기차는 7시에 떠나네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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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그야말로 소설의 연대였다. 민중 문학을 표방하면서 소설이 홍수를 이루었고,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 중에서도 수작이 쏟아져 읽을 거리가 상당히 많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정점으로 소설의 시대가 온 듯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에는 잔치가 끝났다. 그 빈자리를 메우던 작가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중 독특한 문체와 특유의 상징적 분위기를 가진 작가가 바로 신경숙이다.

그의 소설은 우선 적당하게 몽롱하다.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세상 자체가 인간들이 적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몽롱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나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잘난 인물이 없다. 그저 기계적인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한두가지 정도 상처를 안고 사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난 그의 소설이 친근하다. '그' 또는 '그녀'는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다가, '아무'도 아니기도 하다. 인칭, 인격의 몽롱함은 나의 자아를 주눅들게 하지 않는다.

<기차~>에서는 예지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억 상실에 시달리는 주인공 하진이 사진 한 장에 매달려 과거를 추적하는 스토리이다. 스토리랄 것도 없다. 헤어졌던 친구들의 결합, 헤어졌던 주인공의 결합, 자살 미수 조카의 의욕, 전화 속의 그녀의 동의...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기워지는 동시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인간 관계들이 통속적인 드라마의 마지막회처럼 다들 모여든다. 이 부분은 좀 산만하고 너무 뻔한 구성이라 좀 불만스럽긴 하다.

미스테리와 자살, 그리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결말을 보여주기까지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간혹 구로구의 공장들이라든지 그런 것들로 유추하게 만들긴 하지만, 추리소설처럼 깜짝놀랄만한 기억이 아니라, 확인하고 나서도 그저 그런... 인간 본연의 <결핍>에 대해서 확인하게 하는 신경숙의 문체는 이 소설에서 상당히 변화된 듯 하다.

내가 읽었던 이전의 소설 몇 편과 비교하면,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한 결과물인듯하고,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과 추억의 거리감을 안개라도 자욱하게 낀 듯 희미하고 몽롱하게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마음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글은 내 취향과 잘 어울린다. 속물적인 인간들이 등장하고, 애매한 정체성을 상실한 인물은 늘 피곤한 소설을 난 싫어한다. 적당히 몽롱하고 적당히 낙관적이며, 적당히 낭만적인 소설이 난 좋다. 소설은 어차피 픽션이라면, 굳이 또렷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본래 어느 구석이 이렇게 텅 비어있고, 평생을 그 빈곳에 대한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라고 뇌까리는 그의 글에는 늘 <결핍>과 결핍으로 인한 <흉터>가 남아 있어 가끔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그 결핍과 결핍의 상처에서 그의 글이 나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서른 다섯, 몸 속의 습기가 메말라 가는 나이. 만남도 이별도 새롭지 않고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 언젠가 한 번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나이." 어떻게 이런 걸 느끼고 글로 적을 수 있을까. 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낯을 덜 가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저 나이였던 것 같다. 발도르프 이야기에서 처럼, 사람이 태어나서 7년마다 새 몸을 얻는다면, 나는 지금 여섯번 째 몸은 얻어 살고 있는 거다. 그 분기점이었던 서른 다섯을 지나면서 이별에 연연해하지 않고, 만남에 비중을 두지 않는 퍼석한 삶을 살기 시작했던 거다. 내 삶이 퍼석했던 것은 슬슬 몸 속의 습기가 메말라 갔기 때문이었던가... 그래서 김현승 시인은 노래했나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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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깊은 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5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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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깊은 집이라면 아파트에나 사는 요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공간 배치일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어린 시절 열 가구가 너머 사는 집에 살았던 적이 있다. 마당의 가운데는 화단이 있고, 주인집에는 대가족이 오골거리며 살고, 우리는 컴컴한 화장실을 두려워했다. 아직 다섯 살이던 나는 그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지 않았고... 가끔 귀신 소동이나 날 때라야 화장실에 친구들이랑 몰려 갔다가는 와---하면서 도망가곤 했다.

 

전쟁통의 상처를 이렇게 상세히 형상화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세살림하는 네 가구의 모습과 주인댁네의 살림살이는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염상섭의 <두 파산>에서처럼 만큼이나 정신적, 물질적 파산을 선명하게 형상화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삶의 좁은 여유 하나 누릴 수 없고, 이데올로기에 찌들리기만 했던 사람들의 물질적 파산의 형상과, 부유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사람들의 정신적 파산의 형상이 더도덜도 할 것 없이 그 만큼만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그 흔한 눈물바다였던 전후 문학의 한 마디였겠지만, 이 작품에서 단연 빛나는 존재는 ‘한주’의 존재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던 사람들의 시대였던 전후 시대에서도 페시미즘의 절망적인 나락으로 빠지지 않고 늘 웃음을 잃지 않던 한주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두 파산>의 하나였던 어머니의 좌절과, 주인집의 오만방자함도, 한주와의 따스하고 넉넉한 추억에 묻혀 지긋지긋한 전후 문학에서 이 작품을 건져주고 있는 것이다. 한주를 만들어낸 김원일은 역시 뛰어난 전후 소설 작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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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1-3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일님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많은 좌절 속에서도 두레박같은 희망을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넉넉함을 주는 것 같아요...^^

글샘 2005-02-01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일의 작품이 담은 비극성이 짙어서 80년대 작품만 읽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좋네요. 전쟁의 비극성을 성장 소설의 체로 잘 걸렀단 생각을 해요.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이던 죽음의 이미지가 삶의 이미지로 대체된 느낌이 들었거든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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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박완서의 장편 소설을 읽고, 생뚱맞다는 둥 디립다 깐 적이 있다. 그 소설을 정말 맘에 안 들었다. 그러면서, 박완서는 역시 단편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빌려 본 책이 그미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읽고 난 느낌은 역시 그미는 훌륭한 단편 작가였다는 거다.

장편과 단편의 가장 큰 차이는, 장편 소설은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궤적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들면서 인생의 복잡 미묘함을 드러내는 만화 영화와도 같은 소설이고, 단편 소설은 단일 구성으로 인생의 단면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정물화 같은 그것이다.

박완서의 순간을 포착하는 눈은 정말 존경할 만 하다. 농촌이 해체되면서, 도시의 핵가족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 <노인>의 문제를 <노인>으로서 정말 시니컬하게 포착하고 있다.

환갑이 된 나이에도 소녀와 같은 감성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마른 꽃>, 그러나 그미는 결국 스스로 소녀가 아님을 인정한다. 허긴, 늙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일이다. 겉모습은 늙었대도, 속마음은 다섯 살 어리석은 아이 그대로임을...

딸네서 사는 친정 어머니가 아들네 가서 구박 받다가, 치매에 걸린 후 무당 집에서 살게 된다는 <환각의 나비>. 환상과 서사 사이에서 현대의 노인의 위치를 좌표로 보여준다.

중년 여자의 과거 이야기를 멜랑콜리하게 적은, <참을 수 없는 비밀>

병 수발에 지친 자식들의 이야기,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정말 무서운 비유 아닌가.

평생을 어리석은 교사로, 권위적인 교장으로, 멋대가리 없는 남편으로 고생에 고생을 하며 살지만, 남은 것이라곤 삐적 마른 다리에 숱하게 생긴 모기 물린 자리를 쓰다듬으며 느끼게 되는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 <너무도 쓸쓸한 당신>

이 작품집의 수작, <그 여자네 집> 지금은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좋은 작품, 낭만적인 젊은 시절의 꿈과 정신대 문제를 엮은 탁월한 작품. 그 중에도 만득이와 곱단이의 이야기는 박완서가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문화의 차이와 이민 동포들의 머릿속의 조국을 그린, <꽃잎 속의 가시> 

갑자기 생긴 돈으로 수직상승을 꿈꾸는 <공놀이하는 여자>

소설가로 미국에 강연회를 꿈꾸다, J-1비자 발급 문제로 감추어졌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J-1비자>, 그리고 맨 끝의 컴퓨터로부터 소외된 이야기, 꽁트 <나의 웬수 덩어리>

착착 달라붙는 어휘들과, 적절한 묘사와 비유, 그리고 적절한 <여성들의 어투로 이루어진 대화>는 단편 소설의 멋, 인생의 날카로운 단면들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는, 마치 다큐멘터리 작가의 흑백사진과도 같은 감동, 죄책감, 연대의식, 위기감을 공감하게 하는 소설집이라 칭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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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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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하도 유명해서 참고 읽었다. 솔직히 3/4 지점까지 갔을 땐, 차마 마저 읽지 못했다. 그리고, 독후감을 쓰려면, 그 글을 한 번 읽어서는 안 되고, 읽은 느낌을 다시 되돌아 보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솔직히 이 소설을 되돌아볼 거리가 없다. 그저 별것 아닌 작가의 별것 아닌 작품에 '뇌쇄적'이란 형용사를 쓴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의 무뇌적 판단에 혐오감이 들 뿐이다. 아니, 그저 빨리 잊고 싶다.

<유한자 인간의 기품과 슬픔 뇌쇄적으로 그려,>

김영하의 검은 꽃은 뇌쇄적인 작품이다... 감상주의에 빠지지도 않았고... 모험담에 유혹당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일시'와 '낯설게 하기'라는 모순된 기법을 하나로 융합시켜나가는 가운데 정념의 '두 무한'을 인간 정신의 높이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처럼 세워놓았다. ... 최고 수작 운운 , 심사위원들의 평

이들 문화 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최고로 뽑은 작품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닐까?

검은 꽃. 세상에 없는 꽃. 그런데 최고의 상을 주다니... 병신같은 세상... 하며 작가는 그들 심사위원들을 비웃고 있는 '다중이'라면 차라리 사랑스러우련만, 이 작품으로 그를 다시 평가하라니... 유구무언이다.

그간 우리 역사소설이, 특히 민중소설이 역사를 유목적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도덕적으로 그리고 있었던 경향이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유구하게도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벽초 홍명희의 아름다운 언어 속에서 펄떡거리던 임꺽정의 핏줄기가, 황석영의 장길산의 육중한 분노가, 박경리의 토지에 얽힌 조선 사람들의 삶의 지평이... 개인을 민족의 범주 안에서 재단질 해 온 경향이 짙었던 것은 사실이고, 역사 속에서 우리 개인들은 그러했다. 우리 역사에 개인주의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정치화 시키고자 역사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런 어거지를 부리는 건, 정말 싫다.

작가는 후기에서 나는 1905년 생이다. 라고 착각하며 자랑스레 쓰고 있다. 그리고, 제아무리 대단한 상상력도 누군가의 피로 씌어진 한 줄의 1차 자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354쪽)

그런데, 작가는 사소한, 그러나 1905년 생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몇 가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1910년 8월 16일, 식물처럼 연명하던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데라우치를 조선 총독에 임명하였다...(242쪽)  1905년 생이라면 그 날짜를 결코 잊지 못한다. 경술국치일이 며칠인지... 저승엘 가서라도... 아 그가 유카탄 반도에서 그 시절을 보냈으면, 모를 수도 있겠나?

그리고 그가 희화하하였던 황실의 인물이 적은 편지를 사람들이 읽어내는 것도 우습고(한자일 것이 뻔한 일인데...), 21세기에도 일어나기 힘든 몸섞기가 벌써 백년 전에 그것도 황실의 법도를 배웠을 법한 사대부집 숙녀에게 저질러 버리는 작가는 조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내시에게서도 아닌, 일본인과 주인공의 동성연애는 지나치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소재다. 1차 자료들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거 아닌지...

이 글의 해설을 쓴 남진우는 이 소설을 몇 번은 읽었을 터인데, 밑줄 그어가며 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을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의 해설은 제법 그럴 듯 하다. 김영하의 정치색을 잘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상상력의 자유를 지나치게 요구하는 오만한 작가의 모습을...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 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 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 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 좋은가 나쁜가. 귀중한가 무가치한가? - 로베르트 무질, [통카]

인간 존재를 너무 국가나 민족과 흡착시키려 했던 민족주의 시선을 끈적끈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나타난 지 오래 되었다. 그 이들의 행동 양식을 보면, 저 독재 시대의 순수시와 참여시 논쟁과도 비슷할 정도로 <극우 자유주의>에 집착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화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이 말은, 로베르트 무질이 무너져가는 오스트리아를 보면서, 세계대전의 페시미즘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허무하게 느낀, 결국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닌, <과연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던가>를 비판적으로 적은 것인데, 김영하의 이 소설의 흐름과 유사한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해설자는 이 소설을 <소문자로 씌어진 역사>라고 적었는데, 역사는 원래 소문자로 쓴다. history.

대문자로 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이다. I.

이 소설을 제대로 해설하려면, <소문자로 씌어진 개인의 역사>라고 했어야 옳지 않았겠나...

해설자가 이 소설을 <기존의 통념을 배반하는 역사소설>이라고 하고 있는데, 기실 이 작품은 <역사>를 깨 부수고, 개별자로서의 인간 존재가 더 우선한다는 작가의 <새로운 척 하는 역사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써 기존의 소설 형식을 빌려 왔을 뿐이라 생각한다.

100가지를 조사하고, 1000가지를 알고도 한두가지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이 소설이었다면, 이 작가는 열 가지 정도 조사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걸, 하나도 빼먹지 않고 소설 속에 서술하고 싶은 병을(글을 써본 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자기 새끼 죽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부추기는 세력이 있어 더욱 자신감을 가지는 듯 하다.

날카로운 관찰력(강과 산이 있어 우리 조국을 강산이라 한다는 등)과 신선한 표현 등 아까운 재주가 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나, 십년 뒤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붓을 좀 쉬고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는 필력을 길렀으면 한다. 이제 김영하는 읽지 않으려 한다. 그런 걸 절독(切讀) 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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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6 0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05-01-17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반갑습니다. 처음 뵙네요. 젊은 분들은 김영하를 좋다고들 하시던데... 읽어 보고 어떤지 의견을 말해주시길...

블루 2005-01-1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쓰신 리뷰를 보니 저는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 한거같습니다.전 재밌었고 그냥 그렇게 사라져간 사람들이 슬펐을뿐 많이 뭐가 틀렸는지도 몰랐거든요.좀 잘난척하고 차가워보이는 김영하가 그냥 좋아보였을뿐...

글샘 2005-01-2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어떻게 읽는 게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난 저 사람 글이 너무 싫어지는 계기가 된 책이구나. 원래 왕자병끼리는 남 잘난 척하는 거 보기 싫어하거든...^^

2007-11-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연애가 아니라 동성애지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글을 쓰는 지혜가 아닐까요. 동성애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이들 덕분에 숨어 살았지요.

Kaiela 2015-06-0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꼰대가 따로 없군요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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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나는 박완서의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그의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조곤조곤 수다떠는 가벼움과 주절주절 신세한탄하는 쉽게 읽히는 그것이고 쫄깃쫄깃한 질감마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교과서에 실린 <그 여자네 집> 같은 작품이나, 그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같은 수필류는 그의 문체를 좋아하게 해 주었다.


그의 단편은 좋아하는 반면, 그의 장편소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거의 자전 소설에 가까운 글들로 시작해서, ‘논픽션의 한계를 픽션에서 극복한,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얻은’ 사실을 토로하기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태극기 휘날리며> 투의 전쟁 이야기를 어려서 신물나게 먹었기 때문에 지금도 식상한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재가 특이하게도 의사, 돈, 가족 이런 거다. 이 소설을 읽은 나의 느낌은 한마디로 <생뚱맞음>, 그 자체였다.

요즘 한 개그 프로에서 유행어로 쓰이는 ‘생뚱맞다’의 뜻은 사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생뚱맞다 ꃰ하는 행동이나 말이 상황에 맞지 아니하고 매우 엉뚱하다.

        ¶ 맞선 보는 자리에서 일부러 생뚱맞은 얘기를 해서 신부 될 여자를 골탕 먹이는 일 말예요.≪최일남, 숙부는 늑대≫                        [한컴사전 참고]


우리 사회에서 의사란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부’, ‘중산층’, ‘권력’ 뭐, 이런 것 옆에 늘 있다. 영화 <우리 형>에서 일수놀이하는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의사 아들처럼.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에 나오는 그런 절친한 의사를 둔 사람은 드물 것이고... 그렇지만, 이 소설의 의사의 시점에서 소설을 서술하는 것은 그에게는 역부족인 듯 하다. 의술이나 인술, 고단함, 이런 것 보다는 늑대의 시간을 즐기는 일탈자, 아, 가끔은 아내와 현금을 두려워하는 개가 되기도 하는 초라한 존재다.


그리고, 왜 이 소설에서 재벌 같잖은 것들이 등장해서 재벌처럼 행세하는지... 그 의사놈의 형은 왜 10억을 쾌척하는지, 왜 저토록 박제화되어 생동감없는 소재들이 작가의 뇌리에 준거 집단으로 박혀 있는지... 그닥 설득력없는 느낌이다.

 

그리고, 가족 문제를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건 박완서의 주특기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정의 유대감이 느슨해지는 현상을 반영한 듯도 하면서, 오히려 재벌 집안과 의사, 졸부 형님의 등장으로 가정 해체 현상과 일탈을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의사와 돈과 가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에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으면 즐거운' 그런 것이 아주 가벼운 농담으로 들릴 지는 몰라도, 의사는 너무 멀고, 돈은 나랑 인연이 없고, 가족은 그저 데면데면한 보통 독자들에게는 너무도 생뚱맞은 농담이 아닐까... 얼마 전에 시사 프로에 비윤리적인 의사와 비윤리적인 기자들이 등장했는데, 의사들의 변명을 사람들이 아주 싫어했던 사건을 봐도, 이게 농담으로 듣긴 어려운... 그런 느낌.


그러나, 그는 역시 단편 작가여서, <치킨 박>의 대목에서는 잠시 심금을 울리는 필력을 보이기도 하고, 이 작품의 전편을 휘감고도 남음이 있는 현금이,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린 현금(現金)과 낭만주의의 추억이 되어버린 현금(弦琴)의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불타오를 듯한 능소화 이야기로 환상적 낙인을 찍어 버린다. 어린 시절 낙인과도 같은 시린 추억을 강렬한 주홍빛 시각적 이미지로 그린 데는 성공해서, 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한참을 그 꽃을 슬라이드 쇼로 감상하고 말았다.


그는 역시 잘 쓰는 작가다. 그러나, 결국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은, 이 작품을 왜 <조선일보>에 싣지 않고, <실천문학>에 실었는지... 이해가지 않는 거리만큼의 생뚱맞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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