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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검은 꽃, 하도 유명해서 참고 읽었다. 솔직히 3/4 지점까지 갔을 땐, 차마 마저 읽지 못했다. 그리고, 독후감을 쓰려면, 그 글을 한 번 읽어서는 안 되고, 읽은 느낌을 다시 되돌아 보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솔직히 이 소설을 되돌아볼 거리가 없다. 그저 별것 아닌 작가의 별것 아닌 작품에 '뇌쇄적'이란 형용사를 쓴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의 무뇌적 판단에 혐오감이 들 뿐이다. 아니, 그저 빨리 잊고 싶다.
<유한자 인간의 기품과 슬픔 뇌쇄적으로 그려,>
김영하의 검은 꽃은 뇌쇄적인 작품이다... 감상주의에 빠지지도 않았고... 모험담에 유혹당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일시'와 '낯설게 하기'라는 모순된 기법을 하나로 융합시켜나가는 가운데 정념의 '두 무한'을 인간 정신의 높이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처럼 세워놓았다. ... 최고 수작 운운 , 심사위원들의 평
이들 문화 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최고로 뽑은 작품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닐까?
검은 꽃. 세상에 없는 꽃. 그런데 최고의 상을 주다니... 병신같은 세상... 하며 작가는 그들 심사위원들을 비웃고 있는 '다중이'라면 차라리 사랑스러우련만, 이 작품으로 그를 다시 평가하라니... 유구무언이다.
그간 우리 역사소설이, 특히 민중소설이 역사를 유목적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도덕적으로 그리고 있었던 경향이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유구하게도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벽초 홍명희의 아름다운 언어 속에서 펄떡거리던 임꺽정의 핏줄기가, 황석영의 장길산의 육중한 분노가, 박경리의 토지에 얽힌 조선 사람들의 삶의 지평이... 개인을 민족의 범주 안에서 재단질 해 온 경향이 짙었던 것은 사실이고, 역사 속에서 우리 개인들은 그러했다. 우리 역사에 개인주의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정치화 시키고자 역사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런 어거지를 부리는 건, 정말 싫다.
작가는 후기에서 나는 1905년 생이다. 라고 착각하며 자랑스레 쓰고 있다. 그리고, 제아무리 대단한 상상력도 누군가의 피로 씌어진 한 줄의 1차 자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354쪽)
그런데, 작가는 사소한, 그러나 1905년 생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몇 가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1910년 8월 16일, 식물처럼 연명하던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데라우치를 조선 총독에 임명하였다...(242쪽) 1905년 생이라면 그 날짜를 결코 잊지 못한다. 경술국치일이 며칠인지... 저승엘 가서라도... 아 그가 유카탄 반도에서 그 시절을 보냈으면, 모를 수도 있겠나?
그리고 그가 희화하하였던 황실의 인물이 적은 편지를 사람들이 읽어내는 것도 우습고(한자일 것이 뻔한 일인데...), 21세기에도 일어나기 힘든 몸섞기가 벌써 백년 전에 그것도 황실의 법도를 배웠을 법한 사대부집 숙녀에게 저질러 버리는 작가는 조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내시에게서도 아닌, 일본인과 주인공의 동성연애는 지나치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소재다. 1차 자료들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거 아닌지...
이 글의 해설을 쓴 남진우는 이 소설을 몇 번은 읽었을 터인데, 밑줄 그어가며 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을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의 해설은 제법 그럴 듯 하다. 김영하의 정치색을 잘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상상력의 자유를 지나치게 요구하는 오만한 작가의 모습을...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 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 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 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 좋은가 나쁜가. 귀중한가 무가치한가? - 로베르트 무질, [통카]
인간 존재를 너무 국가나 민족과 흡착시키려 했던 민족주의 시선을 끈적끈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나타난 지 오래 되었다. 그 이들의 행동 양식을 보면, 저 독재 시대의 순수시와 참여시 논쟁과도 비슷할 정도로 <극우 자유주의>에 집착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화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이 말은, 로베르트 무질이 무너져가는 오스트리아를 보면서, 세계대전의 페시미즘 속에서 인간의 존재를 허무하게 느낀, 결국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닌, <과연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던가>를 비판적으로 적은 것인데, 김영하의 이 소설의 흐름과 유사한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해설자는 이 소설을 <소문자로 씌어진 역사>라고 적었는데, 역사는 원래 소문자로 쓴다. history.
대문자로 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이다. I.
이 소설을 제대로 해설하려면, <소문자로 씌어진 개인의 역사>라고 했어야 옳지 않았겠나...
해설자가 이 소설을 <기존의 통념을 배반하는 역사소설>이라고 하고 있는데, 기실 이 작품은 <역사>를 깨 부수고, 개별자로서의 인간 존재가 더 우선한다는 작가의 <새로운 척 하는 역사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써 기존의 소설 형식을 빌려 왔을 뿐이라 생각한다.
100가지를 조사하고, 1000가지를 알고도 한두가지 형상화하기 어려운 것이 소설이었다면, 이 작가는 열 가지 정도 조사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걸, 하나도 빼먹지 않고 소설 속에 서술하고 싶은 병을(글을 써본 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자기 새끼 죽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부추기는 세력이 있어 더욱 자신감을 가지는 듯 하다.
날카로운 관찰력(강과 산이 있어 우리 조국을 강산이라 한다는 등)과 신선한 표현 등 아까운 재주가 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나, 십년 뒤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붓을 좀 쉬고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는 필력을 길렀으면 한다. 이제 김영하는 읽지 않으려 한다. 그런 걸 절독(切讀) 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