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솟네...

5월의 노래를 윤정모가 다시 살려 썼다.
윤정모의 소설은 참 오랜만이다.
늘 운동의 한켠을 지켜보고 소설로 쓰는 작가였는데,
이 소설은 예전의 그의 소설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청소년 소설로 쓴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386세대가 스스로를 개혁의 세대라고 우월하게 생각하지만,
그래서 후일담으로 지껄여대고 술안주로 씹어대지만,
그들의 머릿속에서 80년대는 지워져 가고 있는 현실이 작가는 아팠을 것이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갔지
망월동의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최루탄 가스와 날이 밝고 밤이 오던 80년대의 5월은 망월동 묘역의 멋대가리없는 기념물로 잊혀져도 좋은 것인가?
아직도 광주는 천박하게 핍박받고 있는데,
그 후예들은 국가유공자라는 당근이나 받아먹고 그 시절을 잊어야 하겠는가?

대화를 하지 못한 사람들.
토론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무식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광주를 <빨갱이>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폭도들을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이다.
그들의 세계관, 의식 속에서 <폭도>에 불과한 <광주>는 십자가가 되어 가슴에 박혀 있을 것이다.

윤정모는 애써 잊으려 하는 광주를,
기념 조형물과 잔디로 덮어버리고 미화해 버리려는 민주화 항쟁을,
폭력은 안 된다는 저항의 정신을,
그 건강한 마음을 자라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것이 후일담 문학을 뛰어넘은 성장 소설의 가치라고 여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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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이의 행복
방정환 지음, 민윤식 엮음 / 오늘의책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소파 방정환, 잔물결이란 뜻의 小波는 일본의 어린이운동 선구자였다는 이야길 들은 것 같다.
방정환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린이날 제정, 색동회와 잡지 <어린이> 발간을 통한 어린이의 인권을 널리 알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어린이에 대한 수필이 실려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의 사상은 동학과 천도교에 잇닿아 있다.
세계 종교, 사상의 역사상 가장 혁신적으로 여성과 어린이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천도교와 동학,
여느 종교가 남성 중심의 구조였던 반면, 천도교는 조선에서 핍박받던 계급이었던 상민, 여성, 어린이에 대한 시각이 가히 혁명적이다.

어린이 인권 운동가로 알고 있던 잔물결 선생의 수필을 읽다 보니, 그같은 실학자도 드물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추장스런 옷고름대신 단추 달기,
자주 빨기 귀찮은 흰옷대신 염색옷 입기.
영양을 갖춘 음식 계도, 부엌 개량까지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민족의 장래 위해 다가족제도의 폐해, 특히 인권을 침해하고 서로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고 역설한 글은, 현대에서도 <효>라는 이름아래 가려져 있는 가정의 억압적 구조, 며느리의 비인간적 갈등을 선각자적 시각으로 파헤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부모들처럼 아들딸 길러서 덕도 보고 재미도 보겠다고 욕심부리는 사람도 없으면서 그 덕을 보려는 그 당자를 조선 사람같이 함부로 길러먹는 사람도 없다." 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를 꾸짖는 듯 하다.

어린이들이 건방져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쁘게 해 줘야 어린이들이 튼튼해지고, 현명하게 되고,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백년 전에 한 그는 조선의 암울한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신혼살림의 공동 식당을 상상한 그는 식사 준비 등의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 해방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여성의 정성을 가정의 기본으로 가르쳤던 삐뚤어진 가사 교과서, 현모양처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했던 봉건적 사고의 틀을 깬 그는 얼마만한 선각자였던지...

인형의 집을 나서려는 노라에게,
"너는 무엇보다고 아내요, 어미가 아니냐?"고 하는 남편에게,
"아니오. 나는 이제 그런 말을 믿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사람입니다. 당신과 똑같은."

나도 인형의 집을 읽었지만, 조선의 억압된 여성 문제를 깊이있게 고민하지 못하고 읽었던 듯하다.
이런 구절이 가슴에 박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실용적 사고의 선각자였던 소파 선생이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남성을 적으로 여기고 강퍅하게만 구는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잔물결 선생처럼 인내천을 가슴에 품은 이들의 지속적인 <유연한 사고의 확산>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지나치게 촘촘한 관심이 재미를 덜하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왜 식민지 시대에 <어린이> 운동을 했을까?
그냥 좀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독립운동하기도 바쁜 터에 배부른 소리를 하는가... 하고 얕잡아보던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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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3-17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동학에 대해서도 더 공부를 해 보고 싶어집니다.^^
 
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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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10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도모유키.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허구)를 작가가 꾸며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에 비해서 소설은 작가의 세계관을 잘 드러내기도 하고,
시에 비해서 작가의 세계관을 고지식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 소설은 발칙한 상상력에서 시작한다.

임진왜란을 그린 모든 소설들은 조선의 군인의 시선을 주로하여 그려졌다.
이 책에서는 일본인 도모유키의 시점에서 조선과의 전쟁을 그리고 있다.
도모유키란 이름에서부터 그는 높은 지위의 장수는 아닌 듯하다.
達(도모)은 여러 사람들이고, 行(유키)는 떠돌이의 뜻 정도가 아닐까?
무사라도 하급 떠돌이 무사 정도의 이름이기 쉬울 듯 하다.(별로 근거 없는 내 생각임.)

작가는 후기에서 <형용사와 부사는 죽이거나 죽거나 할 뿐인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썼다.
그는 이 소설을 쓰면서 이라크와 다국적군과 파병을 골백번도 더 생각했을 거란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전장과 수식어론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군대에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도 생겼다.
군대는 준 전시 상태를 유지하려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는 데 큰 두려움이 있다. 내 아들이라도 군대에 선뜻 보내고 싶은 부모가 누가 있겠는가.

소설에서 큰 줄거리랄 것도 없지만, 도모유키의 사랑과 전쟁의 진행이 병렬로 나아간다.

임진왜란에서 칼에 베이고, 잘려 나가고, 찔리는 조선인들은 현대의 <이라크인>이었다.
그들을 베고 죽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일본군은 현대의 <미군>이며,
전쟁터에 간혹 등장하는 명나라 군인들은 고전적인 <다국적군>이었다.
일본인들이 눈을 까뒤집고 찾아 다니는 도공들이 이라크의 <유전>에 빗대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 뿐인가?
코나 귀를 자르고, 시신의 목을 베어 공을 치하하며, 뼈를 깎아 화살을 만드는 행위는 이라크에서의 포로 구타, 학대 행위가 오히려 귀여운 일로 보이게까지 만든다.

이 소설에 숱하게 등장하는 <잘린, 베인, 찌른다.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전쟁 용어들은 차라리 낭만적이지 않은가?
십여 년 전, 그 애비 부시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준 폭격과, 십여 년 뒤, 그 아들 부시가 퍼부은 폭격을 통해서 <파편이 된 살점들, 뼛조각들...>은 영상을 통해 보여지지도 못할 정도로 폐허로만 남지 않았는가.

도모유키는 왜 그토록 명외란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전쟁터에 나아간 군인이란 신분의 사내들에게 과연 고향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를 전쟁터로 내몬 본국의 냉혹한 사회 현실이 군인들에게 조국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보다, 이국 여인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낭만적인 도모유키는 그렇다 치고, 아무 사회적 지위가 없는 말단 병사들에게 던져진 여자란 동물들은 성적 만족의 대상, 그 이상의 아무 가치도 없는 <시간과 장소>를 인식할 수 있는 곳이 <전장>아닐까?
2차 대전때 일본인들이 필요로했던 정신대처럼...
그가 말조차 통하지 않는 조선 여인 명외에게 뇌까렸던 '아이시테마스(사랑합니다.)'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신의 분열된 형태의 조짐이 아니었는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머리가 처연했다...'에서처럼 한국어를 상황에 맞도록 멋지게 구사하는 작가의 소설은 멋진 상상력의 소산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별을 네 개 붙인 것은,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던 것 때문이다. 이것도 지은이의 의도였는지 모른다. 전쟁 소설이 재미있을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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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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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에서 그나마 멜로 드라마로 달리던 오래된 정원은, 하권으로 들어가며서는 완전히 형상화에 실패하고 있다.

의욕이 넘치고 감성이 딸리면 이런 소설이 나온다.

광주에 대한 기억,
노학연대와 6월 항쟁,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
독일에서 통독의 기억,
감옥에서의 경험은 황석영에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워주었으리라...

그렇지만, 솔직히 이 작품은 소설의 범주에 넣기엔 지나치게 '문건'의 성격이 강하다.

조정래가 한강에서 형상화에 어설프게 도전했던 것을 비판했던 것은 좀 성급했던 감이 있다.

황석영에 와선 형상화에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뿐... 기대로 집어든 소설에서 실망을 느끼면서, 지나간 날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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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1-1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권과 하권의 리뷰가 다르네요.ㅋㅋ 상권은 별다섯 하권은 별셋...합이 별 여덟입니다.황석영의 후일담은 그래도 봐줬습니다.본인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테니까..
후일담 소설이 지겨워 한국 소설을 멀리햇는데..요즘은 조금 변화가 있습니다.근데 술자리에서는 여전히 후일담이더군요.국민의 정부 주체들이라서 다 그런가.....
<왕의 남자>만든 그 감독 뭐라더라...386 그들은 이제 기득권이잖아요....그러던데.
전 100% 동의해요.한때의 진보성이 영원한 진보성인지 알고 자기성찰 하지 못하며 후일담이나 하는 자들은 가장 무섭답니다.자기가 기득권인지 모르며 진보..혁식..개혁의 일원인지 알고 있으니까요.그들의 역사적 위치와 공과는 인정하지만 이미 혁파의 대상입니다.뭐 때려잡자는게 아니라...성찰로써....ㅎㅎ

글샘 2006-01-1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변증법적 발전 아닐까요?
386 세대는(저도 386입니다만) 변증법을 배웠으면서도,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듯 합니다.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 이런 것들에 대한 반反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 힘을 실어 줬으면, 뭔가 통합된 나라의 합合으로서의 정치를 해 달라는 말인줄 알아야 하는데, 제 잘난 줄 알거든요.
어느 부분에서나 그런 성향은 나타나는 것 같애요.
인터넷 시대에 가장 타격을 많이 입은 장르가 그래서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자기들만 형상화할 수 있는 '활자의 마법'에 스스로 갇혀버린 셈인가...
 
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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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황석영의 객지가 갖는 무게는 밑바닥 인생들을 통한 인생의 씁쓸한 맛,
그러나 백화가 이점례가 되는 순간의 정념같은 들척지그리한 그 맛을 느끼게 한 그것이라면,

그의 장길산은 민중의 역동성과 역사의 비정함의 피비린내를 느끼게 하는 그것이었다.

이적지의 소설들이 느끼게 한 맛이 비교적 명쾌한 그것이라면,

이 소설은 황석영이 읊었던 불후의 명작, 한국에서 서사시로서의 마지막 노래인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에서 가졌던 5월의 낙인을 곱씹는 80년대 전체를 통찰하려는 <반추>의 소설이라고 하겠다.

소의 되새김을 인간은 느낄 수 없다.
사람은 위가 하나밖에 없어서, 일단 위에 들어간 모든 것은 pH2의 산도에서 시큼하게 소화되기 시작하고,
그 시큼한 맛을 기억하는 인간으로서는,
소의 되새김을 불쾌한 감각으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인데...

아직도 단죄하지 못하고,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70, 80년대의 핏빛 5월은 황석영에게 오래된 전설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나 보다.

역사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운동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잘 어울려 비빔밥이 되었는데,

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유난히 한윤희란 재료가 혀에 자꾸 밟힌다.
비빔밥에 골고루 섞이지 못하고 자꾸 입안에서 겉도는 건 왜일까...
한윤희를 생각하면, 그의 가족사와 연관지은 낭만적 순정은 '빨치산의 딸'보다 왜 진실성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지식인의 노동 현장 투입이랄지,
광주를 껴안고 살아가는 <영원한 현재형>의 사람들 같은 기록은 광주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서의 기록자인 저자의 소설이 필연적으로 갖출 수 있는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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