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이란 무엇인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1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박미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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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자퇴생이 동네 초등학생을 유괴, 살해, 사체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여중생들이 아는 후배를 피가 철철 흐르게 폭력을 가한 사건으로 학교폭력이 화두에 올랐다.

과연 '악'이란 어떤 것일지,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 알게 될지를 궁금해하며 뒤적인 책.

 

그런데, 저런 나쁜 것들은 누가 보나 범죄니까, 이 책에서 다루는 '악'은 아니다.

칸트 형님은 역시 뭔말인지 모를 말들을

번드르르 멋지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 그리고 번역을 거치고 나면,

뭐 일본어 번역에 다시 한국어 번역이 되고 나면... 내가 이해할 수는 없는 게 당연지사인 듯.

 

선의 개념 및 악의 개념은 도덕법칙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칙의 나중에 있고

도덕법칙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139, 실천이성비판)

 

칸트 이전의 시대는 '신의 중세'였다.

인간의 이성이 '정언명령'으로 내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보다,

신의 의지에 따르겠나이다~ 의 시대였다.

칸트 형님은 그걸 부정한 듯 싶다.

하니님이 인간보다 앞서는 게 '선'이 아니라,

인간이 법칙을 정한 뒤에 규정되는 거라고...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

네가 동시에 원할 수 있을 것 같은 준칙만을 따라서 행동하라.(137, 윤리형이상학 정초)

 

그러니 하느님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준칙이 법칙이 되는 세상을 선언한 것.

 

역시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들먹인다.

'마음'의 선생님을 도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도덕적 인간이란 늘 선한 행위를 하는 인간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타인을 불행하게 하는 구조의 한가운데서

신념을 쉽게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때문에 타인을 불행의 나락으로 떠밀 수도 없어서

계속 고민하고 쉼없이 흔들리는 사람을 말한다.(108)

 

그렇게 본다면 칸트의 '선'과 '악'은

재판관이 손쉽게 유죄, 무죄를 판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끝없이 흔들리는 나침반의 자침과 같이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도덕적 인간으로 칭하는 것을 보면,

절대선을 살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신의 시대를 건너오는 철학적 정초가 된 사람이니 말이다.

 

실현된 행위가 간신히 외형적으로 도덕적 선과 닮았다 하더라도(합법적 행위)

그 표피를 벗겨 보면 자기 사랑에 뒤범벅된 오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칸트가 본 인간의 모습.(71)

 

우리가 합법적으로 하는 일 속에서도

스스로 반성하고 돌아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는 삶은 '악'인 셈이다.

 

그러면 인간 심정의 악성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 인간이 자기 사랑에서 비롯한 동기를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한 동기보다 우선하는 준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성벽을 가지는 것 안에 있다는 것.(169)

 

요즘 온갖 악행의 근원이었던 자유당이 하는 말을 보면,

'자기 사랑'만 남은 존재 같이 보인다.

그 그림자가 안철수에게서도 보인다.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성벽'을 가지고 있어, '악'이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근본악이란

지극히 비열하고 피를 얼어붙게 만들며,

인간의 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한적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다든가,

인색하게 보이기 싫어 기부한다든가,

타인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 진실을 전하지 않는 등의 섬세한 행위 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타의) 행복을 추구하려 하는 한,

필연적으로 빠지는 함정이며 온갖 행위의 뿌리(177)

 

전두환도 이명박도

심지어 박근혜도 '정치행위'라고 호도한다.

온갖 비열한 악행을 저지르고도, '통치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고 지껄인다.

추악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니 그들은 근본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조폭이 팔뚝에 쓰인 '차카게 살자'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이자 생활인인 우리에게

칸트의 '악'은 돌아볼 지점을 준다.

물론 현대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감이 있다 하더라도...

 

칸트가 제안하는 바는

왜?라고 거듭 묻는 것이다.

욥처럼 목이 쉴 때까지 묻고 또 묻는 것이다.(183)

 

세상은 한시에 맑아지지 않는다.

모든 악한 세력은 '앙시앙 레짐'이 되어 권토중래를 모의하고 있다.

계속 묻는 일만이, 세계 시민상에 빛나는 촛불 혁명을 명예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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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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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should에서 i will, I am의 시대로...

 

60-70년대의 향수를 그린 '국제시장'의 대사가 있다.

이만하면 열심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야말로,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낙타'의 시대였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눈을 거의 감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만 허용되던...

 

한국은 아직도 저항과 투쟁의 정신이 부족하다.

사대강을 해먹고, 자원과 방산비리를 해먹은 넘의 꼬붕이

선거 부정의 아주 자투리 죄를 물어 4년형을 받았는데,

일사부재리 운운 하고 자빠진 게 현실이다. 하품난다.

아직도 더 싸워야 하는 <사자>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지난 겨울의 촛불은 사자의 정신을 대변하는 세계사적 행동이었다.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광주 유가족에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따뜻한 품을 내어 안아주는 행동을

누구는 '쇼;라고 하지만, 인권을 인정하는 첫걸음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는 아무에게나 선뜻 안기지 않던가.

전임 503호는 악수조차 하지 못한 천박한 마녀였음에 더 '어린아이'의

<실존> 자체가 소중한 시대로 가고 있다.

 

YOLO

 

허무주의와 퇴폐는 다르다.

일견 그것을 비슷하다고 연결시키는 자들이야말로,

뭔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것이 있는 자들이다.

욜로는 퇴폐보다는 허무주의에 가깝다.

그것도 적극적 허무주의.

 

신이 죽은 시대.

국가를 위해 달리던 낙타의 시대는 지나갔다.

아직도 핵무기가 날아 다니니 단결하고 조용히 하라는 자들은 신을 부활시키려 하는 바보들이다.

 

사람은 한 번 산다.

그래서 허무하지만,

또한 그래서 잼나게 살아야 한다.

 

당위에 짓눌려 살면 그저 낙타다.

하지만 낙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시대가 있었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자의 시대도 있었다.

이제 어린아이같이 해맑고 나누는 시대를 향해가기 위해

어둠을 몰아낼 투쟁이 노정되어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실존>이 존재의 이유 그 자체다.

무엇을 위해서 낙타처럼 견디거나, 사자처럼 싸울 필요도 없으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해왔다.

필요한 것은 세계 변혁(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사자의 아버지다.

그 다음 시대를 준비한 사람이 니체의 한 부분이다.

 

현대인은 동경할 줄도 모르고 꿈도 없기에

정반대 사람이 초인.

이상적 유형만이 초인은 아니다.(95)

 

초인은 '위버멘쉬'는,

절대자가 아니다.

계속 움직이는 자이고,

아모르 파티를 깨닫고,

아모르 문디를 지향하는 움직이는 '운동가'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가 이루어놓은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태도를

체와한 인간 유형의 실존 양식이 위버멘쉬(102)

 

 

달리는 자동차에서 물이 흔들리거나 쏟아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개발되었다.

짐벌이라는 수평유지장치를 활용한 것이라는데,

인간도 이런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

전방위적 관심과 사고, 변화 가능성이 '짐벌 Gimbal' 정신이라 불러도 좋지 않으려나.

 

 

殺身成仁을 넘어 殺神成人의 시대로...

 

원래 살신성인은 '도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낙타를 강요하던 시대의 철학이기도 했으나,

근대 이후에는 낙타처럼 사는 이들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이

'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덕목이 살신성인이기도 하다.

 

이제 세계가 식민지가 되는 글로벌 시대에

신은 죽었으니 '인간 실존'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희망사항이 후자에 담겨있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처럼,

신의 세계는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이드는 일도 멋진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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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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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왜 철학이 없는가?

철학할 만큼 한가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돈을 벌어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인 세상을 만들었고,

이제 돈을 못벌면, 물려줄 수 없으면, 자식을 만들지 못하는 헬조선으로 전락했다.

그런 세상에 대고, 왜 철학을 못하냐?고 묻지 말라.

 

그 추운 20주동안, 철학이 없다면 길거리에서 촛불을 들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 혁명보다 더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자유와 정의'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면 길바닥에서 수백만이 모여 촛불하나에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철학은 가진자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배워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자들끼리 둘러앉아,

왜 이나라에는 철학이 없었느냐고,

왜 동양에는 자존이 없었느냐고 반성하는 일은 하품난다.

 

이 책에서 의미있는 시작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읽게된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작가가 한국 사회에 대하여 애정과 관심을 덜 가진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고종이 왜군을 불러 동학농민군 3만을 우금치에서 학살한 것은 혁명에 대한 왕조의 행태였다.

청나라까지 박살내고 당연히 왜놈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민비는(혹자는 명성왕후를 애국자연 추켜올리지만, 학살자들에게 애국은 어불성설이다.)

철저한 왕조사관에 빠진 자로서,

왜놈들을 러시아에 기대 뻗대보려 하다 죽음을 맞는다.

결국 러시아까지 박살난 후,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한다.

일본군의 침략도 없이, 나라를 진상한 셈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의 간섭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짓을 12년간이나 해먹는다.

저항을 제주도에서 또다시 학살이라는 방식을 써서 짓밟는다.

이승만이 쫒겨나고도 박정희는 18년의 압제를 자행한다.

경제적 발전은 박정희의 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을 관리하는 미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에 힘입은 것이었다.(관세도 없이 수입해 준 시절도 있었다.)

박정희가 죽고 다시 군사 독재는 이어지고, 광주에서 학살은 벌어진다.

 

비겁하게 살아남는 일만이 삶의 목표가 된 사람들에게,

철학의 유무를 묻는 일처럼 치사한 일이 있을까?

가진 것 없는 아이들에게 전투적으로 공부하라는 나라에서, 철학 없는 국민을 꾸짖는 일이 가능할까?

 

아직도 노동조합을 불온시하고 전교조를 응징하겠다는 자가 '보수'를 참칭하고 대선에 나서는 세상에,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철학적으로 공을 차보려는 자는, 역시 가진자의 편이 아닌가 하고 열받으며 읽었다.

 

장자를 감명깊게 읽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장자에 감명을 받고 기껏 한다는 생각이,

장자처럼 살아보는 일인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장자는 절대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네.(93)

 

이러면서 서양의 것을 몰아내야 한다는 논지를 세운다.

서양의 철학이 주가 된 것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철학은 어디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

중국은 공산주의를 철학의 기조로 삼고 있으나, 문화 대혁명으로 상징되는 억압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웨이보 같이 국내망으로 부분적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이고,

일본의 철학은 점점 보수화되는 군국주의 부활을 지켜보는 실정이다.

가장 다이내믹한 철학이 한국의 광장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 후진국을 벗어날 수 없는 제한적 현실을 인정한다면,

1980년대 광주와 2014년 세월호를 목도한 세대는,

누구처럼 싸우지 않고 끈질기게 촛불을 들었다.

 

강의를 이끌기 위해 한자를 하나씩 앞에 놓았는데, 책에서는 그것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작가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경제적 기준으로 나누려고 한다.

그것 역시 서양 중심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선진국은 철학이 있어서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부자 나라가 되었을 뿐이다.

땅따먹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세계대전을 일으켜 천만 명 이상을 희생시키고,

그러고도 공황에 접어들자 전쟁을 통해 GDP를 높이는 방법을 쓰는 짐승같은 것들이다.

 

일본과 독일만 개새끼가 아니다.

일본과 독일은 나눠먹을 땅이 없어 대들다가 얻어터진 쫄짜들일 뿐이고,

세계대전 백년 전부터, 선진국이란 것들은 식민지에서 온갖 추잡한 일을 다 한 선배 개새끼들이다.

 

논어에서 '나는 나를 장례지냈다 - 吾喪我'를 인용하면서,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운 세상을 촉구하는 외침을 보여준다.

항상 가진자들이 못가진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한국 땅에서 과연 스스로 돌아볼 만큼 여유있는 시절이 있기나 했던가?

 

그럴듯한 말로 독자를 개돼지 취급하지 말았음 좋겠다.

물론, 그가 독자를 무시하는 발언을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고깝게 들리는 나의 억하심정일지, 자격지심에서 나오는 못마땅함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이야기가 나쁜 말은 없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다.

 

능동적 주체를 장자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을 지배하던 규정적 관념, 즉 성심으로부터 벗어난 소요의 정지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화하여 자유라고 표현해도 되겠습니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자율, 자정 등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됩니다.(250)

 

노자 운운하는 사람의 말 치고는 참 가볍다.

이것은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시절하고 비슷한 논조가 아닌가?

후진국 국민이여, 깨어나라! 이런 것 아닌가?

 

내 보기에 장자의 시대는 잔인한 폭정의 시대였고,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장자의 '소요'는 출세하려 애쓰다 죽지 말고 평화롭게 사는 걸 추구하는 것이지,

결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남을 짓밟은 폭력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유'의 '自'는 그처럼 유목적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자기로부터 말미암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고,

스스로 규율을 세우고,

스스로 깨끗하게 만들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의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애써 선진국이 되려면 또 짓밟고 억누르고 GDP를 높이기만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자'는 <저절로>라는 의미에 가깝다.

인위적으로 애써 하는 일은 지배하는 자나 평범한 자나 일을 망치기 쉽다.

노자는 저절로 다스려지게 하라는 통치철학이고,

장자는 저절로 태어난 인생, 저절로 되어지는대로(自然) 살라는 삶의 철학이 아닌가 싶다.

 

나도 강의를 들었더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철학자들, 기업가들 불러놓고 지껄이는 강의라면,

광화문에서 낄낄대던 동학 농민들의 웃음과,

광화문 위를 날아 오르던 고래 등 위의 304명의 별빛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아마도 모르는 일이기 쉬울듯도 싶다.

 

송시열의 이런 시조가 생각난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절로 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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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꽃들의 축제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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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트인다, 소통한다는 의미의 한자로,

한문 경전을 글자를 짚어가면서 문리가 트이도록 설명하는 글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어서,

이런저런 사람들의 해석을 도모하기도 한다.

 

금강경을 사경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소의경전이라 할 정도로 그 내용이 심오하다 할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니가 부처니 그것을 깨달으면 세상은 극락 찾을 것도 없고,

결국 니가 살아가는 그 일이 제일 소중한 것이여~ 하는 말이렷다.

그렇지만, 일상은 늘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곳이다.

 

불교의 원리는 기독교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하고 주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나의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다~ 이런 깨우침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일 때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체라기보다

감각과 정념, 관심과 인식, 기억과 편견을 토대로 부풀려지고 증폭된 어떤 것.

그래서 자아의 관념이 실체 없는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

이 저간의 소식을 한마디로 '공'이라고...(150)

 

그러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종을 말살시키고 자기만 살겠다고 다투는 데는 그런 관념이 배경이 된다.

 

분별은 이 세계 전체의 고통을 산출하는 무지의 핵심이다.(콘즈, 153)

 

혜능의 설명은 일반인과 수련자에게 다르게 닿기도 한다.

아무튼 금강경은 이 험한 세계의 바다를 건네주는 '뗏목'으로서 가장 큰 것이다.

'반야심경'이 요점정리 암기본이라면, '금강경'은 정석이고 개념원리인 셈.

 

금강경이 반야심경과 달리 체계적이기보다는 설득적, 반복적.

뗏목이기에 목적은 일깨우는 것.

근기와 상황을 고려하여 같은 얘기를 다른 방식, 다른 어법으로 하는 방편.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다.(235)

 

하나님 붙들면 도그마가 된다.

 

어떤 궁금 많은 학생이,

"세상은 끝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시간은 무한하냐, 세상은 누가 만들었냐?"는 질문에 붓다는,

"화살에 맞은 사람이 당장 해야 할 일은,

화살을 뽑고 독을 치료하는 것이다

쏜 사람의 피부색이 검은지, 밥은 먹고 왔는지는 알아서 무엇하려느냐?고 대답.(195)

 

인간은 자신의 감옥에서 갇혀 사는 수인이다.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관자재, 자유롭게 사물을 보게될 때,

전혀 기대치 않던 곳에서 여래와 관음의 얼굴이 떠오를 것.(213)

 

뗏목을 포스트 모던의 어구를 빌려 '썼다 지워야' 하는 물건(245)이라 했다.

 

글자에 얽매이면 살 수 없다.

그래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매 순간 공부해야 한다.

 

진리의 수행은 다음 윤회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한 보험이나 적금이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지금 여기 마주친 생사, 그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한 뗏목이다.

한사코 부여잡되, 저 언덕 기슭에 닿았다 싶거든, 버려라.

그래야 계속 길을 갈 수 있다.(혜능, 270)

 

금강경을 겨우 한 번 사경했다.

반야심경은 사경이 쉽고, 읽으면서 스물 몇 자의 없을 무와 빌 공을 되뇌게 되면서 마음을 갈앉히는데 좋다.

금강경은, 수보리를 여러 번 써야 하고, 어의운하리오... 어떠냐... 이런 말들을 쓰자니 거리는 멀다.

그렇지만, 금강경은 말이 금강경이지, 이것은 진리의 글자가 아님을 깨닫기에는 훨씬 직설적이다.

 

금강경이 서른 꼭지가 넘지만, 핵심은 맨 앞의 서너 챕터에서 다 드러났고,

계속 부연 설명임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매니큐어를 품평하지 않는 자세다.

달을 우러를 수 있으면, 한 생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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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성찰 시리즈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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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이 '숨은 신'을 썼다는 것에 의아함을 가졌다.

그가 공부하고 읽어온 과정들은 '유물론자의 삶'인 것처럼 보여서였다.

 

철이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6)

 

그래. 이런 것이 강유원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이란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 즉 희망을 끊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

 

작가의 말이나 프롤로그 정도로 여겨지는 1장이 이 책의 집필 동기다.

죽음의 문 앞에서 누구나 삶을 돌아보는 것인 인지상정일 것이다.

 

불교에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해골을 볼 일이다.(9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과

오디세우스와 에이해브 선장을 읽는다.

 

사변보다는 문학이 훨씬 인물이 내음이 확 풍긴다.

 

에이해브 선장은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을 사람이다.(152)

에이해브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 최계 위에서 확고한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바다의 인간이었던 오딧세우스와 마찬가지로 갈등없이 자신이 길을 간다.(156)

 

결국 죽음 앞에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살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살던 대로 살자는 것 아닐까 싶다.

 

희망이란 것을 갖고 살다보면,

어느날, 그것이 '끊어지는' 절망을 만날 수 있으니,

신에 대해 생각하며 떨고 있는 갈대 같은 '팡세'보다는,

오딧세우스나 에이해브 선장을 본받아 살 일이다.

 

작가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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