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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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까진가, 법정 스님이 책을 보기만 하면 사재던 때가 있었다. 근데,

언제부턴가, 법정 스님의 책이 보이면 책방에 서서 읽거나, 쭈그리고 앉아 읽게 된다.

글이 좋긴 한데, 사람 사는 이야기에서 홀로 사는 이야기로 바뀌면서 삶의 진실성이 표백되고, 진리에 다가선 언어들로 텅 비어 있는 가득함이 부담스러운 걸까. 서 있는 사람들을 안쓰러워하던 그런 사람 냄새, 사람 사이에서 조급해 하던 관계맺음들이 소거된 홀로사는 이야기들은, 왠지 을씨년스럽다.

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에서 스포츠정신, 아마추어 정신,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 사라진 것은 오래 되었다. 올림픽은 상업의 연속선상에 서 있고,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고, 세계의 축제가 아니라, 영업의 축제라고 할 만하다. 이번 마라톤에서 우린 두 사람의 영웅을 만났다. 3등한 브라질의 비행 마라톤 선수와 봉주르 선수가 그들이다. 싸이코로 인해서 선두를 놓친 아쉬움을 그는 완주로 만족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스포츠의 살아있는 정신이었고, 서른 넷의 노장이 십사등으로 들어온 정신력은 황영조와 대비되어 영업사원의 뺀돌거림이 탈색된 순수, 그것이었다.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를 외치던 경쟁과 1등만의 올림픽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도와준 그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노스님의 입을 보고 이는 없고 혀만있다고 했던 제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진리를 배웠다. 지위 거래 놀이가 생각났다. 내 지위를 낮추는 언행을 한 가지만 보여준다면, 상대는 나를 훨씬 가깝게 느낄 것이라는... 북풍과 태양의 비유가 아니더라도,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스승님이 가마솥을 아홉번이나 옮겨 걸으라고 시켜도 묵묵히 수행하던 불목하니에게 넙죽 절을 하며 '구정선사'의 계를 주던 이야기에서도... 지하철에서 볼펜을 안 사면서도 천 원 적선하던 할머니들의 투박한 손길들에서...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외로 꼬고있는 양복쟁이들에게서 보지 못하는 강함을 배운다.

어딘가에서, 호랑이의 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무늬는 안에 있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무늬가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분의 혜안은 여전히 지혜롭고 맑고, 깊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거니는 그분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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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9-03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햇살의 맑고 따듯한 눈부심에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맞이할 수 있음을 감사드리는 아침이었습니다. 님의 리뷰처럼 내 안의 무늬결을 곱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글샘 2004-09-1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이의 무늬처럼 잘난 체하고 사는 저는 안결의 무늬가 없는 거 같아서 매일 슬프지만, 여우님의 포도송이를 볼 때마다 힘을 낸답니다. ^^
 
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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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힘은 형상화를 통해 진실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임철우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모티프로 하여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썼다. 시의 상징적 표현이 가진 상상력의 날개를 소설의 진실성을 무기로 치환한 것이다.

곽재구의 관심은 늘 낮은 데 있다. 현대 고속철의 위용을 자랑하는 역사에 있지 않고 시골 작은 완행 열차나 서는 '사평역'과 '널'을 타고 맛조개를 잡는 사람과 자연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 이문도 남지 않는 팥죽 파는 포구 사람들 사이에 그의 시선이 머문다. 그런데, 뭔가 감동이 없다. 맛깔스레 보이지만 한입 떠먹고 나니 숟가락을 대기 싫은 물김치같은 야릇한 맛.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민중성에 결여된 그 무엇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낭만적 추상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일단 결론 지었다. 그의 시선이 끊임없이 집착하는 낮은 곳에는 그의 삶이 없었다. 문학의 진실성과 삶은 별개가 아니므로.

그는 포구에서 포구로 '글을 쓰러' 다니는 지식인이었지, 포구에 사는 얼굴과 개흙이 분간도 안 되는 진솔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낭만적인 접근이 그의 글을 추상적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사평역에서'가 시로써 누릴 수 있었던 추상성의 여유 공간을 '포구'는 산문이어서 누릴 수 없었다고나 할까. 이런 글은 은행에서, 병원에서 대기 중에 읽어버릴 잡지 속의 테마 여행이라 할 만하다. 책으로 묶어 사람의 고독과 떠돌이의 바람기를 시린 언어로 전달할 것 까지는 없어 보인다.

'시'로써 만족시켰더라면 '신비감'의 영역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뒷맛.

참,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서귀포여자고등학교'에서 내려다 본 바다란 데 나도 동의한다. 그 학교의 교사에서 내려다본 은빛 바다와 섬 하나는 충분히 그 학교 여고생들을 시심에 홀리게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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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파는 노동은 평온할 수가 없다.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삶이란 때로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 때가 있다.

미래를 위한 시간, 미래를 위한 비행, 거기에는 일정 부분 짙은 꿈의 냄새가 배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새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맞바꿀 만한 가혹한 비행을 통해 스스로의 유전자 내부에 꿈에 대한 기록들을 저장하고, 그 추억들은 쌓이고 쌓여 설령 지금보다 가혹한 삶의 현실이 지상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낼 힘을 갖추는 것이다. 가혹한 자연의 재앙에 부딪쳤을 때 인간이 저 새들보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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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4-07-04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부족한 리뷰 아랫단에 잘 영글은 포도 한 송이 달아주시는 님의 마음이 참도 고맙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참 잘했어요 도장 다섯 개 받은 기분이랍니다.
탁월한 글발이라니요. 정말 과찬이십니다.
제맘대로 쓰는 글을 부지런히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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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어 이거 노무현이(이런 말만 들어도 대통령을 싫어한다고 느껴져서 그냥 넘어갔다.) 권했다는 그 책 아냐?'했다. 읽어보진 않았단다. 난 그게 뭔 소린가 하고 넘긴 뒤, 나중에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보고서야 질색을 했다. 느낌표 도서에 대통령이 읽은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이놈의 천민 자본주의는 책에다가 무식하게도 라벨을 잘도 갖다 붙인다. 대통령이 읽은 책이 뭐 대수란 말인가. 대통령이 칩거하면서 읽을만한 책이 어디 한두권이겠는가.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읽어서 그런지 이순신의 실루엣과 대통령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교차되었던 책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물을 골똘하게 보고 있으면 사물의 본질이 떠오르면서 마음 속으로 비쳐 들어온다. 이런 것을 관조라고 한다. 외로움, 사색의 시간, 그리고 많은 적들... 이런 상황의 그들에게 가장 큰 공통점은 고뇌가 아니었을까? 그 고뇌는 적에 대한 고뇌, 자신에 대한 고뇌, 조직 내부의 적에 대한 고뇌, 가장 핵심적인 것은 큰 나라의 횡포에 대한 고뇌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성웅 이순신으로 추앙받던 이순신을 고뇌하는 장군으로 그려냈다. 간결하고 무뚝뚝한 문체가 그런 장군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소설로써는 많은 점수를 못 주겠다. 형상화에 실패하고 있으며 박진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는 것처럼, 내가 그의 자전거 여행을 읽고 극구 칭찬했던 그의 말맛이 이 무거운 소설에서는 전혀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다.

태백산맥에서 조정래가 무거운 사나이들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기가 막힌 묘사와 지방 사투리들을 녹여낸 데 반해서, 이 소설에서는 정녕 '쿨'한 사나이, 臣 李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은 여기서도 묻어난다. 끼니를 때워야 하는 민중들의 고역을 바라보는 이순신.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 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그는 먹는 음식 앞에서 상당히 엄숙하다. 주막에서 군사들을 먹이는 이순신.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 국에 만 밥을 넘길 때 창자 속에서 먹이를 부르는 손짓을 나는 느꼈다."

모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산문 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는 그의 칼에 대한 단상.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守와 攻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세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흘러들어감이 없고,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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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6-2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퍼갑니다..
 
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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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치옹을 가장 좋아한다. 치옹은 윤오영 선생님의 호다. 바보같은 늙은이.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데도 그 분은 스스로를 바보같다고 질타하신다. 아니.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하신게다.

수천년 전부터 이어져 온 화두. 너 자신을 알라. 에 대한 답으로 그 분은 바보라고 답하신 거야. 피천득의 수필을 읽은 지 오래 되었지만, 그 분이 등장하는 수필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되고 만다.

피천득의 수필 중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필이 인연이다. 우리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그 아스라하던 청년들의 가슴에 일제시대에 있던 일을 교과서에서 사랑이란 감정으로 배웠던 씁쓸한 기억이 남는 수필. 인연. 아사코가 어린 시절 헤어질 때는 아사코가 목덜미에 매달리면서 입맞춤을 해 주었고, 아사코가 대학 다니던 시절 만났을 무렵에는 아사코와 손을 잡고 헤어졌고, 마지막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류의 잡문. 윤오영 선생님이 보았더라면, 치열함이 부족한 덜떨어진 글이라고 일갈을 던지셨을 지 모른다.

광고영화 여친소에 이 책이 등장해서 이 책의 회사 샘터에서 돈을 주었나? 하고 생각 들 정도로, 영화와는 별로 관계 없는 수필집.

피천득이 아직도 우리나라 수필계의 일인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정말 학같고, 난같고 청초한 부인같은 글들은 윤오영 님의 글인데 말이다.

그나마 내가 위안 받는 건, 전지현이 피천득을 몰랐던 것에 대해서다. 여경진이 피천득을 몰라줬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지 않게 했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초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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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4-06-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아든 치옹이든 ....글쓰기에 1인자가 있기는 있나요? 가끔 그런류 질문 받습니다.제게 질문한 사람들은 무안한 답변만 듣기 일수죠. 예를 들면 "누가 최고의 락커냐? 세계 3대 기타리스트는 누구냐? 한국 최고의 소설가는 누구냐? ...누가 최고의 영화감독이냐? 누가 최고의 지휘자냐? 어떤 여배우가 가장 예쁘냐? 등등....고딩땐 그런거 가지고 마구 핏대를 올렸던 거 같습니다. ^^ 자신의 주관적인 감동을 객관화시켜 대중의 동의를 구하고 자신의 안목이 결코 그릇된것이 아님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심리때문이겠지요.근데...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객관적인 평가와 동의가 꼭 필요한건가 모르겠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태준 님의 수필을 좋아하는데 꼭 한국최고 뭐 그런말 안써도 섭섭하진 않습니다.

글샘 2004-06-1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1인자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금아의 사상 없는 글들이 이제껏 미화된 측면이 너무 컸던 것 아닌가 싶어서 그러지요. 우리 나라의 선비들은 늘 어두운 곳에서 꼿꼿한 성깔 하나로 버텨왔던 반면,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서 광채를 입었던 글들이 한결같이 미국의 세례를 입은 자들이라 쓰디쓴 입술만 축일 뿐인 거지요. 이태준 님의 수필도 좋지요. 그분의 글에는 반드시 시대가 반영되어 있거든요. 금아의 글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싫고, 그런 사람의 글은 우리 문단에서 순수문학으로 과대포장된 우리 역사가 서글퍼서 한 소리랍니다.

드팀전 2004-06-1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시대적 고민이 반영되지 못한 금아의 글들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하지만 우리가 어두운 시대를 살았고 그 어두운 시대의 무게에 눌려있덨다고 시대의 고민이라는 거대담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그건 순수문학이 문학의 예술성만을 주장하는 몰상식처럼 일상영역의 문제를 거대담론으로 무시하는 다른 오류를 범할 수 있기때문입니다.저도 개인적으론 그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진지한 성찰이 담긴 글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집니다.하지만 일제시대에도 한국전쟁 때도 사람들은 해가 뜨면 쌀을 씻어야했고 또 지나가던 아가씨가 예쁘면 눈길을 보냈습니다.이러한 일상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을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고 하면 또 하나의 폭력이되고 맙니다.그건 너무 감상적이고 이분법적으로 문제를 바라볼 오류가 있습니다.

글샘 2004-06-1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점을 이분법적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실증주의자들의 오류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도를 잡고 있을 때는 개별성을 주장하다가, 세력이 없어지면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숱한 이론들의 원천이 아니었던가요.
제가 금아를 욕한 게 아니라, 치옹이 문단의 중심이 아니었음을 한탄한 것임을 아시겠지만, 저는 중도, 상대주의를 믿지 않는 쪽이랍니다. 옳은 것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82
김정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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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간 영혼을 사랑하는,

예쁜 나를 발견하는

나비.

김정란의 나비는 역설적이게도 넝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나풀나풀 예쁜 모습과 너덜너덜 닳은 모습을 동시에 지닌 모순체인 그의 나비는, 어쩌면 그의 화려한 이력에 뒤채인 '표현되지 않았고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시니피앙'인 모양이다.

그는 프랑스어를 하니깐, 이런 걸 시니피앙이란 말 속에 절묘하게 넣을 수 있었던 게다. 역시 인생은 생활을 뛰어넘지 못하는 법이니깐. 자아를 자신의 재산의 전부라던 어떤 이에게 시에서 각주라는 생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까지 '내게 자아는 넝마'라고 역설한다.

그의 시에는 일관되게 결핍과 부재, 어두움, 그리고 고아, 그러나 무언가를 느끼는 감기의 코기토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고 하던 김수영의 눈이 그에게도 살아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나비로 보고 있을 때, 그의 눈은 형형하게도 살아서 넝마같은 자기의 실존을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딱딱함.

존재의 어두움 속에서 느끼는 현기증.

"부모님께, 내 핏줄의 두 끝, 내가 눈물 외의 아무 것도 드릴 수 없는 내 존재의 까칠한 겉옷에게" 란 슬픈 서시를 쓴 그의 시니피앙의 눈물을 나는 읽었다.

십오년 전, 내가 한창 군대 훈련소에서 비지땀 흘리던 시절에, 그 폭압적 시절에 저항하는 시들도 있지만, 역시 그의 시의 정점은 시니피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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