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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평점 :
지구에 영웅이 있는가?
옛날에 신화의 시대가 있었다. 신화는 신성하고 위엄있는 이야기로, 조금 황당하더라도 믿게 되는 이야기다. 단군부터 시작하더라도, 최근의 박정희까지는 신화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도, 삼성도 다 신화 속의 기억들이다.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 뭔가는 덧붙여지고, 도색되었지만, 신성하고 위엄이 서려서 감히 뭐라고 건드릴 수 없던...
인간의 시대로 넘어오는 르네쌍스의 시대가 되면, 신에게서 인간은 뚝 떨어진다. 신과 멀어진 인간은 출산의 고통을 얻게 되고, 배고픔의 시련을 사게 된다. 제5공화국 이후, 우리는 최초로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자부심도, 수출 백억달러 달성과 새마을 운동의 성공으로 중진국으로 도약했다는 긍지의 신화도 아득한 안개 속으로 놓치고 만다.
인간의 시대에 전설이 태어난다. 전설따라 삼천리처럼, ~~~라 카드라... 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속에는, 실패한 영웅들과 함께 조악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의 피비린내가 비릿하게 녹아 있다.
간혹 민담들은 삶의 향취도 묻혀 내고, 우스갯소리도 지어내지만, 시대를 뒤덮은 쇠항아리의 어둠을 찢을 수는 없다.
이 소설이 전설인 이유는, 바로 인간의 비릿한 피내음이 주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전설은 구체적인 증거물을 채택하여 신빙성을 높여 준다. 촉석루의 의암에서 실제로 논개가 뛰어든 것처럼 느끼도록 말이다.
20세기의 현대사를 <슈퍼 특공대>를 중심으로 패러디하는 이 소설은 그야말로 뼈대만이긴 하지만, 20세기의 전설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란 본부와 영국과 지-쎄븐이라는 똘마니들, 그리고 겉은 노랗지만 속은 흰둥이가 되고 싶은 동아시아의 <바나나들>... 이 었었다나 뭐래나...
어느 새, 공산 주의에 대한 피끓던 열정도, 평등 세상에 대한 희망도, 혁명과 순수의 시대도 모두 전설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 냉전의 시대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룡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표방하는 <스타워즈>의 역설적 제국, 강포 미국의 21세기인 것이다.
21세기가 오면 <인류 형제애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던, 잭 런던의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 피비린내 나는 전설을 조용조용 읊조리며, 바나나맨이 되고픈 슬픈 하루하루가 이어질 뿐이다.
이 소설은 재미가 별로 없다. 나도 어린 시절 슈퍼 특공대를 정말 감명깊게 보았다. 그 노래는 아직도 한 소절도 잊지 않았다. 람보와 슈퍼 특공대로 세계의 평화를 희구하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음모는 이제 만화 영화가 아닌 현실로 이루어졌다. 적군들이던 세력은 모두 섬멸된 채로...
비참한 바나나맨의 최후는 장렬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처절한 버림받음 그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싶다면, 새로 피비린내를 덮을 아스라한 신화의 시대로 회귀하고 싶다면, 이제 바나나맨의 껍질과 속을 모두 뒤바꿔야 한다. 우리 패러다임은 키위나 토마토처럼 겉과 속이 하나로 되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것으로 말이다.
슈퍼 특공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들을 추종하던 말로가 영어로 입에 풀칠하는 바나나맨이 된 것을 직시해야 한다.
뭔가 주제 의식을 전달하려 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흐르지는 못한다. 확실히 삼미 슈퍼스타의 전작이라 그런지 좀 완성도가 떨어지는 느낌. 심사평에서 말한 것처럼 매끄럽게 흐르긴 하는데,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조금은 어정쩡한... 그러나, 작가의 자각하는 힘은 확실히 보여준 소설이다.
그의 가능성이 좌르륵 펼쳐질 미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