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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에 이미 이 소설을 두고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반페미니즘 소설로 낙인찍혀 욕을 숱하게 얻어먹고 말았던 소설이다.
당시에는 욕먹는 작품 괜스레 읽어 봤댔자, 혈압만 오른다 싶어 그저 넘겼는데, 이제 무슨 이야긴지 궁금해서 빌려 보았는데...
한 마디로, 이건 소설이 아니다. 겉표지에 분명 장편소설이라고 적긴 했으나, 장편이긴 한데, 소설은 아니다.
차라리 복거일의 영어 공용어화론은 우리의 지나친 순수주의에 대한 경계라고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이문열의 <선택>은 호주제가 폐지되고 있는 마당에,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젊은 날의 초상, 사람의 아들로 우리 젊은 시절의 <감상주의>를 달래 주었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소모하던 내 젊은 시절에 그의 영웅시대는 <광장>과 같은 또하나의 푯대가 되어 주었으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우리 시대의 분노로 일그러진 자화상을 <상징주의>적 수법으로 형상화했던 그가,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날개도 없이 추락만 하고 있는 것인지... 하긴 그의 소설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우길 때부터 날개가 없었던 듯 하다.
서정주가 쪽팔린 줄도 모르고 전두환이 편을 들던 시절처럼, 이문열도 쪽팔린 줄도 모르고 자기가 균형감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라고 떠드는 꼴은 이 시대의 논리가 얼마나 가진자의 횡포인지를 보여주는 듯 해 씁쓸하기만 하다.
이 글은 <형상화>에 실패하고 있으므로 소설은 아니다. 그저 수필, 그것도 가벼운 신변 잡기의 수필에 불과할 뿐이다. 장편 수필이라 하면 되겠다.
이문열이 착각하는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닌데,
우선, 자기네 가문이 양반 가문이었던데 대한 자부심은, 마치 상놈인 나더러 <양반처럼 고결한 삶을 선택>하면 될 것을... 하는 마리 앙트와네뜨의 '빵이 없으면 카스테라를 먹지'와 유사한 착각으로 보인다. 그는 양반이 득세하던 시절에 자신이 태어나지 못했음을 무지무지 원망할게다. ㅋㅋㅋ 쌤통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여성 문제는 그동안의 시대 탓이란다. 그래서 남성도 같이 자유롭지 못한데(이 말은 맞다)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한 쪽으로만 몰아간다고 한다. <현모 양처를 선택>하는 것도 자유로운 한 삶인데 말이다.... 하면서... <현모 양처>가 정말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의 선택이라면,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우리 아내들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의 소산이란 말인가... 이 책은, 출산 거부를 <선택>한 이 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모독이다.
자신은 이조 시대의 귀족 후예로서 고상한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며 잰체하고 싶은데, 세상은 불쌍놈들이 목청 돋우는 시대가 되어서 그는 몹시도 성이 났나 보다. 그래서 제사도 안 지낼 놈들, 제사지낼 후손도 안 낳는 놈들에 대해서 시퍼런 칼날을 간다... 그 어머니들의 <사랑과 정성>을 알지도 못한다면서...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닌 사람이다. ... 피할 수 없는 강요에도 선택의 여지는 있게 마련이다. 맹목적인 순응과 적극적인 수용은 다르다.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가문은 피할 수 없는 강요였다. 그러나 나는 맹목적으로 순응한 게 아니라 그런 나름의 논리를 통해 적극적으로 그 이념을 껴안았고, 그런 뜻에서 감히 가문을 내가 결혼 뒤에 첫번째로 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겠지... 자기네는 양반 가문이었다고... 그래서 학문을 포기하고(조선 시대에 여성이 학문을 포기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는 것일까?) 그 봉건적 유교의 가부장 이념을 수용했다는 어불성설인 잡문을 책으로 묶은 것은 참으로 희생한 나무에게 아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문열에게 권하고 싶다. 오늘부터 간절히 간절히 빌어서 조선시대 여성으로, 그와 가장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그렇게 논리적으로 이념을 실현하라고 말이다.
하긴, 호주제 폐지를 놓고 갓쓰고 수염기른 영감들이 국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거 보면, 아직도 이씨 조선 사람들이 호패를 차고 돌아다니는 세상이 우리와 차원이 다른 어느 공간엔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