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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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여, 내 너에게 뛰어들리라,

패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서!

 - 버지니아 울프의 묘비명

 

버지니아 울프(1882∼1941)

 

 * * *

 

버지니아 울프는 이야기할 게 아주 많은 작가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작품들보다 자신의 생애를 둘러싼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될 정도로,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작가다. 그녀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차 대전 중에 홀연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리 오래된 작가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21세기에 와서도 그녀가 쓴 작품을 바탕으로 꾸며낸 멋진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의 작가, 그 작품을 읽는 독자, 그 작품의 주인공이 동시에 등장하는 매혹적인 이야기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워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고. 그 영화의 원작을 쓴 마이클 커닝햄은 그 작품으로 퓰리처 상과 펜 포크너 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녀는 21세기 들어 더욱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여성이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그녀는 문학외적인 영향 보다는 문학 자체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긴 탁월한 작가였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20세기 초반에 갑자기 터져 나온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프란츠 카프가(1883∼1924),  제임스 조이스(1882∼1941), T. S. 엘리엇(1888∼1965) 등으로 대표되는 쟁쟁한 거장들이 그녀와 함께 새로운 문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녀는 19세기의 보수적인 교육 풍토 탓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학자이자 비평가였고 이름난 문필가였던 부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지적인 자극을 흠뻑 받으며 성장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집엔 당대를 대표하는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였던 토머스 헉슬리도 부친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왕립학회 회장을 지낸 토머스 헉슬리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년) 서문에도 등장한다.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손자다. 『댈러웨이 부인』에도 찰스 다윈과 토머스 헉슬리가 잠깐 등장한다.)

 

10대와 20대에 부모를 차례로 잃은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를 따라 블룸즈버리로 이사했고, 여기서 그 유명한 블룸즈버리 그룹이 탄생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오빠의 친구들이 집으로 드나들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와 함께 그들이 나누던 예술과 철학과 문학 토론 모임의 안주인 역할을 떠맡았다. 여기엔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소설가 E.M. 포스터도 끼어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에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였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다. 그는 작가이자 잡지 편집인이자 좋은 남편이 되었고, 결혼 후 재미 삼아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는 점차 번성하여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출판하는 등 일류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발전했다.

 

비범한 성격과 용모를 지녔을 뿐만 이나라 화가인 언니 바네사와 함께 블룸즈버리 그룹의 중심 인물이 된 그녀는 문학과 예술의 첨단 조류를 이끌면서 활기찬 삶을 살았으나 끝내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30년 가까이 병약한 아내를 대신해서 살림을 떠맡고 창작을 격려해 줬던 남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속엔 그녀만의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다시 미쳐 가는 것 같아요. ……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 없어요.>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은 상태로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1941년 3월 28일이었다.

 

1925년에 발표한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의 실험 정신이 낳은 대표적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22년부터 오랜 시간 동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역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대 작가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묘사하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바람에 정작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삶이란 전혀 <이러한> 게 아닌 듯합니다. 여느 때 여느 마음을 잠시 살펴보세요. 마음은 갖가지 인상들을 받아들입니다 ㅡ 사소한 것, 환상적인 것, 덧없는 것, 또는 날카로운 강철로 새긴 듯한 것. 사방에서 그런 인상들은 마치 무수한 원자들의 그치지 않는 소나기처럼 밀어닥치고, 그런 소나기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조점이 달라질 수밖에요. …… 그 가변적이고 알 수 없는, 한계가 지어져 있지 않은 영혼을, 비록 그것이 다소 상궤를 벗어나고 복잡하더라도, 가능한 한 외적이고 무관한 것과 뒤섞이지 않게끔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가 아닐까요.(「현대 소설론」)

 

 

<새로운 소설을 위한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한 실험적 작품은 1921년 말에 완성하고 이듬해 10월에 출간된 『제이콥의 방』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해에는 공교롭게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S. 엘리엇의 『황무지』 등이 동시에 출간된 해였다.(프루스트는 같은 해 11월에 사망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5년 뒤에 출간됐다.)

 

새로운 방법에 확신을 얻은 버지니아 울프는 1922년 8월에 『댈러웨이 부인』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업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을 그 작품에 집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하나씩 해결책을 찾아 나갔다.

 

<나는 내 인물의 등 뒤에 아름다운 동굴을 판다. 그럼으로써 내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인간다움과 유머, 깊이 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는 그 동굴들이 서로 이어지고, 각기 현재의 순간에 밝은 데로 나온다는 것이다.>

 

1925년 5월에 출간된 『댈러웨이 부인』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랐다. 3년 앞서 출간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의 비교를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제임스 조이스의 <사실주의적 활력>의 <유치한 아류>로 평가되기도 했다. 울프 또한 『율리시스』를 잘 알고 있었고, 「현대 소설론」에서 제임스 조이스를 자기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내세우며 인정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율리시스』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드름을 긁어 대는 역겨운 학부생>에 대해 느끼듯 짜증이 나고 환멸을 느낀다거나, <실패작, 천재성은 있지만 질이 낮다. 산만하고 찝찔하고 젠체하며 상스럽다>는 악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실제로 『댈러웨이 부인』과 『율리시스』는 많이 닮았다. 무엇보다도 '의식의 흐름 기법'과 '내적 독백'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닮았다. 작품의 시공간적 구도도 닮았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의 더블린이 주무대다. 『댈러웨이 부인』은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하루, 런던에서의 아침부터 저녁까지가 배경이다. 『율리시스』의 남자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이 아내 몰리와의 옛 추억이 담긴 '호우드 언덕'을 자주 떠올리는 것과 『댈러웨이 부인』의 남자 주인공 피터 월시가 첫사랑 클라리사와의 추억이 담긴 '부어턴'을 자주 떠올리는 것도 닮았다.

 

『율리시스』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현대판 오마주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뚜렷하지는 않지면 호메로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우선, 클라리사의 첫사랑인 피터 월시가 오랜 방랑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클라리사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는 점이 그렇다. 비록 남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피터의 '영원한 고향'은 언제나 클라리사한테 고정되어 있다. 이미 '댈러웨이 부인'이 된 지 오래인 클라리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정절을 지키며 바느질로 소일하는 페넬로페처럼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고치며 피터 월시를 그리워한다. 클라리사는 그녀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자주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침대는 좁았고 …… 아이를 낳았는데도 여전한 처녀성이 새하얀 시트처럼 자신을 감싸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점들 말고도 『댈러웨이 부인』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닮은 점은 더 있다. 그 어떤 작가들보다 셰익스피어가 유난히 자주 인용된다든지, 주인공의 옛 애인이 작품 전체에서 골고루 출몰한다든지 하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 두 작품 사이의 몇몇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생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과감한 문학적 시도에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우연의 일치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댈러웨이 부인』 사이의 차이점은 유사한 점들에 비해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벅찰 정도이다.

 

무엇보다 『율리시스』는 작품의 규모나 방대함, 주제의 다양함에서 『댈러웨이 부인』과 비교되지 않는다. 『율리시스』에는 인간의 삶을 둘러싼 거의 모든 문제들이 총망라된 느낌이 든다. 거기엔 탄생과 죽음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종교, 역사, 음악, 정치, 의학 등 온갖 분과 학문들이 한꺼번에 마구 뒤섞여 들끓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델러웨이 부인』은 그 주제가 오로지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로 오롯이 모아져 있다. 그걸 설명하는데 쓰이는 핵심 도구들은 피터 월시와 클라리사의 사랑, 클라리사가 준비한 파티, 전쟁에서 귀환한 셉티머스의 자살 등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난해하거나 과시적인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보면 『율리시스』보다는 훨씬 읽기 쉬운 작품이다. 독자가 겪는 유일한 어려움 한 가지는 '카메라의 앵글'이 너무나 자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그저 단순히 등장 인물들의 어깨 위로만 옮겨 다니지는 않는다. 옮겨 간 사람의 머릿속으로 잠입하기도 한다.(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에게서 이런 경향이 유독 두드러진다.) 그 점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충분하다. 가끔씩 카메라가 시공간을 통째로 옮겨갈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걸 따라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댈러웨이 부인은 런던에 사는 쉰두 살의 여성이다. 최근에 심장병을 앓고 난 후로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부쩍 늙긴 했지만 영국 상류층의 부인다운 외모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 자신의 집에서 열릴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 속의 이야기는 클라리사의 행동 반경을 따라, 혹은 빅벤에서 매시각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런던 시내의 평온한 일상들을 비추면서 아주 차분하게 진행된다. 이런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우리의 삶이 된다는 것처럼.

 

그런 평온 속에서도 갑자기 삶을 뒤흔드는 건 뇌리에 깊이 박힌 어느 한 때의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한때 클리라사의 삶을 송두리째 차지했던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하며 사는지? 상쾌한 아침 공기를 느끼는 순간 그녀는 곧장 30여 년 전의 과거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그때만큼 삶의 에너지가 충만한 때는 다시 없었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부어턴에서 프랑스식 유리문을 열어 젖히고 ㅡ 그 문의 경첩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ㅡ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려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저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람보며 서 있노라면. 그때 피터 월시가 물었다. 「채소밭 가운데서 명상하는 거야?」ㅡ 그렇게 말했던가? ㅡ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들이 더 좋아.」ㅡ 그렇게 말했던가?(7∼8쪽)

 

 

이렇게 갑자기 불려 나온 과거 속의 인물인 피터 월시는 한때 클라리사와 결혼할 뻔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남자였다. 한때는 온 세상을 개혁할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고, 언제나 클라리사를 너무 감상적이라고 몰아세웠던 당당한 남자, 나중엔 결국 옥스퍼드에서 퇴학 당하고 인도로 떠난 남자, 불행한 결혼 끝에 지금은 영락하고 만 불쌍한 처지의 남자가 피터 월시였다.

 

그녀는 세인트제임스 파크에서 여전히 논쟁을 벌이면서,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고 ㅡ 또 그래야 했다고 ㅡ 결론을 내리곤 했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날이면 날마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그런 여유를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와는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그 작은 정원의 분수 곁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그와 절교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둘 다 파멸해 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다. 그 슬픔을, 그 고뇌를 여러 해 동안이나 가슴에 박힌 화살처럼 지녀야 하기는 했지만.(13∼14쪽)

 

 

부어턴을 떠올리면 클라리사는 언제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열여덟 소녀 시절을 그토록 황홀하게 수놓았던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첫사랑 피터 월시, 절친 샐리 시튼, 지금은 남편이 된 리처드 댈러웨이, 심지어 늙은 고모님까지도. 그런데 별다른 소식조차 없던 피터가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그녀의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하필이면 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 피터가 불쑥 클라리사를 찾아 온다. <누구지 ㅡ 대체 누가> 파티를 여는 날 아침 11시에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사람이? 오, 맙소사! 그가 이렇게 아침 일찍 예고도 없이 찾아오다니! '그를 보자 그녀는 그렇게도 놀라고, 기쁘고, 수줍고, 어리둥절했다.'

 

불행한 처지로 런던에 되돌아온 첫사랑의 남자와 클라리사의 만남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 딸아이가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그러나 불쌍한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 앞에서 까닭 모르게 한바탕 눈물을 왈칵 쏟아낼 틈마저 없었던 건 아니다.(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억누를 수 없이 솟구치는 힘에 북받쳐서, 그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울고 또 울었다. 아무 부끄러움 없이, 소파에 앉은 채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터와의 짧은 만남 이전에 클라리사의 머릿속에 피터와 함께 떠오른 옛 친구는 샐리 시튼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여자 친구였다. 클라리사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재능과 개성들을 지닌 그녀. 샐리는 정말이지 사람들을 너무 자주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것은 샐리에 대한 감정의 순수함, 그 완전함이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과는 달랐다. 전혀 사심이 없고, 여자들, 막 사춘기를 지난 여자들 사이에나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편에서는 다분히 보호자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둘만의 연맹이라도 맺은 듯한 느낌, 자신들을 갈라 놓을 무엇인가에 대한 예감(그들은 결혼을 항상 파탄으로 이야기했다)에서 생겨난 이 기사도적인 감정은 샐리보다는 주로 그녀 편에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48∼49쪽)

 

 

샐리와 함께라면 클라리사는 심지어 이런 느낌까지 들곤 했다. <만일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이리> 그러나 그날 저녁 파티에서 다시 만난 샐리는 실제로 어땠는가. 까마득한 옛날 부어턴에서 함께 보았던 꽃양배추를 보고 '거친 청동 같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적이었던 그 소녀는?

 

이름이 뭐라고? 레이디 로시터? 도대체 레이디 로시터가 누구지?

 

「클라리사!」 아, 저 목소리! 샐리 시튼이었다! 샐리 시튼! 대체 몇 년 만인가! 그녀의 모습은 안개라도 통해 보듯 어슴푸레했다. 그녀가 아는 샐리 시튼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클라리사가 더운 물병을 손에 쥐고서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어, 이 지붕 아래! 하고 가슴 뛰며 생각하던 시절의 샐리는 저렇지 않았는데!

 

서로 얼싸안고, 당황하고, 웃어 대는 동안,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ㅡ 런던을 지나는 길이었어, 클라라 헤이든한테서 들었지. 널 만날 절호의 기회잖아! 그래서 불쑥 끼어들었어 ㅡ 초대도 안 받고 …….(223쪽)

 

 

클라리사가 그날 저녁 파티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맞이할 때까지 얼마나 더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과 (남편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머릿속에 떠올렸는지, 혹은 파티에 초대한 사람들이 얼마만큼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지. 혹은 매시각 어김없이 울려퍼지는 빅밴의 종소리가 그날 하루 런던 시내를 오가는 뭇 사람들의 귓가에 어떤 색조로 들렸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건 삶이 클라리사와 피터와 샐리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그녀는 삶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

 

방 안에 갇혀 소파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그처럼 명백하게 느꼈던 삶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옷자락처럼 휘감고, 화창한 모습으로, 뜨거운 숨결로, 속삭이면서, 커튼을 휘날리게 했다. 그러나 만일 피터가 그녀에게 <좋아, 좋아. 하지만 당신의 파티들은, 대체 그 파티들은 무슨 의미가 있지?> 하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무도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건 하나의 봉헌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말은 한심할 만큼 막연하게 들릴 것이었다. 하지만 피터가 무슨 자격으로 인생이란 그저 단조로운 항해라고 주장할 것인가? 당신 사랑은 어떻고요? 하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대답은 뻔했다. 그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여자들은 도저히 이해 못한다고. 뭐 그렇다고 해두자.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남자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160∼161쪽)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이런 것들이었다.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사람들 사이의 고독, 서로의 눈에 비치는 그 인간적인 왜소함과 나약함 등.> 삶의 표층 아래에 도사린 온갖 모순들은 비단 주인공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레이디 브루턴의 무리한 이주 계획, 속물주의의 극치인 휴의 예법과 교양,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셉티머스에 대해 '권위'로 억압하는 닥터 훔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중 인물 가운데 가장 불행한 인물은 클라리사의 파티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시각에 홀연 창밖으로 몸을 던진 셉티머스다. 그의 자살은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닥터 훔스의 잘못된 권위와 횡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셉티머스의 죽음으로부터 도리어 삶을 긍정하는 미학을 얻는다. 셉티머스가 전쟁 후유증으로 삶에 적응하지 못해 고통받는 모습은 클라리사와는 전혀 별개로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 또한 매시각 늙어가는 중이며, 언젠가 마주칠 죽음이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두려움에서 그녀를 벗어나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있는 순간들 자체를 즐기는 것 뿐이다. 흩어져 가는 순간들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살아 있는 그 순간들을 배합하는 파티는 그런 노력의 일환이자 그녀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이제 블라인드를 내렸다.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그러자 그 말이 떠올랐다. 태양의 열기를 더는 두려워 말라. 손님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얼마나 특별한 밤인가! 그녀는 왠지 그와 ㅡ 자살을 한 청년과 ㅡ 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시계가 종을 쳤다. 납처럼 둔중한 원이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가봐야 했다. 손님들과 어울려야 했다. 샐리와 피터를 찾아야 했다.(243쪽)

 

 

『댈러웨이 부인』은 삶의 이면에 감춰진 꿈처럼 형체 없는 느낌들을 극도로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걸작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한 번만 읽어서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음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놀랍도록 정교하게 직조해 놓은 아름다운 무늬들이 단번에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문장들 사이로 미묘하게 이어놓은 거미줄처럼 세밀한 가닥들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칠 때만 아주 가끔씩 그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문장들이 얼마나 섬세하며, 인물들 사이를 연결해 놓은 가느다란 거미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물방울들을 매달고 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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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8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땜에 <댈러웨이부인> 곧 지르지 않을까 싶네여 ㅎㅎ👍

oren 2019-02-08 11:26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도 분명 좋아하실 꺼에요.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더 재미있는 신기한 소설이에요.^^

hnine 2019-02-08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댈러웨이 부인> 저는 지금 영화로 보고 있는 중이예요. youtube에서 한글 자막 제공 안되는 공짜 영화로 보다보니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oren님 이 글 읽으며 참고가 많이 되겠습니다.

oren 2019-02-08 11:42   좋아요 0 | URL
일단은, 한글 자막 안 나오는 영화를 보실 수 있는 hnine 님의 영어 실력이 부럽습니다.^^

저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동안에 그 옛날 딱 한 번 가봤던 ‘런던 시내 풍경‘이 문득 문득 떠올라서 괜스레 기분이 좋더군요. 버킹검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폴 성당, 빅벤, 하이드 파크, 리젠트 파크, 등등.

hnine 님께서는 런던에서 직접 살아보기도 하셨으니,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주 특별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런던 시내가 주요 배경으로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으니 말이지요.

『댈러웨이 부인』은 잇따라 두 번 읽고, 리뷰까지 다 쓰고 나서도 그 여운이 오래 남더군요. 그래서 결국 『The Hours』라는 영화를 찾아봤어요. 그런데 그 영화는 생각보다 너무 우울하게 그려져 있어서 적잖이 놀랐답니다. 시종일관 무한반복처럼 흐르는 음악까지도요.
 

 

살다 보면 아주 가끔씩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아!

 

물론 대개는 그럴 때 죽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때는 정녕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지, 결코 죽음으로 뛰어들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라는 격정에 휩쓸려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이고야 만 오셀로에게 가장 죽고 싶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런 질문은 하나마나다. 격분에 사로잡힌 그가 아무런 죄도 없는 아내를 죽이고 난 직후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졌을 때다. 그는 곧장 자결한다. 그러나 그는 원래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데스데모나를 죽인 직후 로도비코(베네치아 귀족)가 자신의 행적과 인간성을 베네치아 정부에 고할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고 말한다.

 

무엇을 줄이거나

악의로 적지도 마시오. 그러면 당신은

분별없이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을

질투를 쉽게 하진 않지만 하도록 만들면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 버린

비천한 인도인 같은 자를, 차분한 두 눈은

기분 따라 쉬 녹진 않지만 아라비아 나무가

약용 진액 흘리듯 눈물을 줄줄 쏟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 『오셀로』, 제5막 제2장 중에서

 

 

그는 함부로 질투심을 일으키는 시덥잖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갖춰야 할 용기와 위엄을 두루 지녔고, 정직성과 당당함뿐 아니라 다정다감한 감정까지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 중이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섬을 지키기 위해 용병대장 오셀로를 총독으로 파견한다. 베네치아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던 오셀로 일행은 도중에 격렬한 태풍을 만나 뿔뿔이 흩어진다. 뒤늦게 간신히 그 섬에 당도한 오셀로는 아내 데스데모나가 자신들보더 도리어 먼저 키프로스 해안에 무사히 도착한 걸 알고는 좋아서 까무러칠 지경이다. 그때 오셀로가 느낀 황홀감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격정적인 인물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오, 내 영혼의 기쁨이여,

폭풍 뒤에 언제나 이런 평온 깃든다면

바람은 죽음을 일으킬 때까지 불고 불어

고생하는 돛단배를 바다 언덕 저 위로

올림포스만큼 올렸다가 천국에서 지옥 가듯

다시 내리꽂아라. 난 지금 죽어도 지금이

가장 행복할 것이오, 왜냐하면 내 영혼은

절대 만족 맛봤기에 이 같은 안락이

미지의 운명 속에서도 이어질 것인지

염려하기 때문이오.

 

 - 『오셀로』, 제2막 1장 중에서

 

이 장면에서 오셀로가 느끼는 감정은 절정의 행복감이지만, 그 이면에는 벌써부터 미래에 심상찮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가 끼어든다. 이런 행복이 과연 '미지의 운명 속에서도 어어질 것인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오셀로는 이아고의 유혹 장면에서 너무 쉽게 질투심에 불타오르고, 전후 사정이나 자초지종을 자세히 살펴 보지도 않은 상태로, 이아고에게 휘둘린 끝에 아내인 데스데모나와 부하인 카시오 사이의 불륜을 갑자기(!) 확신한다.

 

물론 여기서 오셀로의 질투심이 빚은 비극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오셀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아고가 오셀로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 사용한 트릭이 너무나 교묘하고 그 효과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도 오셀로에게는 쉽게 파멸에 이르는 또 한 가지 약점을 더 지니고 있었다. 데스데모나와 자신의 결혼이 결코 탄탄한 바탕 위에 이뤄진 게 아니고, 갑작스런 유혹으로 이뤄진 허약한 기반 위에 있다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그는 피부조차 검은 나이 많은 무어인이었고, 데스데모나는 베네치아에서도 소문난 미모를 갖춘 고관대작의 딸이었으니 말이다. 이아고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의 틈을 벌이기 위해 그런 점까지도 교묘히 파고든다.

 

"데스데모나가 이 무어인을 계속 오래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중략) 그도 마찬가지고. 그녀로선 격정적인 출발이었으니까 그에 걸맞은 결별을 보게 될 거야.(중략) 이 무어인들은 욕심이 변하는 자들인데(중략) 지금은 그에게 캐롭처럼 맛있는 음식도 머지 않아 땡감처럼 떫은 맛이 날 거야. 그녀는 그를 젊은 남자와 바꿔야 해. 그의 몸에 물리게 되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 테고 사람을 바꿔야만 해. 반드시."

 

이아고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나쁜 악당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인간의 마음은 늘상 변하게 마련이고, 그 변화는 욕망이 좌우하며,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관계처럼 서로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결합은 그 열기가 식을 경우 언젠가는 깨어지기 마련이다. 이아고는 그걸 끊임없이 강조한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여 마침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이런 천하에 몹쓸 악당!!

 

 * * *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런던에 사는 쉰두 살의 여성이다. 그녀는 유월 중순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꽃을 사러 집을 나선다. 그날 저녁에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따라 그녀는 기분이 몹시 상쾌한 느낌을 받는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

 

그녀의 의식은 여기서 곧장 열여덟 소녀 시절로 날아간다.(소설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래 문장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이다. 문장 사이의 도약 덕분에 '과거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부어턴에서 프랑스식 유리문을 열어 젖히고 ㅡ 그 문의 경첩이 약간 삐걱대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ㅡ 활짝 열린 대기 속으로 뛰어들 때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들곤 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고요했던지. 물론 오늘 아침보다도 더 조용했었다. 파도의 찰싹임처럼, 파도의 입맞춤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당시 열여덟 살이던 소녀에게는) 엄숙했다. 거기 그렇게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노라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꽃들과, 나무들과, 나무들을 감돌아 지나가는 연기와, 갈까마귀들이 날아오르고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노라면.(7∼8쪽)

 

 

유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에 꽃을 사러 집을 나선 클라리사가 맨 처음으로 떠올린 추억 속의 그 사람은 피터 월시였다. 한때 너무나 격정적으로 사랑했고, 벌써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와의 아픈 이별만 생각하면 가슴앓이를 겪어야만 하는 남자, 옥스퍼드를 중퇴하고 지금은 영락한 처지지만 늘 보고픈 남자가 피터였다. 

 

그가 곧 돌아온다지. 유월, 아니면 칠월? 잊어버렸다.

 

피터에 대한 추억들도 어느새 뇌리에서 사라지고 얼마쯤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클라리사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옛 친구는 샐리 시튼이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운 능력을 지닌 여자 친구였다. 클라리사에게서는 도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재능과 개성들을 지닌 그녀. 샐리는 정말이지 사람들을 너무 자주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것은 샐리에 대한 감정의 순수함, 그 완전함이었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감정과는 달랐다. 전혀 사심이 없고, 여자들, 막 사춘기를 지난 여자들 사이에나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편에서는 다분히 보호자 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둘만의 연맹이라도 맺은 듯한 느낌, 자신들을 갈라 놓을 무엇인가에 대한 예감(그들은 결혼을 항상 파탄으로 이야기했다)에서 생겨난 이 기사도적인 감정은 샐리보다는 주로 그녀 편에서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시절 샐리는 정말이지 겁이 없어서, 허세를 부리느라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을 감행하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테라스 난간 위를 달린다든가, 여송연을 피운다든가, 묘한, 아주 기묘한 애였어. 하지만 그 매력은 대단했지.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밤에 자기 침실에서 더운물이 든 병을 손에 든 채로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어 ……. 그녀가 이 지붕 아래 있는 거야!> 하고 소리 내어 말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48∼49쪽)

 

 

그녀가 세월의 변천에 따라 얼마만큼 많이 그녀와 멀어지고, 그 모습조차 서로 몰라볼 정도로 바뀌었는지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 클라리사는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찾아 온 사람들을 일일이 신경쓰느라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나 마찬가지였던 옛 친구들인 피터 월시와 샐리 시튼과는 살가운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다. 클라리사가 피터와 샐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가봐야 해.」 「나중에 올게. 기다려.」 이 모든 사람들이 가버릴 때까지...

 

클라리사와 샐리 사이에 언제나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그 옛날의 특별한 감정들이 언제 연기처럼 갑자기 사라졌는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다만 그 두 사람 사이에 언젠가 한 순간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라고 느꼈던 그런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아니, 그런 말들은 이제 아무 뜻도 없었다. 그 옛날 감정의 희미한 메아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흥분하여 몸이 떨리는 기분, 반쯤 취한 기분으로 머리를 빗던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머리핀을 빼어 화장대 위에 놓고 머리를 빗기 시작하니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창밖의 분홍빛 저녁노을 속에서 갈까마귀들이 퍼덕이며 날던 것도.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홀을 가로지르면서 <만일 지금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이리> 하는 심정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느낌 ㅡ 오셀로의 느낌이었고, 그녀는 셰익스피어가 오셀로에게 불어넣었던 만큼이나 강렬하게 그런 심정을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다. 오로지 새햐얀 드레스를 입고 샐리 시튼을 만나러 저녁 식탁에 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49쪽)

 

 

 * * *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는 샐리 시튼과 남녀간의 애정 비슷한 감정을 느낄 만큼 특별한 사이였다. 싱그러운 꽃처럼 모든 게 향기롭게 피어나던 시절엔 그랬다. 그녀는 샐리 시튼 때문에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결혼까지 할 뻔했던 피터조차도 그럴 땐 그녀와 샐리 사이를 가로막는 훼방꾼일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샐리를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샐리는 벽난로 곁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음성은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정한 애무처럼 들리게 했다. 이야기를 듣던 아빠도(그는 그녀에게 빌려 준 책이 테라스에서 푹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한 후로 쉬이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이런 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니!」 그래서 그들은 모두 테라스로 나가 이리저리 걸었다. 피터 월시와 조지프 브라이트코프는 줄곧 바그너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녀와 샐리는 조금 뒤에 처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평생 가장 황홀한 순간이 다가왔다. 꽃이 담긴 돌항아리 곁을 지날 때였다. 샐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꽃을 한 송이 꺾어 들더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온 세상이 거꾸로 도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녀는 샐리와 단둘이 있었다. 선물을 받았는데, 꽁꽁 포장한 선물을 들여다보지 말고 그냥 가지고 있어,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이아몬드나 뭔가 무한히 소중한 것이 겹겹이 싸여 있었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동안 그녀는 살짝 그것을 열어 보았던가, 아니면 그 타는 듯한 광채가, 계시가, 종교적인 감정이, 뚫고 나왔던가! ㅡ 그때 조지프 노인과 피터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별을 보는 거야?」 피터가 말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화강암 벽에 얼굴을 찧은 것만 같았다! 난데 없고, 끔찍했다!(50∼51쪽)

 

 

그토록 소중한 친구였던 샐리가 언젠가부터 클라리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존재로, 또한 서로가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삶의 표층 아래에 도사린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자 삶의 아이러니다.

 

「나중에 올게요.」 그녀는 서로 악수하고 있는 옛 친구 샐리와 피터를 보며 말했다. 샐리는 뭔가 옛날 기억이 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에는 그 옛날의 매혹적인 울림이 없었고, 그녀의 눈은 예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스펀지 백을 가지러 간다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복도를 내달리던 그 시절처럼. 앨렌 엣킨스는 말했었다. 「신사분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러나 모두들 그녀를 용서했다. (중략) 대담하고 무모하고 자기가 모든 일에 중심이 되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능히 그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클라리사는 뭔가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리라고, 때 아닌 죽음이라든가 순교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그녀는 결혼을 했고, 그것도 커다란 단춧구멍만큼 머리가 벗어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 주인과 결혼을 해서,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다고 한다!(236∼237쪽)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오셀로가 했던 말을 버지니아 울프가 클라리사에게 다시 부여한 것은 생각할수록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악당 이아고가 했던 "지금은 그에게 캐롭처럼 맛있는 음식도 머지 않아 땡감처럼 떫은 맛이 날 거야." 라는 말은 클라리사와 피터와 샐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절묘하게 들어맞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땡감처럼 떫은 맛은 알겠는데 캐롭은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글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기가 막힌 맛이 아닐까. 아무튼 기분이 너무 좋을 땐 꼭 '죽여준다'는 느낌이 들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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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2-02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아고의 이간질이 오셀로의 파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작품에서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아고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가짜뉴스가 생각나네요... 시대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위대한 문호의 힘이라 생각됩니다. 글을 읽다보니, 오셀로가 향하는 곳이 베네치아에게는 비극적인 ‘파마구스타 함락‘의 아픔이 있는 키프로스라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베네치아의 아픔과 오셀로의 아픔을 같이 보이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oren님 항상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9-02-02 16:59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가 『오셀로』를 쓴 때가 1601∼1604년 무렵이었는데, 이때는 벌써 오스만 투르크가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을 정도로 세력을 떨칠 때였죠. 『오셀로』의 시대 배경이 1571년에 일어난 역대급 전쟁이었던 <레판토 해전> 직전의 어느 시기, 다시 말하자면 ‘파마구스타 함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한창 전운이 감돌던 위태로운 시기의 어느 한 때였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키프로스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던 <레판토 해전>은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참전해서 왼팔을 잃는 바람에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은 전쟁으로도 기억되는데, 문득 거기가 어디쯤인지 찾아보니 레판토는 그리스의 파트레 만 근처이며 현재는 나브팍토스라 불린다는군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7:01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는 레판토 해전 직전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 못 알았나 봅니다. oren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oren 2019-02-02 17:04   좋아요 1 | URL
제 댓글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군요.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순서는 겨울호랑이 말씀이 맞습니다. <레판토 해전>(1571년>이 있기 전에 ‘파마구스타 함락‘(1570년)이 일어났고, 그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어드메쯤이 『오셀로』의 시대 배경이 아닐까 하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2 17:13   좋아요 1 | URL
^^:) 네 oren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실 시대적 배경에 몇 년의 차이는 작품의 생명력에 비한다면 소소한 문제라 여겨집니다. ^^:) 세익스피어 작품 여러 곳에서 베네치아가 언급된 것을 보면, 베네치아는 지금과는 달리 강대국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oren 2019-02-02 17:32   좋아요 1 | URL
베네치아는 딱 한 번 가봤는데, 이름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정말 환상적인 도시더군요. 수많은 작가들이 베네치아(혹은 베니스)를 무대로 작품을 썼던 것도 이해할 만하고요. 나폴레옹이 거길 차지하고 앉아서 ‘유럽의 응접실‘로 불렀던 것도 그럴 듯하다 싶고요. 전 가끔씩 베네치아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한답니다. 어딜 가나 두루 아름답고, 한때 몹시 번창했고, 세련됐고, 매혹적이고, 역사적이고, 음악적이고, 종합적으로 너무 예술적인 도시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7:39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을 듣고보니 베네치아에 꼭 가보고 싶어 집니다. 괴테도 「이탈리아 기행」에서 베네치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것을 보면 많은 것을 품은 도시라 여겨집니다^^:)

oren 2019-02-02 17:54   좋아요 1 | URL
문득 궁금해서 방금 알라딘 도서 검색에서 ‘베니스‘를 검색해 보니 189종의 책이 나오네요.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 말고도 아주 흥미로운 책들이 많아 보입니다.^^

<릴케의 베네치아 여행>도 있고,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작품도 보이고, 국내 작가가 쓴 <베니스에서 죽다>라는 작품도 보이네요. 심지어는 <책공장 베네치아>라는 책도 있고요.^^

겨울호랑이 2019-02-02 18:21   좋아요 1 | URL
^^:) 이런. 이 정도면 유럽 지식인들에게 베네치아는 관광지가 아니라 순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네치아는 ‘유럽 문명의 성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oren 2019-02-02 19:20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베네치아는 ‘복식부기의 발상지‘로도 기억할 만하네요. 『1494 베니스 회계』라는 책을 보니 문득 그 책을 번역한 분이 제게도 한 권 선물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2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두 분 대화에 낄 수가 없네요 거장이란 고래 사이에 카알 새우 등 터지는 소리! 🎶

oren 2019-02-03 12:39   좋아요 1 | URL
카알 새우는 과연 어떤 맛을 지닌 새우일까요? 너무 궁금하네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2-03 13:27   좋아요 1 | URL
카알 새우는 맛 옵써요 ㅋㅋ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중략)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는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 * *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번역을 하나 발견했다. 토케이라는 단어였다.

토케이? 토케이! 무슨 토끼도 아니고! 우선 그 대목부터 살펴 보자.

 

누군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또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ㅡ 숙녀분들이 자리를 뜨자 신사분들끼리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지. 토케이를 주세요, 루시가 급하게 들어오며 말했다. 댈러웨이 씨가 왕실 저장고에서 가져온, 국왕 하사품인 토케이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토케이가 부엌을 지나왔다. …… 신사분들은 아직 식당에 있었다. 토케이를 마시면서!(216∼217쪽)

 

 -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이 장면의 배경 시간은 1923년 6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이다. 소설의 물리적 시공간은 '런던에서의 딱 하루'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은 그날 아침부터 온종일 파티 준비에 경황이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 첫사랑이었던 피터까지 불쑥 찾아왔으니 그날은 여러모로 정신없는 날이었다. 어쨌든 그 특별했던 유월 하루는 빅벤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차츰 저물기 시작했고,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하나둘씩 댈러웨이 부인의 집으로 모여든다. 그녀가 아침부터 기다려온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다. 세심한 고려 끝에 차려낸 음식들과 군침도는 진귀한 술들이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런 순간에 쨘~ 하고 나타난 술이 토케이였다.

 

여기서 토케이로 번역된 술은 우리가 흔히 '토카이'로 부르는 헝가리 와인이 아닐까 싶은데, 이 책 속에 제법 많이 달리던 주석이 여기서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지나친다. 그래서 굳이 '토케이'를 검색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토케이, 토카이 둘 모두 검색된다. 그러니 더욱 헷갈린다.

 

 

Tokay 미국·영국 [toukéi]

 

1. 토케이 포도(주) (황금색의 양질의 포도(주)); 토케이 지방;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백포도주
2. 토케이 포도(나무)

 

 

 

토카이 와인[Tokay Wine]

 

헝가리 부다페스트 동북쪽, 보드그로그강과 티셔강이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포도로 생산한 포도주.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 루이 14세 때 프랑스 왕실에 선물로 보내졌으며, 이런 인연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와인을 자주 즐겼던 루이 15세가 술자리에서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이 포도주는 군왕의 포도주이며 포도주의 군왕이다”라고 한 일화에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토카이 와인은 수확 시기를 놓쳐 귀부병에 걸린 포도 송이가 썩어갈 무렵의 것을 수확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수확한 포도 송이를 소쿠리에 담아 며칠 동안을 말린 후 포도당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즙을 짜낸다. 그 즙과 정상 포도에서 짜낸 즙을 섞어 토카이 와인을 만들며, 이 과정을 거친 토카이 와인에는 아수(aszu)라는 라벨을 붙인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토케이로 검색하면 어학사전 풀이만 딸랑 나오고, 토카이로 검색하면 무수한 블로그 글들과 함께 다량의 사진들도 함께 검색된다는 점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풍광들과 함께. 왜냐햐면 헝가리에 가 본 사람들은 대개 누구나 한번쯤 토카이 와인을 마셔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도나우 강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즐기기도 한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함께 토카이 와인을 곁들이면서. 나 또한 그랬다.

 

 

 

 - 다뉴브 강 유람선 위에서 처음 맛본 토카이 와인.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추억

 

 

이쯤되니 소설 속에서 다시 만난 토카이 와인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이 과연 토카이를 잘 모르고 그냥 토케이라고 무심하게 번역한 건 아닌지 그게 좀 아리송했다. 토카이 와인이 오래 전부터 '군왕의 포도주이자 포도주의 군왕'이라는 특별한 대접을 받은 술임과 동시에 작가 특유의 부르주아 취향을 봐서라도 저 대목에서 신사분들이 마시는 와인은 분명 '토카이 와인'이 틀림없을 듯한데 말이다.

 

 * * *

 

토케이 때문에 내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른 옛 추억들이 달달하기 그지없던 토카이 와인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과 부다페스트의 멋진 야경 정도에서 뚝~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의식의 흐름은 종종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도 쏜살같이 마구 내달리기 마련이다. 토케이를 만나자 말자 내 머릿속의 날개달린 의식은 갑자기 비상깜박이를 켠 구급차마냥 온데곤데를 정신없이 쏘다니기 시작했다.

 

비상깜빡이를 켠 구급차가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성(城)이었다. 도대체 그 두껍고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책이 토카이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하긴 그 책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대표적인 책이니만큼 토카이가 등장하는 『댈러웨이 부인』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 더구나 그 책에서 다루는 시공간도 '더블린에서의 6월 어느 하루'에 불과하잖아. 런던과 더블린이 그리 멀리 떨어진 도시도 아니고 말이야.

 

마치 오뒷세우스(영어로는 율리시스)가 고안한 '트로이의 목마' 없이는 도저히 그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듯이, 오래 전부터 오지부동인 채로 버티고 선 거대한 성 같은 『율리시스』 앞에 도착한 구급차는 사실 그 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럽고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도 인적이 몹시 드문 그 성 앞에는 그날따라 구경꾼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구급차에서 서둘러 뛰어내린 구급요원은 딸랑 혼자였다. 그는 비상등조차 끌 생각을 하지 못하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율리시스』라는 책의 본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곧장 '방대한 주석'이 달린 후미진 곳으로. 그는 도대체 거기서 무얼 찾아내려는 것일까?

 

그가 응급구호를 위해 『율리시스』에서 찾고자 하는 물건은 '멜랑쥐'였다. 멜랑쥐? 그럼 토케이는 '토끼'의 외국식 발음이었고, 멜랑쥐는 몰캉쥐의 외국식 발음이란 말인가? 아니면 몰랑쥐? 어쨌든 그 쥐는 몰캉몰캉 하거나 말랑말랑하거나 둘 중에 하나겠군. 그런데 멜랑쥐를 과연 어디서 찾아낸단 말인가. 『율리시스』라는 책의 성은 본성(本城) 보다 깊숙히 감춰진 아성()이 더욱 공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 요원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구급차에서 내리자 말자 그는 경비병들의 삼엄한 무장으로 둘러싸인 본성(本城)은 본체만체로 지나쳤다. 그는 곧장 4,463개나 되는 빼곡한 주석들로 가득한 창고 같은 건물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곳엔 경비병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서둘러 '멜랑쥐'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처음 시도에서는 멜랑쥐를 찾는데 실패했다.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니 멜랑쥐가 아주 쉽게 눈에 띌 줄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구급요원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멜랑쥐'를 과연 어디서부터 찾는 게 좋을까.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한참이나 고민하던 구급요원은 의심이 드는 구역부터 집중수색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이번에는 결코 그 쥐를 놓칠 수 없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그런데 왜? 그 쥐한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길래?

 

멜랑쥐는 뜻밖에도 두 번째 수색에서 쉽게 발견되었다. 그 쥐가 서식할 만한 의심스러운 구역들이 몇 군데로 확 좁혀졌기 때문이다. 멜랑쥐는 어쨌든 독 안에 든 쥐였고, 이번에는 틀림없이 붙잡혀서 구급차에 실려갈 운명이었다! 구급요원의 말에 따르면 '멜랑쥐'에 딸린 '주석'에는 오래 전부터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었는데, 여태껏 아무도 그걸 고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마침 『댈러웨이 부인』이 런던에서 파티를 준비하면서 내놓은 토카이 와인이 토케이로 잘못 번역된 사실이 발견되었고, 그 문제가 굳이 이번에 들춰지는 게 마땅하다면 더블린에서 헤인즈와 벅 멀리건이 주문했던 '멜랑쥐'도 이번에 함께 바로 잡혀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더블린에서 주문한 멜랑쥐라니? 그럼 토케이가 토끼가 아니었듯이, 멜랑쥐도 몰캉쥐가 아니고 무슨 마시는 음료라도 된다는 말인가? 구급요원의 말에 따르면 멜랑쥐는 어쨌든 마시는 음료의 일종이 분명하다고 했다. 뒤늦게 자세히 밝혀진 바로는, 그 음료는 특별히 비엔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의 일종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한국 사람들은 흔히 '비엔나 커피'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뭐라고? 기껏 그토록 어렵게 찾아낸 멜랑쥐가 비엔나 커피였다고? 그렇다면 『율리시스』라는 성에 갇혀 그토록 오래 숨어있었던 '멜랑쥐'는 과연 뭐라고 번역이 되어 있었지? 글쎄, 그게 말이지... '혼합주의 일종'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는 군.

 

아하, 이제야 모든 일이 납득이 가는구먼. 버지니아 울프는 '한 잔의 술'을 마시기 위해 런던에 사는 댈러웨이 부인으로 하여금 토카이 와인을 준비하도록 했고, 그걸 우리말로 번역한 분은 토카이 와인을 토케이로 약간 이상하게 번역 했다는 이야기로군. 그 다음에 토케이는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에) 갑자기 멜랑쥐를 불러 냈고, 오래도록 숨어 있었던 멜랑쥐는 알고 보니 몰캉쥐가 아니고 '비엔나 커피'였다는 말이군. 이제야 모든 이야기가 술술 이해되는군.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이 보이기 시작한단 말일세. 그리고 '가슴에 남는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이야기한 구급대원의 서러운 이야기도 이해되고 말일세.(더군다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의식의 흐름 기법'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있었고 말이야.)

 

 * * *

 

어느새 쉰 살을 넘긴 클라리사가 '런던에서 보낸 유월의 어느 하루'를 담은 『댈러웨이 부인』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율리시스』와 여러모로 묘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율리시스』도 블룸이라는 중년 남자가 '더블린에서 보낸 어느 하루'를 그리고 있는 데다가, 두 작품 모두 '의식의 흐름 기법'을 대표하는 것도 몹시 닮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내내 함께 떠올린 작품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두 작품들 사이를 알게 모르게 이어주는 희미한 연결선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토케이와 멜랑쥐가 함께 붙들려 있는 거미줄만큼 내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없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두 책 속에 담긴 우연하고도 사소한 번역의 오류가 이토록 서로를 튼튼하게 이어줄 줄 그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는가.

 

 * * *

 

『율리시스』의 어떤 대목에서 '멜랑쥐'가 등장하는지도 덧붙여 놓는다. 이걸 찾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따로 밝히지 않겠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고 했던가. 내가 도대체 뭘 믿고 '멜랑쥐' 옆에 '해당쪽수'를 빠트리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 잊지 말자, p.775의 교훈을. 아, 참, 비엔나에서 주문했던 '멜랑쥐 사진'도, 자허토르테와 함께.(말투가 또다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닮아가는 군.)

 

──── 나는 '멜랑쥐'165  를 하겠어, 헤인즈가 여급에게 말했다.

 

──── '멜랑쥐' 둘, 벅 멀리건이 말했다. 그리고 몇 조각 버터 바른 스콘 빵과 약간의 케이크도 함께 가져다 줘요.

             그녀가 가버리자 그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 우리는 여길 매우도 나쁜 과자(Damn Bad Cake)를 팔기 때문에 D. B. C.라 부르지. 오, 그러나 자네 데덜러스의 <햄릿> 을 놓쳤군. (204쪽)

 

주석

165) (불어) 혼합주의 일종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4개역판), <제10장. 거리(배회하는 바위들)> 중에서

 

 

 - 비엔나에 갔을 때 직접 주문했던 '멜랑쥐'(왼쪽은 왕가의 주방장이 만든 비엔나의 명물 초콜릿 케익 `자허토르테`)

 

 

덧)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김종건 교수님의 『율리시스』번역은 사실 다른 분들의 새로운 번역을 기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대체불가인 것도 사실이다. 원문 자체가 워낙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쓰인 데다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외하더라도) 내용 자체가 몹시 난해하기 때문에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쉽게 번역하기는 힘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율리시스』에 담긴 3만 개에 가까운 어휘들 중에는 도저히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때로 마주치는 불가항력적인 번역의 난관들은 독자들이 미리 알아서 수용해 주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멜랑쥐'에 대한 번역은 못내 아쉽다. 토카이나 멜랑쥐나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얼마든지 정확한 번역이 가능했을 터이니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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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28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김종건님의 번역본 <율리시스>를 10년 전에 구입해 고이 묵히고 있는 1인! 안녕히 주무십시오 오렌님~ 오렌님 은 추적자 기질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산불조심!!!”ㅋㅋㅋ

oren 2019-01-28 01:10   좋아요 2 | URL
『율리시스』를 읽을 때 그 엄청나게 상세하고 꼼꼼한 주석들에 놀라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동받았던 적이 있었지요. 김종건 교수님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독자들이 그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나 있었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러나 <제4개역판>까지 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눈에 거슬리는 오탈자가 많고, 흔치는 않지만 가끔씩 명백히 잘못된 주석들이 엿보이는 건 못내 아쉽긴 하더라구요.

『율리시스』를 볼 때마다 제 머릿속을 늘 맴도는 ‘아쉬운 번역 하나‘는 Dooooooooooog! 랍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15장에서 `God`를 일부러 뒤집어서 (제 생각으로는 분명히 하느님을 욕하는 뜻으로 표현한) Dooooooooooog!를 김종건 교수님은 `하느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님`으로 번역했는데, 저는 이게 아직도 영 못마땅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알맞는 우리말 번역은 `개새애애애애끼이이이이이!` 가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지요.!

페크pek0501 2019-01-2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작이라 할지라도 율리시스는 너무 묵직해서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댈러웨이 부인 정도의 두께라면 모르겠지만요...ㅋ

oren 2019-01-28 13: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습니다. 『율리시스』만큼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책도 없지요. 그에 반해 『댈러웨이 부인』은 정말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고요. 두 작품 모두 ‘의식의 흐름 기법‘이니, ‘내적 독백‘이니 하는 실험적 기법들로 쓰인 작품이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난해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더군요.

카알벨루치 2019-02-02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명절연휴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 가득 넘치시길 바랍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

oren 2019-02-02 14:32   좋아요 1 | URL
일부러 먼 데까지 오셔서 친절한 명절 인사까지 남겨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 님께서도 설 잘 쇠시고, 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트로이 전쟁이 끝나자 그 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군사들은 마침내 귀국선에 서둘러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들뜬 항해가 무탈하게 마무리되어 오매불망 자신들을 기다리던 가족의 품에 안긴 채, 화려한 꽃다발과 팡파레가 울리는 가운데 <귀국선>과 같은 감동적인 노래까지 곁들여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 얼마나 그렸던가  * * * 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 *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트로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귀향길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는 승리의 주역이었던 오뒷세우스도 끼어 있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자 웅변가이자 지략가였다. 힘으로만 따진다면 물론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와 아이아스 등에 뒤졌지만 말이다.

 

전쟁에서의 그의 무훈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는 전사한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번 드러났다. 저 유명한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 건'을 맞아 죽은 뒤, 그가 지녔던 불후의 무구를 과연 누구에게 줘야 마땅한가에 대한 논쟁이 붙었을 때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용맹무쌍의 아이콘이었던 아이아스였다.(네덜란드 축구팀 '아약스'의 기원이 된 인물이다.) 그가 마침내 꾀많은 오뒷세우스에게 '전쟁에서의 공훈 경쟁'에서 밀려나고, 이내 광분에 빠져 자신의 군대 막사를 마구 짓밟은 끝에 자결하고 마는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를 낳았다. 이 불운한 장군의 내적 갈등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직 내에서의 공훈 경쟁에서 억울하게 패한 사람이 과연 그 조직에 얼마만큼 충성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바로 '아이아스의 딜레마'다.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담긴 사진

 

 

그리스 군대가 맨처음 트로이 정벌을 위해 머나먼 항해를 하는 도중에 벌어진 특이한 사건 하나도 주목할 만하다. 무려(!) 헤라클레스로부터 활을 물려받은 그리스 최고의 특등 사수였던 필록테테스가 렘노스 섬에서 그만 독사에 물렸고, 독이 퍼진 그는 심한 악취를 풍기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스군의 핵심 전력이었지만 도저히 함대에 태울 형편이 되지 못하자 그는 결국 무인도에 홀로 버려졌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렘노스 섬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가 치른 고역들은 실로 끔찍했다. 그야말로 원조 로빈슨 크루소였던 셈이다.

영영 탈출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기적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그를 버리고 트로이 원정을 떠났던 그리스군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그를 꼭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신탁에 따르면 '필록테테스와 그가 헤라클레스로부터 물려받은 활의 도움'이 없으면 트로이아는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원한에 사무친 필록테테스를 교묘히 설득해서 전쟁터로 데려온 인물도 오뒷세우스였다. 아흔 살이 다 된 소포클레스가 비극 경연대회에서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필록테테스』라는 작품 덕분이었다.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

 

 


 - 기욤 기용 르티에르, <렘노스 섬의 필록테테스>, 18세기∼19세기, 루브르 박물관

 

 

트로이 전쟁의 백미였던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구사한 것도 오뒷세우스였다. 그가 트로이 전쟁에서 쌓아올린 온갖 활약상을 두루 접하고 보면 그에게 불가능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토록 꾀많고 지혜로웠던 오뒤세우스도 귀향길에서는 결국 길을 잃고 방황한다. 아테네 여신이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쟁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스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열심히 도왔지만, 트로이가 함락되고 나서 몇몇 그리스인들이 저지른 오만방자한 행동들을 보고는 분노를 느꼈다. 여신의 노여움은 잠잠하던 파도에게 전해졌고, 그리스 함대들은 이내 폭풍에 휘말려 산산조각나고 만다. 아테네 여신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도움을 받았던 오뒷세우스조차 그 화를 피할 수 없었으니, 그가 고향인 이타케로 곧바로 돌아가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나긴 10년 동안의 목숨을 건 귀향 이야기가 눈 먼 음유시인이었던 호메로스의 입으로 전해졌으니 그게 바로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노래한 『오뒷세이아』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누구나 다 아는 빤한 이야기를 너무나 길게 풀어놓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나머지 얘기를 조금이나마 더 흥미롭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밑자락은 깔아주는 게 마땅하다. 오뒷세우스는 그만큼 출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향길에 오른 오뒷세우스가 온갖 고초를 다 겪는 동안에 끊임없이 마음 속으로 되뇌었던 질문 몇 가지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과연 고향 이타케는 목숨을 걸고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 곳인가." 등등.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그 꾀많던 오뒷세우스도 홀로 방랑하는 틈틈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을까. 물론이다! 그 사람만큼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인물도 일찌기 없었다. 오랫동안 방랑하던 그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비로소 누군가에게 밝힐 기회를 얻었을 때는 '고된 방랑'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가 도착한 섬에는 아름다운 나우시카 공주가 살고 있었고, 그는 이내 궁정으로 초대된다. 파이아케스족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궁금해 하자 그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좋아요.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엇을 나중에 이야기할까요? 

하늘의 신들께서 내게 너무 많은 고난을 주셨으니 말이오.

먼저 내 이름을 말씀드리겠소이다. 그대들도 내 이름을 알도록

그리고 내가 무자비한 날에서 벗어나 비록 멀리 떨어진

집에서 살더라도 여전히 그대들의 손님으로 남아 있도록 말이오.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뒷세우스올시다! 나는 온갖 지략으로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고 내 명성은 이미 하늘에 닿았소.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14∼20행

 

그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다시(!) 밝힐 수 있었다.(이게 포인트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던가.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있었던가. 삼척동자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게 이상할 정도였는데, 오랜 방랑 끝에 이 평화로운 외딴 섬에 당도하고 보니 그의 영광스런 과거는 온데간데가 없었고 그의 이름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외눈박이 거인과 싸울 때처럼 자신의 이름을 속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마침내 위험은 끝나가고 이토록 마음씨 착하고 평화로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가 자신의 신분을 감출 필요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나로서는 자기 나라보다 달콤한 것은 달리 아무것도 볼 수 없소이다.

아닌게아니라 여신들 중에서도 고귀한 칼륍소는 나를 남편으로

삼으려고 자신의 속이 빈 동굴들 안에 나를 붙들어두려 했지요.

마찬가지로 아이아이에 섬의 교활한 키르케도 나를

남편으로 삼기를 열망하며 자신의 궁전에 나를 붙들어두려 했지요.

하지만 그들도 내 가슴속 마음을 설득할 수는 없었소.

이렇듯 누군가가 부모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낯선 나라의 풍요한 집에서 산다 해도

고향 땅과 부모보다 달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라오.

자, 나는 그대에게 내가 트로이아를 떠났을 때 제우스께서

내게 지우셨던 고난에 찬 귀향에 관해서도 말씀드리겠소이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28∼36행

 

 

오뒷세우스는 맨 먼저 '로토스의 열매'를 먹고 사는 족속들을 만난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전우들은 그 달콤한 열매를 먹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한순간에 자신들의 귀향의 목적까지도 잊어 버리는 근본적인 위험에 처한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이들을 억지로 함선들에 태우고 묶어서 항해를 계속한다. 그 다음에 마주친 곳은 외눈박이 괴물들이 사는 '퀴클롭스들의 나라'였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비통한 마음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오만불손한 무법자들인 퀴클롭스들의 나라에 닿았소.

그들은 불사신들을 믿고 아무것도 제 손으로

심거나 갈지 않았소. 밀이며 보리며 거대한 포도송이들로

포도주를 가져다주는 포도나무하며 이 모든 것이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 않지만 그들을 위해 풍성하게 돋아나고,

그러면 제우스의 비가 그것들을 자라나게 해주지요.

그들은 의논하는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으며

높은 산들의 꼭대기에 있는 속이 빈 동굴들 안에 살면서

각자 자기 자식들과 아내들에게 법규를 정해주고

자기들끼리는 서로 상관하지 않아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105∼115행

 

퀴클롭스의 나라들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책에서 별도로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입법자들은 오직 스파르타 사람들의 폴리스에서만, 혹은 소수의 폴리스에서만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해야 할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던 것 같다. 다른 대부분의 폴리스들에서는 이런 일들에 관해 소홀히 취급하였으며,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퀴클롭스들처럼 법을 부여하면서.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 <제9장 윤리학, 입법, 정치체제> 중에서

 

오뒷세우스 일행들은 그 섬에 당도해서 퀴클롭스가 사는 동굴로 들어간다. 거기엔 광주리마다 치즈가 가득하고 우리마다 새끼 양과 새끼 염소로 가득했다. 오뒷세우스는 젖과 치즈와 어린 짐승들을 훔쳐 달아나자는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출타 중인 주인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결국 그들은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의 포로가 되고, 동굴의 입구는 거대한 돌로 막히고, 끼니때마다 부하가 둘씩이나 잡아먹힌다. 그런 와중에도 오뒷세우스는 꾀를 내어 자신이 가져온 '포도주'로 괴물을 유혹한다. 포도주에 맛들인 폴뤼페모스는 점점 더 술이 땡기기 시작한다.

 

'너는 내게 자진하여 그것을 한 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

지금 당장. 그러면 나는 너를 기쁘게 해줄 선물을 주겠다.

물론 퀴클롭스들에게도 풍요한 대지는 거대한 포도송이의

포도주를 가져다주고 제우스의 비가 그것을 자라게 해주지만

네가 준 이것이야말로 가히 암브로시아요, 넥타르로다.'

그자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반짝이는 포도주를 다시 건넸소.

나는 세 번이나 그자에게 포도주를 주고, 그자는 어리석게도 세 번이나

그것을 받아 마셨소. 마침내 포도주가 퀴클롭스의 마음을 에워쌌을 때

나는 그자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걸었소.

'퀴클롭스, 그대는 내 유명한 이름을 물었던가요? 그대에게

내 이름을 말할 테니 그대는 약속대로 내게 접대 선물을 주시오.

내 이름은 '아무도아니'요. 사람들은 나를 '아무도아니'라고

부르지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전우들도 모두.'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즉시 비정하게 내게 대답했소.

'나는 전우들 중에서 맨 나중에 '아무도아니'를 먹고

다른 자들을 먼저 먹겠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접대 선물이다.'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355∼370행

 

 

방금 우리가 들은 '폴뤼페모스와 오뒷세우스의 동굴 속의 대화'야말로 이 글의 핵심이다. 이 짧은 대화 속에 실로 많은 시사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괴물은 오뒷세우스에게 '네 이름'을 말하라고 요구하는데, 오뒷세우스는 '아무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이름이 그럴 수 있는가. 무슨 인디언식 이름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도 아니'는 그리스어로는 우티스(Outis)이고 영어로는 Nobody이다. 결국 '아무도 아니'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오뒷세우스로서는 그 괴물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만이 정말로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그런데 오뒷세우스가 임기응변식으로 얼렁뚱땅 내놓은 이 기막힌 이름이야말로 결국 '신의 한수'였음이 나중에 판명된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서 빨리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폴뤼페모스의 동굴 안에 갇힌 오뒷세우스

야콥 요르단스 (wikimedia commons, 1593∼1678), 17세기 전반경, 푸슈킨 미술관

 

 

여기서 잠깐 오뒷세우스 일행들이 그 바위에 갇힌 동굴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장면으로 살짝 되돌아 가자. 그 장면만큼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로부터 포도주를 연거푸 얻어 마신 외눈박이 퀴클롭스는 이내 잠들고, 그 순간을 위해 미리 올리브나무 말뚝을 준비한 오뒷세우스 일당은 끝이 벌겋게 단 말뚝을 움켜잡고 그자의 눈을 찌른다. 피투성이가 된 말뚝을 자신의 눈에서 뽑아 던진 괴물은 이내 주위의 동굴에 사는 퀴클롭스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퀴클롭스 살려! 퀴클롭스 살려!"

 

오뒷세우스가 폴뤼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술잔(기원전 550년경)
(에우리피데스 지음 /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에서 인용)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모여든 퀴클롭스들이

동굴 주위에 둘러서서 무엇이 그자를 괴롭혔히는지 물었소.

'폴뤼페모스!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괴롭혔기에 그대는 신성한 밤에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우리를 잠 못 들게 한단 말이오? 설마 어떤

인간이 그대의 뜻을 거슬러 작은 가축들을 몰고 가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누가 꾀나 힘으로 그대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요?'

힘센 폴뤼페모스가 동굴 안에서 그들을 향해 말했소.

'오오, 친구들이여! 힘이 아니라 꾀로써 나를 죽이려는 자는 '아무도아니'요'

그들은 물 흐르듯 거침없이 이런 말로 대답했소.

'그대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이 아무도 아니고 그대가 혼자 있다면,

그대는 아마도 위대한 제우스가 보낸 그 병(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아버지 포세이돈 왕께 기도하시오."

이렇게 말하고 그들이 떠나가자 내 마음은 웃었소.

내 이름과 나무랄 데 없는 계략이 그들을 속였기 때문이지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401∼414행 

 

이렇게 해서 다른 퀴클롭스들을 교묘하게 뿌리친 오뒷세우스 일행은(그들은 여전히 동굴 속에 갇혀 있다!) 다음날 아침 폴뤼페모스가 동굴 안에 가둬 놓은 숫양들을 풀밭으로 내모는 틈을 이용하여 '양들의 배에 거꾸로 들러붙어' 그 동굴을 빠져나온다. 동굴의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던 눈먼 폴뤼페모스가 오로지 숫양들만 좁은 틈으로 동굴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인질들이 양들과 함께 도망치는 게 아닐까 싶어 숫양들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살아남은 전우들과 함께 서둘러 다시 배에 올라탄 일행들은 그 섬에서 멀어질 때 다시 한번 퀴클롭스를 조롱한다. '퀴클롭스! …… 그대는 제 집에서 손님들을 잡아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래서 제우스와 다른 신들께서 그대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오.' 화가 더욱 돋구친 그자는 큰 산의 봉우리 하나를 뜯어내 오뒷세우스 일행들에게 던져 보지만 배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폴뤼페모스를 조롱하는 오뒷세우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1829년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전우들을 격려하면서 더욱 빨리 노를 젓도록 재촉하는 와중에도 오뒷세우스는 한 번 더 퀴클롭스를 조롱한다. 저 멀리 도망치는 오뒷세우스를 '눈으로는 보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던 폴뤼페모스는 마침내 신에게 기도한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자는 별 많은 하늘을 향해

두손을 들고 포세이돈 왕께 기도했소.

'내 말을 들으소서, 대지를 떠받치시는 검푸른 머리의 포세이돈이시여!

내가 진실로 그대의 아들이고 그대가 내 아버지이심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면 이타케에 있는 집에서 사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뒷세우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해주소서.

그러나 그자가 가족들을 만나고

잘 지은 집과 제 고향 땅에 닿을 운명이라면

전우들을 다 잃고 나중에 아주 비참하게 남의 배를 타고

돌아가게 해주시고 집에 가서도 고통 받게 해주소서!'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제9권 제526∼535행

 

이렇게 해서 외눈박이 거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 오뒷세우스는 다음 여정을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 물론 그의 앞에는 아직도 수많은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다. 폴뤼페모스 때문에 창졸간에 포세이돈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으니 그의 앞길이 어찌 험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폴뤼페모스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아니'었던 오뒷세우스는 차츰 자신의 고향에 가까워 지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된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이 포세이돈에게 부탁했던 대로 고향 이타케에 돌아와서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한다. 자신의 궁궐에는 아내 페넬로페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로 득실거렸고,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위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오뒷세우스는 다시금 '아무도 아니'라는 존재로 잠시 되돌아간 셈이었다.

 

고향 이타케에 도착한 이후로도 지난하게 이어지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은 총 24권에 이르는 『오뒷세이아』의 절반인 12권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돼지를 키우던 에우마이오스가 맨 먼저 옛 주인이 돌아왔음을 알아 채고, 아들 텔레마코스도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지만 아내 페넬로페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알아보는 대단원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이 남아 있었다. 어찌보면 『오뒷세이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불세출의 영웅의 기나긴 '자아 회복 과정'이자 '자신의 존재 증명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한때 자신의 이름이 '아무도 아니'라고까지 말했던 오뒷세우스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가짜 이름을 내세운 것이며, 그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되찾았을 때의 그의 감격은 얼마나 벅찼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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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1-25 1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처음부터 철저히 카알벨루치 님의 글 <제 탓이 아니잖아요!>에 대한 ‘먼댓글‘ 형식으로 기획된(?) 글이다. 그래서 ‘알라딘 상품넣기‘에도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이 추가된 것이다. 나는 황정은 작가가 쓴 최신작인 『아무도 아닌』뿐 아니라 그 작가의 다른 어떤 작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 카알벨루치 님의 글을 통해 그 작품에 실린 8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짚이는 게 있었다. ‘아하, 이 작가는 틀림없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구나‘ 싶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해 봐도 ‘아무도 아닌‘ 혹은 ‘아무도 아니‘와 ‘오뒷세이아‘의 연결 고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내 방식대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내가 쓴 글에 담긴 생각은 ‘100% 순수 창작물‘은 아니다.(특히, 강대진 님의 『그리스 로마 서사시』라는 책에도 ‘아무도 아니‘라는 가짜 이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이 담겨 있다.)

이 글을 올린 직후에 알라딘에서 ‘아무도 아닌‘으로 검색해 본 책들은 딱 세 권이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파울 첼란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루이지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내가 쓴 글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 작품들을 왜 내가 굳이 일부러 거명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이 세 작품을 쓴 작가들도 틀림없이 『오뒷세이아』 속에 나오는 ‘아무도 아니‘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확신이 들어서다. 아니면 말고!

어쩌면 내가 ‘아무도 아닌‘ 걸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연관지어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 어쩌랴.

아니면 말고!

카알벨루치 2019-01-25 17:46   좋아요 2 | URL
ㅎㅎㅎ제 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셨다니 역시 산불이십니다 ㅎㅎ이 방대한 페이퍼, 오렌님의 모든 글은 페이퍼로 보기엔 너무 아까운데 출판의 계획은 없으신지요? ㅋㅋ추천합니다 책내실 것을~이미 작가이신 것은 아닌지...

한번 읽고 넘어가기 아까운 <아무도 아니>페이퍼~좋아요 백만개 보냅니다! 제가 이전에 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란 페이퍼에서도 ‘아무것도 아닌’이란 의미가 나와 제가 쓴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페이퍼와 조금 연결되는 느낌도 있고...십자군전쟁의 <킹덤 어브 헤븐>의 마지막 장면도 계속 생각나고...오딧세이아의 이름없는 ‘아무도 아니’란 의미도 새삼 새롭게 다가오고...이래저래 흥분되는 페이퍼입니다 굿뜨👍👍👍

oren 2019-01-25 19:30   좋아요 0 | URL
카알벨루치 님께서 예전에 쓰셨던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글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게 최승호 시인의 시집 제목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고요. 그리고, 지금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니,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카알벨루치 님꼐서 소개해 주신 황정은 작가의 다음 말 때문이었던 것 같네요.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아무도 아닌‘은 Nobody인데, ‘아무것도 아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도로 들려서 그 어감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결국 그 뉘앙스 차이 때문에 오뒷세우스까지 찾아 나서게 된 것이지요.
* * *
참고로 이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 트릭은 짐 자무시 감독이 <데드맨>이란 영화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악당들에게 잡힌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가 누구와 함께 왔냐는 질문에 ‘노바디Nobody와 함께‘ 라고 답하는데, 악당들은 동행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이 ‘노바디‘는 그와 동행하던 인디언의 이름이었다. 잠시 후 방심한 악당들은 이 노바디의 화살에 쓰러지게 된다. 하지만 이 트릭 역시 그냥 속임수는 아니다. 그가 동행하는 ‘노바디‘는 사실상 그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deadman이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주인공이 쏘는 총에 유명한 총잡이들이 모두 쓰러지는 반면, 그들의 총알은 노상 빗나가는 것도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강대진, 『그리스 로마 서사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중에서

hnine 2019-01-25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미 위에 써주셨듯이 오디세이라는 작품의 핵심은 오디세우스가 긴 여정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Nobody라고 칭한 것은 oren님 말씀대로 ‘신의 한수‘라고 할 수 있는게, 자기의 신분과 정체를 드러내면 절대 위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라고 판단되었다면 ‘somebody‘가 싶은 명예와 신분욕을 포기하고 nobody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지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중에
I‘m nobody! Who are you?
Are you nobody, too?
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어요.
책은 아니지만 nobody가 주제어로 등장하기에 덧붙여 봅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은 읽었습니다만 읽으면서 저는 오디세우스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네요.)

oren 2019-01-25 19:32   좋아요 0 | URL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저런 대목이 있군요. 그녀의 시는 언뜻언뜻 접하기만 해도 몹시 심오해서,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hnine 님 덕분에 이렇게 또 자극을 받는군요.^^

겨울호랑이 2019-01-25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oren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오뒷세이아>가 다시 떠오릅니다.^^˝) 동시에, 그때는 생각하지 않았던 몇 가지 생각이 나서 적어봅니다. <오뒷세이아>라는 작품은 주인공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과업‘의 기록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오뒷세우스는 죽기 싫어하는 아킬레우스를 전쟁에 끌어들여 죽게 만들었으며, 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동료 아이아스를 자살하게 만들었고, 그의 계략으로 트로이의 수많은 시민을 죽음으로 끌어들였으니, 트로이를 지지한 신들의 노여움을 사는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렇기에, 헤라가 내린 광기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12과업을 수행해야 했던 헤라클레스처럼 <오윗세이아>는 오뒷세우스의 속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폴뤼페모스와의 일화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어 저주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는 필멸의 인간이 가진 ‘휘브리스‘가 보여진다고 여겨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뒤에 일어난 행복한 결말은 그리스 비극에서 보여지는 ‘신-인간‘의 화해구도와도 유사점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네요. 근거는 없습니다만, oren님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oren 2019-01-25 21:16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 말씀해 주신 내용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오뒷세우스의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트로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워 죽겠는‘ 웬수 같은 인물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겨울호랑이 님께서 지적해 주신 여러 죄과들 말고도 오뒷세우스가 벌인 ‘교활한 음모와 지략‘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인물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겠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교활한 시쉬포스의 아들‘이라고 자주 놀려대기도 했고요.(시쉬포스는 아우톨뤼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가 라에르테스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녀를 범한다. 그래서 그가 오뒷세우스의 실부(實父)라는 주장도 있다. - 천병희 주석)

그런데,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나 오늘날 우리가 지니는 도덕감정과 유사한 ‘선과 악에 대한 가치 판단‘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싶어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이라는 게 결국은 신들의 보살핌이나 노여움의 결과이거나,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니까요. 심지어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조차도 오뒷세우스에게 죽을 꺼라는 예언을 예전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기도 하고요.

그분은 이 모든 일들이 나중에 이루어져서
내가 오뒷세우스의 손에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
그래서 나는 늘 큰 용맹으로 무장한, 키카 크고
준수한 사내가 이리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 한 왜소하고 쓸모없고 허약한 자가 나를 포도주로
제압한 다음 눈멀게 했구나. 자! 이리로 오라, 오뒷세우스여!

‘휘브리스‘는 그리스 비극의 핵심주제이기도 한데, 제 생각으로는 오뒷세우스의 고난에서는 그런 요소가 덜하거나 거의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가 아무리 심한 고초를 겪었다고 하더라도요. 비록 폴뤼페모스를 눈멀게 한 죄과로 포세이돈으로부터 노여움을 샀지만, 어쨌든 그는 파멸하지 않고 끝끝내 살아 돌아와 영광스런 과거를 되찾았으니까요.

겨울호랑이 2019-01-25 21:38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처럼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에 씌여진 그리스 비극의 요소들이 그보다 한참 앞선 시기에 생생하게 묘사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다만, 폴리페모스 눈을 찌르고 조용히 가면 그만인데, 굳이 자신의 명성을 떨치고자 교만한 마음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오뒷세우스의 모습에서 인간의 교만이 느껴져 이를 연관지어 봤습니다. 그냥 스쳐가는 생각이기에 정확한 의견은 될 수 없겠지만, oren님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oren 2019-01-25 21:5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와 그리스 비극이 쓰여진 시대 사이에는 엄청난 세월의 간극 만큼이나 ‘가치관의 변화‘도 컸고, 문학의 형식이나 주제까지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뒷세우스라는 인물도 그에 따라 당연히 ‘아주 훌륭한 영웅‘에서 ‘교활한 악당‘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었겠고요.
* * *
『오뒷세이아』에서 그는 현명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많고 언변에 능한 탁월한 인물로 그려져 있고 그에 관한 비판적인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카베』, 『오레스테스』, 『트로이아의 여인들』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 등에서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하고 약삭빠른 인물로 그려져 있다.(천병희 번역, 『일리아스』, 718쪽)

timeroad 2019-02-0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히 총평]
어 명함이 없네! (오뒷세우스가)
나름 이유는 절실하지만 그것이 ‘노바디‘
-가끔 뵈요.
늘 고맙습니다.

oren 2019-02-07 22:39   좋아요 0 | URL
timeroad 님의 반갑습니다.
함축이 많은 댓글이라 뭐라 알맞은 대댓글을 달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암튼 고맙습니다.^^
 
190119Sat - 190121Mon

 

 

어제는 syo 님의 글을 읽다가 내 눈에 번쩍 뜨이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내가 발견한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눈이 마음의 모양을 결정하듯, 마음이 눈의 기능을 여닫는다. 우리의 눈은 그저 있는 것을 보는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고, 당연히 보일 것이라 믿는 것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syo 님의 저런 멋진 표현을 읽는 동안에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자연』이라는 수필에서 언급했던 '투명한 눈알' 이었다.(예전에 내가 읽었던 책에는 마침 커다란 눈알을 그린 '삽화'까지 실려 있어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었다. 사람의 얼굴 전체가 눈알로만 묘사된 특이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 딸린 부연 설명은 지금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크랜치가 1839년에 그린 「투명한 안구」 삽화.)

 

syo 님의 이토록 멋진 표현을 근사하게 뒷받침할 만한 '에머슨의 어록'이 어디 없을까 하고 얼른 뒤져 봤더니 마침 그럴싸한 인용문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얼른 '가위질'을 해서 댓글창에 오려붙였었다. 내가 좁디좁은 댓글창에 무람없이 우겨넣은 내용은 (구차스런 반복이지만) 다음과 같았다.

 

 

인생은 염주처럼 기분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기분들을 하나씩 겪어나갈 때, 그들은 그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칠하는 다채색 렌즈라는 것을 드러낸다.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하기 때문이다.(17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경험> 중에서

 

혹은,

 

인생이란 한 줄에 꿰인 염주와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며 지나갈 때, 이들은 모두 각기 독특한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고, 각기 자기의 초점 속에 들어오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형형색색의 만화경의 렌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이창기 편역, 『자신감』, <경험> 중에서

 

 

이처럼 내가 다른 글에서 언젠가 한번쯤 인용했던 문장들을 다른 사람들의 댓글창에서 '얼른' 되살려 내는 건 내가 지닌 고약한 버릇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댓글창이 너무 좁다는 생각 때문에 '똑같은 원문의 다른 번역' 하나는 일부러 오려붙이기에서 생략했더랬다. 너무 크게 오려붙이면 어쨌든 흉해 보이니까 말이다. 그때 생략했던 부분을 여기에 마저 끌어오면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유리구슬을 꿰듯 여러 감정mood을 줄줄이 엮어가는 것이다.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저마다 그만의 색조로 세상을 비추고 그만의 초점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빛깔의 렌즈와 같다. 우리는 구슬을 꿰듯 그 갖가지 감정들을 하나씩 통과해 간다.

 

에머슨의 에세이 <경험>에 나오는 글귀다. 그해 봄 일기에 이 에세이를 써내려가던 에머슨은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젖어 있었다. 전적으로 '정직하게만' 인생을 묘사하기로 맘먹고 예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곡진하게 체험하면 어떤 확신을 갖게 되듯이, 인생무상의 세계관으로 삶을 바라보았다.(117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에머슨 가족의 한 사람이 되다> 중에서

 

syo 님의 글을 얼마쯤 장식해 줄 수도 있는 댓글창의 '부연 설명'으로는 어쩌면 이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한번 떠오른 '투명한 눈알'에 대한 이미지가 떠날 줄을 모르고 계속 눈에 밟혔다. 에머슨이 『자연』에서 '투명한 눈알'에 대해 남겼던 말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던가, 에머슨과 줄곧 한 동네에 살았던 평생의 절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그걸 또 어떻게 발전시켰던가, 그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각인된 '투명한 눈알'은 결국 어떤 책의 주석에서 그 비밀의 '연결 고리'를 드러냈던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 부지런히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소로우의 책에 담긴 표현들은 아주 빠른 시간에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그것부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물들이 우리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경로에서 벗어나 있기보다는 우리의 정신과 눈을 그쪽으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젤리(jelly)에도 보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 눈 자체에도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39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다.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응한다.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40  풍경은 우리가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ㅡ한 티끌의 더도 아니라 ㅡ의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한 특정한 언덕 꼭대기에서 보게 될 실제 사물들은 다른 사람이 보게 될 사물과는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것만큼 상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진홍참나무가 이미 당신 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ㅡ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것은 거의 볼 수 없다. ……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것만 본다. 풀 연구에 빠져 있는 사람은 가장 멋진 평원의 참나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말하자면 걸어다니다가 자신도 모르게 참나무들을 밟아 뭉개버리거나 기껏해야 그 나무들의 그림자만 본다. …… 그렇다면 지식의 다른 분과에 주목하려면 우리의 눈과 정신이 얼마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는가! 시인과 자연주의자들은 얼마나 다르게 사물을 바라보는가!(216∼218쪽)

 

주석)

39) 소로우는 여기서 사람의 안구가 젤리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의 생각)

여기서 소로우가 '젤리'를 떠올린 까닭은 아마도 스승이자 친구였던 에머슨의 수필 속에 언급된 '투명한 안구'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이 글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40)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에서 나온 표현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6. 가을의 빛깔들> 중에서

 

 

소로우는 이런 문장을 쓰고 나서도 그게 다소 미진했던지 이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또다시 꺼낸다. 나는 영어 표현에서 '눈의 사과'라는 말이 있는 줄은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과나무는 구약성서에 적어도 세 군데에서 언급되고, 그 열매는 두세 번 더 나온다. 솔로몬은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라고 노래한다. 또한 "나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라는 구절도 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형상 중 가장 귀한 부분은 이 과실을 본떠서 "눈의 사과"7 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도 사과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율리시스는 알퀴노오스"8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배와 석류, 그리고 훌륭한 과실을 맺은 사과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호메로스에 따르면 탄탈로스가 딸 수 없었던 과일 중에 사과가 들어 있었는데 바람이 항상 불어 가지를 그에게서 멀어지도록 했다.(225쪽)

 

주석)

 

7) 눈의 사과(apple of the eye): 눈동자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이다. 소로우는 시각을 인간이 가진 감각 중 가장 귀한 것으로 간주한다.

 

8) 알퀴노오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스케리아에 있는 파이아키아의 왕으로 나우시카의 아버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7. 야생사과> 중에서

 

 

이 정도면 소로우의 생각은 얼추 재확인된 셈이다. 이제는 에머슨의 문장을 찾아 옮길 때다. 이 작업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삽화가 담긴 페이지만 찾으면 되니까. 그렇게 해서 찾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헐벗은 대지 위에 서 있을 때 ㅡ 나의 머리는 쇠락한 공기로 멱감고 무한한 공간 속으로 들쳐올라간다 ㅡ 모든 천박한 자기 집착은 사라진다. 나는 하나의 투명한 안구 a transparents eyeball가 된다. 나는 무(無)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우주적 존재의 흐름이 나를 관류한다. 나는 신의 일부가 된다. ……나는 억압되어 있지 않은 영원한 미의 애호자가 되어 있다. 미개지에서 나는 거리를 걷거나 마을에 있을 때보다 한층 소중하고 친밀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특히 먼 지평선상에서, 사람은 자신의 천성과 같은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21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신문수 옮김, 『자연』, <자연> 중에서

 

 

그런데 '투명한 안구'가 담긴 문장들이 그리 쉽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에머슨의 문장들이 대체로 그렇다. 심지어 선문답 같은 문장들도 많다. 그렇다면 다른 책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싶어 또다른 책을 뒤져 봤다. 거기엔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하나의 투명한 눈알이 된다. 나는 무(無)로 된다. 나는 만물을 본다. 우주적 존재의 흐름이 나를 들고 잇따라 돈다. 나는 신의 일부분 또는 한 조각에 불과하다. 가장 가까운 친구 이름도 그때엔 아무 상관없는 바람 소리 같이 들린다. 형제나, 마음이 통하는 벗, 주인이나, 사내종이라 하는 것이 그때엔 아무런 가치 없는 귀찮은 것이 된다. 나는 끝없는 불멸의 아름다움의 애호가가 되어 있다.(31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정광섭 옮김,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 신념의 철학』, <자연에 대하여> 중에서

 

 

사정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고 보니 소로우의 '젤리'와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 사이의 거리가 차츰 더 멀어지는 기분도 떨치기 어렵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어떤 책에서 이 둘의 관계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가. 혹시 『주석 달린 월든』이라면 그런 내용이? 그 책엔 주석만 해도 무려 1,400여개가 붙어 있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거기서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걸 찾아내기 전에 내 눈알부터 먼저 빠져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나는 혹시 모를 후일(?)을 대비해서 그 책의 여백에 일부러 '나만의 색인'을 별도로 만들어 두지 않았던가. 그걸 이용한다면 찾아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색인만 하더라도 '에머슨'이 무려 55쪽에 걸쳐, 다시 말하자면 『월든』의 거의 전 영역에 아주 골고루 분포되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이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일일이 해당 페이지를 뒤져볼 수밖에. 그렇게 해서 찾아낸 대목은 애석하게도(!) 그 책의 맨 끝에 있었다.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기다리는 날에야 비로소 새벽이 찾아온다.108  앞으로는 더 많은 날에 새벽이 찾아올 것이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에 불과하다.(446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 중에서

 

주석)

 

108. 가능성을 포착하려면 가능성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소로우는 「가을의 색깔」에서 "뭔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뭔가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일기에서는 "엽총을 갖고 다니는 사람, 즉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사냥감이 눈에 훨씬 잘 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루 종일 숲을 배회하는 사람은 뭔가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숲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는 것을 우연히라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우드척을 사냥해 먹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은 생전에 우드척을 한 번도 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영국 시인 존 던의 산문집『비상시의 기도문』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씌어 있다. "종소리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들린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주석달린 월든』말미에 끄적여 놓은 나만의 색인. 『주석달린 월든』에서 에머슨이 등장하는 대목은 이 사진으로는 '21곳'인데, 틈날 때마다 보강한 덕분에 지금은 '55곳'에 이른다.)

 

그런데 정말 애석하게도(!) 여기까지 왔는데도 나의 궁금증은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에서 시작되어 소로우의 '젤리'로 이어진 연결 고리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읽었단 말인가. 혹시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에서? 그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더이상 어디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책에서는 소로우가 에머슨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얼마나 세세히 다루었던가.그래서 얼근 그 책을 펼쳐 들고 <찾아보기>를 통해 재빠르게 뒤져봤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과 소로우의 연결 고리를 기어이 찾아내고 말리라는 굳은 결심까지 다지면서. 그러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단지 희미한 흔적들만 여럿 발견했을 뿐.

 

 

『자연』이 전개하는 논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에드워드 헤일이 말한 바 있듯이 이 책의 대부분은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헨리 소로우의 반응은 달랐다. 소로우는 『자연』을 조심스럽게 읽어가며 그간 어떻게 표현할지 갈팡질팡하던 내적 방황을 끝낼 수 있어 매우 흡족했다. 그 책을 "과거의 권위를 모두 허무는 급진적인 아나키즘"의 한 표현으로 보고 좋아했다. "인간은 자연이 비추어주는 거울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 에머슨의 주장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소로우는 '경험'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훗날 그는 『자연』이란 책을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노라고 고백했다.(20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첫 만남> 중에서 

 

 

 

여기까지 오고 나니 조금은 허탈하다. 내가 이틀 동안이나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과 소로우의 '젤리'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는데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미리부터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너무 확신하거나 지레짐작했던 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걸 누가 알겠는가.

 

 * * *

 

 

 

 

 

 

 

 

 

 

 

 

 

 

 

 

*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과 소로우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조금 무리했더니 결국 눈알이 아프다. '눈의 탐욕'이 문제다.

 

눈의 탐욕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234쪽)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235쪽)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제36절 호기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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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24 0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책을 이런 식으로도 읽어낼 수 있군요.... 정말 oren님께는 끝없이 배웁니다.

많이 감탄하고 돌아섭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01-24 10:02   좋아요 2 | URL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한다‘는 생각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알고 있던 내용일 뿐인데, syo 님이 때마침 그걸 좀 더 환하게 밝히기 위해 제게 ‘성냥불‘을 그었던 게 아니었나요? ㅎㅎ

syo 2019-01-24 10:08   좋아요 3 | URL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달지, 믿음이나 신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달지 하는 이야기는 oren님 말씀대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고, 딱히 저작권(?)이 없을만큼 공지의 사실이라 저는 더 무람없고 부담 없이 제가 느낀대로 한 줄 띡 쓸 수 있었지요.

그런데 oren님이 세밀한 관찰과 집요한 하이퍼링크를 통해 쓰신 글을 보니 비슷한 생각이라도 글로 표현되는 데서 깊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입니다.

저는 그저 성냥만 그었는데 oren님께서 산불을 내셨어요ㅎㅎㅎㅎ

oren 2019-01-24 11:49   좋아요 2 | URL
산불이 났다손 치더라도 맨 처음 불을 낸 사람은 결국 ‘성냥을 그은 사람‘입니다. 곁에서 모박불을 좀 쬐려다가 결국 산불로 번졌다 한들 그 누가 보잘 것 없는 성냥개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겠습니꽈!
* * *
나는 내 눈으로 보았다 :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있고, 풍부하며 자유롭게 태어난 본성의 소유자들이 30대에 이미 ‘망쳐질 정도로 독서‘했던 것을.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서 ㅡ ‘생각‘을 주기 위해서 ㅡ 누군가가 그어주어야만 하는 성냥개비였던 것을. ㅡ 아침 일찍 날이 밝을 때, 모든 것이 신선할 때, 자기 자신의 힘이 아침놀을 맞을 때,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 ㅡ 이것을 나는 못된 습관이라고 부른다! ㅡ ㅡ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카알벨루치 2019-01-24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불이야 불이야 산불이야 산불!!! 🔥 🔥 🔥

oren 2019-01-24 12:57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은 어째서 제 글에서 ‘산불‘을 보실 수 있다는 말입니꽈! 저는 단지 오손도손 모여 앉아 감자라도 함께 구워 먹을 따스한 모닥불이나마 피워봤으면 했는데 말입지요..
* * *
밝은 불꽃이여, 삶의 모습을 비춰주는
그대의 사랑스럽고 친근한 공감을 내게 거절하지 마소서.
내 희망이 아니면 무엇이 그처럼 밝게 치솟아 올라가겠는가?
내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 밤에 그처럼 낮게 가라앉았겠는가?

왜 그대는 우리의 벽난로와 응접실에서 추방당했는가?
모두에게 환영받고 사랑받던 그대였는데,
이제 우리 삶에서 흐릿하기 그지없는 흔한 빛에 비하면
당시 그대의 존재는 얼마나 환상적이었던가?
그대의 밝은 불빛은 우리 영혼과 마음에 맺는다고
신비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너무나 대담하게 비밀까지도?
그래, 우리는 이제 희미한 그림자조차 흔들리지 않고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불기운이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롯가에 앉아 있어 안전하고 안정되기는 했지만
더 큰 열망을 품지 못한다.
아담하고 실용적인 난로 옆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자리 잡고 앉아
잠에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어둑한 과거에서 걸어나와 모닥불의 휘청대는 불꽃 옆에
우리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 『주석 달린 월든』 중에서

카알벨루치 2019-01-24 13:3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