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9Sat - 190121Mon

 

 

어제는 syo 님의 글을 읽다가 내 눈에 번쩍 뜨이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내가 발견한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눈이 마음의 모양을 결정하듯, 마음이 눈의 기능을 여닫는다. 우리의 눈은 그저 있는 것을 보는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고, 당연히 보일 것이라 믿는 것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syo 님의 저런 멋진 표현을 읽는 동안에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자연』이라는 수필에서 언급했던 '투명한 눈알' 이었다.(예전에 내가 읽었던 책에는 마침 커다란 눈알을 그린 '삽화'까지 실려 있어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었다. 사람의 얼굴 전체가 눈알로만 묘사된 특이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 딸린 부연 설명은 지금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크랜치가 1839년에 그린 「투명한 안구」 삽화.)

 

syo 님의 이토록 멋진 표현을 근사하게 뒷받침할 만한 '에머슨의 어록'이 어디 없을까 하고 얼른 뒤져 봤더니 마침 그럴싸한 인용문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얼른 '가위질'을 해서 댓글창에 오려붙였었다. 내가 좁디좁은 댓글창에 무람없이 우겨넣은 내용은 (구차스런 반복이지만) 다음과 같았다.

 

 

인생은 염주처럼 기분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기분들을 하나씩 겪어나갈 때, 그들은 그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칠하는 다채색 렌즈라는 것을 드러낸다.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하기 때문이다.(17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경험> 중에서

 

혹은,

 

인생이란 한 줄에 꿰인 염주와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며 지나갈 때, 이들은 모두 각기 독특한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고, 각기 자기의 초점 속에 들어오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형형색색의 만화경의 렌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이창기 편역, 『자신감』, <경험> 중에서

 

 

이처럼 내가 다른 글에서 언젠가 한번쯤 인용했던 문장들을 다른 사람들의 댓글창에서 '얼른' 되살려 내는 건 내가 지닌 고약한 버릇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댓글창이 너무 좁다는 생각 때문에 '똑같은 원문의 다른 번역' 하나는 일부러 오려붙이기에서 생략했더랬다. 너무 크게 오려붙이면 어쨌든 흉해 보이니까 말이다. 그때 생략했던 부분을 여기에 마저 끌어오면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유리구슬을 꿰듯 여러 감정mood을 줄줄이 엮어가는 것이다.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저마다 그만의 색조로 세상을 비추고 그만의 초점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빛깔의 렌즈와 같다. 우리는 구슬을 꿰듯 그 갖가지 감정들을 하나씩 통과해 간다.

 

에머슨의 에세이 <경험>에 나오는 글귀다. 그해 봄 일기에 이 에세이를 써내려가던 에머슨은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젖어 있었다. 전적으로 '정직하게만' 인생을 묘사하기로 맘먹고 예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곡진하게 체험하면 어떤 확신을 갖게 되듯이, 인생무상의 세계관으로 삶을 바라보았다.(117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에머슨 가족의 한 사람이 되다> 중에서

 

syo 님의 글을 얼마쯤 장식해 줄 수도 있는 댓글창의 '부연 설명'으로는 어쩌면 이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한번 떠오른 '투명한 눈알'에 대한 이미지가 떠날 줄을 모르고 계속 눈에 밟혔다. 에머슨이 『자연』에서 '투명한 눈알'에 대해 남겼던 말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던가, 에머슨과 줄곧 한 동네에 살았던 평생의 절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그걸 또 어떻게 발전시켰던가, 그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각인된 '투명한 눈알'은 결국 어떤 책의 주석에서 그 비밀의 '연결 고리'를 드러냈던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 부지런히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소로우의 책에 담긴 표현들은 아주 빠른 시간에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그것부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물들이 우리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경로에서 벗어나 있기보다는 우리의 정신과 눈을 그쪽으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젤리(jelly)에도 보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 눈 자체에도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39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다.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응한다.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40  풍경은 우리가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ㅡ한 티끌의 더도 아니라 ㅡ의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한 특정한 언덕 꼭대기에서 보게 될 실제 사물들은 다른 사람이 보게 될 사물과는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것만큼 상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진홍참나무가 이미 당신 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ㅡ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것은 거의 볼 수 없다. ……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것만 본다. 풀 연구에 빠져 있는 사람은 가장 멋진 평원의 참나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말하자면 걸어다니다가 자신도 모르게 참나무들을 밟아 뭉개버리거나 기껏해야 그 나무들의 그림자만 본다. …… 그렇다면 지식의 다른 분과에 주목하려면 우리의 눈과 정신이 얼마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는가! 시인과 자연주의자들은 얼마나 다르게 사물을 바라보는가!(216∼218쪽)

 

주석)

39) 소로우는 여기서 사람의 안구가 젤리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의 생각)

여기서 소로우가 '젤리'를 떠올린 까닭은 아마도 스승이자 친구였던 에머슨의 수필 속에 언급된 '투명한 안구'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이 글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40)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에서 나온 표현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6. 가을의 빛깔들> 중에서

 

 

소로우는 이런 문장을 쓰고 나서도 그게 다소 미진했던지 이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또다시 꺼낸다. 나는 영어 표현에서 '눈의 사과'라는 말이 있는 줄은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과나무는 구약성서에 적어도 세 군데에서 언급되고, 그 열매는 두세 번 더 나온다. 솔로몬은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라고 노래한다. 또한 "나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라는 구절도 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형상 중 가장 귀한 부분은 이 과실을 본떠서 "눈의 사과"7 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도 사과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율리시스는 알퀴노오스"8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배와 석류, 그리고 훌륭한 과실을 맺은 사과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호메로스에 따르면 탄탈로스가 딸 수 없었던 과일 중에 사과가 들어 있었는데 바람이 항상 불어 가지를 그에게서 멀어지도록 했다.(225쪽)

 

주석)

 

7) 눈의 사과(apple of the eye): 눈동자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이다. 소로우는 시각을 인간이 가진 감각 중 가장 귀한 것으로 간주한다.

 

8) 알퀴노오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 스케리아에 있는 파이아키아의 왕으로 나우시카의 아버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7. 야생사과> 중에서

 

 

이 정도면 소로우의 생각은 얼추 재확인된 셈이다. 이제는 에머슨의 문장을 찾아 옮길 때다. 이 작업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삽화가 담긴 페이지만 찾으면 되니까. 그렇게 해서 찾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헐벗은 대지 위에 서 있을 때 ㅡ 나의 머리는 쇠락한 공기로 멱감고 무한한 공간 속으로 들쳐올라간다 ㅡ 모든 천박한 자기 집착은 사라진다. 나는 하나의 투명한 안구 a transparents eyeball가 된다. 나는 무(無)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우주적 존재의 흐름이 나를 관류한다. 나는 신의 일부가 된다. ……나는 억압되어 있지 않은 영원한 미의 애호자가 되어 있다. 미개지에서 나는 거리를 걷거나 마을에 있을 때보다 한층 소중하고 친밀한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특히 먼 지평선상에서, 사람은 자신의 천성과 같은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21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신문수 옮김, 『자연』, <자연> 중에서

 

 

그런데 '투명한 안구'가 담긴 문장들이 그리 쉽게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에머슨의 문장들이 대체로 그렇다. 심지어 선문답 같은 문장들도 많다. 그렇다면 다른 책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싶어 또다른 책을 뒤져 봤다. 거기엔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하나의 투명한 눈알이 된다. 나는 무(無)로 된다. 나는 만물을 본다. 우주적 존재의 흐름이 나를 들고 잇따라 돈다. 나는 신의 일부분 또는 한 조각에 불과하다. 가장 가까운 친구 이름도 그때엔 아무 상관없는 바람 소리 같이 들린다. 형제나, 마음이 통하는 벗, 주인이나, 사내종이라 하는 것이 그때엔 아무런 가치 없는 귀찮은 것이 된다. 나는 끝없는 불멸의 아름다움의 애호가가 되어 있다.(314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정광섭 옮김,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 신념의 철학』, <자연에 대하여> 중에서

 

 

사정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고 보니 소로우의 '젤리'와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 사이의 거리가 차츰 더 멀어지는 기분도 떨치기 어렵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어떤 책에서 이 둘의 관계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가. 혹시 『주석 달린 월든』이라면 그런 내용이? 그 책엔 주석만 해도 무려 1,400여개가 붙어 있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거기서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걸 찾아내기 전에 내 눈알부터 먼저 빠져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나는 혹시 모를 후일(?)을 대비해서 그 책의 여백에 일부러 '나만의 색인'을 별도로 만들어 두지 않았던가. 그걸 이용한다면 찾아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색인만 하더라도 '에머슨'이 무려 55쪽에 걸쳐, 다시 말하자면 『월든』의 거의 전 영역에 아주 골고루 분포되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이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일일이 해당 페이지를 뒤져볼 수밖에. 그렇게 해서 찾아낸 대목은 애석하게도(!) 그 책의 맨 끝에 있었다.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기다리는 날에야 비로소 새벽이 찾아온다.108  앞으로는 더 많은 날에 새벽이 찾아올 것이다. 태양은 아침에 뜨는 별에 불과하다.(446쪽)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 중에서

 

주석)

 

108. 가능성을 포착하려면 가능성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소로우는 「가을의 색깔」에서 "뭔가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뭔가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일기에서는 "엽총을 갖고 다니는 사람, 즉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사냥감이 눈에 훨씬 잘 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하루 종일 숲을 배회하는 사람은 뭔가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숲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는 것을 우연히라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우드척을 사냥해 먹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은 생전에 우드척을 한 번도 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영국 시인 존 던의 산문집『비상시의 기도문』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씌어 있다. "종소리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들린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주석달린 월든』말미에 끄적여 놓은 나만의 색인. 『주석달린 월든』에서 에머슨이 등장하는 대목은 이 사진으로는 '21곳'인데, 틈날 때마다 보강한 덕분에 지금은 '55곳'에 이른다.)

 

그런데 정말 애석하게도(!) 여기까지 왔는데도 나의 궁금증은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에서 시작되어 소로우의 '젤리'로 이어진 연결 고리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읽었단 말인가. 혹시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에서? 그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더이상 어디서 그 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책에서는 소로우가 에머슨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얼마나 세세히 다루었던가.그래서 얼근 그 책을 펼쳐 들고 <찾아보기>를 통해 재빠르게 뒤져봤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과 소로우의 연결 고리를 기어이 찾아내고 말리라는 굳은 결심까지 다지면서. 그러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단지 희미한 흔적들만 여럿 발견했을 뿐.

 

 

『자연』이 전개하는 논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에드워드 헤일이 말한 바 있듯이 이 책의 대부분은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헨리 소로우의 반응은 달랐다. 소로우는 『자연』을 조심스럽게 읽어가며 그간 어떻게 표현할지 갈팡질팡하던 내적 방황을 끝낼 수 있어 매우 흡족했다. 그 책을 "과거의 권위를 모두 허무는 급진적인 아나키즘"의 한 표현으로 보고 좋아했다. "인간은 자연이 비추어주는 거울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 에머슨의 주장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소로우는 '경험'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훗날 그는 『자연』이란 책을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노라고 고백했다.(20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첫 만남> 중에서 

 

 

 

여기까지 오고 나니 조금은 허탈하다. 내가 이틀 동안이나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과 소로우의 '젤리'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는데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미리부터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너무 확신하거나 지레짐작했던 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걸 누가 알겠는가.

 

 * * *

 

 

 

 

 

 

 

 

 

 

 

 

 

 

 

 

* 에머슨의 '투명한 눈알'과 소로우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조금 무리했더니 결국 눈알이 아프다. '눈의 탐욕'이 문제다.

 

눈의 탐욕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그 특징상 보는 것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세계를 독특하게 감지하며 만나게 하는 경향을 표현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원칙적으로 실존론적-존재론적인 의도를 가지고 해석하지, 좁게 인식함에 방향을 잡지 않는다. 인식이 이미 일찍부터 그리스 철학에서 "보려는 욕망"에서부터 개념파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234쪽)

"봄"의 기이한 우위를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디 눈에 딸린 것이 보는 것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감관으로 무엇을 알려고 할 때에도 "보다"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들으라, 얼마나 번쩍이는지', '맡으라, 얼마나 빛나는지', '입을 대라, 얼마나 찬란한지', '만져라, 얼마나 눈부신지.'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보라고 말하고 이 모든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따라서 눈만이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빛나는지' 할 뿐 아니라, '소리를 들어보라', '냄새를 맡아보라', '맛을 보라', '얼마나 단단한지 만져보라' 하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을 '눈의 탐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감관들도, 비슷한 점에서 인식함이 문제가 될 때면 눈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봄의 기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235쪽)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제36절 호기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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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24 0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책을 이런 식으로도 읽어낼 수 있군요.... 정말 oren님께는 끝없이 배웁니다.

많이 감탄하고 돌아섭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01-24 10:02   좋아요 2 | URL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한다‘는 생각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알고 있던 내용일 뿐인데, syo 님이 때마침 그걸 좀 더 환하게 밝히기 위해 제게 ‘성냥불‘을 그었던 게 아니었나요? ㅎㅎ

syo 2019-01-24 10:08   좋아요 3 | URL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달지, 믿음이나 신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달지 하는 이야기는 oren님 말씀대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고, 딱히 저작권(?)이 없을만큼 공지의 사실이라 저는 더 무람없고 부담 없이 제가 느낀대로 한 줄 띡 쓸 수 있었지요.

그런데 oren님이 세밀한 관찰과 집요한 하이퍼링크를 통해 쓰신 글을 보니 비슷한 생각이라도 글로 표현되는 데서 깊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입니다.

저는 그저 성냥만 그었는데 oren님께서 산불을 내셨어요ㅎㅎㅎㅎ

oren 2019-01-24 11:49   좋아요 2 | URL
산불이 났다손 치더라도 맨 처음 불을 낸 사람은 결국 ‘성냥을 그은 사람‘입니다. 곁에서 모박불을 좀 쬐려다가 결국 산불로 번졌다 한들 그 누가 보잘 것 없는 성냥개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겠습니꽈!
* * *
나는 내 눈으로 보았다 :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있고, 풍부하며 자유롭게 태어난 본성의 소유자들이 30대에 이미 ‘망쳐질 정도로 독서‘했던 것을.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서 ㅡ ‘생각‘을 주기 위해서 ㅡ 누군가가 그어주어야만 하는 성냥개비였던 것을. ㅡ 아침 일찍 날이 밝을 때, 모든 것이 신선할 때, 자기 자신의 힘이 아침놀을 맞을 때,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 ㅡ 이것을 나는 못된 습관이라고 부른다! ㅡ ㅡ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카알벨루치 2019-01-24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불이야 불이야 산불이야 산불!!! 🔥 🔥 🔥

oren 2019-01-24 12:57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 님은 어째서 제 글에서 ‘산불‘을 보실 수 있다는 말입니꽈! 저는 단지 오손도손 모여 앉아 감자라도 함께 구워 먹을 따스한 모닥불이나마 피워봤으면 했는데 말입지요..
* * *
밝은 불꽃이여, 삶의 모습을 비춰주는
그대의 사랑스럽고 친근한 공감을 내게 거절하지 마소서.
내 희망이 아니면 무엇이 그처럼 밝게 치솟아 올라가겠는가?
내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 밤에 그처럼 낮게 가라앉았겠는가?

왜 그대는 우리의 벽난로와 응접실에서 추방당했는가?
모두에게 환영받고 사랑받던 그대였는데,
이제 우리 삶에서 흐릿하기 그지없는 흔한 빛에 비하면
당시 그대의 존재는 얼마나 환상적이었던가?
그대의 밝은 불빛은 우리 영혼과 마음에 맺는다고
신비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너무나 대담하게 비밀까지도?
그래, 우리는 이제 희미한 그림자조차 흔들리지 않고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불기운이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롯가에 앉아 있어 안전하고 안정되기는 했지만
더 큰 열망을 품지 못한다.
아담하고 실용적인 난로 옆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자리 잡고 앉아
잠에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어둑한 과거에서 걸어나와 모닥불의 휘청대는 불꽃 옆에
우리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 『주석 달린 월든』 중에서

카알벨루치 2019-01-24 13:3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