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닥잠

 

 

  길 떠나면 뜻 하지 않은 사건 하나쯤은 생겨줘야 제격이다. 여행담은 평범하지 않을수록 오래 기억되고, 그 기억의 갈래들은 깨어지는 삶의 리듬에 윤활유가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고, 심하게 로망에 젖었던 파리에 대한 첫인상은 실망감이었다. 대책 없이 자유로운 도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도로에 흩어진 각종 비닐봉지, 휴지, 꽁초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단정했던 런던 거리와 자꾸만 비교되는 것이었다. 겨우 한 번 스친 눈썰미로 이른 실망에 닿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내게 파리의 첫인상은 기대 이하였다.

 

  그에 대한 파리의 보복이었을까. 도시 외곽 호텔에 짐을 풀었다. 잠시 밖에 나오면서 카드키를 방안에 둔 채 문을 닫아 버렸다. 자정 즈음이라 호텔직원들은 퇴근했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꼼짝없이 한뎃잠을 자야 할 신세였다. 우리 일행을 운전해주던 버스기사 아저씨 두 분도 나처럼 카드키를 방안에 두고 나왔단다.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들 방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아무리 여유 공간이 있다 해도 쉽지 않은 선의였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잠시나마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며 내 입장을 변명하던, 민폐를 자초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한 순간이 떠올라 복합적으로 울컥해지는 것이었다.

 

 

  그날 밤, 가이드가 동분서주하며 구해준 여유이불을 바닥에 깔고 잠을 청했다. 내 방이 아니고, 침대 위도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따뜻한 잠자리였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가이드 역시 곁방 잠을 잤단다. 운전기사 두 분께 잠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가이드 방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내 문제로도 피곤했을 텐데 잠자리까지 편치 않았던 가이드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순간의 실수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그 민폐를 보듬어 안는 것 또한 개인의 몫인데 쉬운 일은 아니다. 잠자리 내어준, 모녀처럼 다정하던 직장 동료사이라던 두 분께 지면이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유럽의 커플들 뒤태를 몰카짓하는 것이었습니다.

       핸드폰 사진이라 건질 게 별로 없습니다. ㅠ

 

1. 밀라노 엠마누엘2세 갤러리아에서 바라본 두오모 성당

 

 

 

2. 피렌체 베키오다리 근경

 

 

3. 파리 몽마르뜨 사크레쾨르 성당 

 

 

4. 로마 콜로세움 광장 앞 어린 연인 - 비둘기 심정이 곧 나였다!

 

 

5. 로마 스페인 광장 계단 - 아직은 물병 만큼의 거리가 있는 커플

 

 

6. 로마 마차 경기장 건너 - 중년만큼의 저 여유

 

 

7. 런던 하이드파크의 남남 커플 

 

8.런던 버킹검 궁전앞  

 

9. 하이델베르크 아지매 커플 

 

10.하이델베르크 네카 강 - 때론 개와의 커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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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6-2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잠자리였군요. 여행지에서는 꼭 뜻밖의 일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는 측면도 있구요. 저도 앙코르와트 갔을 때 한밤에 호텔에서부터 약간의 차질이 일어나 두어시간을 헤매었어요. 방 바꾸고 어쩌고 그러는 바람에 ㅎㅎ 같이 갔던 부부와 아들들의 넉넉한 배려로 고마웠었지요.

유럽의 사랑스러운 커플들~~~ 그것도 뒷모습!! 멋져요. 폰이라도 사진 모두 잘나왔네요. 비둘기가 팜므님 심정이라니 ㅎㅎㅎ 빵 터져요. 또또 후기 차츰 기다리고 있을래요. ^^

앗참, 환상이라고 하시니 급생각난 단어! 제가 유럽 가고 싶다니까 울딸이 엄마는 유렵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전 깨끗한 거리 그런 걸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닌데... 하도 많이 들었잖아요.ㅎㅎ 근데 요즘 제 체력 같으면 어딜 못 다닐 정도에요. 왜 이렇지ㅠㅠ 정신없이 뻗어선 이제 일어났네요. 뭔가 체력부터 길러야 될 것 같아요. ㅎㅎ

팜므느와르 2013-06-26 11: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두 시간 씩이나 헤매다니, 연약한 프레님껜 무리였겠어요.
유럽 아들은 서비스 정신이 우리만 못해요. 아쉬운 게 없어서겠지요?

커플들 참 부럽더군요. 우리 청춘들도 비주얼은 좀 딸려도 갸들처럼 뭐 자유로워도
용서하겠어요. 내 아들, 내 딸만 아니면 된다 심뽀~~ㅋ

파리가 좀 더럽다는 정보를 저는 갖고 있지 않아서 이런 심정적 낭패를ㅋ
더럽혀줘야 청소부도 할 거리 있을 거 아냐, 갸들 논리는 그런 것 아닐까요.

꺅, 덧글 저장하려는데 로긴을 안 했네요. 이런 뒤지럴스런^^*





Jeanne_Hebuterne 2013-06-2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지에서는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며칠을 보내기도 하고, 혼자 또 며칠을 보내기도 했어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편도 티켓이 있다는 것과 당장 숙소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 제 삼의 눈을 통해 너무나도 많이 들여다본 거리가 익숙한데 돌아가면 다시 다른 익숙함이 자리 잡을 거란 사실. 팜므 느와르님도, 그러셨을까요? 팜므 느와르님이 풀어주실 도시의 인상도 궁금합니다.(어쩐지 이 다음, 언젠가 다른 페이퍼로 풀어 주실듯한 느낌!)


기억이 가물거려 많은 것을 잊었는데 아직도 어느 거리의 빨래 냄새, 또각거리던 발걸음 소리, 외국어 방송은 선명합니다. 프라하의 지하철 냄새, 런던의 꾸물꾸물하던 하늘, 함부르크의 내 기분같이 변덕스런 날씨. 거기다 팜므 느와르님은 커플 사진을 추가하셨군요! 양해를 구하고 찍으면 이런 사진이 안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누군가의 배경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시는 팜므 느와르 님의 솜씨를 비추어 주신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6-26 11:31   좋아요 0 | URL
진작에, 몇 번이나 유럽 여행을 했을 에뷔님.
님처럼 제가 좀 섬세한 감각을 지녔더라면 아주 멋드러진 여행기를 썼을 거예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마이 건조하고, 눈썰미는 없는데다, 어리바리해서 제대로 뭘 보고 느낀다는 게 불가능했어요.

테른님의 감각을 훔쳐 오고 싶다는 생각을 여행 내도록 했지 뭡니까.

제 흔적이 님의 시간 여행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어요.^^*

다락방 2013-06-2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여행가서 근사한 사진을 찍어 오셨네요.
물병 만큼의 거리가 있는 커플, 남자의 등이 근사해요. 운동한 남자 같아요. (이런것만 보다니..orz)
풍경들이 하나같이 근사한데, 혹 외국의 누군가가 서울에 와서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면 그 누군가도 이곳의 풍경을 근사하다고 생각하려나, 하고 궁금해지네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34   좋아요 0 | URL
핸드폰 사진이라 근사할 것까지야 ㅋ
실은 작년에 사진 강좌 3개월 들었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어요.
지금은 카메라 조작법도 몰라요.

사진을 알고 사진을 찍어야 스트레스 안 받을 것 같아요.

마자요. 물병 남자 등짝이 후덜덜하다고 저도 잠깐 생각했어요.
당근 우리 풍경도 근사하다고 갸들이 생각하리라 믿사옵니다.
단 비주얼 면에서는 자신할 수 없다는 ㅋ

blanca 2013-06-2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너무 좋아요. 특히 1,2번은 작품 같아요. 무척 당황하셨겠어요. 그래도 격하게 부러워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3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일번 사진이 제 개인적으로 젤로 다 맘에 들어요.
왜냐면 그날 비가 적당하게 와 주어서 저 사진을 멀리서 찍을 수 있었거든요.
모두 갤러리아에 대피해 있는데, 유독 저 커플이 빗 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비주얼이 끝내주더군요. 비록 뒤태이긴 했지만.ㅋ

블랑카님도 아그 좀 더 키우시면 또 떠나실 수 있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6-2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파리에서 음악 공부 하던 놈인데 일주일에 한번은 꼬박꼬박 편지를 써서 보내던 놈이 있었는데 항상 하는 얘기가 파리 거리는 더럽다, 였습니다. ㅎㅎ 더럽긴 더러운가 봅니다..ㅎㅎㅎㅎㅎㅎ 이노 잘 살고 있나 모르겠네ㅛ...

다크아이즈 2013-06-26 11:39   좋아요 0 | URL
더러벘어요 ㅋ 파리...
곰발님도 친구 찾아 이 기회에 빠리 한 번 가보시어요.
음악하던 친구 분 기관지 다 망쳤을지도 몰라요. 시내 더러버서...
파리가 엄청 작은 도시였다는. 런던에 비해 마이 작아 보였어요.
작지만 위대한 일등 관광지 이미지...

라로 2013-06-2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들어오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왔어요!!!
대전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요~~~ㅋ
유럽가서 커플들에 눈도장을 찍으셨군요!!! 멋져요~~~. 다 작품 같아요!!!>.<
언니가 예전에 프랑스로 가셨어야 했는데,,,,이런 감성을 숨겨놓고 계셨으니~~~.
암튼 저도 파리의 거리가 지저분 한 것에 놀란 일인인데 얼마전 BBC 방송을 듣는데
파리지엔느들이 관광객을 위해서 길을 청소하진 않겠지만 좀 더 친절하게 관광객을 대할거라고 하던데
혹 그런 혜택 받지 못하셨는지???불어만 사용하지 않고 영어도 사용해 줄거라고 결의를 했다고 하던데 아직???
유럽은 역시 안 추울때 가야 하는 것 같아요,,,저는 추울 때 갔으니까 가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네요!!!
어쨌거나 빨리 후기 시리즈로 올려주세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47   좋아요 0 | URL
울 시아님은 답글 다시는 것도 미안할 정도.
넘흐 바쁘시리라 생각해요. 힘 내요, 힘

형편이 좋았더라면 그 시절 데가 유학 갔을까요.
친구 중에 유학 간 애들 두 셋 되는데 갸들 소식도 궁금하긴 하네요.

마자요, 거리는 더럽히라고 있는 거고 청소부는 치우라고 있는 마인드처럼 보였어요. 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니 영어로 친절을 베풀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영어보다는 불어로 지껄이는 게 파리에서는 듣기에 좋더군요. ㅋ

이건 뭐 후기가 아니라 횡설수설 단상이 될 것이에요. ㅠ


여행

순오기 2013-06-2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드키를 두고 외출하면 저런 낭패가 따르는군요,
그래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훈훈한 마음씀씀이에 감동먹은 행복한 여행이네요.

유럽의 커플들~ 카톡으로 봤던 사진을 알라딘에서도 만나니 반갑네요.
유럽여행은 꿈꾸지만 실현은 보장할 수 없으니 팜므님 후기에 열광하는 거 보이죠?^^
연인들의 뒷모습~ 미셀 투르니에 <뒷모습> 부럽지 않은데요, 전시회 해도 되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49   좋아요 0 | URL
카드키에 대한 개념을 상실한 일인이었지요.
저 많이 띠리하지요?

순오기 언냐도 할 수 있어요. 결심하면 안 되고, 여행은 그냥 떠나야 되더라구요.
우리 2년 뒤 미쿡은 예정 대로 ㅋ
글고 뒷모습은 당근 투르니에 뒷모습 보고 벤치마킹한 걸요. ^^*

세실 2013-06-2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힘든 일 겪으셨네요. 이런..... 당시엔 힘드셨겠지만 벌써 소중한 추억으로 미소 가득 담으셨을듯! 카드키는 늘 핸드백에 소지 ㅋㅋ
이 사진 보는데 문득 달콤한 키스 하고 싶어라~~~~~
아 부럽다^^

다크아이즈 2013-06-26 11:51   좋아요 0 | URL
당시에도 그리 힘들진 않았어요. 세실님
속으로 좋은 단상 하나 건졌구나, 이런 쾌재를 불렀다는
다만 당황한 건 사실이었어요.

나두 백주대낮에 광장에서 비주얼 좋은 놈으로다가 키스나 한 번 해봤으면ㅋ

페크pek0501 2013-06-2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여행을 그리고 멋진 사진을 담아 오신 일을 축하드립니다.
역시 사진은 좋은 볼거리예요. 눈을 즐겁게 해 줘요. ^^

다크아이즈 2013-07-04 10:04   좋아요 0 | URL
페크언니 잘 계시지요?
제 삶이 어영부영, 흐지부지, 되는대로이다 보니 서재질도 두서가 없답니다.
잘 들어오지 못하니(? 아니 안 하니) 안부 여쭈기도 민망하네요.
어쨌든 서재 구경갈게요.^^*
 

 

 

 

 

 

 

1. 민주화라는 말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

  아이돌 그룹의 모 멤버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뱉은 한 마디 말 때문에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단다. 의심할 바 없이 기성세대인 나는 논리적 오류로 이어진 저 말 뜻도 모르겠고, 왜 사람들이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개성을 존중하는데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장난을 해석하느라 골머리만 아팠다.

 

 

  추이를 관망한 이제야 무슨 말인지 감을 잡겠다. 민주화라는 말이 특정 집단에겐 그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부정적이고 치졸한 의미로 쓰인단다.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란 숭고하고 긍정의 의미인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 성향을 지향하는 한 사이트에서는 그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상대를 비하하거나 시비걸때 ‘민주화’라는 말을 쓴단다. 조롱의 의미로 ‘저 녀석 민주화 당했네’, ‘이 자식 민주화시켜야 겠어’ 라고 하거나, 네티즌 글을 ‘비추천’할 때도 ‘민주화’란 말로 대신한단다.

 

 

  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화 운동은 조롱거리로 전락시키고, 인권 유린마저 유희로 생각하는 집단들의 사이트가 활발히 운영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민주화된 사회를 증명하고도 남는데, 왜 그들은 비겁하게 ‘민주화’라는 말을 그토록 폄훼할까. 온갖 불합리와 각종 비리와 말할 수 없는 비열함의 세계를 엮어가는 기성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은 너무 쉽게 생을 환멸이나 유희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화이건만 왜곡된 그것은 이제 내 편이 아니거나 내 뜻과 다른 것일 때 비하하는 말로 전락하게 생겼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실체는 전혀 민주화되지 않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몸짓은 전혀 정의롭지 않은 현실이 그들을 저토록 극단적인 생각의 장으로 내몰게 한 건 아닐까. 숭고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전파하지 못한 기성의 한계에 대한 반발이 이런 현상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곱씹을수록 머리만 무거워진다.

 

 

 

2. 색깔 있는 사람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 언변에 능한 이는 자공이었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자주 회자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자공이 묻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하냐고. 공자가 대답한다. 좋은 사람 아니라고.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떠한지 여쭤본다. 공자는 다시 답한다. 역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연스레 인간관계에 많은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청소년 시기에 왕따 때문에 극단적 행위를 하거나, 사회에 나가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건 그만큼 관계망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얽히고설킨 현실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긴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이라면 그는 정치꾼이거나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만의 색깔이냐 향기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걸 애써 숨기려 하는 그들은 애매모호한 중립의 도덕성을 내세워 ‘나는 이쪽입니다’ 대신 ‘나는 기회주의자입니다’라는 비겁의 실리를 택한다.

 

 

  나만의 견해가 있다는 건 뭐든 좋다는 식의 꼼수부리는 것보다는 진솔하다. 비록 당파성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더라도, 좋은 걸 좋다하고 나쁜 걸 나쁘다 말하는 건 공자가 바라던 바였다. 가장 나쁜 예는 좋은 것은 좋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나쁜 사람에게 욕 좀 먹으면 어떠랴.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고, 나쁜 사람으로부터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건 명예스런 일이다.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절대다수이다. 악덕한 사람들이 내는 나쁜 소리 정도는 거부할 수 있어야 공자가 말한 좋은 사람 대열에 낄 수 있는 것 아닌가.

 

 

 

3. 장그래의 선물

 

  5월은 감사의 달, 마음을 주고받느라 바쁘다. 특히, 젊은이가 중년이상에게 할 선물 때문에 고민한다면 만화책『미생』을 추천할 만하다고 한 선배가 말한다. 당신 아들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연작인 그 책을 한두 권 선물하면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부담을 갖지 않으면서도 만족하게 된단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로 나뉘게 되겠지만, 대개 받은 쪽은 나머지 시리즈 권을 사거나 검색해서 읽게 된단다. 공감이 절로 된다. 좋은 만화는 좋은 사색을 낳고 나아가 좋은 사람까지 낳을 터이니.

 

 

  한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미생은 어린나이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꿈꿨지만 실패하고 평범한 인턴사원이 된 ‘장그래’의 직장 생활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바둑에 빗댄 에피소드이지만 고수가 등장해 직장인의 처세에 대해 훈계하거나 세상을 향해 단순 일갈하는 내용은 아니다. 좋은 어른의 가치, 개별자의 존귀함, 나아가 공감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완전한 삶을 향해 ‘아직 덜 살아있는’ 나를 깨쳐가는 ‘미생’에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 캐릭터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가장 큰 이유라고 작가 윤태호는 말한다. 누군가의 싸움 현장이 창밖으로 보이면 호기심에 구경할 순 있다. 나와 무관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싸움의 대상이 내가 아끼는 사람인데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사건 현장으로 뛰쳐나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불안과 공포가 곧 만화의 캐릭터가 되는데 독자들이 장면마다 스며드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네’라고 독자가 느끼는 건 플롯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 때문이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 주변이 보이고 만물 안에 든 내 모습도 보인다. 작가는 신출내기 직장인 장그래를 통해 그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데 배움이 있고 훈계하지 않는데 깨달음이 있고, 각 인물의 미세한 인과관계까지 독자와 호흡하려는 그 캐릭터 때문에 사람들은『미생』을 지지한다. 곧 영화도 개봉한다니 설렘만으로도 족하다.

 

 

 

4. 뒷모습 넘어 마음

 

  뒷모습이 때론 앞모습보다 많은 걸 보여준다. 그걸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뒷모습보다는 앞모습만 신경 쓴다. 예뻐진다면 친구랑 똑같은 얼굴이어도 좋으니 제 개성을 팔아 미모 지상주의에 편승하고, 돈이 된다면 잘난 인간들 앞에서 비굴해도 좋으니 제 품위를 죽여 물질 만능주의 곁자리를 예약한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도서관에서「위대한 개츠비」독서및 영화 토론수업을 했다. 가치관이나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청소년 초입 시기라 접근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원작 번역 소설도 그들에겐 버거울 수 있는데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신작 영화는 나이 제한에 걸려 개봉관에서 볼 수도 없었다. 책은 축약본을 읽어도 좋다고 타협하고, 영화는 디브이디를 활용하기로 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그런지 기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었다. 그 중 원작에 충실한 로버트 마코비츠 감독 것을 택했다.

 

 

  책과 영화를 접한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개츠비가 답답해죽겠단다. 반어법이라면 몰라도 제목대로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인정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은밀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그토록 빠른 부를 축적한 면에서는 다른 부도덕한 등장인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단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한 여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돈으로라도 여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뒷모습까지 순수한 사랑을 한 사람이란다.

 

 

  상처나 파멸과 친구하는 건 누군가의 뒷모습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본 앞모습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제 지고지순함으로 사랑하는 이의 약점마저 끌어안은 개츠비야말로 갑갑하지만 위대한 남자였다. 그는 제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넘어 심성마저 다사로운 사람이었다. 전상보다 후상, 후상보다는 심상이라 했다. 개츠비가 전상과 후상을 넘어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마음결 때문이다. 보이는 앞, 안 보이는 뒤보다 더 중요한 건 속 깊은 성정이라는 걸 개츠비는 씁쓸한 죽음으로 증명한 셈이다.

 

 

 

5. 관심의 크기는 언제나 다르다

 

  덜 가진데다 피해의식마저 있는 악동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대처할까? 객관적 영향력이 큰 대상을 물고 넘어지면 된다. 제 이름을 드날리고 싶은 신진학자가 흠 있는 학계의 대가를 공략 대상으로 삼거나, 나 혼자 덤터기를 쓰기 싫어 약점 있는 거물급을 물귀신 작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하루라도 관심을 끌지 못하면 배알이 꼴리는 스타일이다. 핵 카드와 로켓포 발사로 세계의 정세가 자신에게 멀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며,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로 주변국을 긴장으로 몰아넣는 몽니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을 조장하는 이슈를 담보로 그의 인민을 통제하고 길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곧 그의 치욕을 의미한다.

 

 

  이번 한미동맹 60주년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은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부각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도에 의하면 그 시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 상태보다는 시리아 사태에 더 집중한 걸로 되어 있다. 실무책임자 존 케리 국무장관은 시리아 사태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러시아로 날아가 버렸다. 이스라엘에 저항해야 한다는 아랍권의 대동단결이 그들에겐 더 큰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온전히 한반도 문제에 그 질문이 할당된 게 아니라 시리아 사태와 미군 내부의 성폭행 문제도 언급될 정도였다. 우리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다.

 

 

  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관계는 신뢰의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 국제협력 등 21세기형 글로벌동맹으로 발전했다고 청와대는 자체 평가한다. 이런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한쪽만의 일방적 메아리이기 때문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무심하고 그것이 상처인지조차 모르는 한쪽이 자화자찬하는 사이, 관심을 빼앗긴 김정은은 소위 열을 받았나 보다. 사흘 연속 동해로 미사일을 쏘아대며 제 몽니를 뉴스 한 줄로라도 장식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이래저래 관심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라는 생존 본능이다.

 

 

 

 

6. 인생은 갑을 관계

 

  ‘갑을’ 관계가 화젯거리이다. 몇몇 우월적 입장을 앞세운 자들의 막말이나 횡포가 상식을 넘어서자 억압되었던 갑을 문화에 대한 불만 표출이 집단적으로 온라인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부담스러운지 공공기관과 백화점 등에서 갑을 관계 표기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본질과는 먼 대처 방식이라 별로 달갑지 않다.

 

 

  갑을이란 용어는 처음엔 단순한 익명의 표기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와 나’이면 어떻고 ‘A와 B’이면 어떻고 ‘사과와 오렌지’면 어떻고 심지어 ‘나와 너’이면 어떻단 말인가. 임의로 출발했을 그 용어가 우리 사회 밑바탕을 관장하는 계급의식으로 점차 왜곡·변질된 것에 씁쓸할 뿐이다.

 

 

  각각 우월적 지위와 아쉬운 입장으로 대변되는 갑을 관계는 따지고 보면 기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매순간 의식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 삶 자체는 갑을 관계의 총화이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여러 관계망에다 유교적 관습 및 상부하달식 기업문화 등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단 한시라도 자유인이 된다는 건 어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가 ‘을’이라고 생각한단다. 당연한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우월적 입장이 되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아쉬운 입장이 되어 서운하고 갑갑한 일을 당하다 보면 피해의식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약자에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부당함은 언제나 약자의 것인데다, 그 부당함의 배에 언젠가는 나도 탈 수 있다는 보험 심리 때문이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고 윈윈하는 관계여야 한다. 사회구조상 완벽하게 동급이 될 수 없다면 더 약자에게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진정성과 효율성이 담긴 인격 수양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기업에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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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5-2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팜므 님은 꼼꼼한 리뷰군요. 전 아직 개츠비 안 읽었는데 내용은 대충 알고있습니다. 왜 고전이라는 게 대충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요즘 애들이 보면 답답할 거예요. 개츠비 순애보가 말이죠.
" 이 바보야,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사랑한다고 고백해 !!!!! " 이런 마음.. ㅎㅎㅎㅎㅎ

다크아이즈 2013-05-28 16:18   좋아요 0 | URL

솔까말 단품 페이퍼지 꼼꼼하진 않죠. ㅠ
제가 좀 헐랭합니다.
고전의 정의 - 안 읽었으면서 내용을 알고, 그래서 읽은 것 같은 책
이 아닐까요.
곰발님껜 위대한 개츠비 왠지 안 어울려요. 독서력 딸리는 저도 얼마나 슴슴하게
읽혔는데요. ^^*

감은빛 2013-05-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민주화가 어떻게 그런 뜻으로 쓰일 수 있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518 사진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모독하고,
전두환을 칭송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났습니다.
처음엔 그저 어린 나이에 유행에 휩쓸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게,
생각없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행동에 화가 나더라구요.

갑을이란 말이 유행이더라구요.
강준만 선생께서는 언제 준비해두셨다가 글을 쓰셨는지.
정말 놀랄만한 타이밍에 책을 내셨어요!

다크아이즈 2013-05-28 16:22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반갑습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해서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 하루 종일 당황스럽더군요.
변질된 그 말의 의도를 야무지게 활용한다는 그 사실에 더 충격 먹었습니다.
어린 갸들 책임이 아니라 기성인 우리 책임이란 게 문제지요.
아직 모든 게 너무 멉니다. ㅠ

2013-05-28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5-29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군요. 말장난도 어느정도라야죠. 기성세대 책임이 크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ㅠ 드디어 내일 ㅎㅎ 송정바다 발 담글 준비도 해오셔요.

다크아이즈 2013-05-29 23:18   좋아요 0 | URL
발은 내륙에서 온 분들께 양보하고, 전 과감히 몸을 담글게요. 우화홧~~
프레님 콧소리 불어 발음 상상하면서 잠을 청하겠어요.
샹송이면 더 좋고^^*

순오기 2013-05-30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공연히 분주하다고 서재 마실도 못하니 댓글도 안 남겼네요.
그래도 내일 반갑게 만나요, 우리~ 송정바다에서!^^

다크아이즈 2013-05-29 23:20   좋아요 0 | URL
조용히 미친듯이 분주하게?!, 뭐 저도 그랬어요.
알라딘 마실 나오기도 힘들던데요. 저야 게으름도 한몫했지만.
아, 언니의 기가 필요해요. 기대할게요, 조심해서 내려오시어요.^^*

페크pek0501 2013-05-29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문에서 민주화가 다른 뜻으로 쓰인다는 걸 읽고 놀랐어요. 어찌 그런 일이...

그저께 위대한 개츠비, 영화 봤어요. 책으로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영화가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팜 님, 아주 오랜만에 글을 올리신거죠? 쉬셨나요, 바쁘셨나요? ^^

다크아이즈 2013-05-29 23:26   좋아요 0 | URL
페크언냐, 영화가 훨씬 생생하다는 말, 맞아요.
싱겁고 밋밋한 책을 바즈 루어만 식 보여주기로 잘 치환했던데요.
그래서 책보다 이번 영화가 더 재미났어요. 그래도 책도 좋죠, 물론...

바쁘기도 하고, 한 번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푹 쉬어 버린답니다.ㅠ
늘 부침이 있긴 했지요.
저 없는 새, 페크언냐가 이곳 잘 지키고 있었지요?

순오기 2013-06-25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의 새글, 유럽 여행기와 사진 기다립니다~ ^^
 

 

 

 

 

 1. 좋은 사람 개츠비 

 

 

  처음 번역해서 안착한 제목은 원작이 지닌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데 일조한다. 피츠 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도 그런 의미에서 살짝 아쉽다. 개츠비의 일생을 쫓다보면 애초에 기대한 위대한 개츠비는 어디에도 없다. 사나이 개츠비의 허망한 순애보만 있을 뿐이다. 그 짠함을 일러 반어법으로 위대하다고 말해도 나쁘지는 않지만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내게 개츠비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 말리고 싶은 사람, 친구이고 싶은 사람 등으로 각인된다. 하기야 이런 걸 통칭할 때 ‘위대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도 없으니 최선의 번역일 수도 있겠다.

 

 

  재즈 유행, 도덕 해이, 불법 난무, 주가 폭등. 1920년대 초반의 이런 뉴욕 분위기를 이해해야만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물질적 풍요와 세련미와 교양이 전수된 롱아일랜드 해협의 이스트에그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당시 사회의 상징 코드로 봐도 좋다. 1차 세계대전 직후 꿈조차 버거운 젊은이들은 파티와 술, 음악과 자동차 등으로 대변되는 ‘재즈 시대’를 살았다. 돈과 환락의 시대였다.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은 그 시절,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사랑을 위해 물질적 성공을 거두고야 만다.

 

 

  물질적 풍요 앞에서 사랑은 쉽게 무너지고, 허영심으로 제 턱 끝을 장식하는 사람들은 순정을 백 번이라도 배반한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 사랑을 제 희생으로 마감함으로써 허무에 이르는 개츠비도 있고, 그것을 안타까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닉 캐러웨이 같은 사람 또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근본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 사랑도 물질도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조급한 오늘날 내레이터 닉 캐러웨이가 되어 어느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허영심으로 더욱 예쁜 데이지를 못 잊어 연신 술잔을 기울이는 착한 사람 개츠비를 만날 수 있으리니. 누군들 개츠비를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으리. 끝내 버리지 않은 순도 높은 꿈과 환상만으로도 개츠비는 위대하구나.

 

 

 

 

 

 

 

 

 

 

 

 

 

 

 

 

 

2.노동이란 말

 

  우리 사회는 불온한 혐의를 지닌 것들을 못 견뎌한다. 개인의 욕망이나 취향보다 집단의 결속이나 합일이 더 중요하게끔 오래도록 길들여지다 보니 (권력) 집단이 용인하는 것이 아니면 그른 것이 되기 일쑤다. 그 적절한 예로 ‘노동’이란 말을 들 수 있겠다. 단순한 그 말에 깃들인 불온의 혐의 때문에 전지구촌이 5월 1일을 ‘노동절’이라 부를 때 우리는 ‘근로자의 날’이란 희한한 용어로 대체해 부르고 있다. 

 

 

  우리는 노동이란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노동당, 노동투쟁, 노동자와 사용자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사회정치적 의미가 강경하거나 불온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의 혼란 끝에 노동절의 날짜는 5월 1일로 정착했지만 오죽하면 그 기념일 이름은 ‘근로자의 날’에 붙박여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가.

 

 

  근로와 노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을 의미하고,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이 된 데는 사전적 뜻과는 무관한, 단순히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겠지만 따지고 들자면 불쾌한 면도 없지 않다. 낱말의 의미대로라면 부지런히 일한 자만을 위한 날이 근로자의 날이 되고 만다. 그에 비해 본래의 노동절로 되돌릴 경우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확장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노동이라는 말 자체는 원래 신성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노동은 노예 또는 종속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노동절이란 말도 씁쓸하게 와 닿는다. 주인의 생산성을 위해 이만치 일한 대가로 그날 하루만큼은 쉬어도 좋다는 시혜의 느낌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자발적 유희의 노동이나 자신의 계발을 위한 노동이라면 타의에 의해 노동의 휴식을 명받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싱그런 오월을 맞으면서 ‘노동’이란 고매한 가치의 낱말이 이래저래 휘둘리는 걸 보니 아직 내 마음의 오월은 맞을 채비가 덜 되었나보다.

 

 

 

3. 질문의 기술

 

 

  어떤 가게의 과일이 맛있을까? 동네 시장엔 대여섯 군데의 과일 가게가 있다. 처음 몇 번은 그게 그맛이려니 해서 눈에 띄는 아무데나 들른다. 한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한두 군데만 정해놓고 가게 된다. 그 집 과일이 가장 싱싱하고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곰곰 생각하면 그 가게 주인의 응대 방식이 과일을 맛 들게 했다. 소비자로선 이 과일 싱싱해요? 맛있어요? 등의, 하나마나한 질문들을 습관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그때 하수인 주인은 살짝 짜증을 미간에 심거나 심할 경우 싱싱하고 맛있는지 만날 먹어보고 사오는 것도 아닌데 자신인들 어떻게 알겠느냐고 손님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고수일 경우 주인은 준비된 맛보기용 과일을 권하며 순한 낯빛과 부드러운 말로 긍정의 대답을 유도한다. 그 가게 과일이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실은 퉁명스런 집이나 친절한 집이나 그 과일이 그 과일일 뿐인데도 말이다.

 

 

  대개 논쟁은 쓸모없다. 상대 입장에서 ‘네’라고 답하게 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최선의 방법이다. 맨발로 다니고 40살 넘어 대머리가 된 뒤에야 어린 신부를 만난, 일상생활에서는 젬병이었던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설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련한 그는 ‘아니오’라는 말보다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화법을 썼다. 상대편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도록 동의를 이끌어내는 질문을 했다. 상대가 극구 반대하던 사안도 어느새 긍정의 화답을 할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이 되어 동의를 구하는 질문을 했다.

 

 

  내 맘속의 안달은 언제나 상대가 틀렸다고 고집부린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은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심리적 간극을 메우려면 맨발의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부드럽게 질문하면 ‘네’ 하고 상대는 동의하게 되어 있다. 그 단순한 방법을 고수는 실행하고 하수는 거부한다. 맛있는 과일은 과일 가게 주인에게 달려있지 과일 자체와는 별 관련이 없다. 무맛 나는 참외도 꿀맛 나는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다.

 

 

 

4. 어머니, 진화를 거듭하셨다

 

  어버이날이다. 홀로 계신 시모와 친정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매뉴얼은 해마다 똑 같다.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에다, 두 노인이 회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횟감을 떠서 방문하지만 실은 이보다 편한 먹거리 효도도 없다. 현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풍문을 위안삼아 푼돈 몇 푼 민망하게 내밀지만 그 역시 반 이상은 아이들 용돈으로 되돌아온다.

 

 

  아무리 창의력이 바닥난 중년의 일상이라지만 의지만 있다면 이런 식상한 어버이날을 뛰어넘어 뭔가 그럴듯하게 두 노인에게 더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며, 자책하는 모든 회고적 모성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들에 그토록 염증을 내면서도 정작 그 부류에서 나 또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간사한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체험하는 셈이다.

 

 

  팔순 중반을 넘어선, 각각 고관절과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두 노인은 보조 수레나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걷지도 못한다. 그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이 성당 나들이에 나선다. 마리아께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해 평화를 갈구하고 내세를 간청하는 것이, 당신들 스스로 다복하다고 자부하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노친네들은 진작에 알고 있다.

 

 

  ‘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 / 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 더 걸어 들어가지 않고 / 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 / 엎드려버리신다(중략) / 관절이 시큰거려 / 얼른 안겨 / 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 (중략) / 할머니,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

 

 

  문인수 시인의「해녀」를 대하면 신 앞에 철벅 엎드리고 마는, 관절 시큰거리는 두 모성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무릎에 스치는 순간, 의탁하고픈 물결이 있다는 것에 무심한 자식들은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다복하고 거칠 것 없는 자식을 둔 것도 죄인양 두 할머니 오늘도 마리아께 오롯이 제 모든 걸 맡기러 저 언덕배기 넘어 간다. 구루마 밀며 지팡이 짚고서 웃으며 간다.

  오늘은 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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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5-07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해녀'와 마지막 문단에 눈시울 젖네요.
어버이날이라고.. 얄팍하기만 하죠.
그래도 은근 기다리시니 얄팍한 효도라고 부끄럽지만 하구요.
두 어르신이 종교도 같고 연세도 비슷하시군요. 구루마,라는 단어 오랜만에 들어요.
울엄마가 잘 쓰는 단어에요.
개츠비, 전 펭귄 것으로 최근 읽었는데 김영하 번역으로도 읽고싶어요.
영화가 더 기대되어요.^^

다크아이즈 2013-05-27 19:46   좋아요 0 | URL
프레님, 개츠비 두 번 봤는데 여긴 곧 종영될 분위기.
벌써, 오전과 밤 두 번 밖에 상영 안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한 번 더 보고 그댈 만나러 갈 수 있을지요. ㅋ
앗, 하기야 2001년 판 토비 스티븐스 분 개츠비도 봤으니 세 번 채웠네요.
그럼 친구 자격 갖춘 거 맞지요? 핫핫~

2013-05-07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3-05-1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팜님의 결론도 개츠비는 위대하다는 것이군요!!^^ 아님 지가 잘못 읽엇던가~~~^^;;
저는 노동절에 큰아들을 낳았어요. 진정한 노동이였죠~~ 미국은 9월 첫째주 월요일이 노동절이거든요~~다들 저에게 "진정한 노동절을 보낸 사람이 바로 너"라는 말을 했더랬죠~신성하고 고매한 노동을 했던 그 날도 아득한 과거네요~~~^^;;
더 길게 쓰고 싶지만 이동중이리 스맛폰, 특히 아이폰으로 댓글을 다는 것은 벌을 받는 것 같아요~~~ㅠㅠ
내일은 어버이날인데 전 뭘 할지 아직도 결정을 하지 못했어요 ~~~ㅠㅠ 그걸 생각하면 차라리 아이폰으로 댓글다는것을 하루 종일 하는 걸 선택하겠어요~~~ 선택권이 잇다면~~~ㅎㅎㅎㅎㅎ

다크아이즈 2013-05-27 19:52   좋아요 0 | URL
뭐, 실은 찌질하다 말하고 싶은데 그래서 위대하다 뭐 이런 논지 ~~
제가 얼마나 알라딘 못 들어왔는지, 어버이날 얘기가 먼 시간처럼 느껴지니...
이러다 또 알라디너질 시큰둥해질까 걱정이옵니다. 일관되게 뭐 하는 게 없어여ㅠ
힘들고, 지치고, 피곤해서 시간 나면 자여.
시아님 에너지를 분양 받고 싶습니다.
하기야 주면 뭐하노? 지가 잘 챙겨 활용을 해야지. 에휴~~

2013-05-08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5-29 23:35   좋아요 0 | URL
아, 정말이지 개츠비가 결혼하자 하면 할래요. 흐흐
제가 데이지라면 개츠비 따라 도망갔어요.
근데 개츠비 같은 사람 요즘엔 없겠지요.
내 아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도 않으니...
원작은 원작대로, 루어만 식 볼거리는 볼거리대로(영화가 원작처럼 싱거운 풍이면 외면 당했을 것 같아요.)

테른님도 남은 오월 잘 보내시어요^^*

페크pek0501 2013-05-0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직 한 여자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다가 죽는 삶이 (지금은) 위대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해요.
사실 이런 삶을 살다가 죽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도 이 책을 읽을 땐, 뭐가 위대하다는 건가... 이러면서 읽었다는...
게다가 세로 줄의 옛 책으로 읽어서인지 별로 감응이 없었다는...
(위대한 개츠비를 구십 몇 년에 읽은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세로 줄 전집의 옛 책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갑자기 그리워지네요.

다크아이즈 2013-05-27 19:59   좋아요 0 | URL
아무리 읽어도 위대한 개츠비는 없었어요. ㅋ
자꾸 세뇌 되다 보니 그 슴슴하던 원작도 재미있게 보이고,
넘 순수해 찌질해 보이던 개츠비가 위대하게도 보이고...
근데 이번 영화에선 캐리 멀리건이 넘흐 귀여버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더라는...
원작에선 저런 싸가지~ 뭐 이런 느낌이잖아요.
페크 언니님도 잘 살고 있지요?

세실 2013-05-0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개츠비의 순수함만은 위대하죠. 정절이 무너진 지금은 더욱 높이 살만합니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버리잖아요.
어디 개츠비 같은 남자 없나? 두리번 두리번.....ㅎㅎ
대체 왜 근로자의 날에 공무원은 안쉬는건지 이해가 안갑니다. 회사도, 은행도, 문을 닫는데.....
부모님 모두 성당 다니시는군요^^

다크아이즈 2013-05-27 20:03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 이번 영화 두 번 보신 거지요?
개츠비가 와서 결혼하자 하면 저도 해요. 연애 말고 결혼이요. 크~~
연애 대상은 뭐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는 없네요. ㅋ
공무원 노조도 있는데, 왜 근로자가 아닐까요? 나랏일은 숭고하니까, 뭐 이런 분위기?

Shining 2013-05-0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읽었을 땐 위대한, 이라는 건 반어법, 이라고 수학능력평가 예상문제의 답처럼 외웠고 두 번째 읽었을 땐 고작 데이지 같은 남자를 사랑한, 가엾고 가여운 남자라고 생각했고 세 번째는 시대가 보이고 사람이 보였어요. 개츠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예요. 피츠제럴드는 짱(웃음). 토비 맥과이어의 닉 캐러웨이나 캐리 멀리건이 연기하는 데이지는 떠올리기만 해도 잘 어울린데 디카프리오는 (여전히) 반대예요. 전 피터 사스가드나 마이클 패스빈더 쪽을 상상했는데.

팜님의 페이퍼는 언제나 좋군요, 정말.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3-05-29 23:37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여기다 댓글 달아야 하는데 밑에 단독으로 달려 버렸네요.
복사해서 올리려니 복사도 안 되네요. ㅠ
어쨌든 전 님의 개츠비 영화 리뷰 기다린답니다^^*

다크아이즈 2013-05-2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비 맥과이어 분 닉 캐러웨이 확실히 어울렸어요.
근데 디카프리오가 아니면 또 상상이 안 되는 게 개츠비 ㅋ
두 번 봤는데 눈빛이 좋던데요.

2001년판, 토비 스티븐스(개츠비)와 폴 러드(닉 캐러웨이)를 생각하면
이번 연기가 생동감 있게 와 닿았어요.
물론 바즈 루어만의 화려한 연출 말고 오직 연기력만 두고 봤을 때도요.

근데 닉 캐러웨이 역할은 어딘지 비슷한 분위기...
첨부터 끝까지 나오니 내레이터야말로 진짜 주인공 ㅋ 맞지요, 샤이닝님?
 

 

 

 

 

 

 

 

 

 

 

 

 

 

 

 

 

 

 

  1. 섬이 되어야

 

  알베르 카뮈는 스승 장 그르니에의 철학 에세이『섬』에 붙여 다음과 같은 헌사를 던진다.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 성찬의 의미에 동참하고자 책을 펴들었다. (사놓고 몇 번째 시도하다 겨우 성공했다. 책이 바래졌다.ㅠ) 웬걸, 처음부터 난공불락이다. 내게 장 그르니에의 섬은 카뮈의 헌사가 더 나은 책, 카뮈의 헌사로 기억될 책, 카뮈의 헌사가 호들갑스런 책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암시와 독백으로 가득한 그르니에 식 사유의 독창성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였다. 아무리 카뮈가 말한 대로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기려 해도 속만 더부룩해져올 뿐이다. 소화 안 된 묵직한 배로 뭔가를 더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랄까.

 

 

  원문의 난해함 때문인지 번역본은 비문을 쏟아낸다. 아무리 독자의 예를 다하려 해도 부분에 따라선 쓸 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기분이다. 글이 글로서 제 기능만 다해주면 좋으련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문을 구해서 비교하면서 읽고 싶다. 읽기에 껄끄러운 건 번역의 문제이지 원문의 문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스승의 현학허세나 자기만의 말놀이를 위해 카뮈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헌사를 날렸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심오한 철학과 명징한 단상들 덕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고무 또는 찬양의 독후감들은 이 책 전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분적으로 빛나는 사유들에 대한 몫이리라. 남들 다 좋다고 하는 책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 불충한 독해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섬이 되지 않고서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다. 섬이 되어야 섬에 닿을 수 있는, 막막하고도 먹먹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섬』.

 

 

 

   

2. 인지 부조화

 

  솔직하다는 말의 함의에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이거나 약점을 묘파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추녀더러 ‘넌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무례한 솔직함인데, 솔직함이 타자를 향하는 나쁜 예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나는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내 약점을 고백해 공감을 유도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누군가 솔직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타자를 향하는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의 약점을 객관화하는 것일 때 공감하기 쉽다.

 

 

하지만 참으로 솔직하기 힘든 게 사람이다. 여우와 신포도 이솝 우화가 그 좋은 예이다. 너무 높이 열려 따먹을 수 없는 포도는 여우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일거야. 못 먹는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급기야는 정보를 왜곡해버린다. 비겁의 커튼 뒤로 숨어 자기 위안을 도모한다.

 

 

  이런 일은 수없이 겪는다. 내가 추천한 맛집의 위생 상태가 엉망인데도 ‘음식이 깔끔하다’고 설레발을 치는가 하면, 내가 읽자고 한 책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도 ‘밤새 눈시울을 적셨다’고 거짓 감상을 유도한다. 내가 산 냉장고가 더 비싼데다 소음도 심하지만 디자인이 좋고 실용적이라고 떠벌인다. 저 직장을 포기하고 이 직장을 선택한 것이 후회스럽지만 저 직장은 분명 복지 혜택이 부족할 거라며 자기 위안을 한다.

 

 

  이 모든 건 스스로의 약점이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방어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행동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의 태도나 신념을 바꿔버리는 경향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외적 당당함과는 달리 내면적 갈등을 야기한다. 한편 인지부조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동 수정을 한다면 이 또한 너무 이른 자기 성찰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솔직해도 자책에 빠지기 쉽고, 스스로를 너무 보호해도 자기기만의 우물에 허덕일 수 있다. 솔직과 포장의 적당한 경계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게 만만찮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3. 봄 나목을 보며

 

  봄이 깊어간다. 사방천지가 푸름의 향연을 위해 제 몸을 부풀린다. 창밖을 본다. 벚나무 한 그루에 잎이 나질 않는다. 주변 가로수가 날 다르게 푸른 숨결로 제 가지를 키울 때 그 나무는 헐벗은 듯 꼿꼿한 듯 제 온몸으로 봄바람을 마주하고 있다. 겨우내 다 같이 나목으로 있을 땐 몰랐는데, 꽃 피우고 잎 나기 시작하니 주변 나무와 다른 게 표가 난다.

 

  어떤 이유에서든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는 곧 잊힐 것이다. 오뉴월이 와 무성해진 잎들이 다른 가지를 넘나들 때면 그 나무는 완전히 주변에 잠식되고 말 것이다. 있으되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뿌리가 약하거나, 강한 기 때문에 쉽게 그 땅에 안착하지 못하는 나무는 봄이 와도 나목으로서의 제 수치를 감내해야만 한다. 기실 그 나목은 죽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밑둥치 잘려나갈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

 

 

  사람의 나무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문 앞에서 정의를 내리거나 명답을 얻는 건 무척 어렵다. 거기서 최선이나 차선의 길을 수용할 때 우리는 ‘순리를 따른다’고 한다. 순한 이치나 도리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세상과 타협한다. 그 타협조차 받아들일 의지가 없거나 그 타협보다 자의식이 강할 경우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그 명제 앞에서 내 힘이 받쳐주지 않거나, 내 강박이 우선이면 쉽게 나무들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섬이 되었다, 바람이 되었다 하는 게 사람의 나날이다.

 

 

  내 안의 핍진이나 질곡, 내 안의 거품이나 고집 이 둘 다를 버리지 못할 때 봄 깊은 저 사람의 마실에서 쓸쓸히 나목이 되어 제 치욕을 견뎌내야 한다. 혼자 부는 바람도 없고, 홀로 크는 숲도 없다. 혼자 푸른 언덕도 없고, 홀로 꽃 피우는 나무도 없다. 한 호흡의 양심, 한 손길의 애정, 한 눈길의 의심, 한 모금의 불안 이 모든 것들이 삶을 이루는 주체이다. 세상만사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최선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봄은 오고 계절은 저리도 깊어만 간다.

 

 

    

 4. 배 타도 산에 오를 수 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말은 매우 빨랐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그녀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번역 자막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눌변인 경우가 많다는 속설은 그녀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광풍처럼 몰아치기만 한 언변에 유머와 재기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호의적인 청중들의 웃음소리를 한 호흡 쉬어가는 발판으로 삼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만 했다. 성급한 내레이션,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굿윈은 링컨 연구자의 권위자이다. 10년 동안 링컨에 관한 연구와 자료 수집으로 한 권의 책을 집대성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권력의 조건』은 그녀의 링컨에 대한 오롯한 헌사이다. 책 속의 링컨도 위대하고, 책을 쓴 그녀도 대단하다. 한 사람의 집념은 여러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정치가로서의 링컨이 그러하고, 글쓴이로서 굿윈 역시 그러하다.

 

 

  방대한 내용 안에서 그녀가 링컨을 가장 잘 살린 대목은 정치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들에서였다. 링컨의 강점은 적들도 내 편으로 만드는 건실한 가치관이었다. 때로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더러는 해돋이 같은 미소로 불편한 정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권모술수나 이해타산이 아니라 건전하고도 도덕적인 접근법이었다. 유능한 라이벌들을 내각에 등용시키는가 하면, 뛰어난 화술과 친절한 마음씨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사로운 비난과 웬만한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우정을 고수했고, 동료들의 실수마저 끌어안았다. 자기훈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던 링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저자 도리스 컨스 굿윈도 링컨만큼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링컨의 정치적, 사적 행보는 바지런한 작가의 발품과 손품에 의해 정치적 욕망과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인간적 신뢰감으로 변주된다. 이런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라면, 즉 링컨과 굿윈의 안내라면 배 타고도 능히 원하는 산에 오를 수 있겠다.

 

 

  2005년 4월 18일 아돌5. 멘첼에게 묻기

 

  온 세상, 자기계발이 화두다. 책이든 강연이든 ‘자기계발’란 타이틀만 달면 시쳇말로 반은 그냥 먹힌다. 처음 한두 번은 솔깃하다가 나중에는 똑 같은 얘기 같아 시들해지는 게 또 자기계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꾸준히 회자되는 건 그만큼 자기 계발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두 권의 계발서, 한두 번의 강연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자신만의 모델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해서 각종 자기계발 관련 정보에 대해 가졌던 편견, 이를 테면 상투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거나 나아가 뻔한 얘기라는 생각을 접어보기로 했다. 원하는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니 오히려 그것에 대한 모든 정보들에 애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최근 참석한 모 특강도 그랬다. 욕심보다 최선이 먼저라는 깨우침을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데 하루 종일 그것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돌프 폰 멘첼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그 거장에게 청년 작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성품이 급하고 그림 실력은 그럭저럭한 이였다. 초조한 표정의 젊은 화가는 멘첼에게 물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리는데, 파는 데는 왜 일 년도 넘게 걸리느냐고. 멘첼이 대답은 명쾌했다. 하루 만에 그리던 것을 일 년에 걸쳐 그려보라고. 그러면 금세 그림이 팔릴 거라고. 멘첼의 충고를 받아들인 청년은 태도를 바꿨다. 욕심을 버리고 기초부터 다졌다. 하루의 치기를 일 년의 노력으로 대체했다. 청년의 그림이 한나절 만에 팔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바라기 전에 갖추고, 갖추기 전에 버려야 길이 보인다. 욕심을 미루고 기본을 쌓는 것보다 나은 자기계발은 없다. 멘첼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있는 거실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계발 강사가 말한다. 거장의 붓질을 기억해라. 저 흰 커튼의 펄럭이는 생동감과 저 마루를 내리찍는 광선의 각도를 위해 얼마나 숱한 붓질이 있었는지를. 그 맘이어야 하룻밤 새 팔릴 그림을 꿈꿀 수 있다고.

 

 

 

 

  6. 언어유희

 

  싸이의「젠틀맨」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음악성 자체보다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풍자 깃든 춤, 언어유희가 섞인 노랫말 등이 지구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음악 정서를 충분히 자극해주고 있다. 특히 ‘나랏말쌈’에서 자유로운 말장난 같은 가사의 전략적 배치도 노래의 파급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처럼 언어유희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매개물이다. 진은영의 시「대학시절」은 맛깔나는 말장난을 전면에 내세워 청춘의 지난한 현실을 노래한다. ‘내 가슴엔/멜랑멜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살고 있어/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비슷한 말들의 소란을 빌려 이십대를 회상하는데, 같은 경험을 거친 독자라면 그게 더한 신뢰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명랑발랄해서만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멜랑콜리’의 정점을 맛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단순한 우울이나 비애로 설명할 수 없는 세련된 우울의 정서인 멜랑콜리를 이십대 때의 시인은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염소 한 마리’로 정의하고 있다.

 

 

  청춘의 염소는 종일토록 종이만 먹어치우며,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시’만 토할 수밖에 없다. 앞선 친구들의 속도감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감과 멀게 태어난 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빈둥빈둥 빈센트 반 고흐’처럼 보장된 바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며 시간을 축낼 뿐이다. 누군들 아프지 않을 청춘이었을까. 누군들 멜랑콜리하지 않을 이십대였을까. 하지만 누가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유희로 자신의 멜랑콜리한 청춘을 ‘화끈하고 말끔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젠틀맨」을 들으며 제 청춘에 말장난 걸어본다. 알랑가몰라 아리까리한 그 시절.

 

 

 

   꽃돌이와 아리삼7.바람 씌고 약 줘야

 

  일주일이 지나도록 배탈이 낫지 않는다. 꾸룩꾸룩 장 뒤틀리는 소리 요란하고, 가스 찬 배를 두드리면 수박 두드릴 때처럼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욱신거리는 배를 다독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병원 가는 게 성가셔 약국에서 응급약만 지어 먹었다. 그래도 차도가 없어 결국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단순 장염이지만 염증은 심해졌을 거란다. 아픈 순간 빨리 병원부터 찾는 게 순선데 자가 처방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배탈 따위는 하루만 참으면 절로 낫는다는 자신감 같은 게 그간 내 안에 있었다. 음식 버리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엄마는 흔히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어른들이 그러듯 쉰 콩나물무침도 씻어서 기어이 드시는 분이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비교적 건강한 소화기관을 자랑하는 당신의 산교육(?) 영향인지 나도 위와 장은 튼튼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환경이 바뀌면 나를 바꾸거나 대상을 바꿔 줄줄도 알아야 한다. 기존을 고집하면 탈이 날 경우 더디게 회복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쌀밥덩이처럼 몽실몽실한 흰꽃을 사들인 적이 있다. 싸리꽃 닮은 ‘아리삼’이란 일년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꽃색이 흐려지며 생기를 잃는 것이었다. 끄떡없이 두 달은 꽃구경 할 수 있을 거라던 꽃집 주인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바람과 물과 영양제까지 맞으며 무리지어 생육환경에 맞게 자라다가 고립무원의 아파트로 옮겨오니 꽃도 소화계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자주 환기를 시켜 바람과 별빛의 기를 씌었더라면 꽃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들어가는 초기에 꽃집에 들러 조치를 취했더라면 초기의 싱싱함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 때는 아프더라도 하루 만에 거뜬히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면역력이나 소화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론 건강할 때의 잣대로 자신의 몸을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하루 가던 장염이 한 달, 아니 일 년을 끌기 전에 현명한 조치가 우선임을 뼈저리게 맛본 한 주다.

 

  ** 이 글을 마치고도 낫지 않아 결국 종합병원까지 갔다. 죽을병은 아니란다.

     떨어진 소화력에는 소식과 운동이 제일이다. 둘 다 힘들다. 그 중 운동이 더 힘들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고 싶다. 운동해야겠다.

 

 

 

  

 

 

 

 

 

 

 

 

 

 

 

 

 

  8.회고 미학

 

  시인 김수영은 수필「가장 아름다움 우리말 열 개」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 열 개로 꼽았다. 그 낱말에는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뒷말이 머리끝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향수에 어린 말들은 (중략) 진정한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 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회고 미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한 기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몇 글줄 쓰려한다. 오늘날 우리 수필은 재미없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신춘문예 공모에서조차도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숙제해라고 아무리 엄마가 고함질러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이는 빈 공책에 낙서만 하다 잠들고 만다.

 

 

  좋은 수필의 전형이라고 하는 글들을 보면 대개 면죄부 얻은 과거의 상투적 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모성의 희생은 위엄 깃든 필수요, 부성의 패악은 낭만적 양념이며, 툇마루에 대한 추억은 당연한 선택이다. 처음 한두 번은 마음결을 다독여주고, 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이런 글에 마음이 간다. 두세 번 읽다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하는 반발감이 생긴다. 사람들은 으레 수필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되고 종내는 그들만의 잔치로 머물고 만다. 김수영식 대로 고작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 의식은 좀 더 현재적 보편성에 가깝게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쌈박한 개별자의 개성이 저만치 앞서가는데, 어쩌면 이런 것이 새로운 보편의 패러다임에 가까운데 언제까지나 의고적이고 훈계적인 말들로 향수를 포장하고 열거하는 데만 머물 것인가. 무려 50년 전에 이런 회고 미학의 경계성을 단언한 시인의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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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5-0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포스팅 정말 좋군요. 왜 사람들은 이런 책 리뷰를 할 때마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아요.
내가 이런 말 하면 욕 먹겠지 ? 카뮈가 좋다는데 시부랄.. 나도 그냥 섬 좋다고 하자.
그런 묘한 눈치... 같은 거 말입니다. 일종의 체면 같은 거 아닐까 싶어요.
김미정의 언니의 독설'은 신나게 까면서 막상 권위자(카뮈)의 입에서 확인된 섬'에 대해서는 꺼려하는... ㅎㅎㅎㅎ. 속 시원한 글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까뮈에 혹해서 < 섬 > 읽다가... 도저히 제 취향은 아니더군요. 카뮈의 설레발에 의아해했던 적이 있습니다..ㅋㅋㅋㅋㅋ.

제가 한국 수필에 대해 깐 적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반론이 100개 정도 달린 적이 있습니다.
신달자나 이어령 같은 수필'은 사실 수필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랑이죠.
작은 것에서 큰 깨달음을 얻자는 건데...ㅎㅎㅎ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너희들은 몰랐지만 나는 간파했어, 라는 묘한 과시적 겸손이 주류거든요.
한국 수필 특히 그렇습니다.

글을 꼭 순우리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죠. 굳이 계파ㅡㄹ 나누자면 이오덕 계열인데 전 좀 이게 웃기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고종석 계열인데 언어란 오염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옛말은 죽고, 새로운 말은 탄생하는 거지요. 그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번역투 번역투 하지만 사실 그것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오염된 언어'입니다. 그게 언어의 사생활이에요.
그런데순우리말 주의자들은 이걸 무슨 괴물 보듯 해요. 예를 들면 < ~ 의 > 를 쓰면 안 된다. 이런 게 어디 이습니까....

다크아이즈 2013-05-01 19:02   좋아요 0 | URL
곰발님 덧글에 지대 공감합니다.
카뮈 발에 장 그르니에 계 탄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몇몇 단상들 때문에 이처럼 호들갑 떨어야 할 것까지는 아닌 듯. ㅋ

우리 수필이 갑갑의 영역에 머문 것도 선배 글 권력자들에게 그 혐의가 있어요. 쌈박한 글을 발견해주는 속도가 너무 느리니, 감각적이고 도발적이고 섹시한 글을 쓰는 이들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는 것 같아요. ㅠ

김수영이 혐오한 것 -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갇히는 것, 언어가 변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부류들.. 뭐 이런 것 같았어요. 변하는 걸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잖아요. 이십대 때 순우리말 운동 경력자로서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 같았다고 항상 회고합니다요. 저도 고종석 빠라 할 수 있는데, 예를 든 <~의>는 고종석도 싫어할 것 같다는.ㅋ 왜냐면 일본 잔재니 뭐 그런 거 떠나서 안 붙이면 더 세련되고 더 경제적일 때가 많긴 하거든요. 자고로 전 <문체미학의 경제성>에 강박이 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명원의 평론을 엄청 좋아하지만 그의 문장들은 반토막으로 다 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부류 - 학문적 문체는 왜 그토록 씨잘데기 없이 의도적으로다가 학구적으로 써야 하는 걸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5-01 19:48   좋아요 0 | URL
길게 써야 쪽수가 늘어나잖아요...ㅎㅎㅎㅎㅎ 마침표를 멀리 내던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평론 쪽이 오히려 진짜 왕창 비문 작렬이죠.
전 그걸 그냥 정성일 꼰대 말투'라고 하는데 보면 뭐 기가 막힙니다.

인간의 실존적 강박성'은 즉자적 공포로 인해 현시성을 획득한다..

뭐 ㅇ런... 한 문장에 의, 적, 성 이 세트가 반드시 붇습니ㅏ. 그러니 평론집 읽다가 성질납니다..

이진 2013-05-01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뭐하다가 이제 오셨어요. 아프진 않으셨지요.
아앗, 장염이라니. 팜님 장염 지인짜 힘들다던데. 괜찮으셔요?
시험기간 맞아요. 시험이 다음 주 월요일이에요. 말하자면 닷새가 남은 셈인데 이제서야 와닿네요.
으으... 너무 피곤해요. 눈이 스르르 감기고, 몸에 기력이 없고. 이러다 기면증 오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요.
팜님 이 페이퍼 정말 좋아요. 길이도 길고 내용도 좋아요. 특히 시가 많아서 좋아요. 진은영의 시는 딱 한 개 읽어봤는데 그게 정말 좋더군요. 신형철이 뽑아서 짧게 평을 쓴 시였는데.
김민정의 시집도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거예요. 시집 한 백 권 쯤을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는데 언제 그것을 다 살는지는 모르겠네요.
누군가 말하길 장 그르니에의 섬, 이 무지무지 재밌다던데요. 철학 에세이라니. 저도 구미가 당겨요. 사실 철학 에세이를 예전에 신간평가단 활동 무렵 읽었는데 어렵더군요. 몇 장 읽고는 안 읽은 기억이 나요. 그땐 어렸으니까. 이젠 철학이 좋아요. 철학 내 사랑. 희희

한강이 나무 좋다고, 그렇게 소설마다 말하고 다니다보니 저도 덩달아 좋아졌어요. 나무를 보면 어떤 엄숙함이랄까 경건해져요.

세실 2013-05-02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카뮈와 박웅현의 극찬에 혹해서 섬 읽다가 난해함에 이내 포기했답니다. 왜이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ㅋ
소식과 운동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왜 지키지 못하는 걸까요? 언능 완쾌하시길 빕니다. 우리 맛난거 먹어야지요^^

다크아이즈 2013-05-02 16:53   좋아요 0 | URL
세실님 글치요?
몇몇 단상이 빛나는 건 알겠는데,
카뮈가 저토록 괜찮은 헌사를 들이댈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이...
프랑스에도 주례사 헌사가 있는 건 아닐 테고,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완벽히 이해 못한데는...
번역도 새로이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오월도 금세 갈 것 같아요. 만나는 날은 기다려지는데 세월 가는 건 서럽더라 ㅠ ㅠ

페크pek0501 2013-05-0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염이었군요. 새 글을 올리시지 않길래 다른 일로 바쁘신 줄 알았어요.
어느 새 우리?가 건강을 챙겨야 하는 나이에 와 있는 것이죠.

글이 길어 한참 읽었네요. 책 구경을 잘 하고 갑니다. 다양해요.
글을 쓰시더라도 사이사이에 휴식 시간을 가지세요. ^^

다크아이즈 2013-05-02 16:56   좋아요 0 | URL
장염 핑계 겸 겸사겸사~~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서재질도 하게 되더라구요.
저 같은 경운 안 들르게 되면 몇날 며칠이고 못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안식천데 관리 좀 하면서 살아야할텐데...
편하게 생각하려구요.
페크 언냐도 뭐든지 매진하고 계시리라 짐작하옵니다^^*

순오기 2013-05-0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탕이 까매서 글 읽기가 어려워요~ ㅠ
장염이라니....잘 치료하셔야지 그러잖으면 수시로 재발하더라고요.ㅠ

다크아이즈 2013-05-02 16:57   좋아요 0 | URL
순오기 언냐, 제가 컴맹에다 귀차니즘에다 서재 시크녀라 관리를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알라딘에서 주시는 대로 받다보니 이런 시커먼 배경이 될 때도 있어요. 오늘 하루만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여^^*
오월엔 꼭 보여주세요. 에너제틱한 그 모습.... 기대할게요.

드림모노로그 2013-05-0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아프셔셔 우짠대요..
저희 어머님이 열정과 정열의 화신이셨는데
아프셔셔 집에 와 계시게 되었는데요
건강하실 때의 모습과 병약한 모습이 너무 차이가 나서 눈물이 많이 나더라구요.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섬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ㅎㅎㅎ 미루고 있네요 ㅎㅎ
그리고 김수영문학은 .. 무척 사랑하는.... 아끼는 책인데 ㅋㅋ
팜님의 멋진 페이퍼에 눈이 호강하고 갑니다 ~ ^^

다크아이즈 2013-05-02 16: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울 엄마도 아무리 건강하시다지만 구순을 바라보니
계단 올라가기 힘들어서 성당도 자주 못가신대요.
주일 미사와 노인학교만 겨우 간다고 아쉬워하시네요.
나이 앞에 장사 없잖아요.
섬은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에요. 리뷰를 보면 아직까진 호 쪽이 훨씬 많으니
시도해 보시어요.
드림님처럼 다독하면서 정독하는 분께는 맞을 수도 있어요.^^*

Shining 2013-05-02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글 읽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와서 댓글 남깁니다 :-) 저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중학생 때 처음 읽었는데 당최가 뭔 말인지를 모르겠더라구요; 몇 년 전에 다시 시도했으나 그 때도 그저 그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중학생 때는 그래도 읽었다며 내심 자랑했다면 몇 년 전에는 다시 또 닿을 때가 있으려나 하고 접어뒀다는 점이요(웃음).

이 페이퍼 정말 좋아요 팜님. 정말정말. 찜해두고 두고두고 읽어야겠어요*-_-* 에이, 이렇게 글을 잘 쓰시면서 엄살은~(이러기?ㅋ)

그런데, 아프시면 안되요ㅠ 책도 글도 모두가 건강한 후에 일이잖아요. 아프지 마세요, 그래야 이렇게 좋은 글도 계속 쓰시고 제게 힘을 주는 댓글도 남겨주실 수 있잖아요. 다음 번 페이퍼까지 완쾌해서 오시기에요 :-D

다크아이즈 2013-05-02 17:02   좋아요 0 | URL
핫, 중학교 때라고라고라~~~
전 샤이닝님보다 훨씬 연배가 높긴 할 것 같지만 촌스런 학생시절이라
그땐 섬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겨우 데미안이나 어린왕자 수레바퀴 아래서 등을 들고 낑낑대던 시절인데...
어쨌거나 전 섬이 썩 훌륭한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훌륭한 건 카뮈의 헌사더군요. 장 그르니에는 월매나 뿌듯했을까요^^*
샤이닝님의 오월을 기다립니다. 서재에 오는 한 님 글은 꼭 읽습니다.

프레이야 2013-05-0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죽을병 아닌건 다행한일이지만 이제 우리 몸 좀 잘 챙겨야겠어요. 진짜 에전과 달라요ㅠ 건강과 몸에 좀더 신경쓰라는 신호니까 신호 잘 지켜야될 거 같아요. 저도 심란한 구석이 몇가지 있는데 자연스레 몸의 계절이 바뀌는 시기라 생각하고 비료도 좀 주고 그러려구요. 에고ㅠ 근데 이 페이퍼 참말로 좋으네요. 그르니에의 섬은 까뮈의 헌사 따위 몰랐던 때 그니까 육년전 녹음한 도서에요. 전 나쁘지않았어요. 좋더라구요^^ 한국수필은 정말 할말이 많아요. 바로 그런점에 회의가 들고 혁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함부로 쓰질 못하겠더라구요. 초반에 멋모르고 써댔지만 지금와서 보니 회고미학에 해당하는 글이 절반은 돼죠. 좀더 미래지향적일 필요가 있을거 같은데 소재나 주제나 참 쉽지않은 장르입니다. 요즘 어느분의 수필을 봐주고있는데 바로 그 회고미학의 절정이라서 사실 괴로워요. 그걸 다 들어내면 글이 도무지 안 되구요. 어쩔 수 없이 안 봐 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ㅠ 하루밤에 다 팔릴 수 있는 소설책을 쓰시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단련하시는 팜님, 늘 마음으로 응원해요! 오늘도 내일도 하나의 섬이 되었다가 한줄기 바람도 되었다가 한송이 꽃송아리도 되었다가 변화무쌍한 우리 되어요. 언능 보고싶어요^^

다크아이즈 2013-05-02 17:10   좋아요 0 | URL
프레님 몸이란 게 챙긴다고 챙겨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정말이지 운동해야겠다는 생각밖에.
프레님이 저보다 건강이 안 좋은데 만날 나혼자 징징대네요. 제가 막내라서
은근 징징댄답니다.ㅠ

섬 녹음할 때 고양이 물루 편은 엄청 좋았을 것 같고, 인도 편 뭐시기 그 부분은 책을 던지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ㅋ

수필 한 편 쓰기가 소설 한 편보다 어렵다는 데는 변함이 없는데, 수필 문단 권력자들이 생각이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개성 강한, 어쩌면 현대적 보편성에 충실항 그런 작품들을 기성이 발견해주지 않으면 우리수필은 외국에 비해 몇 백 년은 뒤떨어질 것 같아요. 김수영이 오십 년 전에 회고 미학에 대해 경고했다는 게 놀랍더군요. 김수영이 괜한 김수영이 아니에요.

김수영의 연인도 사서 읽었는데 금세 읽혀요. 딴 건 모르겠고 김현경 여사는 굉장한 미인이더군요. 프레님 오월의 그날이 기대되어요. 그래도 좀 일찍 헤어져요, 우리... 체력 고갈 방지와 프레님의 안녕을 위해 흐흐~~

프레이야 2013-05-0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작가의 아내로 쉽지않은 삶을 살아오신 거 같았어요. 자신의 재능도 미뤄두고ᆢ 지순한 사랑의힘 아니면 어렵겠죠. 그렇게 믿고싶은건지ᆢ 그런 여성이 문학사에 꽤 있지요. 그날은 일찍은 아니되어요. ㅎㅎ 열시쯤 가실 각오하셔요 . 그래야 제가 스케줄 짜기 쉬워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05-07 19:52   좋아요 0 | URL
프레님도 읽으셨구나.
근데 강신주의 분석 책을 읽다 보니 차라리 김현경의 책은 안 읽었더라면 하는 맘도 있어요. 사생활이 중첩되니 자꾸 읽는데 방해되지 뭡니까.^^*
 

 

 

 

 

 

 

 

 

 

 

 

 

 

 

 

 

 

 

  1. 소설 쓰기의 어려움

 

  글쓰기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확고한 의지 없이는 제대로 된 한 편의 글을 내놓기 어렵다. 주변인  과의 약속도 미뤄야 하고, 스마트폰의 유혹도 이겨야 하며, 쏟아지는 잠도 극복해야 한다. 내 안에서 풀어진 나를 다독이지 않으면 절대로 가시적인 생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제 안의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라야 글로서 우뚝 설 수 있다. 왜 극소수의 작가만이 살아남겠는가. 그들은 스스로 부딪치며 견뎠고, 끝내 싸워서 이긴 자들이다.

 

 

  쓰는 글이 소설인 경우, 쓰는 자는 시간과 노동이란 이중고를 겪어내야 한다.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머리는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생각하는데 필요하고, 가슴은 활자화된 소설 앞에서 일어나는 여러 정서적 반응 기제의 확인처일 뿐이다. 소설 쓰는 데는 애오라지 묵직한 엉덩이와 예민한 손끝만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쓰기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두 가지를 끝내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건이 안 되고 시간이 부족한 핑계가 마련되어 있는 한 점점 소설 쓰기는 멀어진다.

 

 

  위의 얘기는 내 것이기도 하다. 시간은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이 없었고, 글쓰기의 노동 강도 앞에 저질 체력은 언제나 무너졌다. 날마다 고군분투한 것 같지만 언제나 악마의 승리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다. 이 모든 건 핑계다. 묵직하게 의자에 앉아 있질 못하고, 예민하게 손끝을 놀리지 못한 자의 자기변명일 뿐이다.

 

 

  삶이 빈약하니 사유가 빛날 리 없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만 있고, 그것을 받쳐줄 철학이 부족하다 보니 초조하게 시간만 보낸다. 내 안에 제대로 된 심지 하나 없어 독자에게 가더라도 공명하지 못할 소설, 이런 부담 때문에 오래 앉아 있어도 쉬이 써지질 않는다. 지나친 자기연민이나 자기성찰은 소설 쓰기의 제일 방해요소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책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오직 써라. 그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도 괜찮다. 이렇게 스스로 힐링하며 버티는 나날이다.

 

 

 

 

 

 

 

 

 

 

 

 

 

 

 

 

 

 

 

  2. 합평하는 시간

 

  글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각자 쓴 글에 대해 합평하는 시간을 가질 때도 있다. 그때마다 느낀다. 써온 작품에 대해 애정을 담아 한 말씀씩 해주는 그 과정이야말로 제2의 창작 시간이 될 수도 있음을.

 

 

  웬만한 ‘자뻑’ 환자가 아니라면 구양수·소동파 급 문장가도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다. 선인들이 익히 백 번 이상의 퇴고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잘 모르는 초보일 때는 쓴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재밌을 수가 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오직 쓰기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참으로 행복한 시기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글쓰기에 이력이 붙은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다. 글을 보는 눈은 깊고 넓어졌는데, 쓰는 능력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친다. 괴로운 나날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해놓고도 안절부절못한다. 제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합평이다.

 

 

  찜찜한 글을 그러안은 채 아무리 혼자 숙성시켜보아도 완벽한 내 글이 되어주진 않는다. 부끄럽지만 동료들 앞에 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은 글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적어도 쓰는 능력보단 읽는 능력이 앞선 다수의 글동무들은 적확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 말들은 대개 글쓴이가 제 글에서 느낀 여러 문제점들을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불필요한 설명을 없애라, 주인공에게 생동감을 불어 넣어라, 주제를 상징하는 장면에는 부연 묘사가 필요하다, 사실적 취재로 장소를 구체화 시켜라. 이 모든 충고는 글쓴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다. 하지만 맘과 달리 한 번 만에 그런 약점 없는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합평의 장에 나를 내놓고 채찍질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문제점들을 점검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제2의 창작에 들어선 거나 마찬가지다. 다시 골방에 들어가 지우고 덧대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백 번 쯤 그짓을 되풀이하면 된다!!

 

 

  좋은 글은 공감을 전제한다. 혼자 쓰고 혼자 고치기보다, 혼자 쓰고 누군가에게 보이는 그 길만이 너도 울리고(웃고) 나도 우는(웃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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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5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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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6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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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4-15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있어요 .팜님.. 글쓰기에 대한 고뇌와 고통의 글에 주제 넘게 멋지다는 말 만 얹어 놓습니다
아직 글쓰기의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저는 ㅋㅋ
항상 신기하고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ㅎㅎ
글쓰기에 대한 고뇌와 퇴고의 과정을 거친 글들의 아름다움을 전 경외합니다 ㅎㅎ
그래서 팜님의 글들이 몹시 부럽습니다 ㅎㅎㅎ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문제점들을 점검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제2의 창작이라는 말씀이 일침처럼 느껴집니다 ^^
제게 늘 부족한 것이 합평이거든요 ^^;;
팜님의 글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사유해야겠다는 반성을 해봅니다 ^^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4-16 16:57   좋아요 0 | URL
드림님, 전 멋있는 글을 못 쓰는 스따열(?)이라서 노력 많이 해야 되어요.
써놓고 보면 언제나 무미 건조...
합평하면 자신의 글의 부족함을 재확인할 수 있어 큰 도움 된답니다.
합평에서 끝나면 안 되고 매진해야 하는데, 대개는 원문을 처박아두고 숙성시키는 게 문제긴 하지만. ㅠ
저를 위한 채찍질인데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3-04-16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6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6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6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8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1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6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6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4-1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스스로 채찍질하시는 모습까지도 좋아보입니다.^^
예전에 어느 강평 시간에 참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보기엔 주관적이라고 여겨진 어느분의 강평(태도와 어조 그리고 내용)이
못마땅했고 거듭되니 화가 나더라구요. 유용한 강평이 서로 되려면 갖춰야할 게 있을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3-04-17 23:22   좋아요 0 | URL
채찍만 하면 뭐해요, 진전이 없어요ㅠ
전 합평 시간 넘흐 감사해요.
이번엔 제 작품(?) 합평했는데, 어쩜 제가 생각한 약점을 재확인시켜주지 뭡니까. 보는 눈이 발달한 글동무들의 한 마디씩은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그걸 제 것으로 확실히 만들어야 하는데 벌써 짱박아 두고 쳐다보기도 싫답니다.ㅠ

프레님의 어느분의 강평 부분, 대충 어떤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집니다.ㅋ
공감하기 어려운 이상한 소리하는 분들 말씀하시는 거지요? ^^*

Jeanne_Hebuterne 2013-04-2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꿈:그녀만의 바로 그 미소.
꿈:온전해서 더 바랄 것이 없는 기억.

롤랑 바르트의 이 짧은 일기 앞에서 길을 잃었답니다.

다크아이즈 2013-05-01 18:33   좋아요 0 | URL
테른님, 롤랑 바르트가 어디서 이런 말 했을까요?
애도일기, 사랑의 단상?
낯선 꿈 보다 꿈에 대한 해석이 좀 더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낯선 꿈을 선택하기로 했어요. 그녀만의 바로 그 미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