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은 사람 개츠비
처음 번역해서 안착한 제목은 원작이 지닌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데 일조한다. 피츠 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도 그런 의미에서 살짝 아쉽다. 개츠비의 일생을 쫓다보면 애초에 기대한 위대한 개츠비는 어디에도 없다. 사나이 개츠비의 허망한 순애보만 있을 뿐이다. 그 짠함을 일러 반어법으로 위대하다고 말해도 나쁘지는 않지만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내게 개츠비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 말리고 싶은 사람, 친구이고 싶은 사람 등으로 각인된다. 하기야 이런 걸 통칭할 때 ‘위대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도 없으니 최선의 번역일 수도 있겠다.
재즈 유행, 도덕 해이, 불법 난무, 주가 폭등. 1920년대 초반의 이런 뉴욕 분위기를 이해해야만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물질적 풍요와 세련미와 교양이 전수된 롱아일랜드 해협의 이스트에그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당시 사회의 상징 코드로 봐도 좋다. 1차 세계대전 직후 꿈조차 버거운 젊은이들은 파티와 술, 음악과 자동차 등으로 대변되는 ‘재즈 시대’를 살았다. 돈과 환락의 시대였다.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은 그 시절,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사랑을 위해 물질적 성공을 거두고야 만다.
물질적 풍요 앞에서 사랑은 쉽게 무너지고, 허영심으로 제 턱 끝을 장식하는 사람들은 순정을 백 번이라도 배반한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 사랑을 제 희생으로 마감함으로써 허무에 이르는 개츠비도 있고, 그것을 안타까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닉 캐러웨이 같은 사람 또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근본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 사랑도 물질도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조급한 오늘날 내레이터 닉 캐러웨이가 되어 어느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허영심으로 더욱 예쁜 데이지를 못 잊어 연신 술잔을 기울이는 착한 사람 개츠비를 만날 수 있으리니. 누군들 개츠비를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으리. 끝내 버리지 않은 순도 높은 꿈과 환상만으로도 개츠비는 위대하구나.
2.노동이란 말
우리 사회는 불온한 혐의를 지닌 것들을 못 견뎌한다. 개인의 욕망이나 취향보다 집단의 결속이나 합일이 더 중요하게끔 오래도록 길들여지다 보니 (권력) 집단이 용인하는 것이 아니면 그른 것이 되기 일쑤다. 그 적절한 예로 ‘노동’이란 말을 들 수 있겠다. 단순한 그 말에 깃들인 불온의 혐의 때문에 전지구촌이 5월 1일을 ‘노동절’이라 부를 때 우리는 ‘근로자의 날’이란 희한한 용어로 대체해 부르고 있다.
우리는 노동이란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노동당, 노동투쟁, 노동자와 사용자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사회정치적 의미가 강경하거나 불온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의 혼란 끝에 노동절의 날짜는 5월 1일로 정착했지만 오죽하면 그 기념일 이름은 ‘근로자의 날’에 붙박여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가.
근로와 노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을 의미하고,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이 된 데는 사전적 뜻과는 무관한, 단순히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겠지만 따지고 들자면 불쾌한 면도 없지 않다. 낱말의 의미대로라면 부지런히 일한 자만을 위한 날이 근로자의 날이 되고 만다. 그에 비해 본래의 노동절로 되돌릴 경우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확장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노동이라는 말 자체는 원래 신성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노동은 노예 또는 종속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노동절이란 말도 씁쓸하게 와 닿는다. 주인의 생산성을 위해 이만치 일한 대가로 그날 하루만큼은 쉬어도 좋다는 시혜의 느낌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자발적 유희의 노동이나 자신의 계발을 위한 노동이라면 타의에 의해 노동의 휴식을 명받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싱그런 오월을 맞으면서 ‘노동’이란 고매한 가치의 낱말이 이래저래 휘둘리는 걸 보니 아직 내 마음의 오월은 맞을 채비가 덜 되었나보다.
3. 질문의 기술
어떤 가게의 과일이 맛있을까? 동네 시장엔 대여섯 군데의 과일 가게가 있다. 처음 몇 번은 그게 그맛이려니 해서 눈에 띄는 아무데나 들른다. 한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한두 군데만 정해놓고 가게 된다. 그 집 과일이 가장 싱싱하고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곰곰 생각하면 그 가게 주인의 응대 방식이 과일을 맛 들게 했다. 소비자로선 이 과일 싱싱해요? 맛있어요? 등의, 하나마나한 질문들을 습관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그때 하수인 주인은 살짝 짜증을 미간에 심거나 심할 경우 싱싱하고 맛있는지 만날 먹어보고 사오는 것도 아닌데 자신인들 어떻게 알겠느냐고 손님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고수일 경우 주인은 준비된 맛보기용 과일을 권하며 순한 낯빛과 부드러운 말로 긍정의 대답을 유도한다. 그 가게 과일이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실은 퉁명스런 집이나 친절한 집이나 그 과일이 그 과일일 뿐인데도 말이다.
대개 논쟁은 쓸모없다. 상대 입장에서 ‘네’라고 답하게 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최선의 방법이다. 맨발로 다니고 40살 넘어 대머리가 된 뒤에야 어린 신부를 만난, 일상생활에서는 젬병이었던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설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련한 그는 ‘아니오’라는 말보다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화법을 썼다. 상대편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도록 동의를 이끌어내는 질문을 했다. 상대가 극구 반대하던 사안도 어느새 긍정의 화답을 할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이 되어 동의를 구하는 질문을 했다.
내 맘속의 안달은 언제나 상대가 틀렸다고 고집부린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은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심리적 간극을 메우려면 맨발의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부드럽게 질문하면 ‘네’ 하고 상대는 동의하게 되어 있다. 그 단순한 방법을 고수는 실행하고 하수는 거부한다. 맛있는 과일은 과일 가게 주인에게 달려있지 과일 자체와는 별 관련이 없다. 무맛 나는 참외도 꿀맛 나는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다.
4. 어머니, 진화를 거듭하셨다
어버이날이다. 홀로 계신 시모와 친정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매뉴얼은 해마다 똑 같다.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에다, 두 노인이 회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횟감을 떠서 방문하지만 실은 이보다 편한 먹거리 효도도 없다. 현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풍문을 위안삼아 푼돈 몇 푼 민망하게 내밀지만 그 역시 반 이상은 아이들 용돈으로 되돌아온다.
아무리 창의력이 바닥난 중년의 일상이라지만 의지만 있다면 이런 식상한 어버이날을 뛰어넘어 뭔가 그럴듯하게 두 노인에게 더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며, 자책하는 모든 회고적 모성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들에 그토록 염증을 내면서도 정작 그 부류에서 나 또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간사한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체험하는 셈이다.
팔순 중반을 넘어선, 각각 고관절과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두 노인은 보조 수레나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걷지도 못한다. 그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이 성당 나들이에 나선다. 마리아께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해 평화를 갈구하고 내세를 간청하는 것이, 당신들 스스로 다복하다고 자부하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노친네들은 진작에 알고 있다.
‘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 / 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 더 걸어 들어가지 않고 / 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 / 엎드려버리신다(중략) / 관절이 시큰거려 / 얼른 안겨 / 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 (중략) / 할머니,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
문인수 시인의「해녀」를 대하면 신 앞에 철벅 엎드리고 마는, 관절 시큰거리는 두 모성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무릎에 스치는 순간, 의탁하고픈 물결이 있다는 것에 무심한 자식들은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다복하고 거칠 것 없는 자식을 둔 것도 죄인양 두 할머니 오늘도 마리아께 오롯이 제 모든 걸 맡기러 저 언덕배기 넘어 간다. 구루마 밀며 지팡이 짚고서 웃으며 간다.
오늘은 어버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