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좀 단상

 

  한겨울이 코앞인데 무좀이 도졌다.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가 찢어져 따끔거린다. 오래 전부터 각질이 벗겨지는 정도의 무좀증세가 있긴 했지만 온 여름내 멀쩡하던 발이었다. 맨발에다 샌들을 신던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어 무좀균이 숨어 있었는데, 간절기를 맞아 양말을 신는데다 신발마저 부츠로 바뀌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제 역할을 잊고 있던 무좀균이 저 좋다고 활개를 친 것이다. 다행히 약을 발랐더니 금세 가라앉는다.

 

 

  며칠 무좀약을 바르면서 이런저런 단상이 스친다. 무좀균은 박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 삼아도 좋을 위안이라고. 우리네 소소한 일상은 무좀 앓는 발과 같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시련은 무좀 앓는 발에 비유할 수 없겠지만 웃고, 울고, 떠들고, 마시는 가운데 생겨난, 감당할 만한 모든 고충은 무좀균에 비유하고 싶다.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비의(秘義)는 가지고 산다. 아픔이나 상처의 옷을 입은 그것은 평소에는 비활성화 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있으면 표면으로 드러난다. 통풍에 문제가 없을 땐 잠잠하던 무좀균은 바람 쐬어 주지 않고 꼭꼭 싸매기만 할 때 스멀스멀 피어나 발가락 사이를 갉는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뭔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에 무좀균이 생긴다. 그때 위로라는 약을 발라 상처를 달래는데, 금세 낫는다. 그렇다고 무좀균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들었을 뿐인 이때의 무좀균은 발이 발로 단련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경고 장치로 기능하니 그대로 두는 것도 괜찮다.

 

 

  그 어떤 약점에도 노출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산다는 건 환희라는 날개옷을 걸칠 때보다 고통이라는 갑옷을 두를 때가 더 많다. 수고로운 갑옷의 시간을 무좀 앓는 발이라 쳐두자. 그 성가신 쓰라림이 가슴 한쪽을 찢어대기도 하겠지만 그건 모두 견뎌낼 만한 것들이다. 따라서 박멸할 필요도 없다. 혹시라도 완전히 없애버린 평범한 상처 그 자리에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나 번민이 들어찬다면 그보다 낭패스런 일도 없을 것이니.

 

 

 

 

 2.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관계의 호불호는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내게 와선 비호감이 되는가 하면, 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지만 타인에겐 비호감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정답도 없다. 이것을 인정하면 관계의 피로감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한데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는 인간은 모든 관계에서 환희만을 맛보기를 바란다. 해서 어색한 관계를 만나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하고 번민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니 가만 내버려 두면 된다.

 

 

  첫인상에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는 찰나에 결정된다. 시간을 십 분이나 한 시간 연장시킨다고 그 찰나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의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감정을 유지하느냐 폐기하느냐는 상호보완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 근접성, 유사성, 친숙성, 상호성 등을 언급한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더 친해질 가능성이 높고,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해도 다가서기 쉽다. 원래 성격이 상냥하고 친밀한 사람이면 호감도가 높아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상호성이 사람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합당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관계는 교감 즉 서로 주고받음으로 형성되는데,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 발짓, 눈빛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상대가 더 잘 안다. 내가 느끼는 만큼 상대도 느낀다.

 

 

  한 번 형성된 나쁜 인상은 다른 좋은 단서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내게 거슬린 언행을 하면 내 눈과 마음은 객관성에서 멀어진다. 내 프레임 안에서 상대는 부정의 영역에 머물고, 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번 잘못 엮인 감정은 재고의 여지마저 꺾어놓는다. 그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면 가만 두면 된다. 때론 인위적인 의지보다 자연스런 불편함이 훨씬 인간적일 때가 있다. 모든 이를 친구 삼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노력도 없을 테니.

 

 

 

  3.작은 몸짓 큰 관심

 

  모든 사연은 작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거창한 성과나 큰 깨달음의 시초도 밀알 같은 소박함에서 출발한다. 삶 이래로 숱한 우연이 우리 곁을 스쳐갔다. 그것들 중 제 삶의 물줄기를 바꿀만한 순간의 경험과 환경의 영속성이 모여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지나치게 소심하고 주변머리 없는 아이가 있었다. 존재감 없는 그 아이는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 눈에 띄고도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마음 같지 않은 아이의 몸 신호는 언제나 ‘나도 저 아이들처럼 나를 말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한 해 다행히 아이는 어질고 인내심 많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눈에 띄게 자신감 없는 아이를 위해 부러 발표를 시키고, 틈만 나면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질적, 환경적 제 한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성정이 쉽게 바뀔 리 없다는 걸 깨친 선생님은 방법을 달리했다. 의식적으로 뭔가 하도록 이끌기보다 그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우연히 만들기 시간에 아이의 손재주를 발견한 선생님은 지나치듯이 한 마디 칭찬을 했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심함을 가장한 칭찬 세례를 이어나갔다. 우물쭈물하고, 민숭민숭하기만 한 아이에게 맞춤한 접근 방식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제게 손재주 하나는 있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훗날 전통옷 만드는 일로 일가를 이루었다.

 

 

  제 소심함에 겨워 떨었던 몸짓을 섬세한 눈으로 지켜봤던 선생님을 추억하는 그 아이가 말한다. 무심한 듯한 선생님의 적극적인 낯빛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여전히 말로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재주가 없지만 여문 손끝으로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이가 강조한다. 모든 시작은 우연하고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제 작은 몸짓을 눈여겨 봐주는 세상 모든 이가 스승이라고.

 

 

 

 

 4.날갯짓

 

  누구에게나 날개는 있다. 하지만 그 날개의 쓰임새는 천양지차이다. 약한 날개를 가졌으나 그 깃털을 보듬어가며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왕의 강한 날개를 가졌으면서도 그 기운을 뒷전으로 몰아내 퇴보의 빌미로 삼는 이도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서글픈 건 날갯짓을 일관성 있게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거다. 강단 있게 제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신은 인간을 핑계거리 많은 피조물로 만들었다. 해 봐도 안 되고, 하기 싫어서도 안 하고, 할 여건이 안 되어서 못하고 등등 갖은 이유로 우리들이 시도하지 않은 날갯짓에 대해 변명을 할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먼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다. 맘먹은 대로 날갯짓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겸한다는 결심도 작심삼일이요,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쓴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허방에 빠뜨리기 일쑤고, 독촉 받은 원고를 마감 시간에 맞추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이다. 해서 주변인들이 뚝심 있게 제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만날 그 정신만은 벤치마킹하는데 실천력이 부족하다. 역시 스스로 마련해 놓은 여러 핑계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핑계의 전부는 게으름일 뿐이다.

 

 

  뉴질랜드 은화에 보면 키위새가 등장한다. 키위새는 뉴질랜드의 나랏새이다. 부리가 길고 후각이 발달한 그 새는 날지를 못한다. 아주 오래전 먹을 것이 풍부했던 뉴질랜드 땅의 그 새는 천적이 없었다. 굳이 날아다니지 않아도 먹을 것 천지였다. 자연히 날개는 퇴화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땅을 접수하면서 키위새에겐 재앙이 따랐다. 인간과 함께 들어간 고양이, 들쥐 등의 활약과 인간들의 포획에 의해 그 개체수가 멸종 위기 수준으로 줄었다. 그들에게 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그리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적 없는 삶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묵묵히, 또는 소란스럽게 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사는 모든 이들을 제 삶의 긍정적 천적, 아니 스승이라 여긴다. 그들이 이끄는 일상의 방식에 내 영혼의 밥술을 얹어 조금이라도 자극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퇴화하는 날개 끝에 얻은 일상의 평화에 안주하는 거야 말로 가장 무서운 습관이다.

 

 

 

  

 5.채찍과 당근

 

  누구나 칭찬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칭찬만을 바라는 건 아니다. 거짓 칭찬은 안 한 만 못하다. 예를 들면 상급반 글 모임이 있다 치자. 쌓아온 글쓰기 연륜만큼이나 그들은 글을 보는 안목 또한 높다. 어떤 글이 매혹적인 것이며,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인지도 잘 안다. 안다는 것과 쓰는 행위는 별개라는 것까지도 꿰 차고 있어,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안다.

 

 

  해서 제 글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그 글에 대한 타자의 충고를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일 줄도 안다. 왜냐하면 진심어린 도반들의 한마디야말로 제 글을 살찌우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축적된 여러 활동을 통해 깨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료나 스승이 제 글을 칭찬해주면 기분 좋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쓴 소리를 한다고 특별히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약점을 본인이 잘 알고 있고, 그 약점을 넘어서려면 주변의 채찍이 꼭 필요하다는 걸 서로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느 일정 수준에 도달한 부류의 예이고, 입문자의 경우인데다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데, 옆에서 충고랍시고 누가 한 마디 한다면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럴 수 있다. 글에 대한 객관적 눈이 뜨이기 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충고도 고깝게 들린다. 그 상황에서는 채찍의 방식 보다는 그가 원하는 당근의 방식을 취한 채,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단련된 고수는 벌점을 달게 받지만, 순수한 입문자는 가산점을 원한다. 고수가 당근을 겸연쩍게 여기기는 쉽지만, 입문자가 채찍을 감당하기는 버겁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고수보다는 하수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당근과 채찍은 달리해야 하고, 달콤한 채찍도 충분한 당근이란 뿌리가 있은 뒤의 일임을 알겠다.

 

 

 

 

 6. 경험의 타인

 

  위대한 철학자의 큰 사유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다.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한다. 한 사람의 디테일한 일 퍼센트가 그 사람의 숨겨진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돌렸다.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사유에 언제든지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언제나 공감한다. 그의 사유를 한마디로 풀어 쓴다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감이 곧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어릴 적 체험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이후 한 번도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개인적 전쟁 체험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존재론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개별성과 고유성은 무시하고 타자를 집단 속에 묶으려 하는 그 방식에 레비나스는 염오증을 느꼈다. 이런 통찰의 아픈 뿌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내 영향권 아래 두고 맘대로 부리고자 할 때 국가주의, 전체주의 같은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긴다. 타자가 곧 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런 위험한 사고의 틀 안이라면 전쟁도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의 경험이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선명한 계기가 되었다.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이다.  나 이외의 것을 인정하고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무, 그것을 레비나스는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윤리학으로 승화시켰다. 

 

 

 

 

 7.알바트로스적 전환

 

  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다면 내 개인사엔 ‘알바트로스적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어리바리한 나에 비해 독서로 무장한 후배는 세상을 향한 시크하고 시니컬한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그미는 랭보와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등을 좋아했는데, 치기로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 그런 시인들의 성향을 좇았다. 보들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냉소적인 눈으로 사물을 대했으며, 세속적인 부르주아 근성을 혐오했다. 그미가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편안한 정신이었다. 그미는 고매하고 피로한 지적 노동자를 자처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고, 선하고, 밝고, 맑고, 소박한 것이어야 온당했다. 추하고, 악하고, 어둡고, 흐리고, 화려한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들이었다. 이유 불문한 당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후배의 사고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사유의 빈곤과 약점을 포착하고 세뇌하는 그미의 눈썰미가 불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상을 선명하고 명쾌하게 보는 그미의 통찰력이 부러웠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온 우주를 꿰뚫는 듯한 그 모습을 나는 높이 샀고, 내 사유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너무 남다르게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던 그미는 그야말로 고독한 큰새였다. 거대 알바트로스도 선원에게 잡힌 신세면 고역을 면치 못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거대 날개를 질질 끌어야 하고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기도 한다. 고매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보들레르는 시인인 자신의 운명으로 치환했겠는가. 지상으로 내몰린 남다른 생각의 소유자들은 운명적 고난자들이지만 타고난 개척자이기도 하다. 우뚝한 새가 평범함의 지상에 유배당했을 때 겪을 가혹한 정신의 웃자람을 그미는 태연히 즐겼고, 나는 전율하며 그것을 부러워했다.

 

  보들레르 시를 다시 꺼내 읽는 밤, 자꾸만 옛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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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9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 보니 저는 하루에 페이퍼 하나를 꼬박꼬박 올리지만
팜므 님은 페이퍼 7개 분량을 일주일에 한번 올리시는군요... ㅎㅎㅎ

그렇게혜윰 2013-12-09 10:57   좋아요 0 | URL
하루에 한 페이퍼도, 하루에 7 페이퍼도 다 대단하신 거예요!
전 기복이 있네요 ㅋㅋㅋ

다크아이즈 2013-12-11 10:15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ㅋ
자주 올 수 없으니 한꺼번에 물량공세ㅠ
곰발님처럼 부지런하고, 페이스 조절도 잘 하고 싶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18   좋아요 0 | URL
그렇게 혜윰님, 닉네임 바꾸셨나요?
제 즐찾에 있는 분인데, 이름이 바뀌신 것 같아 헛갈려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도 알라딘 찾는 면에서는 기복의 여왕인 걸요. ^^*

마녀고양이 2013-12-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언니, 책 무지하게 많이 읽으셨네요... 으아....
알라디너들은 왜 자꾸 저를 반성하고 분발하게 만들까요... 캬.

관계는 상호적이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요인을 보면, 자주 보면 정든다, 나랑 비슷한 곳이 있을 것... 과 같은 게 있더군요. 어디서 들었는데, 영화배우 이영애씨는 너무 완벽하게 생겨서 도리어 영화 그림이 안 나왔다, 어울리는 남자 배우가 없었다 라는 말을 감독들이 했대요.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근과 채찍...
저는 하수예요, 하수. 아직 당근이 엄청나게 필요해요!! 큭큭.
저는여, 제 나름대로 '평생 받을 당근 총량의 법칙'이란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연구 결과는 절대 없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26   좋아요 0 | URL
마고님에 비하면 독서량은 아니지요. 잘 계시지요?
완벽한 미인이면 부담스럽지요. 그런 사람 만나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걸 자주 목격하잖아요.

저도 하수인걸요.
제가 매일 자각하는 건, 참 세상엔 글 잘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거지요.
알라딘에도 그런 분들 많잖아요, 마고님 비롯... 긍정의 자극이 되고 있어요.
만날 하수인 스스로를 자책해요. 자책도 잦으면 주변인들이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자중하는데도 불쑥불쑥 난, 왜이리 글이 안 되지?, 못 써, 소질 없어, 이러면서 한숨 짓는답니다.

여긴 눈발이 조금씩 날리네요. 마고님은 오늘도 열공 중, 또는 열 상담 중...
부디 겨울 잘 나시길^^*

oren 2013-12-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계절의 기나긴 한때를 억지로 뭔가를 하며 보낼 필요는 없다'고 누가 말했지만, 그래도 무좀이 도져 몹시 가려우면 우선은 좀 시원하게 긁고 나서 무좀약을 찾을 수밖에 없지 싶어요.
* * *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개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 몽테뉴

다크아이즈 2013-12-11 10:32   좋아요 0 | URL
오렌님은 어디서 이토록 적재적소에 좋은 말씀만 건져다 배달해주시는지요.
알라딘의 맑은 우물 같은 분^^*
무좀은 통풍과 직결된다는 걸 실감했어요.
수면 양말 신고 있으면 그 다음날 새끼 발가락 사이가 따끔따끔ㅠ
심한 거 아니니 평생 친구로 가려구요.

오렌님의 겨울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3-12-1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영월로 가는 차안에서 이 페이퍼를 읽으며 몇가지 생각이 들어요.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는 그녀를 저도 원생적으로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을 이리 채찍질하는 마음에 응원 날립니다. 건필하시구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37   좋아요 0 | URL
영월행이라, 얼마나 좋으실까
좋은 결과 안고 떠나는 그 여행 그림이 그려집니다.
알바트로스 단상 편에 나오는 그 후배 생각이 간절해요.
(일상에 안주한 절 보고 실망할 것 같아 미뤄두고 있다는 ㅠ)
어제도 사람들 만나면서 느낀 건데,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앞에 장사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런 사람 30퍼센트만 닮아도 좋을 건데...

그나저나 전력을 다하는 그사람들은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1. 불러주는 데 있더나?

 

곽경택 감독의「친구2」는 단순 조폭 영화로 읽히지 않는다. 삶에 관한 여러 은유적 메시시를 담고 있다. 전작이 주는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네티즌들의 평가는 접어두련다. 조오련이랑 바다거북이랑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삶이란 이런 비루한 질문의 연속이고, 그런 질문들에 괜찮은 답이 있을 리 없다는 걸 말해주는 영화이다. 폼 나게 살고 싶지만 결코 폼 나지 않는 삶의 비애를 조폭 군단의 형식을 빌려와 들려준다.

 

 

‘어른 남자가 내 편 들어준 게 그때가 처음입니더.’ 동수의 아들 성훈(김우빈)이 준석(유오성)에게 고백할 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독한 격랑의 생채기만 쌓아온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을 얻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천국을 만난 기분이 된다. 사람은 많아도 내 편은 드물다는 것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후회할 선택만 하고 사는 게, 그게 건달이라고 준석은 읊조린다. 어찌 건달만 그렇겠는가? 삶 자체가 후회라는 선택의 연속이다. 후회 없는 삶이란 후회하지 않기로 한 그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삶 자체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때 그 시간에 열심히 할 걸,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등등 후회로 점철된 시간이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건달이 쪽팔리면 되겠나,고 준석은 말한다. 건달만 그러할까. 누구나 쪽팔리면 얼굴 들기 힘들다. 건달에게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솔직한 멋이라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용기조차 없기 때문에 더욱 쪽팔림을 감수해야 한다. 저 대사를 뒤집으면 보통 사람들은 쪽팔림을 쉽게 팔면서 산다는 말과 같다.

 

 

모든 걸 잃은 뒤, 어디로 가겠냐는 부하의 말에 준석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를 던진다. ‘나를 불러주는 데가 있더나?’ 늙으면 아픈 재미로 산다는 페이소스 강한 준석의 말에 빗대자면, 변방으로 밀리면 외로운 재미로 산다. 그게 삶이다. 한때는 치열하게, 더러는 울컥하며, 끝내 외롭게 스러져 가는 것, 삶의 허무를 영화는 조폭이란 그림을 빌려와 극적으로 보여준다.

 

 

 

 

 

 

 

 

 

 

 

 

 

 

 

 

 

2.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과 남쪽의 소도시 통영은 다소 생뚱맞은 조합이다. 하지만 백석의 연애사가 통영과 관련 있기에 사람들은 백석과 통영을 함께 떠올린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덕에 우리는 통영에서의 백석 행장을 상상으로나마 그려 볼 수 있다.

 

 

통영 ‘천희’ 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처녀’를 천희라고도 불렀나 보다. 동료 기자의 소개로 백석은 통영 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蘭)’(박경련)을 만난다. 시인이 24살 때였다. 란의 부모에게 청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란과 결혼한 사람은 바로 백석과 란을 연결해준 그 친구였다. 시인은 큰 상처를 얻었지만 그 덕에 우리는 바람결 같은 그의 통영 관련 연시를 낭송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란 시에서 란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 대한 서운함을 언급한다.「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나지막한 집에서 지아비와 어린 것 옆에 끼고 대굿국으로 저녁을 먹는다고 노래한다. 통영에 와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단 한사람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외로이 대구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통영」이란 제목의 시 두 편을 연결하면 백석의 ‘란’에 대한 그리움의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날,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 도시에서 미역오리 같이 마르고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한 처녀를 객줏집 마루방에서 만난다. 처녀는 ‘명정골 정당샘’ 근처에 산다고 들었다. 물 긷는 여인네들 가운데 혹시 ‘란’을 만날까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바닷사공이 된 심정으로 길 건너 정당샘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만나지 못한 사랑은 시가 되었다. 백석의 로맨스를 알고 통영에 가는 이라면 명정골 정당샘과 충렬사 계단을 무시로 지나치지 못한다. 먼 타향 사람 백석마저 붙잡아 놓는 힘 이것이 통영, 아니 사랑이 위대한 이유이다.

 

 

 

3. 언어는 사람을 규정한다

 

뜨는 드라마 중에 ‘응답하라 1994’가 있다. 시대상에 맞지 않는 일일드라마나 재벌과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루는 미니시리즈와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내용이라서 꼭 챙겨본다. 거기서도 우리식의 위계질서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씁쓸하면서도 공감을 하게 된다. 같은 나이인줄 알았던 대학 동기가 두 살이나 어리다는 걸 알게 되자 등장인물은 다짜고짜 누나 행세를 한다. ‘나이도 어린 게 누나 앞에서 까불고 있다’는 사회가 가르쳐준 고정관념을 내세워 우위를 점하고자한다. 상대남의 멱살을 잡고 수직 관계를 인정하라고 윽박지른다.

 

 

언어는 형식을 낳고,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소통 부재를 경험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모순된 언어 형식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말의 형식은 세밀한 등급까지도 규정한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할게, 해줄게’ 등이 뜻하는 바와 같이 말꼬리 형식에 따라 타자와 나의 계급은 분명하게 규정된다.

 

 

대학입학 후에도 자기소개를 할 때 몇 학번인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밝힌다. 새내기인지 재학생인지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내가 어떤 계급 구조를 형성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탐색자료로서 그 학번놀이가 필요한 것이다. 따르고 거둔다는 명목으로 선후배의 선을 가르지만 실은 위계질서에 자연스레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사회에서부터 굳어진 이런 불문율은 사회에 나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행여나 이런 질서에 저항이라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너 몇 년 생이야? 민증 까 봐.’, ‘새파란 것이, 니 에비랑 내가 친구다.’ 등등의 익숙한 언어폭력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숫자놀음으로 예시되는 이런 위계 체제가 진솔한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이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구축되어온 세계관이 불편할지언정 질서유지에는 더할 나위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 불편보다는 질서 유지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언어형식의 노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4. 수전 손택의 젊은 날

 

거의 매일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너무 어려(젊어) 격정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칼날로 스스로를 베거나, 세상을 향한 분노나 원망이 주된 내용이었다. 청춘이 괴로워 그저 기록함으로써 심리적 해방을 맛보던 시절이었다. 돌아서 들쳐보는 일기장은 회한과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누가 볼까 부끄럽고, 스스로도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일기장은 모두 불쏘시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을 일기로 읽는다. 일군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고 태울 때 누군가는 내밀한 일기장을 남겨 잊고 지냈던 과거나 사유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손택의『다시 태어나다』는 총 3권으로 기획된 그녀의 일기 중 첫 번째 책인데, 사춘기 시절부터 청춘 부분을 다루고 있다.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랑, 결혼 생활의 갈등과 환멸, 사물과 대상에 대한 거침없는 눈썰미 등의 보고서로 읽힌다.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는 그녀의 공적인 책들과 비교해 격정과 수치와 회한의 옷섶을 풀어놓은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사람살이는 참으로 비슷하구나, 하는 위안을 받는다.

 

 

동성애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두 여자에게서 느낀 자신만의 수치심과 모욕과 고통과 자괴를 지나치리만큼 진솔하고 가혹하게 고백한다. 개인적 정념을 넘어 그녀가 보통 사람과 달랐던 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기 확신과 끊임없는 열정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넘어 그녀에게는 지적 갈망이라는 거대 우물이 있었다. 스스로 판 그 우물에 문학과 음악과 영화와 비평이라는 샘물이 흐르도록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모든 열망은 오로지 작가로 거듭나겠다는 꿈 하나로 연결되었다.

 

 

손택 자신의 청춘 보고서는 사적인 일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번지고 무너지는 자아를 다잡아 어떻게 창의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준다. 누가 뭐래도 욕망은 다양하고 자아는 개별적이다. 육체적 욕망과 지적 욕구를 스스럼없이 발산해 나간 그녀의 젊은 내면이 그녀가 남긴 인문학적 저술의 예술혼이었음을 알겠다.

 

 

 

 

 

 

 

 

 

 

 

 

 

 

 

 

5.눈 맞추기

 

마음이 아픈 아이들은 잘 웃지 않을뿐더러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아이들이 눈 맞추기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닿고 싶은 별과 오르고 싶은 나무와 맞대고 싶은 바람에 대해 그 아이들도 누군가와 눈 맞추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른들의 시선은 대체로 태생적으로 웃음이 많거나 담백한 명랑함을 지닌 아이들에게 먼저 가닿았다. 마음 깊이 앓아보지 않은 그들 그룹은 실은 누군가 애써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는 나무가 될 터였다.

 

 

잘 웃지 않는 아이들은 ‘평온한’ 그들이 부러웠다. 관심 받지 못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상처가 되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눈빛에 고인 사연은 절절해졌다. 외면에 지친 아이들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사랑 받지 못했고, 사랑 받지 못하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패감이 그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단순한 패배감이 아니라 고착에 가까운 자기포기처럼 보였다.

 

 

명랑한 아이들이 가벼운 랩 리듬처럼 슬리퍼를 끌며 지날 때 웃지 않는 아이들은 슬리퍼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곁을 지났다. 더욱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왼쪽 목덜미의 사마귀마저 가리느라 한껏 움츠린 자세가 되는 것이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은 이 세계야말로 모순적인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공정한 눈 맞추기를 할애하지 않은 어른들의 잘못이었다.

 

 

그 맘을 열어주는 데는 끊임없는 눈 맞추기 말고 아무 것도 없었다. 여백조차 없는, 마음의 얼음성을 쌓는 아이들과 눈길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눈치만 웃자란 그 아이들에게 가식과 형식은 금물이었다. 그들 마음에도 빨주노초파남보 풍선은 부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맘속의 풍선이 맘껏 날 수 있도록 누군가의 눈 맞추기는 계속될 것이다. 눈 맞추기는 상처를 아는 자가 상처 입는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일 터였다. 누군가의 상처를 안다고 말하기 전, 가만 다가가 그 아이와 눈을 맞추는 당신이라면 당신도 상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6.착한 사람 콤플렉스

 

한 친구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칭찬이 자신더러 ‘착하다’고 하는 것이라고. 학창 시절 과 야유회를 갈 때 그 친구는 이십인 분의 김밥을 자취방에서 홀로 쌌는가 하면, 오갈 데 없는 친구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쌀독은 자주 비었고, 좁은 방엔 친구들이 흘리고 간 머리카락들이 뒹굴곤 했다. 잦은 방문에도 쌀 한 줌 밑반찬 하나 챙겨오는 이 없었고, 머리카락 뭉치 한 번 치워주는 이 없었다.

 

 

자신이 좋아서 베푼 호의였지만 사람이기에 갈수록 서운한 맘이 들었다. 어느 날 그런 고민을 다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 친구의 충고는 이랬다. “걔들, 친구 아니야. 당장 끊어. 니가 베푸는 친절이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면 그건 좋은 게 아니야.” 그 이후로도 친구는 소위 ‘빈대붙는’ 그 부류들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친구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어찌 친구일 수 있겠는가. 친구사이일수록 예의와 양심에서 멀어져서는 곤란하다.

태생적 성정이 착한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착하다. 하지만 누가 자신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착하다는 말 속에는 ‘너는 착하니 어지간히 만만하게 대해도 괜찮지?’라는 숨은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나를 적절하게 연기하며 살아간다. 저마다 페르소나라는 예의의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천성이 착한 사람은 자신이 그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착한 사람은 진짜 나와 가짜 나의 경계가 덜하다. 하지만 대중에게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진짜와 나 사이의 싸움으로 내면의 기를 탕진한다. 착한 사람은 상처 받기 쉽고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에너지 낭비에 휘둘린다. 둘 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이다. 하지만 ‘세상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7. 시청률의 노예

 

한 방송작가를 두고 일부 시청자들이 퇴출 운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 의 임성한 작가가 50회 분의 연장 방송을 요구한 것이 발단이란다. 시청률이 좋다는 것을 볼모로 작가는 방송사를 상대로 슈퍼 갑 행세를 하고, 방송사는 광고 완판을 보장해주는 작가의 눈치만 본다.

 

 

문제는 개막장 드라마를 쓰더라도 시청률만 높으면 그만이라는 방송가의 생각들이다. 시청률에 집착한 작가는 작가정신이나 작품성은 물론 시청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도 생각지 않는다. 관심 끌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에피소드라도 적극 활용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느닷없이 중도하차 시키는가 하면, 개연성 없는 죽음으로 이끌어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만든다. 기이한 장면들과 대사들도 빈번하게 동원한다. 유체 이탈에다 귀신 출몰은 예사이고, 기괴한 시집살이 장면은 애교를 넘어 실소를 부른다. 이해할 수 없는 총체적 현상들이 드라마를 지배한다. 그래도 시청률은 높다. 아니, 그래서 시청률이 높다.

 

 

대중의 심리는 묘하다. 정돈된 드라마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정신줄을 놓게 된다. 작가와 방송사는 그것을 십분 활용하고 시청자는 불편한 내용인 걸 알면서도 단순한 호기심에 같이 놀아난다.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 시청률 높은 작가는 광고 완판을 부르고, 콧대 높아진 작가는 집필부터 캐스팅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작가 앞에서 방송사는 윤리고 양심이고 따질 겨를이 없다.

 

 

품위를 버린 그들이 쌍으로 돈의 노예가 될 때 시청자가 나서면 되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막장 드라마 따위는 안 보면 그만이라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만큼 시청자의 심리를 대변하는 말도 없다. 비상식적이고 말 안 되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욕하고 분노하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게 일반대중의 역할이다. 시청률을 무기로 슈퍼갑이 된 작가는 대중을 우롱하고, 방송사는 직무유기로써 그 책임을 회피한다. 대중은 욕하면서 그 시청률을 높여준다. 이것이 삶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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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2-0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서도 선 후배 위계질서가 있지만 선후배끼리도 친구가 되자고 합의하면 서로 말을 편하게 하던데 우리나라는 그런 점에서 과도하게 융통성이 없죠.서열을 나타내는 호칭은 많은데 소위 평등호칭은 없어요.그래서 호칭 가지고 머리끄댕이와 주먹다짐이 많죠.

다크아이즈 2013-12-05 19:21   좋아요 0 | URL
생각 외로 호칭, 나이, 선후배 등등 위계질서가 가져다 주는 폐단이 많사옵니다.
가만 둘러 보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거기에 있어요. 이걸 가장 역겨워 하는 그룹이 김상봉 교수 측들 - 도덕교육의 파시즘, 이 책은 읽을 때마다 공감 또 공감해요.

오늘 국회도 보니 가관이던데요. 재선 주제에 삼선 보고 대드냐고 난리고, 니 나이 몇 인데 깝치냐고 따지고... 에휴~

곰곰생각하는발 2013-12-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팜므 님이 게을러터져서 그렇지 이런 모음 형식은 최고입니다. 잠을 좀 줄여가면서 일주일에 한 편이라도 페이퍼를 좀 올려주십시요. 모두 다 호강하게 말입니다. 흠흠..


아동치료 하니... 옛날에 읽은 딥스'라는 책 생각나네요. 누나가 아마 학과 공부 땜에 산 책이었는데 고거 되게 잼있더라고요...

다크아이즈 2013-12-05 19:23   좋아요 0 | URL
푸핫핫~~!!!
맞아요, 게을러 터져서 - 저 좀 어찌 안 될까요? 안 게을러 터지고 싶사와요.
잠을 팔아 체력을 보충하려니 이런 사단이 ㅠ
그러보 보니 곰발님이 더 위대하게 보이옵니다^^* 크~

딥스는 초등 고학년 필독서라 논술 수업할 때 활용하지요. 정작 애들 읽기엔 두껍고 중복되어 별로 안 좋아해요. 어른이 읽고 반성하기 좋은 책이지요.

양철나무꾼 2013-12-0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닿고 싶은 별과 오르고 싶은 나무와 맞대고 싶은 바람에 대해 그 아이들도 누군가와 눈 맞추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른들의 시선은 대체로 태생적으로 웃음이 많거나 담백한 명랑함을 지닌 아이들에게 먼저 가닿았다. 마음 깊이 앓아보지 않은 그들 그룹은 실은 누군가 애써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는 나무가 될 터였다.

너무 이쁜 문장인데, 너무 아픈 문장이기도 하네요.
잘 지내시죠?

다크아이즈 2013-12-05 19:20   좋아요 0 | URL
아, 양철님 제 맘을 알아주시는 것 같아 눈물 나려 해요. 저 문장 - 현장에서 얻은 저만의 경험이에요. 어른이고 애들이고 상처가 바탕이 된 이들은 눈 맞추기를 잘 못해요.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고 잘 사는 아이 어른들은 굳이 눈 맞출 필요 없어도 되는데 눈을 잘 맞추고, 정작 눈 맞춰야 할 아이 어른들은 일단 피하고 봐요. 어릴 때부터 한두 개씩 경험한 상처가 누적되어 '저이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야. 나 보다 매혹적인 동료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거야.' 이런 단정으로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지요. 그건 분위기와 눈빛으로 감지해요.

어린아이든, 중고생이든, 어른이든 눈 피하는 사람은 거의 상대(학교 선생이든, 자기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전 의식적으로 그들에게 눈길을 더 줘요. 하찮은 걸로 상처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들이 눈길을 피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들에서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뚱뚱하니까 싫어할거야. 이쁜 사람들만 사람들이 좋아할거야. 내 손가락이 굽은 걸 상대는 싫어할 거야.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눈 마주치기를 거부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건 그들 잘못이 아니에요. 이미 숱하게 자잘한 경험치가 쌓여 그들 마음 문을 닫게 한 거거든요. 나는 니 편이다, 하고 진심으로 다가가기의 과정이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인이나 애들에게나 그 느낌은 꼭 같아요. 사람이 상처이면서 사람이 곧 위안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양철님도 여전하시지요? 바쁜 중에 독서 게을리 하지 않는...
오늘 밤도 평안하시길^^*

세실 2013-12-0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는 특히 온전한 내편이 드물어요. 다들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보다 로비스트가 승승장구해요.ㅠ
통영 가고 싶어라. 참 아기자기하면서 아름다운 곳이죠
내년도 다이어리에 십이월부터 일기 쓰고 있어요^^

다크아이즈 2013-12-06 16:57   좋아요 0 | URL
저야 직장 생활을 안 해봐서 깊은 내막은 모르지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요. 뭐.
피 섞인 관계 말고는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 이런 신조가 직장 생활, 사회 생활에 적용되나 봐요. ㅋ
강좌생으로 만난 초중고생, 어른들 중에 유독 눈 맞추기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상처를 알 것 같아 더 맘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요. 편애의 영역에서 늘 벗어나 있었던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어요. 뚱뚱하다고 선생님이 자신을 구박했다는 초등생의 고백이 짠하더라구요. 그 이후 그 어떤 선생님도 믿지 않게 되었대요. 외모로 판단하지 않기, 그걸 실천하려고 해요. ^^*

노이에자이트 2013-12-06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른들도 청소년에게 존대말하자고 권고해요.팜므 느와르 님도 동참해주세용~

다크아이즈 2013-12-06 17:01   좋아요 0 | URL
노이님 당연하지요. 독서지도사 과정 수업 중에 누군가 물었어요. 초등생을 상대로 수업할 때 말 놓으면 되지요, 하고... 저 깜짝 놀라서 그건 아니라고 답해줬어요.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생들 앞이라고 말 놓으면서 수업한다는 발상 자체가 저는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학생들 앞에서 존대어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분위기가 훨씬 좋아요. 아이들도 존중 받는다 생각할 것이구요.^^*

2013-12-06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심기

 

  ‘마음으로 느끼는 기분’을 심기(心氣)라고 한다. 상대의 심기를 너무 헤아려도 진상이요, 그 심기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면 밉상이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 입지를 높이려 욕망하는 자는 은근히 권력자의 심기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백성 입장에서는 둘 다 똑 같아 뵌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지난 달 박대통령이 영국 방문을 했을 때 런던의 모 극장에서 한국영화제 특별시사회가 있었단다. 애초의 영화제 개막작은 <설국열차>또는 <관상>이었다. 하지만 박대통령이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숨바꼭질>로 바뀌었다나. 설국열차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빗댄 계급투쟁 이야기라서 안 되고, 관상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 찬탈을 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안 된다는 식이다. 인사차 들러 예고편 2분을 보고 떠나는 VIP를 위한 배려치고는 너무 심한 자기검열이다.

 

 

  실제 대부분의 권력자는 나무라지 않고 핀잔하지도 않는다. 심기 불편할까봐 주변인들이 알아서 기는 게 문제다. 재외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보태는, 의례적 행사 참석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지나친 헤아림’이 도리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화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물론 반대로 죄 없는 가진 자에게 도발을 감행해 심기를 자극하는 주변인도 많다.

 

 

  세상일은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남 뜻대로 될 때가 훨씬 많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남이 옳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 가진 자나 권력자들이 그들 맘대로 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주변인들이 앞서서, 그들 말이 다 옳으니 그들 심기만을 살피겠다고 한다면 못 가진 자, 안 가진 자의 심기는 누가 보살피나? 언제나 타인은 옳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진 자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심기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있다. 도발해서도, 눈치 봐서도 안 되는 오묘한 심리가 인간의 ‘심기’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겠다.

 

 

 

2. 과잉교정인간

 

  ‘과잉교정(overcorrection)’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강제로 책임지게 하기 위해 특정 행동을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게 해 문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심리학 용어인데 문제 행동이 수정될 때까지 강제로 반복시키는 방법이란다. 잘못된 행동이 지나치게 일어날 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 말은 행동 주체나 교정 조력자 양측 다 ‘지나친’ 부분이 있을 때 쓰이는 것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음식을 흘릴 경우 단순히 흘린 음식을 치우는 것을 넘어 바닥 전체를 닦게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놓을 때까지 반복해서 제 자리에 정돈하게끔 하는 것도 과잉교정에 해당된다. 이것의 단점은 지나친 반복으로 반항심이나 적대감 등을 키울 수 있고, 강압적 훈련으로 인한 윤리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흔히 ‘오버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잉교정 용어 자체의 뉘앙스에서 보듯이 뭐든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

 

 

  과잉교정이란 말에서 파생되어, 네티즌 사이에서 회자되는 용어가 ‘과잉교정인간’ 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이는데 표준어, 맞춤법, 띄어쓰기 등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이거나 이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한다. 잘못된 언어를 쓰는 게 좋을 리는 없지만 ‘과잉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콕콕 집어 교정하려는 태도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음을 꼬집는 것이리라.

 

 

  말의 규범을 지키는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기본자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말의 노예가 되어 시시콜콜 그 잘못을 지적하려 든다면 피곤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영역이 언어 분야이다. 생활이 바뀌는 것만큼 언어는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언어의 사회성을 인정하는 융통성과 언어 규범을 지키려는 원칙,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 자체가 ‘오버’인 게 우리 언어 활용의 현 주소인지도 모르겠다.

 

 

 

3.강박은 예술을 낳고

 

  프로이트가 진단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러 강박증을 지녔다. 해부도에 능한 다 빈치였건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릴 때, 남자 몸은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여자 몸은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렸다. 다 빈치가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다 빈치는 또한 어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강박적이리만큼 세부적 회계 방식으로 기록했다. 얼핏 어머니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냉혈한 같아 보이지만, 괴로움을 표출하는 다 빈치의 다른 방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조차 이성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서자로 태어난 다 빈치는 계모에게 입양되는데, 생모와 함께 했던 기간 동안 모자 관계는 무척 돈독했다.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의 교제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프로이트는 추측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불가해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잡을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며 모나리자 속에서 어머니의 미소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가 미완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 밑에 자란 아들은 강박증을 가지기 쉽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들이 완벽하기를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빈치의 경우 그런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림을 왜곡하거나 미완으로 남긴 셈이다.

 

 

  프로이트의 눈에 비친 그는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모성과 분리되지 않은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강박적 집착이 다 빈치의 예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감성과는 멀어 보이는 치밀한 계산과 과학의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내면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강박의 소산물일 수도 있다는 게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강박 증세를 품고 있다. 예술가는 그것으로 꽃을 피우고, 평범한 이들은 그것이 꽃이 되는지조차 모른다.

 

 

 

4. 그림으로 공자 읽기

 

  조정육 선생의 ‘행복한 그림읽기’라는 블로그가 있다. 담백하면서도 분명한 논지의 글이 올라와 내 취향에 맞춤하다. 여러 카테고리 중에 그림으로 읽는 공자, 라는 코너가 있다. 공자의 활동 상황이 그려진 고전 그림을 제시하고 관련 고사 성어를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시리즈물이다. 내 짧은 소견으로 다른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관련 그림을 찾아내는 수고도 대단한데다, 그것으로 독자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 중 오늘 읽은 ‘인번거노’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공자가 정치할 때 장사치는 저울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을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자 덕에 강해지는 노나라에 위기를 느낀 이웃 제나라가 계책을 꾸민다. 미인계를 써 노나라 군주가 미혹에 빠지면 공자가 충언을 할 테고, 충언을 멀리하게 된 군주에게 환멸을 느낀 공자가 결국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제나라가 원하는 대로 노나라 군주는 환락에 빠졌고, 자로가 스승인 공자더러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공자는 ‘주군이 하늘에 제사 지낸 뒤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인번거노)’라고 답한다. 고기를 받지 못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난다. ‘그깐 제사 지낸 고기 못 받아 삐쳐서 떠나는 놈’으로 떠날 구실을 만든 것이다.

 

 

  그건 공자의 진심이 아니었다. 공자가 달리 공자이겠는가. 어차피 떠날 몸, 구차하게 군주가 싫어서 떠난다고 핑계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짐을 졌다. 남은 군주를 위한 배려로 위악을 떤 셈이다. 너무나 공자다운 생각이다. 충언이 통할 때까지 계속 설득하면 좋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멈추고 떠나는 수밖에 없다. 떠나는 와중에도 주군을 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선한 자를 위한 방패막이가 아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던가. 공자가 아니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5.굴원과 어부

 

  전국시대의 굴원은 초인의 노래인 초사(楚辭) 문학에 능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어부와 굴원이 나눈 대화체 이야기를 되새길 때마다 굴원보다는 어부의 말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무래도 어부가 현실적인 인물이라서 그럴 것이다. 굴원만큼 강직한 사람은 문헌 속에서나 흔하지, 일반적으로는 작품 속 어부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청렴결백한 굴원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굴원의 죄라면 완전무결함이 가장 큰 죄였다. 잘못하지 않음이 죄가 되는 건 잘못 많은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제 그의 할 일은 수척해진 몸으로 강호에서 시나 읊는 것이었다. 어부가 물었다. 큰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굴원이 답한다. 혼탁하고 취한 세상에 홀로 깨끗한 채 깨어 있다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어부가 충고한다.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 따라 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모두 탁한 물이면 진흙탕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고, 모두 취했으면 싸구려 술을 마시면 되지 고매한 처신으로 추방을 자처할 일이 무엇이냐고. 굴원이 응한다. 머리를 감았다면 관을 털어 쓰고, 목욕을 했다면 반드시 옷을 털어 입어야 한다고.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그럴 바엔 강물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겠다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순 없다고. 지친 어부가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다.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타협을 강조하는 어부의 삶과 대조적으로 굴원의 강직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이란 강물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어부가 부른 창랑가처럼 한 세상 둥글게 살아가는 게 범부(凡夫)의 일상이라는 것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해 굴원은 제 강직한 삶을 빗대어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범부 부처되기가 위대한 건 그렇게 된 분이 오직 부처 한 분이기 때문이리라.

 

 

 

6. 겸허해지기

 

  다시 수전 손택이다. 1961년 어느 봄날의 일기에서 그녀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루에 스무 번씩 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시린 무릎에 전율이 일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다.

 

  온통 나라가 시끄럽기만 하다. 한쪽에서는 NLL 포기 발언에 대해 물고 늘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거품을 문다. 민생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안을 두고 지겹도록 몇 달째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들어 보면 모두 옳다. 일을 벌이는 쪽에서는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고, 꼬투리 잡는 쪽에서는 그 입장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단다.

 

 

  정치가 시끄럽고 관계가 뒤틀리는 건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그를 수 있고,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왠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니, 그게 두려워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과격한 삿대질을 곁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치졸한 속성을 파악했기에 젊은 수전 손택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하루에 스무 번씩이나 가슴에 새겼으리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긍정의 효과를 발휘하는 썩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 타인도 귀하게 대접한다고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이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고, 정치 현실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다 보니 서로 배려하는 미덕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흠 잡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너무 확고하면 아집이 생기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최소의 겸허 모드를 곁에 두었기에 손택은 그토록 진솔한 자기성찰에 가닿을 수 있었으리라. 진정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일수록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걸 알겠다.

 

 

  

 

 

 

 

 

 

 

 

 

 

 

 

 

7. 시크와 시니컬

 

  의외로 대중들이 잘못 알고 쓰는 외래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크’(chic)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 단어를 내 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뭔가 도도하고 무심해 타인의 의사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더러 ‘시크하다’고 표현해왔다. 우연히 인터넷 게시물을 보다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당황했다. 당장 사전을 검색해 봤다.

 

 

  시크하다 - ‘세련되고 멋있다’라고 되어있다. 도도하다, 차갑다, 등 소위 ‘쿨하다’는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잘못 알고 쓴 경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크란 말은 패션용어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독일어로 세련되고 맵시 나는 경우를 일컬을 때 쉬크(schick)라고 한단다. 프랑스어(chic)를 거쳐 영어로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선 시크란 신외래어로 쓰이는 모양새다. 화려한 원색이 아니라 흰색과 검정색 톤의, 차분하면서도 도회적 감각을 추구하는 패션을 두고 시크하다는 표현을 썼다. 세련되고 멋있다, 라는 패션 용어와 도도하고 차갑다는 성격 이미지는 묘하게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을 규정할 때도 시크하다는 표현을 하게 된 모양이다.

 

 

  시크란 말이 무심하고 도도하다는 의미로 쓰인 건, 비슷한 단어인 ‘시니컬’(cynical)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냉소적인 데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이 시크와 비슷한 발음인데다 어쩌면 시크의 어원이 시니컬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더러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 사람 시크해.’라고 말해왔다. 한데 그 원뜻이 그 사람은 세련되고 멋있어, 라는 것이었다니 위로가 된다.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인 도회풍 사람들이 멋있고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니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크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이 순박한 성격을 지녔다면 어딘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약간은 시니컬한 사람이 적당히 시크한 패션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니 시크한 자 시니컬해도 용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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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강박적으로 나는 좋은 놈이 아니다, 좋은 놈이 아니다, 좋은 놈이 아니다' 라고 하다보니 선생님께서 그러더군요. " 아니야, 넌 좋은 사람이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단다. " 라고 말해서 요즘은 그냥 난 좋은 놈이다, 난 좋은 놈이다, 난 좋은 놈이다 라고 자기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12-05 08:18   좋아요 0 | URL
ㅋㅋ 자고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어야(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심리학 책이 가르치잖아요. 근데 스스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근거없는 자기긍정이 불편할 때도 있더라고요. 진짜 괜찮은 사람은 그냥 가만 있기만 해도 아우라가.
어쨌든 결론은 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무한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는 것. 뭐 그 정도에요.
곰발님은 여전히 완전 알라딘 접수 중이시지요?

단발머리 2013-12-0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돌아오셔서 기뻐요~~
소개해주신 책들 다 좋은데, 좀 어려울듯 하기도 해요.^^
어부의 이야기 너무 좋은데요.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다크아이즈 2013-12-05 08:20   좋아요 0 | URL
단발님 반갑습니다.
솔직히 어려울 거야 없지요. 지겨운 부분은 있겠지요. 그건 패스하면 될 것이야요.
굴원의 어부사, 이거 우리 고등학교 때 배웠나, 아리까리하네요. ㅋ

프레이야 2013-12-0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페이퍼 반가워요.^^
어떤 것이든 과잉은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아요.
지나친 자기검열도 교정도 사랑도. ㅎㅎ
12월의 첫날이자 일요일, 즐거이 지내셨죠?
전 강변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일몰 직전의 해도 바라보고 그랬어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8:23   좋아요 0 | URL
과잉교정, 자기검열, 집착적인 사랑, 자기맹신...
이 모든 게 문제의 시발점. 인간 자체가 연구대상인 것만은 분명하옵니다. ㅋ
강변 공원이라면 부산을 벗어난 어디를 가신 게야, 그쵸?
좀 바지런해져서 알라딘에 자주 오기를 바랄 뿐이어요^^*
싸랑해여~~

너무좋아 2013-12-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12-05 08:2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너무좋아님.

그나저나 너무좋아를 남발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ㅋ

oren 2013-12-0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음미할 게 많은 좋은 글들을 팜므님께서 한꺼번에 여럿 올려주시니, 오랫만에 알라딘에 등장하신 잘못(?)을 모조리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듯싶어요. 여러 꼭지의 글이라 한꺼번에 댓글을 달기도 어렵다 싶지만, 서로 잘났다고 떠드는 정치판과 공자님의 은퇴와 굴원의 시까지 연결지어 생각해 보니 어제 읽은 책 한 대목을 덧붙이고도 싶네요.
* * *
"왕이 말했다. 짐은 아무쪼록 우리 왕국의 국사를 잘 처리할 수 있는 신중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오. 그러자 퇴임하는 대신이 말했다. 오, 폐하, 그렇게 슬기롭고 능력 있는 인물이라면 이와 같은 일에는 끼어들려 하질 않을 것입니다." 아아, 슬프게도 그 퇴임하는 대신이 거의 과녁 한가운데를 맞춘 것이라면!
- 헨리 데이빗 소로우,『소로우의 강』중에서

다크아이즈 2013-12-05 08:31   좋아요 0 | URL
아, 오렌님 이거 저한테 꼭 필요한 말이에요.
이거 다음 번 단상에서 써먹게 빌려 가겠사옵니다.
오렌님은 오랜만에 뵈어도 언제나 학구파.
근데 적재적소에 위로가 되는 이런 말들을 어찌 그리 빨리 구해서 전해주시는지요?
언제나 준비된 분 같사옵니다.^^*

페크pek0501 2013-12-0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팜님, 매우 오랜만이 아닌가요?
푹~ 쉬셨습니까? 무척 반갑군요. ^^
저야말로 요즘 쉬고 싶을 지경이에요. 일은 밀려 있고 속도는 나지 않고...
이 긴 글을 다 읽고 나서... 읽기도 긴데, 이 글을 언제 다 쓰셨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이 글을 비롯, 님 덕분에 좋은 글을 많이 읽고 가요.
바쁘시더라도 자주 글을 볼 수 있기를... 바라도 되는 거죠?

다크아이즈 2013-12-05 08:33   좋아요 0 | URL
페크 언니는 잘 쓰고 계셨지요?
열 자매의 맘 좋은 왕언니처럼 알라딘을 생각하기에
제가 감당 안 되면 마구 방치하기도 해요. 하지만 충전되면 또 돌아오곤 해요.
이렇게 언냐가 힘이 되어 주잖아요. ㅋ
 

 

 

 

 

   알라딘 서재 두어 달을 방치했다. 그 어떤 이유도 없다. 게으름이 이유라면 이유이다. 체력과 지력과 시간이 다 모자라는 상태에서, 자기 만족 생계형 과제는 넘쳐났다. 당연히 과부하가 걸렸다. 지쳐 나가 떨어졌다. 알라딘 방치는 제일 순서였다. 그간에도 내 깜냥으로 뭔가 안 될 때 가장 먼저 손을 놓은 건 알라딘이었다. 방치와 방문을 오락가락해도 유일하게 용서되는 공간이 이곳이기에 이런 무례를 자주 저지른다. 

 

 

   알라딘 생각을 자주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잊은 건 아니다.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벗들과는 여전하다. 그 증거가 이 두 책이다. <이모부의 서재>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손수 책을 사들고 와서 우리 그룹에게 건넨 친구 덕에 내 손에 왔다. 책 자체도 좋고, 이모부도 좋지만 나는 여전히 이 책을 보면 그 친구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임호부 작가님께도 작가를 생각하는 친구의 어여쁜 맘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재판, 삼판, 십 판 거듭 된다면 친구의 역할도 상당했을 거라 믿는다. 그 친구, 알라딘에 자주 들어오진 못하지만 항상 응원한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독서공감, 사랑을 읽다>는 우편으로 받았다. 역시 우리 오공주 그룹 중 한 분이 손수 사서 부쳐주었다. 다락방님도 좋아하고, 다락방님의 첫 책(?)인 이 책도 무척 좋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우아하고 깔끔한 이 친구를 먼저 떠올릴 것 같다. 다락방님 원대로 12쇄를 무난히 넘길 것 같은데, 역시 책 사준 친구의 열혈성원도 그 성과에 한몫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이유경 작가님 파이팅, 책 친구도 파이팅! 조만간의 겨울 만남을 기약해. 님이 다음 순서로 책 내면 내가 다락방님께도 사서 부칠게.

 

 

   바쁜 일정 소화한 뒤 만난 모처럼의 여유. 항상 하는 얘기지만 체력, 지력, 시간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지치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한없이 게을러지고 손 놓아버리는 이 오래된 나쁜 습관을 경멸한다. 절대 바로잡기 힘든... 한결 같이 알라딘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성실성 면에서 신뢰한다. 그들은 이겼고, 나는 지고 있는 중이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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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5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12-0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공주 님들도 각각 책을 내시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단독으로도 책 내고 오공주 님이 함께 책 한 권에 글을 싣는 것도 좋을 듯해요.
당연히 저는 사 봅니다. ㅋㅋ

다크아이즈 2013-12-05 08:38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가 먼저 내야 되는 거 아냐요?
언니 단상들 시쳇말로 쩔잖아요. 그것만 정리해도 책 세 권은 거뜬하지요.
물론 저도 사봅니다.^^*

oren 2013-12-0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참 묘한 곳이긴 해요. 여러모로 일상이 바쁘거나, 혹은 일상이 너무 재미있거나, 혹은 살아가는 나날이 너무 힘겨울 땐 '여기'를 돌볼 겨를조차 없을 때도 많은데, 그래도 가끔씩 잊을 만하면 생각이 나서 다시금 되돌아 오고픈, 그런 장소처럼 느껴질 때가 많더라구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8: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못 와도 걱정해주는 이는 있어도 질책하는 이는 없으니 큰 언니 같다고나 할까요?
저 혼자 십자매의 왕언니 같은 곳이 알라딘 서재라 생각하고 살아요.

세실 2013-12-0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공감 저도 받았지요~~~ 우리 오공주 참 좋아요^^
전 뭘 드려야하나? 누군가 또 책을 내면 보내 드려야겠어요. 우리 오공주중 한명이면 좋겠다. 팜므님 아프지 마시고, 체력관리 잘 하시어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8:44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 당근 받았지요.ㅋ
아프지는 않지요. 언제나 게으름이 문제일 뿐.
바쁜 일정 마무리하고 이제 휴식 중. 그래도 맘은 편치 않아요.
뭔진 몰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저를 더 힘들게 하지요.
세실님의 상큼발랄 긍정 화사 이쁜 에너지 조큼 빌리겠사와요.^^*

 

 

 

 

 

 

1. 거꾸로 가는 시간

 

이 글로벌한 세상에 유독 우리 현실만 거꾸로 간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이석기 사태를 둘러싼 정치권 및 언론의 여러 행태는 유행지난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통진당 수뇌부의 ‘과대망상적’ 발언이나 국정원의 ‘내란 음모’ 카드나 일반국민에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구태의연한 두 과거가 그들만의 레퍼토리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국민들은 귀 후비거나 코 파는(곰발님 식 표현ㅋ) 지겨움으로 그것을 구경할 뿐이다. 두 쪽 다 신선하지도 않고, 21세기 정서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국정원이 통진당 수뇌부를 향해 내란예비음모죄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석기 의원 및 통진당 쪽은 예상대로 날조, 왜곡이라고 맞선다. 이석기 그룹의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몇몇 움직임이 내란음모에 해당된다는 것이 국정원의 입장이고, 처음엔 모임 자체를 부정하던 통진당 쪽은 단순한 당내 모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기본 틀에다 변주만 가한 형태인 이런 공안 정국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레퍼토리이다.

 

 

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와 어울리기 보다 마음이 병든 자에 가깝다. 이미 그들 그룹은 국회에 입성할 때나 대선 과정에서 희한한 행보를 거듭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동정의 대상이지 위협적 존재는 못 된다.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내란예비음모 증거 자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을 그 죄몫으로 엮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그들의 정체가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고, 국민을 호도할 만큼 위협적인가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다. 법조계나 언론의 분위기도 그들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볼 정도로 명백한 목적과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쪽이다.

 

 

마음이 병든 자는 치료의 대상이지, 교화의 대상이 아니다. 비뚤어진 정치색이나 고착된 이데올로기는 가두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선 개입이란 악재를 벗어나기 위한 국정원의 전환용 카드인지, 진짜로 내란예비음모를 할 만큼 그들이 통 큰 그룹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에 씁쓸해질 뿐이다.

 

 

 

 

2. 창의력이 필요해

 

하루 종일 단세포생물이 된 기분이다. 시쳇말로 뇌가 너무 청순해진 나머지 또릿또릿한 행보와는 거리가 먼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실수투성이 일상을 꾸리는 건 내게 흔한 일이다.

 

 

우선 독서모임에서 활용한 CD를 기기 안에서 빼내지 못해 허둥거렸다. 몸집이 큰 전문 기기였다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금세 CD 플레이어의 위치를 찾을 것인데 내 눈엔 그 데크가 그 데크 똑 같아 보인다. 기계치다 보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저녁에는 약속 장소를 찾느라 또 헤맸다.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주변 조명이 바뀌니 이 길이 아닌가 싶어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고 있는 거다. 당황하다 보니 선물로 준비한 책을 전하는 걸 깜박하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그건 바람일 뿐이다. 집에 돌아 올 때는 식구들 간식을 사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기다리던 식구들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은 거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한두 가지에 몰두하게 되면 나머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신경이 덜 쓰인 것들이 떠오르면 챙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

 

 

창의적이지 못한 일상이 아쉽기만 하다. 이참에 우스갯소리나 한 번 해야겠다. 곧 죽을 할머니, 내 생명을 구해준 오랜 친구, 꿈꾸던 이상형 여자(남자) 등이 급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로 지나던 나는 오직 한 사람만 태울 수 있다. 누구를 옆자리에 앉힐 것인가? 단순 세포형인 나는 망설임 없이 오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력 만점인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답을 내는 이도 있다. 자동차 키를 친구에게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게 한 뒤, 자신은 이상형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탄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은 차치하고라도.

 

 

두려워서, 당황해서, 예민해서 등의 핑계가 붙은 습관성 어리바리함을 벗어나고 싶다. 빠릿빠릿한데다 창의적이기까지 한 전천후 멀티플 인간형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내 현실은 멀기만 하다.

 

 

 

3. 잡스라는 아이콘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기 전이었다. 한 IT 업계의 대표가 스마트폰의 장점에 대해 설파하는 인터뷰 소식을 자주 접했다. 자신은 몇 년 전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휴대용 컴퓨터가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 검색, 메일 송수신, 사진 촬영 및 편집, 심지어 쇼핑까지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이야기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 못지않게 스마트폰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이 빠르게 세계로 확산된 데는 애플사의 ‘아이폰’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배경에 스티븐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도 지나치진 못한다. 안타깝게도 잡스는 이 세상에 없지만 명실공히 애플사는 세계 IT 업계의 왕좌가 되었다. 잡스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가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전기문을 읽었다. 괴팍하고 특이한 그의 성정 이면에 버림받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추진력 뒤에는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양부모와 절친 사업 동료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만 관심 있다면 잡스가 어떤 인물이었다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다. 잡스에 관한 영화가 나왔다고 했을 때 약간은 기대감에 들떴다. 전기문을 넘어선 뭔가 강한 한 방이 있을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영화로 옮겼을 때의 말할 수 없는 지겨움 같은 게 화면에 흘렀다.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 영화였다. 세상을 뒤집어버린 천재괴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도, 하다못해 혼잣말이라도 들어볼 수 없었다. 버려진 자식으로서의 상실감, 도덕과 불화하는 내면의 혼란, 선불교와 인도에 관심이 많던 히피족으로서의 젊은 잡스, 까다로운 채식성과 어울리지 않는 다혈질 등, 섬세하게 짚을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도 뽑아내지 못했다. 방황하는 잡스,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 잡스를 그리지 못한 영화는 실패작으로 보였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꾸렸다면 이만한 실망감에서는 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전에 잡스에 관한 정보가 없거나 잡스 전기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도 쫓겨날 때 관객들은 왜 쫓겨 나는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게 구성했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잡스로 분한 애쉬튼 커처의 연기력이었다. 그것으로 커버하기엔 감독의 한계가 빤히 드러나는 영화였다.

 

 

잡스라는 아이콘은 너무 선명하고 그 콘텐츠 역시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것이나 영화에 와서는 그 캐릭터도 내용도 흐지부지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별나거나 희한한 짓을 하면 흉보거나 손가락질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미친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런 내용의 내레이션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영화였다.

 

 

 

4. 모든 것의 빌미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배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의 치유 프로그램이 어느 한 쪽만 일방적인 혜택을 보는 경우는 없다. 공감대라는 공통분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끄는 쪽이나 따르는 쪽이나 서로 배우게 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마음상함’에 관한 주제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상처의 근원지인 가족과의 마음 상함에 대해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상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알래스카에 사는 생면부지의 아저씨와는 상처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다. 타인의 풍성한(?) 사례에 비해 비교적 다행한(!) 제 상처에 위안을 삼는 모습은 어디나 같다.

 

 

안에 있는 그들이나 밖에 있는 우리나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뜻하지 않게 우리는 유행가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 내 영혼에 흠집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때 언제나 눈물짓는 피해자는 나이고, 몹쓸 가해자는 상대방이다.(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라고, 자신의 잣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대는 내 영혼을 교란시키고 내 심장을 후벼 판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나도 상대의 뺨을 갈긴다. 순차적으로 쌍방의 영혼에 펑크를 내고 만다.

 

 

그 와중에 멋진 결론을 내 주는 한 분이 있다. 모든 상처의 빌미는 스스로에게 있단다.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생각만 많아졌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고 ‘나’ 아닌 원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단다. 옆 사람이 날 모욕하는 건 내 작은 교만의 턱짓 때문이다. 옆집 아줌마가 내 눈빛을 거절하는 건 오늘아침 그미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바쁘단 핑계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모든 것의 빌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마라. 이 편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 마음 상함 때문에 타인을 단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한 말을 받아 적는 이 순간이야말로 ‘힐링’이란 말이 가장 어울린다.

 

 

 

5. 눈물

 

눈물샘에서 만들어진 눈물은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밖으로 표출된다. 바람 또는 알레르기 현상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환경적 요인의 눈물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 이해 받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인 눈물은 그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띤다.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이 토크쇼에 나와 차례로 눈물을 보인 것이 이슈가 되었다.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자신의 연애사를 들먹이며 사회자들이 약을 올리자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옆자리의 동료 아이돌도 뒤질세라 배턴을 이어받았다. 애교를 보여 달라는 주문에 난감해하자 한 사회자는 숫제 맡겨 놓은 돈 뺏어가듯이 윽박을 질렀다. 겁에 질린 아이돌 출연자는 넘치는 애교 대신 그 누구도 원치 않은 눈물을 보여주고 말았다.

 

 

프로라면 두 경우 모두 농담으로 맛깔스레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아이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자연발생적인 환경적 요인의 눈물처럼 심리적 요인의 눈물도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중들은 그렇게 이해심이 넓은 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아직은 어린 그녀들을 이해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거고, 그래야만 프로라고 생각하는 자체도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덜 이해하는 데서 오는 단정적 언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정리 되지 않고 복잡 미묘한데다, 잦은 스케줄로 스트레스 지수마저 높은데, 멍석도 깔아 주지 않고 내키지 않은 것을 하라니 서러운 눈물만이 솟구칠 수도 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적절히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이십대 때의 여성 감성이 가장 섬세하고 다치기 쉬운데 현 상태가 얼마나 힘겹고 난감할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린 여자의 눈물이 다 연민하고 동정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의 눈물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요청하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주는 이도 필요하다. 누구나 청춘의 강을 건너왔고, 건널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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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석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 방면에는 플라톤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플라톤주의자였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이런 '괴악한 사태'가 오래 전에도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을텐데 '아직도' 아주 가까이서 '현재진행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 뿐이지요.

* * *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

나는 이런 일에 참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이런 가장 못된 사태를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행위를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택하며, 아주 확실하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가장 명백한 원칙을 가지고 자기 영혼의 구제를 찾고,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정부와 관리와 법률을 둘러엎고, 어머니(조국)의 사지를 찢어서 옛날의 적에게 갉아먹게 던져 주고, 동포애를 골육상쟁의 증오심으로 채우고, 마귀와 광귀들을 원군으로 청하면서, 하나님의 법의 거룩한 평화와 정의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해력이 우둔한 수작을 본 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자주 의심을 품어 본다.

야심과 탐욕과 잔인성과 복수심은 그 자체로서 본연의 기세를 충분히 갖지 않았다. 그런 것을 정의와 신앙의 영광스런 자격으로 뜨겁게 해 주고 부채질해 주자.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신보다 더 심한 기만은 없다. 그것은 신들을 구실 삼아 범죄를 은폐한다."(티투스 리비우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다크아이즈 2013-09-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언제나 이렇게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고전 철학자들의 말을 옮겨 오시니, 그 독서력에 감복할 따름인뎌^^*
오렌님의 책 소개 덕분에 제 교양의 지평도 아주 조금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고 황송한 일입니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