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외출했다. 

볼일만 보고 들어오기엔 넘 아까운 한나절.

가까운 곳, 여울님은 전시회 중.


고요한 시선, 시선들

오래 머물렀다. 

불친절한 결기가, 더욱 친절해 보이는 

초겨울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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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0-12-1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여울 님 전시회로군요 !!!

다크아이즈 2020-12-10 19:59   좋아요 0 | URL
아, 곰발님도 좋아하실 테마 같았어요.

라로 2020-12-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울 님이 누구신지 몰라요. 차 색이 예쁘네요. 차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

여울 2021-12-0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챙겨드리질 못했네요. 프레이야님이 알려주셔서 건너왔네요. 따뜻한 차 함께할 수 있길요. 올핸
 





  1. 저녁 먹고 나면 식곤증이 몰려온다. 잠깐 한숨 붙이고 일어나면 열시 반쯤. 더 이상 잠 들지 못한다. 이제 밤을 꼴딱 새기만 하면 된다. 몇 달째 이어지는 나만의 루틴. 밤 새 할 일은 쌔고 쌨다. 글쓰기 프로젝트 수행도 하고, 읽은 책 리뷰도 정리하고, 새 책도 고르고, 사념에 시달리기도 하고.  




여섯 시, 사과와 토스트 각 한 조각을 차려서 침대 머리맡에 가져간다. 남편이 아침 먹는 그 때가 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남편 말에 의하면) 매번 자신이 사과를 다 먹기도 전에 나는 벌써 골아떨어진단다. 출근 배웅 같은 건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대개 일어나면 열시 전후. 코로나 때문에 바깥 활동을 하지 않기에 늦잠이 가능하다. 어제도 밤을 꼴딱 샜다. 토요일이라, 정시에 출근용 아침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침실로 갈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7시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전화 한 통에 잠을 깼다. 




  지인이 잠깐 내려오란다. 책 몇 권을 드리기로 했기에 부은 눈은 안경으로 가리고, 떡진 머리에다 (잠옷 위에) 파카를 걸친 채 부랴부랴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인의 양 손에는 큰 김치통이 들려 있다. 김장을 했단다. 당장 먹을 맛보기용 김치까지 김치통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다. 내 몰골을 보더니, 눈치까지 빠르셔라. 긴 말 하지 않고 후딱 사라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코로나를 들먹이며 자주 만나지 못한 내 여유없음이 부끄러웠다. 




  집에 올라와, 달리 인삿말이 생각나지 않아 '살림 거덜 낼 일 있냐'는 핀잔 섞인 카톡을 보냈다. 김치통은 안 줘도 된다, 는 무심한 다정의 답 톡이 왔다. 이럴 땐 부러 김치통을 비워 급히 되돌려주지 않는 게 예의다, 라고 혼자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김치통 김치가 익어가고 김치통이 빌 때까지 유쾌한 숙제를 지니게 되겠지. 무엇으로 빈통을 채워 되돌려줄까 미소 짓는 숙제.     






2. 급히 우체국에 들러 알라딘 님들에게 책을 보냈다. 다정한 안부도 이쁜 말들도 넣지 못했다. 받는 분들은 이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첫날, 책 알림 글에 <좋아요>를 눌러준 몇 분께도 보내드렸다. 주소가 안 맞아 못 보낸 한두 분께는 다음 주 내로 다시 보내드리겠다. 책을 보내드렸기 때문에 책 안내글은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비공개로 돌렸다. 








3. 북플에서 8년 전 오늘의 글이라면서 글이 뜬다. 내 옛글은 거의 클릭하지 않는다. 이건 이상한 경험인데, 옛날 글을 보면 지금은 저처럼 못 쓸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때 글이 좋아서가 아니라 지금이 덜 절실하기 때문에 글이 잘 되지 않는다는 심정이랄까. 그때도 힘들게 썼지만 지금도 쓰는 게 힘들다면 굳이 짊어지고 갈 필요가 있을까, 늘 그런 강박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쓰기를 멈추진 못한다. 




  너무나 좋아하는 알라디너 한 분께 책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더니 재미있는 덕담을 해주셨다. 내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솔직히 뜨끔했다. 어쩔 수 없이 에세이를 쓰지만, 언제나 내겐 에세이가 더 어렵다. 자기 검열, 문장의 밀도, 진솔함, 인품 등등 에세이에서는 살피고 따지고 신경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시중에서는 붓가는 대로 쓰는 게 수필류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 장르는 아무나 써서는 안 된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기질상 소설이 딱이다. 감추지 않아도 되고, 다 드러내도 되고, 비틀어도 되고, 불편해도 되고... 소설의 강점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나 스스로 소설에서 의미를 찾고 거기에서 힐링이 되는 부류이다.

 


  그 님께 2년 뒤에는 제 소설을 만나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다. 응원해주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니 계속 쓰는 일만 남았구나. 장편이 될지 소설집으로 묶을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4. 알라딘에서 몇몇 지인을 사귀고 좋아하게 된 데에는 <올리브 키터리지> 덕이 크다. 알라딘 하기 전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몰랐다. 이렇게 '아련 돋고' 저렇게 가슴 저미는 작가라니! 그 책을 프레이야님이 선물해줬는데, 첫 챕터 약국, 만 읽고 바로 빠져 버렸다. 왜 그 책을 선물해줬는지 알 것 같아 마구 껴안아주고 싶었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원서로 읽고 낭독으로 듣는 라로님과도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났을 때, 언니, 올리브 키터리지 몇 번이나 들어도 좋아요. 언니도 들어 봐요. 했는데 너무 슬펐다. 까막귀가 원서 히어링이라니. 그 정도는 될 거라고 단정 짓는 라로님의 순정을 나는 미워할 수가 없다.) 그 두 분과 친한 오기 언니와 세실님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지금은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게다가 알라딘 말고도 여러 소셜 매체가 있으니 그쪽으로 옮겨 탄 이도 있다.) 난 다른 곳은 하지 않으니 소통하려면 싫으나 좋으나 알라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옛글들을 보면서 십 여년이 되어 가는 그때가 다들 알라딘 시절의 피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몇몇 터줏대감 빼고는 모르는 분들이 더 많다. 알라딘을 꿋꿋이 지키는 몇 분들, 진짜 존경스럽다. 한결 같기가 얼마나 어렵던가. 




  각설하고, <올리브 키터리지>는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소설이다. 독서회에서 이 책을 권했을 때, 열광하는 이는 한 분도 못 봤다. 앨리스 먼로 작품을 더 쳐주는 눈치였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시리즈로 방영된다고 언젠가 라로님이 말했다. OCN인 것 같았다. 넷플릭스에는 안 올라와서 무지 서운하다. (지금은 되는지 모르겠다.) 혹, 올리브 키터리지 한국어로 방송되는 매체 아시는 분 덧글 달아 주시면 감사. 유튜브에 감질맛나게 올라오는 것 이 년 전인가, 본 적 있는데 그것만 봐도 눈물 날 것 같더라. '강' 부분이었던가. 



  어쨌든 <다시, 올리브>가 나왔다니 얼씨구나 지화자다. 바구니에 담고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시도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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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29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를 사 놓았어요. ‘약국‘이란 작품을 팟캐스트로 열 번쯤 들은 게 생각나서요.
들을수록 좋거든요.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에서 들었는데 단편이라 전문을 읽더라고요. 이 책에 있어요.
다른 작품도 하나씩 읽어 볼 참이에요. <다시 올리브>는 아직...ㅋ

다크아이즈 2020-12-06 16:34   좋아요 0 | URL
우리 소설에도 올리브 키터리지 같은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읽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많이 부러운 건 사실이지요.

라로 2020-11-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어깨 힘 빼고 쓰시는 글 같아서 언니가 더 가깝게 느껴져요~.^^;; 가끔은 이런 글 올려주세요!!
음, 제가 그렇게 눈치가 없고, 늘 제 생각만 해요.ㅠㅠ 그러고 보면 프레이야 님은 정말 센스 만점!! 그런 점은 늘 배워야 하는데,,, 저는 배워도 배우는 그 순간,,,천성이니 다른 분들의 이해를 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ㅠㅠ
[다시, 올리브]는 자꾸 생각하면 [올리브 키터리지]보다 더 좋기도 해요. 아마도 제가 점점 늙어지고 있다는 것이라서 그런지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더 그럴까요? 저는 올 오월에 한 번 읽었는데 여유가 생기면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어쨌든, 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드시나요? 우리 건강 잘 챙겨요, 언니!!!!!!!

다크아이즈 2020-12-06 16:35   좋아요 0 | URL
힘 자체가 아예 없어요. ㅋ
개인적인 글이 아니면 힘이 들어가게 보이나 봐요. 그치요?
한 세상 설렁설렁 살고 싶다오.

2020-12-01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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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16: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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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1 2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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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0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OCN에서 하나요? 하면 봤을텐데...

오늘 책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다크님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쓰느라고 또 보내시느라고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겠습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책 많이 내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다크아이즈 2020-12-06 16:38   좋아요 0 | URL
ocn에서 한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지금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넷플릭스를 하니, 없더라는ㅠ
스텔라님, 천천히 잠 오실 때 읽어주시어요.

2020-12-03 0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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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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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4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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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16: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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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한 파일 두어 개 부탁하고

  강좌를 마치고 왔더니

  저토록 어여쁜 메모가 책상 위에.

  편하게 카톡으로 해도 될 말을

  깨알로 수를 놓듯 

  한땀한땀 연필 끝에 앉혀 놓았더라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을 수고로  

  5만년을 예약하는 감동과 여운이라니   

  누군가의 가슴을 데우는 일은

  한 마디 손글씨로도 충분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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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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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0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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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25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손글씨. 글씨를 잘 쓰는 분은 부럽습니다.
읽는 분이 기분좋을 느낌이네요.^^

다크아이즈 2018-05-26 07:49   좋아요 2 | URL
손 글씨를 잘 쓰시는 것도 부럽고
그 속에 정성까지 깃드니 뭔가 뭉클함이~
서니데이님도 손글씨 예쁘시잖아요^^~

2018-05-25 1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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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0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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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2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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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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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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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6 18: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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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26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을 수고로
5만년을 예약하는 감동과 여운이라니
누군가의 가슴을 데우는 일은
한 마디 손글씨로도 충분하더라

- 캬악!!! 작가다운 문장 같습니다. ㅋ

다크아이즈 2018-06-04 17:29   좋아요 0 | URL
한결 같이 알라딘을 키워가시는 페크 언냐님 잘 계시지요?
누군가의 가슴을 데우는 일의 숭고함
부쩍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요즘 빨간머리 앤, 다시 읽고 있는데
마릴라 아줌마, 매튜 아저씨가 가슴에 팍팍 꽂히네요.
잔꾀를 부리는 날이 있고, 그럴 때는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릴라와 매튜의 나날에 경의를 표하는 온나절입니다.

2018-06-04 1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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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17: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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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1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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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17: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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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17: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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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6-2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한동안 덥고 비오는 날이 계속될 것 같아요.
남쪽에는 오늘 밤에 비가 올 거라는 뉴스도 보았어요.
눅눅하고 덥고, 습한 여름입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다크아이즈님, 편안한 밤 되세요.^^

서니데이 2018-12-3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 봄에 들었던 새 책 소식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벌써 겨울이 되고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네요.
올해도 잘 보내셨나요.
이제 내일이면 2019년이 됩니다.
가정과 하시는 일에 건강과 행복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더하고 싶습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19-12-3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새해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그 사이 일년이 지나고 또 다른 해를 앞두고 있어요.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그리고 가정에 평안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0-05-04 0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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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14: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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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1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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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3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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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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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였을까. <<풋내기들>><<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두 작품을 꼭 비교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대성당>> 소설집에 수록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고 충격을 먹은 뒤부터였나 보다. <<대성당>>을 읽기 전 <<사랑을 말할 때~>>를 먼저 만났다. 좋은 작품집이라고 권하는 사람들의 말을 온전히 믿어서는 안 되었다. <<사랑을 말할 때~>>는 대체로 요령부득이었다. 몇 번이나 책을 던지고 싶었다. <목욕>이란 작품의 원본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란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 내가 보기에 두 작품은 다른 느낌이었다.

 

  편집자 고든 리시한테 농락당한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속울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허울 좋은 미니멀리즘의 성에 갇힌 카버의 소설이 그의 사후에라도 날개를 달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번역도 김우열이 정영문보다 훨씬 깔끔하다. 하기야 원본의 반 이상을 잘라낸 것도 있고, 결말마저 원작가인 카버와 다르게 한 것도 있는데 후자더러 잘 된 번역이기를 바라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알려졌다시피 <<풋내기들>>은 레이먼드 카버의 두 번째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본이다. 편집자 고든 리시는 카버의 원고를 대수리했다. 일부 작품은 제목과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거의 모든 작품의 결말을 그의 입맛대로 잘라내거나 바꿨다. 누더기가 된 원고를 받고 당황했을 카버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고든 리시의 의도대로 출간 되었다. 아마 판매에도 성공했을 듯. 카버는 언젠가 원본 그대로 출간할 수 있기를 바랐다. 2009, 카버의 아내 테스 겔러거가 고인이 된 남편 대신 <<풋내기들>>을 펴냈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한때의 카버를 닮은 듯한 절망적인 서민들. 알코올중독과 가정불화와 장애를 지닌 사람들. 단순한 문장, 섬세한 감성, 순간 포착, 미세하게 변화하는 인물들, 술 관련, 파산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룬다. ‘미니멀리즘이라 표현되는 카버 소설의 단순한 전개, 담백한 문체, 아리까리한(?) 결말 등은 카버의 의지가 아니라 편집자의 장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두 작품을 비교할수록 확실해진다. 편집자의 역할이 고든 리시처럼이 되어도 좋다면 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후자의 책을 출간 당시 카버가 겪었을 심리적 혼란이 백 번 이해된다. 세 번째 소설집 <<대성당>>을 작업하면서 고든 리시를 가리켜 최고의 편집자라고 추켜세웠던 건 돈 맛이 작가정신에 녹아들었기 때문인 것은 아닌지

 

   독자로서 보기에 고든 리시는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지나친 생략으로 작가 감성과 작가 의식을 무시했다. 두 책 내용을 비교해야 레이먼드 카버의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시도해본다. 편집자본인 후자를 읽고 엄지척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 과연 취향 존중이라며 쉽게 인정해도 좋을 것인지. (이하 스포일러)

 

1.춤 좀 추지 그래? - 집밖에 중고 물건을 내놓은 남자에게 소년과 소녀는 관심을 보였고, 뭔가 절박해 보이는 남자는 그들과 위스키를 마시며 춤을 권하고 그들은 함께 남자집 마당에서 춤을 춘다. 남자와 춤을 추고 레코드 판과 전축을 남자에게서 받은 소녀는 쓰레기 같은 이것들에 대해 모든이에게 이야기한다. 이야기 속엔 그 이상의 무엇이 있고 그걸 꺼내려고 애쓰다가 그녀는 그런 노력을 관둔다. (인칭 통일 되지 않은 영어본 또는 번역, 생뚱맞고 어리둥절한 결말)

 

--> 춤추지 않을래? 남자 잭과 여자애 칼라는 스무 살, 남자 이름은 맥스, <25잭이랑 난 그 남자 침대에서 자버렸다니까. 잭이 취하는 바람에 아침에 트레일러를 빌려야 했어. 그 남자 물건 다 옮기려구 말야. 나 자자가 중간에 한 번 깼거든. 근데 우리한테 담요를 덮어주고 있는 거야. 그 남자가 말이야. 이 담요야 만져봐. 여자애는 계속 이야기했다.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뭔가 더 있었다는 건 여자애도 알았지만,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여자애는 이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이 문장을 빼먹고 애매모호하게 처리.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서 독자들의 (짜증나는) 상상력을 기대하게 만듦.

 

2.뷰파인더 - 양 손이 없어 갈고리 손을 한 남자가 나의 원경이 비치는 집 사진을 폴라로이드로 찍어주고 사라고 말한다. 서로 외로운 처지인 나는 호기심 반으로 그를 불러들여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다. 아이 셋이 보도 위 갓돌 위에 페인트로 주소를 써주고 일 달러를 달라고 했는데 그것과 연관이 있느냐고 묻자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애들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고 남자는 말한다. 지붕 굴뚝 위 망으로 아이들이 던진 돌을 주워 멀리 던지는 장면을 찍어 달라고 하자 남자는 움직이는 피사체는 찍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도 나는 다시 돌을 집어 든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됨. 아내나 아이들이 곁을 떠난 것에 대한 트라우마?)

 

--> 뷰파인더 나의 가족도 날 떠났다는 것을 사진사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중에 나도 가족이 훌쩍 떠난 것을 인정한다. 아이 엄마와 아이들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사진사가 말한다. 사진사는 나의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여자 때문에 모든 게 무너지고 다리까지 잃었다는 것을 나는 말한다. 그냥 망이 아니라 철망이다. 돌멩이를 집어 들고 그를 향해 웃는다.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요! 내가 외쳤다.

30이런 비극이 담긴 사진을 내가 뭣하러 사겠는가? - 복선이 되는 문장

(세상에 이 멋진 단편을 고든 리사가 완전 망쳐 놨다! 이해도 잘 되고 교감도 되는데.)

 

3.미스터 커피와 수리공 양반 - 알콜 중독 보고서로 읽힘.

어머니집에 들렀는데 예순 다섯의 그녀는 누군가와 키스를 하고 있다.

어머니가 바람 피우던 그 무렵 아내도 애 여섯이나 딸린 로스라는 수리공 남자와 바람이 났다. 전 부인이 로스를 감옥에 처넣었을 때 보석금 내 준 것도 아내라는 사실을 내 딸을 통해 들었다. 딸에게 갈 돈이 줄어든 것에 대해 딸은 서운한 감정이 있고 그것 때문에 딸은 로스의 감시 대상이 되지만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아내는 로스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도 했지만 아이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삼년 전 일이다. 가끔 아내가 그를 정말 사랑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점성학과 오로라와 역경 같은 것에 관심이 있을 정도로 명민하고 재미있었으므로.

아버지는 팔 년 전 마흔 넷에 술에 취해 잠자다 죽었다.(말이 안 되는 번역?) 어머니와는 한번도 밤인사를 한 적이 없다. 머나가 집으로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시 끌어안고 있은 뒤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말한다. 머나는 손 씻으라고 대꾸한다. (이게 뭐야?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바람 피우는 엄마, 그를 통해 바람 난 아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제목은 뭐지?)

 

--> 다들 어디 있지? 로스에게 총을 쏜 것은 첫째 부인, 감옥 보낸 것은 둘째 부인으로 나오지만 원본에서는 둘 다 첫부인(부양비를 안 낸 걸로 감옥 가게 함. 편집본은 왜 감옥 보냈는지 안 나옴.), 항공우즈공학 분야에서 일한 장면 편집본에서는 안 나옴. 다들 술 때문에 일이 벌어진 일과 인연인데 편집본에서는 그것이 덜 느껴짐. 아내가 나보다는 로스가 술독에서 빠져나올 가망성이 있는 것을 보고 도우려고 그집을 드나듬. 아이들에 대한 내 광기가 편집본에서 빠져 있음. 성장한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술버릇에 대해 트라우마를 겪고 있음. 아내는 교사로 일하고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음.

한때 나를 사랑한 적이 있음을 아내가 고백함. 아들 마이크가 군대에 가서 인간이 되어 오기를 바람. 스물두 살의 베벌리는 로스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로스는 신시아를 사랑한다고 안심 시킴. 취한 상태에서. 항공우주국에 다니면서 로스는 술독에 빠져서 잘림. 아버지는 원본에서는 쉰 넷으로 합리적인? 나이로 나옴. 내가 내 친구 아내와 좋은 감정으로 전화 통화하고 있는 것은 빠져 있음. 현재 지속 되는 상태.(편집본에서는 화해 모드)

55다들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방금 집에 전화했는데. -나의 현재 심리 상태

 

4.정자 - 모텔을 운영하는 나는 동료이자 아내인 홀리와 살면서 호텔 청소원인 후아니타와 바람이 났다. 홀리는 심적으로 괴로워한다. 우리는 술 없이는 안 되고, 모텔은 파산 직전이다. 한때 서로가 애틋했던 시절 외곽의 농장 뒤쪽에 있던 정자의 추억에 잠긴다. 우리 모텔도 그런 추억의 장소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나는 홀 리가 무슨 조짐을 보이기를 기도한다.(?) (무슨 결말인지?)

--> 정자 후아니타 동료 청소원 여자가 아내에게 내가 바람 피운 것을 고자질하는 장면은 안 나옴. 지속되는 나의 바람으로 아내는 술독에 빠지게 됨. 마지막 장면 손님을 받지 않고 둘만의 화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일까. 아니면 고개를 흔들고 손님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정자, 라는 의미도 긍정 부정 다 활용할 수 있겠다.

 

(47)하지만 홀리는 술잔을 쥔 채로 침대 위에 그냥 앉아 있다. 나는 그녀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77하지만 홀리는 빈 잔을 들고 침대에 앉아서 그저 날 바라볼 뿐이다. 그러더니 고개를 흔든다. 홀리는 알고 있다.

 

5.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볼 수 있었다.

기척에 나는 잠이 깨어 밖으로 나간다. 이웃 샘이 민달팽이를 잡으러 입에 (담배 같은) 미끼를 물고 환한 달빛 아래를 누빈다. 달빛 아래 모든 것이 환하다. 샘은 심장마비로 아내를 잃었다. 샘과 남편은 술을 마시다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의절하고 샘은 울타리를 두 겹으로 쳤다. 하지만 화해하고 싶어 한다. 샘과 헤어져 잠들어 있는 남편 곁으로 온다. 그의 가슴 속에 뭔가 맺혀서 흐르고 있다. 그걸 보니 샘이 가루?를 뿌려대던 그것들이 생각난다. 나는 서둘러 자야겠다는 생각 말곤 없다. (무슨 이야기? 가루의 정체는? 화해하고 싶지만 가까울 수 없는 관계의 회한?)

 

--> 뭐 좀 볼래? 편집본에는 샘에게 히피 딸이 있다는 사실. 새로 결혼한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가 알비노라는 사실. 아기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안도감. 나와 남편은 자발적 의사에 의해 아이가 없다. 아기 이후 샘은 급하고 약해져서 남편과 다투게 되고 울타리 치고 말을 섞지 않게 됨. 달팽이들이 마당의 꽃들을 아작낸다는 사실. 유리병에 넣어 숙성시켜 비료로 쓴다는 사실. 샘이 새 아내 로리가 아니었다면 첫아내 밀 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 함께 있으리라는 사실. 그곳이 실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 세제 깡통에서 달팽이에게 (가루)를 뿌리고 또 뿌린다는 사실. 샘이 술을 많이 줄였다는 사실. 꿈꿔왔던 과거와 현재 삶이 달라졌다는 사실. 남편 클리프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맘에 있던 모든 얘기를 자고 있는 남편에게 한다는 사실과 아무 데도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인정해야 할 때라는 사실. 말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지고 클리프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왠지 잠들 수 있을 거라는 사실. (두 집 사이의 앙금 같은 것을 은유하는 달팽이. 이 멋진 단편을 망쳐 놨어. 개연성을 무시하는 미니멀리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83사냥하는 중이에요. 뭐 좀 볼래요? 이리 와봐요. 낸시. 내가 뭐 보여줄게요.

88죽음은 아무 데도 없는 거예요, 낸시.

 

6.봉지 - 업무 차 잠깐 짬을 내 공항 로비에서 나는 이혼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줄 과자 등을 담은 봉지를 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람 피운 이야기를 주절댄다. 어머니 거래처 여자(여자는 엄마가 주문한 물건을 봉지에 담아왔다.)와 바람을 피우다 그의 남편에게 들켜 도망친 적이 있다.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의 봉지를 챙기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고 그 봉지는 내 아이들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 아이들이 일 년 새 다 커버려서? 아이들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

 

--> 외도 집에 배달온 여자를 강간성 폭행을 했다는 사실. 아버지의 외도 이야기를 나는 늙은 망나니의 미친 짓으로 생각하고 있음. 이혼의 직접적 계기가 바람 피운 사실이라는 것. 상대녀의 남편이 무너져 칼로 자살을 했다는 것. 그때 아버지 일부는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아버지는 양심에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라 아버지 주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마지막 내 아이 부분은 언급되지도 않는다는 사실.

 

124세상 누구도,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아요. 어서 기운 되찾으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124하지만 내게 말해줬으면 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아버지는 뭘 기대한 걸까?

 

7.목욕 - 어머니는 아들 생일 케이크를 주문해두었다. 생일날 아침 아들은 교통 사고가 나고 입원한다. 생사를 오가는 동안 남편과 아내는 번갈아 집에 목욕하러 간다. 남편에게서 낯선 전화가 오지만 남편은 무시한다. 여자가 집에 목욕하러 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 넬슨, 하고 분위가 심상찮은 광경이 목격된다. (이 부분이 인칭이나 번역이 일관되지 않고 매끄럽지 않아 이해가 안 됨, 원작을 봐야 이해가 되는 구조.) 집에 오니 어머니를 찾는 낯선 벨이 울린다. 스코티(아들) 관련 전화라고만 목소리가 말한다. (이 장면만으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음. 아이의 죽음을 예견하는가 싶지만 원작을 보면 그게 아니라는 사실)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케이크를 주문한 사실을 남편은 모르고 있음. 흑인 가족 넬슨 이야기도 흐릿하게 나와 알 수 이해 불가능. 스코티가 행방불명된 적 있던 사건은 사라지고 없음. 넬슨이 죽었다는 사실. 스코티가 죽었다는 사실. 빵집주인은 아이 없이 긴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 빵집 주인의 중년 회의와 무력감. 츤데레 빵집 주인

166스코티 말입니다. 준비 다 해놨는데요.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스코티는 잊어버리셨나요? (왜 확실하게 말하지 않아서 이런 오해를 하게 만드나. 안타까워요.)

166그 개자식. 죽여버리고 싶어. 총으로 쏴서 뒈져버리는 꼴을 보고 싶어.

173손님이 전화로 이야기한 것 같은 사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내가 더 이상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걸, 그런 느낌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부탁이니 두 분에게 날 좀 용서해줄 마음을 내달라고 해도 될까요? 빵집 안이 따뜻해서 하워드는 일어나 코트를 벗었다. --갓 구운 롤빵이라도 좀 드셨으면 싶은데. 드시고 살아내셔야죠. 이럴 땐 먹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거든요. 빵집 주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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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26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아이즈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그 사이 겨울이 지나가고 봄도 많이 지나가고 있어요.
같은 책이지만, 번역에 따라서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가끔은 같은 원서의 여러 번역본을 읽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이 책은 김우열 번역이 좋은 모양이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


다크아이즈 2018-04-26 23:3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실시간으로 덧글을 주시네요.
서니데이님의 바지런함을 십분의 일만 닮았어도
제 삶이 달라졌을 거예요.
왜 이리 피곤하고 게으른 나날인지요.

이 책은 단순 번역 비교가 아니라 원작자 대 편집자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서니데이님도 편히 주무세요.

서니데이 2018-04-27 00:11   좋아요 0 | URL
앗, 저 요즘 너무 게을러서 게으름 줄이기 하고 있어요.
그런데 2주동안 게으름이 더 커졌어요.^^;
다크아이즈님, 좋은 꿈 꾸세요.^^
 

 

 

 

 

 

 

 

 

 

때늦게 박상륭 소설가의 부고를 들었다. 선생은 작품성 하나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신 문단의 큰 별이셨다. 하필이면 그 무거운 소식을 한 유명 제약회사의 오너가 자신의 운전수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뉴스와 같이 접했다.

 

애도의 마음이 훑고 간 자리에 뭔가 뿌연 막 같은 것이 가로막았다. 선생과는 직접적인 사연이 없으니 내 애도가 절절함에 가닿지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이 막연하고 갑갑한 막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마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선생의 대표작인 자욱한 안개 숲 같았던 죽음의 한 연구를 처음 접했을 때의 막막한 경외감 같은 것일 테고, 다른 하나는 매캐한 연기 속 같은 가진 자들의 갑질행태를 바라봐야 하는 갑갑한 분노쯤이 아니었을까. 막막한 경외감에서 오는 조심스러움과 갑갑한 분노에서 오는 부글거림의 감정이 동시에 온몸과 마음을 뒤덮었던 것. ‘강자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나쁜 뉴스가 선생의 작품 한 부분과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이는 교만으로 가득하고 편견으로 뒤틀린 우리 자화상에 대한 경종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탐욕스런 영감이 착한 종을 데리고 서낭귀신에게 목숨 무게를 재러 갔다. 부자이니만큼 자신의 목숨 무게가 천한 종보다는 무거울 것이라 확신하면서. 귀신은 두 사람 무게가 꼭 같아 아무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고 했다. 영감은 종과 자신이 같은 목숨 무게라면 어째서 종놈은 못사는 데다 종살이를 면치 못하냐고 따진다. 서낭귀신이 말했다. 목숨이나 혼의 무게는 재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같다고. 다만 선업(善業)의 무게는 달아줄 수 있다고. 저울추를 보니 종의 그것이 영감보다 삼사백 배나 더 무거웠다. 영감 업의 무게는 가랑잎 한 잎에 지나지 않았다. 귀신이 말했다. 혼 위에 업()을 업고 오는 것이라 영감의 업을 종놈에게 판다고 해도 그 무게가 너무 가벼워 저승조차 종이 대신 가 줄 수 없노라고. 이 세상엔 같은 업의 무게는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울며 재물로 원한을 씻겠노라고 발길을 돌리지만 귀신은 그런 영감을 불러 세워 다그친다. 어디를 가느냐고, 저승사자가 와있으니 따라갈 채비나 하라고.

 

소설로만 읽히지 않는 독본이 박상륭의 세계이다. 난해한 철학서이자 불가해한 경전 같다.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손톱만한 뭐라도 건지고 싶은 심정이랄까. 환멸(幻滅)로 가득 찬 진창을 헤매는 고뇌의 인간이 끝내 죽음으로써 환멸(還滅)에 다다르고야 마는 길. 생소한 문법으로 구도에 이르는 길을 장황하게 얘기하는데 뭐라 형언하기 힘든 파장이 인다. 낯설고도 독창적인 문체 앞에서 내 안에 있는 안개 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한 허상을 걷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해독 불가능한 박상륭 식 문장 앞에서 차라리 무지는 아름다운 고통이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강자와 약자가 있다. 약자가 강자에 의해 환난의 울타리로 내몰렸다면 약자에게 동정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강자는 가만있기만 해도 약자 앞에서 강자 자체로 군림한다. 강자가 아무 눈치 주지 않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약자는 이미 심리적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약자는 강자의 쓰레기통이나 샌드백이 아니다. 거친 소리를 쓸어 담거나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막아내는 물건이 아니다. 소설을 넘어서는 소설이자 답 없는 비유로 가득한 암호 속에서도 이미 작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목숨이나 영혼의 무게는 같아도 업의 무게는 같을 수가 없다고.

 

큰 작가는 죽음으로써 감당키 어려운 당신 작품의 업 무게를 늘려놓았다. 사람의 존재감은 목숨 자체가 아니라 살면서 지속되는 선업의 축적에 달려 있다. 그것은 힘과 재물과는 무관하다.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느냐에 따라 그 경중이 달려있다. 죽음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업의 무게를 떠올려 본다. 마음이 무겁지만 피해갈 수도 없다. 박상륭 선생의 평생 테마 중의 하나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존재 이유에 대한 선업의 돌탑 쌓기가 아니었을지. 

 

  

  루체른 카펠교에서 - 

    앨리스 먼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등등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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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07-3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상륭.... 처음 들어보는 작가에요. 제가 얼마나 무지한 사람인지 또 깨닫게 되는 글입니다. 언니는 글을 정말 잘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