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섬이 되어야
알베르 카뮈는 스승 장 그르니에의 철학 에세이『섬』에 붙여 다음과 같은 헌사를 던진다.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 성찬의 의미에 동참하고자 책을 펴들었다. (사놓고 몇 번째 시도하다 겨우 성공했다. 책이 바래졌다.ㅠ) 웬걸, 처음부터 난공불락이다. 내게 장 그르니에의 섬은 카뮈의 헌사가 더 나은 책, 카뮈의 헌사로 기억될 책, 카뮈의 헌사가 호들갑스런 책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암시와 독백으로 가득한 그르니에 식 사유의 독창성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였다. 아무리 카뮈가 말한 대로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기려 해도 속만 더부룩해져올 뿐이다. 소화 안 된 묵직한 배로 뭔가를 더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랄까.
원문의 난해함 때문인지 번역본은 비문을 쏟아낸다. 아무리 독자의 예를 다하려 해도 부분에 따라선 쓸 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기분이다. 글이 글로서 제 기능만 다해주면 좋으련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문을 구해서 비교하면서 읽고 싶다. 읽기에 껄끄러운 건 번역의 문제이지 원문의 문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스승의 현학허세나 자기만의 말놀이를 위해 카뮈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헌사를 날렸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심오한 철학과 명징한 단상들 덕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고무 또는 찬양의 독후감들은 이 책 전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분적으로 빛나는 사유들에 대한 몫이리라. 남들 다 좋다고 하는 책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 불충한 독해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섬이 되지 않고서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다. 섬이 되어야 섬에 닿을 수 있는, 막막하고도 먹먹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섬』.
2. 인지 부조화
솔직하다는 말의 함의에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이거나 약점을 묘파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추녀더러 ‘넌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무례한 솔직함인데, 솔직함이 타자를 향하는 나쁜 예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나는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내 약점을 고백해 공감을 유도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누군가 솔직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타자를 향하는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의 약점을 객관화하는 것일 때 공감하기 쉽다.
하지만 참으로 솔직하기 힘든 게 사람이다. 여우와 신포도 이솝 우화가 그 좋은 예이다. 너무 높이 열려 따먹을 수 없는 포도는 여우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일거야. 못 먹는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급기야는 정보를 왜곡해버린다. 비겁의 커튼 뒤로 숨어 자기 위안을 도모한다.
이런 일은 수없이 겪는다. 내가 추천한 맛집의 위생 상태가 엉망인데도 ‘음식이 깔끔하다’고 설레발을 치는가 하면, 내가 읽자고 한 책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도 ‘밤새 눈시울을 적셨다’고 거짓 감상을 유도한다. 내가 산 냉장고가 더 비싼데다 소음도 심하지만 디자인이 좋고 실용적이라고 떠벌인다. 저 직장을 포기하고 이 직장을 선택한 것이 후회스럽지만 저 직장은 분명 복지 혜택이 부족할 거라며 자기 위안을 한다.
이 모든 건 스스로의 약점이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방어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행동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의 태도나 신념을 바꿔버리는 경향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외적 당당함과는 달리 내면적 갈등을 야기한다. 한편 인지부조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동 수정을 한다면 이 또한 너무 이른 자기 성찰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솔직해도 자책에 빠지기 쉽고, 스스로를 너무 보호해도 자기기만의 우물에 허덕일 수 있다. 솔직과 포장의 적당한 경계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게 만만찮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3. 봄 나목을 보며
봄이 깊어간다. 사방천지가 푸름의 향연을 위해 제 몸을 부풀린다. 창밖을 본다. 벚나무 한 그루에 잎이 나질 않는다. 주변 가로수가 날 다르게 푸른 숨결로 제 가지를 키울 때 그 나무는 헐벗은 듯 꼿꼿한 듯 제 온몸으로 봄바람을 마주하고 있다. 겨우내 다 같이 나목으로 있을 땐 몰랐는데, 꽃 피우고 잎 나기 시작하니 주변 나무와 다른 게 표가 난다.
어떤 이유에서든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는 곧 잊힐 것이다. 오뉴월이 와 무성해진 잎들이 다른 가지를 넘나들 때면 그 나무는 완전히 주변에 잠식되고 말 것이다. 있으되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뿌리가 약하거나, 강한 기 때문에 쉽게 그 땅에 안착하지 못하는 나무는 봄이 와도 나목으로서의 제 수치를 감내해야만 한다. 기실 그 나목은 죽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밑둥치 잘려나갈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
사람의 나무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문 앞에서 정의를 내리거나 명답을 얻는 건 무척 어렵다. 거기서 최선이나 차선의 길을 수용할 때 우리는 ‘순리를 따른다’고 한다. 순한 이치나 도리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세상과 타협한다. 그 타협조차 받아들일 의지가 없거나 그 타협보다 자의식이 강할 경우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그 명제 앞에서 내 힘이 받쳐주지 않거나, 내 강박이 우선이면 쉽게 나무들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섬이 되었다, 바람이 되었다 하는 게 사람의 나날이다.
내 안의 핍진이나 질곡, 내 안의 거품이나 고집 이 둘 다를 버리지 못할 때 봄 깊은 저 사람의 마실에서 쓸쓸히 나목이 되어 제 치욕을 견뎌내야 한다. 혼자 부는 바람도 없고, 홀로 크는 숲도 없다. 혼자 푸른 언덕도 없고, 홀로 꽃 피우는 나무도 없다. 한 호흡의 양심, 한 손길의 애정, 한 눈길의 의심, 한 모금의 불안 이 모든 것들이 삶을 이루는 주체이다. 세상만사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최선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봄은 오고 계절은 저리도 깊어만 간다.
4. 배 타도 산에 오를 수 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말은 매우 빨랐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그녀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번역 자막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눌변인 경우가 많다는 속설은 그녀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광풍처럼 몰아치기만 한 언변에 유머와 재기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호의적인 청중들의 웃음소리를 한 호흡 쉬어가는 발판으로 삼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만 했다. 성급한 내레이션,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굿윈은 링컨 연구자의 권위자이다. 10년 동안 링컨에 관한 연구와 자료 수집으로 한 권의 책을 집대성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권력의 조건』은 그녀의 링컨에 대한 오롯한 헌사이다. 책 속의 링컨도 위대하고, 책을 쓴 그녀도 대단하다. 한 사람의 집념은 여러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정치가로서의 링컨이 그러하고, 글쓴이로서 굿윈 역시 그러하다.
방대한 내용 안에서 그녀가 링컨을 가장 잘 살린 대목은 정치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들에서였다. 링컨의 강점은 적들도 내 편으로 만드는 건실한 가치관이었다. 때로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더러는 해돋이 같은 미소로 불편한 정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권모술수나 이해타산이 아니라 건전하고도 도덕적인 접근법이었다. 유능한 라이벌들을 내각에 등용시키는가 하면, 뛰어난 화술과 친절한 마음씨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사로운 비난과 웬만한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우정을 고수했고, 동료들의 실수마저 끌어안았다. 자기훈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던 링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저자 도리스 컨스 굿윈도 링컨만큼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링컨의 정치적, 사적 행보는 바지런한 작가의 발품과 손품에 의해 정치적 욕망과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인간적 신뢰감으로 변주된다. 이런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라면, 즉 링컨과 굿윈의 안내라면 배 타고도 능히 원하는 산에 오를 수 있겠다.
5. 멘첼에게 묻기
온 세상, 자기계발이 화두다. 책이든 강연이든 ‘자기계발’란 타이틀만 달면 시쳇말로 반은 그냥 먹힌다. 처음 한두 번은 솔깃하다가 나중에는 똑 같은 얘기 같아 시들해지는 게 또 자기계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꾸준히 회자되는 건 그만큼 자기 계발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두 권의 계발서, 한두 번의 강연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자신만의 모델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해서 각종 자기계발 관련 정보에 대해 가졌던 편견, 이를 테면 상투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거나 나아가 뻔한 얘기라는 생각을 접어보기로 했다. 원하는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니 오히려 그것에 대한 모든 정보들에 애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최근 참석한 모 특강도 그랬다. 욕심보다 최선이 먼저라는 깨우침을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데 하루 종일 그것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돌프 폰 멘첼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그 거장에게 청년 작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성품이 급하고 그림 실력은 그럭저럭한 이였다. 초조한 표정의 젊은 화가는 멘첼에게 물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리는데, 파는 데는 왜 일 년도 넘게 걸리느냐고. 멘첼이 대답은 명쾌했다. 하루 만에 그리던 것을 일 년에 걸쳐 그려보라고. 그러면 금세 그림이 팔릴 거라고. 멘첼의 충고를 받아들인 청년은 태도를 바꿨다. 욕심을 버리고 기초부터 다졌다. 하루의 치기를 일 년의 노력으로 대체했다. 청년의 그림이 한나절 만에 팔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바라기 전에 갖추고, 갖추기 전에 버려야 길이 보인다. 욕심을 미루고 기본을 쌓는 것보다 나은 자기계발은 없다. 멘첼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있는 거실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계발 강사가 말한다. 거장의 붓질을 기억해라. 저 흰 커튼의 펄럭이는 생동감과 저 마루를 내리찍는 광선의 각도를 위해 얼마나 숱한 붓질이 있었는지를. 그 맘이어야 하룻밤 새 팔릴 그림을 꿈꿀 수 있다고.
6. 언어유희
싸이의「젠틀맨」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음악성 자체보다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풍자 깃든 춤, 언어유희가 섞인 노랫말 등이 지구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음악 정서를 충분히 자극해주고 있다. 특히 ‘나랏말쌈’에서 자유로운 말장난 같은 가사의 전략적 배치도 노래의 파급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처럼 언어유희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매개물이다. 진은영의 시「대학시절」은 맛깔나는 말장난을 전면에 내세워 청춘의 지난한 현실을 노래한다. ‘내 가슴엔/멜랑멜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살고 있어/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
비슷한 말들의 소란을 빌려 이십대를 회상하는데, 같은 경험을 거친 독자라면 그게 더한 신뢰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명랑발랄해서만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멜랑콜리’의 정점을 맛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단순한 우울이나 비애로 설명할 수 없는 세련된 우울의 정서인 멜랑콜리를 이십대 때의 시인은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염소 한 마리’로 정의하고 있다.
청춘의 염소는 종일토록 종이만 먹어치우며,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시’만 토할 수밖에 없다. 앞선 친구들의 속도감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감과 멀게 태어난 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빈둥빈둥 빈센트 반 고흐’처럼 보장된 바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며 시간을 축낼 뿐이다. 누군들 아프지 않을 청춘이었을까. 누군들 멜랑콜리하지 않을 이십대였을까. 하지만 누가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유희로 자신의 멜랑콜리한 청춘을 ‘화끈하고 말끔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젠틀맨」을 들으며 제 청춘에 말장난 걸어본다. 알랑가몰라 아리까리한 그 시절.
7.바람 씌고 약 줘야
일주일이 지나도록 배탈이 낫지 않는다. 꾸룩꾸룩 장 뒤틀리는 소리 요란하고, 가스 찬 배를 두드리면 수박 두드릴 때처럼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욱신거리는 배를 다독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병원 가는 게 성가셔 약국에서 응급약만 지어 먹었다. 그래도 차도가 없어 결국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단순 장염이지만 염증은 심해졌을 거란다. 아픈 순간 빨리 병원부터 찾는 게 순선데 자가 처방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배탈 따위는 하루만 참으면 절로 낫는다는 자신감 같은 게 그간 내 안에 있었다. 음식 버리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엄마는 흔히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어른들이 그러듯 쉰 콩나물무침도 씻어서 기어이 드시는 분이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비교적 건강한 소화기관을 자랑하는 당신의 산교육(?) 영향인지 나도 위와 장은 튼튼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환경이 바뀌면 나를 바꾸거나 대상을 바꿔 줄줄도 알아야 한다. 기존을 고집하면 탈이 날 경우 더디게 회복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쌀밥덩이처럼 몽실몽실한 흰꽃을 사들인 적이 있다. 싸리꽃 닮은 ‘아리삼’이란 일년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꽃색이 흐려지며 생기를 잃는 것이었다. 끄떡없이 두 달은 꽃구경 할 수 있을 거라던 꽃집 주인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바람과 물과 영양제까지 맞으며 무리지어 생육환경에 맞게 자라다가 고립무원의 아파트로 옮겨오니 꽃도 소화계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자주 환기를 시켜 바람과 별빛의 기를 씌었더라면 꽃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들어가는 초기에 꽃집에 들러 조치를 취했더라면 초기의 싱싱함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 때는 아프더라도 하루 만에 거뜬히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면역력이나 소화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론 건강할 때의 잣대로 자신의 몸을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하루 가던 장염이 한 달, 아니 일 년을 끌기 전에 현명한 조치가 우선임을 뼈저리게 맛본 한 주다.
** 이 글을 마치고도 낫지 않아 결국 종합병원까지 갔다. 죽을병은 아니란다.
떨어진 소화력에는 소식과 운동이 제일이다. 둘 다 힘들다. 그 중 운동이 더 힘들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고 싶다. 운동해야겠다.
8.회고 미학
시인 김수영은 수필「가장 아름다움 우리말 열 개」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 열 개로 꼽았다. 그 낱말에는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뒷말이 머리끝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향수에 어린 말들은 (중략) 진정한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 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회고 미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한 기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몇 글줄 쓰려한다. 오늘날 우리 수필은 재미없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신춘문예 공모에서조차도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숙제해라고 아무리 엄마가 고함질러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이는 빈 공책에 낙서만 하다 잠들고 만다.
좋은 수필의 전형이라고 하는 글들을 보면 대개 면죄부 얻은 과거의 상투적 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모성의 희생은 위엄 깃든 필수요, 부성의 패악은 낭만적 양념이며, 툇마루에 대한 추억은 당연한 선택이다. 처음 한두 번은 마음결을 다독여주고, 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이런 글에 마음이 간다. 두세 번 읽다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하는 반발감이 생긴다. 사람들은 으레 수필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되고 종내는 그들만의 잔치로 머물고 만다. 김수영식 대로 고작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 의식은 좀 더 현재적 보편성에 가깝게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쌈박한 개별자의 개성이 저만치 앞서가는데, 어쩌면 이런 것이 새로운 보편의 패러다임에 가까운데 언제까지나 의고적이고 훈계적인 말들로 향수를 포장하고 열거하는 데만 머물 것인가. 무려 50년 전에 이런 회고 미학의 경계성을 단언한 시인의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