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21일 째.

금요일 회식 때 술 마신 걸 빼면 별 다섯 개!
약속은 점심 때만 했고(저녁 약속 일체 사절),
초콜릿, 아이스크림, 콜라, 피자.... 피해야 할 음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다이어트 전에는 "드림 카카오 72%", 갈색 플라스틱 병이
항상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비타민 병처럼.

피곤하거나, 갑자기 열을 확~받을 때
드림 카카오 몇알을 약 먹듯이 먹곤 했다.
할머니들이 우황청심환을 먹는 것처럼.

내가 드림 카카오를 즐겨(?) 먹는걸 본 후배들이 선물을 하기도 해서,
드림 카카오 병은 항상 책상 위에 자리를 떡~하니 잡고 있었다.
모니터나 전화기처럼.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책상 위에 남아있던 드림 카카오를
마른 체형의 K과장에게 선물(?)했다.
그 후로 한번도 초콜릿을 먹지 않았다.

월요일 오전, 열을 확~받는 사건이 있었다.
순간.... 넘넘 초콜릿이 땡겼다.
초콜릿, 핫초코, 치즈 케익, 피자빵....
이런 것들이 머리를 빙빙 돌았다.

먹을까? 아니, 참자.
그냥 먹어 버리자. 아니야, 참자.
마음 속에서 100만번은 갈등했다.
결국... 먹지 않고 월요일 오전이 갔다.

스트레스를 참지 못해서,
화가 나서, 우울해서,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해서,
초콜릿, 아이스크림, 치즈 케익 같은
무진장 단 것들을 먹은 적이 많았다.

편두통이 심할 때 타이레놀을 찾는 것처럼
스트레스를 참지 못할 때 달고 자극적인 음식들이 땡겼다.
먹고 나서는...먹었단 이유로 또 스트레스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인 이유"로 음식을 먹는다. 전혀 배 고프지 않은데도!
화가 나서, 우울해서, 피곤해서, 외로워서, 마음이 헛헛해서...

문제는 먹고 나서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다.
심한 경우, 죄책감까지 느낀다.

[MY BIG FAT GREEK DIET](번역 제목: 나는 이렇게 113kg을 뺐다)의 저자
Nick Yphantides는 그의 나이 서른 살, 고환암 판정을 받은 날,
잠시 바람을 쐬러 간다며 혼자 나가
KFC에서 치킨을 먹었다.

" 이 이야기를 다시 하자니 몸이 다시 아파오는 것 같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
자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해준 가족들 곁을 버리고
프라이드 치킨과 몇몇 메뉴들에 의지한 것이다.

그 동안 먹는 것이 얼마나 나를 지배해왔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다이어트 여행 8개월 동안 음식을 멀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음식은 마음의 괴로움과 고통을 가라앉히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131)

그래...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음식은 배 고플 때 먹는거지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먹는 게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기간, 다이어트 21일 째.
이제 39일 남았다.

이번 주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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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7-05-2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핑은 필요한 것을 사는 행위다. 쇼핑이 마음의 괴로움과 고통을 가라앉히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알기야 다 알지 뭐) ㅎㅎ

kleinsusun 2007-05-2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음식, 쇼핑, 똑 같아.
알기야 다 알지. 처세술 책에 나와 있는 내용도 모르는 게 없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계획을 세워라. 음하하하

마늘빵 2007-05-20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축하해요. 미리. 전 계속 못지키고 있습니다. -_-

moonnight 2007-05-2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남은 39일도 훌륭히 지켜내시리라 믿어요. 전 이번주 화요일에 거한 술자리가 잡혀있어요. 흐흐-_-;;;

antitheme 2007-05-2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성공하십시오.

BRINY 2007-05-2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잘 나가다가 수련회 다녀온 이후로 무너졌어요, 전...다시금 패스트푸드와 기름기있는 음식과 빵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

드팀전 2007-05-2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목표치가 얼마인데 날짜까지 기억하면서 다이어트를 하시는 건지 ^^
건강검진에서 과체중 (특히 체지방) 표시 나온거 아니면 다이어트에 너무 힘쓰지 마세요.언젠가 보니까 정상체중의 여대생 중 40인가 50인가 몇 % 가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린다고 하데요...

2007-05-20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7-05-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두 다시 시작해야 겠어요...작심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요트 한약 먹을까 심각하게 고려중.....

2007-05-2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편견에 분노했고 투쟁했다”
에이즈 감염 20년만에 유엔 고위관료된 케이트 톰슨
한겨레 서수민 기자
» 에이즈 감염 20년만에 유엔 고위관료된 케이트 톰슨
감염 뒤 친구들도 멀리
‘성매매여성’ 편견 괴로워
여성 환자 인권개선 앞장

1987년 봄, 당시 26살이던 케이트 톰슨은 자신이 에이즈를 유발하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됐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는 사람들은 감염을 두려워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몇 달 동안 난방도 안 되는 방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모진 역경을 딛고 200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의 선임고문에 발탁돼 지금도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맡은 분야는 ‘HIV 감염자들의 사회참여 확대’이다.

그를 환자에서 활동가로 바꿔놓은 원동력은 ‘분노’였다. 그는 여성 감염자들이 남성보다 훨씬 열악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는 처음에 의사에게 HIV 검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괜한 히스테리로 의료보험 예산을 깎아먹지 말라”고 면박만 받았다. 동성애자가 아닌 여성이 HIV에 감염될 리 없다는 이유였다.

치료 과정에서도 ‘여성 환자는 모두 마약중독자 아니면 성매매 여성’이라는 편견을 견디기 힘들었다. 환자에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절망한 그는 한때 모든 치료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생을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쓰자’고 마음먹고, 영국 최초의 여성 HIV 감염자 모임인 ‘포지티블리 위민’을 결성했다. 전문가들과 감염자들을 엮은 모임은 회원 수가 1천명이 넘는 주요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그는 1992년 ‘국제 HIV감염여성 커뮤니티’(ICW) 설립에도 앞장섰다.

이런 활동이 알려지면서 그는 2005년 유엔에이즈계획에 발탁됐다. 그는 바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남성들에게 ‘나는 감염자’라고 밝히며 데이트를 계속했다. 지난해엔 14년 동안 사귀어온 남자 친구와 결혼했다. 석사 학위와 보석공예 자격증도 땄다. 그동안 의학의 발달로 치료를 받는 HIV 감염자의 평균 잔여수명은 24년으로 늘어났다. HIV에 감염돼도 정상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보여줬다.

그는 앞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만나 HIV 감염자 인권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그는 15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보낸 기고문에서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들이 나에게는 모두 투쟁이었다”며 “그래서 나는 더욱 내 삶을 사랑하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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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노동자들은 노동중에 필요한 수분과 열량 섭취를 위해
맥주와 같은 알코올 음료를 마셨다.
(우리나라에서 농사일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알코올 음료의 과다한 섭취가 근대적 공장제의 노동 강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차나 커피 같은 음료를 마시게 하였고,
여기에 설탕을 듬뿍 쳐서 노동에 필요한 열량을 공급케 한 것이다.

설탕은 신대륙 노예들에 의해 생산되고 구대륙의 공장 노동자를 노예화시키는
기묘한 역할을 한 셈이다."

- 주경철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p211

벌써 3달 전,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을 읽다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쳤다. 물론... 밑줄도 쳤다!

신입사원 때부터 궁금했던,
<호기심 천국>에 물어볼까...도 생각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만났으니!

"왜 회사에는 꽁짜 커피믹스가 쌓여 있을까?"

대한민국 어느 회사를 가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꽁.짜" 커피믹스!
(옆에 있는 종이컵도 무제한 꽁짜!)

오늘 퇴근하기 전,
쓰레기통을 보니 커피믹스 껍데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하루에 3~4잔씩 습관적으로 마시는 사람들도 많으니 그럴 수 밖에!

나도 한 때, 커피믹스 중독이었다.
스타벅스의 더블, 아니 트리플 에스프레소 샷도 줄 수 없는 강력한 각성효과!
잠시나마 피로를 잊게하는 대적할 수 없는 달달함!
비몽사몽으로 출근하면 컴퓨터를 부팅하듯 습관적으로 커피믹스를 저었다. 빨간 스틱으로! (커피믹스+종이컵+빨간 스틱 트리오)

그러다 코카콜라 CF의 북극곰처럼 토실토실한,
아기곰 같은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곤....커피믹스를 끊.었.다. 굳건한 의지로!

요즘 남자들도 다이어트를 많이 한다.
하긴...정작 다이어트가 필요한 건 30~40대 남자 회사원들이다.

회사에서 체육대회를 할 때,
남자들이 축구를 하는 걸 보면 당황스럽다.
전력질주를 하는 것 같긴 한데...
공기의 저항 때문인지 몸은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않고
배 둘레 타이어가 출렁~출렁.... 물침대처럼.

다이어트를 하려면 무의식적으로 마시는,
회의할 때, 담배 필 때, 손님 왔을 때, 졸릴 때,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 믹스를 줄여야 한다.

아무리 운동을 빡세게 해도
커피 믹스의 프림과 설탕의 가공할 칼로리는....
지구를 반바퀴 돌지 않는 한 소화하기 어렵다.

회사원들의 다이어트 성공을 위한 Tip 1.
- 커피 믹스를 줄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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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저는 커피를 잘 안마십니다. :)

이매지 2007-05-16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아예 커피믹스를 가져가서 타먹다보니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건지 커피믹스 때문인지 뱃살이 느는 거 같아요.
흑흑. 커피믹스따위 굳건한 의지로 끊어야할텐데 쉽지 않네요 ㅠ_ㅠ

다락방 2007-05-1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치만...그치만.....지리멸렬한 회사생활에 달달한 커피믹스마저 마시질 못한다면.... orz

클리오 2007-05-1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믹스라도 공짜로 제공하는 직장에 다니고 싶어요. ㅎㅎ

antitheme 2007-05-1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돈은 안내지만 부서경비로 충당되는 커피믹스 엄밀히 공짜는 아니죠..
하지만 커피믹스 없는 사무실은 앙꼬없는 찐빵.^^

프레이야 2007-05-1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믹스가 이마트 최고판매 품목이라죠. 공짜는 없다, 아찔하네요.
예리한 발견이에요...

사마천 2007-05-17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차도 마찬가지로 공짜입니다. 컨설팅 회사 등 연봉 높은 회사를 가보면 꼭 고급 커피 만들기 기계가 있습니다. 수백만원 하는 우유 따로 넣는 기계도 있고요. 공짜거든요. 하지만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요? 공짜는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비로그인 2007-05-17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커피, 자판기에서밖에 마실 수 없습니다. 직원들에게 돈받고 팔아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BRINY 2007-05-17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커피 안마시지만...몸이 안좋아 활동량이 줄으니 몸이 둔해지고 살이 불어나는 거 같아요. 하여간 몸의 균형이 중요해요. 근데 저의 직장도 커피믹스 공짜 아닌데요.

kleinsusun 2007-05-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네...마시지 마세요, 영원한 꽃미남으로 남아 주세요!^^

이매지님, 아....도서관에 커피믹스를 갖고 가시는군요?
전 남친이 생기면 도서관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게 소박한(?) 소망이었는데...
그게... 소박한 게 아닌가봐요. ㅋㅋ

다락방님, 지리멸렬한 회사 생활을 하면서 뚱뚱해 지기까지 하면 더 속상하잖아요.ㅋㅋ

클리오님, 아........교무실에는 꽁짜 커피 믹스가 안 쌓여있나요? 몰랐다는.....^^

kleinsusun 2007-05-1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titheme님, 네....막상 없으면 서운할 것 같아요.ㅋㅋ

혜경님, 커피믹스가 이마트 최고판매 품목이예요? 아.....전 "신라면"인지 알았는데...^^

사마천님, 네....녹차, 둥굴레차, 각종 티백들이 꽁짜죠.
그럼요, 세상에 꽁짜는 없어요!^^

Jude님, 네....꽁짜가 아닌 직장도 꽤 있군요. 몰랐어요. Jude님도 자판기 커피 마시나요?^^
Briny님, 교무실에는 꽁짜 커피믹스가 없다! 는거 오늘 처음 알았어요.ㅋㅋ
그럼요, 몸의 균형이 중요해요. 건강 관리 잘 하시구요, 잘 챙겨 드세요!^^

세실 2007-05-2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안녕하세요~~~
한겨레신문에 실린 님의 모습 참으로 멋졌습니다.
분위기 찾고 싶을때엔 사무실에서 원두 마시고(뒷정리 하기가 좀 귀찮아서 아주 가끔~) 주로 맥심 커피믹스 마시고 있는데 님 표현처럼 북극곰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에궁...벌써 중독되었는데 큰일이네요....

kleinsusun 2007-05-2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한겨레 보셨군요. 부끄부끄^^
커피 믹스 열량이 정말 장난 아니예요. 프림에는 트렌스 지방도 있데요. ㅠㅠ
세실님도 한번 끊어 보세요.^^ 홧팅!
 

김훈-홍세화 특별한 만남
한겨레
» 소설가 김훈씨(오른쪽)와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9일 오후 서울 신문로의 한 야외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2년 2월 한겨레신문사에 함께 입사해 1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었던 두 사람은 여섯 시간 남짓 계속된 이날 대담에서 <한겨레>의 논조와 보도 태도, 한국 사회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각자의 성장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겨레>는 창간 19주년을 맞아 소설가 김훈씨와 홍세화 기획위원의 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남다른 인연을 지니고 있다. 2002년 2월 김훈씨가 <한겨레> 편집국 부국장 대우 사회부 기동팀 취재기자로 입사했으며, 홍세화씨 역시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위원으로 입사했던 것. 그러니까 두 사람은 ‘입사 동기’인 셈이다. 물론 김훈씨는 2003년 1월 20일자로 사직했고, 홍세화 위원은 정년퇴직 이후에도 기획위원으로 계속 신문사에 몸을 담고 있다. 홍 위원이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보아 ‘진보’에 해당한다면 김훈씨는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닌 이로 알려져 있다.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이 상극에 가까울 정도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궁금하고 솔직히 걱정도 됐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둘의 이야기는 활발했고 흥미로웠다. 대담은 9일 오후 서울 신문로의 한 야외 찻집에서 시작됐으며 찻집이 문을 닫은 뒤에는 인사동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김훈씨의 근작 소설 <남한산성>을 막 읽고 난 홍 위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홍: “<남한산성>을 잘 읽었습니다. 그 소설 속 상황을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는데, 저는 거기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쉬운 이야기부터 하죠. 김 선생의 경우에는 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김: “글이요? 글쎄요.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내 자신을 훈련시키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죠. 글에서,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자유 같은 건 저에게 일체 없는 거예요. 이것이 저에겐 노동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밥을 벌어먹는 노동이기 때문에 그건 끔찍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홍: “뭐, 저에게도 글쓰기가 비슷한 밥벌이의 수단인 건 사실인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또한 사실이죠. 역시 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무시할 순 없다고 봅니다.”

» 김훈
김: “저도 홍 선생께서 쓰신 책을 많이 봤는데, 역시 지금 말씀하신 소통의 문제, 소통을 통해서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 그런 것들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근데 글이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매우 아득하고 신뢰하기가 어렵고 위태로운 말처럼 들리기도 해요. 그것은 글을 쓰는 자들의 절망적인 답답함인데, 무기는 세계를 개조하잖아요? 미국의 무기는 오늘 아침도 이 세계를 정확하게 때려부셔가지고 개조해 버리는 것이죠. 그 개조의 방향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네들의 이익에 맞게끔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죠. 근데 말이 세계를 개조한다는 것은 거기에 비하면 참 아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홍: “지금까지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볼 때 지금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그러한 현실에 저항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그나마 지금과 같은 정도의 이성적인 사회가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인간은 물론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동시에 성찰적 이성 역시 지니고 있어서 그걸 토대로 부당한 현실을 상대로 한 싸움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글쓰기 작업도 그런 것의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두 사람 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이들. 그러나 개인적인 글쓰기의 동기, 그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탐색전을 생략한 채 득달같이 일합을 겨룬 느낌이었다. 과열된(?) 분위기도 식힐 겸 두 사람의 성장기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보았다. 홍 위원이 1947년 12월생이고, 김훈씨는 1948년 5월생이어서 두 사람은 5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김훈씨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두 사람은 같은 학번이 되었는데,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도록 한 번도 같은 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김: “제 어린 시절은 가난과 억압뿐이었어요.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왔는데 거기서 좀 자라서 왔어요. 거기서 미군이 철조망 너머로 던져주는 껌과 초콜렛을 얻어먹었죠. 대학 들어갈 무렵 나와 내 친구들의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밥을 먹는 것. 밥. 밥을 좀 먹는 나라를 만들어서, 도대체 밥 세 끼를 좀 먹고 살아야겠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간절한 소망이었죠. 우리는 고조선때부터 그 시대까지 밥을 못 먹었어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보면 해마다 굶어죽은 놈이 수만명씩 나오잖아요. 그리고 우리 어렸을 때도 해마다 보릿고개만 되면 굶어죽었어요. 우리 정부의 행정구호가 ‘기아퇴치’였다고, 기아퇴치.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들려는 게 우리들의 비통한 소망이었지. 근데 우리는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의 박정희 대통령이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든 것이고 우리는 그 밑에서 노예처럼 일했어요. 마소처럼 일하고 개처럼 짓밟히면서 일해가지고 밥 먹는 나라를 만든 거예요.”

» 홍세화
홍: “전후의 상황이라는 게 대부분이 가난했고 저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나마 조금 나은 축에 속한다고 할까. 고등학교 때까지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해서 빨리 출세를 하나 하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영어보다 수학을 잘해서 이과를 갔고 공대에 들어갔는데, 바로 대학 들어간 해에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내 가족이 6.25 당시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던가를 통해서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아까 ‘기아퇴치’라고 하셨는데 전 그에 관한 기억은 별로 없고 대신 학교 담벼락마다 붙어 있었던 ‘반공방첩’이라는 구호가 아주 강력하게 남아 있어요. 저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 구호를 저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 가치관이 붕괴되고, 그래서 공대고 뭐고 다 재미없어지고 방황하게 된 시기가 바로 20대 초반이었어요.”

김: “전 대학 졸업을 못했어요. 영문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해버렸는데, 그리고 다시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고. 내가 그때 학교를 그만둔 것은 돈이 없어서였어요. 등록금이 없어가지고. 그런데 지금 밥 얘기를 더 하자면, 밥을 먹는 세상을 만들어 놨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악과 억압과 비리를 저질러 가지고,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에요. 야, 밥을 먹는 것에 대한 무서운 대가가 바로 그거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죠. 노무현 대통령은 아마 우리가 밥을 먹는 과정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악들에 도전했다가 참패하신 것 같아요. 그분이 참패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개조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일은 차기 정권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계승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박정희, 이승만 이후로 깔려버린 구조화된 악과 억압이라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가 않은 것이죠. 노 대통령 같은 낭만주의나 대중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힘으로도 그것은 부술 수가 없는 훨씬 더 뿌리깊고 강한 구조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어요. 이만큼 생각한 것도 나로서는 상당히 사고가 진보된 것이죠. 그 전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웃음)

노대통령이 ‘실패’한 이유는…
김 “성장과정 구조화된 악에 대중주의로 도전했다 참패”
홍 “과반의석까지 몰아줬는데 민중의 변화요구에 스스로 배반”

홍: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 지배세력들이 민중이나 이런 걸 표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명분과 실리를 같이 취하려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죠. 그것이 물론 지금까지 말슴하신 대로 축적된 모순과 60년 가까이 수구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물적 토대, 각 부문별로 결합되어 있는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이 변화를 요구하면서 노무현 정부를 세웠던건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과반수의 국회의석도 주었고. 근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결국 자기를 뽑은 민중을 스스로 배반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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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서 노무현에 이르는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은 예상 가능한 차이와 뜻밖의(?) 공감대를 보였다. 두 사람이 공감대를 이룬 바탕에 <한겨레> 입사동기라는 인연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쯤 해서 2002년, 두 사람이 <한겨레>에서 한솥밥을 먹던 시절로 거슬러올라가 보았다. 두 사람은 어떤 계기로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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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당시 저는 혼자 구석방에 들어앉아서 책만 읽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유령 같은 인간이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위기를 느꼈어요. 어디론가 다시 삶의 현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 자신이 괴멸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시 김종구 사회부장(현 편집국장)에게 찾아가서 채용해 달라고 부탁했죠. 신문사에 들어갔더니 월드컵의 대규모 거리 응원이 벌어지고, 그 다음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어서 대통령 선거까지 대중들의 힘의 폭발이 이어졌어요. 월드컵은 놀라웠죠. 난 그런 대중의 힘을 처음 봤어요. 대중의 힘은 매우 맹목적인 것 같기도 했는데,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이어 대선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지는 걸 보면서 ‘난 다시 집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 밀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통령이 당선되던 그 다음날 사표를 내고 <한겨레>를 떠났죠. 미선이 효순이 사건, 그것은 범죄는 아니었죠. 사고였어요. 그런데 그것을 범죄로 몰아가고 결국 반미주의로까지 끌고 나가는 일련의 흐름에서 <한겨레>는 자기의 사명을 다했죠. 그 과정을 바라보면서 ‘내 생각하고는 상당히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나와 <한겨레>의 큰 갈등이었어요.”

홍: “저는 프랑스에 머물다가 귀국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겨레> 입사였어요. <한겨레>에 입사하기 위해서 귀국한 것이죠. 그런데 저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죠.”

김: “심하다, 심해.” (웃음)

홍: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말씀하신 대로 사고인 게 분명하죠. 그런데 만약 미군쪽에서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서 그야말로 점령군이 아닌 평등 차원에서의 선언이나 이런 것이 나왔다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미 간의 구조적인 문제, 역학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는 <한겨레>가 역할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감정적 부분을 동원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점령군이라는 미군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죠.”

김: “그것은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결과도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앞으로도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서 고통스러운 전례를 남긴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고를 계기로 미군과 미국측의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생산적인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의 이성이 매우 교란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홍: “그것은 참 어려운 문제죠. 우리처럼 지독한 미국중심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회에서 대중의 이성은 벌써 오랫동안 마비되어 온 것이 사실이거든요. 거기에서 어떻게 균형감각을 가지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게 무척 어려운 지점이죠.”

2002년 ‘한겨레’ 같이 입사했는데…
김 “골방에서 현장으로 복귀…대선 끝나자 다시 밀실로”
홍 “입사위해 프랑스서 귀국 때 한국에 적응 않겠다고 각오”

김: “아까 소통에 관해 말씀하셨죠. 제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말들이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이 되는 일이 많아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해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당파성이 지향하는 바의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언어의 소통기능은 점점 마비되고 언어는 무장하게 되는 것이죠. 무장된 언어가 사회를 막 교란하고 뒤집어엎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말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시대 언어의 풍경인 것이죠.”

홍: “동의합니다. 예컨대 인터넷이 활성화하면서 마치 인터넷이 쌍방향간의 소통의 장이 열린 것이다 라고 하지만 저는 회의적입니다. 토론이란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뿐 아니라 남의 견해도 들으면서 자기 견해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바로 배설해버리는 식인 것 같아요. 그것은 집단의 외피를 쓴 이기적인 개인들의 뻔뻔한 때문인 것 같아요. 집단의 뒤에 숨어 있는 개인들이 문제인 거죠. 그리고 그게 다 경제지상주의적 가치관 때문인데, 경제사회에서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토론과 교육, 소통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요.”

» 김훈

김: “민주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고,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 사회는 이루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전개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홍: “그와 관련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해 조금 말해 보죠.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해야 하는 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농촌의 피폐화가 걱정이에요.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그야말로 무서운 변화가 올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성찰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죠.”

한-미 FTA에 대한 생각은…
김 “이익 추구하는게 국가도덕성…진보 일관성 시비는 무의미”
홍 “한국의 문제는 상대적 빈곤…농촌의 피폐화가 걱정”

김: “저는 한 나라는 이념이 아니라 이득을 추구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도덕성이라고 생각해요. 국가가 이익을 이행하는 것은 도덕적인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도덕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도덕이나 부도덕을 말할 수가 없는,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이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참 따지기 어려운 것이죠. 나는 우리 정부가 그것이 결국 이득이 되게끔 앞으로 그걸 헤쳐 나가야 하고 그 이득이 제발 국민 각계각층에 골고루 미치는 이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난 자유무역협정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다음에 <한겨레>가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의 일관성을 집요하게 시비한 적이 있었어요.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진보의 일관성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참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런 기사가 나올 때 <한겨레>를 좋아하지 않아요. 다만 농민이라는 한 계층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이걸 추진한다는 것은 참 무리하고 부당하고 부도덕한 측면이 조금 있어요. 그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마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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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에 와서 다시 부딪쳤다. 얘기가 다시 격렬해지려는 참에 마침 찻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대신 적포도주가 곁들여지면서 좀 더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두 사람은 음식을 앞에 두고 다시 배 고팠던 지난 시절을 회고한 다음, 요즘 젊은이들이 소중한 청년기를 너무 소홀히 보내는 것 같다는 데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김훈씨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표한 것은 다소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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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저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정말 약자의 편이 되기를 바랐어요. 전 노 대통령 치하에서 세금 많이 냈습니다. 세금 낼 때 기분이 좋았어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책을 써서 인세를 받아서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어요. 저는 의료보험도 많이 냈어요. 우리 시대의 분배에 기여한다면 정말 좋은 일이죠. 그런데, 신문 보니깐 아니더라고.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 소득세 50만원 올렸다고 시위하고 말이죠. 우리나라 조세정책은, 대통령의 리더십은 거기서 망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홍: “그렇게 당연히 사회에 내놔야 되는 사람들이 정작 내놓지 않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분노해야 되는 것이죠.”

김: “저 분노하고 있어요.”

홍: “분노의 방식이 문제인데요. 분노가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요.”

김: “그건 권력이 해야죠. 정치권력이.”

홍: “한국과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 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그런 일을 순조롭게 하리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요?”

김: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저는 <한겨레>가 기본적인 객관성을 가지길 바랍니다. 부는 악이고 빈이 선이다, 라는 이분법을 버려야죠. 노동은 선이고 자본은 악이다, 그런 이분법적 정서가 있는 거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 안해요. 지금 한국 노동의 문제는 노동세력 타락의 문제예요. 노동귀족들의 타락에 국민들은 절망하고 있죠.”

홍: “그걸 과연 노동귀족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구요. 또 하나, 한국 사회에서는 타락할 권리가 있는 사람과 타락할 권리조차 없는 사람으로 나뉘어진다고 봅니다. 어느 자리에 서면 다 타락합니다.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 홍세화

김: “홍 선생의 전공이 ‘똘레랑스’입니다만, 똘레랑스라는 건 본래 보수주의자의 것이었어요. 우리가 빼앗긴 거죠. 보수주의의 관용 안에서 많은 걸 해결할 수 있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구요. 그런데 그걸 놓친 거예요. 보수주의자가 타락해서 자기 기득권만 방어하면 된다, 이런 식이 되면서 망하게 된 거죠.”

홍: “‘똘레랑스’의 어원 자체가 참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관용이라고 하기보다는 용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거죠. 가장 정확한 것은 사자성어 ‘화이부동’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똘레랑스’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수구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앵똘레랑스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이었습니다.”

김: “저는 우리 현행법에 모든 정의와 개념이 있다고 생각해요. 법치주의를 완성해야 합니다.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똘레랑스’도 이루어질수 있다고 봅니다. 법치주의를 깨자고 들면 곤란하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죠. 인간의 능력이나 경제적 처지가 평등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죠. 다만 법률 앞에 평등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두사람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은…
김 “말해보니 기본은 같은데 삶의 여정이 달랐잖아요”
홍 “관찰하는건 일치하는데 대응방식이 갈라졌지요”

홍: “김 선생과 저는 사회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데에서는 많은 부분 일치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데에서 갈라지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우리 사회에 힘의 논리가 관철될 때 기본적으로 그 힘은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 법조차 힘의 논리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부와 빈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겨레> 논조가 부는 악이고 빈은 선이다, 그런 것은 아니죠. 그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빈곤이 죄악시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사물이라고 봅니다.”

김: “가난은 탈피할 대상이지 장려 대상은 아닙니다. 옹호할 가치는 아니죠. 가난에 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수한 것은 아니에요.”

홍: “우리가 공화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그 핵심이라 할 애국주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한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위함을 받았다는 경험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에서는 그런 경험이 없죠. 끝없이 관리통제의 대상이 될 뿐이죠. 자발성이 없는 거예요. 이를테면 무상교육 얘기를 해 보죠. 그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자본 형성 비용을 사회가 대준다는 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계층간 연대와 세대간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겁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소득이 적은 사람의 비용 대주는 것이 계층간의 횡적연대라면,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을 가령 국민연금 같은 형태로 돌려주는 것은 세대간의 종적연대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나로 하여금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윗세대가 은퇴할 때 그들에게 지금의 경제활동 인구가 받은 것을 되돌려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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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역시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벌써 여섯 시간이 훌쩍 넘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보는 세상과 <한겨레>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초반과 같은 팽팽한 긴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포도주로 불콰해진 얼굴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김훈씨가 대담을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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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저는 사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우리 둘이 매우 다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말을 나누어 보니 기본은 같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방향은 정말 달라졌네요. 그도 그럴 것이 삶의 여정이 매우 달랐잖아요. 그런 만큼 서로를 더 존중하고 긍정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의 바탕이 천진해야 해요. 천진성이 있어야죠. 천진성이라는 게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거잖아요?”

» 소설가 김훈씨(오른쪽)와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9일 오후 서울 신문로의 한 야외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훈-홍세화 특별한 만남<

김훈씨는 <한국일보> 기자와 <시사저널> 편집국장 등을 거쳐 <한겨레>에서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로 일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어 최근 새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발표해 서점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받았다.

홍세화 기획위원은 오랫동안 프랑스 파리에 머물다가 2002년 한겨레신문사 입사를 계기로 귀국했다.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위원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한 뒤, 지금은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등의 시평집을 냈다.

정리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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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5-15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자 신문에 실린 건가요? 챙겨두어야겠네요.^^

마늘빵 2007-05-1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드무비 2007-05-1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들으면 김훈의 이야기가 그럴듯하군요.
수선 님, 잘 읽었어요.^^
 
 전출처 : 로시난테 > 김훈은 '난 아무 편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 나무*2003)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했던 김훈이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한 비평가는 '그의 문체가 소설에 적합하겠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기자로서의 글쓰기와 소설가로서의 글쓰기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글쎄. 솔직히 난 김훈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처음 접한 김훈의 글은 <강산무진>이었다. 김훈의 몇몇 소설을 뒤적이고 또 이 책을 본 후에, 난 위의 비평가와는 전혀 반대의 의문을 가졌다. '이런 식의 사고와 문체로 과연 김훈이 기자적 글쓰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뒤늦게 읽은 김훈의 글에는 뭐랄까, 기자로서 요구되는 '벼린 이성'보다는 '축축한 감정'이 묻어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는 편집자와의 상의 끝에 원래 제목이었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를 수정한 제목이라고 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곱씹을수록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제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걸 두고 제목에 '낚였다'라는 표현을 쓰는가 보다, 했다.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출판사>에서 스치듯 김훈의 과거사를 전해 듣고, 난 그가 궁금해졌다. 부끄러운 과거 덮기에 급급한 한국 지식인 지형에서 자신의 치부를 손수 밝히고자 했던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듣고 싶어졌다. 게다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도발적 표제를 건, 김훈이 말하는 세설(世說)이라니. 알라딘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난 조바심이 났다.  

그에게 붙은, 그를 가장 단선적으로 보여주는 수식어는 바로 ‘문장가’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간결한 문체와 그 사이에 드문드문 배치하는 만연체는 글의 전체 맥락 속에 적절히 혼용돼 읽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책머리에>라는 책의 첫 장부터 그의 칼날 같은 문장이 나를 압도한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미리 설정한 사유의 틀 속으로 세상을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글의 계통 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흘린 액즙과 고름이 서로 섞이고 스미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것은 어찌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지. 몸이 가장 부대끼는 날에, 가장 곤고한 글을 나는 썼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세설 중 가장 압권으로 문화일보가 소개한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일부를 보자.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록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중략)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pp.18-20) 

그러나 김훈의 미사여구에 갖혀 그의 문체에만 주목하는 것은 오랜 기간 기자로 재직하며 쌓았던 그의 내공을 폄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글 쓰는 재주야 하늘이 내려주신 선험적 재능이라 볼 수도 있어 그의 필력에만 평가가 집중하는 건 ‘주례사비평’스러운 경향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 실린 글은 세상살이에 대한 김훈의 사색을 훔쳐볼 수 있어 그의 내면을 보다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 

 

김훈식 글쓰기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게 바로 '아날로그적 글쓰기'다.

그는 여지껏 컴퓨터 자판에 익숙치 않아, 4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꾸역꾸역 문장을 만들어 나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집필 공간엔 잔뜩 구겨진 원고지와 지우개 가루가 어지러히 널려 있다고 한다.

사실 글쓰기를 업으로 자임한 자가 만드는 문장 하나하나는 몇번을 고쳐쓰고 지워쓰는, 산고의 고통을 거치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란 본디 '볼펜'보다는 '연필'로, 좀 더 투쟁적으로는 '몽당연필'로 써야 맞다.


 

‘너는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김훈의 대답은 자못 분명하다. ‘난 아무편도 아니다’가 그가 유일하게 밟고 있는 사유의 방향성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그는 그의 ‘계통없음’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니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도 그의 ‘아무편도 아님’은 쉽게 읽힌다.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 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p.78)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 지경인 것은 아니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난다.“(p.76) "나는 보편과 객관을 걷어치우고 집단의 정의를 조롱해 가면서 나 자신의 편애와 편견을 향하여 만신창이로 나아갈 것이다.”(p.76)  

그가 잣대로 삼는 유일한 사유의 기초는 바로 ‘삶의 구체성’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먹고 사는 일’을 고려하는 것부터 그의 사유가 전개된다. 예컨대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에서 아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충고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p.13)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밥을 먹고 돈을 버는’ 인간의 기초 행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일자리를 잃고 내 처자식의 밥 세 끼를 포기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도대체 ‘개혁’이란 말인가."(p.31) 그리고 그의 이러한 기본적 삶에 대한 집착은 곤궁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의 대한민국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듯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열차 지붕 위에 실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세 살 먹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피난지에서 자라난 유년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팠고 1년 내내 배가 고팠다.”(p.21) 혹은 오랜기간 기자 생활을 하며 부딪힌 사건들, 사람들의 양면성과 이면성을 몸으로 체득하며 얻은 심성일 수도 있겠다.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세계를 강제로 편입시켜서 일사불란한 논리를 전개하는 언론행위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인다.”(p.92) 

난 김훈의 계통없음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대단히 용기 있는 커밍아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한 가지 틀로 명쾌히 설명하는 언설은 이제 흰소리로 느껴진다. 다만 이 책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잣대의 무의미함’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삶의 모든 부분을 인정하는 ‘절대적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언급해 둔다. 또한 지나친 허무주의로 인해 극단적 부정의 냉소주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젊은 날의 말을 되돌아보는 두려움이 98년의 저물녘에 되살아난다. 말들은 허상 만들기로 싸우고 허상 위에서만 타협이 가능하다. 결국 당대의 현실은 당대에서 말하여지지 않는다. 들끓고 날뛰고 날아오르는 말들이 당대의 결핍이며 빈곤이다. 신기루는 점점 두꺼워진다.”(p.66) "어느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고위관리가 ‘그것(IMF)은 나의 책임이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책임을 자인하고 나섰다 한들 그 말이 그 말이다. ‘책임이 없다’는 말이나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나 그 말이 그 말인 것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이고 들으나마나한 소리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내용하다. 왜냐하면 그가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책임을 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p.3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나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의 ‘계통없음’을 삶의 구체성에 천착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지, 삶의 갖가지 핑계거리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초로(初老)라 부르지만, 이제 이순(耳順)에 가까워져 오는 그가 보여주는 ‘글’에 대한 집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글이란 ‘왜 쓰는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생기발랄한 몸의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이 몸이 언어를 통해서 이미지에 가닿을 때 그의 글을 가장 빛나는 문장을 이룬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p.203) 매일 이 핑계, 저 핑계에 절주, 금연 선언을 번복만 하기에 바쁜 나로썬 얼굴 홧홧 거리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난 몸을 부릴 대로 부려야 사유가 번뜩이는, 젓 비린내 여지껏 가시지 않은 20대가 아니던가. 이런 내가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지금부터 다시 금연이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몸이 이미지에 맞는 가장 정확한 문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이 술과 담배에 절어 있어서는 끝장이다.

이 몸에 포즈가 배어 있어서는 다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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