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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한글의 날.
예전 같으면 아주아주 행복했을 휴일.
노태우 정권 때 10월에 휴일이 많다는 이유로 국경일에서 쏙 빠졌다. 슬프다.

그런데 더 슬픈건 10월의 유일한 국경일 개천절 마저 올해는 일요일이었다는 거다. 작년 12월에 올해 달력을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소록소록하다.

일본어를 배우기로 작년 부터 내내 결심했던 수선.
( 참 시작하는데 오래도 걸렸다.)
이번달, 억수로 피곤하고 바쁜데도 불구하고
드뎌 일본어 주말반 초급반을 등록, 10월 9일에 첫수업을 받았다.

일본어 첫수업은 항상 똑같다.
글자 배우고, 글자 읽는 법 배우고, 다음 시간까지 히라가나 몇번 써오라고 숙제 내주고...

그 다음 시간엔 인사 배우고,
" 소레와 난 데스까?" 이런가 하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석을 하기 시작한다.
일본어 학원들은 커리큘럼을 대폭 개선해야 한다.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지겹게 가르키냐?

어쨌든 이번만은 꼬~옥 일본어를 제대로 배워서
일본 소설을 읽고야 말테다. 꼬~옥!!!
( 번역의 한계를 너.무.도 절실히 느낀다.)

수업을 마치고 강남역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어서
진솔문고에 갔다.
진솔문고 바로 옆에 사는 친구랑 진솔문고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의 6개월만인가? 오랜만에 진솔을 찾는 발걸음이라 사뭇 기대가 되었다. (난 쾌적하고, 사람 많지 않고, 책 배치가 잘되어 있는 진솔문고를 아주 좋아한다.)

기분좋게 진솔문고에 들어서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책장이 텅텅 비어있고,
책들은 바닥에 마구잡이로 쌓여서 울고 있었고
선반 정리를 하는건지 철수를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공사하는 아저씨들이 디따 큰소리로 못질을 하고 있었다.
쿵쾅쿵쾅.
정말 깜짝 놀랐다.

그냥 나오려고 하다가 반대편을 보니,
진솔문고의 반쪽은 정상영업을 하고 있었다.
놀라서 친구에게 전화를 해 보니,
원래 진솔이 건물 두개 자리를 썼는데 ( 지하를 터서)
계약기간이 끝나서 면적의 반은 안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아무래도 강남교보로 인한 매출 하락으로 공간을 줄이는것 같다고 했다.

이유가 뭐건 아주아주 실망했다.
난 친구가 올 때 까지,
흉물스런 빈 책장들이 가득한 나머지 반쪽에서 울려오는
못소리를 들으며 책구경을 했다.
못소리도 자꾸 듣다보니 리듬감이 느껴졌다.

문학코너에서 몸풀기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왔다.
우리는 거의 한시간 동안 천천히 책구경을 했다.
저녁 먹기 전의 애피타이저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띄는 책이 꽤 많았는데,
나중에 인터넷에서 주문하기로 하고
찜한 책을 폰카로 사진만 찍어 두었다.
책은 달랑 두권만 샀다.
나 같은 얍쌉한 소비자의 달라진 소비유형 때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하나하나 문을 닫고 있느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달랑 두권, 무슨 책을 샀냐구?

For me, <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 ( 에스테 빌라 저 /조선희 역/ 황금가지) .
- 일단 제목에 feel 꽂혀서 책을 뽑았다.
그런데.... 이 책은 <마님 되는 법> 처럼 남자를 부려먹자 이런
가벼운 얘기가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그 유명한 에스테 빌라.독일의 유명한 의사이자,
사회운동가다.
남자를 우려 먹는 여자들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여성억압이란 허구이며, 오히려 여자들이 남자들을 이용한다는
얘기다.흥미롭지 않은가?
이 책을 보자마자 동생이 재미있겠다고 가져 갔는데,
( 내 동생은 대단한 독서광이다. 미술,음악,문학 너무도 재능
많은 그녀!)
나도 빨리 읽고 싶다.

For my friend, <웬디수녀의 미국 미술관 기행2>(예담)

미술코너에서 우리들의 대화.
친구 : " 웬디수녀 책이 그렇게 재미있다며?"
수선 : " 어... 나 <유럽미술 산책> 읽었는데 진짜 재미있더라.
잘난 척 하고 어렵게 쓰는 다른 평론가들하고 전혀 틀려.
그림 하나하나에서 미세한 감정을 잡아낸다.
그리고 할머니답지 않게 아주 날카로워."
친구 : " 어...그래? 꼭 읽어봐야 겠네."
수선 : " 그래? 그럼 내가 한권 선물할께"
( 호기 좋게 책을 뽑아 계산대로 걸어가는 수선.
계산을 하고 친구에게 말한다)
" 그럼 우리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우하하하.
책 한권 선물 받고, 저녁을 살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친구!
토요일 저녁, 맥주를 참 맛있게 마셨다.
그날 따라 어찌 그리 달던지....ㅋㅋ

진솔문고의 반쪽화
정말 정말 아쉽다.

교보여! 너만은 영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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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마릴라 2004-10-2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종종 들어와서 서재를 둘러보고 갑니다^^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셨나봐요?
음...저도 요즘 일본어가 배우고 싶어졌는데 당최 시작하기가 쉽지 않네요.
개인적으로 작가 유미리를 좋아하는데 얼마전 유미리 홈피가 있는걸 알았거든요. 근데..일본어! 번역 싸이트가 있긴 하지만...쩝.
후훗~일본어 열심히 하세요! 저도 언젠가는 시작하렵니다^^
 

오늘 우리팀의 한 선배가 회사를 떠난다.
저녁에는 환송회가 있을 예정이다.

요즘 가뜩이나 팀 분위기도 안 좋았는데,
날씨도 흐린 것이 구질구질 하고,
금요일이라 부담도 없고,
항상 그렇듯이 다른 사람이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하면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슬쩍 떠올리는 사람들의 특성상
오늘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술자리가 될 것이며, 전사자가 속출할 확률이 높다.
특히, 오늘의 주인공은 업혀갈 가능성이 크다.

오늘 회사를 떠나는 선배는 나랑 같은 대학을 나왔다.
얼마 전 한 리크루트 회사의 이직률 조사 결과를 보니
주요(?) 대학 중 서강대가 이직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얼마나 신뢰성 있는 조사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고
선배는 오늘 세 번째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회사를 떠난다.

설렁설렁 다닐 수 있는 문과대를 졸업한 나와 달리,
선배는 빡센 화학과를 졸업했다.
서강대가 흔히 서강고등학교라 불리는데,
설렁설렁하게 졸업할 수 있는(그래도 다른 학교 보다는 훨 빡빡하지만) 문과대와 달리,
이공계는 정말 고등학교 같다.
토요일에 실험을 일상다반사로 하며, 애들은 학교에 살다시피 한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전에 잠깐 운동장에서 몸을 푸는 고딩들 처럼
저녁을 먹으면 우유팩 차기를 한다.
(물론 허접한 차림으로 우유팩을 차는 사람들은 대부분 복학생들이다.)
선배는 대학원도 나왔으니까,고등학교를 6년 더 다닌 샘이다.

선배는 참 끼가 많은 사람이다.
노래방에 가면 혼자 마이크를 먹다시피 노래를 한다.
정말 노래를 잘한다. 특히 발라드에 강하다.
기타도 잘 치는데 팀 야유회 갔을 때 기타를 들고 와서,
90년대 초 엠티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도 잘 찍는다. 매뉴얼 기능 빵빵한 디카를 하나 사사 매일 들고 다닌다.
디카 동호회 같은데도 자주 사진을 올린다.
가끔은 점심시간에 덕수궁에 가서 사진을 찍고 오기도 한다.

선배는 참 술을 좋아한다.
술 마실 사람이 없으면 혼자 가서도 술을 마신다.
분위기도 좋아해서 바에서 술 마시는걸 좋아한다.
여자도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다.
밝힌다기 보다는 그냥 편하게 앉아서 농담 따먹기 하는 걸 좋아한다.
조용조용하게 얘기하는걸 좋아한다.
선배는 쇼핑을 좋아한다.
백화점도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남자들과 달리 온라인 쇼핑을 좋아한다.
옥션 같은데 자주 들어가고, 간간히 소품들을 산다.
몇 번씩이나 옥션에서 소포가 배달되는 걸 봤다.
시계, 명함첩, 운동기구 이런 잔잔한 물건들이다.

선배와 16개월 동안 앞뒤로 앉아서 근무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선배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작년 겨울에 한번 껄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 서로 조심하며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선배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은 선배를 의식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선배가 회사를 그만 둔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다.
" 성대리 안테나가 왜 이리 느려요?" 하며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선배가 밉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벌써 3주 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선배가 회사를 떠난다.
추석 전 선배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PC에 있던 폴더들을 통째로 넘겨 주었다.
거래선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retire announcement를 하고,
Susan Sung을 소개했다.
거래선들은 그 동안 고마웠다는 짤막한 답장을 보냄과 동시에,
Susan에게는 인사 메일을 보내고, 선적 일정을 챙기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일상적으로 돌아간다.
나는 정신 없이 수많은 메일들에 채이면서, 답장을 한다.
" Happy to work with you".

오늘 회사를 떠나는 선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무 상투적인 말이지만
꼭 행복하라고.....

선배는 30대 후반의 다른 남자들과 달리
여리고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감정 기복도 커서 곧잘 우울해 지기도 한다.
언젠가 선배가 건축가나 교수가 되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아니면 작곡가?
어쨌든 선배는 텁텁한 조직 보다는 자유로운 일, 뭔가를 create하는 일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사진을 찍는 것 처럼....
선배가 가는 회사가 좀 설렁서렁, 헐렁헐렁 했으면 좋겠다.

Go Go J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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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0-0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적추적 비도 내리는데 우울하게 술 퍼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새길 찾아 떠나는 분 축하해 주는 들뜬 자리를 가지시길 빕니다. 라고 말하면 아직 "사회물"을 제대로 먹어보지 않은 학생의 눈높이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일까요. 비오는 날 오전내내 들떠 있었으니 비도 그쳐가겠다, 대강 마음 가다듬어야겠어요.

아, 늦게나마 다시 인사드립니다. 매너, 대중입니다. 반가워요. 숨책, 리더스가이드, 그리고 이곳까지. 각종 리뷰와 리스트 섭렵하셔서 사랑받는 서재 꾸미시길 빌어요. ^_^o-

22zero 2004-10-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 일까 궁금했는데....^^ 잘보고 갑니다...
 

<태평로 사랑 이야기>
이런 상투적인 제목의 홍보용 CD가 있었다.
이문세의 노래가 한참 유행할 때였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 중학교 때였는지 아님 고등학교 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 CD가 라디오 드라마 같았고,
성우의 목소리는 아주 인위적이었으며,
대사들은 아주 상투적이고 닭살스러웠다는 기억만이 남는다.

삼성플라자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그 CD는
<태평로 사랑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한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 커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만들고 그 중간중간에 그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들을 끼어 넣었다.

그걸로 어떻게 홍보를 하냐구?
그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장소가 모두 삼성플라자 안에 있는 식당들, 서점, 음반가게 등이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길에
매일 매일 1년 넘게 보아온 노숙자 아저씨를 보면서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 이런 허접한 또는 너무도 현실적인 "제목"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에 대한 짧은 글을 써보리라 생각했다.

태평로란 어떤 곳인가?
삼성본관, 삼성생명 빌딩, 신한은행 본관이 있는
소위 엘리트 회사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울역과 시청역은 한 정거장 차이지만,
이 두 역의 분위기는 굉장히 다르다.
서울역에는 노숙자가 셀 수 없이 많지만,
태평로 지하도에는 노숙자가 몇 되지 않는다.

내가 매일 보는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침 마다 태평로 지하도에서 신문지도 깔지 않고 자고 있다.
서울역의 다른 노숙자들은 두꺼운 라면박스를 몇 겹으로 깔고,
적어도 신문지는 깔고 나름대로 침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갖추고 잔다.
요즘엔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태평로 아저씨는 그냥 맨 바닥에 쪼그려 누워 있다.
그 아저씨는 1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까만 파카에 까만 바지.
쪄 죽을 것 같은 여름에도, 얼어 죽을 것 같은 겨울에도 똑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파카 속에는 난닝구 하나 없이 맨 살이 보인다.

8월의 가장 더웠던 날,
버스 정류장까지의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던 날,
그 아저씨는 파카를 입고 왕뚜껑을 먹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아무런 표정 없이 열심히 왕뚜껑을 먹고 있는데,
그 아저씨를 바라 보는 내가 더 더운 것 같았다.

퇴근할 때도 맨날 그 아저씨를 본다.
그 아저씨는 그냥 천천히 걷고 있다.
머리는 나만큼이나 길고,
검은 머리 반 새치(흰 머리?) 반인 아저씨의 머리는
산발 그 자체이다.

그 아저씨는 하루 종일 뭘 할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해 봤는데,
지금은 매일 지나가는 버스를 보는 것처럼
그 아저씨는 내게 익숙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아저씨의 하루 일과가 다시금 궁금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퇴근할 때 까지 하루 종일 뭘 할까?
그 아저씨는 구걸도 하지 않는다.
다른 노숙자들처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시비도 걸지 않는다.

그 아저씨는 무슨 돈으로 왕뚜껑을 먹고
매일 매일의 시간을 견딜 만큼의 식량을 얻을까?
그 아저씨는 덥지 않을까?
그 아저씨는 언제부터 노숙자가 되었을까?
그 아저씨는 가족이 없을까? 등등.

태평로 노숙자는
번듯한 양복을 입은 허울 좋은 회사원들 속에
오늘도 까만 파카를 입고 태평로를 느릿느릿 걷고 있다.

2004년 9월 추석을 앞둔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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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

'작가와 문학사이' 21번째 작가는 사랑 듬뿍 받는 소설가 김애란씨이다. 심진경 평론가에게 바톤을 이어받은 젊은 평론가 차미령씨가 공개적으로 표나는 애정고백을 바치고 있다. 혹은 작업을 걸고 있다. '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이라... 넉다운시킨다는 얘기 아닌가?..  뉴스메이커에 실린 가장 최근의 인터뷰 기사도 후미에 붙여놓는다. 평론가의 애정고백이 영 쑥쓰럽다고 하므로.  

경향신문(07. 06. 09) [작가와 문학사이](21) 김애란-독자를 세번 매료시키는 힘

한 소설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양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작업을 거는구나.’(이기호)

또 한 비평가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신형철)

2003년 등단한 작가는 2005년 ‘최연소’라는 타이틀과 함께 유수의 문학상(한국일보 문학상)의 영예를 누렸다. 작금의 한국소설을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이 일치단결이 그렇고 그런 안간힘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넘겨짚은 분들은 조만간 출간될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을 꼭 읽어 보기 바란다. 이러한 반응이 예사로 부풀려진 것이 아님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범한 작가는 누구인가. 김애란이다. 1980년생이다.

현재 김애란은 2000년대 젊은 소설의 대표명사다. 하지만 동년배의 소설들과는 확실히 다르고, 그래서 더 눈에 띈다. 최근 1, 2년 사이 데뷔한 문단의 최신예들은 이상하고 신기하고 난해한 이야기들을 창안하는 데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애란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범속한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누구나 쉽사리 포착할 수 없는 그 이면의 진실들을 끌어내서 기어이 독자가 무릎을 치게끔 만든다.

김애란은 세번 독자를 매료시킨다. 한번은 그 활달한 상상력에, 한번은 재치 넘치는 언어감각에, 또 한번은 세상살이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이 세층위가 한데 엉기며 시너지 효과를 빚어내는 것이 김애란 소설이다. 그중 세번째 층위가 유난하다. 그 시선이 비루한 동시에 숭고한 우리네 삶을 다시금 곱씹게 한다.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서는 기원에의 탐색, 서울 변두리 자취 남녀들의 삶,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가 유머와 페이소스를 등에 업고 촘촘히 펼쳐진다. 각각을 대표하는 소설의 제목을 따와 작품집의 면면을 간략히 스케치해 본다. 불꽃놀이는 자기 생명을 기획하고 재연하는 개체의 첫번째 시나리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이고, 아무도 노크하지 않는 집은 단절되고 고립된 현대인의 거처(‘노크하지 않는집’)이며, 종이 물고기는 현실의 수면 아래를 찢어질 듯 힘겹게 유영하는 글쓰기의 상징(‘종이 물고기’)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개인의 서사, 개인의 윤리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빌린다. 우리는 각기 우리 삶의 ‘영원한 화자’다.

두루 환영받은 첫 창작집 이후, 이즈음 김애란 소설은 더 몸을 낮추고 더 낮은 자리로 향하고 있다. 편의점과 원룸은 애당초 댄디들의 세련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근래 발표한 소설들의 공간은 거기서 다시 여인숙(‘성탄특선’)과 반지하방(‘도도한 생활’)으로 옮아간다. 제목부터가 아이러니다. 지상의 방 한칸마저 마땅치 않은 청춘남녀들에게 성탄절은 ‘역병’이나 다름없고, 도도하기는커녕 비애가 뼈아프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그곳에서 김애란의 인물들이 이제 누군가와 맞닥뜨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 누군가는 동남아시아 출신 외다리청년이기도 하고, 누르스름하고 고르지 않은 이를 가진 사내이기도 하다. ‘영원한 화자’가 마침내 조우하기 시작한 이 타자들에 대한 인식을,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또 어디까지 밀어붙이는가에 따라 앞으로 김애란 소설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자리에선가 김애란은 말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나한테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쓸 뿐이라고. 겸사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영화감독도 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한다.”(차이밍량) ‘나’에게 절실한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설만이, 안으로는 질문을 내장하고 바깥으로부터 퍼부어지는 질문 역시 끝내 견뎌낸다. 누구나 주목하고 좋아하는 작가를 주목하고 좋아한다고 말하기란 영 쑥스러운 노릇이다. 그러나 그 염치불구를 무릅쓰게 할 만큼 김애란 소설은 동시대 비평가에게는 설레는 기쁨이자 섬세한 자극이다.(차미령|문학평론가)

뉴스메이커(07. 06. 12)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뿐이죠”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 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 문학평론가 신형철(계간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꼽을 수 있다”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계간 ‘창비’ 2006년 봄호)

소설가 김애란(28)에 대한 극찬은 이뿐만이 아니다. 2005년에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서기도 했다. 김애란은 단편 몇 편만으로도 검증이 끝난 작가라는 게 당시 의견이었다.

1980년생인 소설가 김애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하고, 제1회 대산대학생문학상 소설부문 당선(2003년)을 거쳐, 2005년 11월 단편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출간한 그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는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 부를 넘기면서 문단은 물론, 새로운 소설에 목마른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칭찬만 있는 건 아니다. “김애란 소설의 특징은 개그적 재능이다. 자기 삶을 통일시켜줄 규범이 없는 세대니까, 개그처럼 즉흥과 되풀이가 많은 것이다”(평론가 유종호), “상황 속에서 어떤 말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를 표현하기 위해 상황을 만든다. 장면만 제시하고 지나가는 TV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다”(소설가 이청준)가 그것이다.

그러나 문단이든 독자든, 김애란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녀의 출연에는 ‘한국 소설의 샛별’이라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질질 끄는 문체와 화려한 수식어, 한 말 또 하고 또 하기를 거듭하는, 지극히 관념적인 기존의 여성 작가들 문장에 질린 독자들에게 김애란의 짧은 호흡, 수미상응의 작법, 군더더기 없는 경쾌한 문장, 세상을 미워하지 않는 쿨한 문장은 신선함과 함께 우리 문단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여 놓았다.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김애란 작품에서 찾는 ‘소설에의 희망’은 중성(中性)성과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다. 우선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은 없으며, 때문에 슬프거나 노엽거나 좌절하거나 그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소설의 명랑성을 만드는 원천이라는 평가다. 이 점이 기존 여성 작가들과의 구별점이기도 하다.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여성보다는 인간에 주력하고자 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그녀는 많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등장시키는데, 봉건사회와 분단시대, 그리고 산업화라는 시대의 질곡 속에서 우리 문학에 등장하는 아버지와는 전혀 딴판이다. ‘달동네 맨 꼭대기에서 오줌 마려운 듯 벌게진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가다 연탄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장발 휘날리며 콘돔을 사러’ 가는 남자가 김애란 소설 속 ‘아비’의 초상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우리 손자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던 차에 그 세대의 작가가 쓴 소설이라 반가웠다. 김애란 소설에서 ‘아비’들은 전통적 아버지에 비하면 아버지 같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의 소설에서 젊은이들은 ‘아비’에게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아비’를 버렸다고 자부하니, 새롭고 재미있다”고 평가했다.

손정수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최근 격주간 ‘기획회의’ 195호에서 “발단부터 결말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이 하나의 줄기로 매끈하게 꿰어져 있는 전통적인 단편소설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답지 못한 것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바로 이 점이야말로 김애란의 소설이 기존의 낯익은 소설들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 뚜렷한 토대”라고 평한다.

한편 김애란은 “지각이 없는 작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글을 쓸 때 나한테 필요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쓸 뿐”이라며 “젊으니까 뭔가 다르고 새롭게 써야 한다는 의무감보다는 부러 ‘비스듬히’ 보지 않고 ‘오래, 빤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고 자신의 소설관을 나타냈다.(조득진 기자)

07.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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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으로는 부족해, 라고 생각했던 작가였어요. 매우 재기발랄하고 경쾌한데, 이 리듬이 어디까지 이어질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어쩌면 그녀의 책은, 저자 이름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남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혜덕화 2007-06-1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주 솔직하게 보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은데, 읽은 지 오래되어 이젠 생각도 나지 않는군요. 독립 생활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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