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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에서 나가라 - 상
무라카미 류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6년 4월
평점 :
<반도에서 나가라>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다.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의 'TWO무라카미'가 대단한 명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주로 미스터리 소설만 읽는 본인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읽어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마음 속으로 칼을 갈고 있던 차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하루키 의무방어전 1차전은 성공리에 끝냈다. 이제 무라카미 류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 <반도에서 나가라>의 출간 소식을 듣고 이 작품을 골랐다. 무엇보다 내용이 아주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일군의 북한 특수부대가 일본 후쿠오카를 점령하고, 부랑아에 진배없는 일본의 불량소년들이 북한군과 대결한다는 내용 자체가 본인의 호기심과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2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을 순식간에 다 읽고 나서 독후감을 남긴다.
시간적 배경은 가까운 미래인 2011년. 눈부신 경제력으로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의 현재는 암울하기만 하다. 국제 금융과 경제 위기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일본은 경제적으로 파산을 선고하고 살인적인 인플레와 국민의 10%가 실업자에 달하는 초유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동안 경제력으로 모든 난관을 돌파하던 일본의 경제력이 파탄나자 미국과 중국 등의 국제 열강들은 일본에 모두 등을 돌리고 만다. 믿고 따르던 미국이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일본을 버리자 국민들은 분노하지만, 그들은 국제 사회의 냉엄한 진리를 몰랐던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력은 그 나라의 힘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을 말이다.
한편 세계의 골칫덩이인 북한은 남한, 미국, 중국 등과 해빙 무드를 조성해 평화 통일의 계기를 맞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통일 후에 북경 대저택으로 망명할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군부내 대미 강경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이에 북한 고위층은 몰락한 일본을 타깃으로 기발한 작전을 구상한다. 대미 강경파가 지휘하는 군단을 일본 후쿠오카로 파병해 점령해 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계륵이니 일본에서 희생당해도 좋고, 후쿠오카를 점령해버리면 그것대로 좋다. 군단의 명칭은 '고려원정대'로 하고 북한 내 반란군으로 발표해 버린다. 이러면 후쿠오카를 점령당한 일본측의 항의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명목상 북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셈이니 북한측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이 작전의 이름이 바로 '반도에서 나가라'이다.
고려원정대는 치밀한 작전을 세워 후쿠오카를 차근차근 점령해 나간다. 처음에는 9명의 특공대가 후쿠오카 돔의 3만 관중을 인질로 잡고 일본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500명의 추가 부대를 급파해 후쿠오카 시 일부를 점령한다. 12만 명의 추가 군단이 도착하는 예정일은 약 열흘 후, 일본 열도는 충격으로 혼미해진다. 그러나 고려원정대가 한 가지 몰랐던 것은 '이시하라 그룹'이라는 일종의 사회부적응자 집단의 존재였다. 일본인들도 고려원정대도 인간쓰레기 취급을 하며 무시했던 이들은 사실 파괴의 충동을 가슴 깊히 묻고 사는 위험한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대단히 길게 내용 설명을 했다. 워낙에 방대하고 사실적인 플롯이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길게 적었다. 독서의 재미를 빼앗는 게 아니냐고 항의하지 마시라. 이 작품에는 워낙 많은 이야기와 다양한 재미가 있기에 이 정도로는 <반도에서 나가라>의 재미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못하니까.
무엇보다 이 작품은 테러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과 작가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돋보인다. 누구도 주인공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출연해 고려원정군의 테러에 대해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원정군의 장교들과 사병들을 비롯해 일본의 정치인들,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들, 이시하라 그룹의 소년들 등 다채로운 인물의 다채로운 시선으로 미증유의 테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만 50명에 가까울 정도인데 그들의 눈에 비친 테러의 실체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911테러' 이후 변화한 테러의 양상도 적절하게 녹여내고 있다. 비행기가 대형 빌딩에 자폭하고, 이어 빌딩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영상도 안방에서 생생히 볼 수 있게 된 현대 상황에 맞춰 고려원정군의 테러 장면도 실시간으로 NHK 방송에서 중계하고 있다. 보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기묘한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테러하면 연상되는 것은 보통 죽음과 파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절묘한 건 그런 테러의 이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쿠오카를 점령한 북한군의 여성장교가 하는 일은 통조림이나 햄같은 식재료를 도매하는 업자와의 가격 합의다. 테러분자들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게 아닌가. 12만 군인들의 식품, 의복, 주거지, 분뇨 처리 등의 일상적이지만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장면은 보통 작가라면 상상해내기 힘든 절묘함이다. 작가 무라카미 류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류는 작가이기 이전에 일본인이다. 그는 타자(고려원정군)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도 힘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파악하는 일본인의 실체가 비판적으로 묘사되는데, 최초의 침투 과정에서 9인의 특공대는 그들을 발견한 부자(父子)를 죽이고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나중에 깨닫게 된 그 위화감의 정체는 부자에게 혼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도망도 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일본의 현재 모습이 아닐까 하는 작가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 정세와 부족한 게 없는 경제 호황으로 일본인들이 식물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원정군과 대결하는 인물들을 '이시하라 그룹'으로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은 일본도로 사람을 죽이고, 47차례의 방화로 수십명의 인물들을 태워죽이는 등의 소년범들이지만 무기력한 식물이 아니다. 원초적인 파괴 본능을 잃지 않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울부짖는 야수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작가는 극악한 이시하라 그룹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 받아야 할 비난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다소 동정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있고, 섣불리 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잘난 사회에서 약간의 성공이나마 거두기 위해 이빨을 감추고 사는 무기력한 사람들 속에서 거침없는 파괴 본능을 드러내는 그들의 모습에 일정한 통쾌감을 느낀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고려원정군의 점령 과정은 분명 신사답지 못했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점령지의 일본인들도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은 교류를 해야만 살 수 있다. 이 세계에서 혼자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작가는 후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힌다. 작가 후기를 발췌해 보면.
"역사도 문화도 가치관도 다르고 이해의 일치조차 없는, 더구나 한쪽은 무장하고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그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나를 이 작품의 집필에 불러 세운 최대의 동기였다."
이 점에서도 작가는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특히 아이를 잃은 북한 여성 장교와 소년병으로 참전해 전쟁과 폭력의 무익함을 깨달은 일본의 노의사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미워하는 일본인과 그래도 우리의 동포인 북한군이 대결하는 이 작품을 가볍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괜시리 불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엄연히 픽션이고, 사실 우리가 불쾌해할 만한 요소는 작품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단치 않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이 작품을 놓치는 건 분명히 손해다. 모든 걸 다 떠나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다. 작가 무라카미 류는 어마어마한 양의 취재를 통해 작품을 벽돌성같이 탄탄하게 만들었고, 소설의 대중적 재미 역시 최고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정과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해 일그러진 영혼을 가지게 된 이시하라 그룹이 북한군과 마주하면서 함께 하는 일의 의미와 재미를 깨닫게 되는 장면이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그 부분을 발췌하며 맺으려 한다.
"어떻게든 작업을 완성시키고 싶다고 히노가 말했을 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공동작업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서로를 도와가며 일을 분담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나간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자신의 작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도와준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런 관계를 가져 본 적조차 없다. 모두 고려가 죽도록 무서웠지만, 끝까지 작업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싶었다."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