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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1
김용 지음, 박영창 옮김 / 중원문화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인간이 무리짓고 살게 된 순간부터 비극의 씨앗은 잉태되었다. 힘이 센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계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 말이다. 어떻게든 지배자 계급에만 서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뒤로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지배자가 되기 위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으니, 사실 정치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위정자는 사리사욕과 일신의 안녕을 위해 가진 것없는 피지배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짜내기 위해 고도의 수법을 개발해냈고, 계급의 차이는 더욱 벌어져 오늘날까지 왔으니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중국의 역사는 신화에 가까운 삼황오제 시대를 빼고, 하나라부터 잡아봐도 대략 4,000년이 넘는다. 수천명의 황제와 영웅들이, 중국의 끝을 알 수 없는 광대무비한 땅덩어리와 거기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다투다 명멸해갔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 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중국의 패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음모와 협잡이 난무했고, 바다를 이룰만큼 많은 피가 흘러내린 것을. 그래서 고래로 중국의 뜻있는 문사들은 천하의 정상에 서기 위해 갖은 술책을 부리며 피를 부르는 정치꾼들을 나무라는 글들을 자주 지었으니, 다행히 우리 시대에도 손꼽히는 중국 문단의 별이 있어 그 구색을 맞추고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홍콩으로 이주해 일간신문 '명보'의 사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걸작 무협소설을 집필한 김용이 바로 그 걸출한 인물 중의 인물이다.
<소오강호>의 세계는 수많은 무협소설들이 반복해 써 먹었던 익숙한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정파와 사파의 이분법적 대립구조 말이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시기가 1969년이니 아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대 이데올로기로 세계가 반으로 쪼개져 으르렁대던 당대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정파는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와 무당파, 그리고 오악검파가 있는데 숭산파, 화산파, 형산파, 항산파, 태산파의 5대 검파의 합당 체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파는 숙적인 사파를 멸망시키기보다는 오악검파 내부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당파싸움으로 머리가 더 복잡하다. 특히 두각을 나타나고 있는 인물은 오악검파의 수장, 숭산파의 패권주의자 좌냉선이지만, 협잡의 일인자인 화산파의 '군자검' 악불군도 조용히 그 세력을 기르고 있다. 숭산파 좌냉선은 차제에 아예 오악검파를 합당하고, 소림, 무당의 무릎을 꿇리고 최종적으로 사파를 멸해 천하의 정상에 서려하는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한편 사파라 할 수 있는 '일월교'는 상태가 더 심각하다. 전임교주 임아행을 쿠데타로 몰아낸 신임교주 동방불패는 전임교주 임아행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탄압하고, 임아행은 감옥에 갇혀 권토중래를 노린다. 여기나 저기나 추한 정치싸움 일색이다. 정통이라 자처하는 오악검파 안에서도, 종교의 형태를 띈 일월교 안에서도. 이 혼란의 와중에 술 좋아하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커온 사매 악영산을 좋아하는 화산파의 수제자 영호충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호충은 재기넘치고 인간적인 성품의 호방한 사나이지만 사실 그리 뛰어난 존재는 아니다. 천하 대세에 영향을 미칠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화산파의 전대 고수 풍청양에게 '독고구검'을 배우며 그의 인생은 달라지고 만다. 절대적인 위력을 가진 독구구검으로 인해 그가 가세하는 쪽이 천하 패권을 움켜쥘 수 있게 된 것이다. 갑작스레 천하 대세의 키 플레이어가 되 버린 영호충은 그를 둘러싼 온갖 음모와 협잡, 회유와 유혹에 당황하게 되며, 이윽고 그는 그 모든 것들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영호충과 그가 사랑하는 두 여인, 악영산과 임영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적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좌냉선은 야심을 드러내니 오히려 순진한 인물. 군자검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이미지 정치에 능한 악불군은 뒤로 온갖 모사를 꾸미니 '위군자검'이라 할 수 있다. 일월교 전교주 임아행은 영호충에게 자신의 딸 임영영을 줘서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데, 영호충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영호충의 일신의 능력을 높이 치기 때문이다. 항산파의 방장 정한사태는 자신이 죽어가면서 여자로 이뤄진 항산파의 수장 자리를 영호충에게 넘긴다. 문파의 정통성(여자만 가입한다는)을 훼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웃어도 영호충만 끌어들이면 된다는 식이다. 음률에 능한 형산파의 막대 장문인은 그래도 괜찮은 인물이지만 정치판(?)을 아예 떠나지는 못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능력이 부족해 예술로 도피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소오강호>는 한 편의 완벽한 정치 풍자소설이다. 정치의 소용돌이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소묘하듯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제목 <소오강호 笑傲江湖>는 '강호를 비웃다'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강호라 함은 영웅호걸들이 노니며 천하를 다투는 곳이라 할 수 있으니, 바로 정치판을 비웃는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소오강호>는 악곡의 이름이기도 하다. 형산파의 유정풍과 일월교의 곡양이라는 적대 세력의 두 고수가 음악으로 교감해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만든 곡이 바로 이 '소오강호'곡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둘 다 죽음을 맞게 되겠지만 죽음도 그들의 우정과 음악혼을 막을 수는 없다. 두 사람에게 이 '소오강호'곡을 배우는 사람이 영호충이다. 정치보다는 우정과 예술을 택한 두 사람이 부르는 이 소오강호 곡이야말로 작품 전체를 꿰뚫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정파와 사파의 우렁찬 구령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역시 우리의 가슴 속에 은은히 파고드는 아름다운 곡조라 아니 할 수 없다.
정치판에 뛰어드는 순간, 협잡질부터 배우고 야심으로 눈앞이 흐려진다. 정치의 노예가 된 좌냉선이나 악불군, 임아행, 동방불패 등의 인물에 비하면 우리의 주인공 영호충은 참으로 인간적인 인물이다. 사랑하는 영산 사매의 마음이 점차 멀어져 사제인 임평지에게로 향할 때, 영호충이 느끼는 그 절망감이란. 늘 함께 하며, 자신만을 보고 웃어주던 사매가 임평지가 가르쳐주는 노래를 부를 때, 영호충은 한바탕 취해버리고 만다. 나중에 임평지와 악영산이 결혼하자 지엄한 항산파 방장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젖어버리도록 울어버리는 영호충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소냐. 정치의 노예로 꼭두각시가 되버린 인간군상들 속에서 영호충의 인간다움은 그만큼 특별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 한 가지. 사매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는 영호충과 그런 영호충을 일심으로 사랑하는 임영영. 사매에 대한 집착으로 괴로워하던 영호충은 사매가 위기에 빠져 있는 걸 알고 임영영과 함께 도와주려 간다. 그러나 예전처럼 세상이 끝난거마냥 서둘지는 않고, 마차 안에서 임영영과 담소를 나누며 유람하듯 사매에게로 간다. 임영영이 말한다. 늘 사매만을 생각하던 영호충의 마음이 이제 나에게로 돌아섰음을 확인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순간 영호충은 자신을 그토록 사로잡던 사매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순간의 벅찬 해방감이란! 집착, 특히 사랑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마음을 미혹시킨다. 이미 아닌 것을, 끝났음을 알면서도 한자락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이 바로 해탈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되는데, 미련과 아쉬움에 그걸 못하니 그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큰 병이리라. 정치판도 비슷하다. 집착하기는 오래지만, 벗어나기는 순간이다.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영호충의 깨달음을 정치가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이 작품을 쓴 김용 선생은 '신필'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데, 내 생각엔 그것도 부족하다. 인간이 글로 쓸 수 있는 최상의 작품들을 두루 집필해낸 그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자, 하늘에서 잠시 다니러온 文의 별이다. 홍콩의 일간지 '명보'의 사장이자 주필이라는 언론인의 역할도, 수많은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로서의 역할도 성공적으로 해낸 이 80대의 노작가는 여전히 생존해 있고, 현재 영국에서 필생의 꿈인 중국 역사를 집대성하는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그의 무협소설은 총 15편으로 문장의 유려함과 사상의 깊이, 몰아일체의 재미로 인해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역시 <소오강호>. 부디 인간을 옥죄는 정치판의 온갖 굴레 속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자유로운 곳으로 날아가려 하는 영호충의 날개짓을 확인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