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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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이 있다. 작디 작은 소년이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여행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성장해가는 소년을 그리는 소설은 미국 문학의 오랜 전통이다. 허클베리 핀이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어느 세대나 그 세대만의 허클베리 핀을 보유할 자격이 있다. 다행히 우리 세대에도 허클베리 핀이 있다. 1951년에 처음 우리에게 소개된 홀든 콜필드라는 아이가 바로 우리 세대의 허클베리 핀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유명 사립학교의 허위와 모순에 질려 비행을 일삼다 퇴학당한 홀든 콜필드라는 소년이 이틀동안 뉴욕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수구의 오딧세이아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뉴욕에서 만나는 여러 명의 밤거리 인생들(콜걸 등)이 정확하게 묘사된다. 물론 홀든이 창녀만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다. 유일하게 믿음을 주었던 선생님의 집도 찾아가게 되는데, 그 선생님은 잠든 홀든의 몸을 어루만지며 성욕을 채우려 한다.

 

비행소년의 외투를 입었지만 사실은 섬세하고 여린 영혼을 가진 홀든은 이틀동안 만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속이려 하며,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 하자 크게 상처를 입는다. 마침내 모든 고단한 현실을 잊고 도피하려 하지만, 어린 여동생 피비의 순수한 마음을 보고 자신에게는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같이 어리고 여린 아이들이, 자신같이 상처받는 일이 다신 없도록 막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대단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다. 거의 신화가 되어버린 작품으로 출간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그 광채가 조금도 바래지 않은 성장소설의 고전이다.

 

작품에서 1인칭으로 묘사되는 홀든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우스운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끓는 사춘기의 그가 여자들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오히려 털리고 마는 장면들은 특히 재미나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홀든과 동생 피비의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홀든은 가족과 사회에 모두 실망해 짐을 챙겨들고 산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어린 여동생 피비는 가방까지 싸서는 오빠와 같이 가겠다며 쫓아온다. 오빠는 피비를 어떻게든 집으로 보내려고 애쓰다가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보고는 저걸 태워준다고 말한다. 피비는 자신의 숭고(?)한 목적은 망각한 채, 회전목마를 타며 너무나 신나한다. 너무도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독자인 나마저도 눈물나게 만든다. 동생의 순수한 모습을 보며 홀든은 동생 피비만큼은 내가 느꼈던 아픈 상처를 겪게 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순간, 홀든은 좀 더 좋은 어른으로써, 좀 더 멋진 사람으로써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된 것이다.

 

영화로 만들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장면이다. 빨간 옷을 입고 있는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고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이틀동안의 피로로 점점 흐려져 가는 홀든의 눈에는 빨간 색채만 가득하다. 이윽고 서서히 감겨지는 홀든의 눈...그림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나? ^^;;

 

홀든이 되고 싶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사실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홀든이 스스로 성장했듯이 아이들은 누구나 고통과 상처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므로...그렇지만 홀든은 이틀 동안의 여정을 통해 비행소년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아 각성했다. 자신만의 고민과 아픔에 매몰되어 가던 소년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고 말하게 되는 변화의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이 소설이 주는 강렬한 감동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이 작품으로 불멸의 명성을 쌓았는데, 실제 홀든의 성격과 웬지 비슷할 것 같은 추측을 해본다. 현재 그는 80세가 넘는 고령으로 여전히 생존해 계신데, <호밀밭의 파수꾼> 이후 완전히 은둔한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한층 신비감이 더해져 거의 현대 문학계의 신화적 존재가 됐다.

 

그런데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대문호의 집을 가다'라는 기사에서 보니 집 앞 술집은 가끔 간다고 한다...-_-;;

 

존 레논을 암살한 정신병자가 범행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있었던 건 이미 유명한 일화이다.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이 작품을 탐내어 영화화 1순위로 꼽히고 있는데, 만들어지면 대성공이 보장된거나 다름없는 작품이지만 작가가 워낙 영화를 싫어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영화 제작자들은 작가가 사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뭔가 꺼림칙한 뒷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명문장을 소개해 본다...홀든이 동생 피비에게 하는 말이다.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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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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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분들도 별로 안 계실 듯 합니다. TV 만화로도 있었던 것 같고, 영화도 얼핏 생각이 나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을 직접 읽어보신 분들은 의외로 많지 않은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이 많다는 건 정말 비극이예요. 이 책을 읽으며 흥분과 감동으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가슴을 부여 잡으며 하얀 새벽을 맞이한 몇년 전, 어느 밤이 생각이 나네요.

 

   작가는 미국 문학계의 선조 격인 마크 트웨인입니다. 타계한 지 거의 100년이 됐지만,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이 대단한 작가입니다. 세계 명작 동화 모음집에 꼭 들어가는 단골 작가답게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등의 작품들은 모든 미국 소년, 아니 세계의 모든 소년, 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바가 있지요. 아마 역사상 소년, 소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가 아니였을까요? 그러나 그는 당대에는 유머 작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정말 품격있는, 그러나 정신없이 웃기는 유머들의 향연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유쾌한 건 역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지만요.

 

그의 유머가 단지 말장난이나 넘어지고 자빠지는 소극에 그쳤다면 그가 그렇게 위대한 작가로 남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는 현실 사회를 꿰뚫는 날카로운 안목에 풍자 정신을 결합하는 한 차원 높은 유머를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엇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좋아하는 건, 주인공인 허클베리 핀이나 톰 소여가 행동하는 자유인이라는 겁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사변적이고 굼뜬 자의식 과잉의 인물들이 넘쳐나는 현대의 소설 속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주고 있기에 매혹당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어머니가 없는 허클베리 핀은 고아나 다름 없습니다. 아버지는 난봉꾼 주정뱅이지만 그나마 실종된 상태거든요. 마을의 노처녀는 허클베리를 어여삐 여겨 데려다 기르려 하지만 그는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자연과 야생의 삶에 적응된 상태이거든요.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해라...반복되는 설교에 질려가는 허클베리에게 무서운 아버지가 찾아오고 어쩔 수 없이 그는 도망을 칩니다. 비슷한 신세의 도망 노예인 흑인 짐과 함께요...

 

허클베리 핀과 짐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당대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배우게 됩니다. 순박하고 인간적인 짐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차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도 느낄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가문간의 알력이라는 인습으로 인해 죽어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스케치해내는 마크 트웨인의 필력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무거운 주제도 재미있게 담아낼 줄 아는 능력을 저는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혼탁한 사회와 대비되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멋집니다. 그야말로 한 편의 자연 찬가입니다. 허클베피 핀과 짐은 한 번쯤은 모두들 꿈꾸는 아름다운 여행을 한답니다. 어떤 속박도 없는 자연 속에서 낚시도 하고, 늦잠도 마음껏 자고...아이들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가시죠? ^^;;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절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아니 무지하게 웃기는 작품이죠. 크게 봐서 3부로 나눌 수 있는 작품인데, 마지막 3부는 완전히 대소동극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짐이 터무니없는 톰 소여의 요구로 인해 온갖 고초를 당한다는 내용인데 제가 본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 등장한답니다. 3부를 보고 비평가들은 마크 트웨인이 결국 제 버릇을 못 버리고, 유머로 안착했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가장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웃을 줄 아는 여유, 그게 있다면 우리 시대의 삶이 이렇게 팍팍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떤 괴로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며, 우리 삶을 두 배쯤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유머의 효용과 가치를 파악하는 눈을 마크 트웨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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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5-12-04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 소여의 모험에 비해 같은 친구인 허클베리의 모험은 인지도가 낮더군요. 저는 그게 신기합니다. <아더왕과 양키>도 괜찮다고 하던데...
 
다정불심 1
박종화 지음 / 자유문학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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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공주의 태어난 생년일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원나라 황제인 순제의 동생 위왕의 딸이었다. 당대 제일의 미모로 유명했던 공주는 꽃다운 나이에,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고려 충목왕의 둘째 아들 강릉대군과 정략결혼을 했지만 남편의 기상이 높은 것에 저윽이 안심했다. 그녀는 첫날 밤에 남편에게 당신이 그저 그런 인물이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당찬 면모가 있었다. <다정불심>에서는 사냥을 즐기는 당대의 명사수로 묘사되는 여걸이었다.

 

1351년 강릉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남편을 따라 고려로 돌아와 왕비가 되는데, 어진 성품과 뛰어난 지략으로 왕을 보필했다. 왕께서 지기이자 사부로 생각할 만큼 공주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변정도감을 만들어 억울하게 전답을 빼앗긴 농민들을 구제하도록 간했으며, 원나라에 빼앗긴 쌍성을 되찾으려 할 때 왕이 군량미를 백성에게 거두려 하자 그리하면 백성들의 원망을 산다며 원에서 가져온 어마어마한 양의 패물들을 내놓아 그것으로 군량미를 삼았다. 단호한 계책으로 원에 빌붙은 간신배 기철 일당을 처단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흥왕사의 반역 때는 반역도 50명 앞에 혈혈단신으로 나서 왕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치마두른 요순 임금과도 같다며 공주를 극찬했고, 그런 노국공주에 대한 왕의 사랑도 지극했다. 시집오고 10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어 새 왕비를 간택하라는 왕의 모친 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공주는 고려의 사직을 위해 몸소 후궁을 간택해 왕의 침소에 들게 하는 믿기 힘든 어진 성품을 보였다.(지금 기준으론 어질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왕은 다른 여인에게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아 결국 새로 얻은 혜비는 본의 아니게 평생 수절을 해야 했다. 1365년 그렇게도 바라던 임신을 했지만 결국 난산 끝에 영영 이승 세계를 떠나야 했다. 인간 세상의 용, 봉황과도 같았던 절세가인이었기에 하늘도 그 재주를 질투한 것이리라...

 

 

공민왕의 아명은 왕기였다. 부득이 원나라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당대에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평생 예술가로 살고 싶어 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왕으로 살아야 했다. 초기에는 노국공주와 더불어 의욕적인 개혁을 펼쳤으며, 우리 역사상 마지막으로 북벌을 추진했던 왕으로 남을 정도로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아끼던 노국공주를 잃고 정치에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된다.

 

그는 노국공주의 시신이 썩어가는 악취를 풍길 때까지도 그녀를 떠나지 못했고, 나라의 국력을 소진할 만큼 어마어마한 대공사를 펼쳐 그녀의 무덤을 만들었다. 공주를 잃고 한 순간도 잊지 못하며 방황하자 왕의 모친께서는 궁궐에 미모가 뛰어난 다른 여인들이 많다며 재가를 권유했다. 그러자 왕은 눈물을 흘리며 '공주만 한 여자는 없소이다' 하였다.

 

왕은 우연히 기이한 중 편조를 만나게 되는데, 편조는 섭혼술로 공주의 혼을 데려올 수 있다고 호언했다. 공주의 영혼을 몇 번 대면한 왕은 편조를 크게 신뢰해 모든 실권을 준다. 나중에는 신돈이라는 속명과 함께 섭정왕의 자리까지 내렸다. 그러나 실상 공주의 영혼은 공주와 닮은 반야라는 천한 여인이었다. 왕은 반야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으니 이이가 바로 훗날의 우왕이다.

 

그러나 왕은 결단코 반야가 공주의 혼인 줄로 믿고 동침을 하였기에, 진실이 밝혀지자 다시는 반야를 보지 않는다. 이 반야가 홀로 왕을 짝사랑하며 외로워하다 마침내 자결하는 대목하는 대목 또한 구슬프다.

 

왕은 신돈이 노국공주의 무덤을 넓히는 데 반대하자 누명을 씌워 그를 살해한다. 여러 가지 악행도 많았지만 큰 뜻을 품었던 신돈마저 잃자 왕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왕은 술에 절어 음탕한 행동들을 일삼다 마침내 비명에 살해된다.

 

지엄한 왕의 신분으로 한 평생을 노국공주에 대한 정으로 살았던 전무후무한 이 사나이를 기려 책에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삽시간 일이었다. 왕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넋은 날아 그리운 공주를 찾았으리라!

다정(多情)이 병이 아니고 무엇이랴! 뒷사람들은 왕을 가리켜 공민(恭愍)이라 불렀다."

 

 

<다정불심>은 역사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애정소설이다. 1940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작품에 내재된 불후의 낭만성과 끊을 수 없는 정에 대한 애절함이 당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으리라...아니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으니, 언제 어느 곳에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엔 은근한 정이 함빡 가득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는 문학평론가 윤병로 님의 해설이 실려 있다. 그는 이 작품이 한 마디로 공민왕이 오랑캐 땅에서 맺은 한 번의 사랑이 그 자신을 망치고 나라까지 망쳤다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고 썼다. 한 마디로 졸견이다.

 

<다정불심>에서 월탄 박종화 선생이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깟 역사적 교훈 나부랭이가 아니다. 월탄 선생은 남녀 사이의 지극한 정이란 얼마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지, 간장을 녹여내도록 슬픈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믿는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정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정에 대한 보고서라 하겠다.

 

정이 있어 슬프지만, 그럼에도 끊을 수 없는 것...대관절 정이란 무엇이길래 사바세계와 저승세계도 갈라놓지 못하는가. 정이란 사람의 얄팍한 지식 위에 있는 법이기에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작품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은 공민왕이 아내의 무덤에 직접 그림을 그려주는 장면이다. 지엄한 왕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망극한 일인데, 하물며 그림까지 직접 그리다니...당대 제일의 화가였던 공민왕이 아내의 무덤에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니 그 그림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그는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생전에 그려주지 못한 걸 애석해 하며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붓놀림 하나하나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화폭을 채워 간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월탄 선생의 붓마저 혼신의 힘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 노국공주 초상화는 훗날 연산군이 보고 공주에게 반할 정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실전된 상태이다. 이게 남아 있으면 오죽 좋았으랴. 한숨만 나올 뿐이다. 공민왕의 그림은 지금 <천산대렵도>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한다.

 

많은 눈물을 흘리며 본 작품이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낡은 표현도 있지만 작품 속의 사랑은 전혀 낡지 않았다. 1천 년의 사랑이 지금까지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것처럼 또 다른 1천 년이 지나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하리라 믿는다.

 

염량세태의 세상 속의 나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을 보며 많은 걸 느낀다. 사람들 입성이며 먹는 건 예전과 비할 수 없겠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니 옛사람 정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잔술에 쓰러져 눈을 뜨면 1천 년 전이었으면 하나니...

 

 

 



 

 

 

 

 

 

 

 

 

 <개성 봉명산에 위치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정릉. 왼쪽이 공민왕, 오른쪽이 노국공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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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5-11-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에 심취하시더니 결국 책까지 읽으셨군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신돈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많이 비롯된것 같습니다.

jedai2000 2005-11-2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올드핸드님...드라마 <신돈>이 사람 하나 폐인 만들었어요. ㅋㅋ
제 책상 주변에는 <신돈>에서 노국공주 역을 맡은 서지혜 양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답니다. 컴퓨터 월페이퍼는 물론이지요..^^;; 이 책은 정말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보았으면 합니다...
 
붉은 인형의 집 - 하 밀리언셀러 클럽 16
타마라 손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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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의 공포소설은 별로 읽어 보지 못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스티븐 킹이 엄청난 인기가 있다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힘을 못쓰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의 <사계>는 읽어보고 아주 감탄했지만 그 외 작품들은 너무 길어 읽기 힘들며...무엇보다 무섭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본인이 겁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기가 허하기로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나다.(웬지 자랑같다..-_-;;;) 일본의 공포소설 <링>과 <검은 집>,<메두사> 등을 읽고는 불켜고 잤다..무서워서..-_-;;

 

영미권의 공포소설은 그 나름의 전통이 있고, 그쪽 문화권에서는 상당히 무서워할 독자들이 많이 있겠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별로 공포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흡혈귀나 늑대인간, 귀신들린 집 등의 공포 코드보다는 머리푼 처녀 귀신, 원한을 잊지 못하는 원혼 등이 훨씬 무섭게 느껴지는 건 비단 본인만은 아닐 것 같다.

 

이 작품 <붉은 인형의 집>은 위에 언급한 서양의 공포 코드 중 귀신들린 집을 차용했다. 보디 하우스( Baudey house - Body house)라는 중의적인 이름을 가진 집에 베스트셀러 공포소설 작가가 딸과 함께 취재 겸 해서 이사를 온다. 이사 첫날부터 콜드 스팟이라 불리우는 차가운 영적 덩어리가 그들을 반긴다.

 

알고 보니 그 집은 100년전쯤에 창녀들의 매음굴 비슷한 집이었다. 리찌라는 여자가 주인장이었는데 창녀굴을 운영했지만 악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리찌의 딸인 크리스터벨은 부두교의 주술에 능한 주술사였다. 심지어 호르몬 분비가 과다해 밝히기까지 한다...-_-;;

 

사악한 크리스터벨은 그 집을 피로 물들인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해되는데 어찌나 끔찍한지 여기다 적을 수가 없을 정도다. 

 

베스트셀러 작가 데이빗은 그 집에서 살면서 인형을 발견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라면 모두 짐작하셨겠지만 그 인형에는 크리스터벨의 영혼이 갇혀 있다. 크리스터벨은 부활을 꿈꿔 데이빗의 꿈으로 찾아가 밤마다 그를 유혹한다..

 

밤마다 시큐버스(몽마)에게 강간을 당하다시피 해 공포에 질리는 데이빗...여기서 작가의 최초 실수가 있는 듯 하다. 미모의 여인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잘해주는데(무엇을?) 그게 뭐가 공포스럽다는 말인가?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까? -_-;;;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펼쳐지다 최후에 크리스터벨과 대결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꽤 두꺼운 분량으로 2권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나오고 비교적 흥미진진한 전개가 펼쳐져 읽는 맛은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이라면 역시 공포소설치고 무섭지가 않다는 것이다. 공포소설이라면 긴장감 넘치게 달음박질쳐가다가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공포의 오르가즘을 독자에게 안겨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결정적으로 무섭게 느껴지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다. 전술한대로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공포소설이 무섭지 않다는 건 김빠진 맥주같이 느껴진다. 너무 잔인하고 색정적인 장면들이 연속되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간단히 말해 싸구려같이 보인다.

 

지루하지 않고, 쭈욱 읽어나갈 수 있는 어느 정도 재미있는 책이지만 크게 무섭지도 않고, 칭찬받을 요소가 가득한 작품은 아니다. 다음 번 밀리언셀러 클럽에는 일본 공포소설을 추가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공포소설, 영화는 일본쪽이 요즘 세계를 휘어잡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p.s/ 주인공이 작가이다 보니 출판사 이름들이 자주 나오는데 조금 웃긴다. 랜달하우스(랜덤하우스), 도너북스(워너북스) 등이 패러디로 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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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1-0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모의 여인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잘해주는데(무엇을?) 그게 뭐가 공포스럽다는 말인가?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까? -_-;;;
으하하! >ㅁ< 재밌어요!
저 이 책 아는 분이 빌려주셔서 읽었는데, 진짜 무지하게 실망스럽더군요. 저도 검은집 읽고 무서워서 덜덜 떨었는데, 역시 일본 호러가 와 닿는 것 같아요. ^^
재밌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제다이님. 흐흐흐흐

jedai2000 2005-11-0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시귀> 보셨나요? 일본 공포소설하면 <링> <검은 집> <시귀>의 삼총사를 꼽는 분이 많아 궁금하네요. 솔직히 미국 공포소설이 진심으로 무서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 예전 <토탈호러>라는 단편집에서 <샌드킹>이라는 작품을 읽었는데 그건 엄청 무서웠어요.

panda78 2005-11-0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귀 봤지요! ^^ 근데 무섭다기보다 재밌던데요. ^^;;
오노 후유미의 [악몽이 깃든 집], 이게 좀 더 무섭던데, 다른 분들은 하나도 안 무섭더라고 하셔서... 그 때 주위 분위기가 호러 읽기에 적합했나 살짝 의심이 가기도.. ^^;

(토탈 호러는 그런대로 무섭고 징그럽고 기괴하고 끔찍한 느낌이었죠. ㅎㅎ 샌드킹은 그 중에서도 걸작! b)

jedai2000 2005-11-0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몽이 깃든 집>이 무섭군요. 구해봐야겠네요. <샌드킹>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네요. 고교 때 읽고 정말 엄청 무서웠었는데..
 
야옹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
김민희 지음 / 21세기북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심각한 질환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제외하고, 인간은 누구나 오감을 가지고 있다. 촉각, 후각, 시각, 청각, 성감(性感)이 그것이다..-_-;; 농담이다. 미각이 맞다. 이 다섯 가지 감각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세상을 가장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랑은 과연 오감 중에 무엇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사랑은 대체 어떤 감각이기에 생각만 해도 그리 좋고 행복해지는지,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인간의 능력이란 미약하기 짝이 없어 사랑은 좀처럼 오감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의 느낌을 불완전한 우리의 오감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왜냐?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_-;; 중언부언 써댔는데 이런 것이다. 사랑을 떠올릴 때, 나는 항상 그녀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 느낌이 후각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고나 할까.

 

이런 분들도 많을 것같다. 옛날에 함께 먹었던 스파게티의 맛으로 지나간 사랑을 추억한다거나,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애인과 먹던 떡볶이만 떠올려도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감도는 분들...(부럽다..T.T) 역시 먹는 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즐거움일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라는 가장 큰 선물과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 식도락이 결합한다면 그게 바로 멋진 만남, 행복한 인생 아닐런지...

 

그래서 선지자들은 이런 사랑과 음식의 행복한 밀월 관계에 주목해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달콤쌉사름한 초콜릿>도 생각나고, 조니 뎁 나오는 <쇼콜라>, <식신(이건 좀 아닌가 -_-;;;)>등도 있다.

여기 사랑과 음식을 멋지게 결합시킨 또 한편의 훌륭한 작품이 있다.

 

두둥~ 바로 <야옹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이하 '야옹양')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가 상당히 재미있다. 네이버에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던 성은 야요, 이름은 옹양이라는 분께서 -_-;; 평소 요리에 심취하야 몸소 요리한 사진을 예쁘게 찍어,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와 조리법을 곁들여 올린 것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끌어 결국 이쁜 책으로 묶여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국내 유일의 '로맨틱 큐트 쿠킹 에세이'를 표방한 이 작품은 요리책으로도, 에세이로도 재미있다. 이 책의 형식은 먼저 연애와 일상의 에피소드가 3페이지 정도 제시되고, 그 에피소드를 요리로 산뜻하게 마감한다.

 

예를 들어, 고백의 날 두 사람은 스파게티를 먹는다. 어색한 고백이 끝나고 사랑을 시작하기로 한 두 사람. 그 에피소드의 마지막에는 스파게티의 레시피와 사진이 나오는 식이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작가를 조금 알고 있는데 실제로 그분의 요리 솜씨는 대단하다) 그러니까 이 책을 보시는 분들은 비밀스런 연애일기를 훔쳐보는 쾌감(?)과 요리 지식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떨리는 첫 만남에서부터, 가슴 터질듯한 고백의 순간, 점점 닮아가는 서로를 확인하는 기쁨 같은 연애의 첫걸음부터 사랑이 깊어지자 그만큼 외로움도 깊어지는 오래된 연인의 느낌 같은 미묘한 슬픔으로 작가는 우리를 안내한다. 그렇다. 연애에 어찌 행복만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는 직접 연애를 하면서 겪은 기쁨, 슬픔, 외로움, 환희, 절망 등의 감정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너무도 솔직해 오랜 친구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야옹양과 정군은 특별하지 않다. 평범한 직장인, 정군이 사실은 재벌2세의 후손이라든가, 야옹양의 요리 솜씨가 세인의 관심을 끌어 제과, 제빵 기능장으로 성장한다든가 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이 책에 없다. 요리를 좋아하고, 그만큼 정군을 좋아하는 야옹양의 소소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공감가고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야옹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는 평범한 우리의 친구들이 평범하게 사랑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울고, 웃고, 먹는 이야기를 비범하게 그리고 있다. 깊어가는 이 가을, 연애에 흠뻑 빠지신 분, 꿈같은 연애 한번 해보고 싶으신 분, 이별의 위기를 맞은 연인들, 맛난 요리를 해보고 싶으신 분, 본인 같이 라면도 잘 못 끓이시는 분...모두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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