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야드 게임
노지마 신지 지음, 금정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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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로 들썩였던 2002년 여름, 방학 중이었던 나는 당시도 솔로라 누구 만날 사람이 있기를 하나, 어디 놀러갈 데가 있기를 하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지막지한 썰렁한 나날을 보내던 중 심심타파를 위해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국내 최초로 신촌에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 비슷한 처지의 연애 낙오자들 몇 명을 모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고 말았다. 그날 점심 때쯤 가서 차 끊길 때까지 놀았다.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개강을 하고 나서도 보드게임방에 상주하며 물경 수백 만원의 돈을 쓰고 배운 게임만 200개가 넘을 정도로 보드게임 마니아가 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스코틀랜드야드 게임>도 사실은 유명한 보드게임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원래 5명이 하는 게임으로 1명이 범인이 되어 지하철, 택시, 버스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해 도망치고, 나머지 4명이 형사 팀을 짜서 같은 교통 수단으로 정해진 턴 안에 범인을 잡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범인이 불리하니까 여러 가지 특전이 있는데, 워낙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다니는 범인의 역량에 게임의 재미가 좌우되므로 서로 내가 범인하겠다고 다투던 생각이 난다. 아무튼 무척 재미있는 보드게임이므로 5명 정족수가 맞으면 꼭 해보시기 바란다.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은 이 게임의 기본 규칙-정해진 24턴 안에 범인을 잡는다는-에서 착안해 순박한 한 남자가 생기발랄하면서도 아픔을 간직한 여자의 마음을 24일 동안의 만남 안에 사로잡는다는 내용으로 이끌어간다. 줄을 잘못 서서 출세가도에서 밀려난 회사 상사와 유일하게 술을 마셔줄 정도로 착한, 어쩌면 실속 하나 못 차리는 남자 주인공은 결국 차가 끊길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24시간 만화카페에 들어가 밤을 새우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울고 웃고 하여튼 소란스럽게 만화를 보는 여자와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데 옛 말에 싸우다가 정든다고 느낌이 그리 싫지는 않다.

 

며칠 후 우연히 병원에 가게 된 주인공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데, 그녀는 생명 수호의 최전선인 병원 응급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사였다. 환자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반해버린 주인공은 외롭던 차에 어떻게 잘 꼬득여서 여자친구 한 번 만들어볼까 생각하는데, 이게 웬 걸. 그녀는 애인이 있다는 게 아닌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라지만. 그래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골키퍼도 자리를 비운 상태 아닌가. 용기를 내보려던 찰나에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녀의 애인은 몇 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쉽사리 서로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가 아니라 아예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인 셈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걸작 만화 <터치>에서도 보듯이 연적 가운데 최고는 역시 죽은 사람과의 대결. 남아 있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한없이 예쁘고 멋지게만 미화되는 영영 떠나간 이는 더 이상 이미지가 훼손될 염려도 없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좋았던 그 모습 그대로만 남기 때문에 곁에서 때로 실망도 주고 잦은 만남에 질리게도 만드는 산 사람이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의 주인공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불가능에 도전하려 한다. 비록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무엇보다도 단 24일이라는 강력한 제약이 있긴 하지만(왜 꼭 24일이냐고? 독서의 재미를 위해 밝힐 수 없지만 약간은 초자연적인 이유가 끼어든다).

 

작가인 노지마 신지는 내겐 낯선 인물이었지만 '101번째 프로포즈', '고교교사' 같이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들의 각본가로 명성이 높다는데, 과연 작품 분량의 거의 대부분이 주인공들이 핑퐁같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뤄져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1988년에 데뷔한 작가면 이제는 중견 혹은 노장 축에 들어갈 작가일 텐데도 상대방 말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대사들이 귀엽기 짝이 없다. 아마도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그간 자기가 썼던 드라마의 공식을 스스로 반성한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굴곡없는 미적지근한 연애사를 그리면 누가 보겠는가. 필연적으로 남녀 주인공이 죽어 슬픔의 정서를 극한까지 증폭시키거나 요상한 출생의 비밀이 끼어들거나 하면서 과장하기 일쑤인데, 노지마 신지는 자기를 비롯한 작가들이 그런 드라마에서 죽음이 갈라놓아도 언제까지고 사별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만들낸 게 아닌가 자문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자, 죽은 사람과의 추억도 소중하지만 지금 바로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못지않게 소중함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만다.

 

주인공의 사랑의 행방이 결정되는 결말 부분이 약간 급작스럽고 남자 작가가 남자의 시점에서 쓴 작품이라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약간 피상적인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그 사람의 숫자 만큼이나 제각각의 연애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 많은 연애들을 전문적으로 예쁘게 가공하고 포장해 성공을 거뒀던 작가이니만큼 몇몇 장면에서 주인공의 연애 심리에 대한 통찰이 특히 돋보인다.

 

예를 들어, 여자가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할 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곁에서 지켜주고 기댈 수 있게 도와주는 오빠는 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털어놓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느끼지는 못할 거라는 걸. 그러면서도 결국 주인공은 힘들어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준다. 이 순간의 비통하고 헛헛한 마음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역시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뜬구름잡는 공허한 이야기보다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쪽에 마음이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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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사람들 - 경쟁에서 이기는 10가지 법칙
진 랜드럼 지음, 양영철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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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인생, 그냥 그렇게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성공을 원하고 멋있게 사는 걸 꿈꾸는 게 당연하다. 이런 사람들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영악한 출판사들은 성공 지침서 등의 책을 곧잘 펴내 성공에 목마른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고 있는데, 나 역시 그런 흐름에서 자유롭지는 못해 셀프 스터디, 경제 경영 처세서 등의 책들을 한두 권 읽어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우화 형식을 차용한 지침서들은 알맹이는 없고 그저 그런 고루한 교훈들로 점철되어, 본전 생각만 간절할 뿐이었다. 이 책 <신화가 된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콘셉트가 좋은 것 같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으로 라이벌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위대한 스포츠 스타 10인의 삶에서 배우는 성공 비결, 멋지지 않은가? 
 

더구나 스포츠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꼭 성공 지침서로가 아니더라도, 마이클 조던이나 타이거 우즈 등의 슈퍼스타의 빛나는 활약이 잘 요약된 이 책을 일종의 가이드북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 이렇듯 여러모로 기대를 하고 읽었고, 실제로 내용도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아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어 유감이다. 문학의 경우라면 사실 관계가 다소 어긋나도 문학적 허용이라고 봐 줄 수도 있겠지만 실화를 토대로 교훈과 감동을 주는 이런 류의 책에서는 사실 관계를 생명처럼 중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한 분이나 편집하신 분들은 인터넷이 깔린 컴퓨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했는지 얼토당토않는 내용이 가끔 나와 눈쌀이 찌푸려진다. 예를 들자면 본문 29쪽에 나온 내용이다. "존 스톡턴은 NBA 사상 최고로 많은 어시스트와 인터셉트 기록을 남긴 선수이다. 그리고 또 역시 NBA 사상 최고로 많은 팀을 오갔던 선수도 존 스톡턴이다." 점심 먹고 막간을 이용해 인터넷 검색을 1분만 하더라도 존 스탁턴이 유타 재즈 팀에서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쭉 뛰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아 유타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존 스탁턴이 저니맨이라니 오류가 이만저만이어야지.

 

또 타이거 우즈 편에서는, 본문 383쪽에서 "하지만 2000년 6월 우즈가 US오픈에서 페블 비치를 놀라운 15타 차로 누르고 우승했을 때"라고 적어 페블 비치라는 선수를 15타 차로 누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페블 비치는 프로암 골프 대회가 열리는 골프 코스 이름이다. 기본적인 산수 능력만 있으면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있다. 본문 363쪽에는 "1975년 12월 30일 첫 아들이자 외동아들인 엘드릭 타이거 우즈를 얻었다"로 되어 있는데, 본문 386쪽 "이 책이 집필될 무렵 우즈는 마흔 살에 접어들었고"란다. 올해로 따져봐도 1975년생이면 33살이다. 멀쩡한 사람을 순식간에 중년으로 만들다니 우즈가 얼마나 슬퍼하겠나.

 

이외에도 몇 번씩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뜯어봐야 겨우 이해가 되는 상황이 부지기수다. 오탈자나 행바꿈 실수도 무척 많다. 작가의 말을 보면 "편집 작업은 길고 지루한 과정이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엄청난 작업 분량에도 불구하고 최종 편집 작업을 완성해 준 로즈마리 테너에게 특히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그녀의 세심한 끈기가 없었더라면 작업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들쭉날쭉하고, 애매모호하고 소홀하게 느껴졌던 부분들이 정리되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담당 편집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작가 진 랜드럼은 로즈마리 테너에게는 감사해도 이 책의 한국판 편집자에게 감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판 편집자의 세심한 끈기와 노력이 부족했기에 <신화가 된 사람들>의 한국판은 들쭉날쭉하고 애매모호하고 소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무 비난만 한 것 같아 죄송한데, 이 책의 주제가 결국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불꽃같이 다시 타올라 성공을 일구라는 것이기에 이 책을 작업하신 분들도 좌절하지 말고 더 노력해 다음에는 훨씬 완성도 있는 책을 만들어주십사 하는 부탁을 진심으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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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7-07-0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류 목록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ㅎㅎ

Koni 2007-07-0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일침이 강렬합니다.

jedai2000 2007-07-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저보다 스포츠에 대해 훨씬 많이 아시니 더 많이 찾으시겠네요.

냐오님...서평단으로 받은 책이라 영 죄송스럽긴 한데, 그래도 구체적인 걸 지적해야 수정도 되고 그럴 것 같아서요. ^^
 
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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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상깊게 읽은 [꽃밥]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신작이라 큰 기대를 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읽어보았다. 작가는 [꽃밥]으로 2005년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호러소설 작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인데, 막상 작품을 보면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괴이하고 신비한 이야기 혹은 약간 소름끼치는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일본의 오랜 기담, 괴담 문학 전통의 계승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제법 아니 꽤 잘 쓰는 작가다. 다소 노골적인 제목, [새빨간 사랑]을 달고 나온 이 단편집은 버려진 마론 인형처럼 처연한 느낌을 주는 금발머리 소녀가 표지를 장식한다. 과연 이 소녀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절로 궁금해진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는 투병 중인 동생이 결국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자 절망하는 언니가 주인공이다. 이제 갓 스물인데 한 순간도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동생의 운명에 슬퍼하는 언니를 보다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가 묘한 정보를 가져오는데, 죽은 사람을 예쁘게 장식한 다음 사진 속에 담아 내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망자를 추억하게끔 한다는 장의사가 있단다. 언니는 결국 장의사와 연락해 동생이 결코 입어볼 수 없었던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동생을 잘 돌봐주던 간호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그 장의사와 관계된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는다. 공포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분들이라면 대개 아시겠지만 이쪽 장르, 은근히 교훈적이다. 청춘 난도질 호러 영화가 난잡한 성관계를 즐기는 10대들이 주로 당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공포 영화의 피해자는 금기를 어기는 사람들이다. <영혼을 찍는 사진사>의 교훈은 망자는 기억 속에 아름답게 묻어야지 너무 과도한 애도의 표현은 좋지 않다, 뭐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독특한 소재와 분위기가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다.

 

<유령소녀 주리>는 제목에 상당한 스포일러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학교도 가끔 가는 한 소녀가 있다. 엄마의 푸념에 견디다 못해 모처럼 학교를 나가는데, 이게 웬 일 학생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네. 알고보니 그녀는 진짜 유령소녀였다. 누군가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뭐든지 귀찮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이 그립기만 할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녀에게 정말 모든 걸 바쳐서라도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지만 실체가 없기에, 만질 수 없기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책에서 묘사되는 이 순간의 절망감은 너무 아프게 느껴져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혹시 있다면 이 단편을 보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괴로워도 슬퍼도 살아 있어야 남도 돕고 자신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단편에도 교훈이 있는걸.

 

<레이니 엘렌>은 미스터리 팬들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를 그린다. 대기업을 다니는 미모의 여사원이 밤에는 매춘을 일삼다 피살되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바로 그 사건. 일단 기리노 나쓰오가 그토록 멋지게 요리해낸 소재를 또 한 번 다룬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두둑한 배짱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어차피 장르가 완전히 다르니까 부담은 약간 적었을 것이다. 러브호텔 밀집지역에서 채팅으로 만난 두 중년남녀, 싸구려 잠자리를 준비중이다. 남자는 대학교 때 만나 짝사랑했던 같은 과 여자친구를 회상한다. 그 여자친구와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그후 매스컴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모의 커리어우먼이자 매춘부가 된 여자친구는 결국 밤거리를 떠돌다 목 졸려 살해되고 말았다. <레이니 엘렌>에서는 러브호텔 거리를 가득 메운 풍선을 통해, 이 도시를 부유하는 정체불명의 욕망을 그린다.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바로 그 욕망을.

 

<내 이름은 프랜시스>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었다. 마치 에도가와 람포를 연상케 하는 이상성욕을 소재로 다룬 작품인데, 화자인 젊은 여성이 중학교 때 스쳐 지나간 같은 반 여자친구에게 테이프를 녹음해 보내면서 그녀의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특이한 설정이다. 이단 종교에 매몰된 가족을 둔 그녀의 최대 고민은 원인 모를 도벽이다. 어떻게도 참을 수 없는 이 도벽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도쿄로 도망을 치게 되고 몸을 팔면서 생활한다. 매춘 생활 중 만난 남자는 유달리 신사적이고 성품이 훌륭하지만 한 가지 기묘한 요구를 하는데...끈적끈적한 분위기와 기묘한 인간군상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변태성욕을 그려 독자를 훌륭하게 빨아들인다.

 

<언젠가 고요의 바다에>는 소품이다. 초등학생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젊은 남자와 알게 된다. 그의 집에는 지구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기묘한 어떤 것이 살고 있는데, 그 생물(?)을 키우는 데는 품이 무척 많이 든다. 이 작가는 [꽃밥]에서 '요정생물'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집착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근사하게 지은 바가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그 생물(?)에 홀려 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짤막하게 수록작을 살펴보았다. 작품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전부 되어 있고, 내용도 다 재미있어 금세 읽힌다. [꽃밥]과 비슷하게 공포와 사랑, 에로틱한 정서, 욕망 등의 내밀한 인간 본성을 그리는 것도 인상적이다. 다만 [꽃밥]의 이야기들은 전부 유년시절의 풍경을 담아내 어딘지 아련한 느낌이 좋고 우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있는데, 성인들이 주인공인 [새빨간 사랑]은 그만큼 노골적이라 약간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정은 [꽃밥]이 위다. 하지만 둘 다 재미있다.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 독자라면 슈카와 미나토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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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5-2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을 읽어야겠군요. 그나저나 그로테스크와 같은 소재는 정말 님 말씀처럼 작가의 배짱인것같네요^^

jedai2000 2007-05-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밥>이 더 좋습니다. <그로테스크>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당시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긴 했나 봐요 ^^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
나가시마 유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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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나가시마 유의 2005년도 작품으로 두 개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평소에 순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데도 200쪽 남짓한 페이지도 부담이 없고, 또 너무 미스터리에만 편향된 독서를 하는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책을 잡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표제작인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무쓰미라는 한 평범한 직장 여성이 직장 동료를 알게 되고 서서히 그가 마음속에 자리잡지만 결국 바라만 보다 끝나는 짝사랑 이야기인데 커다란 드라마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들이 영화처럼 우연과 우연이 겹쳐 결국 인연으로 맺어지는 드라마틱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그냥 미소지을 때 어쩐지 쓸쓸함이 감도는 옆얼굴이 마음에 들더라, 하는 식의 소박한 이유가 대다수다.

 

이 작품에서 무쓰미가 남자 동료에게 처음 마음을 주게 되는 순간은 그가 노래방에서 자메이카의 레게 아티스트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부르는 걸 보고 나서부터다. 일단 노래 자체도 무난한 히트곡이 아니고 시쳇말로 뭔가 있어 보이는 노래인데다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자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라고 해석될 그 제목을 <울지 않는 여자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 남자가 신비하게 느껴진다. 사실 남자가 무식해서 제목을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는 그런 무난한 이유는 통하지 않는다. 왜 이 남자는 그렇게 해석한 것일까, 혼자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보기도 하며 설레여 한다. 누구나 노래방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왜 이 노래를 불렀을까, 무슨 뜻일까 하며 혼자 갖은 상상을 하며 괜히 흐뭇해지고 때로 쓸쓸해하며 망상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무쓰미의 내밀한 심리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작가는 결국 말하지 못하고 남자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절망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관찰할 뿐인데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도 무쓰미에게 애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자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에피소드처럼 내일이면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을 속으로만 삭이는 무쓰미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외에도 현대의 직장 여성으로서 출퇴근 시간과 일하는 과정 속에서 무쓰미가 느끼는 여러 가지 단상도 비슷한 삶을 사는 독자들에게 큰 공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뱀처럼 긴 줄을 이루며 출근하는 사람들, 서로 알지 못하기에 나란히 서지 못하고 앞뒤로 서서 행렬을 이룬다.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실상은 단절되어 있다. 어느 비오는 날 출근길에 땅바닥에 덮여 있는 나무판자를 누군가 물이 튀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깔아두었다는 걸 깨닫고 감동받는 무쓰미. 역시 우리는 선의로 이어져 있어, 라고 기뻐하지만 그 감격을 이야기할 상대는 출근길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역시 없다. 결국 혼자인 것이다. 아마 나를 비롯해 이 에피소드에 공감할 독자들이 무척 많을 거라 믿는다.

 

'센스없음'은 표제작보다 더 인상적이고 더 기억에 남는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걸 발견한 아내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집안 정리를 한다. 남편이 빌려놓은 성인비디오를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가 쌓이는 걸 알고는 비디오를 갖다주러 대여점이 있는 역까지 걷는다. 남편이 그동안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눈내린 거리를 사진에 담으며 그저 걷는다. 결국 파국으로 끝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느껴지는 환멸감과 곧 헤어질 거면서 남편의 성인비디오를 갖다주기 위해 걷는 상황의 묘함, 오랜만에 눈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예전 학창시절의 달콤씁쓸한 기억까지 여자의 혼돈스런 사고가 내내 이어진다. 역시 끝까지 큰 사건은 없고 그저 걸을 뿐인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인데도 여운이 굉장히 크고 깊다. 나가시마 유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지만 담백한 심리 묘사와 현실적이면서도 뭔가 마음을 적시는 여운에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재미로 보는 소설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런 풍의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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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후를 기다리며
하라다 마하 지음, 오근영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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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빛 파도가 넘실대는 남국의 섬,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 제목 <카후를 기다리며>의 '카후'는 오키나와 사투리로 좋은 소식, 행복 등을 뜻한단다. 좋은 어감 만큼이나 좋은 뜻이다. 오키나와의 작은 섬에 사는 아키오는 28살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채, 자그만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애견 카후와 함께 하루하루를 재미없게 보내고 있다(애견만 없다 뿐이지 다른 신세는 필자와 비슷하다, 흑). 책 첫 머리에 아키오의 외로움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었는데, 어쩐지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런 일과는 인연이 멀었던 인생이다.  

 

고백하자면 여기서부터 역시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과는 인연이 먼 인생을 살고 있는 필자가 급격히 몰입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키오는 섬 밖으로 관광을 나갔다가 한 신사에 들러 기원문을 매달아둔다. 신에게 던지는 한 마디가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진지하게 미지의 여성에게 구애를 한 것이다. 

"나한테 시집오지 않을래요? 행복하게 해줄게요 - 아키오."

개인적으로도 특정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친구들이랑 어디 놀러 가서 절이나 사당 같은 곳이 나오면 꼭 헌금을 하며 소원을 비는데, 친구들이 돈 낭비라고 다 비웃어도 나는 진지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랑 잘 되기를 빌기도 하고, 지금처럼 항상 맑고 곱기를 기원하기도 하며 뭐 그런데, 인연이란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도 때로 어긋날 수도 있는 모양이니 뜻대로 되지 않는 애정이 벽에 부딪쳤을 때 신을 찾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결국 그렇게 많이 빌었음에도 본인은 신으로부터 어떤 기별이나 연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질투나게도 이 작품의 주인공 아키오는 대뜸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니, 사치라는 이름의 낯선 여자에게서 온 것이다.

"기원문이 진심이라면 저를 당신의 아내로 받아주시겠어요? - 사치"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사치를 몹시 기다린다. 하루하루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해가지만 사치는 오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아키오는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은 지금껏 전부 나를 떠나갔다.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떠난 어머니, 나보다 단짝 친구를 더 좋아했던 짝사랑하는 여자애...평생 이렇게 외로울 팔자인가 보다, 하며 포기한 순간에 사치가 찾아온다. 눈부신 미소에 단아한 아름다움, 활달한 성격에 싱그러운 젊음을 소유한 사치가...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 사치"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자연을 배경으로,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을 간직한 아키오와 사치가 점점 가까워지고,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를 돋운다. 왜 이쁘게 사랑하는 커플을 보면 괜시리 훔쳐보고 싶고, 그저 예뻐 보이고, 잘 됐으면 하고 응원하는 게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우리네 마음 아닌가.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튼튼한 결실을 맺기를 열심히 바라며 읽었다. 제1회 '일본 러브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데, 분명히 매력있는 소설이다. 만나고 가꿔워지다, 오해를 겪고 이별하지만,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는 대강의 설정은 통속적이고 대부분 짐작 가능하지만 솜씨 좋게 빚어져 있어 결점을 찾기 어렵다. 이 작품에서의 오해는 대부분 아키오의 우물쭈물함, 용기없음, 지레짐작에서 비롯되고 있어 '이런 바보'하면서 내내 욕을 하면서 보았다. 마지막 100여쪽을 볼 때는, '빨리 사치의 마음을 알아채란 말야', 하면서 하도 몰입하면서 봤더니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순진한 아키오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풋풋한 연애담, 꼭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사치라는 여인의 매력,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남국의 싱그러운 바람, 전쟁 같은 도시가 아닌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시골의 여유를 안겨줘 한참을 잊지 못할  독서가 될 듯하다. 좋은 연애소설은 아마도 책장을 모두 덮고 나면 나도 지금 당장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줘야 할 것이다. <카후를 기다리며>를 읽고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닷가 모래밭을 단둘이 다정하게 걷고 싶어서, 철 지난 사랑 노래를 찾아 듣고 싶어서, 카메라처럼 내 눈에 나만을 보고 웃어주는 한 여인을 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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