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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요즘 출판계의 최대 화제는 뭐니뭐니해도 <오만과 편견>일 것입니다. 연초부터 심상치 않더니 이제는 소설 부문 판매 1위까지 올라 있습니다. 이 작품이 갑자기 이렇게, 시쳇말로 확 떠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꽃처럼 화사한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동명 영화의 영향도 크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작품 자체가 지금 읽어도 꽤 재미있다는 점일 겁니다. <오만과 편견>은 1813년에 처음으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그러나 100년을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로맨스와 결혼에 관한 글을 쓰는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지요. 아마 연애를 주로 쓰는 드라마 작가들의 집에는 필수적으로 한 권씩 구비되어 있을걸요.
영국의 중류층 신분인 베넷 집안에는 망아지같은 딸만 다섯 명이 있습니다. 작가 제인 오스틴은 딸 다섯을 모두 개성 강하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합니다. 첫째 제인은 천사표, 둘째 엘리자베스는 발랄하고 자기주장 강한 똑순이 느낌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딸의 모습은 여기가 끝입니다. 셋째 메리는 뻐기는 독서광, 넷째 캐서린은 자기 주관이 없는 무뇌아, 막내 리디아는 남자 밝히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해요. 거기다 딸들의 결혼 덕을 보려는 대책 없는 엄마와 시니컬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인 아버지까지 가세한 베넷 가는 조용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물론 가족 소동극은 아니죠. 남녀간의 로맨스가 핵심입니다. 베넷 가의 옆집에 부잣집 도련님 빙리 씨가 머물러 옵니다. 빙리 씨는 기념 무도회를 열고 거기 참석한 제인 베넷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립니다. 물론 제인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그곳에는 빙리 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빙리 씨의 절친한 친구이자, 훨씬 부자에 신분이 높은 다아시 씨도 참석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아시 씨는 무표정해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고, 틀에 박힌 사교 활동을 싫어해서 무도회에서 춤도 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거만한 느낌을 주는 다아시 씨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다아시 씨 역시 그다지 예쁘지 않은 엘리자베스를 별로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 끝까지 이런 상태가 유지될 거라곤 말씀 못 드립니다. ^^;;
위에서 드라마 운운했는데, 사실 <오만과 편견>은 지금도 꾸준히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남녀간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과 드라마, 영화의 원전 같은 작품입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주로 다루고 있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재벌 아들을 차지하는 건,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눅들지 않고 씩씩한 여주인공이죠. 아마 그런 비법(?)을 처음 공개한 게 이 작품일걸요.
"건방지다고 해도 될 거예요. 거의 그랬으니까요. 실상은 말이에요. 당신은 예절이라든가, 경의라든가, 괜스러운 친절 같은 것이 지긋지긋했던 거예요. 언제나 당신의 인정을 받으려고 말을 건네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이 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여자들하고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흥미가 생겼던 것이죠."
엘리자베스가 본인의 성공 이유를 뻔뻔스럽게 분석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신분과 재산이 높은 남자와의 결혼에 결국 골인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비뚤어진 결혼관에 대해 깊이있는 묘사와 날카로운 풍자를 곁들이고 있어요. 그 시절 영국에서는 장자만이 상속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은 거의 상속권이 없었구요. 장남만이 상속을 받는다고 쳐도 차남이나 다른 아들들은 남자니까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지, 여성은 그런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차단되니 극도로 궁핍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 부자집 남자와의 결혼 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생계를 위해 사랑없는 결혼으로 불행하게 살았다네요.
이 작품은 결혼이 남녀간의 진실한 사랑의 결합이 아닌 저잣거리의 물건처럼 사고 파는 현실이 되어버린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특히 베넷 부인의 묘사를 통해 중점적으로 나타나죠.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요즘 결혼도 당시 상황과 비교해 봐서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능력을 재고, 조건만 맞으면 애정없는 결혼을 하는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잖아요? 이래서 고전이 위대하다는 겁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인간사의 진리를 그리는 게 바로 고전 아니겠습니까. 돈과 신분에만 혈안이 되어 상대를 재는 흉한 풍경들 속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결국 아름다운 인연으로 맺어지는 다아시 씨와 엘리자베스 양이 그래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 같아요.
제목인 <오만과 편견>은 사랑을 할 때 의례 따라오기 마련인 두 가지 나쁜 감정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다아시 씨는 귀족 집안의 총아답게 좋은 성품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약간은 오만한 점이 있었고, 엘리자베스 양은 그런 다아시 씨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편견을 쌓아왔습니다. 이 두 가지 나쁜 감정을 가진 두 사람이 사랑을 알게 되면서 점점 변해가는 모습이 이 작품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에 빠지고 싶게끔 만드는 이 봄날에 딱 어울리는 책인 것 같아요.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행복해지는 책이죠. 게다가 덤으로 유머도 풍부합니다. 특히 베넷 씨의 독특하고 시니컬한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 최고급 로맨스와 풍자, 유머를 보증하는 작품입니다.
작가 제인 오스틴은 줄곧 영국 중류 계급의 연애와 결혼이라는 소재로 작품을 썼는데, 알고보니 두 번의 결혼 실패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더군요. 그중에 한 번은 남자가 결혼식 직전에 돈이 더 많은 여자에게로 떠나고 말았다고 하네요. 그뒤로 결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노처녀로 살았다고 합니다. 작가란 역시 자신이 잘 알고, 관심 있는 소재에 대해 글을 쓸 때 최고의 실력을 보이나 봅니다. 그런 면에서 제인 오스틴 만큼 결혼을 소재로 잘 쓸수 있는 작가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기를 가장 큰 적으로 보고 피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 우연한 해후에서 친분을 유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듯했고, 둘 사이에만 해당되는 일을 가지고 대놓고 호감을 표시한다거나 눈에 띄는 태도를 보이는 일 없이 자기의 친지들에게 호감을 사려 하고 누이를 소개하려고 마음을 썼던 것이다.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 아니라 감사한 마음까지 생겼다. 사랑, 그것도 열렬한 사랑 때문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