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라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7
로베르토 사비아노 지음, 박중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바로 지난 3월 2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마피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참가 인원이 무려 15만 명. 좁은 도시에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썩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폭력 조직이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웬 오버? 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충격적인 르포소설 <고모라>를 보게 된다면 그런 안이한 감상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깊이 깨닫고 말 것이다. 실제 나폴리 토박이인 사비아노는 나폴리의 마피아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 부를 축적하고, 살인과 테러로 어떻게 나폴리를 공포의 생지옥으로 물들이고 있는가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했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충실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강렬한 분노와 예리한 분석, 뛰어난 문학성이 어우러진 <고모라>는 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책 중 가장 읽어볼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탈리아의 범죄 조직 하면 흔히 마피아를 떠올린다. 사실 마피아는 코사 노스트라로 불리는 유서 깊은 시칠리아 본토의 범죄 조직만을 가리키며, 190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주한 시칠리안 갱들의 활약(?)을 통해 이탈리아 범죄 조직의 대명사가 되었다. 최초의 아메리칸 마피아 신디케이트를 만든 전설적인 뉴욕의 찰스 '럭키' 루치아노, 시카고의 알 카포네 같은 보스들의 이름은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았을 듯. 이렇듯 미국의 이탈리아계 범죄 조직을 통칭해 보통 마피아라 부르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마피아) 말고도 다양한 범죄 조직이 있다. 칼라브리아 지방의 은드랑게타, 풀리아 지방의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그리고 나폴리의 카모라가 이탈리아의 4대 범죄 세력이다. 아직도 코사 노스트라는 가입식 때 성모 마리아 그림에 피를 묻힌 다음 불태우는 전통 의식을 행하지만 전통과 형식, 위계를 그닥 중시하지 않는 카모라는 낡은 의식 따윈 생략이다. 철저히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합법과 비합법을 오가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카모라에 의해 희생된 사람만 900명에 달하는 일종의 '범죄주식회사'라고 보면 된다.

 

책 못지않게 영화도 좋아하는 나를 늘 개봉과 동시에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영화가 있으니 그건 갱이 나오는 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영화 중 하나도 프란시스 코폴라가 미국으로 이주한 마피아 일족의 삶을 바로크적인 장중함으로 그려낸 <대부>며, 아메리칸 갱들의 흥망성쇠를 리얼하게 담은 마틴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 늙은 갱이 결국 과거로부터 찾아온 망령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는 꿈이 이뤄지기 직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 같은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보았다. <벅시>, <카지노>, <스카페이스>, <도니 브래스코>, 심지어 홍콩의 변종 갱 영화들인 <영웅본색>, <열혈남아>, <천장지구>, <고흑자> <무간도>,  갱이 토착화된 발음인 우리나라의 깡패를 그린 <게임의 법칙>, <비열한 거리>, <우아한 세계>까지 갱이 없으면 누굴 소재로 삼아 영화를 만들까 싶을 정도로 많은 영화들이 폭력 조직을 그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갱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비밀스런 판타지가 충족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영화들에서 갱 우두머리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법이 없다. 아무리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어도 언제나 가장 좋은 자리가 예약되어 있다. 비록 불법이라지만 돈은 썩어넘칠 정도로 흘러 들어오고, 미모의 애인도 여러 명,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버튼만 누르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이런 게 바로 남성 판타지의 정수가 아닐까. 우리는 설레이는 꿈으로 가득차 사회 생활을 시작하지만 한 살씩 나이를 먹고 배우는 거라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하게 명령에 따라야 할 때, 괴로워도 슬퍼도 참아야만 할 때 내게도 힘과 권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아니 날 수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라. 마피아를 비롯한 폭력 조직이 검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건 바로 이 순간이니까.

 

사비아노에 따르면 마피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나 권력에 굴복하고 어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을 얻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때 그 마음에 기생해 서서히 세력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돈과 힘으로 어떻게든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고, 경쟁자는 골통을 날려버려서라도 제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에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아름다운 나폴리에 카모라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카모라의 물리적인 폭력보다 나도 카모라의 힘에 호소해 정점에 서고 싶다는 나폴리 사람들의 비뚤어진 사고방식 자체가 카모라라는 병근을 제거하는 치료를 그토록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구의 44퍼센트가 카모라와 관련된 나폴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돈과 권력에 미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않는 전 세계의 어디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비아노의 근원적인 문제 제기로 역시나 금권주의로 인한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고민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카모라의 주 수입원은 너무도 다양하다. 재봉사들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몰아놓고 명품 의류를 싼 가격에 공급해 폭리를 취하는가 하면, 마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자체다. 유통업과 건설, 쓰레기와 폐기물 처리 사업까지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카모라의 연간 수입은 수십 억 유로로 원화로는 수 조 단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사비아노는 스크래치라는 아주 재미난 표현을 통해 해답을 준다. 마약 등의 불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합법적인 곳에 투자하다 자금난 등이 생기면 치기직칙, 레코드 판으로 스크래치를 하듯 잠시 사업을 멈추고 다시 불법 행위로 돈을 끌어들인 다음 치기직칙, 다시 스크래치를 걸고는 합법적인 사업에 재투자. 이 합법과 불법의 스크래치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막대한 돈이 쌓이는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카모라의 암약에 강렬한 적개심을 보이는 사비아노의 한 마디, 한 문장을 읽으며 마치 애미넴 같은 래퍼가 떠올랐다. 끝없는 분노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그의 용기 있는 외침은 마치 성서의 죄악으로 가득찬 타락의 도시 '고모라'의 유일한 선지자 '롯'의 재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어느 시대나 의인은 어려움이 많은 법인지 과연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카모라 보스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로부터 엄중 경호를 받고 있다는데,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한 그가 진심으로 무사했으면 좋겠다.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새로운 건설업자들, 은행과 요트의 소유주들, 가십의 왕자들, 창녀들의 왕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숨긴다. 어쩌면 그들은 아직은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의 수입이 어디서 나오는지 밝히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헌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회사의 부가 무엇인지를 안다. 모든 기둥마다 다른 사람들의 피가 얼마나 많이 묻어 있는지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나는 결코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__'시멘트' 장에서 

 

카모라는 어느 보스의 카리스마나 지도력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이 너무도 공고히 갖춰져 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이 없어도 곧바로 대체자 한 명이 들어오고 그동안처럼 별다른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 카모리스타(카모라 조직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결국 폭력과 범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경찰에 잡힐 수밖에 없다. 산더미 같은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야 하며,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결국 자기도 언제든 나의 자리를 노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을 우려가 있으므로 지하 벙커에 숨어 살아야 한다. 돈과 힘이 제아무리 많아도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게 바로 카모리스타의 인생일 뿐이다. 한국판 카모라를 꿈꾸는 우리나라의 일부 철없는 범죄 조직 지망생들은 사비아노의 이 통찰을 명심하기 바란다.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 1979년생 젊은 작가로 누구나 겁내는 카모라에 문학으로 맞서는 대단한 사나이다.>

 

 

 <사비아노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고모라'.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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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1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모라에 대해 나온 거 봤는데 정말 대부는 심각한 포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edai2000 2009-04-1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피아에게 로맨틱한 요소는 있을 래야 있을 수가 없죠. 영화가 꼭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은 반드시 담고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 1 오브리-머투린 시리즈 1
패트릭 오브라이언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삶이 팍팍해서일까. 요즘 바다에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푸르른 대양을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릴 것 같고, 내 머리 위에 불어오는 상쾌한 바닷바람은 온갖 망상과 잡념으로 찌든 머릿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누구나 바다를 동경하고 바다에 얽힌 추억 한 가지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바다는 틀에 박힌 삶에 지쳐가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모험심을 자극하며 잠시 고단한 현실을 잊고 꿈을 꾸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3부작의 성공 요인도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겠는가. 여기 바다를 소재로 한 하나의 매력적인 소설이 있다. 해양 모험소설의 대표작인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마스터 앤드 커맨더>가 바로 이 작품으로, 갱 영화에서의 <대부> 같은 존재, 혹은 무협소설에서 김용의 <사조삼부곡> 같은 위치를 점한다고 보면 되겠다. 3년 전에는 러셀 크로 주연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은 아니고, 21편에 달하는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의 10번째 작품 <세상의 끝>을 영화화한 것이란다. 마침 영화도 DVD로 가지고 있어 조만간 볼 예정이다.

 

고등학교 때 <대항해시대>라는 컴퓨터 게임을 하며 주말 밤을 새우기 일쑤였는데,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읽으며 그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 유럽의 18, 19세기라는 비슷한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항해의 준비 과정과 실제 항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그럴싸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잭 오브리는 아버지가 해군 장성이지만 밑바닥부터 다른 배에서 구르다 마침내 소피 호의 정식 함장이 된다. 그는 유능한 선원들을 모으고 오랜 항해를 위해 물자를 채우며 착착 밑준비를 한다(여기가 사실 <대항해시대>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이다). 한번 출항하면 배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의사가 꼭 필요하다. 오브리는 우연히 알게 된 박학다식한 학자이자 의사 스티븐 머투린을 군의관으로 삼아 마침내 닻을 올리고 바다로 향한다. 

 

뱃사람으로서 유능하지만 재물과 승진, 여자 등의 욕망에 불타 있는 속물 잭 오브리와 생명을 중시하는 고결한 이상주의자 스티븐 머투린은 성격이 많이 다르지만 서로를 몹시 위하며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 이 시리즈를 오브리-머투린 시리즈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점점 깊어가는 두 사람의 우정과 내면의 성장, 파란만장한 인생 항로가 21권이라는 많은 양의 소설을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돛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 패트릭 오브라이언이 철저하게 19세기 초의 관점으로 모든 걸 묘사했다는 데 있었다. 솔직히 소피 호와 잭 오브리가 다짜고짜 적국인 프랑스, 에스파냐 상업선을 나포하는 장면들은 해적이나 다를 바 없었고, 오브리의 불륜 행각, 혹은 흑인이나 장애자들에 대해 편견 섞인 대사들을 마구 내뱉는 장면들은 아마 요즘 나오는 소설이라면 그렇게 쓰지 못했을 것 같다. 작가는 그저 철저하게 당시 뱃사람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출 뿐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19세기의 시대상, 인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로서 이 작품이 가진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피 호는 4파운드 짜리 작은 대포 14개만을 갖춘 조그만 배다. 이 시원찮은 배를 이끌고, 뛰어난 전술로 적함을 연전연파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장면들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짜릿하다. 특히 오브리와 머투린의 순간적인 기지로 다 죽었다 싶은 장면에서도 무사히 탈출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통쾌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대형 대포 32문을 갖춘 카카푸에고 호를 격파하는 부분. 적함으로 밧줄을 타고 뛰어들어 처절한 살육전을 전개하는 오브리와 소피 호 선원들의 모습은 박력이 철철 넘친다. 이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절대로 놓치지 마시길. 작가 패트릭 오브라이언은 문필가면서 범선에 조예가 깊은 모양인지 엄청 정교하게 소피 호를 그린다. 앞돛대, 가운데돛, 아딧줄, 바람받이, 활대, 패덤...사실 뇌에 과부하가 걸리며 머릿속으로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범선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어보려 했는데,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게 되더라. 가치 있지만 솔직히 읽기가 쉽지는 않다고 고백하고 싶다. 나처럼 가볍게 해양 모험소설로서만 읽는 방법도 있을 테고, 역사나 범선, 해양에 관한 자료를 꼼꼼히 찾아가며 공부하는 독서도 있을 수 있다. 어떻게 읽든 잘 쓴 소설임은 분명하고 읽으면 유익한 작품이니 자기만의 독서법을 찾아 재미나게 즐기시길...

 

 

 

p.s/ 원저에는 단 하나의 역주도 없고 자주 나오는 프랑스어, 에스파냐 어 등에 대한 설명도 일절 없다고 하는데, 이걸 일일이 찾아 역주를 달고 번역한 번역자 분의 고생이 정말 굉장했을 것 같다. 번역에 2년이나 걸렸다는데 과연 그랬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다음 편은 2010년에 보게 되는 건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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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남자 밀리언셀러 클럽 76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줄어드는 남자>라는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랄 중년 남자들이 떠오른다. 다행히 그런 중년의 고개 숙인 남자가 등장하는 섹슈얼한 내용은 아니고, 문자 그대로 하루에 0.36센티미터씩 매일 줄어들어 점점 작아지는 스콧 캐리가 주인공이다. 사춘기 시절 흔히 눈에 보이지 않게 작아지면 여자 목욕탕도 가고 짝사랑하는 아이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야지 하는 공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보고 나면 날마다 작아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작품의 첫 시작부터 스콧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뒤에서 쫓아오는 집채만한 거미를 피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괴물 같은 거미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무작정 도망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콧은 왜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작아지는 병을 얻게 된 것일까? 그는 형과 함께 보트를 타고 바다에 머물다가 정체 모를 안개에 몸이 닿는데, 나중에 그 안개는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밝혀진다. 이 작품이 처음 씌어진 해(1956년)가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사용된 1945년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라는 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비록 원자폭탄의 가해국이라지만 원폭의 가공할 위력과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재앙은 미국인들에게도 끔찍한 공포가 되었으리라는 걸 유추해볼 수 있는 설정이다.

 

<나는 전설이다> 이후 오랜만에 읽어본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이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러 모로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책인데, 6일 후에 0센티미터까지 떨어져 망각 속으로 사라져야만 하는 주인공 스콧이 느끼는 절절한 고독과 슬픔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흡혈귀, 좀비인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아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투쟁하는 <나는 전설이다>의 네빌의 처지와 어쩜 그리 흡사한지. 외로움에 사무친 스콧이 바비인형과 한 침대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 처절하도록 안쓰러운 장면이 나오는 소설이 또 있을까. 또한 <나는 전설이다>에서 1950년대 대중소설 작가로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던, 단 한 명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어찌할 수 없는 네빌의 성욕을 솔직히 고백하는 장면이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스콧은 아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몸 크기를 갖게 되었을 때도 육체와 정신은 팔팔 뛰는 삼십대 장년의 그것이라 아내를 원하지만 몸 만큼이나 작아진 자존심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내내 번민만 한다. 스콧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고용한 십대 베이비시터 여자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스콧의 모습은 희극적이면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 가혹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모든 훌륭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당대의 공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작가 리처드 매드슨은 사회와 시대의 흐름이 변함에 따라 강인함과 권위를 숭상하던 기존의 남성상이 붕괴하고 있는 현상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더 이상 가족에게 어떠한 작은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남성 스콧의 작아지는 몸과 마음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점차 위축되어만 가는 당시 미국 남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던 건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가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 스콧의 강인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타인들의 무분별한 호기심에 흥밋거리로 치부되는 걸 그토록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난 뒤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수기를 써 돈을 버는가 하면, 운명에 희롱당했지만 패배자로만 남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공격하는 거미와 정면승부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절대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스콧의 모습은 진짜 남자가,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떤 의지와 결기가 필요한지를 독자에게 일깨워줄 것이다. 예상 밖의 결말에서 스콧이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토록 통쾌하고 희망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스콧이 보여준 용기에 감복한 작가의 흐뭇한 보너스가 아닐까.

 

표제작 '줄어드는 남자' 말고도 이 책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훨씬 완성도가 있다고 평가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데뷔작이었던 '결투'나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 괴물보다 훨씬 끔찍하게 느껴지는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등 매드슨의 대표 단편들이라고 할 만하다. <줄어드는 남자>나 <나는 전설이다>가 1950년대 작품들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리처드 매드슨의 역량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한 완성도, 깊은 감동을 자랑하는 <줄어드는 남자>는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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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세이타로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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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계 은어 중에 쌈마이라는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해 3류 배우란 뜻인데 반대로 연기 잘하고 자세 좋은 배우는 니마이라고 부르더라. 이 책을 보면 원래는 일본 대중연극에서 코믹하고 넘어지며 망가지는 역할을 지칭하는 산마이메와 멋진 주인공을 뜻하는 니마이메라는 말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대중연극이란 무엇이냐. 지방 흥행 무대를 전전하며 신파극, 시대극, 여장 쇼, 오래된 엔카 등을 공연하는 일종의 유랑극단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주로 가문의 후계자들에게만 전승되어 내려오며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가부키 배우들과는 달리 대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수십 년을 버텨온 종합 엔터테인먼트쯤 되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세이타로는 대중연극의 전성기에 배우로 날렸고 극단까지 하나 꾸렸을 정도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지만 은퇴 후에는 하는 사업마다 실패해 영락하고 말았다. 전형적인 옛날 아버지라 자기 의견에 무조건 순종만을 내세우는 덕에 가족들에게도 별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표현에는 둔감하고, 배우 후계자로 키우려던 첫째 아들은 이지메에 못 견뎌 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며, 첫째 딸은 19살의 미혼모, 막내 아들이자 작품의 화자로 자주 등장하는 간지는 정신지체아다. 

 

함께 살지만 실질적으로 교류가 별로 없는 이 가족을 이끌고 세이타로는 신종 사업을 구상한다. 가족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짜 가족 역할을 해주며 시간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 대행을 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연기의 일종이고 연기라면 세이타로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뭉치 가족인지라 출장 갈 때마다 사건이 터져 제대로 돈도 못 받고 엉뚱한 고초만 겪는다는 것이 전반부의 내용. 대여가족이라는 소재는 사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뻔한 이야기고, 생각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없어 여기까지는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이타로가 언제나처럼 대여가족 사업에 실패하고 연기 스승이자 최고 권위의 극단을 소유하고 있는 단노스케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대목부터 재미가 확 살아나기 시작한다. 세이타로는 단노스케의 배우들을 몰래 데리고 나가 자신의 극단을 세웠기 때문에 일종의 배신자나 다름없다. 다혈질의 단노스케 노인이 노구를 들어 일본도를 휘두르기에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그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기 아들에게 극단 하나를 만들어줬지만 아직 어리니 자네가 단장보좌대리를 해주게. 세이타로는 일선에서 물러난 지 십수년 만에 복귀를 결심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지방 순회공연에 참가한다.

 

그런데 불후의 명우 단노스케의 아들은 전통 대중연극을 경멸하고 자기도 잘 모르는 브레히트 같은 서양연극에 경도되어 기괴한 공연만을 추구한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로미로와 주리' 같은 저질연극을 펼치니 무대에는 계란 투척이 예사. 결국 아들은 줄행랑을 쳐버렸고 당장 공연을 앞두고 있는 단장보좌대리 세이타로에게도 발등의 불이 떨어진다. 세이타로는 오랜 예인 경력을 바탕으로 몇 명의 베테랑과 함량미달의 배우들에게 착착 지시를 내려 결국 공연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늘 패배자 같던 세이타로가 정말로 멋지게 보이는 유일한 순간이다.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온 관객을 만족시켜주는 것만이 배우의 소명이라는 세이타로의 자존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전에 어떤 영화잡지를 봤는데 지금은 작고한 신상옥 감독과의 인터뷰였다. 세부적인 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무슨 이야기였냐면, 그분이 강제로 납북된 분이 아닌가. 거기서도 영화를 찍게 됐는데 일제시대 때부터 여배우로 활약했던 분이 당시 할머니 연배가 되어 그곳에 계셨다 한다. 다리도 불편해서 거의 걷지도 못하는 양반이 신감독이 왔다니 이제 연기할 수 있게 됐다고 펄쩍 뛰며 좋아하는데, 그 다리로 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자 한사코 손을 저으며 "안 아파, 나 안 아파. 연기하면 하나도 안 아파" 이러셨다는데 이 정도는 되야 진짜 배우가 아닐까 싶다.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고통도 즐거움으로 여기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그런 진짜배기 배우. 아무리 인기가 많고 얼굴이 반반한 배우라도 이러한 열정과 배우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없다면 쌈마이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한번 공연할 때마다 많아야 수백 명앞에서 웃음과 눈물을 파는 신세라도 세이타로는 당연히 니마이 배우다.

 

<유랑가족 세이타로>의 가장 큰 재미는 대중연극의 막 뒤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준비 과정과 막이 오르고 나서 펼쳐지는 대중연극 자체의 매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예술성보다는 관객들과의 호흡을 중시하기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싶으면 일발 애드립으로 웃음도 주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유기적으로 진행되는 이 대중연극은 그렇기 때문에 세이타로 같은 베테랑들의 역량이 중요하다. 작품 속에 언급된 '철새를 사랑한 엄마'라는 극은 실제 있다면 반드시 보고 싶을 정도. 물론 망가져가던 가족이 조금씩 철들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과 정신지체아 간지가 무대에 오르면서 점차 성장해가는 이야기도 충분히 웃음과 감동을 준다.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약간 쓸쓸한 느낌도 좋았고. 처음 읽어본 오기와라 히로시의 작품이지만 독특한 소재와 재미가 제법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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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댄디 제다이님^^
지금 오기와라 히로시의 '하드보일드 에그'를 읽고 있는데 초반부지만 그 코믹함에 쓰러질 지경이라...(읽으셨나요?)그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서 검색하던차 역시 제다이님이 계시군요.오랜만에 오게 되었어요^^ 작품내신거 축하드려요
히로시 작품이 출간된게 많네요...다 읽어볼 작정입니다.느낌이 좋아요!

jedai2000 2008-05-2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익후, 댄디를 아시네요 ㅎㅎ

<하드보일드 에그>는 전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도 아직 못 봤네요. 재미있다는 평판이 많아요. 속편은 <써니사이드 에그>랍니다. 아마 나오게 될 거예요. 저도 오기와라 히로시를 주목해보려구요. 축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bongbong 2008-05-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알다니요ㅋㅋㅋ 제가 오아시스인걸요
'미키 스필레인' 검색하다 역시나... 제다이님이 리뷰 첫장을 장식 하시네요^^
ㅡ'키스 미 데들리'라는 좋아라하는 하드보일드 b급무비 원작자가 스필레인이란걸 뒤늦게 알게되었어요ㅡ 일일이 하나하나 댓글 다시는것 그대로이시네요..정보 감사드립니다.
킹 오브 카인드니스! 확실하네요^^

jedai2000 2008-05-28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아시스님이시구나 ^^

아주 오래전부터 방문해주셔서 낯익은 아이디였는데, 그분이 오아시스 님이실 줄이야..
넘 방갑구요 ^^ <키스 미 데들리> 들어본 적 있어요. 보지는 못했지만요. 나중에 스필레인이 직접 마이크 해머 역할로 영화를 찍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재미있죠 ^^
킹 오브 카인드니스는 과찬이시구요.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
 
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현재 한국 공포소설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김종일 작가의 신작 장편이 나왔다. 아마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1, 2>에 수록된 '일방통행'과 '벽'을 읽어본 독자라면 김종일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과 공포라는 장르를 주무르는 솜씨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 밖에 인체의 여러 부분 즉 눈, 귀, 입 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 <몸>도 출간되어 있는데 죄다 우수한 단편들임에도 불구하고 10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분명히 무리한 설정이 보여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었다. 하지만 <손톱>은 처음부터 온전한 장편을 구상하고 쓴 작품이라 이번에야말로 김종일 작가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겠구나 모두들 기대가 컸을 것이다.

 

아이를 유괴 살해당하고 나서 남편과도 이혼한 채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는 듯한 홍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애인 세준과 동거하면서 삶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생기고, 또 호구지책으로 친구 민경과 동업한 네일아트 가게도 그런대로 잘 풀려 이제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구나 싶다. 하지만 홍지인이 낯선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소박한 평화는 깨진다. 꿈 속에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저 재미로 죽이는 살인귀가 되어 있는데, 그런 그를 노리는 사신이라는 존재가 있다. 사신은 손톱만을 이용해 살인귀(홍지인과 동화된)의 눈을 뽑고 잔인하게 난자하는데 비록 꿈이라지만 고통이 생생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보니 손톱 하나가 빠져 있는데 빠진 손톱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그날 이후 홍지인은 매일같이 꿈 속에서 고문기술자나 퍽치기범 등 죽어 마땅한 인간이 되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손톱으로 살해당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물론 꿈에서 깰 때마다 손톱 하나씩이 빠지고 사라지는 것도 변치 않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악인이 되어 살해당하는 꿈을 꾸는 걸까, 그리고 손톱은 왜 빠지고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홍지인은 꿈에서 얻은 단서를 토대로 나름의 조사를 벌이는데, 정말로 꿈 속에서 자신이 되어 있었던 고문기술자 등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꿈과 달리 고문기술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앞으로 고문기술자가 죽게 될 걸 암시하는 예지몽을 꾼 것일까? 의문은 정체불명의 노숙자가 홍지인 앞에 등장해 '라만고'라는 말을 전하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데, 인도네시아 전설에 등장하는 라만고는 손톱을 먹는 자를 뜻한다.

 

손톱이 부러졌거나 아예 빠져본 사람이라면 그 머리끝까지 온통 곤두서는 듯한 통증을 기억할 수 있을 텐데, <손톱>은 말 그대로 신경 하나하나까지 날카롭게 찌르는 손톱이 빠질 때의 아픔과 불쾌감이 살아 있는 공포소설이다. 페이지마다 홍지인의 불안과 혼돈스런 심리가 생생해 독자 역시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가 공포를 느끼는 배경이 꿈 속이라는 것도 탁월한데, 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기에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악몽과 손톱이 빠지는 이유를 홍지인과 그녀의 지인들이 밝혀나가는 미스터리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어 뒤가 궁금해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하이라이트는 홍지인의 유일한 버팀목들인 세준과 민경에게서 어두운 그늘을 발견하는 후반부.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혼란스런 처지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하지만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을 꾸고 손톱이 빠져,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홍지인의 마지막 손톱이 빠지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 결말 부분은 살짝 아쉽다.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손톱이 다 빠지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알게 될 거라는 정보를 주긴 했지만 홍지인이 정말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공들여 미스터리 플롯을 구축했건만 기다려보면 진상이 나온다는 결말일 줄이야. 그렇다면 홍지인이 애써 찾아다닐 필요없이 처음부터 그냥 손톱이 다 빠지기만 기다리면 됐던 것 아닌가. 공포소설이지만 미스터리 소설의 플롯을 깊이 차용한 작품답게 홍지인이 그녀와 관계된 비밀을 여러 가지 단서 속에서 추리를 통해 밝혀냈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 스즈키 고지의 걸작 중의 걸작 <링>처럼 말이다. 또한 라만고의 실체가 약간 복잡해 홍지인과 그녀의 꿈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에게 각각 달리 작용하는 구석도 있어 뒷맛이 아주 개운치는 않다. 영화로 만들어질 작품이라는데 라만고라는 복잡한 존재를 필연적으로 축약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야심을 다소 버리고 소박하게 각색하는 건 어떨지 싶다.

 

누가 쓴 소설이든 간에 완벽한 만족감을 주기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테고, <손톱> 역시 잘 쓴 부분과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이 공존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됐는데, 악인의 재생과 정화라는 테마에서 김종일 작가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매스컴을 매일매일 장식하는 살인, 강간, 유괴 등 악의 소용돌이를 보며 그저 한숨만 짓고 절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김종일 작가는 반성과 재생을 통해 세상이 새로 태어나길 바라는 희망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손톱>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독자들이 잠시나마 생각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가장 큰 작가의 행복이 아닐런지. 예전에 여동생이랑 싸울 때 여동생이 손톱을 쓰면 엄마가 혼을 냈다. 손톱으로 할퀴면 흉이 평생 간다고. 김종일 작가의 <손톱>도 그렇게 오래오래 남을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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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2-2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죠..^^이 작가 앞으로도 기대하게 될것같아요!!

jedai2000 2008-02-2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한국 공포소설계에서는 확실한 보증수표인 것 같아요. 하이 퀄리티 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