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국의 성 1 학생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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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 팬들이 가장 기다려왔던 선물이 드디어 도착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제4편 <여왕국의 성>이 제3편 <쌍두의 악마>에 이어 6년 만에 출간된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일본에서도 <쌍두의 악마>는 1993년에 나왔고, <여왕국의 성>은 2008년에 출간되어 무려 15년 만의 후속작이었다는 것.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도 일본과 비슷하게 어느 정도 텀을 맞춰주느라 일부러 6년을 기다린 걸까? 잘은 모르지만 일본보다 9년 앞당긴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개인적으로도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는 작은 인연이 있는데, 예전 출판사를 다닐 때 제2편 <외딴섬 퍼즐>을 담당 편집한 적이 있다. 그때가 2008년 봄이었지, 아마. 당시는 이미 <쌍두의 악마>는 일본에서 출간된 지 오래였고, <여왕국의 성>도 일본 출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외딴섬 퍼즐>은 물론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그전 출판사에서 이직하고 처음 작업한 책이라 꽤나 열의를 기울였는데 안타깝게도 판매가 썩 좋지 못했다. 게다가 <쌍두의 악마>와 <여왕국의 성>은 둘 다 2권으로 나와야 할 만큼 분량도 만만찮아 윗분들께서 시리즈 중단을 통보했었다. 편집자이기 전에 추리소설 마니아였기 때문에 내가 일을 잘 못해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여기서 끝나는구나 죄송했는데, 웬걸 나보다 훨씬 훌륭한 편집자님이 3편과 4편을 뚝심 있게 출간해주셔서 그저 반갑고 기쁠 따름이다.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여왕국의 성>의 아리스가와 아리스이다. 특이한 이름이라 필명임을 짐작케 하는데, 본명은 우에하라 마사히데. 이 작가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두 가지 시리즈로 잉크밥을 먹고 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화자이자 왓슨 역을 맡는 추리소설가 아리스(저자와 동명)가 범죄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고, <여왕국의 성>이 포함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화자이자 왓슨 역을 맡는 추리소설가 지망 대학생 아리스(저자와 동명)가 28살 늙다리 선배(이지만 명탐정) 에가미 지로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다. '아리스'라는 이름이 많이 나와 처음 보시는 분들은 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아무튼 두 시리즈의 화자인 작가 아리스와 대학생 아리스는 둘 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라 작가 아리스가 쓰는 추리소설이 '학생 아리스 시리즈', 학생 아리스가 쓰는 습작 추리소설이 '작가 아리스 시리즈'라는 재미있는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쉽게 설명하려 했으나 왠지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여왕국의 성>과 인연이 없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제일 독특한 특징이라면 주인공들이 전부 대학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추리소설 연구회 대학생들이 엠티만 갔다 하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김전일'스러운 전개의 원조 격이다. 화자 아리스가 신입생이었던 여름방학 엠티 때는 화산 분화로 고립된 산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월광게임>), 2학년 때는 신입 회원으로 들어온 어여쁜 여대생 마리아의 할아버지가 소유한 섬에서 또 연쇄살인이 벌어지고(<외딴섬 퍼즐>), 2학년 2학기 때는 전작에 얽힌 모종의 사정으로 상심한 마리아가 틀어박힌 산중의 예술가 마을에서 또또 연쇄살인이 벌어진다(<쌍두의 악마>). 이쯤 되면 여행이라면 신물이 날 법도 한데 지치지도 않고 떠나는 녀석들이 더 대단할 지경이다. 아무튼 아리스가 3학년이 된 <여왕국의 성>에서는 UFO와 외계인을 숭상하는 신흥 종교 교단에서 또또또 발생하는 연쇄살인에 맞서는 추리소설 연구회의 경천동지할 활약이 펼쳐진다. 화자 아리스와 그가 짝사랑하는 마리아, 허당 선배 콤비 오다와 모치즈키, 부드럽고 섬세한 인품의 소유자이면서 뜻밖의 놀라운 추리력도 겸비한 에가미 지로. 멤버 모두가 대학생이다 보니 자연스레 경쾌한 분위기와 코믹한 만담, 미묘한 사랑 이야기 등 청춘소설로서의 싱그러움도 아울러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추리소설들이 별로 가지지 못한 작가 아리스 시리즈만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진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5편에서 끝낼 계획이라고 오래전부터 밝혔는데, 아마 평범한(?) 대학생들이 잇달아 연쇄살인에 휘말리는 이야기는 다섯 개까지가 한계라고 본 것 같다(나는 솔직히 두 개도 많다고 생각한다ㅎㅎ). 그렇다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리소설 스타일은 어떨까? 그야말로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등 고전적인 퍼즐 추리소설을 현대에 계승한 정통파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특히 엘러리 퀸의 영향을 많이 받아 논리를 강조하는 축이며 퀸의 전매특허인 소거법으로 추리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영락없이 퀸과 판박이이다. 아야쓰지 유키토도 그렇고, 요즘 인기 있는 마야 유타카 같은 추리소설가는 범인의 의외성 측면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완벽한 페어플레이어라서 용의자로 한정한 인물 외의 범인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이 작가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편히 먹고 용의자 명단을 살펴가면서 하나하나씩 아닐 것 같은 사람을 지워나가라. 그러다 보면 (운이 좀 받쳐주면) 범인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난점이랄까, 예전만큼 오늘날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단서 수집 장면과 용의자들과의 기나긴 탐문이 지루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살해 현장을 오가면서 핵심 단서를 수집하고, 용의자들과 대화를 거듭하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본격 추리소설에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이 장면들이 액션과 스릴에 치중하는 요즘 독자들에겐 너무 느린 템포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분량을 대폭 줄여 사건 해결과 직결되는 단서만 적는다면 단번에 답이 나오게 마련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해결과 상관없는 가짜 단서와 쓸데없는 증언들 속에 진짜를 살짝 숨겨두어야 독자들이 속아 넘어갈 게 아닌가. 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바로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들을 대학생으로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단서 수집과 탐문 장면이라도 대학생들이 찢고 까불고 만담을 하면 그래도 좀 더 유쾌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며, 미묘한 연애 감정이나 20대 초반 순수한 젊은이가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단상 같은 내용들이 조사 중에 더해지면 꼭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에 유독 책이나 영화 얘기, 지방의 역사, 음식 등 잡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을 웬만큼 읽은 나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큼 흥미롭게 단서 수집과 탐문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본격 추리소설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이 소설의 번역자 또한 자타 공인 아리스가와 아리스 마니아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설에도 참 공을 들였는데, 결정적인 트릭에서 살짝 문제가 되는 부분까지 양심적으로(?) 밝혀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나도 읽으면서 이 부분은 조금 그렇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서도 조금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트릭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치명적인 결함까지는 아니고 살짝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고만 보면 될 것 같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단어가 있다. 여행, 동아리, 사랑, 우정 등등... 이런 멋진 테마들을 본격 추리소설에 잘 녹여내 즐거운 읽을거리를 만들어낸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감탄해 개인적으로도 살짝 흉내내본 바가 있다. 물론 결과물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신작 <여왕국의 성>을 읽으면서 또다시 한 수 배운 느낌이다. 특히 조연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그러한데, 에가미 지로와 마리아, 아리스 등의 주연 캐릭터는 당연히 핵심적인 내용을 담당하지만 개그를 담당하는 오다와 모치즈키는 어디 그런가. 조금만 시선을 거두면 병풍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두 개그 캐릭터를 위해 멋진 탈출 장면까지 만들어주면서 조연들도 충분히 뛰어놀 여지를 만들어준 수법은 정말 교묘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왕국의 성>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에게 있어 여러 추억과 과제, 배울 점 등을 떠올리게 만든, 영감을 주는 멋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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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6-12-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잘 읽었습니다.
이 작가의 책은 아직 읽어본적은 없지만 잘 정리해주셔서 도움이 많이되네요 참고하겠습니다.



jedai2000 2016-12-27 17:20   좋아요 0 | URL
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가가 장난도 좋아하고, 설정도 복잡해 설명이 넘 어려워진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도움이 됐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1권의 핵심 트릭이 일본어의 특징을 이용한 다잉메시지라 1권은 저희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지만 2권부터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기회되시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쭈니 2016-12-2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일미 막 읽기 시작했을때
제다이님 추천도서 보고 구입하기도하고 읽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책 많이 알게됐습니다.
늦었지만 감사인사라도 드려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뻑 ^^

jedai2000 2017-01-13 01:20   좋아요 0 | URL
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쓴 리뷰가 266편이 넘는데 문득 그걸 쓴 시간을 생각해보니 편당 1시간만 걸렸다고 쳐도 266시간이더라고요(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걸립니다ㅠ.ㅠ). 인생의 많은 부분을 투자한 셈인데 쭈니님처럼 제 추천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그만한 보람이 없습니다. 큰 힘과 용기 얻고 내년에도 더욱 리뷰에 매진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리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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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크리피> 이후 오랜만에 읽은 공포소설이다. 코미디만큼이나 호러도 각 나라의 문화적인 토양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서양에서 날고 긴다는 공포물을 봐도 뜨뜻미지근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전설적인 <링>이나 <검은 집>, 영화 <주온> 등 일본의 공포물은 비교적 한국에서도 잘 먹히는 것 같다. 같은 동북아시아권이라 생활상이나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비슷해서일까? 아무튼 이번에 소개할 <리카>라는 작품이 제2회 일본 호러 서스펜스 대상작이라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았다. 일본산 호러에다 문학상 수상작이라면 아무래도 기본 이상은 할 확률은 높으니까. 무심코 한밤에 반쯤 읽다가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어 책장을 덮고 말았다. 모든 게 잠든 한밤중에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괴이한 잡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무서워서 버틸 수가 없었다. 실체를 알고 나면 고작 전자제품이나 바람소리 등에 불과하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공포가 최고조에 달해 예사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음 날 환한 오전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국가대표 쫄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작품을 새벽 2시경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야밤에 공동묘지로 느긋하게 산보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소감을 말하기 전에 무심코 공포소설은 참으로 권선징악적(?)이고, 체제수호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카>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공포물은 주인공이 꼭 하지 말라는 짓을 하거나 비도덕적인 일을 할 때 단죄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대학생들이 놀러갔을 때 몰래 얼레리꼴레리를 하는 커플이나 만취할 정도로 술을 먹고 마약을 하는 녀석들은 저승에 이미 한 발짝을 걸친 셈이다. 그 밖에 외딴 곳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낯선 자를 태워주거나 절대 열지 말라고 써 있는 책을 펼쳤다면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빌어라. 하긴 어렸을 때도 엄마가 곱게 방 치우라고 하면 어디 말을 듣는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눈에 불을 켜며 소리소리 질러야 겨우 말을 듣지. 그런 의미에서 공포소설 작가들은 본질적으로 몽둥이를 든 엄마와 마찬가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쁜 짓하면 흉악한 꼴을 당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공포소설 주인공들은 꼭 나쁜 짓을 해서 벌받는 사람만 나와야 할까? 뭐 아닌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도 밟아 죽이지 않는 훌륭한 인격자가 원인도 모른 채 희생양이 되면 읽는 독자들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는 당할 만한 놈이 당해야 보는 독자들도 마음 편히 책장을 넘길 수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 그렇게 쓰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리카>에서 주인공이 당하는 이유는 인터넷 채팅 때문이다. 사랑스런 외동딸을 두고 아내와도 큰 문제가 없는 40대의 중년 가장이 우연히 인터넷 채팅에 발을 들이면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채팅에 빠져들면서 낯선 여자들을 꼬시는 도입부가 전체 360페이지 중에서 1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제법 분량이 긴데, 이 부분은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흥겹게 묘사되어 있어 책장이 바람개비처럼 훌훌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채팅으로 여자 꼬득여본 일이 한 번도 없어 한 수 배우는 느낌으로 묘하게 정독이 되더라. 아무튼 주인공은 채팅으로 십 수 명의 여자와 교류하며 그중 한 명과는 얼레리꼴레리도 성사시키는데 내가 정말 부러워서...흠흠. 작가가 도입부를 이렇게 밝게(?) 처리한 이유는 당연히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면도 있을 테고, 또 중반부터 그가 겪는 지옥도와의 대비를 강렬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전반부가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후반부의 고통을 겪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인 낙폭이 훨씬 클 테니까. 절찬리에 채팅을 하던 주인공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얼레리꼴레리(이 표현이 이상하게 남발되네)를 하고 이 짓을 접자, 하고 마지막으로 공을 들이던 상대가 있다. 조금 소심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다른 여자들보다 좀 의존적인 성격 같지만 천성적인 상냥함이 있는 간호사의 이름이 바로 '리카'.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얼레리꼴레리(또!)를 하기 직전, 리카가 조금 이상하다. 하룻밤 새 전화를 20통 이상 하는가 하면 집으로 괴이한 팩스를 보내고 몰래 사무실에 잠입해 스크린세이버를 바꿔놓는다. 짐작하겠지만 주인공이 이 여자, 이상하구나 싶어 연락을 딱 끊으려 했을 때가 바로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리카는 역대 어느 소설에도 나온 적 없는 최강의 스토커였으니 말이다.

 

 

대략 이런 줄거리이다. 본격적으로 리카가 활동하는 시점부터는 비교적 여성 스토커가 나오는 공포소설의 정석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으나 템포도 빠르고 순간순간 섬찟한 장면들이 연속되어 단숨에 책장을 덮게 만든다. 편집자 출신이라는 작가는 배경 묘사나 분위기보다 사건 위주로 휙휙 이야기를 전개시켜 요즘 인기 있는 인터넷소설 같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다. 데뷔작 <리카>가 대단히 히트해 10년 만에 속편 <리턴>도 나왔다는데, 아마 <리카>에서 10년 동안 성장한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주얼적인 면에서나 성격적인 면에서나 '리카'라는 존재가 주는 압도감이 있어 <링>의 '사다코'처럼 속편 및 영상화도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는 괜찮은 상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치는 박력과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충격적인 공포 장면들이 공포소설 애호가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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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14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요! 야밤에 공동묘지가 무섭지않은 1인!^^
근데 얼레리꼴레리가 뭘까요~^^ 대따 궁금해!!^^

jedai2000 2016-12-14 15:40   좋아요 1 | URL
막상 야밤에 공동묘지 가시면 무서우실 걸요ㅋㅋ 솔직히 끝까지 못 다녀오신다에 만 원 걸겠습니다ㅎㅎ

얼레리꼴레리는 참 남자에게 좋은 건데...뭐라 설명할 말이 없네요^^;;;

[그장소] 2016-12-14 21:41   좋아요 0 | URL
음..그럼 제가 만원 벌었네요! 확실히 공동묘지를 저는 밤에 가는게 좋거든요! ㅎㅎㅎ
사람도 없고..적요하고 얼마나 편안한데요! ^^

남자한테 좋은 , 마늘입니까? ( 아닌가? 그 무슨 광고가...퍼뜩!!)

jedai2000 2016-12-15 02:50   좋아요 1 | URL
헐, 진심이신가요? 혹시 공동묘지 근처에 사세요? 국가대표 쫄보인 저는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꼭 만 원 드리겠습니다ㅎㅎ

남자한테 참 좋은 건...그 광고에서는 아마 산수유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적다고 합니다만 얼레리꼴레리가 잘만 되면 남녀 모두 좋은 경우도 있긴 할 겁니다^^;;

[그장소] 2016-12-15 04:29   좋아요 0 | URL
어릴때 공동묘지를 거쳐 학교를 다녀 그런가봐요. 거기 분위기 전 좋아해요. 겨울엔 특히 ~^^ 여름엔 반디불이도 잔뜩보고요!^^
제가 미스터리 심령썰렁물을 상당히 애호하거든요!^^ ㅎㅎㅎ

산유수 ㅡ 아! 핫!^^ㅋㅋ

jedai2000 2016-12-19 17:45   좋아요 1 | URL
낮에도 공동묘지 가면 무서운데 어렸을 때부터 단련하셔서 겁이 없어진 거로군요. 그장소님 학교 친구들은 전부 귀신 잡는 해병대이겠어요ㅎㅎ 귀신들도 먹고살려면 좀 겁에 질려줘야 하는데, 그장소님 만나면 걔네들도 당혹스럽겠는데요^^

기회가 되면 제가 꼭 미스터리 심령썰렁물을 써보겠습니다!!!

[그장소] 2016-12-19 23:03   좋아요 0 | URL
ㅎㅎ그러게요. 귀신이 무서워야 하는데, 사실 사람이 더 무서우니 신기하죠?

꼭 꼭 심령썰렁물 ㅡ부탁드려요!^^
 
유곽 안내서 - 제137회 나오키 상 수상작
마쓰이 게사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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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에서 이 책을 샀는데, 마침 계산대에 젊은 아가씨가 서 있어 책을 내미는 손이 무지 부끄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유곽 안내서>라는 제목만 보면 영락없이 어디 유곽이 괜찮고, 어디 아가씨가 예쁘고 잘해준다(?)는 걸 알려주는 안내서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인터넷으로 살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며 서점을 나왔다. 그런데 사실 요즘 우리나라 전통(?) 유곽은 거의 멸종 단계라서 굳이 안내서가 필요하진 않을 듯하다. 내가 쭉 살아왔던 인천에도 전국구로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진작에, 나머지 하나는 동네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영업이 원활하지 않다고 한다(난 도대체 이런 걸 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_-??). 아무튼 전성기 때는 대단했다던 파주나 평택도 최근에는 끝물이라 하니 몸 파는 여인들을 쇼윈도 아래에 전시하다시피 해서 손님을 맞는 속칭 '정육점' 방식의 유곽은 이미 시효를 다한 것 같다. 다만 밑천이 안 드는 이 장사(?)는 유사 이래 인간사회에서 없어져본 적이 없으니 사라진 유곽 대신 오피나 안마방 같은 신종 성매매로 대체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렷다.

 

 

마쓰이 게사코가 지은 이 책의 원제는 <요시와라 유곽 안내서>이다. 지금 제목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요시와라'가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대규모 유곽을 이르는 말이므로 제목만 봐도 시대소설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요시와라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유녀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하게 '안내'하는 일종의 교양서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접대나 청년 성공과는 큰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유흥을 접해본 일이 거의 없어 솔직히 이쪽 풍경에 제법 흥미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웬만하면 이런 이야기 다 흥미로워하지 않는가(개인적인 호기심을 남성 일반으로 확대하여 면죄부를 꾸미는 중). 뭐 그런 이유로 대단히 몰입하며 읽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대히트했던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처럼 인터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인터뷰어가 요시와라에 직접 찾아가 관련자들을 하나씩 인터뷰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터뷰를 받는 사람 중에는 요시와라의 일급 기루 사장도 있고, 손님으로 찾아간 사람도 있고, 심지어 유곽에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뱃사공도 있다. 모종의 일로 이번에 최초로 요시와라에 발길을 들인 인터뷰어는 이곳에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대변하는 존재라서 처음에는 요시와라의 운영 방식이나 유녀들의 등급 체계, 유녀들의 생활상, 손님을 받는 시스템 등 보편적인 정보를 얻는 일부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자들과 스텝을 맞춰주는 것이다. 책이 중반쯤 지나 인터뷰어와 독자들이 어느 정도 요시와라에 익숙해졌을 때 저자는 얼마 전 이곳에 일어났던 '대사건'을 언급하며 슬그머니 분위기를 띄운다. 요시와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녀들을 부르는 명칭 '오이란'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가쓰라기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인 것 같은데, 시원하게 다뤄주지 않으니 독자들은 애가 탄다. 이쯤 되면 요즘 아이돌같이 어마어마한 인기에 카리스마도 대단했던 가쓰라기와 그녀가 벌인 대사건이 알고 싶은 나머지 단숨에 끝까지 독파하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남자로서의 호기심이 이 책을 읽게 한 일등 동기지만 막상 다 읽고 나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대개 집안이 가난해 6-8세에 팔려온 소녀들이 유녀로 키워져 운 좋게 낙적(부잣집에 팔려가는 일)되지 않는 한 살아서 나가기 힘든 곳이 요시와라였으니 말이다사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음속 깊이 원해서 그런 일을 할 여자는 하나도 없을 텐데 오죽 현실이 녹녹치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포기하겠는가. 아무튼 요시와라는 철저하게 여성들을 착취하는 공간. 인기 있는 오이란이 금방 돈을 모으면 나갈 게 뻔하니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놓는데, 그건 요즘도 절찬리에 통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래저래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요시와라를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고, 하룻밤 인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녀와 손님 사이의 야릇한 풍정 등 풍속소설로서의 맛도 충분히 주고 있다. 짧은 분량에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점층시키는 기법을 잘 활용해 가독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재미가 있으니 꼭 일독해보시라. 마지막으로 <유곽 안내서>가 남자들에게 농락당하기만 하는 불쌍한 유녀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독서를 포기할 여성분들이 있을까 봐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이지면 가쓰라기는 그렇게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그만큼 그녀가 벌인 '대사건'은 남성 위주의 에도사회에 던진 통쾌하고 장렬한 한 방이었다!

 

 

세상은 유곽이 거짓말투성이라고 하네만, 사실 이곳만큼 남자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도 없지. 아하하, 그거야말로 이 세상의 진실인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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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쟁 세트 - 전5권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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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다. 물론 대다수의 역사소설은 권수가 무척 많은지라 자주 붙잡을 수 없고, 또 슬프게도 오랜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만큼 만족스러운 역사소설도 그리 왕왕 눈에 띄지는 않아 1년에 한두 편에 불과하지만. 언제 역사소설을 읽고 싶으냐면, 저녁 밥값을 고민할 때나 장바구니에 넣어둔 물건을 살까 말까 줄기차게 재는 상황에서 주로 생각난다. 다시 말해, 팍팍한 현실에 움츠러든 내 모습이 싫어지는 순간 억눌린 내 마음은 장쾌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달음박질 쳐가는 것이다.

 

역사소설은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얘기다. 그래서 역사 속 실존인물들의 행보를 가슴이 터질 만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충신열사, 재자가인, 장삼이사, 기군역적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인간 드라마를 때로는 감탄하며 혹은 비분강개하며 죽 감상하면 되는 일이다. 소설보다 실제 있었던 일이 더욱 흥미롭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나고, 게다가 오늘날의 삶에 충분히 되살릴 수 있는 교훈까지 제공하고 있으니 읽어서 손해 볼 걱정이 없다.

 

역사소설이 이렇게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지만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를 생각해보면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3할이 사실이요, 7할이 허구라는 <삼국지> 등의 중국 고전이나 일본의 역사소설 거장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을 주로 읽어왔는데, 남의 나라 역사만 줄기차게 들고파는 것도 물론 장점이 있겠으나, 먼저 우리 것을 알고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다른 나라의 뛰어난 역사소설에 버금가거나 혹은 능가하는 작품을 쉽사리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김성한의 <칠년전쟁>은 과장을 조금 보태 내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일독의 가치가 있는' 우리의, 우리만의 역사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국어 교과서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90년대 중고교 교과서에는 김성한의 <바비도>나 <오분간> 등의 단편이 실려 있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작가가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을 소재로 소설(<바비도>)을 썼다는 게 이채로웠는데, 이른바 '순문학'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첨예한 역사적 순간을 배경으로 삼았던 걸 보면 원래 역사에 예리한 감각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인 듯하다. 실제로 60년대에는 영국에서 역사학을 정식으로 공부했고, 작가생활의 말년에는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다룬 <칠년전쟁>을 이 시기, 김성한의 대표작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가. <칠년전쟁>의 핵심이라 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백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까지 몰리다가 수군대장 이순신이 분전해 일본군을 쳐부수어서 전쟁이 끝났다, 이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전쟁이 7년 동안 지속된 것도 몰랐고, 정유재란이라는 일본군의 2차 침공에 대해서도 깜깜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대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내가 너무 얕보는 건가)? 임진왜란이 동북아 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대전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무지는 가슴 아픈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은 각자의 이익과 자구를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있는 처지니까. 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과거의 전쟁을 자세히 알면, 그 공부 속에서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어 향후의 전략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나온 김성한의 <칠년전쟁>이 요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전5권으로 된 <칠년전쟁>의 각권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1권에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부리자, 조선과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먹고 사는 쓰시마(대마도) 도주 이하 신하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서서히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막후에서 펼쳐지는 이 치열한 외교전은 임진왜란을 다룬 어느 매체에서도 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마침내 20만 일본 대군의 침공이 시작되는 2권에서는 문치주의를 숭상해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왕, 선조가 명의 국경과 맞닿은 의주까지 피난을 갈 정도였으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전쟁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전라도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그들의 보급망을 끊어버리는 조선의 반격이 3권의 줄거리다. 이즈음 선조는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지난한 노력 끝에 마침내 명의 파병 승인을 이끌어낸다. 명나라의 원군과 조선군의 합동작전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친 일본군이 서울에서 방어선을 치며 전쟁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한편 명에서는 희대의 걸물 심유경이 등장해 삼국의 화평을 중계하여 크게 한탕을 할 계획을 세운다. 민간에서 땅 한 뙤기 파는 것만 중재해도 구전이 떨어지는 판국에 항차 나라 간의 거래를 성사시키면 그 이득이 어떻겠는가. 4권은 이 화평회담에 얽힌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대미의 5권에서는 결국 화평회담이 결렬되고, 재침공한 일본군(정유재란)은 다시 위세를 북돋우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본국으로 철수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퇴각 과정에서 최후까지 적을 추격하던 명장 이순신은 전사하고 만다.

 

대강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양상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제시된다. 게다가 이건 그저 줄거리일 뿐, 실제 책을 읽으면 그 압도적인 정보량과 정교한 당시 정세의 묘사에 마치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10년에 걸친 작가의 자료 조사와 치밀한 고증에 힘입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국의 궁정과 초유의 사태에 고뇌하는 고관대작, 전쟁의 참상에 신음하는 민간 등 어느 곳이라도 소홀히 다뤄지는 법 없이 고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 때로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전국을 멀찍이서 조망하는가 하면, 가끔은 다큐멘터리 8밀리미터 카메라로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들고 찍는 등 변화무쌍한 서술 방식이 일품이다.

 

아무래도 역사소설은 과거를 다루다 보니, 당대의 고색창연한 대화법이나 뜬구름 잡는 고담준론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 독서를 방해한다고 투덜대는 분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칠년전쟁>은 그렇지 않다. 인물 간의 대화는 대개 두 줄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짧으며 점잔빼는 꾸밈이나 꿈지럭거리는 서두 없이 꼭 필요한 핵심만 제시된다. 대화에 있어서는 일부 리얼리티를 벗어난 형국이지만 그만큼 속도감이 넘치며 독자들이 대화 속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도 훨씬 수월하다.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날렵한 묘사는 꼭 인물의 대화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에도 적용되는데, 빠르고 날렵하여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조선, 일본, 명의 수많은 인사들이 등장해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지만 각각의 인물이 거대한 풍경에 매몰되는 일 없이 오롯이 개성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특히 이순신)의 무조건적인 장점만 보는 신격화나 적군이랍시고 사람의 형상을 한 악마 식으로 묘사하는 유치한 이분법도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방불케 하는 화법으로 무지몽매한 군신을 일깨우는 정승 정유길의 지혜, 초일류의 군인다운 청결한 고상함과 기품을 지닌 이순신, 비록 전쟁에는 나왔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평화를 갈구하는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 히데요시의 미친 야욕을 진심으로 믿고 진군 또 진군하는 전쟁중독자 가토 기요마사, 물건을 사고파는 시시한 장사치가 아니라 나라를 거래해 천금을 희롱하려는 명나라의 심유경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전술한 대로 이들 군상들이 이합집산하며 펼치는 인간 드라마가 <칠년전쟁>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유독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각 군의 분포도와 주요 전장의 형세에 얽힌 지도 등 소규모 전투의 양상을 통찰할 수 있는 자료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안에서 펼쳐진 전쟁이라 한국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전쟁의 세부도가 들여다보인다. 예컨대 경상도 전역을 제압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도로 침투하려 하는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목줄이 바로 진주여서 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이 진주를 둘러싸고 치열한 교전이 몇 차례에 걸쳐 펼쳐진다. 만약 다른 나라의 전쟁이라면 이곳이 핵심 장소니 어쩌니 해도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 잘 모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금 안 된 얘기지만 <칠년전쟁>의 주요 전장은 대개 우리가 잘 아는 곳이라서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점에서도 편하다.

 

아주 허접한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의 책 속에는 으레 교훈이 있게 마련이고, <칠년전쟁> 같이 좋은 책에는 당연히 더 많은 교훈이 있다. 예컨대, 전쟁을 잘 모르는 군신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에게 총공세를 지시해 수군을 전멸시킨 일화를 통해서는 농사는 농사를 잘 아는 농부에게, 전쟁은 전쟁을 잘 아는 군인에게 맡기라는 소박한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화평회담을 이끌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불사한 심유경의 파멸을 통해서는 비록 뜻이 좋다 해도 큰일에 있어서는 역시 신의가 중요하다는 교훈도 느꼈다. 무엇보다 '무능한 지배자는 만번 베어 죽여도 부족하다'는 말이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일 테지만. 결국 한 권의 책에서 3할을 얻을 것인지, 절반을 취할 것인지, 작가가 의도한 전부를 얻을 것인지는 개인의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결정될 테니 부디 뜻 있는 독서를 하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칠년전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직접 전쟁(6. 25)을 경험한 작가만이 쓸 수 있는 휴머니즘에의 갈구였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백성들이 수도 없이 일본군은 물론이고, 도와주러 온 중국군의 손에도 죽어나갔다. 작가는 그 참상을 낱낱이 묘사해 하늘 아래 더는 이러한 인면수심의 지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다. 비록 적장이지만 7년 내내 평화를 위해 막후에서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 고니시 유키나가, 그와 작가 김성한이 왠지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부질없는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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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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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다 끝나가는 이맘때, 올해는 어떤 일이 있었나 생각해본다. 좋은 소식, 기쁜 일들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유감스럽게도 2009년은 늘 우리 곁에서 밝게 빛나고 길잡이가 되어주던 소중한 사람들이 우리를 아주 떠나간 슬픈 기억이 유달리 많은 것 같다. 고통받는 서민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노무현 대통령이나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 신의 영역과 맞닿은 음악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우리 지구와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심은 마이클 잭슨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비록 지금 언급한 위인들만큼 유명하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니지만, 평생을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희망과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삶과 죽음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듯하다.

 

전쟁통인 1952년에 태어나 올해 5월 9일 별세한 장영희 교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다(과거형으로 써야 하는 게 못내 가슴 아프다). 하지만 헌신적인 부모님의 보살핌 덕에 국내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서강대 영문과를 무사히 졸업했다. 지금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불편한 구석이 너무 많은 대한민국이거늘 하물며 아직 전혀 사회 전반이 정비되지 않았던 1970년대에 그런 성취를 얻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뉴욕 주립대와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곧 귀국해 모교에서 교편을 잡아 수많은 학생들을 길러냈다. 그러는 틈틈이 장미같이 화려하진 않아도 들꽃처럼 은은한 문장과, 장애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유쾌하고 진솔한 필치의 수필을 잡지에 기고해 당대의 문장가 중 한 명이라는 친사도 받았다. 하지만 좋지 않은 운명이 이대로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인지, 유방암으로 3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했고, 겨우 이겨냈다 싶더니 이번엔 척추암으로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내 탓, 네 탓, 심지어 부모 탓까지 하며 현재의 암울한 현실에 그저 좌절만 하기 일쑤인 요즘의 나약한 사람들 속에서 장영희 교수는 희망과 용기의 전도사로 칭송받아 마땅한 '슈퍼 히어로'인 것 같다. 남들이 천형이라 부르며 안타까워 하는 온갖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하고 재주가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고,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써내려간 글이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데 자신이 왜 불행한 사람이냐고 되물었던 장영희 교수. 매일매일 바다 냄새를 닮은 아침 냄새를 맡고, 하트 모양 비슷한 푸르른 나뭇잎과 꽃을 볼 수 있어 자신은 천형이 아닌 천혜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진심을 담아 토로하는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온 천지를 순식간에 밝게 비추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유성처럼 짧아서 더 아름다웠던 사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이런 장영희 교수의 유고 수필집이다. 어제까지 있던 건물이 오늘 사라지고, 어제 인사했던 친구를 오늘 볼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풍파가 많은 세상을 그동안 무사히 살아낸 게 이미 기적이니, 앞으로도 그 기적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암투병 동안에 쓴 글들이라지만 어느 한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찾을 수 없고, 한 사람의 선생님으로서, 누군가의 이모나 딸로서, 그리고 수필가로서 평소에 겪고 느꼈던 소소하고 정겨운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이미 높은 성취를 이룬 문인인데도, 약속에 잘 늦고, 가끔 퉁명스럽게 구는 게 고민인 그녀의 이야기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만큼 아, 나도 그러는데 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고 마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들의 끝에는 힘든 삶을 이겨낸 그녀만의 깊은 지혜와 통찰, 용기와 희망 등이 오롯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흥을 준다.

 

수필가로서 장영희 교수의 글은 수필을 쓰고 싶어하는 분들께 꼭 추천드리고 싶은 미덕으로 가득하다. 일단 쉽게 쓴다는 것. 영미 문학의 권위자면서도 전혀 어려운 비유나 비비 꽈서 멋부리는 문장 등을 쓰지 않는다. 물리, 수학 등 모르는 게 없는 석학부터, 힘든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뭐 읽을거리가 없나 찾는 주부, 삶이 힘들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수까지 누가 읽어도 이해가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진리 중 하나가 바로 알기 쉽게 쓰는 게 난해한 문장 쓰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거다. 장영희 교수는 이 진리를 알고 쓰는 글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미덕으로 그녀의 솔직함을 꼽고 싶다. 대학 교수로서의 체면이나 사회적 명사의 위치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쪼잔하고 때로는 뒤틀린 자신의 감추고 싶은 마음까지도 가감없이 종이 위에 담아, 보다 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솜씨에 감탄하고 말았다. 먼저 자기가 속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어차피 그저 그런 교훈담을 늘어놓을 거잖아" 하며 굳게 닫힌 불량독자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무장해제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 외에는 잘 읽지 않지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분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게 바로 기적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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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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