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은 코로나로 거의 외출을 못한 덕분에 어느 때보다 많은 신간 추리소설을 읽었다. 그래서 다섯 편만 꼽기 너무 힘들었고, 아쉽게 순위에서 밀린 작품들이 눈에 밟히지만 그동안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다섯 편만...실은 베스트를 다섯 개 이상 뽑으면 써야 할 글 분량이 늘어나는 게 끔찍해서 어쩔 수 없이^^;;

5위 <어리석은 자의 독> - 우사미 마코토









처음 읽어보는 작가의 책이었는데 가독성이 굉장했다. 물론 이건 우사미 마코토라는 작가가 글을 잘 써서이기도 하지만 '수기' 형태의 소설만이 주는 몰입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여름, 나는 사람을 죽였다'라는 첫 머리로 시작하는 소설과 '딩동, 택배 왔습니다' 하고 시작하는 소설 중 어느 것에 더 흥미가 쏠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읽는 내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호기심에 도저히 책장을 놓을 수 없었는데, 틈틈이 앞으로의 끔찍한 파국을 예감케 하는 서술이 들어가 결말까지 달음질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친해진 생년월일이 같은 두 여자가 남긴 수기는 그녀들이 접하는 공통의 사건을 각각의 시선에서 묘사하면서 점차 빠진 부분을 더해가고 끝에 가서 결국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퍼즐은 두 여자의 '생년월일이 같다는 데서'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지만 독자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어둡고 비극적인 사연들도 넘쳐난다. 절대적인 빈곤과 시대적인 아픔 속에 잉태된 '독'과 '악'의 씨앗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발아하는지 통렬하게 그려내는 결말은 가히 압도적. 무엇보다 다 읽고 보면 수기 속에 은근슬쩍 남겨진 복선들이 굉장히 많음을 깨닫게 되는데, 차근차근 복기해서 하나하나 맞춰보는 쾌감이 짜릿했다. 여러모로 굉장히 교묘하게 잘 쓴 미스터리이며, 특히 2부에서 쇠락한 탄광 마을의 묘사는 공들인 취재가 작품을 얼마나 빛나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될 것 같다. 여담이지만 2부에서는 탄광 마을의 일본 사투리를 번역가가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했는데 네이티브 경상도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굉장히 수준이 높은 것 같다. 보통 사투리를 잘 모르는 작가들은 어미만 '~했노', '~했나' 식으로 처리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를 곁에서 생생하게 듣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졸고를 집필할 때 사투리에 자신이 없어 아직까지 사투리를 쓰는 인물을 등장시킨 적이 없는데 만약 쓰게 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4. <살인범 대 살인귀> - 하야사카 야부사카










외딴 섬에서 연속살인이 벌어지는 본격 추리소설의 왕도적 전개를 펼쳐 보이는 작품인데, 닳고 닳은 이 장르에서 이 작품만의 킬링 포인트는 '살인범'과 '살인귀' 두 명이 각각의 이유로 두 갈래의 연속살인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뻔한 장르에 독특함 한 스푼을 추가시켜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작가의 영리함이 돋보인다. 나는 미스터리 소설을 크게 엔터테인먼트 계열과 메시지 계열로 나누는데, <살인범 대 살인귀>는 엔터테인먼트 계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본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작가는 아주 새로운 구석은 없다. 여러 곳에서 자주 쓰인 트릭들을 재활용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게 너무도 무지막지해서 오히려 흥겨울 지경이다. 예컨대 한 추리소설에서 범인에게 이어지는 단서나 트릭은 보통 3~4가지 정도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작가가 구상하기도 어렵고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독자들도 싫어한다. 하지만 하야사카 야부사카 작가는 줄잡아 10개 정도의 트릭과 단서를 범인을 특정하는 데 사용한다. 물론 '살인범' 하나를 특정하는 데만 그렇다는 얘기고, '살인귀'에게도 그만큼의 분량을 할애한다. 한마디로 설명 파트에서 20개 정도의 트릭과 단서가 줄줄이 제시되면서 독자들에게 다다다다 기관총을 쏘는 것이니 본격 추리소설 팬들에게 이보다 황홀한 순간이 또 있을까 싶다. 거울 장난이나 왼손, 오른손잡이 등 대부분 어디서 많이 봤던 것이지만 하여간 양이 많으니 뭔가 배불리 먹은 기분이다. 물론 뻔한 것만 팔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둘 중 한 사람이 '희생자들을 선택하는 이유'에는 완전히 감탄했다. 근래 연속살인물 중에서 이보다 더 창의적인 동기는 못 본 것 같고, 한국어로도 비슷한 착상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노인문제나 영아살해 같은 사회적인 내용을 담는 메시지파 작품들은 그 주제의 무게만큼이나 좋은 평을 받을 확률이 높은데, 순전히 유희적인 추리소설이라도 이 정도로 화끈하게 잘해내면 그 못지않게 상찬을 받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3위 <녹슨 도르래> - 와카타케 나나미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립탐정을 병행하는 '히무라 아키라'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레이먼드 챈들러에 경도된 하라 료가 챈들러처럼 극도의 과작을 선보이고 있기에 현재로서는 일본 정통 하드보일드 계열 미스터리를 단독으로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와 손자의 집에 세를 든 히무라 아키라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는 별명답게 화재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에 걸쳐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사소해 보이는 의뢰로 출발해 거대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는 고전적인 하드보일드의 주제에, 'Seek & find'라는 하드보일드의 방법론까지 충실하게 구사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새로운 장소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점차 최종 결론을 향해 가는 이런 스타일은 용의자를 한 방에 몰아넣고 계속 증언만 청취하는 본격 추리소설과는 다른 흥취가 있다. 탐정이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마다 1인칭 화자인 탐정만의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볼 수 있어 한층 공감이 더해지며 몰입감도 높아진다. 요즘 유행하는 엽기범죄나 독특한 특수설정이 전혀 없이 담백하지만 볼수록 은은하게 잘쓴 소설이다. '녹슨 도르래'라는 제목의 의미가 밝혀지는 결말도 근사하고 전체적인 미스터리 구조도 짜임새가 훌륭하며 곳곳에 설치한 단서나 복선도 신중하게 배치되었다. <녹슨 도르래>에 X선을 쬐면 하드보일드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뼈대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그만큼 단정하고 튼튼한 수작이다.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인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챈들러풍의 서구 하드보일드와 가장 구별되는 지점은 츤데레스럽고 툴툴대면서도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 아키라의 인간미일 것이다. 게다가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생활감도 기존의 하드보일드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대목이다. 하드보일드의 구조와 형태를 잘 분석한 뒤 작가 자신만의 개성을 가미한 이 시리즈가 계속 이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작가'로 남는 것도 꿈이 아닐 것 같다.

2위 <스완> - 오승호










총기소유가 일상화된 서구와 달리 아시아권에서는 총기 난사사건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스완'이라는 거대 쇼핑몰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으로 시작되는 도입부가 유독 시선을 제압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20명 넘게 사망한 이 초유의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람들에게 한 장의 초대장이 날아든다. 각자의 기억을 공유해 그날의 진실을 밝혀보자고...데뷔작 <도덕의 시간>이 크게 인상 깊지는 않았지만 오승호 작가의 독자를 이끌고 가는 파워는 주목할 만했는데, <스완>에서는 더욱 완숙해졌다. 조금씩 정보를 제공하다가 딱 흥미로운 지점에서 잠깐 끊고 다음을 기약하니 책을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요즘 드라마처럼 끊기 신공이 절묘한데 스토리텔러로서의 이 감각은 타고난 재능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미스터리가 풀린 후반부에서도 결정적인 한 가지 비밀은 남아 있었다. 이 비밀이 풀리는 최후반부에서 무릎을 쳤다. 상식적으로 그것밖에 답이 없는데 왜 깨닫지 못했을까 깊이 안타까웠다. 메시지에 더해 <도덕의 시간>에선 조금 아쉬웠던 미스터리 소설의 근원적인 재미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할 수 있었으리라. 주제 면에서는 미증유의 사건을 접한 주인공들이 순간순간의 절박한 상황에서 내린 판단들에 대해 집중력 있게 들여다본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지 말걸 하는 각자의 후회들이 꼬리를 물고,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쉽게 늘어놓는 비난들에 가슴이 무너지는데 생존자들은 말 그대로 생과 사가 오가는 찰나의 상황에서 그때그때 최선으로 느껴지는 일들을 했을 뿐이다. 처음 겪어보는 사태에 멘탈이 나가는 게 당연한데도 상식과 논리를 내세우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요즘 세태에 꼭 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결말은 조금 타협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온갖 비난 속에서도 백조처럼 다시 한 번 날아오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먹먹한 감동을 주었다.

1위 <거울 속은 일요일> - 슈노 마사유키









나온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뛰어난 반전으로 간간이 회고되는 <가위남>으로 성가를 높인 슈노 마사유키의 간만의 신작이다. 소라고둥을 닮은 범패장이라는 건물에서 살해된 불문학 교수의 살인사건을 다룬 과거와 깔끔하게 해결된 그 사건을 재조사하는 현재가 교차되는 구성이다.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1인칭 화자의 넋두리가 때때로 삽입되어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작가의 익숙한 트릭도 만나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더욱 완숙해져서 진상을 제대로 추리할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 사건이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한 트릭이라 살짝 실망했지만 그건 예고편에 불과하고 진짜 해답 파트에서는 작가의 장기인 독자를 혼비백산하게 하는 반전이 몇 번이나 튀어나와 본격 미스터리 팬으로서의 만족도는 최상급에 달한다. 불문학과 프랑스어 등이 자주 나오다 보니 왠지 프랑스 예술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는데 왠지 현학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듯한 그 느낌도 너무 좋았다.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수상하고 이미경 CJ부회장이 봉 감독이 말하는 방식, 웃음, 스타일, 유머 등 모든 것이 좋다고 한 소감처럼 나 역시 이 소설의 모든 것이 그냥 좋았다. 특히 명탐정 캐릭터는 일본 추리소설에 등장한 명탐정 중에서 단연코 제일 매력적이라 할 만했다. 자신만만한 모습, 사려 깊은 모습, 사랑스러운 모습 등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 이 탐정을 계속 만나보고 싶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은 책장을 다 덮었을 때 폭풍처럼 밀려오는 문학적 여운에 있다 할 것이다. 그동안의 추리소설에서는 사건이 해결되면 명탐정은 다음 사건을 기약하며 기분 좋게 떠나가지만 이 책에서의 명탐정은 여기서 끝이다. 모종의 이유로 더 이상 사건을 맡을 수 없으며, 과거 본인이 해결했던 사건들도 철없을 때의 옛 추억쯤으로 여기는 모습이 쓸쓸하기 그지없어 인상에 깊이 남았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의 매듭도 쾌도난마처럼 끊어버리는 초인 명탐정의 비애를 담아내는 이런 추리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더구나 본격 미스터리는 전 세계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장되어가는 장르이다. 그 장르에 신명을 바쳐 봉사한 명탐정의 퇴역, 게다가 실제로 저자가 별세하기까지 했으니 <거울 속은 일요일>의 쓸쓸한 정서는 더욱 배가된다. 퇴장의 미학이랄까,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뛰어난 본격 추리소설적 트릭이 우아하게 융합되었다. 미스터리 소설 팬으로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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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22-10-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를 너무 잘 읽엇습니다.
1위 거울속의 일요일은 읽으셨을때의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거 같네요
5권 다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