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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평점 :
여름의 <크리피> 이후 오랜만에 읽은 공포소설이다. 코미디만큼이나 호러도 각 나라의 문화적인 토양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서양에서 날고 긴다는 공포물을 봐도 뜨뜻미지근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전설적인 <링>이나 <검은 집>, 영화 <주온> 등 일본의 공포물은 비교적 한국에서도 잘 먹히는 것 같다. 같은 동북아시아권이라 생활상이나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비슷해서일까? 아무튼 이번에 소개할 <리카>라는 작품이 제2회 일본 호러 서스펜스 대상작이라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았다. 일본산 호러에다 문학상 수상작이라면 아무래도 기본 이상은 할 확률은 높으니까. 무심코 한밤에 반쯤 읽다가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어 책장을 덮고 말았다. 모든 게 잠든 한밤중에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괴이한 잡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무서워서 버틸 수가 없었다. 실체를 알고 나면 고작 전자제품이나 바람소리 등에 불과하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공포가 최고조에 달해 예사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음 날 환한 오전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국가대표 쫄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작품을 새벽 2시경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야밤에 공동묘지로 느긋하게 산보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소감을 말하기 전에 무심코 공포소설은 참으로 권선징악적(?)이고, 체제수호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카>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공포물은 주인공이 꼭 하지 말라는 짓을 하거나 비도덕적인 일을 할 때 단죄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대학생들이 놀러갔을 때 몰래 얼레리꼴레리를 하는 커플이나 만취할 정도로 술을 먹고 마약을 하는 녀석들은 저승에 이미 한 발짝을 걸친 셈이다. 그 밖에 외딴 곳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낯선 자를 태워주거나 절대 열지 말라고 써 있는 책을 펼쳤다면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빌어라. 하긴 어렸을 때도 엄마가 곱게 방 치우라고 하면 어디 말을 듣는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눈에 불을 켜며 소리소리 질러야 겨우 말을 듣지. 그런 의미에서 공포소설 작가들은 본질적으로 몽둥이를 든 엄마와 마찬가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쁜 짓하면 흉악한 꼴을 당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공포소설 주인공들은 꼭 나쁜 짓을 해서 벌받는 사람만 나와야 할까? 뭐 아닌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도 밟아 죽이지 않는 훌륭한 인격자가 원인도 모른 채 희생양이 되면 읽는 독자들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는 당할 만한 놈이 당해야 보는 독자들도 마음 편히 책장을 넘길 수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 그렇게 쓰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리카>에서 주인공이 당하는 이유는 인터넷 채팅 때문이다. 사랑스런 외동딸을 두고 아내와도 큰 문제가 없는 40대의 중년 가장이 우연히 인터넷 채팅에 발을 들이면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채팅에 빠져들면서 낯선 여자들을 꼬시는 도입부가 전체 360페이지 중에서 1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제법 분량이 긴데, 이 부분은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흥겹게 묘사되어 있어 책장이 바람개비처럼 훌훌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채팅으로 여자 꼬득여본 일이 한 번도 없어 한 수 배우는 느낌으로 묘하게 정독이 되더라. 아무튼 주인공은 채팅으로 십 수 명의 여자와 교류하며 그중 한 명과는 얼레리꼴레리도 성사시키는데 내가 정말 부러워서...흠흠. 작가가 도입부를 이렇게 밝게(?) 처리한 이유는 당연히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면도 있을 테고, 또 중반부터 그가 겪는 지옥도와의 대비를 강렬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전반부가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후반부의 고통을 겪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인 낙폭이 훨씬 클 테니까. 절찬리에 채팅을 하던 주인공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얼레리꼴레리(이 표현이 이상하게 남발되네)를 하고 이 짓을 접자, 하고 마지막으로 공을 들이던 상대가 있다. 조금 소심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다른 여자들보다 좀 의존적인 성격 같지만 천성적인 상냥함이 있는 간호사의 이름이 바로 '리카'.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얼레리꼴레리(또!)를 하기 직전, 리카가 조금 이상하다. 하룻밤 새 전화를 20통 이상 하는가 하면 집으로 괴이한 팩스를 보내고 몰래 사무실에 잠입해 스크린세이버를 바꿔놓는다. 짐작하겠지만 주인공이 이 여자, 이상하구나 싶어 연락을 딱 끊으려 했을 때가 바로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리카는 역대 어느 소설에도 나온 적 없는 최강의 스토커였으니 말이다.
대략 이런 줄거리이다. 본격적으로 리카가 활동하는 시점부터는 비교적 여성 스토커가 나오는 공포소설의 정석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으나 템포도 빠르고 순간순간 섬찟한 장면들이 연속되어 단숨에 책장을 덮게 만든다. 편집자 출신이라는 작가는 배경 묘사나 분위기보다 사건 위주로 휙휙 이야기를 전개시켜 요즘 인기 있는 인터넷소설 같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다. 데뷔작 <리카>가 대단히 히트해 10년 만에 속편 <리턴>도 나왔다는데, 아마 <리카>에서 10년 동안 성장한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주얼적인 면에서나 성격적인 면에서나 '리카'라는 존재가 주는 압도감이 있어 <링>의 '사다코'처럼 속편 및 영상화도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는 괜찮은 상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치는 박력과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충격적인 공포 장면들이 공포소설 애호가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