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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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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선배분의 눈이 빨갛다. 이유를 물어보니 너무너무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잤다는 것이다. 제목을 물어보니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였다. 평소 입싸고 귀엷기로 유명한 본인은 그렇게 재미있다니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매에 이르게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국내 작가의 소설이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국내의 유명한 작품들은 의무 방어전으로라도 전부 읽었었는데 알맹이없는 사색으로 독자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드는 사소설과 진부한 운동권 후일담 문학, 얼치기 페미니즘 작품들로 완전히 실망하고 국내 소설은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요즘 한국 문학이 위기라는데 제일 먼저 작가들이 반성을 해야 한다. 이름을 밝히기는 뭣하지만 주인공 발 묘사만 한 페이지 넘게 쓰는 작가도 보았다. 독자는 주인공 발톱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 주인공이 발을 딛어 외부 세계와 대면하며 그 과정에서 감동과 재미, 성찰을 제공하는 것을 원할 뿐이다.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수업 시간에도 몰래 책상 밑에서 책장을 넘기게 하는 그런 재미있는 책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한국 소설이 외면받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국소설을 별로 읽지도 않는 사람의 건방진 사설이었다. 어쨌든 다시 <카스테라>로 넘어가 보면, 무엇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총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집 형태인데 각각의 단편에 작가 특유의 환상적(?)인 현실 인식, 유머스런 너스레가 잘 섞여져 있어 읽는내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이 작품집은 새롭다. 박민규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보지만, 이 사람의 뇌를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이다. 표제작인 ‘카스테라’에서 1인칭 주인공은 전생에 훌리건이었지 모를 냉장고와 동거하다, 20세기는 사실 냉장의 역사임을 깨닫는다. 그는 냉장고에 소중하거나 해악을 끼치는 모든 것들을 집어넣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걸리버 여행기>가 들어간다. 소중하니까...두 번째는 아버지다. 간단히 말할 순 없지만 해악을 끼치니까...나중에는 미국도 들어가고 두 사람을 제외한 중국도 들어간다. 냉장고 안에 새로운 세계가 조성된 것이다. 다 집어넣고 한참 뒤에 냉장고를 열었더니 냉장고 안에는 카스테라 한 조각이 들어있을 뿐이다.

 

‘헤드락’이라는 작품에서 미국 유학생인 화자는 호두나무 아래에서 느닷없이 달려온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에게 헤드락을 당하고, 복수를 위해 몸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되갚는다. ‘대왕오징어의 기습’에서는 150m짜리 대왕오징어에게 전세계가 유린당하기도 한다. 마치 초딩(?)같은 분방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로 작가는 우리를 초대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평범한 주인공이 애써 현실을 넘어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현실과 환상이 공존한다. 예를 들어 세상의 온갖 쓴 맛을 본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주인공이 사우나에서 괴로워할 때,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너구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너구리는 주인공의 등을 밀어주며 그를 위로한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장면이지만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역시 세상에 좌절한 중년남자가 그의 등을 밀어주고 그를 위로했더라면 지금같은 작품의 감흥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구리니까 감동적인 것이다! 이런 현실과 환상의 평화공존은 답답한 세상의 현실에 찌들어 있는 독자들의 눈과 가슴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준다.

 

또한 이 작품집은 무지하게 웃긴다. 작가는 시침 뚝 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풀어놓는데 그 문장에 재치가 가득하다. 위에 언급한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보자.

 

어떤가? 잘은...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네. 내가 중학교 때 하던 오락일세. 그때는 이 너구리 기계가 연달아 열 대까지 놓여 있던 오락실도 있었지. 애들은 줄을 섰고 말이야.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너구리에 빠져 있었어.
좋은 시절이었지.

그럴 수도, 라고 나는 생각했다. 너구리와 중학생이 그토록 친했다면 확실히 나쁜 시절은 아니었을 테지.

 

이 대목을 읽을 때 지하철이었는데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여기서 가장 유쾌한 작품은 ‘야쿠르트 아줌마’이다. 상습적 변비 증후군에 걸린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힘을 주며 읽는 작품은 <농담 경제학사전>인데, 이 책의 첫머리에는 300년 전 멸종한 도도새의 이야기가 나온다. 배설물로 위치가 들통나 멸종의 위기에 빠진 도도새들이 론도, 르네, 드봉, 캄푸 등으로 배설물을 숨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풀어놓는 작가의 입담에 두손두발 다 들었다. (론도, 르네, 드봉, 캄푸가 무엇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길...참고로 유명한 도도새 사냥꾼들의 이름은 피구, 콘세이상 등 전부 포르투갈 국가 대표 선수들이다.)

 

농담이 앞에 붙기는 하지만 <경제학사전>이라는 진지한 권위를 작가는 정말 사전을 보는 것처럼 진지하게(그러나 말도 안 되는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며) 묘사하고 있다. 왜 우스운 이야기도 자기가 먼저 웃는 사람보다도, 자신은 진지하게 정색을 하며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지는 사람이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말이다. 참을 수 없는 진지함과 참을 수 없는 유머의 절묘한 조화로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웃음의 오르가즘을 안겨준다.

 

물론 이 작품집은 정신병자의 환각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나, 가벼운 유머에만 집중하는 작품은 아니다. 묘사는 환상적이지만, 작가가 인지하고 있는 세계는 다분히 현실적이다. 10편의 단편의 모든 주인공들은 사회적 약자이며, 현실에서 좌절을 경험하며, 지독한 가난에 빠져 있다. ‘갑을고시원 체류기’같은 작품의 고시원 묘사같은 부분들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지독한 현실감을 보여준다.

 

내가 박민규 작가가 마음에 든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보는 현실은 대책없이 낙관적이지도, 하염없이 비관적이지도 않다. ‘코리언 스탠더즈’에 등장하는 전직 운동권 인사는 국회의원 자리도 고사하며, 농촌으로 낙향해 농촌 운동을 한다. 종래의 우리소설에서는 이런 사람은 처음에 힘들어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집단 농장은 외계인의 공격을 받아 전부 파괴되고 만다. 곧은 마음을 가진 인격자가 항상 성공하는 세상은 아니라는 현실을 냉철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현실 인식이 칼같이 냉정하기만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보일 때가 많다. ‘아, 하세요 펠리컨’이라는 작품에서 전세계의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은 오리배(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오리배)를 타고 전세계를 여행하기도 하고, ‘야쿠르트 아줌마’에서 변비로 상징되는 세상 앞에 좌절한 주인공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나타나 돈도 안 받고(!) 야쿠르트를 주기도 한다.


작가가 아웃사이더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느낀 점을 대강 정리해 보았는데,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는 보다시피 아주 새롭고, 기이하며,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이다. 기존의 어떤 작가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이야기에 묘한 아픔을 담아 그만의 문장으로 작품을 완성해낸다. 물론 현재의 그 독창적인 문체는 재기발랄한 면은 강하지만, 그만큼 기품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자신만의 색깔이 있고 기백이 보이는 작가이니만큼 장점은 잘 살리고, 단점은 더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참으로 길게 썼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작품이니 꼭 읽어보시라고 진심으로 권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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