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왕국의 성 1 ㅣ 학생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11월
평점 :
일본 추리소설 팬들이 가장 기다려왔던 선물이 드디어 도착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제4편 <여왕국의 성>이 제3편 <쌍두의 악마>에 이어 6년 만에 출간된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일본에서도 <쌍두의 악마>는 1993년에 나왔고, <여왕국의 성>은 2008년에 출간되어 무려 15년 만의 후속작이었다는 것.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도 일본과 비슷하게 어느 정도 텀을 맞춰주느라 일부러 6년을 기다린 걸까? 잘은 모르지만 일본보다 9년 앞당긴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개인적으로도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는 작은 인연이 있는데, 예전 출판사를 다닐 때 제2편 <외딴섬 퍼즐>을 담당 편집한 적이 있다. 그때가 2008년 봄이었지, 아마. 당시는 이미 <쌍두의 악마>는 일본에서 출간된 지 오래였고, <여왕국의 성>도 일본 출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외딴섬 퍼즐>은 물론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그전 출판사에서 이직하고 처음 작업한 책이라 꽤나 열의를 기울였는데 안타깝게도 판매가 썩 좋지 못했다. 게다가 <쌍두의 악마>와 <여왕국의 성>은 둘 다 2권으로 나와야 할 만큼 분량도 만만찮아 윗분들께서 시리즈 중단을 통보했었다. 편집자이기 전에 추리소설 마니아였기 때문에 내가 일을 잘 못해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여기서 끝나는구나 죄송했는데, 웬걸 나보다 훨씬 훌륭한 편집자님이 3편과 4편을 뚝심 있게 출간해주셔서 그저 반갑고 기쁠 따름이다.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여왕국의 성>의 아리스가와 아리스이다. 특이한 이름이라 필명임을 짐작케 하는데, 본명은 우에하라 마사히데. 이 작가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두 가지 시리즈로 잉크밥을 먹고 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화자이자 왓슨 역을 맡는 추리소설가 아리스(저자와 동명)가 범죄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고, <여왕국의 성>이 포함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화자이자 왓슨 역을 맡는 추리소설가 지망 대학생 아리스(저자와 동명)가 28살 늙다리 선배(이지만 명탐정) 에가미 지로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다. '아리스'라는 이름이 많이 나와 처음 보시는 분들은 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아무튼 두 시리즈의 화자인 작가 아리스와 대학생 아리스는 둘 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라 작가 아리스가 쓰는 추리소설이 '학생 아리스 시리즈', 학생 아리스가 쓰는 습작 추리소설이 '작가 아리스 시리즈'라는 재미있는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쉽게 설명하려 했으나 왠지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여왕국의 성>과 인연이 없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제일 독특한 특징이라면 주인공들이 전부 대학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추리소설 연구회 대학생들이 엠티만 갔다 하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김전일'스러운 전개의 원조 격이다. 화자 아리스가 신입생이었던 여름방학 엠티 때는 화산 분화로 고립된 산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월광게임>), 2학년 때는 신입 회원으로 들어온 어여쁜 여대생 마리아의 할아버지가 소유한 섬에서 또 연쇄살인이 벌어지고(<외딴섬 퍼즐>), 2학년 2학기 때는 전작에 얽힌 모종의 사정으로 상심한 마리아가 틀어박힌 산중의 예술가 마을에서 또또 연쇄살인이 벌어진다(<쌍두의 악마>). 이쯤 되면 여행이라면 신물이 날 법도 한데 지치지도 않고 떠나는 녀석들이 더 대단할 지경이다. 아무튼 아리스가 3학년이 된 <여왕국의 성>에서는 UFO와 외계인을 숭상하는 신흥 종교 교단에서 또또또 발생하는 연쇄살인에 맞서는 추리소설 연구회의 경천동지할 활약이 펼쳐진다. 화자 아리스와 그가 짝사랑하는 마리아, 허당 선배 콤비 오다와 모치즈키, 부드럽고 섬세한 인품의 소유자이면서 뜻밖의 놀라운 추리력도 겸비한 에가미 지로. 멤버 모두가 대학생이다 보니 자연스레 경쾌한 분위기와 코믹한 만담, 미묘한 사랑 이야기 등 청춘소설로서의 싱그러움도 아울러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추리소설들이 별로 가지지 못한 작가 아리스 시리즈만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진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5편에서 끝낼 계획이라고 오래전부터 밝혔는데, 아마 평범한(?) 대학생들이 잇달아 연쇄살인에 휘말리는 이야기는 다섯 개까지가 한계라고 본 것 같다(나는 솔직히 두 개도 많다고 생각한다ㅎㅎ). 그렇다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리소설 스타일은 어떨까? 그야말로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등 고전적인 퍼즐 추리소설을 현대에 계승한 정통파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특히 엘러리 퀸의 영향을 많이 받아 논리를 강조하는 축이며 퀸의 전매특허인 소거법으로 추리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영락없이 퀸과 판박이이다. 아야쓰지 유키토도 그렇고, 요즘 인기 있는 마야 유타카 같은 추리소설가는 범인의 의외성 측면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완벽한 페어플레이어라서 용의자로 한정한 인물 외의 범인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이 작가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편히 먹고 용의자 명단을 살펴가면서 하나하나씩 아닐 것 같은 사람을 지워나가라. 그러다 보면 (운이 좀 받쳐주면) 범인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난점이랄까, 예전만큼 오늘날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단서 수집 장면과 용의자들과의 기나긴 탐문이 지루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살해 현장을 오가면서 핵심 단서를 수집하고, 용의자들과 대화를 거듭하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본격 추리소설에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이 장면들이 액션과 스릴에 치중하는 요즘 독자들에겐 너무 느린 템포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분량을 대폭 줄여 사건 해결과 직결되는 단서만 적는다면 단번에 답이 나오게 마련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해결과 상관없는 가짜 단서와 쓸데없는 증언들 속에 진짜를 살짝 숨겨두어야 독자들이 속아 넘어갈 게 아닌가. 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바로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들을 대학생으로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단서 수집과 탐문 장면이라도 대학생들이 찢고 까불고 만담을 하면 그래도 좀 더 유쾌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며, 미묘한 연애 감정이나 20대 초반 순수한 젊은이가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단상 같은 내용들이 조사 중에 더해지면 꼭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에 유독 책이나 영화 얘기, 지방의 역사, 음식 등 잡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을 웬만큼 읽은 나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큼 흥미롭게 단서 수집과 탐문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본격 추리소설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이 소설의 번역자 또한 자타 공인 아리스가와 아리스 마니아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설에도 참 공을 들였는데, 결정적인 트릭에서 살짝 문제가 되는 부분까지 양심적으로(?) 밝혀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나도 읽으면서 이 부분은 조금 그렇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서도 조금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트릭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치명적인 결함까지는 아니고 살짝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고만 보면 될 것 같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단어가 있다. 여행, 동아리, 사랑, 우정 등등... 이런 멋진 테마들을 본격 추리소설에 잘 녹여내 즐거운 읽을거리를 만들어낸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감탄해 개인적으로도 살짝 흉내내본 바가 있다. 물론 결과물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신작 <여왕국의 성>을 읽으면서 또다시 한 수 배운 느낌이다. 특히 조연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그러한데, 에가미 지로와 마리아, 아리스 등의 주연 캐릭터는 당연히 핵심적인 내용을 담당하지만 개그를 담당하는 오다와 모치즈키는 어디 그런가. 조금만 시선을 거두면 병풍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두 개그 캐릭터를 위해 멋진 탈출 장면까지 만들어주면서 조연들도 충분히 뛰어놀 여지를 만들어준 수법은 정말 교묘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왕국의 성>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에게 있어 여러 추억과 과제, 배울 점 등을 떠올리게 만든, 영감을 주는 멋진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