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5위. 성녀의 구제
'갈릴레오' 유가와 교수 시리즈 제4작. 다른 추리소설가들과 달리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독 시리즈 캐릭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3편 이상의 작품에서 활약한 캐릭터가 작가의 페르소나 가가 형사, 그리고 유가와 교수가 유일하다. 이중 가가는 직업 자체가 실제 사회에서 진짜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다 보니 사건의 배경이나 동기가 좀더 현실적이고, 수사관, 용의자, 사건 관계자의 심리도 공감이 가는 구석이 많다. 또한 간간히 사회 문제도 건드리고. 반면 유가와 교수는 추리소설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들어보고 싶은 고전적인 명탐정 캐릭터에 가깝다. 다소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품을 지녔지만 추리력만큼은 초인적인. 그래서 유가와가 다루는 사건도 다소 현실감을 희생하더라도 추리소설 세계에서는 흔히 통용되는 트릭과 논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성녀의 구제> 역시 다른 건 다 제쳐놓고 트릭이 가장 빼어나다. 전작 <용의자 X의 헌신>의 핵심 트릭이 살인이 일어난 시각을 조작하는 알리바이 공방이었다면, <성녀의 구제>도 마찬가지. 다만 비슷한 알리바이 조작을 전작과 정반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릎을 쳤다. 트릭이 하도 기발해 자려고 누웠는데도 푸슬푸슬 웃음이 새어 나오더라. 어떻게 이런 역발상을! 게이고의 특징 중 하나가 <변신> <분신> 등 제목에 많은 내용을 담아내는 것인데, <성녀의 구제>도 과연 그렇다. 책을 다 읽고 '구제'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면 오슬오슬 소름이 돋을 것이다. 누군가 우스개로 한 '석녀의 구제'라는 말도 틀리진 않다^^
4위. 붉은 손가락
미소녀 게임이나 피규어에 미쳐 7살 소녀를 유괴하고 살인한 중학생 소년이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치매로 이성을 잃은 자신의 노모(소년의 할머니)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을 세운다. 어차피 노모는 심신미약 상태이므로 범인으로 몰려도 감옥에 갈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필 가가 형사가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게 문제다. 범죄와는 인연이 없던 평범한 중년 남자가 형사들 사이에서도 수사가 뛰어나기로 정평 난 가가를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범인의 시점과 형사의 시점이 교차하며 서술되는 일종의 도서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서 가장 미약해 보이는 인물이 뜻밖에 놀라운 판단력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작위성이 엿보이지만, 가가와 범인 사이의 숨막히는 공방전은 물론 가가가 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단서들이 균형 있게 배분되어 읽는 동안은 그런 약점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으면 보통 힘을 빼고 가볍게 쓰는 게이고의 필치와 달리 메시지나 트릭, 완성도 면에서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 작가도 자신을 대표하는 시리즈라고 생각하는 듯.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와 달리 가가 형사 시리즈는 각 권이 철저하게 독립적이라는 데 있다.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는 전작에 나왔던 조연들을 다음 편에도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만든다거나,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속편을 보는 것 같은 익숙함을 내세운다. 하지만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는 그런 게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잠자는 숲>에서 가슴이 터질 듯한 로맨스를 선보였음에도 다음 편에는 그 일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냥 가가는 여전히 독신이다, 한마디 설명으로 땡. 전작의 설정들에 이어서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유혹을 무시하고 매번 새로운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켜 시리즈 중 어느 작품을 읽어도 참신하니 참말로 대단한 수완가가 아닐 수 없다.
3위. 용의자 X의 헌신
나오키상 수상작. 다섯 번이나 물을 먹고 이 작품으로 겨우 수상했다. 또한 후쿠야마 마사히루, 시바사키 코우 등의 올스타 라인업으로 영화화되기도 하는 등 2000년대 게이고의 최대 히트작으로 봐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교수와 대학 시절부터 그가 유일하게 손꼽던 적수, 즉 수학의 달인 이시가미의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필자는 바둑을 두는 법을 모르지만 바둑의 고수들은 상대의 앞수를 예측하고 그에 맞게 수를 두면, 상대는 그다음 수를 예상하고 , 그걸 또 앞서 계산하는 등 나중에는 한 판 전체가 머릿속에서 돌아간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결 또한 그렇다. 라이벌보다 한 수를 더 생각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상대가 마침내 돌을 던지게 만들기 위한 두 사람의 팽팽한 지략 대결이 최대의 재미 포인트. 개인적으로는 게이고의 단골 남자 주인공인 사랑에 목 매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신파형 캐릭터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당대의 순애 코드와 맞아떨어져 이토록 대성공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묘사가 별로 없고, 설명보다는 대화가 많은 게이고의 스타일에 따라 걸리는 부분도 없이 술술 잘 읽힌다. 하긴 워낙에 미친 속도감을 자랑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읽다보면 어느새 끝이라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장점들이 많은데, <용의자 X의 헌신>도 재독할수록 참 짜임새가 있고, 곳곳에 복선이나 단서를 교묘하게 잘도 깔아놓았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최고의 장점은 아무래도 범인의 성격에 걸맞는 트릭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추리소설을 보면 얘가 범인인 건 알겠는데, 그간 묘사한 범인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범죄의 양상에 흥이 떨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의 범인 이시가미가 공들여 짠 트릭의 목적이나 방법 등은 앞서 묘사된 그의 성격과도 정확하게 일치해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한결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2위. 백야행
믿을 건 서로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사랑과 범죄의 연대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일본 사회의 변화상이나 기술 산업의 발전 양상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져 작가의 대표작 중에서는 조금 다른 지점에 위치하는 걸작이다. 직접적인 심리 묘사는 배제하고 대부분 두 남녀 주인공의 행동만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런 표현상의 난제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나 서로에 대한 질긴 사랑을 미묘하게 독자에게 전달해내는 작가의 테크닉이 발군이다. 내가 이만큼 널 사랑해, 하고 목놓아 외치는 것보다 때로는 말없이 상대의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장면이 더 깊은 사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백야행>이야말로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닐런지. 유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서까지 끊임없이 범죄에 몸을 담구는 두 주인공의 인생 항로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천변만화하는 시대상이 절묘하게 맞물려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책이다. 더구나 이 작품 역시 사랑 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는 한 여인과 그녀를 위해 평생을 음지에 숨은 채 그녀의 비밀스런 욕망을 돕기 위해 애쓰는 신파남이 등장한다. 이쯤되면 뇌를 해부해서 작가의 여성관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 이런 사회파 추리소설에 가까운 얘기 속에서도 게이고의 본격 트릭에 대한 본능이 여전한 것도 이채롭다.
1위. 악의
아직까지는 게이고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다.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집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인기 없는 아동문학가. 발견자는 작가답게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이번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는데, 마침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예전 고교 교사 시절의 동료였던 가가인지라 그에게 수기를 전달하며 사건에 참고하라고 한다(가가 형사가 교사를 그만둔 이유가 이 작품에서 설명된다). 수기를 꼼꼼이 읽은 가가는 몇 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는데...진범이 밝혀지는 건 책의 초반부. 진정한 문제는 범인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누군가가 타인의 목숨을 뺏고 그의 모든 성취를 망가뜨리려 획책하는 비열한 악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있었다. 단순한 추리 게임 같았던 초기 작풍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범죄 심리에도 눈을 돌린 현재의 게이고 스타일이 완성된 걸작. 수기와 실제 현장 상황을 비교해가며 진실에 이르는 물리적인 단서들과 수기에서 피어나는 정체 모를 위화감을 차근차근 분석해 범인의 진짜 목적까지 추출해내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뤄 일급의 재미를 선사한다. 우리 게이고가 변했어요, 하는 최초의 작품을 보통 <숙명>이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약간은 어설픈 면이 보였던 <숙명>보다는 <악의>가 진정한 게이고 문학의 신호탄이라 생각한다.
이상으로 내가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 10을 마친다. 일본도 그렇지만 국내에서 또한 추리소설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폭넓은 사랑을 받는 작가라 사실 굳이 또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잘하는 거 다 아는데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번이지 잘한다, 잘한다 자꾸 해봐야 역효과만 나는걸. 하지만 모든 작품이 순차적으로 나와 조금씩 성장해가는 작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초기작과 최신작, 대표작과 범작이 무차별로 쏟아져 나와 조금 저평가되는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이 작가는 처음부터 완성됐다기보다 꾸준히 쓰면서 탄탄해진 사람이라 확실히 떨어지는 초기작만 보고 이제 더 볼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오해하는 독자들도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말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거장의 필수 조건 중 한 가지를 다작으로 꼽는다. 초기에 반짝하다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작가 생활 후반기에는 집필보다 온갖 가십면에 더 많이 나오는 그런 사람보다는 무조건 쓰면서 느릿느릿이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는 작가야말로 나의 우상이라는 얘기다. 언젠가 먼 훗날, 게이고는 에도가와 란포-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계보를 잇는 일본 추리소설의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으리라 확신한다. 어쩌면 8부 능선쯤은 이미 넘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들을 그 수준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한 줄로 소개한다. 상품은 취향 때문에 아쉽게 베스트10에 들지는 못했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 작품, 중품은 재미만큼은 보장하는 작품, 하품은 시간이 남아돌면 읽으시길.
<상품>
<편지> - 아아, 너무 감동적이야...
<내가 그를 죽였다>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은 범인찾기 놀이. 용의자가 셋이라 난이도도 세 배.
<방황하는 칼날> - 소년범 문제를 다룬 서스펜스. 게이고 풍미가 남김없이 녹아 있는 수준작.
<옛날 내가 죽은 집> - 딱 하룻밤 새 벌어지는 그날 밤의 비밀찾기. 오싹한 분위기가 그만이라 게이고의 호러도 보고 싶다.
<잠자는 숲> - 모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최고의 마무리! Sooooooo Romantic!!!
<호숫가 살인사건> - 비뚤어진 부모들의 교육열을 다룬 사회파 터치의 작품. 이런 책을 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다른 게 별로 없다.
<도키오> - 게이고판 <백 투 더 퓨처>. 과거에서 만난 미래의 아들. 시간여행의 잔재미와 부자가 힘을 합쳐 모험에 나서는 줄거리가 훈훈한 성장소설.
<중품>
<탐정 갈릴레오> - 과학 모르면 추리소설도 보지 말라는 소리요!
<예지몽> - 유가와 교수 대단하네, 이런 것도 알고, 하고 박수치는 것 말고 독자가 추리할 여지가 별로 없다.
<방과후> - 데뷔작. 고무줄로 장난치는 전형적인 밀실 트릭.
<유성의 인연> - 하야시라이스만 기억난다.
<동급생> - 억지스런 기계 트릭이지만 청춘의 분위기만큼은 정말 사랑스럽다. 수준을 떠나 무척 좋아하는 작품.
<레몬(분신)> - 인간복제를 소재로 다룬 과학 서스펜스. 여운 있는 결말이 좋다.
<변신> - 뇌과학을 소재로 다룬 과학 서스펜스. 영화판에서 내 사랑, 너의 사랑 아오이 유우가 나왔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게이고는 단편은 그저 그렇다. 심지어 가가 형사가 나온다 해도.
<교통경찰의 밤> - 그래도 주제가 통일되는 연작 단편집은 좀 나은 편.
<환야> - 흥미롭지만 <백야행>을 똑같이 한 번 더 쓸 필요는 없었잖아.
<괴소소설> - 츠츠이 야스타카풍 풍자, 독설 소설집. 게이고는 은근히 이런 장르도 잘 소화한다.
<독소소설> - <괴소소설>과 동문.
<흑소소설> - <독소소설>과 동문.
<아내를 사랑한 여자> - 게이고도 여자를 모른다. 남성적인 작가 게이고가 오묘한 여자의 심리를 그려내기란 좀 어렵지.
<숙명> -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석궁 갖고 위험하게 노는 것 같던데.
<하품>
<회랑정 살인사건> - 굳이 우리나라에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브루투스의 심장> - 로봇을 등장시켜 우수한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정녕 아이작 아시모프밖에 없단 말인가.
<백마산장 살인사건> - 신사숙녀 여러분. 히가시노 게이고 골든 래즈버리 상 위너는 바로 이 작품입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게이고는 단편은 그저 그렇다. 심지어 가가 형사도 안 나오면 더 그렇겠지.
<11문자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패작(11문자임).
<아름다운 흉기> - 살인병기로 재탄생한 철인3종 경기 여성 선수. 철인3종 하지말고 그냥 시집이나 가지 그랬어.
<수상한 사람들> - 수상하게 시시한 단편집.
<사명과 영혼의 경계> - 2000년대 작품 중에서는 드문 졸작. 메디컬 서스펜스와는 맞지 않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