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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8
이종호 외 9인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의 책장을 끝까지 덮고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공포작가 10인의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 단편집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작가 연보를 보면 대부분 70년대 후반생으로(단 두 명만이 예외인데,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호호) 상당히 젊은 편인데 다들 내공이 만만찮았다. 실제로 인쇄된 책을 발간한 작가는 몇 명 되지 않고, 아마도 공포소설 마니아로 출발해 인터넷에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다 이번에 좋은 기회를 맞아 처녀작을 싣게 된 신진작가들이 많은 셈인데, 조성면 교수의 해설에 실린대로 마니아에서 작가로 성공적인 확대재생산이 이뤄지고 있는 공포소설의 전망이 몹시 밝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편집의 포문은 [몸]이라는 인간의 신체를 소재로 한 공포연작 단편집을 낸 김종일 작가의 <일방통행>이 연다. 집은 없어도, 빚을 내더라도 자동차는 가져야 대접받는 한국의 현실에서 그 많은 차들이 좁은 도로에 몰려 아수라장을 이루는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차로 인해 주인공이 겪는 온갖 짜증나는 상황들에 너무도 감정이입이 잘 되는 작품으로 도로야말로 가장 공포스런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평범한 한 인간이 자동차를 타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로 점점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는 수작 단편.
[은둔]은 권정은이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우발적으로 형을 죽이게 된 남자가 방 안에 은둔해 살고 있다. 형의 죽음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태에서, 마침내 세상으로 나갈 결심을 한 남자가 방문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분위기가 상당히 음산하고 조여오는 공포감이 일품이지만 뻔한 공포소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많아 약간 아쉬웠다.
신진오의 <상자>는 이번 단편집의 백미이다. 적어도 공포소설 분야에서는 반드시 기억할 만한 작가다. 한 부부에게 상자 하나가 배달되어 온다.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의 상자라 갖다 버리지만, 어느 순간엔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있는 상자. 태워도 소용없고, 쪼개도 소용이 없다. 어느 날, 부부간의 불화로 우발적인 살해를 저지른 남편은 아내의 시체를 상자에 넣고 버린다. 상자는 여느 때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지만 그 안에 든 아내의 시체는 어찌 될 것인가, 추측해보기 바란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을 초월하는 전개, 결말의 반전까지 깊이 탄복한 작품이다.
엄성용의 <감옥>은 불륜을 저지른 남자가 여자의 남편이 돌아오자 급하게 침대 밑에 숨은 다음부터 시작되는 짧은 이야기. 인상적인 공포의 한순간이 있지만, 다른 단편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난 점은 없다. <들개>는 여성의 시각에서 공포를 그리고 싶다는 우명희의 작품으로 도살장에서 괴물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는 불우한 아이가 살인마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엽기적일 정도의 하드고어 분위기가 돋보이나 이야기 전개에서 뛰어난 아이디어는 없는 것 같다.
최민호의 <흉포한 입>은 기괴한 정신병을 얻게 된 치과의사를 더욱 기괴한 방식으로 치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이야기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고, 누구나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치과치료에서 신체훼손의 모티브를 얻어 직접적인 공포감을 주고 있다.
장은호의 <하등인간>은 결말을 제외하면 공포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SF의 느낌이 나는 작품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그들은 모든 인간의 머리에 특별한 통을 씌워 소재지를 파악하며 지배의 도구로 삼는다. 대학가에서는 저항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연이어 벌어지는데...
<아내의 남자>는 한국의 스티븐 킹, 이종호의 작품이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한마디로 이중인격)를 바탕으로 잘난 아내에 대한 의처증과 불륜 드라마를 섞어 아주 흡입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보면 더욱 공포스러워지는 결말이 흥미롭다. 뻔한 불륜 소재로도 볼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모텔 탈출기>는 박동식 작가의 작품으로 이번 단편집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상황은 엽기적이고 끔찍하나 묘하게 희극적인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원조교제를 하러 모텔에 들어온 남자. 그런데 여자애가 욕실에서 미끌어져 저 혼자 죽어버리고, 출세가도가 보장된 남자는 난감해진다. 결국 남자는 여자애를 해체해 들고나갈 결심을 하는데...남자의 고생담은 정말이지 눈물 겨울 정도로, 이게 상상해보면 상당히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키득거리게 만드는 일종의 코믹 엽기 고어 호러로 작가의 재기가 돋보인다. 살짝 결말을 알려준다면 남자는 결국 모텔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팔란티어]로 굉장히 유명한 김민영 작가도 의학 공포소설로 참여했다. 그러나 사실은 로빈 쿡 류의 메디컬 스릴러에 가깝다. 짧은 분량에도 상당한 완성도가 엿보이는데, 조금 길게 늘여 장편으로 써도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수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며 신의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지 이 작품에서 만나보시길. 깊고 푸르고 공허한 결말이 일품인 암울한 이야기.
이상으로 열 편을 대강 살펴보았다. 단언코 작품들의 수준은 가장 못한 것도 일정 이상의 질을 담보하고 있을 정도로 그 수준들이 높다. 물론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들은 <일방통행> <상자> <아내의 남자> <모텔 탈출기> <깊고 푸른 공허함>이지만 다른 단편들도 못지않다는 이야기다. 직접 읽어보고 베스트를 꼽아보는 재미를 느껴보시길...그리고 출판사에서는 이런 뛰어난 공포 단편선을 매년 여름마다 이어나가, 이제 막 불길이 지펴지고 있는 공포소설 시장에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불러모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