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한 달 사이에 거의 5권이 나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온다 리쿠의 작품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 <흑과 다의 환상><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빼고는 국내에 나온 건 다 읽어본 셈인데, 재미있는 사람들 사이의 취향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두고 두 작품 이상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갈리더라 이거다. 어떤 작품은 좋고, 다른 작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고 그저 취향의 차이거니 해야지. 내 취향에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가장 좋았고, <네버랜드><여섯 번째 사요코>는 볼 만했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밤의 피크닉>은 그저 그랬다.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인 <빛의 제국>은 어땠냐고? 개인적으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같은 수준의 베스트고, 비미스터리 쪽에서는 최고로 꼽는다.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작품집은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며,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코노 일족의 사람들은 각각 다른 이의 기억을 읽어내기도 하고,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훤히 듣거나 보고, 바람처럼 날아다니기도 한다.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고 약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 수록된 10개의 이야기들은 그 내용과 이끌어가는 방식,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은근히 도코노 일족의 그림자가 휘감겨 있다. 다소 짧은 단편들이라 이야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작품집은 전체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몸 부분부분이 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것처럼, <빛의 제국>에 수록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도코노 일족의 빛과 어둠을, 그 머리를, 몸통을, 꼬리를 하나하나 보게 된다. 그렇게 모인 작은 부분들이 결국 하나의 전체를 이뤄 도코노 일족의 장엄한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 뒤표지에 '단편을 읽었는데, 이상하게 거대한 장편의 여운이 느껴진다'는 아마존 독자의 코멘트가 실려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거라고 믿으며, 본인도 크게 동감한다. 근래 들어 이렇게 거대한 여운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살아가다가, 남과 다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스러져가는 도코노 일족의 모습. 그럼에도 찬란한 빛을 꿈꾸며 다시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들이 다 좋지만 역시 표제작인 '빛의 제국'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독자들이 행간에서 도코노 일족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꾸민 단편들과는 달리 이 단편은 직접 도코노 일족에 얽힌 박해의 역사를 그린다. 태평양 전쟁 무렵 산으로 숨어 들어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민 도코노의 소년 소녀들과 일족의 지도자격인 두루미 선생님, 몇 명의 선생님들. 다들 상처를 안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지만 서로를 위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전황이 패색으로 짙어지자 그들의 초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총칼을 들고 산으로 찾아온 군인들. 군인들의 손에 하나둘씩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을 줄줄 흘려버렸다. 결국 다시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된 이 이야기에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만든 기도문만 처연하게 떠돈다.

 

"우리는 억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실수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빛이 드는 것처럼,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꽃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풀에 볼을 비비고, 바람에 머리칼을 나부끼며, 앨매를 따서 먹고, 별과 새벽을 꿈꾸면서 이 세상에서 살자. 그리고 언젠가 이 눈부신 빛이 태어난 곳으로 다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자."

 

10개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의 등장인물의 후일담이 다른 이야기에서 나오는 등 이어져 있는 것이 많으며, 도코노 일족 시리즈의 제2편 <민들레 공책>과 제3편 <엔드 게임>으로 확대되어 일종의 온다 리쿠표 '도코노 월드'를 이룬다. <빛의 제국>의 이야기들은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장편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소재가 흥미로우며 내용이 탄탄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총력전을 펼치는 심정으로 10개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는데, 이야기 만드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다 덮고 나면 눈 앞에 환한 빛으로 덮여 정확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몇 명의 도코노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그 빛은 따뜻한 느낌이 든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빛에 몸을 씻으며 돌아온 도코노 사람들, 그들을 더 알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8
이종호 외 9인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의 책장을 끝까지 덮고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공포작가 10인의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 단편집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작가 연보를 보면 대부분 70년대 후반생으로(단 두 명만이 예외인데,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호호) 상당히 젊은 편인데 다들 내공이 만만찮았다. 실제로 인쇄된 책을 발간한 작가는 몇 명 되지 않고, 아마도 공포소설 마니아로 출발해 인터넷에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다 이번에 좋은 기회를 맞아 처녀작을 싣게 된 신진작가들이 많은 셈인데, 조성면 교수의 해설에 실린대로 마니아에서 작가로 성공적인 확대재생산이 이뤄지고 있는 공포소설의 전망이 몹시 밝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편집의 포문은 [몸]이라는 인간의 신체를 소재로 한 공포연작 단편집을 낸 김종일 작가의 <일방통행>이 연다. 집은 없어도, 빚을 내더라도 자동차는 가져야 대접받는 한국의 현실에서 그 많은 차들이 좁은 도로에 몰려 아수라장을 이루는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차로 인해 주인공이 겪는 온갖 짜증나는 상황들에 너무도 감정이입이 잘 되는 작품으로 도로야말로 가장 공포스런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평범한 한 인간이 자동차를 타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로 점점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는 수작 단편.

 

[은둔]은 권정은이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우발적으로 형을 죽이게 된 남자가 방 안에 은둔해 살고 있다. 형의 죽음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태에서, 마침내 세상으로 나갈 결심을 한 남자가 방문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분위기가 상당히 음산하고 조여오는 공포감이 일품이지만 뻔한 공포소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많아 약간 아쉬웠다.

 

신진오의 <상자>는 이번 단편집의 백미이다. 적어도 공포소설 분야에서는 반드시 기억할 만한 작가다. 한 부부에게 상자 하나가 배달되어 온다.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의 상자라 갖다 버리지만, 어느 순간엔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있는 상자. 태워도 소용없고, 쪼개도 소용이 없다. 어느 날, 부부간의 불화로 우발적인 살해를 저지른 남편은 아내의 시체를 상자에 넣고 버린다. 상자는 여느 때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지만 그 안에 든 아내의 시체는 어찌 될 것인가, 추측해보기 바란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을 초월하는 전개, 결말의 반전까지 깊이 탄복한 작품이다.

 

엄성용의 <감옥>은 불륜을 저지른 남자가 여자의 남편이 돌아오자 급하게 침대 밑에 숨은 다음부터 시작되는 짧은 이야기. 인상적인 공포의 한순간이 있지만, 다른 단편들에 비해 그다지 특출난 점은 없다. <들개>는 여성의 시각에서 공포를 그리고 싶다는 우명희의 작품으로 도살장에서 괴물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는 불우한 아이가 살인마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엽기적일 정도의 하드고어 분위기가 돋보이나 이야기 전개에서 뛰어난 아이디어는 없는 것 같다.

 

최민호의 <흉포한 입>은 기괴한 정신병을 얻게 된 치과의사를 더욱 기괴한 방식으로 치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이야기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고, 누구나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치과치료에서 신체훼손의 모티브를 얻어 직접적인 공포감을 주고 있다.

장은호의 <하등인간>은 결말을 제외하면 공포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SF의 느낌이 나는 작품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그들은 모든 인간의 머리에 특별한 통을 씌워 소재지를 파악하며 지배의 도구로 삼는다. 대학가에서는 저항하는 학생들의 집회가 연이어 벌어지는데...

 

<아내의 남자>는 한국의 스티븐 킹, 이종호의 작품이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한마디로 이중인격)를 바탕으로 잘난 아내에 대한 의처증과 불륜 드라마를 섞어 아주 흡입력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보면 더욱 공포스러워지는 결말이 흥미롭다. 뻔한 불륜 소재로도 볼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모텔 탈출기>는 박동식 작가의 작품으로 이번 단편집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상황은 엽기적이고 끔찍하나 묘하게 희극적인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원조교제를 하러 모텔에 들어온 남자. 그런데 여자애가 욕실에서 미끌어져 저 혼자 죽어버리고, 출세가도가 보장된 남자는 난감해진다. 결국 남자는 여자애를 해체해 들고나갈 결심을 하는데...남자의 고생담은 정말이지 눈물 겨울 정도로, 이게 상상해보면 상당히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키득거리게 만드는 일종의 코믹 엽기 고어 호러로 작가의 재기가 돋보인다. 살짝 결말을 알려준다면 남자는 결국 모텔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팔란티어]로 굉장히 유명한 김민영 작가도 의학 공포소설로 참여했다. 그러나 사실은 로빈 쿡 류의 메디컬 스릴러에 가깝다. 짧은 분량에도 상당한 완성도가 엿보이는데, 조금 길게 늘여 장편으로 써도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수작이다.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며 신의 역할을 대신 수행한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지 이 작품에서 만나보시길. 깊고 푸르고 공허한 결말이 일품인 암울한 이야기.

 

이상으로 열 편을 대강 살펴보았다. 단언코 작품들의 수준은 가장 못한 것도 일정 이상의 질을 담보하고 있을 정도로 그 수준들이 높다. 물론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들은 <일방통행> <상자> <아내의 남자> <모텔 탈출기> <깊고 푸른 공허함>이지만 다른 단편들도 못지않다는 이야기다.  직접 읽어보고 베스트를 꼽아보는 재미를 느껴보시길...그리고 출판사에서는 이런 뛰어난 공포 단편선을 매년 여름마다 이어나가, 이제 막 불길이 지펴지고 있는 공포소설 시장에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불러모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복의랑데뷰 2006-12-15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내일 뵙겠군요. ^^ 내일 책들 들고 갈께요~

jedai2000 2006-12-1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세요. 재미있습니다. 이따 봐요. ^^ 그런데 책이라뇨? 아, <반도에서 나가라> 말씀하시는요. ^^
 
행복한 식탁
세오 마이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세오 마이코란 비교적 낯선 작가의 <행복한 식탁>의 띠지 홍보문구는 이렇다. '전 일본을 눈물로 적신 감동의 성장소설'이라는. 읽기 전부터 이 문구에 굉장히 긴장했었다. 이거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려야겠구나. 과연, 엄청나게 슬픈 소설이었다.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자살한 아빠로 인해 가정은 풍비박산이 난다. 오빠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빚쟁이들에 의해 탄광에 갇혀 일을 하다 진폐증에 걸리고, 엄마는 호스티스가 된다. 주인공인 중학생 사와코는 학교까지 쫓아온 빚쟁이들에게 망신을 당하며 감수성 여린 나이에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고 한다면 전부 거짓말이다.

 

다행히 이렇게까지 처절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랑말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자살을 기도하다 간신히 살아난 아빠로 인해 분위기가 무거워진 가정, 엄마는 아빠가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힘들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 집을 나가 혼자 산다. 천재인 오빠는 진지하기만 한 아빠가 삶의 커다란 무게로 인해 자살을 기도했다는 걸 깨닫고는, 자신도 같은 선택을 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일체의 진지함을 포기하고 설렁설렁 가볍게 모든 걸 대한다. 나 사와코는 중학생 소녀로 아빠의 자살 기도 당시 흘리던 피를 잊지못해 약간의 불안강박증을 얻게 되었다.

 

거의 붕괴 위기에 몰린 이 가족이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힘들 때면 서로를 보듬어주고 있음을 깨닫는 따뜻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 일본을 눈물로 적시기는 어렵겠고, 잔잔하고 포근한 느낌의 소설이다. 작가 세오 마이코는 현직 중학교 교사라고 하는데, 직업상 중학생 소녀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중학생 사와코가 겪는 일들, 내면 묘사를 그럭저럭 잘 포착하고 있는 것 같다.

 

4편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으로 편안하고 잔잔한 분위기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구미에 제법 맞을 것이다. 간혹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유머도 빈번히 등장하고. 다만 제26회 요시카와 에이지 신인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에 걸맞지 않게, 작가의 문장력은 다소 평범하고 어딘지 모르게 아마추어의 글을 보는 듯 했다. 가만히 보면 일본에는 문학상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상업적으로는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오키상, 아쿠타가와상, 야마모토 슈고로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미시마 유키오상...역량이 살짝 떨어지는 작가라도 수상작이라는 레테르를 둘러 자국과 해외에서 성공적인 세일즈를 하는 일종의 판매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독자들은 많고많은 유수의 수상작들 중에서 옥석을 잘 골라야 하는 피곤한 의무도 지게 된 셈이다.

 

<행복한 식탁>의 네 가지 이야기들에서는 가족의 의미와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매번 등장한다. 이를테면 꼭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해야만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형식일 뿐이다. 뭐 이런 식인데, 그 깨달음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사와코가 퍼뜩 깨닫는 식이다. 사와코는 그 어린 나이에 벌써 '돈오'의 경지를 깨우쳤는가. 한 마디로 대단하다. 이 작품에서는 사와코가 고등학교 1학년까지 진급하며 끝나는데, 내가 알기로 일본에서 후속편이 나왔을 것이다. 솔직히 후속편이 나온다면 볼 것 같다. 비록 <행복한 식탁>의 내용 곡절이 잔잔한 나머지 심심한 지경이고 작가의 문장이 매우 평범하다지만, 책장을 다 덮고 나면 이 4인 가족이 조금은 사랑스럽게 느껴지긴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밀리언셀러 클럽 50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위태롭고 불행한 일들의 시작이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아홉살 소녀 트리샤에게 일어난 일도 시작은 별 것 아니었다. 부모가 이혼을 한 덕에 엄마 밑에서 오빠와 자라는 트리샤. 그러나 오빠는 매사 불만투성이에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어서 자신을 아빠에게 보내 달라고 매양 엄마와 싸운다. 주말을 맡아 광활한 미국 북부의 애팔래치아 숲을 하이킹하러 온 트리샤 가족. 그러나 트리샤는  쉴 틈없이 투덜대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넌더리가 나 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잠시 멈춰선 트리샤는 길을 벗어나 소변을 본다. 그리고 길을 잃는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그 팀의 구원투수 톰 고든을 숭배하며, 인기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도시소녀 트리샤가 문명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숲속을 헤메게 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공포소설을 잘 쓴다는 스티븐 킹이 이번에도 또 한 번 퍼펙트 게임을 펼쳐내었다. 이번 작품에서의 공포의 대상은 괴물이나 유령은 아니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다. 다름 아닌 숲 자체가 트리샤와 독자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깊은 숲을 가보신 분들은 다 알겠지만,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으면 무섭다. 더구나 뼈를 닮은 회백색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밤이라면, 아무리 담력이 있는 사람도 혼자서 밤을 지새우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트리샤는 단 아홉 살에 불과하다. 육체적 완력이나 강인함을 기대할 수 없는 연약한 소녀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게다가 숲이 주는 위험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안감을 자극하는 적막과 고요, 틈만 나면 피를 빨려 덤벼내는 모기떼,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비롯한 악천후, 참을 길 없는 갈증과 굶주림까지 숲이 보여주는 공포의 얼굴은 시시때때로 얼굴을 바꾸며 트리샤를 압박한다.

 

트리샤는 만루홈런을 맞은 패전투수처럼 이대로 무너지고 말 것인가? 그러나 트리샤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나오는 보스턴 팀의 중계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공포를 이겨낸다. 트리샤에게는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힘을 주는 톰 고든이 있었다. 톰 고든은 기아와 질병으로 거의 환각 상태에 이른 트리샤에게 찾아와 승리 공식을 가르쳐준다. 희망과 신념, 집중과 의지가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이 작품에서 소녀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 야구라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야구야말로 미국인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길잃은 숲속에서 소녀가 야구 방송을 들으며 철저한 고립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 야구장에는 핫도그가 있으며, 콜라와 맥주, 환성과 한숨, 승리와 패배, 경쟁과 화합이라는 미국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홀로 숲속에 동떨어진 트리샤가 절대 맛볼 수 없는 것들이다. 트리샤는 이 모든 것을 그리워한다. 다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간절한 애원, 그것 뿐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답지 않게 분량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분량 이상으로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숲은 대단히 무시무시하지만 실제로 책을 덮고 나면 숲에 가보고 싶어진다. 작가가 숲의 여러 가지 풍경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고립과 공포의 순간이 겨우 지나가면 찾아오는 벅찬 풍경들, 별똥별 무리는 하늘 가득 오렌지색으로 수놓고, 새끼사슴과 비버는 눈을 즐겁게 한다. 굶주려 죽어가기 직전 발견한 백옥나무 열매는 어쩌면 그리 맛있을까. 스티븐 킹이 묘사한 숲은 이렇게나 무섭고, 아름답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트리샤를 괴롭히는 대목에서는 조금 눈쌀이 찌푸려지기도 하지만 감동적인 결말이 모든 것을 보상한다. 숲과의 기나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소녀가 취하는 행동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단지 숲이라는 대상만이 공포감의 전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트리샤를 노린다. 숲을 헤매고 다닌 지 며칠째, 트리샤가 자고 일어나보니 둘레는 온통 거대한 발톱자국이고 자신의 몸 주변은 흙으로 빙둘러 원이 쳐져 있다. 너는 내 먹이,라는 표식일지도 모른다.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숲이라는 절망의 공간을 벗어나 희망의 세계로 날갯짓을 펼치는 한 소녀의 믿음과 신념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트리샤의 몸을 빌어 우리에게 공포와 허무, 절망들을 상대로 정면승부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 단지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트리샤에게는 그 용기가 있었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p.s/ 요즘 PSP 게임으로 메이저리그 게임을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보스턴 레드삭스로 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며칠 전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와의 게임 때, 구원투수로 톰 고든이 나오는 걸 보고 무지 반가웠다. 이 작품에서만 해도 보스턴의 붙박이 마무리였는데, 언제 뉴욕으로 갔는지 궁금했다. 참고로 나는 톰 고든을 난타해 강판시켰다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11-25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2회 일본호러소설 대상작이란 홍보 문구를 보고 흥분하고 말았다. <링>과 <검은 집>이후 그럴싸한 일본호러소설을 보지 못했는데 또 한 번 공포의 오르가즘을 느끼겠구나, 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무서운 구석은 별로 없어 호러소설이라기엔 조금 부족했다. 다만 악몽을 꾸는 듯한 끈끈함과 요괴가 출몰하는 기묘한 밤의 정취는 돋보였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기괴한 제2의 세계를 그리는 일종의 환상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시>에는 표제작 '야시'와 '바람의 도시'의 두 중편이 실려 있는데, 문체나 주제, 스타일이 대동소이해 연작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야시夜市'는 한자 그대로 밤의 시장이라는 뜻이다. 10년도 더 전에 보았던 에로영화 <야시장>이 갑자기 떠오른다. 아무튼 야시에는 요괴나 영구방랑자, 악마 등이 판을 벌인 다음 뭐든지 팔고 있다. 그런데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황천에서 주워온 돌이 1억엔이란다. 그걸 어따 쓰라고? 한 남자가 여자 친구와 함께 야시를 방문한다. 그런데 야시의 규칙은 들어온 이상 반드시 사고 파는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야시에 먹혀 버린다. 알고보니 남자는 몇년 전에 야시를 온 적이 있었고, 자신이 빠져나가기 위해 동생을 납치업자에게 팔아버리고, 야구를 잘하는 재능을 샀었다. 남자는 동생을 찾으러 다시 돌아온 걸까?

 

이야기가 짧은 게 조금 아쉬웠다. 야시가 돌아가는 모습을 좀더 세밀하게 그린다면 잔재미가 더 살았을텐데 말이다. 작가 쓰네가와 고타로는 문장에서도 이야기에서도 군더더기를 줄이고 단순하게 가는 편인데, 짧은 만큼 효과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지만 아마추어의 글을 보는 느낌을 주는 단점도 보인다. 멋부린 문장이 꼭 뛰어난 작가의 필수조건은 아니겠지만, 문장의 맛이라는 것도 분명 있는 거니까. 반면 다카하시 가쓰히코 같은 베테랑 작가들도 칭찬한 종반부의 반전은 과연 훌륭했다. 사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단서나 복선 등을 전혀 주지 않기에 논리적인 반전이라고 하긴 힘들고, 비상한 국면 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기발한 뒤집기 한판이라고나 할까. 이 이야기의 진행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바람의 도시'도 독특하다. 우리가 걷는 길의 어딘가에는 묘하게 일그러진 지점이 있어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 길은 '고도'라 불리우며 요괴와 신 등이 살고 있다. 초등학생인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고도로 들어갔다가 그곳의 방랑자와 얽힌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만다. 고도에는 죽은 자를 되살려주는 사원이 있어 방랑자와 주인공은 함께 사원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야시'만은 못해도 이 작품에도 의외의 상황 전개와 급작스런 상황 변화가 있다. 뻔한 이야기를 비틀어 어디로 튀게 만들지 모르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쓰네카와 고타로라는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듯 하다. 그외에도 두 작품 다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일관된 주제를 선보이고, 그 세계의 규칙-'야시'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나갈 수 없고, '고도'는 고도에 속해있는 자는 나갈 수 없다'-을 잘 활용해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일종의 상실감, 허무, 슬픔, 애절함 등을 바탕에 깔아 정서적 울림을 주는 수법에 특히 주목하고 싶다.  

 

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이야기도 재미있는 편이라 꽤 흥미롭게 봤다. 그러나 만인이 인정할 만한 재능은 발견하지 못했고, 그저 다음 작품이 나오면 한 번쯤 더 읽어봐야겠다, 정도의 인상만을 받았다. 이 작품이 134회 나오키상 후보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어리둥절했다. 90년대 나오키상 수상작은 <마크스의 산> <이유> <부드러운 볼> 같은 작품들이었다. 비록 <야시>가 수상은 못하고 후보에 그쳤다지만 언급한 작품들에 비하면 질과 양 면에서 상당히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2000년대 이후에 데뷔한 최신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별로 감탄한 적이 없다(많이 읽지도 못했지만). 그 동네도 이제 밑천이 떨어져가는가 싶다. 일본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재능있는 젊은 피에 의한 참신한 충격을 기대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10-3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런 점이 있었군요. 전 오히려 짧아서 상상으로 느끼게 되는 공포를 담아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edai2000 2006-10-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죠. ^^ 상상으로 느끼는 공포가 더 큰 법이니까요. 단지 제 생각입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느낀 대로 쓴 거예요. ^^

2006-11-1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