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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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개인적으로 우석훈씨의 책을 많이 읽은 편 같다. 88만원세대에서는 20대들의 문제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분석했다면,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동아시아의 평화시대를 위한 조건으로 볼 수 

있을듯 하다.(부제에서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라고 했듯이) 책 내용 중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과 

한국과 일본의 경제구조의 분석 내용들은 아주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좀 아쉬운 점은 

읽는 내내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 같은 것이 있다. 주장하는 바가 좀 추상적이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읽는 내가 지은이의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88만원세대 

에서 지은이가 10대들에게 수능총파업을 주장(책에서 그랬는지, 내가 강연회에서 들었는지 좀  

헷갈린다)하는 걸 보면서 이게 뭐하자는 거지 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그말의 뜻을... 혹 나중에  

한번 더 읽어본다면 더 이해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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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 2.19   문제는 난장이 아니라 폭력이다.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임인데 … 뭐라고 부르리까 먼 데서 오신 손님.’ 1970년대 초, 이 노래는 텔레비전에서 늘 흘러나와 민망하게도 초등학생이던 내 귀에조차 익숙한 인기가요였다. 이 노래가 민망한 것은, 가사에서 적시되지만 않았지 분명 성매매를 연상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불법이었으나 이런 노래는 버젓이 나왔다. 만약 이 시절에 젊은 연인들이 대낮에 길거리에서 단체 키스 해프닝을 벌였다면, 세상이 망조라고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이때는 치마가 무릎 위 17㎝보다 짧은 것을 허용하지 못하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랑하는 남녀의 키스나 미니스커트와 성매매 중 무엇이 더 문제일까? 인권, 법, 풍속, 어느 측면으로 보더라도 범죄인 성매매가 더 큰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과 여론은 젊은이들의 노출이나 성적 표현에 비해 성매매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근 일부 중학생들의 과격한 졸업식 뒤풀이에 대한 여론을 살펴보면 이런 문제점이 보인다. 이 사건 초반에 여론은 옷을 찢거나 벗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양 보도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른다는 것에 어른들은 혀를 찼다.

하지만 원래 축제란 속성 자체가 그렇다. 축제의 핵심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고 무질서, 난장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욕설 천지이고 낯 뜨거운 음란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 끝난 직후의 축제는 난장과 일탈이 허용되는 숨쉴 공간이었다. 젊음이 끓는 10대 중반, 입시 부담도 없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학교라는 억압적 굴레를 상징하는 교복을 찢는다는 것 역시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난장과 무질서, 그것이야말로 축제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알몸, 일탈, 무질서, 난장, 이런 것이 아니다.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적당한 곳에서 그런 축제를 하도록 해주면 된다. 진짜 문제는 간간이 나타나는 강제성과 폭력이다. 그 뒤풀이가 강제와 폭력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고 졸업생들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폭력일 뿐 축제가 아니다. 뒤늦게나마 경찰이 폭력 혐의로 수사에 착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우리는 축제가 될 기회를 폭력으로 뒤범벅할까.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폭력적인 음주 강요와 얼차려나, 중학생들의 알몸 뒤풀이나 본질은 같다. 시작과 끝, 가장 중요한 축제가 즐거움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한 고통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그들이 내면에 지닌 사회상,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태도,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일상을 벗어나 상대방에게 고통을 줌으로써만 자신과 그가 동일집단 성원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건강한가.

찢거나 때리는 폭력적이고 과격한 일탈과 전복을 막으려면, 좀더 부드럽고 온건한 일탈과 무질서로도 만족할 수 있도록 일상이 덜 억압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뒤풀이가 지닌 폭력성보다 알몸과 난장에 더 화들짝 놀라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야말로,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정말 우려할 만한 지점인 것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ps : 평소 이영미씨가 쓰는 한겨레칼럼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는데, 특히 이번 칼럼은 시의적절하며 이번 졸업식문제를 제대로 해석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마지막 문장처럼 이런 문제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 단순히 요즘 애들 문제다.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그런 애들은 콩밥 좀 먹어야한다고 하는 저차원적인 시각이 왜 문제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글이다. 

 

한겨레신문 2010.2.22     공격받는 청소년 

한 무리의 학생들은 팬티만 입고 거리를 질주하고, 어떤 아이는 이 엄동설한에 바다에 던져졌다. 급기야 또다른 학생들은 선배들에게 불려나가 알몸으로 기합을 받으며 졸업을 ‘축하’받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평소 열렬하게 청소년의 인권을 옹호하던 친구조차 얼굴을 돌렸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대세는 강경한 일벌백계다. 그래도 철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 아니냐고 한마디 보태다가는 “요즘 청소년들은 이미 알 것 다 알고 하는 ‘인지범’들인데 무슨 사회와 교육 탓이냐”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요즘 청소년’들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공격받고 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사회가 보수화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를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연결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그랬다. 1970년대 말에 대처주의가 대중적 공감을 얻고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청소년들의 일탈행위에 대한 좌파의 정책적 무능을 틈탄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학교가 폭력과 마약의 통제 불가능한 무정부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법과 도덕의 질서를 강력하게 세워야 한다고 보수적 매체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어 그들은 청소년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신 나간 좌파들이 무분별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학교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궁극적으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비난하였다. 공격의 첫 대상은 청소년이었지만 애초부터 대처주의의 목표는 교원노조와 진보 전체였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진보의 가치 자체였다. 그 결과 영국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였다.

30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진보는 이 사태에 대해 영국의 무능했던 진보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소위 진보적인 매체라는 곳을 살펴보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고 학교와 가정에서는 어떤 존재들이고 이들의 또래집단은 어떻게 조폭처럼 되었는지를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듣고 분석하는 작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폭력에 대한 감수성과 인성교육의 붕괴에 대한 하나마나한 개탄을 단순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보수주의가 노리는 것이다. 무능한 진보를 등에 업고 모두가 ‘요즘 청소년’들을 걱정하게 하여 도덕에 대한 위기의식과 규율에 대한 공감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다음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이들을 버렸다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으로 전교조와 공교육의 무능을 집중적으로 지목하여 파상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결과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수월성 교육의 강화이다. 성공적인 학생 관리를 명목으로 특혜를 받고 있는 학교에는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그렇지 못한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있던 지원을 줄이고 더 많은 제재와 처벌이 주어질 것이다. 교사는 무능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아이들은 사회의 보호와 권리 바깥으로 내팽개쳐질 것이다. 이렇게 무법지대로 추방된 아이들은 도덕의 이름으로 영구히 쓰레기 취급을 받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이다. 그런데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 보수주의의 도덕과 규율의 정치에 수수방관하거나 놀아나고 있다. 위기에 빠진 것은 청소년의 도덕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진보의 정치적 역량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신문 2010. 2.20    문제적 졸업식 관람기 

설 연휴 전에, 졸업식에 갔다. 그곳에 가서야 나는 마흔 살을 훌쩍 넘긴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려는 자식들을 둔 아버지들 틈에 끼어 한참이나 서 있었다. 감개가 무량이라고나 할까. 아버지가 되고 학부형이 되고, 이젠 중학교에 입학하는 자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름살 많은 아버지들 틈에 나도 어깨를 조심스레 들이밀고, 꽃다발을 한 손에 쥔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건 그렇고, 졸업식은 정말로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졸업식은 문제였다. 잠깐만! 내가 목격한 졸업식은, 요즘 뉴스 시간마다 급박하게 들려오는 ‘사건’의 졸업식은 아니다. 내가 겪은 졸업식 얘기는 이런 것이다. 우선 세월이 바뀌었는데도 졸업식의 관제성은 변한 게 없었다. 20세기 중엽의 관제적인 문화가 인터넷이며 아이폰이며 소녀시대가 압도하는 이 21세기 초엽에도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근엄함을 과시하려는 단상의 배치는 세월이 바뀌고 감성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옛날 그 모습 그대로여서 차라리 키치적인 조악함으로 느껴졌고 그 단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전 행사는 지나치게 지루했다.

초등학교 졸업반이면 자기들을 위한 행사에서 어느 정도 참을성 있게 앉아 있을 만큼 성장한 셈인데, 그러나 아이들은 금세 지쳤고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내외빈의 치사, 축사, 격려사가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말의 공허함이라니! 그 많은 말들은 아이들은 물론 참관한 학부모나 심지어 그 말의 화자 자신도 정확히 뜻을 모르거나 적어도 확신하지 않는 단어들의 연속이었다. 과거처럼 ‘민족의 동량’이 되라는 식의 웅변식 어조는 희미해졌지만 ‘글로벌 리더’, ‘세계 속의 한국인’, ‘지역 사회의 참 일꾼’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지역 유지들의 ‘한 말씀’이나 ‘축전’이 이어지는데, 가관이었다. 선거법에 저촉이 될 만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어느 시의원은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이라고 하면서 현재 졸업식을 거행하고 있는 대강당을 자기가 의정 활동 하면서 지은 것이며 이 학교에 어학실이나 음악실 같은 시설이 부족한데 이번 6월에 한 번만 더 “관심을 모아 주시면” 꼭 좋은 시설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졸업식의 주인공인 꼬마 아이들에게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지역구 주민들의 박수만 기대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사람이 박수를 하긴 했는데, 내 생각에는, 그나마 그가 격려사를 짧게 끝낸 덕이었을 것이다. 그다음 차례는 박수도 받지 못했다. 지역구 국회의원의 순서였는데, 직접 방문은 하지 않고 축전만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축전을 사회 보는 교사가 일일이 지루하게 읽어댔다.

자, 이러니 어떤 아이들이 밀가루를 던지고 교복을 던졌다고 해서 과연 그 아이들만 따로 공론 뉴스의 한복판에 호출하여 대대적으로 혼찌검을 내는 일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20세기 한국 문학계의 유니크한 지평을 단독자로 가졌던 소설가 이제하의 단편 중에 <태평양>이 있다. 그의 고교 시절 체험이 녹아 있는 이 단편에는 반세기 전, 한국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저 남도 끝의 어느 고등학교 풍경이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라는 제도의 엄격성은 매한가지지만, 일제의 잔재에 더하여 난리까지 겪고 있는 와중의 고교 풍경이기 때문에 오늘날보다는 훨씬 더 규율이 심하고 군사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규율을 잡으려는 교장 선생님과 학교 당국,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어쩔 수 없이 그 규율의 빈틈을 벌려야 하는 학생들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전쟁통에서도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친밀성과 낭만은 기어코 존재했다는 점이다. 전쟁 때문에 아들을 잃은 교장 선생님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이에 저항하려다 끝내 삼투하게 되는 학생들의 가녀린 서정. “선생님도 마찬가집니다. 모두가 고독합니다”라는 어느 학생의 말을 끝으로 졸업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1년쯤 지나서 교장 선생님과 제자들은 해수욕장에 모인다. 어느 제자가 말한다. “선생님. 바답니다.” 그러더니 자기 말을 고쳐서, “태평양입니다” 하고 덧붙인다. 교장 선생님이 대답한다. “태평양이지. 자, 들어가서 헤엄들을 치라구….”

이제 그런 서정이란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내 딸과 친구들은 그 지루하고 답답한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담임 선생님을 둘러싸고 사진을 찍고, 또 몇몇은 울었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서 교무실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줌의 도덕’은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많았다. 격려사를 마친 시의회 의원이 ‘주요 의정 활동’을 이유로 먼저 자리를 뜰 때 교장 선생님은 대강당 출입문까지 뛰어가며 배웅을 하였고 이 모습을 아이들과 학부모 모두가 지켜보았다. 아마도 그 시의원은 같은 날 열리는 인근 학교 졸업식에 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는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의 격려사가 짧게 끝난 것은 아닐까, 씁쓸하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가로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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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년 동안 같이 근무했던 내 또래의 동료가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게되서  

좋은 책 한권을 선물하려 했다. 난 원래 타인에게 하는 모든 선물은 거의다 책이다. 

책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원래는 자기계발 서적을 사주려 했다. 난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적은 하나도 

사지 않는다. 전혀 필요없다고 보기 때문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많이들 읽고 그리고 내가 선물을 

주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리타분한 내용들의 책도 필요하다 생각이 들어서 '행복한 이기주의자' 

의 저자 웨인 다이어의 최근작 '오래된 나를 떠나라'를 두권 들고 계산하려 했다. 근데 뭔가 아쉬워서 

서점에 온김에 인문사회쪽 코너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눈에 확 띠는 책이 '오래된 연장통'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소개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었는데... 이 책은 어떨까 하고 머리글을 읽어보니... 오 

참 책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이 책으로 계산하고 동료에게 선물했다. 결과는 만족 

스럽다. ㅋㅋㅋ 나도 조만간에 구입해야겠다. 

 

 

 

 

 

 

 

2. 얼마전 헌책방에서 '프란츠 파농'이라는 책을 사서 읽고 있다. 20여년 전에 출판된 문고판 책으로  

프란츠 파농의 삶과 글에 대한 소개글이다. 중간 정도 읽다 보니, 파농의 애기를 하며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에 관련된 내용들이 나온다. 다들 프로이트와 융은 알지만 아들러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도 오늘 알았는데, 형제간의 성격차이가 왜 나는지를 처음으로 밝힌 학자가 아들러라고 

한다. 프로이트, 융과 더불어 3대 심리학자로 일컬어질 정도라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에  

알려진 정도는 크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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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이라고 하는 희한 제목의 책이 나왔다.  

자살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끈질긴 자기보존 충동에 맞서"인간 실존이 인간에게 

보장하는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가장 생생하게"실행하는 행위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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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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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삶의 존엄과 자살의 자유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 / 산책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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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08년 5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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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 청아출판사 / 1994년 1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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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0.2.12  

공정무역… 농장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 이름 "누구를 위한 공정무역인가? 그것은 다국적기업이 독점한 커피 시장에서 그 이익을 덜 남기는 것으로 틈새시장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커피 상인들의 하나의 상술이지 결코 공정무역이라 할 수 없다. 공정무역의 직접 수혜자는 농장주와 그 조합이지 농장노동자는 아니다."(40~41쪽) '농부 철학자' 천규석(72ㆍ사진)씨가 2006년 이후 잡지 '녹색평론' 등에 기고했거나 강연장에서 발표한 원고 10편을 모은 책이다.   
  

 

 

  

 

 

 천씨는 1965년 대구로 귀농해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을 억제하는 전통 유기농법 보급, 농산물의 도농 직거래를 통한 자급형 도농 공동체 건립 운동을 펼쳐온 농민운동가다. 한때 한국 지식인 사회에 유행했던 유목주의 담론을 정면 반박한 저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2006)를 통해 한바탕 논쟁을 일으켰던 천씨는, 이번 책에서는 근래 시장에서 '제3세계 생산자에게 더 많은 이윤을 돌려주자'는 취지로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공정무역' '착한(윤리적) 소비'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는 다국적기업이 장악한 세계시장 체제를 더욱 강화할 뿐이며, 그 소비 대상이 커피나 초콜릿 등 농산물에 집중된 탓에 제3세계 국가에 대규모 농장만 확장시켜 환경 파괴를 촉진할 뿐이라고 일갈한다. "진정으로 착한 일은 오히려 초콜릿 불매운동과 함께 식량부족국들의 식량자급도를 높여줄 새로운 방략을 찾아주는 것이 아닐까?"  

백낙청, 박원순씨 등 진보적 인사들을 비판하는 글도 있다. 예컨데 박씨의 시민운동에 대해서는 "정부 돈과 기업 후원으로 체제 안에서 정부의 파트너 사업하는 것도 시민사회운동인가"라며 날선 비판을 던진다. 때로 급진적, 근본주의적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체제와 비타협'하는 천씨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다.  

 

한겨레신문 2010.2.13  

‘공정무역’ 불공정한 속내를 꼬집다 “착취구조 숨기고 연장하는 신식민주의적 발상 소농공동체 자급자치보다 윤리적인 소비는 없다” 공정무역은 정말 공정한가? 그리고 윤리적인가?  

 

 

 

 

 

 

4년 전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72). 실명비판을 마다않는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생태적 자급자치 소농(두레)공동체 복원이라는 자신의 오랜 작업을 가로막는 ‘적’들이라면 그 누구와의 논쟁도 피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엔 민중무역·윤리적 소비·착한 초콜릿·착한 여행 등으로도 변주되는 공정무역을 정면으로 문제삼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정무역 이념은 옛 식민지 착취구조를 현재와 미래까지도 계속 연장 확대하려는 제국주의 국제분업체제의 신식민지주의 논리일 뿐이며,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의존관계를 은폐시켜 그 영속에 일조하는 반민중주의라는 게 천규석의 생각이다.  

직거래 형식을 통해 유통 모순을 어느 정도 해소함으로써 제3세계 가난한 생산자들에게 20~30%의 이익이 더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잘사는 먼 나라 소비자들에겐 안전식품에 대한 욕구와 심리적 부채감을 해결해주며, 생태환경 보존과 세상의 수평적 연대에도 기여한다는 공정무역. 지은이에 따르면 다분히 일본 그린코프 등의 생협활동에서 자극받은 이 땅의 공정무역 운동은 마스코바도 설탕과 올리브유 등의 수입품을 취급하는 두레생협연합, 여성민우회생협, 동티모르 교육사업 지원 명목으로 동티모르 커피를 평화커피라는 브랜드로 판매하는 와이엠시에이(YMCA), 생산자에게 두 배의 가격을 주고 네팔산 커피를 수입하는 아름다운가게,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착한 초콜릿’을 홍보하고 공정무역여행을 기획한 한국공정무역연합 등 날로 세를 얻고 있다. 이에 대해 천규석은 야멸칠 정도로 냉소적이다. “히말라야 오지의 산악국가에까지 자급 대신 세계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는 장삿속을 인도적 지원으로 위장하는 양두구육은 노골적으로 돈벌이에 나선 세계무역보다 오히려 더 역겹다.” 그가 지적하듯이 공정무역의 대상은 커피, 차, 카카오, 바나나, 설탕 등 주로 기호식품이다. 이들 기호식품은 상품화 역사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수탈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전세계 기호식품 주요 생산지들에는 서구 열강들이 무자비한 수탈을 위해 생필품 중심의 자급적 전통농업을 철저히 파괴한 뒤 건설한 기호식품 단작 플랜테이션(모노컬처), 도태당한 현지 노동력을 대체한 추악한 아프리카 노예무역 등 원주민 절멸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천규석도 공정무역이 상대적으로 공정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일품목 경작 때문에 외부 의존형으로 바뀐 원주민들의 삶을 온전하게 복원시켜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왜곡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 결과 이득을 얻는 쪽은 지금의 뒤틀린 국제분업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기업 등 자본, 그들과 결탁한 지배그룹이 사실상 사유하는 국가다. 게다가 원거리 공정무역은 운반과 이동 등에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함으로써 지구 생태계 파괴를 가속시키고, 자원 거래를 장악하고 있는 강자들의 이익을 더욱 배가시킨다. 이런 불평등·생태파괴 구조를 온존시킨 채 “사실은 자신들의 기호적 필요와 이익사업을 위해 (공정무역을) 하면서도 마치 시혜를 베풀듯”하는 공정무역의 위선을 천규석은 질타한다. 결과적으로 “공정무역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세계시장체제에 예속된 농업의 국제분업을 기정사실화하고 거기로부터 차선이라도 구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자기위안 행위일 뿐이다.”  

대안은 그가 지난 수십년간 계속 주장해온 지역적 자급자치 소농공동체의 복원이다. 소비도 “자급자치적 소비보다 더 높은 윤리적 소비는 없고”, 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급이다. 제국주의 ‘외세’의 식민지·신식민지 수탈 출발점은 바로 이 자급체제를 강제로 무너뜨려 외부의존체제로 만드는 것이다. 자급이 무너지면 자치도 무너진다.  

자급자치 소농공동체를 무너뜨린 이 외세의 대변자, 착취의 실행주체는 자본가와 관료 등 지배세력이 사실상 사유화한 국가다. 제국주의 일본도 외세였지만, 국내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도 자급적 소농공동체에겐 외세였다. <윤리적 소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국가지배로부터의 탈피, 국가에 대한 저항, 나아가 국가 해체 없이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도 임계점을 넘어버린 지구생태계 파괴 저지도 불가능하다고 거듭 외친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도 그랬지만, ‘국가 타도’를 역설하는 지은이의 목청은 이번 책에서 더욱 단호하고 집요하다. 공정무역이 나쁜 것도 결국은 그것이 강자들의 수탈기구인 국가를 온존시키거나 더 강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노동조합 또는 노동운동의 대안 가능성에 회의적인 이유도 자급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국가에 저항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급이 안 되면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급적 소농공동체와의 연대 없는 노동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예속되거나 그들과 한통속이 돼 치명적인 살인무기 생산이나 생태파괴에도 앞장설 수 있다. 설사 노동계급이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국가를 장악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국가 소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는 건 실패로 끝난 현실사회주의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유럽형 사민주의나 복지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거부감도 거기서 비롯된다.  

소농두레공동체 복원은 그가 보기에 국가에 대한 가장 완강한 저항이며,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국가해체 작업이다. 그것은 혁명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권력 탈취를 통해 단기간에 달성될 순 없다. 소농공동체 복원과 국가 소멸은 오히려 권력을 버리는 기권,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거부하는 절약과 가난을 선택하는 결단을 통해 주체와 객체가 함께 바뀌어가는 점진적 과정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것만이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천규석은 생각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먹거리 연대로 시장 예속 벗어나야”  

한살림운동 펴는 천규석씨  

친환경 유기농과 도농 직거래 유통을 추구해온 소농두레공동체 한살림의 대구공동체 대표이사를 1990년 설립 당시부터 맡아오고 있는 천규석은 자신을 “조직 내의 야당”이라고 했다.  

2006년 한살림 제4차 정기이사회 때 공정무역 도입 검토안이 제기됐을 때 그는 단호하게 거기에 반대했고 결국 “그쪽으로 다 기운 것을 되돌려놓았다”고 했다. 상업적 수익 극대화에 매진해온 다른 유사조직들이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거둔 물량주의 성과들에 비하면 20년이 넘은 역사의 한살림 외형은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임원이나 활동가들이 그 때문에 불평도 하고, 빈약한 대우 때문에 사람 붙들어두기도 쉽지 않지만 그는 “한살림도 그렇게 한다면 다를 게 없다”며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천규석은 한살림운동이란 “결국 가난하게, 하지만 재미나게 살자는 것”이라며 “가난하지 않으면 이웃이 안 보인다, 가난해야 비로소 주변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가난한 삶이야말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도 했다.  

시인 김지하보다 1년 늦게 들어간 서울대 미학과를 그보다 2년 먼저 졸업한 그는 학창시절에 이미 자급적 소농공동체 건설을 꿈꾸었다.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내려간 게 1965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소농두레공동체 혁명”에 매진해오면서 지금과 같은 생활이 “재미나고 좋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느꼈다”며 “나보다 못사는 친구들이 없지만, 남부러울 게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국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지난 정권교체 뒤 한층 더 확고해졌다.  

“70 평생 (국가의 언설에) 다 속고 살아왔는데, 이젠 결론을 내려야 할 때”라고 했다. 국가지상주의 시대에 일방적으로 국가를 해체한다면 외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에 대해 그는 “다들 그런 고민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 국가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세계연방정부가 대안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쪽이 더 어렵다”며 국가가 존속하더라도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면 된다고 했다.  

국민국가 거부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를 어찌할 거냐고 지레 겁먹는 것은 기우라면서, 국민국가를 대체하거나 극복할,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국가보다 훨씬 강력한 공동체의 출현이 없이 절대로 국민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말하자면 소농두레공동체만이 국가를 대체할 수 있으며, 소농두레공동체가 그만큼 강력해지지 않는 한 국가는 계속 존속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는 당장 모두가 소농공동체에 동참하기 위해 귀농할 순 없는 일이라며, 비록 도시에서 살더라도 그런 정신으로 연대하면서 먹을거리 하나만이라도 우선 시장과 자본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살림에 호의적인 사람들조차 대다수는 건강식품을 먹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그런 식의 참여도 꾸준히 오래 하다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했다. 1980년 무렵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한살림운동은 1985년 원주에서 첫출발을 했고 1986년 천규석이 두번째로 마산에서 시작했으며, 서울에 가게를 연 것은 1987년이었다. 지금은 전국 회원이 18만에 이른다. 고령이 된 그는 겨울엔 주로 대구 쪽에서 생활한다. 창녕엔 농업전문대를 나와 함께 농사짓는 아들 식구들이 살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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