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 김연아의 금메달은 여러모로 한국사회에 던뎌진 의미가 크다. 김연아는 금메달이 확정되었을때 울지 않고, 자신의 경기가 끝난 후 눈물을 보였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스케이트를 탄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케이트를 신었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크다라고 생각한다. 내가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해질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 

피겨스케이팅 역사를 새로 쓴 프리스케이팅을 끝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던 김연아는 자신도 그 눈물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스케이트를 그렇게 타면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연아의 눈물은 고된 훈련을 위해 흘린 피와 땀 때문이 아니라 스케이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눈물이다.”

바늘자국 하나 없는 옷처럼 깔끔했던 연아의 연기는 스케이트에 대한 사랑 없는 고된 훈련만으론 나올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이다. 오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988년 캘거리 올림픽 당시 이른바 ‘브라이언의 전투’에서 패배한 일에 대한 오랜 반추의 결과다. 캐나다의 우상이며 전년도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이었던 그는 올림픽에서 0.1의 점수차로 금메달을 놓쳤다. 금메달을 딴 미국의 브라이언 보이타노는 판정이 내려진 뒤 오서의 모습은 실성한 사람 같았다고 회상했다. 패배는 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가 당시 경기 장면을 다시 볼 여유를 되찾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는 그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중요한 것은 승부가 아니라 스케이트 자체를 사랑하는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연아의 코치가 됐을 때 그는 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주니어 챔피언이었던 15살의 연아는 행복한 스케이터가 못 됐다. 어머니와 코치로부터 실수한 점프를 계속 반복하라고 강요받는 훈련에 지친 ‘자기 안에 갇힌 내향적 성격의 소녀’였다. 그는 연아의 유머와 기질을 끄집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의 이야기를 듣고 휴식할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함도 가르쳤다. 이런 훈련을 통해 연아는 비로소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와 동작과 음악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오서는 연아의 눈물에서 자신의 사명이 성취됐음을 확인했다.

한겨레신문 2010.3.3 

권태선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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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필자의 말마따나 이제 수도 이전이 예전 조선시대때의 경우처럼 시대를 바꿀수 있는 요인이 아니다라는 점을 빨리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네덜란드 헌법에 나와 있는 이 나라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다. 그러나 정부 청사, 의회, 대법원, 왕궁 등은 헤이그에 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9세기 초 잠시 암스테르담에 정부가 소재했으나, 16세기 이후 헤이그에 대부분의 국가기관이 위치했다. 이는 네덜란드 근현대사의 산물이다. 네덜란드의 모태인 홀란드공국의 원래 수도가 헤이그였다가, 주변 지역을 병합해 커지면서 암스테르담이 중심 도시로 바뀌었다. 19세기 초부터 헌법에 암스테르담을 통치자가 취임하는 도시로 언급해 수도의 지위를 부여했으나, 여러 이유로 정부 소재는 바뀌지 않았다. 수도의 실질적인 기능이 헤이그에 있음에도, 암스테르담은 명목상의 수도가 아니라 이 나라의 실질적인 수도로 국내외에 받아들여진다. 1983년 개헌을 하면서 아예 ‘수도 암스테르담’이라고 못박았다.

볼리비아도 수도는 수크레이나, 정부는 라파스에 있다. 정부 소재 도시와 수도가 일치하지 않는 나라는 베냉과 코트디부아르도 있다. 수도 분할이 아니라, 정부 소재 분할도 흔한 일이다. 세종시 문제로 수도 분할 역기능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독일이 이제 이 문제로 논란을 벌인다는 증거는 없다.

1990년 독일 통일 때 새로운 수도로 베를린을 정하는 문제에 대해 일부에서는 베를린이 독일제국, 특히 나치 독일과 연관된다며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평화적 통일을 한 독일이 과거 전쟁의 잔상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베를린을 통일 공화국의 수도로 하고, 의회와 행정부를 옮긴다고 합의했으나, 행정부의 이전은 상징적 수준에서 그치기로 했다. 베를린으로 옮겨간 부처도 최고위 관리들은 본에 여전히 있기로 했다.

본은 지금도 6개 연방정부 부처와 약 20개 연방기관의 소재지이다. 또 총리와 대통령, 상원의 제2 공식 소재지이다. 이들 부처가 베를린으로 옮겨갈 계획은 이제 없다. 독일은 분단 시절 본에 정부 청사가 위치할 때부터 사법부는 카를스루에 등 세 도시에 분산되어 있었다.

스위스도 수도는 연방도시 지위를 갖는 베른이나, 사법부는 로잔에 있다. 체코 역시 헌법상 수도는 프라하이나, 사법수도는 브르노이다. 남아공은 아예 행정수도가 프리토리아, 입법수도가 케이프타운, 사법수도가 블룸폰테인이다.

수도는 한 국가의 모든 공식적 기능이 모여 있어야 한다는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니다. 수도의 가치에 유독 집착하는 것은 중국식의 중앙집권적 왕조 역사에서 나온 가치관이다. 이 때문에 천도라는 개념이 나오고, 천도라는 것은 왕조의 교체나 혁명의 산물로 받아들인다. 우리 헌법에서 수도가 서울이라고 못박지 않았는데도, 헌법재판소에서는 경국대전까지 들먹이며 행정수도 건설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세종시 당론을 정하기 위한 한나라당 의총에서 일부 의원들이 아예 개헌과 국민투표를 해서 수도를 옮기자는 제안을 했다. 국가 균형발전과 행정효율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잡자는 취지다. 논리적으로 맞는 접근이다. 수도 옮긴다고 세상이 바뀌는 시대도 아니다.
1987년 당시 실각 위기에 처했던 여권은 6·29선언이라는 선제적 민주화 조처를 통해 정면돌파하고, 다시 집권했다. 청와대는 교육과학복합도시라는 어정쩡한 세종시 수정안을 가지고 국민투표를 하겠다며 장난칠 때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결코 밑지지 않는 장사가 될 것이다. 


한겨레신문 2010.3.3 

정의길 오피니언 온·오프 통합추진팀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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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얼마전 겨울방학 기간에 1정 연수를 받을때 한겨레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오셔서 강의를 했다. 한겨레고...처음 들어보는 학교여서 어떤 학교일까 했는데, 우리나라로 온 탈북자 중 미성년자 학생들이 들어와 우리나라 정규학교에 준하는 교육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솔직히 처음 들어봤다. 이런 학교가 있는지...그 교장선생님의 여러가지 애기중 좀 충격아닌 충격적인 애기 하나. 

"통일이 되면 어떨것 같습니까? " ??? "아마도 여기 계신 선생님들 중 절반 가까이는 지금의 북한쪽으로 근무지를 옮겨야 할 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혼란도 생길것입니다." 

두번째 애기야 그렇고...첫번째 애기를 듣고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분명 통일에 의해 현실적으로 이익과 불이익을 받는 집단과 사람들이 생겨나겠구나, 그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겠구나. 어렵다. 바로 이런 관점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글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에 실린 통일독일에 관한 내용이다. 내용이 좀 길다. 

 

동독, 기억을 거부당한 ‘타인의 삶'   
 [특집-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홀로코스는 기념하면서 동독 흔적 지우기 한창
영토는 하나 되었지만 마음의 간극은 더욱 벌어져
 
 [14호] 2009년 11월 05일 (목) 20:31:16 베르나르 움브레흐트 | 언론인  info@ilemonde.com 
 
1989년 5월과 8월에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의 와해, 그리고 그해 11월 베를린의 개방으로 베를린장벽은 붕괴되었고 독일민주공화국은 소멸되었다. 1949년에 수립된 이 국가는 1600만 명의 주민과 함께 서독에 흡수되었다. 이후 동서 진영 간의 냉전은 ‘기억 속의 냉전’으로 대체되었다. 패자의 불행이여! 그들의 과거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얼마 전 ‘통일과 자유’를 의미하는 국가적 상징을 고안하기 위해 독일 의회는 디자인 응모전을 결정했으며, 지난 5월에 전국 규모의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응모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500여 개의 응모작 중에서 아무것도 주제에 부합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역사학 강의를 했던 엔조 트라베르소는 “독일 전체 국민을 아우르는 상징을 찾기가 힘든 것이 독일의 역사적 현주소”라고 평가했다. “독일은 대단한 문화를 지녔고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맡았던 굉장한 나라지만 긍정적 신화가 없는 나라입니다. 항상 자신을 부정적으로 정의해야만 했습니다. 독일이 긍정적으로 자신을 정의할 때는 초국가적 공간에서였습니다. 여기에서 독일의 헌법적 애국주의(1)에 각인된 인종적·문화적 요소를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 스위스의 영화감독 도미니크 드 리바는 동서를 양분하는 155km의 긴 장벽을 탐방하면서 보고 겪은 이미지들을 사진집으로 묶었다. <베를린 장벽의 길: 흰색 위의 검은색>(2009·288쪽·39유로)
트라베르소는 “현재 독일이 보여주는, 유대인 학살의 과거를 현재화하려는 강박관념과 구동독의 과거를 지우려는 철저한 의지 사이의 뚜렷한 간극에 충격을 받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 사회의 기억에서 이 간극은 베를린 한복판에서 시각적으로 표명됩니다. 한편에는 거대한 규모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잊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시절의 공화국 궁전 터는 흉물스럽게 방치하고 있어요.”

즉, 한편에서는 기억의 구멍을 메우면서(홀로코스트를 잊지 않음, ‘홀로코스트 부정’에 대해서는 형법으로 처벌) 다른 한편에서는 지움과 철거, 혹은 레진 로뱅2)이 일컫는 ‘박제화’를 통해 기억의 새로운 구멍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일종의 ‘기억의 냉전’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이전 시대를 지우는 일이 독일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고 오래된 전통에 속하는 것일까? 로뱅은 이 나라에서 “사후 선고”(damnatio memoriae)(3)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영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독일은 (철거된) 공화국 궁전은 공터로 방치한 반면 월드컵을 위해 나치의 올림픽 경기장을 리모델링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요. 아돌프 히틀러의 건축가였던 슈페어(4)가 디자인한 가로등을 비롯해 폭격에서 살아남은 나치 건축물 대부분은 여전히 잘 보존돼 있어요. 그러나 동독 시절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심지어 알렉산더 광장에 세워진 것까지 거의 모두 철거되었죠. 이는 독일민주공화국의 정당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동독을 나치의 제3제국과 동격으로 보고 독일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국기, 국장. 영웅, 길 이름, 건물, 교과서, 대학 교육과정 등 구동독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야 하는 것들이지요”라고 캐나다 퀘벡 출신의 로뱅은 설명했다.

동독인을 무시하는 서독인들

    
▲ <베를린 장벽의 길: 흰색 위의 검은색>, 2009-도미니크 드 리바
남아 있는 베를린장벽의 일부분이 분단의 종식을 기념하기 위해 새로 페인트칠이 되었지만 그 덧칠 안에 있는 것은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결국에는 왜 이 장벽이 세워졌는지를 자문하게 될 수도 있다. 또 20년 전 동독 주민이 봉기한 이유가 코카콜라와 슈퍼마켓과는 다른 것을 갈망했기 때문임을 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벽 저편의 동독에는 1700만 명의 다른 삶이 있었다. 아무도 동독의 부활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다수는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당시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며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동독 주민 63%는 동·서독 간에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더욱 크다고 답한다.(5)

일부 건축가들은 구 독일민주공화국 영토에 있는 건축물들의 소멸에 대해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특히 데사우 바우하우스 재단의 책임자 필립 오스발트는 베를린 도심 재건축 계획(스프리강에서 알렉산더 광장 사이를 중세풍으로 바꾸는 계획)에 반대한다. 이 지구에는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동상이 있으나, 일부 개발론자들은 이를 청산해야 할 유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 헌법 제정 60주년 기념일에 맞춰 지난 5월과 6월 ‘60주년-60개 작품’이란 이름으로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일부 미술 전문지에 의해 ‘승자의 예술’(6)이라 일컬어졌다. 구동독에서 온 모든 회화와 조각품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볼프강 마토이어의 그림이 선정되면서 전시회의 선정 기준은 명확해졌다. 1989년 이후에 그린 마토이어의 작품만 선정하면서 전시회 감독들은 그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에야 ‘진정한’ 미술가가 되었다는 점을 암시했다. 전시된 60개 작품은 “예술은 자유롭다”라는 독일 헌법 5조 3항의 문구를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이로써 이 전시회는 독재하에서 예술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동독인들만 통일을 원했던가?

    
▲ <베를린 장벽의 길: 흰색 위의 검은색>, 2009-도미니크 드 리바
전시회 오프닝 초대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던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에게 이 전시회는 ‘거짓 통일’의 본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통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직 동독인들만 통일을 원했습니다. 서독인들에게 독일의 국경은 엘베강까지입니다. 그들의 관념에는 엘베강은 러시아와의 국경이지 동독과의 국경이 아니었어요. 서독인들은 아무런 개념도 관심도 없는 독일민주공화국과 통일하는 것보다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 혹은 발레아레스 제도(지중해 서부의 스페인령 휴양지)와 통일하는 것을 꿈꿨을 겁니다. “독일인들이 통일의 상징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느냐”고 묻자 크리스토프 하인은 벌컥 화를 낸다. “통일의 상징이 너무 많아서 탈이지요! 이 전시회도 그중 하나입니다. 빈곤 문제도 또 다른 멋진 상징이고요! 임금, 일자리, 연금의 불평등한 분배 역시 대단한 상징입니다!” 하긴 에르푸르트, 라이프치히, 아이제나흐 등 독일 전역에 걸쳐 세력을 떨치는 마피아(7)의 존재를 위시해 우리는 통일을 상징하는 목록을 계속 어렵지 않게 꼽을 수 있다.

토마스 하이스의 새 영화 <재료>(8)는 1980년대 말 동독에서 촬영된 영상을 시작으로 2008년 중반까지 독일에서 촬영된 영상을 모아놓았다. 이 영화는 또한 <남아 있는 것들>로 불릴 만하다. “남아 있는 것들이 내 머리 속에 차 있어요. 이 영상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들은 계속 움직입니다. 재료는 미완성이지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재료가 구성되었어요. 이것이 나의 이미지입니다.” 하이스의 이 말은 지난 20년에 대한 평가의 시도이기도 하다.

하이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했다. “역사를 길쭉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역사는 쌓인 형태입니다.” 그의 영화는 역사가 이전과 이후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쪽과 뒤쪽, 높은 곳과 낮은 곳, 보이는 곳과 감추어진 곳을 포함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독창적인 자료들이 풍부한 이 작품은 설명과 논평을 곁들인 기존의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영화감독은 분절적 편집 형태 사이로 영상들이 서로 충돌하도록 내버려둔다. 줄 사이를 읽고 낱말 사이를 들으며 이미지 사이를 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 모든 단편(斷片)들은 직접적인 발언의 순간과 잊혀진 순간을 실제로 상기하게 만든다. 사면(赦免)에 관한 죄수와 교도관 간의 대화 장면 혹은 동독 공산당 평당원과 지도자 간의 대화 장면이 그 예다.

하이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된 설명’에 항의한다. 예를 들면, 톈안먼의 그림자(무력 진압)가 시위 군중의 머리 위에 드리우는 순간, 이들이“우리는 국민이다”라고 외칠 때 이들은 흔히 말하듯이 서독인을 향해서가 아니라 진압 경찰을 향해 외친 것이다.

“그들이 지우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 시위의 앞줄에 나선 시민들의 모습, 이러한 기억은 이들이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환영합니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국민 스스로가 주권자임을 천명한 사실은 잊혀졌어요. 이후 통일이 아니라 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질서는 유토피아의 파괴를 통해 회복되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동쪽에 있는 주권자인 국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장벽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열렸습니다.”

동독의 산업과 과학 인프라도 파괴

    
▲ <베를린 장벽의 길: 흰색 위의 검은색>, 2009-도미니크 드 리바
동독의 흔적 지우기는 정치와 문화의 상징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독 지역의 모든 산업과 과학기술 인프라도 파괴되었다. 경제학자인 에드가 모스트는 여기서도 화를 삭이지 못했다. 아직도 그는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정략적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한 사실을 비난했다. “4천 마르크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 1서독 마르크를 2동독 마르크로 정한 환율정책은 동독 지역의 경제 기반을 허물어버린 경제적으로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내가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귄터 미탁(9) 치하에 살고 있는 줄 알았어요.” 동독 공산당 체제를 흉내내듯, 콜 전 총리는 모스트를 자리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튀링겐 출신인 모스트는 강한 지역 억양을 자부하며 솔직한 언변을 구사한다. 그는 동독 국영은행의 부은행장을 지냈고 동독 최초의 민간은행을 설립했었다. 이후 베를린 도이체방크의 최고 간부를 지냈다. 그는 최근에 <자본을 위해 봉사한 50년>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상이한 두 개의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국영은행 시절 나는 국가의 돈을 가지고 화폐와 대출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최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았어요. 첫째, 이 정책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둘째, 이 정책은 기업과 노동을 위해서도 유익할까? 그리고 세 번째 순위에 가서야 이 정책이 은행에도 유익할 것인가를 따졌습니다. 사적 자본을 위해 일할 때에는 우선순위가 완전히 전도되었어요. 이것이 은행에 유익할까에 대한 질문이 우선이었지요.”

1990년, 그는 사람들이 숙고할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독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이 무시되었습니다. 행정은 서독이 책임졌습니다. 그런데 동독 현지에 파견된 서독의 직원들은 절대 높은 수준이 아니었어요. 대학도 서방에서 온 교수들이 모든 자리를 독차지했습니다.(10) 동독의 과학학술원은 해산되었습니다. 모든 구동독의 과학적 능력은 서독과 완벽하게 경쟁할 수준이었지만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시도조차도 전혀 없었어요.” 서독 사람들이 동독을 점령해버린 셈이었다. 왜 동독 주민들이 자신을 2등 국민으로 느끼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서독인들

    
▲ <베를린 장벽의 길: 흰색 위의 검은색>, 2009-도미니크 드 리바
동독이 결국에는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방만하게 경제를 운영했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그는 1980년대 말 동독이 채무지불 불능에 빠졌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지적한다. 프랑스가 당시 동독에 차관을 제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그는 확인한다. 조금도 구동독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스트는 그가 동독에서 이미 겪었던 비현실적 상황을 현재 다시 겪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동독의 종말은 1972년, 에리히 호네커가 정권을 잡으면서 예견되었다. 호네커는 모든 중소기업과 소규모 상업을 국유화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경제·사회 정책의 통일”을 추구했다. 이 정책의 총책임자 귄터 미탁은 당의 이름을 걸고 동독의 기업을 닦달했다. 모스트의 눈에는 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주주들의 무책임한 닦달도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찬 베거트는 자서전을 쓰지는 않았지만 현재 쓸 생각을 하고 있다. 재료물리 전공 엔지니어인 그는 사회주의 기업의 책임자에서 ‘자본주의 기업가’로 변신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재료분석 관련 회사인 IMA 드레스덴의 본사가 위치한 드레스덴에서 그를 만났다. 160명을 고용하고 있는 그의 회사는 항공기 제작회사인 에어버스를 비롯해 자동차, 철도, 풍력발전, 의료기기 관련 회사가 주 고객이다. 주변 지역의 경제적 환경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독일에서 가장 산업화된 이 지역(작센)은 수출 지향적 산업이 집중돼 있어 다른 지역보다 경제위기의 한파를 더 받고 있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는 동독의 경제부가 직접 관리하는 광산·제철 국영기업에서 과학기술국장과 연구실장을 역임했다. 베거트는 1980년대 말 과학기술연구소(직원 900명) 소장으로 발령받았으나, 이내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무엇을 해야 했을까? “독일 전국을 돌아다녔죠. 아무도 우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1990~91년에 400명이 정리해고되었어요. 신탁관리공사(11)는 1992년까지 민영화를 하든지 파산 절차를 밟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어요. 나와 함께 동료 3명이 기업을 인수할 것을 결정했어요.” 그리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동독인은 계산도 못하고 포크와 나이프질도 못한다고 믿는” 서독인의 거만함에 질려버렸다. 그가 볼 때 “시민권의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던 짧은 시기가 지나고, 이내 경쟁 이데올로기, 부분적으로는 점령자의 멘털리티와 선의가 뒤섞였으나 이 역시 짐승 같은 거만함을 가지고 추진한 일자리 교체의 광풍에 휩쓸려 지나가버렸다. 동독 경제 전반에 대한 신탁관리공사의 관리는 정반대편으로 이루어진 중앙집권적 경제의 지속에 불과했다”고 그는 판단한다.

“점차 자본수익이 노동임금보다 더욱 중요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비도덕적인 상황을 목도했습니다. …사회주의가 이 세계와 아직 경쟁을 벌일 때만 해도 그들은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이 하나의 제동장치로 작용했습니다. 이제 이 두려움이 없어지자 제동장치는 사라졌습니다”라고 그는 2001년 한 콘퍼런스에서 행한 연설의 원고에 적었다.

엘마 파버는 아들과 함께 라이프치히에 출판사를 열었다. 그는 에른스트 블로흐와 한스 마이어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강의했던 찬란한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이러한 유산을 누군가 그에게서 뺏는 것을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파버는 이전에 동독의 가장 유명한 아우프바우 출판사 편집인이었다. 편집인 자격으로 그는 출판사의 민영화를 주도했다.

민영화냐 소멸이냐. 통일 독일이 국영기업에 제시한 유일한 대안은 민영화였다. 민영화 과정은 신탁관리공사의 통제하에 있었고 민영화가 완료되어도 공사의 허가를 계속 받아야 했다. 파버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공사에 호출되었습니다. 내 파일에 서류 한 장이 모자랐어요. 인사과에서 ‘선언’이라는 제목의 서류를 받았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서명해야 했어요. ‘나는 슈타지(13)를 위해 전혀 일하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 그 서류에는 서명할 수 없지만 대신 다른 종류의 선언서를 제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문구에 서명했습니다. ‘나의 직위를 위해 구체제에서도 현 체제에서도 아무런 서명도 하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 이 사건은 아침 10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오후 1시에 문 밖으로 쫓겨났어요.”

21세기 독일의 분서갱유

    
▲ <베를린 장벽의 길: 흰색 위의 검은색>, 2009-도미니크 드 리바
파버는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의 혼란한 이 시기에서 분노의 순간을 겪었다. “시적인 시기라고 할 수는 없죠. 동독의 훌륭한 작가들의 책뿐 아니라 하인리히 만, 리온 포이히트방거, 아르놀트 츠바이크, 안나 제거스 등 수많은 책들이 파기되었습니다. 요리책과 온갖 종류의 지침서와 여행책자를 위해 서가의 자리를 내줘야만 했어요.” 1991년에 일어난 신탁관리공사 사장 살인사건이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사장이던 데틀레프 로베더는 구동독 일부 산업의 잠재력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아우프바우 출판사가 그 경우였다. 이 출판사는 우선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인수되었으며 이후 베를린의 사업가 마티아스 코흐가 재인수했다. “데틀레프 로베더의 비극적 죽음 이후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어요. 예를 들면 공사 책임자는 우리 출판사가 결국 마르크스와 엥겔스 서적(13) 이외에는 아무것도 출간한 것이 없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혼자서 사색 끝에 지어버린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을 수 없는 멍청한 거만함에 직면하게 되었죠”라고 파버는 말을 이어갔다.

이 출판사는 ‘탈역사화’ 작업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왜 다른 독일을 원했는지를 잊게 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이 아니라 끝에서부터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려는 현재의 지배적 논의에서는 아무런 희망의 서광도 비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한다. “지도자들이 대중보다 더욱 어리석게 되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그람시는 말했지요. 그 상황이 동독에서 일어났어요. 그런데 현재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정치권이나 대중이나 모두 어리석다는 차이가 있지만요”라고 그는 말을 맺었다.

드레스덴 독일위생박물관은 노동에 관한 전시회를 위한 공간이나 인류박물관으로 변모할 만한 성격의 건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노동의 개념은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들다. 특히 고용의 개념을 전적으로 포괄하지 않으면 말이다. 노동을 인간 의지에 의한 세상의 변화로 정의함으로써 이 전시회는 새로운 사고의 길을 열었다. 또 방문객에게도 전시회가 제시한 노동의 개념을 비판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노동. 감각과 근심’(Arbeit. Sinn und Sorge)으로 이름 붙여진 전시회는 노동을 감각과 근심의 개념과 연관시켰다.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이 개념에 약간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독일의 근심(Sorge) 개념은 걱정과 두려움의 차원이 강해서 다소간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근심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관된 걱정의 또 다른 차원 역시 존재한다. 철학가이며 전시회 총감독인 다니엘 티라델리스는 “우리에게는 전시회의 이름에 긍정적 차원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걱정의 대상이 문제이지요. 우리는 이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개인주의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으로 갈 수 있을까요? 개인주의적 차원을 초월하는 무엇에 대한 감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노동의 의미는 어떻게 변했을까? 통계적 측면에서 실업률이 급등하기 시작했으며 부분 노동의 형태가 발전했다. 노동에 대한 만족감이 동독 지역에서 증가했으나 모순적이게도 노동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도 격화되었다.(14) “서독에서는 노동이 임금에 선행하는 반면 동독에서는 임금이 노동에 선행한다는 말은 분명 하나의 역설입니다”라고 베를린의 에른스트 부쉬 연극학교 교장인 사회학자 볼프강 엥글러는 말한다. 그는 또한 “과거 동독 주민들의 성취욕을 완전고용의 명분으로 무시하는 동독의 시스템을 거부했다”고 판단한다.

박물관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유리공장’이란 이름의 완전히 투명한 첨단 건물에는 폴크스바겐의 최신 자동차가 전시돼 있다. 자동차 신(神)의 영광을 기리는 이 사원에서 폴크스바겐 페이톤을 구입하는 고객은 직접 자신이 주문한 차의 조립과 마무리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기업 광고에서 폴크스바겐은 이 ‘유리공장’을 드레스덴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고, 승용차를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처럼 찬양한다. 이곳은 미술 전시회나 패션쇼와 같은 문화 공간으로 꾸며놓았으며 오페라도 공연한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마치 차(茶)를 서빙하듯이 자동화된 조립 라인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더라도 공장이라는 말은 지나치다.

포르셰, 오펠, 메르세데스의 경우와 같이 카타르 왕국이 최근에 지분 17%를 사들인 폴크스바겐은 서방, 특히 독일의 무너진 ‘유토피아’의 일부다. “과거 서독은 민주주의와 대기업의 경제적 발전을 항상 긴밀히 연결시켰습니다. 이 둘은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직면한 분명한 경제적 도전과 우리의 집단의식을 밝혔던 몇몇 등불의 소멸로 인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라고 엥글러는 분석한다.

민주주의는 여기에서 저항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이 근심은 우리가 인터뷰한 여러 사람의 공통 사항이었다. “사라진 동독을 생각하면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라는 질문에 드레스덴의 작가 인고 슐츠는 “현상 타파에 대한 확신이었지요. 우리는 미래 우리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규정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미래를 말할 때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욱 나빠질까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린 다시 배워야 합니다”(15)라고 답했다.

글·베르나르 움브레흐트 Bernard Umbrecht

번역·김태수 asticot@ilemonde.com
파리1대학 정치학 박사 

<각주>
(1) 위르겐 하버마스의 개념. 인용문은 필자의 인터뷰에서 따왔다.

(2) Régine Robin은 <Berlin Chantiers>(Stock, Paris) 저자이며, 2009년 10월 21일~12월 31일 파리 l’Hétel des Invalides 현대사박물관에서 개최 예정인 ‘베를린, 흔적의 지움’ 전시회 공동감독이다.

(3) 정치인의 모든 공적 자취를 지우기 위해 로마 상원에 의해 결정되는 사후 선고.

(4)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5) Deutsche Presse-Agentur, 28 septembre 2009.

(6) 2009년 4월 30일자 <디 차이트>의 기사 제목은 ‘승자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7) ‘그곳에 마피아가 있다’, <디 차이트>, 2009년 8월 13일.

(8) 최근 이 영화는 마르세유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국제경쟁부문 그랑프리를 받았다.

(9) 동독 공산당 정치국의 경제 담당비서.

(10) 일부 연구소에서는 이제 동독 출신은 청소부만 남게 되었다고 크리스토프 하인은 덧붙였다.

(11) 트로이한트 안슈탈트(Treuhand Anstalt). 구동독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전담한 신탁관리공사.

(12) 구동독 비밀경찰.

(13)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은 동독 공산당 출판사(Dietz Verlag)가 전담했기 때문에 전혀 사실이 아니다.

(14) 그러나 동독인의 노동에 대한 열정은 식기 시작했다.

(15) Ingo Schulze “정치인들은 경영인에 불과하다”, <Cicero>, Berlin, 2009년 5월.
 

흡수한 나라 vs 흡수당한 나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독일이 2차 대전에 패배한 이후 소련의 점령 지역에서 1949년에 성립되었다. 바로 직전에는 서방(미·영·프) 점령 지역이 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성립되었다. 1973년 2월 9일 두 개의 독일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자 프랑스는 독일민주공화국을 공식 인정했다. 독일통일사회당의 41년 통치를 뒤로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은 1990년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당시 동독의 인구는 약 1600만 명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 아래 살면서도 (1953년 6월 17일, 당국의 생산성 향상 규정에 반대해 일어난 폭동은 소련의 전차에 의해 진압되었다) 주거와 육아, 보건에서 성공적인 사회정책의 혜택을 받았다. 동독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가장 높은 삶의 수준에 도달한 국가 중 하나였다. 1976년 저항시인 볼프 비어만이 동독 시민증을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동독 지식인들과 권력 간의 관계는 더욱 요원해졌다.

베를린장벽은 동베를린 주민이 서베를린으로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61년 세워졌다. 베를린에만 문자 그대로 장벽이었을 뿐 동·서독을 가르는 1400km의 국경은 철조망과 지뢰밭으로 덮여 있었다. 베를린장벽 건설은 현재 시점에서 상상하는 것과 달리 당시에는 별다른 분노를 자아내지 않았다. 장벽은 당시 유럽의 안보를 안정화하는 요소로 간주되었다.

B. U.

번역· 김태수 asticot@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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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책의 내용은 죽음을 다루었지만 차원이 다른 내용이다. '사망일기'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지은이의삶의 회한과 소중함에 대한 내용이라면, '자유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자기 선택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자유죽음'을 가지고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개인의 삶을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 하며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학살과 수용소의 힘든 상황을 이겨낸 저자가 결국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전쟁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 다면 '자기 살해'가 아닌 죽음과 삶의 의미를 좀더 알 수 있지 않을까? 

ps : 예전 군복무 시설에 '사망일기'를 읽었다. 상병이 꺽인 다음부터는 책을 좀 읽을 수 있어서... 근데 내가 '사망일기'란 책을 읽으니 부대 정보장교가(참고로 난 정보병이었음) 나를 이상하게 처다보며 왜 이런 책을 읽냐 호통(?)을 치며 책을 압수했다.(나중에는 돌려줬지만) 난 그때 정보장교에게 이 책은 이상한 내용(?)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아주 슬픈내용의 실화를 다룬 내용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대상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 가지고 해석, 판단하는 것 같다. 나부터 그러지 말아야지.

 

조선일보 2010.2.18      장 아메리 '자유 죽음' 번역 출간 

장 아메리(1912∼1978)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문학과 철학 박사학위를 따고 글을 쓰는 지식인이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유대인으로 낙인 찍힌 아메리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활동 중 체포된 그는 게슈타포의 악명 높은 고문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고 아우슈비츠에 갇혔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망가진 몸을 이끌고 겨우 돌아온 그는 친구인 시인 헬무트 하이센뷔텔의 도움으로 조용히 작가 생활을 했지만, 대표작인 ’자유죽음’을 내놓은 지 2년 만인 1978년 끝내 자살했다.

국내에서는 처음 번역, 출간되는 아메리의 작품인 ’자유죽음’(산책자 펴냄)은 삶과 죽음의 의미, 자살의 자유를 성찰한 철학 에세이다.

죽음에 이미 한 발을 들여놓은 듯 위태롭고 처절한 작가의 사색은 예사롭지 않다.

“우리더러 군홧발이나 불구덩이에 희생당하라고 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라며 그리스도의 신을 들먹이는 말이야말로 진짜 신성모독이다.”

’자살’이라는 말이 품은 사회적 함의는 명백하다. 생명은 하늘이 내리고 사회가 지켜주는 소중한 것이므로 목숨을 스스로 끊은 자는 의무를 저버린 배신자다. 생명을 예찬하는 말은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으나 자살을 예찬하는 것은 방종이며 비윤리다.

그러나 아메리는 주저하지 않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자살이라는 금기에 다가간다. ’자기살해’라는 뜻의 자살(Suizid)이라는 말도 자유죽음(Freitod)이라는 말로 바꾼다.

그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무엇인지 물으며 자신은 물론 이웃의 존엄과 자유까지 짓밟으면서 치욕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일은 자연사만큼이나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자신을 맡겨버린 사람과 다르다.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에게서 사회 통념을 깨부수려는 치기 어린 도전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의지를 바닥까지 긁어내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반평생 망가진 몸으로 고통의 기억 속에서 산 노인의 치열한 성찰은 역설적으로 강렬한 실존의지에 대한 예찬이다.

“어찌 됐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아메리의 자살론은 여전히 위험하다. 삶을 멸시하는 이들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다만, 이 책은 현실 도피로서 자살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을 통째로 부정한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기를 부정하는 일은 나약한 자의 도피와는 다르다.

해제를 쓴 김남시 박사는 “아메리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한다면, 그의 사유를 이끌고 있는 것이 삶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경외와 자기 삶에 대한 자기 결정 권리, 그리고 자유에의 갈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풀이했다.

 

경향신문 2010 2.19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면 차라리... 

30여년 전 출간됐을 당시 독일, 스위스 등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책으로 논쟁, 논란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자살을 교묘하게 옹호하고 있다고. 오죽하면 저자가 첫머리에 “자유죽음을 옹호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할까. 자살은 어느 사회에서나 신의 뜻을 ‘감히’ 거부하는 배신이며, 반자연적·비도덕적인 행위이자, 없어져야 할 사회병리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자살, 자살을 한 인간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 “살아 있는 자나 살아남은 자의 눈이 아니라, 자살을 택한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누군가의 부모나 자식·친구 등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생 상황에 처한 한 명의 실존적 인간으로” 바라본다.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면,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더 추하게” 만든다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의 생각은 ‘자살’ 대신 ‘자유죽음’이란 용어를 쓰자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니체에 따르면 자유죽음은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선택한 죽음”이다.

그래서 저자는 ‘감히’ 말한다. 귀를 틀어막은 비난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역설적인지 아느냐”고.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짓이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줄여주기 때문”이라고. 나아가 자살을 다시 바라볼 때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른다”고.

자살, 죽음, 삶 등에 대한 넓고 깊은 인문학적 논의가 씨줄로, 저자 자신이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로 끌려다니며 “죽음보다 못한 삶”을 처절히 살아내며 쌓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날줄로 엮었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증언 작가’ 3인방으로 꼽힌 그는 결국 고향에서 자유죽음을 택했다. 김희상 옮김·김남시 해제.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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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우석훈씨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었다.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의 세번째 책인데, 나머지 책들도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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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에 오른 밥상- 건강한 사회를 위한 먹거리의 대반란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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