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10. 2.19   문제는 난장이 아니라 폭력이다.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임인데 … 뭐라고 부르리까 먼 데서 오신 손님.’ 1970년대 초, 이 노래는 텔레비전에서 늘 흘러나와 민망하게도 초등학생이던 내 귀에조차 익숙한 인기가요였다. 이 노래가 민망한 것은, 가사에서 적시되지만 않았지 분명 성매매를 연상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불법이었으나 이런 노래는 버젓이 나왔다. 만약 이 시절에 젊은 연인들이 대낮에 길거리에서 단체 키스 해프닝을 벌였다면, 세상이 망조라고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이때는 치마가 무릎 위 17㎝보다 짧은 것을 허용하지 못하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랑하는 남녀의 키스나 미니스커트와 성매매 중 무엇이 더 문제일까? 인권, 법, 풍속, 어느 측면으로 보더라도 범죄인 성매매가 더 큰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과 여론은 젊은이들의 노출이나 성적 표현에 비해 성매매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근 일부 중학생들의 과격한 졸업식 뒤풀이에 대한 여론을 살펴보면 이런 문제점이 보인다. 이 사건 초반에 여론은 옷을 찢거나 벗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양 보도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른다는 것에 어른들은 혀를 찼다.

하지만 원래 축제란 속성 자체가 그렇다. 축제의 핵심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고 무질서, 난장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욕설 천지이고 낯 뜨거운 음란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 끝난 직후의 축제는 난장과 일탈이 허용되는 숨쉴 공간이었다. 젊음이 끓는 10대 중반, 입시 부담도 없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학교라는 억압적 굴레를 상징하는 교복을 찢는다는 것 역시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난장과 무질서, 그것이야말로 축제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알몸, 일탈, 무질서, 난장, 이런 것이 아니다.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적당한 곳에서 그런 축제를 하도록 해주면 된다. 진짜 문제는 간간이 나타나는 강제성과 폭력이다. 그 뒤풀이가 강제와 폭력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고 졸업생들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폭력일 뿐 축제가 아니다. 뒤늦게나마 경찰이 폭력 혐의로 수사에 착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우리는 축제가 될 기회를 폭력으로 뒤범벅할까.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폭력적인 음주 강요와 얼차려나, 중학생들의 알몸 뒤풀이나 본질은 같다. 시작과 끝, 가장 중요한 축제가 즐거움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한 고통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그들이 내면에 지닌 사회상,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태도,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일상을 벗어나 상대방에게 고통을 줌으로써만 자신과 그가 동일집단 성원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건강한가.

찢거나 때리는 폭력적이고 과격한 일탈과 전복을 막으려면, 좀더 부드럽고 온건한 일탈과 무질서로도 만족할 수 있도록 일상이 덜 억압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뒤풀이가 지닌 폭력성보다 알몸과 난장에 더 화들짝 놀라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야말로,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정말 우려할 만한 지점인 것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ps : 평소 이영미씨가 쓰는 한겨레칼럼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는데, 특히 이번 칼럼은 시의적절하며 이번 졸업식문제를 제대로 해석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마지막 문장처럼 이런 문제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 단순히 요즘 애들 문제다.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그런 애들은 콩밥 좀 먹어야한다고 하는 저차원적인 시각이 왜 문제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글이다. 

 

한겨레신문 2010.2.22     공격받는 청소년 

한 무리의 학생들은 팬티만 입고 거리를 질주하고, 어떤 아이는 이 엄동설한에 바다에 던져졌다. 급기야 또다른 학생들은 선배들에게 불려나가 알몸으로 기합을 받으며 졸업을 ‘축하’받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평소 열렬하게 청소년의 인권을 옹호하던 친구조차 얼굴을 돌렸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대세는 강경한 일벌백계다. 그래도 철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 아니냐고 한마디 보태다가는 “요즘 청소년들은 이미 알 것 다 알고 하는 ‘인지범’들인데 무슨 사회와 교육 탓이냐”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요즘 청소년’들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공격받고 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사회가 보수화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를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연결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그랬다. 1970년대 말에 대처주의가 대중적 공감을 얻고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청소년들의 일탈행위에 대한 좌파의 정책적 무능을 틈탄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학교가 폭력과 마약의 통제 불가능한 무정부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법과 도덕의 질서를 강력하게 세워야 한다고 보수적 매체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어 그들은 청소년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신 나간 좌파들이 무분별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학교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궁극적으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비난하였다. 공격의 첫 대상은 청소년이었지만 애초부터 대처주의의 목표는 교원노조와 진보 전체였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진보의 가치 자체였다. 그 결과 영국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였다.

30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진보는 이 사태에 대해 영국의 무능했던 진보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소위 진보적인 매체라는 곳을 살펴보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고 학교와 가정에서는 어떤 존재들이고 이들의 또래집단은 어떻게 조폭처럼 되었는지를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듣고 분석하는 작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폭력에 대한 감수성과 인성교육의 붕괴에 대한 하나마나한 개탄을 단순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보수주의가 노리는 것이다. 무능한 진보를 등에 업고 모두가 ‘요즘 청소년’들을 걱정하게 하여 도덕에 대한 위기의식과 규율에 대한 공감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다음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이들을 버렸다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으로 전교조와 공교육의 무능을 집중적으로 지목하여 파상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결과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수월성 교육의 강화이다. 성공적인 학생 관리를 명목으로 특혜를 받고 있는 학교에는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그렇지 못한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있던 지원을 줄이고 더 많은 제재와 처벌이 주어질 것이다. 교사는 무능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아이들은 사회의 보호와 권리 바깥으로 내팽개쳐질 것이다. 이렇게 무법지대로 추방된 아이들은 도덕의 이름으로 영구히 쓰레기 취급을 받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이다. 그런데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 보수주의의 도덕과 규율의 정치에 수수방관하거나 놀아나고 있다. 위기에 빠진 것은 청소년의 도덕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진보의 정치적 역량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한겨레신문 2010. 2.20    문제적 졸업식 관람기 

설 연휴 전에, 졸업식에 갔다. 그곳에 가서야 나는 마흔 살을 훌쩍 넘긴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려는 자식들을 둔 아버지들 틈에 끼어 한참이나 서 있었다. 감개가 무량이라고나 할까. 아버지가 되고 학부형이 되고, 이젠 중학교에 입학하는 자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름살 많은 아버지들 틈에 나도 어깨를 조심스레 들이밀고, 꽃다발을 한 손에 쥔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건 그렇고, 졸업식은 정말로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졸업식은 문제였다. 잠깐만! 내가 목격한 졸업식은, 요즘 뉴스 시간마다 급박하게 들려오는 ‘사건’의 졸업식은 아니다. 내가 겪은 졸업식 얘기는 이런 것이다. 우선 세월이 바뀌었는데도 졸업식의 관제성은 변한 게 없었다. 20세기 중엽의 관제적인 문화가 인터넷이며 아이폰이며 소녀시대가 압도하는 이 21세기 초엽에도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근엄함을 과시하려는 단상의 배치는 세월이 바뀌고 감성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옛날 그 모습 그대로여서 차라리 키치적인 조악함으로 느껴졌고 그 단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전 행사는 지나치게 지루했다.

초등학교 졸업반이면 자기들을 위한 행사에서 어느 정도 참을성 있게 앉아 있을 만큼 성장한 셈인데, 그러나 아이들은 금세 지쳤고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내외빈의 치사, 축사, 격려사가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말의 공허함이라니! 그 많은 말들은 아이들은 물론 참관한 학부모나 심지어 그 말의 화자 자신도 정확히 뜻을 모르거나 적어도 확신하지 않는 단어들의 연속이었다. 과거처럼 ‘민족의 동량’이 되라는 식의 웅변식 어조는 희미해졌지만 ‘글로벌 리더’, ‘세계 속의 한국인’, ‘지역 사회의 참 일꾼’ 같은 말들이 난무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지역 유지들의 ‘한 말씀’이나 ‘축전’이 이어지는데, 가관이었다. 선거법에 저촉이 될 만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어느 시의원은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이라고 하면서 현재 졸업식을 거행하고 있는 대강당을 자기가 의정 활동 하면서 지은 것이며 이 학교에 어학실이나 음악실 같은 시설이 부족한데 이번 6월에 한 번만 더 “관심을 모아 주시면” 꼭 좋은 시설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졸업식의 주인공인 꼬마 아이들에게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지역구 주민들의 박수만 기대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사람이 박수를 하긴 했는데, 내 생각에는, 그나마 그가 격려사를 짧게 끝낸 덕이었을 것이다. 그다음 차례는 박수도 받지 못했다. 지역구 국회의원의 순서였는데, 직접 방문은 하지 않고 축전만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축전을 사회 보는 교사가 일일이 지루하게 읽어댔다.

자, 이러니 어떤 아이들이 밀가루를 던지고 교복을 던졌다고 해서 과연 그 아이들만 따로 공론 뉴스의 한복판에 호출하여 대대적으로 혼찌검을 내는 일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20세기 한국 문학계의 유니크한 지평을 단독자로 가졌던 소설가 이제하의 단편 중에 <태평양>이 있다. 그의 고교 시절 체험이 녹아 있는 이 단편에는 반세기 전, 한국 전쟁의 막바지에 벌어진 저 남도 끝의 어느 고등학교 풍경이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라는 제도의 엄격성은 매한가지지만, 일제의 잔재에 더하여 난리까지 겪고 있는 와중의 고교 풍경이기 때문에 오늘날보다는 훨씬 더 규율이 심하고 군사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규율을 잡으려는 교장 선생님과 학교 당국,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어쩔 수 없이 그 규율의 빈틈을 벌려야 하는 학생들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전쟁통에서도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친밀성과 낭만은 기어코 존재했다는 점이다. 전쟁 때문에 아들을 잃은 교장 선생님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이에 저항하려다 끝내 삼투하게 되는 학생들의 가녀린 서정. “선생님도 마찬가집니다. 모두가 고독합니다”라는 어느 학생의 말을 끝으로 졸업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1년쯤 지나서 교장 선생님과 제자들은 해수욕장에 모인다. 어느 제자가 말한다. “선생님. 바답니다.” 그러더니 자기 말을 고쳐서, “태평양입니다” 하고 덧붙인다. 교장 선생님이 대답한다. “태평양이지. 자, 들어가서 헤엄들을 치라구….”

이제 그런 서정이란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내 딸과 친구들은 그 지루하고 답답한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담임 선생님을 둘러싸고 사진을 찍고, 또 몇몇은 울었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서 교무실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줌의 도덕’은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많았다. 격려사를 마친 시의회 의원이 ‘주요 의정 활동’을 이유로 먼저 자리를 뜰 때 교장 선생님은 대강당 출입문까지 뛰어가며 배웅을 하였고 이 모습을 아이들과 학부모 모두가 지켜보았다. 아마도 그 시의원은 같은 날 열리는 인근 학교 졸업식에 가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는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의 격려사가 짧게 끝난 것은 아닐까, 씁쓸하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가로지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