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농업인 비중은 크게 줄고 도시민 귀농·다문화 가정 급증 

농촌에 정통 농업인의 비중은 줄어드는 반면에 귀농인이나 외국 이주 여성 농업인의 비중은 늘고 있다. 정통 농업인의 탈농과 도시민의 귀농, 다문화가정 확산 등으로 농촌 인구 구성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7일 농림수산식품부와 통계청 등에 따르면 농촌 인구 중에서 순수 농업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67.7%에 달했으나 2000년에는 42.9%로 50% 아래로 떨어지더니 2008년에는 28.2%로 급락했다. 2020년에는 13%대에 그칠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반해 귀농·귀촌 인구는 꾸준히 증가세를 타면서 2002년 769명, 2004년 1302명, 2006년 1754명, 2008년 2218명에 이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4080명으로 급증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생계형 귀농이 아닌 삶의 여유를 찾고 자연에서 살기 위한 생태형 귀농이 늘면서 귀농 형태도 다양화하고 있다. 생태형 귀농에는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실버 귀농과 자녀 교육을 위한 대안학교 귀농,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주말농장 귀농 등이 포함된다.

결혼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농촌 결혼이주 여성도 급증하고 있다. 정부는 2005년 2885명에서 올해는 3967명, 2020년에는 5066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2007년에 결혼한 농림어업 종사자 중 40%가 국제결혼을 했고, 농촌지역으로 분류되는 읍·면 거주 농촌총각 중 44.5%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밖에 은퇴 후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부부, 집단으로 귀촌해 마을을 이루고 사는 문화예술인, 산촌 유학생, 5도2촌족(일주일 중 닷새는 도시, 이틀은 농촌에서 생활하는 인구) 등을 감안하면 순수 농업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농촌 정착이 계속 늘 것으로 보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다문화가정과 귀농 확산은 향후 농촌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중요 요인들”이라며 “정부는 실제 농촌의 구성원이 더욱 다양화될 것으로 보고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 계층에 맞춘 농촌정책을 편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상혁 기자 세계일보 200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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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고등학교때부터 듣던 락음악을 버리고(?) 클래식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다양하고 같은 교향곡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지는 클래식... 읽고 싶은 책들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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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니니- 세기의 마에스트로
이덕희 지음 / 을유문화사 / 2004년 1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0년 03월 10일에 저장
절판

을유문화사에서 헌대예술의 거장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클래식 음악가로는 토스카니,글렌굴드, 바렌보임 관련 책이 나왔다. 욕심같아서는 시리즈를 다 사고 싶다.
지휘의 거장들- 볼프강 슈라이버의
볼프강 슈라이버 지음, 홍은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2010년 03월 10일에 저장
품절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지휘 스타일과 음악적 특징들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한 권 읽으면 좀 감이 생길듯 하다.
자클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
캐럴 이스턴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9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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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 세계적인 첼리스트...그러나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재클린의 삶...참 멋있게 삶을 살았던 예술가인 듯 하다.
피아노, 피아니스트, 피아니즘- 한 피아니스트의 인문학적 레퍼토리, 이태은 피아노 연주기
이태은 지음 / 효형출판 / 2010년 3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22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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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한국내에서의 외국인 노동자 차별 문제는 같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지만 '닛케이진'은 한편으로 같은 민족을 차별하는 경제적인 이유로. 필요할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필요가 없어진 후에는 아주 간단히 버려버리는...하긴 우리나라에서 '조선족'아니, 되도록이면 '중국동포'로 부르는게 더 좋을것 같다. 남한사회에서 무수히 많은 '조선동포'들이 저 낮은 고곳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한 경제가 아주 어려울 경우 일본의 경우처럼 그들을 다시 중국으로 내쫓지는 않을까? 우리도 그들처럼...  

브라질 이민자 후손, 조상의 나라에서 ‘3D’ 전전
외모 같은데 언어·문화는 이질적… 정체성 흔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4호 크리스티앙 케슬러 

‘닛케이진’, 즉 20세기 초에 라틴아메리카, 특히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일본인 후손이 1980년대 말 다시 일본열도로 돌아왔으나 생각한 것과 달리 일본은 엘도라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일본어가 어설프고 라틴 문화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까지 한다. 사실 이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인 건 일본 정부였다. 일본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고 노령화가 심각한 사회에 젊은 피를 수혈하려 이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 닛케이진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을 강타한 경제위기 폭풍에 특히 몸살을 앓는 이들이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서도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더 취약한 상황이다. 주로 자동차·건설·전자·식품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 노동직을 연결해주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모집된 이들은 잉여 인력으로서 해고 제1순위다.

▲ 도쿄 외곽 조푸에서 광고지를 돌리는 노동자-<마니에르 드부아> 6~7월호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3D 분야의 경우, 일손이 달려 고심하고 있을 때 외국인 이민노동자들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 1980년대 말에 일본으로 왔다. ‘뉴카마즈’로 불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주로 아시아계 청년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본계 ‘닛케이진’도 있었다. 일본계 닛케이진들은 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난 일본인 후손이다.

1990년에는 닛케이진들을 위한 새로운 특별법이 마련되었다. 일본이 엄청난 경기 호황을 누리고 노동시장이 노령화되던 당시 닛케이진들은 비숙련노동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마침 브라질에 경제위기가 불어닥치자 닛케이진들은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다는 꿈을 품고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 일본은 어떻게 보면 ‘고국’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4천 명 정도이던 닛케이진들은 현재 60만 명에 이른다. 닛케이진들은 2002년에서 2008년까지 경기회복이라는 이점을 누렸고 일부는 가족을 일본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특히 브라질 대도시에는 이들을 고용하는 전문 회사들이 생겨났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최대 디아스포라(이산)를 형성하며 브라질에 100만 명 이상이 있고 일본에 30만 명이 있다. 
   

▲ 요코하마의 간호사-<마니에르 드부아> 6∼7월호

1908년 첫 브라질 이민

1908년 6월 18일부터 일본인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이민자들은 ‘카사토마루’라는 선박을 타고 고베 항구를 출발해 52일 동안 항해해 상파울루 근처의 상투스 항구에 들어왔다. 일본 정부가 용선료를 지급한 첫 선박에는 일본인 이민자 78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현지 언론은 이들을 가리켜 ‘질서를 잘 지키고 깔끔하다’고 표현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는 아직도 일본의 흔적을 잘 느낄 수 있다. 일본계 브라질인 80%가 상파울루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절 근대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은 브라질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고 대규모로 개혁을 단행했지만 인구의 상당수가 급격하고 강제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채 내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몸을 떨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뒤얽혀 일본인은 ‘이민’이라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게 되었다. 그 전의 에도 시대에는 농촌의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도시로 들어왔다. 메이지 시대를 맞아 정부는 옛 봉토를 없애고 새로운 조세제도를 마련했으며 사무라이들에게 주던 급여를 철폐했다. 그리하여 사무라이들은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결과적으로 농민뿐만 아니라 상인,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 지식인들은 바다를 건너면 희망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대서양을 건너 동쪽이나 남쪽으로 갔다. 1869년부터 많은 일본인들이 하와이의 여러 열도,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떠났다. 물론 바다를 건너 이민을 와도 생활이 더 나아지지 않은 일본인들도 상당수였지만 이민 행렬은 계속되었다. 일본 정부가 주도한 ‘공식적인 이민’은 하와이조약(1885)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았고, 여기에 개인적인 이민도 줄을 이었다.

상황에 따라 브라질로 영원히 이민을 떠난 일본인 가족들은 커피나 목화 대농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브라질 도시에 둥지를 튼 일본인 이민자들은 자본이 거의 들지 않고 가족을 모두 동원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래서 하게 된 일이 세탁소, 과일 및 채소 장사였다.

2차 대전 중 갖은 차별 당해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인조합은 금지되고,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차별을 받고, 일본어 사용도 금지되었다. 브라질의 일본계 차별 정책은 미국의 차별 정책보다는 그 정도가 낫긴 했지만(일본계 미국인들은 수용소에 갇혀 지내기까지 했다), 그래도 일본계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일본을 그리워하며 민족주의를 품게 되었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었다. 브라질이 일본과 외교 관계를 재개한 건 1952년에 이르러서였고, 이후 일본인들은 1973년까지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1950년대부터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특별한 브라질인들로 살아왔으며 자신들을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 등으로 불러왔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다시 선조의 국가인 일본으로 귀향하게 된 건 1980년대부터였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이들 행렬은 ‘기코쿠’(고국으로의 귀환)라고 불렸다. 하지만 아무리 일본계라 해도 이들은 일본과 거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왔으며 라틴적인 행동을 고수하고 있었던 탓에 상당히 문명화된 일본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더구나 일자리를 찾아 자리잡은 곳도 도카이 지방(아이치·시즈오카)이나 간토 지방(구마·사이타마)이었다. 이들은 조부모가 사용하던 일본어를 들은 적은 있어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기에 일본어에 능통하지도 않았다.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다 보니 무시를 받기 일쑤였다. 또한 일본을 떠나 한창 노동력이 필요하던 전후 일본 재건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1997년 10월 아이치현 고마키시에서 젊은 닛케이진이 단지 일본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일본 청소년들에게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닛케이진은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일이 많아 장기적으로 일본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자신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폐쇄적으로 살게 됐다. 이들은 해고 대상 1순위일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재취업 가능성도 없이 변변한 집도 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 도쿄 미나코구의 기술자-<마니에르 드부아> 6∼7월호

돌아온 조국서 다시 차별

2009년 1월 18일, 수백 명의 닛케이진이 도쿄에서 시위를 벌였다.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달라는 요구였다. 이 행렬 선봉에 루이 라모스가 있었다. 그는 일본 국가 축구팀에서 선수로 활약한 바 있으며 일본의 스타 대접을 받은 인물로, 일본인으로 귀화한 브라질인이었다. 닛케이진은 자신들이 일본 사회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주고 안정적인 고용·주택·교육권을 보장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어제만 해도 일본계라는 이유로 특별 노동 비자까지 받으며 열렬한 환대를 받았던 이들이지만 이제는 경제가 어렵고 일본 문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는 처지로 전락해버린 데 대한 항의였다.

노령화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시장에 젊은 피를 수혈하려 이민이 추진됐지만, 이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도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일본적인’이라는 인종적·사회문화적 정체성의 관계에 혼란을 주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닛케이진은 보통 일본인과는 행동 방식이 다르고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지만 외모는 일본인이며 일본인 조상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본어를 잘 못하는 닛케이진들은 더욱 곤란한 처지다. 결국 닛케이진은 일본 사회를 혼란스럽고 불편하게 하며 일본의 정체성까지 위협하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비단 이들의 존재가 아니어도 일본의 정체성은 변화를 맞고 있다. 단일민족이라 믿고 살아온 일본인의 생각은 오래전부터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 깨지고 있으며, 일본 도시들은 나날이 국제화돼 외국인 이민자들이 둥지를 틀고 자녀를 기르며 일본 학교에 보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일본 엘리트들이 원하는 ‘국제화’ 전략은 모순적이다. 국경은 확실하게 개방됐으나 법이 경직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외국인 이민자들이 저지르면 일본 사회의 조화를 깨뜨린다고 비난하며 이들에게 더욱 엄격한 법을 적용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분명 아직도 폐쇄적인 사회다.

글·크리스티앙 케슬러 Christian Kessler
역사학자이며 일본 도쿄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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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조건이 인간의 기질이나 삶의 양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연구한 고전으로는 와쓰지 데쓰로 일본 교토대 교수가 1935년에 지은 <풍토와 인간>이 첫손가락으로 꼽힌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다가 현존재의 시간성 분석에 아이디어를 얻어 공간성(자연풍토)의 측면에서 인간의 삶을 탐구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 삶의 유형을 몬순형·사막형·목장형의 셋으로 나누었다. 아시아로 대표되는 몬순형의 경우 인내심이 강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기질이 강한 반면, 사막형은 감정에 끌리지 않고 냉정하며 의지가 강하다고 그는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세와 기질론을 연결한 논리들이 적지 않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도 이와 관련된 몇가지 대목이 나온다. 예를 들어 “강들이 합류하지 않고 제각각 흘러서 인심 또한 그러하다”거나, “사방의 크고 작은 하천이 일제히 모여들어 한줌의 물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 한데 뭉치고 서로를 돕는 풍속을 낳은 것”이라는 따위다. 하지만 산과 강의 모습에 빗대 그 고장 사람들의 기질을 곧바로 단순화하거나 도식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섬나라 사람들은 폐쇄적·외골수인 반면, 대륙인의 기질은 활달·호탕·대범하며, 그 중간에 있는 반도인은 이중적이고 양면적이라는 식의 어설픈 설명도 좋은 예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대구에 가서 “분지적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한 충고도 그런 점에서 썩 유쾌하지 않다. 발언의 애초 의도와는 관계없이 ‘분지에 사는 사람들은 소견이 좁고 폐쇄적’이라는 속설에서 출발한 셈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정운찬 총리도 ‘충청도 양반기질론’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이 정부의 최고지도자들이 너무 앞뒤 생각 없이 특정 지역 주민들의 기질과 특성을 규정짓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한겨레신문 2010.3.10
 

ps : 지리적이면서도 인간의 사고 수준과 지역인식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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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하도 빡빡한 인생을 사느라 거의 소설책을 못보는데 한때에 영어를 배울 겸해서 영미권 소설 - 주로 이미 "고전급"이 된 책 - 을 좀 많이 본 일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이상하게도 지금도 그램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 (1955)은 가장 기억에 잘 남습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안좋게 보시는 분들이 믿으실는지 모르지만, 그 책은 소련 때에 (1950년대에) 영문 원문 그대로 소련에서 재판되기도 하고 번역도 돼 러어로도 나왔습니다. 저자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을 꽤나 냉소적으로 보는 전직 영국 스파이 출신인데, 소련에서 그 책을 삭제할 것도 없이 이렇게 친절히 내준 이유는 미국의 월남 개입에 대한 냉소적인 비관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아프간과도 다를 게 없는데, 경험이 풍부한 그램 그린은 월남이 미국의 계획대로 어차피 살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결국 그 특유의 길 - 일종의 유교화된 국가사회주의의 길 - 로 필히 갈 수 밖에 없다는 점 등을 다 간파해 책에서 그걸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제2의 자아" 격인 토마스 파울러 (영국 기자)가 월남을 "구제하겠다"는 선민의식에 불타는 미국 공작원 올든 파일에게 그걸 역설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월남의 농촌으로 가보거든 농민들의 원한이 섞인 온갖 인생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월맹 (越盟) 간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이공 정부의 관료라는 자들이 대체로 약탈자 이상이 못되고 불란서인 등이 외국 침략자들인데 월맹 간부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리고 민족 해방에 대한 연설로 농민들에게 고상한 인생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우리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란서와 미국과 그 현지 대리인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현지인과 소통이 안되고 현지인들에게 그 어떤 집단적인 "인생의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이상 그들의 분투는 필패라는 건 그 냉소적 기자의 지론이었습니다. 뭐, 사실, 아프간에서 미국이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대로 설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제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바로 "인생 의미 부여"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의미이었습니다. 물론 그린이 이야기한 월맹 간부들은 사실상 어디까지나 유교적 목민관과 계몽주의자를 겸비한 이들이었고, 그들이 농민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어주었다기보다는 농민들을 "조직 통솔"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통사회 해체기로서는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훈육/피훈육" - "통솔/피통솔"의 관계는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로서는 적합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로서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꼭 그 때뿐만 아니고 지금이라 해도 그대로 유효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전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없는 지상낙원을 꼭 건설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게 어디까지나 혹세무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굳이 확률을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가 일련의 국지전을 통해 패권 재배치가 되어 보다 야만적인 자본주의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이성에 입각한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실행할 가능성보다는 훨썬 더 높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 오늘의 일본처럼 - "개혁사기꾼"형, "노빠"형 정치꾼들이 일본 민주당 식의 잡탕식 "개혁" 정당 하나 더 조립해서 언젠가 정권을 탈환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약간 다듬어서 계속 과거대로 운영하는 것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집권보다 훨씬 더 현실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스템의 위기가 아주 커져 진보정당의 집권이 부르주아에게마저도 시스템 전체를 구제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그런데 "진보"할 가치는, 그 무슨 "집권"에만 있는 것은 꼭 아닙니다 (이 부분도 물론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옛날 유인석 선생이나 최익현 선생이 기의하신 것은, 왜적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인간답게 마지막까지 살든지, 그게 안되면 적어도 인간답게 죽어 금수 같은 왜양이 설치는 이 더러운 세계에서 살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굳이 "죽음"을 갖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대의는 같을 것입니다. 사회주의하는 목적이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함"일 듯합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말고 등등은 다 부수적 부분들이죠.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저의 가장 기본적 층위는 생물적 생존입니다. 먹고 자고 성관계 맺고 번식하고 자녀 키우고 아플 때에 약을 먹고, 그리고 자연사하는, 이런 것입니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 기본적 생존마저도 노동자에게는 거의 "꿈" 같은 이야기이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못먹고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아직까지 제약이 좀 있지만 (세계 최장 노동시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많은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 자녀 양육에 있어서의 문제들과 출산율 저하 경향, 무상 의료의 부재로 말미암은 제문제 등) 일단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 정도는 다소 보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층위는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입니다. 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젊은이로서 연애를 할 만큼 해보고, 어른으로서 부모에게 제대로 해드리면서 아이를 잘 키우고, 노후 생활을 조용하고 안정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보내고, 이런 것입니다. 아이의 절대 대다수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바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고, 집에 밤 한 시에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들의 빈곤율이 약 40%에 달하는 이 위대한 토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째 층위 정도는 벌써 거의 보장 못하죠. 한데, 제대로 된 복지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도 보장해줄 확률은 좀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도면 아이 때에 제대로 놀고 젊을 때에 제대로 연애와 섹스를 즐기고, 부모가 되면 저녁 5시부터 아이와 같이 놀고, 노후 인생을 인간답게 보낼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살죠.
 
그런데 셋째 층위 이야기가 나오면 대한민국과 노르웨이의 차이는 벌써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로 대인 관계를 통한, 창조적 노동을 통한, 그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자아 실천입니다. 그게 인생의 진수며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나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고, 이름 모를 타인을 위해 그저 봉사하기가 좋아서 봉사를 해주고, 그리고 나만이 남길 수 있는 그 어떤 독특한 말, 글, 그림, 악보 등등을 남에게 남기고 가는 것.... 적어도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불법을 광설하고 의발 전수하고 상구보리하화중생할 만큼 했다, 이제 가면 된다"하여 안심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만족스러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만족스러운 인생의 복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컨대 우리 신분과 학력, 돈 등등 외부적 요소들이 다 바뀌어도 우리를 계속 사귈 친구들은 몇 명이나 있는가요? 사실, 우리 대인 관계에서 "상호 이용"을 빼면 남을 게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는 남의 심금을 울려 이 세상의 마음의 밭을 조금이라도 더 정토처럼 가꾸는 게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노동 중의 99%는 대개 그 어떤 독립적 의미가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 마음 속에서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생각, 감정 등을 빼면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 없는 벌이, 오락, 상품화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묻히고 말죠.
 
바로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뜻"을 잃은 세계에서는 진보활동이란 그 "뜻"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해당될 것입니다. 진보/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컨대 "나만의 안목" 같은 게 생깁니다. 연예계부터 "경제 회복"에 대한 당국의 망설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그 모든 허위, 가식, 거짓말, 모든 거품에 대해서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흐름에 몸과 마음을 그저 맡기기만 하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는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면 소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상호 이용 등이 개입되지 않는, 동지적 관계의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사회주의란, 단순히 "집권을 위한 정당 운동"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도 당연히 있지만). 이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한,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죠. 종교가 이미 다 상품화돼서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야말로 예수와 석가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마지막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진보 정당 지역 위원회에서 문학 토론, 종교 토론, 인생 토론 해도 좋은 것 같고, 아마추어 연극, 인디 밴드 콘서트 등이라도 해서 돈으로 매개되어지지 않는 "삶"을 즐겨도 좋은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란, 문화가 상품화돼 죽어버린 시대에 인류의 문화를 끝내 지켜보겠다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0년대적인 도식주의, 도그마주의에 아직도 빠져 있는 일부의 분들이 그걸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장일기장 200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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