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10.5.24 이명박 정권의 ‘소탐대실’

지리적으로 보나 사회 분위기로 보나 노르웨이는 한국과 거의 다른 세계로 보이지만, 최근 며칠간 천안함 소식은 노르웨이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크게 다루어졌다. 천안함의 수수께끼가 풀려서 그렇다기보다는 가면 갈수록 각종 의문이 증폭되고 한반도를 주축으로 돌아가는 동북아 안보상황의 미래가 불투명해져서 그렇다는 느낌은 든다.

합동조사단이 비록 “북한 어뢰공격의 확증을 찾았다”고 발표하지만, 항적·교신기록의 공개로 뒷받침되지 않는 ‘결과 발표’는 새로운 의문들을 불러일으킨다. 북한 잠수함이 한국 해역에 잠입해 어뢰를 발사하고서 유유하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한국 해군의 경계망이 허술하단 말인가? 침몰해역에서 수거됐다는 파편만 가지고 “바로 천안함을 침몰시킨 북한 어뢰”라고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명확한 해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지금 천안함 침몰의 책임을 북한에 돌리는 한국 당국이 과연 앞으로 남북관계를 장기적으로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천안함의 비극이 정말로 북한 소행인지 아닌지는 이 시점에서 필자로서는 최종적 판단을 유보하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북한 공격설’이 이미 국내의 광범위한 보수층 사이에서 하나의 ‘통설’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정부 발표 자체에 대해서는 신뢰가 비교적으로 낮지만, 미디어 공세와 압도적 ‘애국주의’ 분위기 조성으로 약 60∼70%의 한국인들이 ‘북한’과 ‘천안함’의 관련성을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차원에서는 이명박 정권과 보수매체들이 본인들의 정치적 과제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볼 수 있다.

천안함 사건 등을 이용해서 냉전기의 ‘레드콤플렉스’를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일본의 반북 정서나 미국의 9·11 이후의 안보공포와 같은 현대적인 안보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재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새천년형 안보주의와 박정희 시대 반공주의의 결정적 차이는 ‘반공’ 퇴색이다. 안보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북한은 1970년대식 ‘공산 악마’라기보다는 미국 보수층이 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처럼 “음흉하고 공격적이고 민주사회와 평화 공존할 수 없는 광신주의적 집단”으로 재현된다. 오리엔탈리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의 “가난하고 후진적이면서도 스스로 진보할 능력 없이 늘 도발만 일삼는” 북한이, 100년 전의 유럽 제국주의의 도식대로 ‘선진적인 대한민국’에 의해서 ‘계몽·개조·지도’되지 않는다면 미래로 나아갈 방법은 없다. 우월감으로 가득 찬 이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보수층 속에서 나름의 이념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명박 정권은, 민생 방면에서의 각종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40∼50%의 지지율을 얻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순전히 국내정치의 부속물로 취급해온 이명박 정권의 ‘성공’은 ‘소탐대실’격이다. 집값 폭락이 아직 그나마 모면되고 수출경제가 그래도 여전히 돌아가는 등 경제적 현상유지가 가능한 한 반북 안보주의 이데올로기가 국내적으로 보수층 결집 기제로서의 기능을 계속 발휘하겠지만, 그 일차적 대가는 북한 지배층과의 ‘소통 가능성의 증발’일 것이다. 전 정권의 ‘햇볕 정책’을 믿고 대남 화해 모드로 들어갔다가 이처럼 ‘소박’을 맞은 북한이, “더는 속지 않겠다”는 속셈으로 이제 남한 지배자들의 어떤 말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할 가능성은 크다.

미국, 일본에 뒤이어 한국 정부로부터도 달콤한 약속을 들었다가 끝내 ‘바람’ 맞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북한 지배층은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것이고 유럽과 중동, 동남아 등의 자본에 계속 ‘러브콜’을 보내야 할 것이다. 경제·외교적으로도 남북 사이의 거리가 계속 멀어질 것이지만, 한국 군사예산의 지속적 증가에 발맞추어 북한도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반민중적·군사주의적 ‘선군’ 정책을 계속 추구해야 할 것이다. 결국 한국 보수층의 이데올로기적 결집의 대가는 분단의 완전한 영구화와 한반도의 지속적 군사화, 폭력화일 터인데, 바로 이와 같은 일을 두고 ‘소탐대실’이라고 하지 않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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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소식을 들을 때 느끼는 것은 일종의 ‘기시감’이다. 방송사 “좌파 청소”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전직 교수(!)를 보거나, 정권과의 유착에 대한 강한 의혹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 종단의 지도자를 보거나, 옛날에 이미 본 듯한 느낌이다. 지배자의 충신이 되는 데에 스스로 자긍심을 내비치는 ‘지식인’, ‘반공’이나 ‘호국’의 기치를 내걸어 지배자들과 어울리는 종교인…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일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일상’과 질적으로 다른 ‘사건’ 하나에 최근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고려대 여학생이 영혼이 없어진 대학을 자퇴 내지 거부하기로 한 일이었다. 이 결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단순히 기업화되어가는 대학의 타락과 이 타락을 부추기는 ‘기업형 국가’의 문제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인간이 왜 사는가, 우리가 인생들에 부여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이 여학생을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취업학원’이 돼버린 대학을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한다. ‘취업’이란 무엇인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다수의 무산자들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 소유자들에게 파는 방법, 즉 생존의 방법이다. 동물이면 단순한 생존 이상을 구하지 않겠지만,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에게 생존 이상의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데에 있다. 만족스러운 인생의 필수조건은 생존이겠지만, 충분조건은 자아실현, 즉 자기만의 꿈을 가꾸는 것이다. 어르신들을 도와주는 사회복지사가 되려는 꿈이든, 모든 이들에게 ‘소리’를 통해 기쁨을 주는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꿈이든, 무슨 일을 해도 늘 여유를 두고 역사책을 읽는 인문학 애호가가 되려는 꿈이든, 꿈이 없는 인생은 곧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 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어느 정도 복지국가의 기틀이 잡힌 사회에서는, 대학이란 꿈을 찾으러 오는 곳으로 인식된다. 4년 전에 필자가 재직하는 대학의 중국학 전공 학생 150명에게 물어본 결과 전공을 선택했을 때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나 취업 가능성을 생각한 이는 3∼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그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중국과의 “만남”을 원해서 왔다고 응답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공부관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사회복지사를 꿈꾸어도 사회복지사의 59%가 비정규직으로 고생한다는 현실 앞에서 졸업 후에 비정규직으로 전락해 등록금 대출금을 갚을 능력도 없지 않을까 겁이 나고, 개인레슨의 천문학적 비용과 음악인 취업시장의 포화상태로 집안이 부유하지 않은 한 음악인이 되려는 꿈을 애당초부터 접고, 아르바이트와 ‘스펙’ 쌓기에 정신없어 인문서를 읽는 걸 ‘사치’라고 여기게 되고…. 사회에 의해서 제어되지 않는 시장의 지배하에 사는 이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영원히 불안해서 꿈까지 생각할 심적인 여유가 생길 리 없다. 그저 ‘빵’을 위해 앞만 보고 계속 달려야 할 뿐이다. 기업형 국가, 기업형 대학의 현실에서는 우리는 꿈을 빼앗긴 채 하루하루 단순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해야 하는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동물농장이 된 대학을 탈출해 ‘인간’으로서의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것은 이번 ‘대학 거부 사태’의 본질이 아니었는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 사회에 대한 ‘거부’를 선언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본면목을 되찾기 힘든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한겨레신문 2010.3.29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ps : 물론 그 여학생의 선택을 존중한다. 내 개인적으로 힘든 선택이고 고귀한 선택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물농장'같은 이 세상에 순응(?)하며 적응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약육강식의 이 사회의 진면목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많은 숨어있는 '거부자'들을 사회의 양지로 떳떳이 나오게 할 수 없는 사회의 분위기와 구조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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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하도 빡빡한 인생을 사느라 거의 소설책을 못보는데 한때에 영어를 배울 겸해서 영미권 소설 - 주로 이미 "고전급"이 된 책 - 을 좀 많이 본 일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이상하게도 지금도 그램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 (1955)은 가장 기억에 잘 남습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안좋게 보시는 분들이 믿으실는지 모르지만, 그 책은 소련 때에 (1950년대에) 영문 원문 그대로 소련에서 재판되기도 하고 번역도 돼 러어로도 나왔습니다. 저자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을 꽤나 냉소적으로 보는 전직 영국 스파이 출신인데, 소련에서 그 책을 삭제할 것도 없이 이렇게 친절히 내준 이유는 미국의 월남 개입에 대한 냉소적인 비관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아프간과도 다를 게 없는데, 경험이 풍부한 그램 그린은 월남이 미국의 계획대로 어차피 살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결국 그 특유의 길 - 일종의 유교화된 국가사회주의의 길 - 로 필히 갈 수 밖에 없다는 점 등을 다 간파해 책에서 그걸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제2의 자아" 격인 토마스 파울러 (영국 기자)가 월남을 "구제하겠다"는 선민의식에 불타는 미국 공작원 올든 파일에게 그걸 역설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월남의 농촌으로 가보거든 농민들의 원한이 섞인 온갖 인생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월맹 (越盟) 간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이공 정부의 관료라는 자들이 대체로 약탈자 이상이 못되고 불란서인 등이 외국 침략자들인데 월맹 간부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리고 민족 해방에 대한 연설로 농민들에게 고상한 인생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우리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란서와 미국과 그 현지 대리인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현지인과 소통이 안되고 현지인들에게 그 어떤 집단적인 "인생의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이상 그들의 분투는 필패라는 건 그 냉소적 기자의 지론이었습니다. 뭐, 사실, 아프간에서 미국이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대로 설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제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바로 "인생 의미 부여"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의미이었습니다. 물론 그린이 이야기한 월맹 간부들은 사실상 어디까지나 유교적 목민관과 계몽주의자를 겸비한 이들이었고, 그들이 농민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어주었다기보다는 농민들을 "조직 통솔"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통사회 해체기로서는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훈육/피훈육" - "통솔/피통솔"의 관계는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로서는 적합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로서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꼭 그 때뿐만 아니고 지금이라 해도 그대로 유효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전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없는 지상낙원을 꼭 건설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게 어디까지나 혹세무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굳이 확률을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가 일련의 국지전을 통해 패권 재배치가 되어 보다 야만적인 자본주의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이성에 입각한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실행할 가능성보다는 훨썬 더 높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 오늘의 일본처럼 - "개혁사기꾼"형, "노빠"형 정치꾼들이 일본 민주당 식의 잡탕식 "개혁" 정당 하나 더 조립해서 언젠가 정권을 탈환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약간 다듬어서 계속 과거대로 운영하는 것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집권보다 훨씬 더 현실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스템의 위기가 아주 커져 진보정당의 집권이 부르주아에게마저도 시스템 전체를 구제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그런데 "진보"할 가치는, 그 무슨 "집권"에만 있는 것은 꼭 아닙니다 (이 부분도 물론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옛날 유인석 선생이나 최익현 선생이 기의하신 것은, 왜적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인간답게 마지막까지 살든지, 그게 안되면 적어도 인간답게 죽어 금수 같은 왜양이 설치는 이 더러운 세계에서 살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굳이 "죽음"을 갖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대의는 같을 것입니다. 사회주의하는 목적이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함"일 듯합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말고 등등은 다 부수적 부분들이죠.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저의 가장 기본적 층위는 생물적 생존입니다. 먹고 자고 성관계 맺고 번식하고 자녀 키우고 아플 때에 약을 먹고, 그리고 자연사하는, 이런 것입니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 기본적 생존마저도 노동자에게는 거의 "꿈" 같은 이야기이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못먹고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아직까지 제약이 좀 있지만 (세계 최장 노동시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많은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 자녀 양육에 있어서의 문제들과 출산율 저하 경향, 무상 의료의 부재로 말미암은 제문제 등) 일단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 정도는 다소 보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층위는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입니다. 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젊은이로서 연애를 할 만큼 해보고, 어른으로서 부모에게 제대로 해드리면서 아이를 잘 키우고, 노후 생활을 조용하고 안정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보내고, 이런 것입니다. 아이의 절대 대다수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바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고, 집에 밤 한 시에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들의 빈곤율이 약 40%에 달하는 이 위대한 토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째 층위 정도는 벌써 거의 보장 못하죠. 한데, 제대로 된 복지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도 보장해줄 확률은 좀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도면 아이 때에 제대로 놀고 젊을 때에 제대로 연애와 섹스를 즐기고, 부모가 되면 저녁 5시부터 아이와 같이 놀고, 노후 인생을 인간답게 보낼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살죠.
 
그런데 셋째 층위 이야기가 나오면 대한민국과 노르웨이의 차이는 벌써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로 대인 관계를 통한, 창조적 노동을 통한, 그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자아 실천입니다. 그게 인생의 진수며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나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고, 이름 모를 타인을 위해 그저 봉사하기가 좋아서 봉사를 해주고, 그리고 나만이 남길 수 있는 그 어떤 독특한 말, 글, 그림, 악보 등등을 남에게 남기고 가는 것.... 적어도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불법을 광설하고 의발 전수하고 상구보리하화중생할 만큼 했다, 이제 가면 된다"하여 안심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만족스러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만족스러운 인생의 복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컨대 우리 신분과 학력, 돈 등등 외부적 요소들이 다 바뀌어도 우리를 계속 사귈 친구들은 몇 명이나 있는가요? 사실, 우리 대인 관계에서 "상호 이용"을 빼면 남을 게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는 남의 심금을 울려 이 세상의 마음의 밭을 조금이라도 더 정토처럼 가꾸는 게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노동 중의 99%는 대개 그 어떤 독립적 의미가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 마음 속에서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생각, 감정 등을 빼면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 없는 벌이, 오락, 상품화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묻히고 말죠.
 
바로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뜻"을 잃은 세계에서는 진보활동이란 그 "뜻"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해당될 것입니다. 진보/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컨대 "나만의 안목" 같은 게 생깁니다. 연예계부터 "경제 회복"에 대한 당국의 망설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그 모든 허위, 가식, 거짓말, 모든 거품에 대해서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흐름에 몸과 마음을 그저 맡기기만 하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는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면 소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상호 이용 등이 개입되지 않는, 동지적 관계의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사회주의란, 단순히 "집권을 위한 정당 운동"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도 당연히 있지만). 이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한,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죠. 종교가 이미 다 상품화돼서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야말로 예수와 석가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마지막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진보 정당 지역 위원회에서 문학 토론, 종교 토론, 인생 토론 해도 좋은 것 같고, 아마추어 연극, 인디 밴드 콘서트 등이라도 해서 돈으로 매개되어지지 않는 "삶"을 즐겨도 좋은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란, 문화가 상품화돼 죽어버린 시대에 인류의 문화를 끝내 지켜보겠다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0년대적인 도식주의, 도그마주의에 아직도 빠져 있는 일부의 분들이 그걸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장일기장 200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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