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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안타까운 소식, 아니 충격적인 소식 중 하나가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 관한 뉴스이다. 나 또한 학교에서 근무하고 여하튼 현재의 교육감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표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문제이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보수 언론의 태도는 역시나 '물 만난 물고기'마냥 똥물에서 똥물 튀기면 좋다고 놀아대고 있다. 하지만 이중적인 잣대 또한 문제일 것이다. 뇌물이라면 모두가 그렇다고 판단하고 문제가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과도한 정치 몰이로 인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낭비할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진보, 보수 언론 모두 약간은 혼란된 논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만큼 이번 사건의 복잡성과 사안의 민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에 읽은 곽노현 교육감 관련 칼럼 중에 맘에 드는 글을 하난 스크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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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8.6   버핏과 곽노현이 칸트를 만났을 때

칸트는 이타적 행위가 의무감이
아니라 동정심에서 나왔다면
도덕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봤다

“미국인 대다수가 아등바등 사는 동안 나 같은 ‘슈퍼부자’들은 비정상적인 감세 혜택을 받고 있다. 나는 지난해 세금으로 소득의 17.4%를 냈으나 내 직원들은 33~41%를 냈다.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어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 미국의 백만장자 워런 버핏이 최근 ‘부자증세’를 촉구하면서 한 말이다. 참으로 ‘착한 고백’이다. 부자들이란 게 본디 타고난 욕심꾸러기라는 세간의 생각을 뒤집는다. 감세를 비정상적인 혜택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선 공동체를 걱정하는 ‘금융계의 현인’다운 성찰이 느껴진다. 버핏은 지난해 6월엔 “살아 있을 때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버핏의 고백에 대중은 환호했다. <엠에스엔비시>(MSNBC) 방송이 5만50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95%가 버핏의 증세론에 지지를 보냈다. “재산을 기부하면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벌이는 쇼”라거나 “부자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시장을 살리려는 속셈”이라는 따위의 지적은 묻혔다. 버핏은 여느 부자와 달리 도덕적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거지가 빵가게에 들어가 손을 벌렸다. 주인은 거지에게 갓 구운 빵 한 덩이를 건넸다. 행여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면 동네에서 장사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주인의 행위는 도덕적인 것인가?”

독일의 철학자 칸트라면 버핏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버핏에게 조금도 환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버핏은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가 보기에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또한 그 동기는 어떤 계산이나 의도가 아니라 ‘순수한 의무’에서 비롯해야 한다. 버핏의 고백은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도덕적이지 않다. 빵집 주인의 선행 역시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우려한 장삿속에서 비롯한 것이니 부도덕하다.

“박 교수가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거 과정에서 많은 빚을 져 자살까지 생각한다는 얘기였다. 박 교수의 성품상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처지를 모른 척할 수만은 없어 2억원을 지원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2억원을 줬다고 시인하면서 설명한 전후사정이다. 박 교수에 대한 동정이 지원으로 이어지는 사연이 절절하다. 금품이 오가는 게 문제가 됐을 때 흔히 나오는 “몰랐다”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따위의 변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신의 행위를 이타적 선행으로 규정하는 곽 교육감의 해명은 2억원을 ‘선의에 입각한 돈’이라고 명명한 데서 더욱 선명해진다.

하지만 칸트는 곽 교육감에게도 결코 환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칸트는 이타적 행위가 의무감이 아니라 동정심에서 나왔다면 “그것이 아무리 옳고, 아무리 다정해도” 도덕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봤다. 동정심은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존중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행의 동기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야지, 자신에게 만족감이나 기쁨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동기가 진실을 숨기거나 잇속을 챙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위선이다.

버핏과 달리 곽 교육감에게는 비난이 쏟아졌다.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칸트가 보기에 둘 다 도덕적으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곽 교육감에게만 가장 부도덕한 사람에게나 할 손가락질을 했다. 대중은 버핏의 고백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곽 교육감의 해명에 속지 않을 만큼 현명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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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글이다. 우리들이 모르더라도 슬픈일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어디 기쁜 '죽음'이 있을까 모르지만, 현시대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죽음은 어쩔수 없이 아무도 모르는 '슬픈' 죽음 뿐이다. 여기 또 '슬픈' 죽음이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뜻한 바를 위해 매진해왔을 이 젊은이에게 삼가 조의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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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입생의 죽음과 세계수준 연구중심 대학

지난 1월 8일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신입생 한명이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이 학생은 국내외 로봇 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쓴 젊은이였고, 입학사정관제에 따라 잠재력을 인정받아 전문계고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2009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일반고를 다니다가 로봇 공부를 위해 전학했을 정도였다니, 마침 새로 생긴 특별전형제도로 합격했을 때 본인과 가족의 기쁨과 기대는 누구나 짐작할 만하다.

이 학생은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기 어려웠다고 한다. 수학과목에서 낙제했고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들이 버거워 학사경고가 나왔다. 언론들은 입을 모아 과학고 출신보다 수학능력이 취약한 일반고·전문계고 출신을 위한 사전교육 프로그램이 미비하다거나 학생상담 등 사후 프로그램이 튼튼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모두 타당한 보도지만, 세심한 학생지도의 부족은 어느 한 대학이 아니라 한국 대학 전체가 안고 있는 허점이다. 문제 해결방안은 이 비극에 대한 철저하고 객관적인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접근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징벌적 등록금이라는 희한한 제도

유서도 없었기 때문에 사고 전모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이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점 두가지는 다시 한번 부각시켜 따지는 일이 긴요하다. 그것은 징벌적인 등록금 제도와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라는 문제들이다. 카이스트는 입학생에게 등록금 면제와 병역혜택 등을 베풀어 과학기술분야의 영재교육을 해온 특별한 대학이다. 그런데 현 서남표 총장은 개혁의 이름 아래 2008년부터 징벌적인 등록금 제도를 도입했다. 보도에 따르면, 성적 평점이 4.3 만점에 3.0에서 3.3 미만에 머물면 이공계국가장학금으로 면제되던 기성회비를 최대 150만원까지 내야 하고, 3.0 미만은 다시 0.01점마다 6만원을 더 내야 한다. 또 8학기에 졸업하지 못하면 연 1천만원이 넘는 부담을 지게 된다.

이처럼 희한한 제도가 좋은 성과를 낳은 선례가 과연 나라 안팎에 있었는지, 어떤 납득할 만한 근거에서 이 제도가 도입되었는지 다만 궁금할 뿐이다. 육·해·공군의 사관학교도 생도가 특정 과목에서 낙제가 예상되면 개별 보충수업 등으로 보완 기회를 준다. 합격선에 도달하게끔 거듭 재교육도 하며 그런 후에야 낙제나 퇴교 조치가 뒤따른다. 엄정한 군율이 앞서는 사관학교도 이럴진대, 과학기술 분야의 수재를 육성하는 대학이 학력 보완의 기회조차 충분히 제공하지 않고 돈으로 징벌을 가하면 다 잘하리라는 식으로 나가는 일은 스스로 교육기관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금액은 웬만한 범법행위에 부과되는 벌금과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이 징벌적 제도가 전문계고 출신을 포함하여 전체 학생에게 어떤 부작용을 일으켰을지 불을 보듯 환하다.     

영어강의, 강요로 될 게 아니다

특정 대학을 비방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영어강의 문제에 이르면 그것은 최근 한국 대학을 휩쓸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드디어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수학, 과학만이 아니라 영어 역시 실력 향상에 시간과 투자가 필요한 과목이다. 전문계고 학생의 영어능력은 고교입학 시점에서도 다른 고교에 비해 평균적으로 떨어지지만, 고교 교과과정의 영어 비중도 미미해서 사실 대학입학 후에 이를 만회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재직하는 학교의 어느 공대 교수에 따르면, 과학고의 영어 비중도 일반고보다 낮아 과학고 출신 공대생들이 종종 전공 실력은 월등한 데 비해 영어 구사력이 뒤처지고 그러다보니 영어에 더욱 등한해져서 학문적 발전과 사회 진출에 지장이 많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요컨대 영어가 약한 학생에게 자기 실력을 보완할 기회를 우선 부여해야지 무조건 영어강의를 강요할 일이 아닌 것이다.

로봇 연구에 대한 열정에 불타는 유망한 젊은이가 힘든 내용의 수학, 과학을 영어강의에 대한 충분한 사전훈련 없이 허덕이며 수강하다가 낙제했을 때의 좌절감이 어떠했을까. 관심 분야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자존심 강한 인재였기에 더욱 절망하기 쉬웠을 것이다. 정반대되는 사례지만, 친분이 있는 어느 교수는 한 명문대 공대에 아들을 보냈다. 미국 유학기간에 아이도 그곳에서 몇년을 자란 덕인지 영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어느 전공과목의 영어강의는 담당교수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교재를 읽어내려가는 식이어서 고교시절에 흔히 그랬듯이 강의는 안 듣고 '자습시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물론 대학 영어강의 대다수가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은 결코 아니지만 그 부작용은 단순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돌리기 곤란하다.

성공사례 찾기 힘든 맹목적 경쟁논리

징벌적 등록금제나 하향식의 획일적 영어강의 강요는 맹목적인 경쟁지상주의나 세계화를 내세운 시장만능주의에서 비롯된 제도이며, 국내외 어디에서도 장기간에 걸친 성공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믿는다. 면학 분위기 향상을 위한 적절한 당근과 채찍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요, 대학의 영어강의가 내실있게 확대될 필요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합리적 사유와 객관적 검증이 으뜸가는 잣대가 되어야 할 대학이라면 이런 제도는 마땅히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서구 선진대학과 달리, 우리는 외국인 교수를 뽑을 때 "5년 후에는 한국어로 정규강의가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강의를 몇년 안에 영어로 하고야 말겠다는 정책을 자랑으로 삼는 대학도 있다. 물론 서구와 우리는 다르다. 비교적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쉬운 서구국가들과 달리 인도유럽어계의 영어와 알타이어계의 한국어는 너무도 달라 익히기 어렵고, 문화와 역사의 차이까지 감안하면 서구학자가 한국어를 교육언어로 사용하기는 한국학 전공자라 해도 매우 힘들다. 그만큼 교육의 언어, 학문의 언어를 무엇으로 택하느냐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육언어를 영어로 택할 때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대책이 빠진 영어강의는 재고되어야 한다. 실제로 영어강의를 밀어붙이는 몰주체적 발상은 대학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교육의 본령 지켜야 세계수준 대학도 가능해

당장 세계수준 연구중심대학(WCU) 사업은 감사원 감사에서 총체적 부실이 드러났으며 이공계의 생각있는 교수들이라면 누구나 그 허술함을 질타한다. 또 전공분야의 특성이나 학생 능력을 외면한 막무가내식 영어강의는 영어를 이미 잘하는 학생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여 교육의 본령을 벗어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입전형제도가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현실에서 다양한 전형으로 뽑은 학생을 각자의 능력과 필요에 맞춰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문제는 전면적 실태조사와 심도있는 대책이 시급하다. 대입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특별전형은 정원외로 뽑는 농어촌특별전형일 것이다. 농어촌 학생들이 생활과 학업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대학교수로 근무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접해왔지만, 의미있는 분석자료를 읽어본 기억이 없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교육당국이나 개별 대학이 시행한 지 십수년이 된 이 제도의 수혜학생들을 추적하여 그 성과와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책을 마련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이처럼 안일에 젖은 교육당국과 대학, 그리고 교수진 탓에 이번 사건과 같은 비극이 터져나옴을 직시할 때만이 한국의 대학은 좌절과 죽음으로 가는 허위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회의 정신적·지적 중심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열 수 있다.

2011.1.19 ⓒ 창비주간논평 

ps : 나도 학교에서 근무한다. 매번 문제가 있을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말이 "어쩔수 없다"이다. 교실에 학생은 많고 할 일은 많고 세세하게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 들여다보고 신경 써줄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싶지만. 

물론 구조적인 문제가 너무 많다. 솔직히 애기해서 교실에 40명의 학생들에(지각, 조퇴, 결석 체크에 틈틈이 담배에 수업태도 불량, 학부모 전화, 면담, 학생 상담 등등) 수업 준비에 기타 학교 잡무에...개인적인 사적인 고민과 문제를 차치하더도 나의 일과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아이들 개개인의 문제와 사정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해 줄 상황이 솔직히 되지 못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직업적 사명의식에 의해 해야될 부분은 해야한다. 그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힘들다. 내 개인을 포기할수는 없지 않은가? 애기하다 보니 또다른 변명같다. 

부디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가오는 2011년에는 좀더 세심한 인간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이 비극적 사건을 통해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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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문으로 이 안타까운 뉴스를 접했는데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많은거 같아요. 그리고 모든 학생들을 개개인 관리하는게 힘드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진지하게 검토해보는 것도 좋을거 같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이런 사건을 대학교만 국한되어 보는 것도 안되구요.

햇빛눈물 2011-01-22 12:06   좋아요 0 | URL
네...사실 대학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종사하는 당사자건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건 모두 정말로 진지하게 '교육'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슬픈일이에요..
 

두달여간의 망설임을 뒤로 한고 드디어 질렀다. 헨슬러 바흐 전집!!  다른 전집과는 질이 다른 전집이다. 여러 연주자들 연주를 전집을 만들기 위해 짜집기 한 다른 전집과는 다른. 바흐 전문가인 헬무트 릴링이 1975년부터 2000년 까지 직접 연주자 선택하고 지휘를 하며 녹음한 앨범의 집대성체가 바로 이 전집이다. 내가 아직 바흐까지는 잘 몰라 살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바흐는 언젠가는 내가 들어야 할 음악이고 알아야 할 음악이기에 큰 맘 먹고 구입했다. 옆에 있는 놈은 같이 구입한 EMI에서 나온 로스트로포비치 녹음 전집이다. 집에서 바흐 무반주첼로 모음곡 DVD만 들어봤는데 아주 좋다. 성당같은 곳에서 홀로 첼로를 켜는 로스트로 할배의 모습이 왠지 좀 쓸쓸해 보이기도 하다. 

 

  

내부 모습이다. 한줄로 수납되는게 아니라 3줄로 칸이 나뉘어져 있다.

  

가장 큰 단점은 시디 낱장 종이가 아주 얇다. 창호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리고 개별 시디의 정보가 케이스에 없어 일일이 부클릿을 봐야하는 단점이 있다. 

요즘 너무 시디를 사서 이제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계속 사고 싶은 것들이 나온다. 하루에 시디 3장씩 들어도 언제 들을지 모를 양이 있지만 그래도 계속 가지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욕심이 끝도 없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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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_6 2012-05-16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부러워요..ㅠ저도 이 앨범을 뒤늦게 찾아봐서..ㅜ그래도 네이버뮤직에도 똑같은 앨범이 나와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이 앨범을 MP3로 담아서 다니는데..공원에 앉아서 들으면은 더 없이 좋더라구요~

햇빛눈물 2012-05-17 07:18   좋아요 1 | URL
저도 한동안 전집류를 많이 구매했는데, 생각보다 잘 듣게 되지 않더군요. 물론 핸슬러 바흐 전집이야 너무 좋긴 하지만...그래서 요즘은 낱장으로 구매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다보면 묘하게 어떤 분위기...예를 들면 말러 교향곡 1번의 4악장 어떤 부분을 듣고 있는데 때마침 따뜻한 햇살과 주변의 잔디밭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런 경험이 많더군요. 하하~~ 좋은 음악 많이 들으셔요~~

2013-07-22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지오웰의 신간이 얼마 전에 출간되었다. 조지오웰하면 <1984>나 <동물농장>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아직 난 둘 다 완독해보지는 못했다. ㅠ.ㅠ 

기사에도 나와있듯, 내가 이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중에 하나는 오웰의 궁금증에 중첩되는 '내'가 왜 글을 쓰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에 관심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도 일상의 밖 풍경, 냄새에서도 어수선한 풍취가 느껴진다. 그 어수선함이 날 이 책에 끌리게 만드는 듯 하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건 이런 어수선함에도 그 모든 걸 날려버릴수 있는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나의 가족과 휴식처가 있다는 사실이다. 

조지 오웰의 책들을 정리해본다. <동물농장>은 여러 출판사에서 많은 종류가 나와있다. 그 수 많은 다양한 표지가 눈에 띈다. 표지만 봐도 재미있을 정도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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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1 한겨레21 제829호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아름다운 글만 썼겠지”

버마 식민지 경찰부터 부랑자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까지…

조지 오웰의 치열한 체험이 낳은 ‘정치적’ 에세이 29편 <나는 왜 쓰는가>

짐작하건대 이 책을 서가에서 집어드는 대부분의 사람은 조지 오웰이 왜 쓰는가를 궁금해한다기보다는 ‘내’가 왜 쓰는가를 더 궁금해할 것이다. 남이 글 쓰는 데 이유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이라면 평소에 글을 쓰든 안 쓰든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 그 이유다. 위대한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에 비춰 한 조각이라도 자신과 닮은 점을 찾는다면, 혹은 그 작가가 타고난 문학 천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면, 읽는 이는 적어도 ‘조지 오웰만큼은 쓰겠다’는 환상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래서 어쩌면 마음속 깊이 간직한 욕망을 다독이는, 위로와 희망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펴냄)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이미 너무 유명해 여러 장르로 변주되거나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줬던 소설 <동물농장>과 <1984> 외에도 오웰은 많은 작품을 썼다. 오로지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탓이다. 그래서 47살의 짧은 생을 살았던 작가는 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 외에도 서평과 칼럼을 포함한 수백 편의 에세이를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생전에 다 묶이지 못했던 그의 에세이를 모아 4권으로 엮은 저작집 중 옮긴이가 29편을 골라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책의 중반이 한참 지나고야 나오는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지 않아도 독자는 그가 ‘왜’ 글을 쓰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부랑자 임시숙소에서의 며칠을 그린 ‘스파이크’,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을 쓴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명문 이튼스쿨 졸업생 중 유일무이하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한 경험을 살려 쓴 ‘코끼리를 쏘다’ 등은 오웰이 직접 몸으로 겪고 자신의 시선으로 옮긴 당시의 세상이다. 르포 성격을 띤 이 에세이들이 쓰인 동기는 겪은 이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시절의 혼란스러움’일 것이다.

이는 책의 여러 장을 넘겨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만나는 한 문장과도 연결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정치’가 글을 쓰게 한 것이다. 그는 글을 쓰는 이유를 4가지로 요약해 말했는데(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이 중 네 번째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하는 책을 썼을지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일상에 관한 따뜻한 마음을 담은 에세이도 눈에 띈다. ‘물속의 달’은 오웰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펍(선술집)에 대해 쓴 글이다. ‘물속의 달’에서는 맛있는 맥주가 손님들의 식감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분홍빛 머그잔에 담겨 나온다. 인자한 여자 바텐더들은 손님 대부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아무에게나 ‘오빠’ ‘언니’라 부르지 않는다. 꽤 큰 뜰이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다. 아빠만 밖에 나가고 엄마 혼자 집에 남아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서글픔 따위는 날릴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현실에는 없는, 오웰의 상상 속 펍이다. 이 에세이를 쓴 동기는 그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와 연결지을 수 있겠다. “미학적 열정.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여 차마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일까, 놓치기 싫은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로 나타났다. 이 에세이의 영향으로 영국에는 ‘물속의 달’이란 이름의 펍이 많이 생겼고, 이 글의 내용에 착안해 만든 펍 ‘웨더스푼’은 현재 700여 개 체인을 거느리고 있단다.

이 시대에 곱씹어볼 만한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선별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대부분의 글은 현재의 여러 가지 정황과 연결된다. 약소국과 강대국의 불공정한 관계, 억압적인 교육, 부랑자나 빈민층의 문제가 연이어 떠오른다. 무거운 주제일 법하지만 대부분의 문장은 위트 있고 거기 담긴 감정은 솔직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글을 쓰는 이유 중 첫 번째로 꼽은 ‘순전한 이기심’을 두고 쓴 문장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굳이 쓰는 일에 목매는 이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쉬이 공감을 줄 법한 솔직함이 문장과 단어 사이에서 문득문득 솟아오른다.

한국의 현재와 연결되는 20세기 중반의 세계

음악에서 뜻 없이 쓰이는 음표 하나 없듯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29편의 에세이는 개개의 의미를 품고 하나의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편곡’해 읽어보자. 쓰인 순서대로 배열된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적잖이 띠고 있으니 오웰 생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겠고, 여러 장을 건너뛰어 ‘나는 왜 쓰는가’를 먼저 읽은 뒤 각각의 에세이들이 어떤 동기로 쓰였는지를 짐작하며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그러다 보면, 쓰고 읽는 통로가 많아진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자꾸만 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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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로’가 남해안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간 7일 오전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서울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하늘이 드러났다.(왼쪽사진) 하지만 이날 오전 태풍을 피해 어선들이 정박한 경남 통영 인평동 포구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 있다. 김태형 기자, 통영/신소영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신문 2010.9.8  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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