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상봉 교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진정성과 현실참여 의지도 있지만, 글의 명쾌함과 시원함에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3호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나는 연신 감탄사를 내 뱉었다. 시원하다. 정말 시원하다. 군더기가 없다. '낡은 진보와 이별하라', 난 교사로서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순간 '낡은 전교조와 이별하라'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언젠가 이와 관련된 글을 하나 쓰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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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 8월(23호)  낡은 진보와 이별하라 

한때 나는 민주당에 적을 두고 있는 옛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아니 저분들이 왜 진보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을 택해 정치를 할까’ 하고 철없이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는 이른바 진보정당이라 자처하는 정당에 몸을 두고 정치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이 왜 민주당으로 가지 않고 굳이 진보정당에 자리를 잡고 정치를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진보정치와 진보정당 건설을 입에 올리는 정치인들에게 니체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었듯이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아직도 진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진보는 죽었다! 하지만 관성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진보의 사망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오해는 계속되고 우리의 선량한 열정은 부질없이 낭비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유럽 진보정당의 중요한 대의는 자본주의의 극복과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었다. 노동자로 사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 존재 방식이 된 우리 시대에, 노동계급을 자본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럽의 진보정당은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삼고 100년을 싸워왔다. 비록 처음의 혁명적 열정이 세월 속에 식고, 하나였던 대열도 여럿으로 갈라졌으나, 지난 세기 사회주의에 기반한 유럽 좌파 진보정당 운동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며 역동적인 정치적 운동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깃발을 들고 시작된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오늘날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대의는 아무도 믿지 않는 구두선이 된 지 오래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니, 자본주의를 폐지하더라도 경제는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말하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경제가 어떤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예들은 사회주의적 경제로 통하는 길을 생산수단의 국유화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생산수단이 국유화된다 해서 자본주의 경제가 전혀 다른 종류의 경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레닌 이후 공산권 국가가 채택한 ‘국가 관리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수십 년간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뒤 오늘날 중국처럼 공산주의를 내걸고 있는 국가조차 경제에서는 자본주의국가와 다름없이 되었다. 공산국가의 상황이 그렇다면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초기의 열정은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와 사회복지 확대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몇몇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무슨 대단한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오늘날 서구의 사회주의 정당이란 한편으론 자본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론 보편적인 사회복지 체제를 추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유고슬라비아에 군대를 보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 사회주의 진보정당의 대의였다면, 그런 진보정당은 이제 죽었다.

박근혜도 외치는 ‘복지사회’

허탈한 일 아닌가? 우리는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 제대로 싸움을 시작해보지도 못했는데, 바깥세상에서는 그렇게 싸움이 끝나버렸다. 지난 시절 우리에겐 언제나 자본주의 타도보다 더 절박한 정치적 과제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 우리에겐 민족의 독립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다. 서양의 사회주의 진보정당이 민족주의를 퇴행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고 있을 때, 이 땅의 진보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눈물로 껴안았다. 그 역사는 해방되었다고 해도 끝나지 않았다. 보수 우익이 외세에 기생하는 매국노들인 나라, 전직 국방장관들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이 물구나무 선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어쩔 수 없이 진보의 몫이었다. 그뿐인가?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고착된 독재는 다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제를 진보의 몫으로 맡겼다. 게다가 그 독재 권력이 지역 차별과 맞물리면서 급기야 호남과 영남을 나누는 지역적 경계를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도대체 이 땅에서 진보는 무엇이고 보수는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보수정당이 해야 할 일까지 진보정당에 맡기고 나면,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땅에서 진보정당이 겪는 특별한 곤경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에 둔감해진 진보정당

좀더 절박한 현실적 과제에 떠밀려 본래적인 진보정당의 과제인 반자본주의 투쟁은 늘 나중으로 밀려나 한 번도 진보 정치의 중심적 의제가 된 적이 없으므로, 대중의 진보적 정치 의식 역시 고작해야 독재 타도를 넘지 못한다. 보수든 진보든 정당정치는 대중의 의식 수준과 분리될 수 없는데,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유권자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꿈꾸지 않으니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아무리 설득한들 반향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이것이 진보 운동가나 정치인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적으로 부패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는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도 하나둘 지쳐 더러는 한나라당으로, 더러는 민주당으로 흩어진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자본주의 극복 같은 것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소박하게 복지국가라도 된다면 감지덕지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그것을 새로운 진보의 깃발로 삼으려 한다.

누가 복지국가를 싫어하겠는가? 박근혜 의원조차 복지국가를 좋아한다. 이는 복지국가 건설이 우리 시대의 새로이 등장한 보편적 시대정신임을 증명해주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는 진보정당을 보수정당과 구별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독재 타도가 아무리 절박한 과제라 하더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궁극적 존재 이유가 될 수 없듯이, 복지국가가 아무리 바람직한 과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이룰 수는 없는 일이다.

서양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그럭저럭 적응해 살기로 한 까닭은 그들이 그 괴물을 나름대로 길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그 괴물과 그토록 오래 싸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 괴물을 그 정도라도 길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는 민주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정당이라 자처하는 어떤 정당도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이 없었으므로, 자본가들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지극히 역설적이게도 지난 10여 년 이른바 민주 정부 아래서 나라는 아예 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기업의 나라가 되었다. 기업은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그리하여 국가가 전반적으로 기업에 동화된 ‘기업국가’로 전락하면 반드시 시민의 자유가 근본에서 위협받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이명박 정부의 독재적 행태는 우리가 우연히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뽑았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기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재벌 기업 또는 재벌 가문의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 말했듯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CEO)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재벌 기업의 CEO에게 민주적인 기업 운영을 바랄 수 있는가? 굳이 한국이 아니라도 현재의 자본주의 기업지배구조에서 모든 CEO는 기업의 독재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주식회사가 가장 봉건적인 가족 지배 아래 있다. 원래 자본주의 기업의 역사에서 주식회사란 가족  경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출현한 것인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주식회사가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을 가진 재벌 가문에 의해 완벽하게 사유화되어 있다. 또 그런 재벌 기업에 의해 국가기구가 포위되고 장악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퇴행은 그런 국가 기업화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정부 권력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모두를 위한 공화국이 아닌 사적 이익 추구의 도구로 만드는 한국의 재벌 기업 체제를 해체할 궁리를 해야 한다. 

재벌 해체 없는 반신자유주의?

하지만 이 나라의 야당들은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한 책임이 모두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는 듯이 ‘반MB’를 부르짖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야 어차피 한나라당과 똑같은 ‘FTA 정당’이요 재벌당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정당조차 반MB 전선에 부화뇌동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반MB뿐만 아니라 반신자유주의를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와의 투쟁은 그 자체로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일 뿐 결코 구체적인 적과의 현실적 대립이 아니다. 마르크스 이래 사회과학은 언제나 주체 없는 구조에 대해 말해왔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과학의 길이라는 듯이. 하지만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인간의 일인 한에서, 그것의 구조는 언제나 주체성의 구조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주체,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절박한 과제다. 하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 재벌 가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체성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주체이고 만 사람이 객체인 ‘홀로주체성’이다. 신자유주의를 해체하려면 재벌 기업의 홀로주체성을 해체해야 한다.

합종연횡의 몽상에서 벗어나야

기업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처럼 폴리스가 되면 안 될 까닭이 무엇인가?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 어디에도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지면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없다. 국가의 주권이 시민에게서 나오듯, 기업의 경영자를 노동자가 선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기업의 전문경영인이, 주주가 아니라 노동자가 책임을 지는 체제가 될 때, 비로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노동의 비정규직화와 사회계층의 양극화, 그리고 자연과 생명의 파괴를 극복할 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진보정당조차 재벌 해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앞으로 우리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한국의 봉건적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원없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이 땅의 민중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한국의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할 것이다. 진보정당이 살아 있다면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자칭 진보정당들은 내심으론 자본주의 극복도, 재벌 해체도 포기했으니 주검에 지나지 않는다. 뜻이 죽었으니, 진보정당이 홀로 설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앞으로는 진보정당의 간판을 내걸고, 뒤로는 저보다 오른쪽에 있는 정당에 빌붙는 것이 진보정당의 습속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반MB 어쩌고 하면서 민주당과 동거하고, 진보신당은 진보 대통합을 핑계로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에 추파를 보낸다. 그러면서 합치면 국민이 감동할 것이라 몽상한다. 지금이 1987년인가? 만약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을 뛰쳐나와 민주당 및 국민참여당 등과 동서화합과 4대강 중단, 그리고 남북통일과 복지국가 건설을 내걸고 합친다면 나도 감동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민노당이 합치거나, 민노당 또는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이 합치는 것이 무슨 감동을 주는가? 당신 같으면 죽은 남편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늙은 과부와 야심만만한 젊은 총각의 결혼에 감동하겠는가? 살을 섞어도 어차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진보는 죽었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지금 진보정당들의 가장 치명적인 허위의식이 생겨난다.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러운 운행이니, 죽은 것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새로운 진보의 역사를 바란다면,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먼저 낡은 진보의 역사와 미련 없이 이별해야 한다. 언제나 생명의 씨앗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그러나 나 자신 속에 새로운 세계가 숨어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새로운 시대의 씨앗이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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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내가 원하는 글이다. 탁월한 선견지명과 현실 분석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름의 유희적인 성격도 띄고 있는. 나는 언제나 이런 글을 흉내나 낼수 있을까나? ㅠ.ㅠ 

 

노무현의 선견지명, 보수를 재구성하라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세종시 법안 원안은 참여정부 시절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에는 원안에 찬성하고 사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약속했으나, 취임 후 표변해 이러저런 이유를 들어 세종시 원안을 공공연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통과 당시 한나라당이 찬성한 세종시 법안을 한나라당 출신 대통령이 거부한 속사정은 알 길 없지만, 한 가지 객관적 사실은 세종시 법 원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을 때 한나라당의 대표가 박근혜 의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이 법안을 반대하고 수정안을 제출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의 결정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뜻도 있으니, 한나라당 내 박근혜계 반발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상임위원회에서 부결된 수정안을 기어이 국회 본회의 표결로 가져갔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과 한나라당 내 박근혜계 의원의 합세로 수정안은 105 대 164로 부결되었다.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박근혜 전 대표가 세종시 문제만은 예외적으로 단호한 태도를 밝혔다. 이번에도 표결에 앞서 굳이 발언을 자청해 수정안에 대한 자신의 반대 입장을 한 번 더 분명히 했다. 지난번 지방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표현되었고, 박근혜계 반대로 통과되지 않을 것이 뻔한 표 대결을 이명박 대통령이 어쩌자고 끝까지 밀고 갔는지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 ("차마 이럴줄을 몰랐다"고 하기에는 뻔히 보이는 결과였기에, 다른 수가 있거니 생각한다. 제발 좀 현명한 수이기를...)


▲ <데칼코마니>, 1966-르네 마그리트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로써 한나라당 내에서 누가 이 대통령 편이고 누가 박근혜 의원 편인지 확연히 드러났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든 2012년 총선 공천에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이것을 위해 기어이 누가 누구의 편인지 확인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라당 내에서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박근혜를 따르는 사람보다 배가 된다는 사실에만 만족해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직 모르는 것이니, 그에겐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971년의 일이다. 당시 공화당은 크게 세 계파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하나는 5·16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 출신으로서 박정희 직계, 다른 하나는 같은 군인 출신이라도 김종필계, 그리고 민간인 출신의 정치인들이었다. 당시 총리는 김종필이었는데 야당인 신민당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을 비롯해 몇몇 장관의 해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적이 있다. 공화당은 국회 다수당이었으므로 해임동의안은 단지 정치적 공세일 뿐 실제로 통과되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상대로 다른 두 장관에 대한 해임동의안은 부결되었으나,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동의안은 통과되었다.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김성곤 재정위원장을 비롯한 민간인 출신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집단적으로 해임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표결 결과를 보고받고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노해 찬성표를 던진 20여 명을 중앙정보부에 연행해 죽지 않을 만큼 구타하고 고문한 뒤 당에서 제명하고 주동자들을 강제로 정치에서 은퇴시켰다. 쌍용 창업주 김성곤 재정위원장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멋있게 기른 카이저 콧수염이 뽑혀 나갈 정도로 건강하던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그 후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몇 해 더 살지 못하고 1975년 62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여당인 한나라당 내에서 박근혜 의원은 물론 친박계 국회의원이 아무리 대통령 뜻에 반대해 표결하더라도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정보원에 불려가 고문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으니,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진보하는 것이다.

적과 아군이 선명해졌다

정치적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지만, 한국 정치에서 좀처럼 진보하지 않은 분야가 한국의 정당정치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말했듯이, 정치가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초한다면 모든 정당은 현실의 어떤 대립을 반영한다. 정당의 대립 구도가 현실 대립을 충실하게 반영할 때, 그렇게 대립하는 정당 역시 현실적 존재 이유를 얻게 된다. 그런데 현실의 대립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정당의 대립 구도 역시 그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당이 현실의 대립과 무관하게 서로 대립하게 되고, 이때 대립하는 정당은 현실의 대립을 조정하고 해결하지 못하면서 현실과 무관한 대립과 갈등을 재생산하게 된다. 지금 한국의 거대 정당 처지가 바로 그러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립은 거슬러 올라가면 남한 사회의 반독재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대립이다. 이 대립 구도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까닭에 대다수 한국인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립을 자명하고, 불변하며, 현실의 대립을 반영하는 객관적 대립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이나 언론인,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가나 학자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서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대립 구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대립 구도가 2012년 총선과 2013년 대선까지 그대로 이어지리라 가정하고 선거의 승리를 위해 각자 당을 쇄신하고 연합 정치를 궁리한다.

6·2 지방선거를 전후해 범야권에서 논의되었고, 지금도 논의 중인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이나 ‘진보 대연합론’ 같은 것도 동일한 고정관념에 따라 한나라당을 공동의 적으로 상정한 뒤, 어떻게 하면 이번 선거의 승리를 더욱 중요한 다음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궁리하는 정치공학적 계산이다. 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에게서 비난 살 것을 각오하고 감히 묻노니, 도대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아직도 그렇게 물과 기름처럼 대립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본질적 모순은 군부독재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의 우익 정당은 의회 민주주의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독재자들이 만든 정당이다. 한나라당 역시 뿌리에서 보자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그렇게 만들어진 독재자의 정당에 대항하는 정당으로 존속해왔다. 두 당의 대립은 독재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현실 적합성을 얻는다. 하지만 누가 지금 독재자인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많은 사람이 그를 과거의 독재자들과 거의 다름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왔다. 그렇게 볼 만한 면이 많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 자신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박정희나 전두환과 다르지 않은 최고권력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이미 집권 중반기에 레임덕에 빠져든 5년 단임 대통령에 지나지 않는다. 세종시 수정안의 표결에서 보듯 여당 의원의 3분의 1이 대놓고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표를 던져도 더 이상 그들을 국가정보원에 연행해 고문할 수 없다.

물론 아무리 과거의 독재정권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보여주는 반민주적 행태를 들자면 얼마든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나라당이 보여주는 극우적 행태가 민주당과의 대립 구도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민주당이 지금에 와서는 있지도 않은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진보 정당 행세를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진보 정당 흉내를 내는 것이나, 한나라당이 극우 정당으로 기우는 것 모두 현실로부터 괴리된 ‘사이비 대립’을 현실적 대립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가면이다. 근본에서 보자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정치자금을 받아 재벌을 위한 정치를 하면서 노동자에게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북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반에 대북송금 특검으로 평지풍파를 일으켜 대북관계를 냉각시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것처럼 박근혜 의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2002년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지금 이명박 정부가 이어받고 있다.

한나라당-민주당의 과장된 대결

그렇다면 무엇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여전히 적대적 대립 속에 묶어두고 있는가? 그것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 대립이다. 두 보수 정당이 모두 이 지역 대립에 기생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두 보수 정당이 사이비 대립을 연출하는 것이다.

여러 해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비웃었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나아갈 바른 길이었다. 이념적으로 차이 없는 정당들이 지역 기반이 다르다고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한, 한국 정치에 정상적인 이념적 대립 구도가 형성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한국 정치의 근본적 발전을 위해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진보의 재구성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아우르는 보수 정당의 대통합이다. ‘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통합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이제 물음을 바꾸어 ‘왜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자유선진당과 국민참여당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이 옳다.

이런 제안이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길 권한다. 첫째는 지난 6·2 지방선거의 결과다. 많은 이들이 지난 선거를 반MB와 민주당의 승리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근본에서 보면 그 선거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그것은 강원도의 이광재 후보에서 경남의 김두관 후보까지 ‘노무현 사람’들이 선거에 승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추구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번 선거를 통해 전반적 승인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 가치란 고질적인 지역 구도의 타파다. 경남에서 김두관 후보가 당선되고, 부산에서 김정길 후보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5%를 득표한 것은 적어도 부산·경남의 민심이 더 이상 이전처럼 맹목적 지역 구도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을 의미한다.

지역정당 틀 깨고 보수 대통합을

다른 하나는 이번 세종시 수정안 표결에서 보듯 한나라당의 박근혜계가 민주당과 연합해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하는 것은 이제 시작일 뿐 앞으로 계속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를 통해 민주당과 한나라당 박근혜계 사이에 실질적인 연합이 진행될 것이다. 특히 현재 진행되는 4대강 사업은 한나라당 내의 박근혜계와 이명박계를 다시 분열시키는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안이다. 4대강 사업은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만의 고유 치적으로 여기는 중요한 역점 사업이지만 세종시 수정안 이상으로 국민의 반대가 강하다는 점에서 박근혜 의원으로서는 이명박 편을 들어 선뜻 지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야당과 한나라당 박근혜계가 연합해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듯이 다시 한번 둘이 연합해 4대강 사업을 저지하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인 상상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2012년 총선과 다음해 대선에서 어떤 방식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박근혜계가 동서화합과 남북의 평화공존,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을 내걸고 합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몽상에 지나지 않지만 진심으로 한국 정치를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듯이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그리고 노무현의 후예를 자처하는 국민참여당이 지역주의를 버리고 대승적으로 통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렇게 보수 색깔이 분명해져야 진보 역시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거시적 전망을 접는다 하더라도 4대강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게 한다는 절박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 사업에 반대하는 야당은 이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조하기를 원한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7월호 김상봉
 

ps : 사실 이 글의 제목이 "노무현의 선견지명.."이라고 해서 노무현의 치적을 치하하는 내용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잘 읽어보면 그건 제목이 띄는 이글의 유희성을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 초록색 줄에 나와있듯이, "노무현의 선견지명"은 자신을 '진보'라 칭하며 행한 행동에 대해 집권 마지막에 행한 '대연정' 제안이 자신의 보수적 색깔을 확실히 한 올바른(?) 처사였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며 그렇게 되야지 상호 색깔이 분명해져 국민들의 판단이 확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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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상봉 교수다운 글이다. 우리나라에 얼마 되지 않는 교수라는 제도적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식인다운 면모를 갖춘 분인 것 같다. 이런 분이 많이 나오고 부디 김상봉 교수님도 지금과 같은 비판적인 면모를 꾸준히 이어나갔으면 한다.

 

프레시안 인터뷰 "2010.5.28 삼성과 싸우지 않는 생활진보?…가짜다" 

한때 '거리의 철학자'였던 그가 삼성을 겨냥했을 때,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대학을 떠난 뒤에도 당당했던 그였다. 공부가 좋은 직업을 얻는 수단으로 통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간단치 않다. 그의 실천과 공부가 한 덩어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삼성불매운동은 그냥 '정치적으로 옳은 일' 차원이 아니다. 서양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바탕에 뿌리를 둔 실천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지난 3월 <프레시안>에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라는 글을 기고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다. 김 교수가 주변 지식인과 활동가, 정치인들을 상대로 삼성과의 싸움에 나서도록 호소했을 때, 그를 아끼는 독자들이 맹렬한 호기심을 느꼈던 것은 그래서였다. '삼성 불매 운동이 어떤 철학적 배경에서 나온 걸까', '철학자가 이해한 삼성 문제란 어떤 것일까' 등의 의문이다.

결국 김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시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 근처에 있는 한 찻집에서 만난 김 교수는 예상대로였다. 그가 쏟아낸 말은, 미리 외워둔 수학 공식에 대입해서 얻은 결과물 같은 상투적인 논평과 달랐다. 말에 담긴 개념은 푹 익어있었고, 맥락에서 동떨어진 낱말은 찾기 힘들었다. 그가 제안한 삼성불매운동이 그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대화였다.

이날 이야기를 마친 뒤, 그는 프레스센터 18층 서울외신기자클럽에서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다. 외신기자들 앞에서 그는 삼성을 비판하는 칼럼이 <경향신문>에조차 실리지 못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대기업에 짓눌린 한국의 민주주의를 잘 보여준 사건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어 그는 외신 기자들 앞에서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 일, 삼성 주식에 투자 하지 않는 일에 전 세계 소비자·투자자가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호소에 앞서 김 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학벌과 재벌, '차별과 불평등'의 다른 표현들

프레시안 : '학벌 없는 사회' 활동을 오래 했다. 이른바 'SKY' 대학(서울대·연세대·고려대)이 배타적인 기득권을 누리는 학벌 구조를 깨는 일을 해 왔던 철학자가 갑자기 삼성 문제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김상봉 : 그동안 해 왔던 '학벌 없는 사회' 활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고 본다. 과거에는 학벌 문제가 교육 내부의 문제로만 여겨졌다.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봤던 게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이들이 사회의 권력 구조와 학벌이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을 안다. 또 스스로 학벌 권력을 포기하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SKY' 대학 진학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자발적 낙오자 되기', '내부로부터의 망명'을 감행한 경우인데, 이런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학벌 없는 사회' 활동이 성과가 있었다고 보는 이유다.

그런데 '학벌 없는 사회' 활동을 하면서 가끔 답답할 때가 있었다. 학벌 권력은 일종의 '기생권력'이다. 미국, 군부, 재벌 등 주류 권력에 기생(寄生)하는 권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학벌 권력을 해체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학벌 기득권층이 기생하는 숙주에 다가가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에 뿌리를 둔 학벌 문제와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바탕을 둔 주류 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 지어야 할까. 이게 학벌 폐지 운동을 하는 이들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학벌 폐지 운동이 결국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려면, 이런 고민을 푸는 게 필수적이다.

삼성 문제에 뛰어든 것은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학벌 문제의 근본에 도사리고 있는 게 '차별과 불평등'인데, 이것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체제다. 그리고 이런 구조의 정점에 있는 게 삼성 재벌과 이건희 회장 일가다. 이들이 누리는 특권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과 불평등'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학벌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에 분노했던 이라면, 삼성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본다.

"학벌 구조 정점에 선 서울대, 재벌 체제 정점에 선 삼성"

프레시안 : 삼성불매운동을 <프레시안>을 통해 호소한 지 두 달이 넘었다. 많은 이들이 호응했지만, 한편에서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어떤 이들은 다른 재벌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왜 굳이 삼성만 문제 삼느냐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삼성이라는 기업과 이건희 일가는 분리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건희 일가의 비리 때문에 삼성 직원들까지 모욕당할 이유는 없다는 게다. 불매운동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삼성 그룹 매출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한다는 점, 대표적인 상품이 반도체라는 점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삼성 반도체가 어디에 쓰이는지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
 

김상봉 : 불매운동에 회의적인 이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이 있느냐'라고 말이다. 삼성 비리에 대해서는 사법부도, 언론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 경우,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노동조합이 나서서 회사의 비리를 공개하고 싸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에는 노조가 없다. 결국 나머지 하나인 소비자가 나서는 길 외에는 대안이 없다.

왜 삼성만 문제 삼느냐는 지적은 황당하다. 학벌 체제를 무너뜨리려면, 결국 서울대를 겨냥해야 한다. 서울대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서울대가 기득권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혹은 SKY대학을 비켜가면서 학벌 체제를 무너뜨릴 방법은 없다. 재벌 체제, 기업독재 체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구조를 바꿔내려면, 정점에 있는 삼성을 먼저 겨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을 마치 다른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왜곡한다면, 잘못이다.

삼성과 이건희를 분리하자는 말도 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 삼성 노동자들이 이건희의 비리에 맞서 싸울 때만 가능한 논리라고 본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지 않는가.

"'우리 안의 이건희' 지우지 않으면, 삼성 불매도 소용없다"

삼성 그룹 매출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발생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삼성 불매운동을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해외에서도 삼성 불매운동이 벌어져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보는 게 옳다.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라면,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분식회계를 저지르는 기업에 대해 불매운동을 하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나라 역시 불매운동이 필요하다. 삼성은 이런 나라에 공장을 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노동인권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현지 주민들이 계속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불매운동은 필수적이다.

삼성 그룹의 가장 큰 수입원이 반도체 판매인데, 이런 부품까지 불매운동을 해야 하느냐라고 한다면, '근본주의적 입장에 설 필요는 없다'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다. 삼성이 생산한 부품까지 쓰지 않으며 생활하기란 쉽지 않다. 불매운동의 초점은 삼성 브랜드가 찍힌 완제품 및 서비스 상품에 맞추는 게 현실적이라고 본다. 불매운동의 목적이 불매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매운동은 삼성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이 집단적으로 벌이는 실천이며, 동시에 우리 내면의 욕망을 성찰하는 작업이다. 삼성을 비난하는 많은 이들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닮고 싶어 한다. '우리 안의 이건희'를 지우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이건희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설령 삼성과 이건희가 사라진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 안의 이건희'를 정직하게 들여다 보는 작업이 바로 삼성 불매운동이다.

"기업은 현대인의 폴리스…기업 민주화 없이 주체적 삶 불가능"

프레시안 : 소비자가 삼성 불매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정치권력, 사법부, 언론 등 공적 영역이 삼성 비리 앞에서 작동을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를 따른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나 박사 학위 소지자나 똑같은 자격으로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한다. 반면, 자본주의는 1주 1표다. 지분을 많이 가진 한 명이 적게 가진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다. 작동 원리가 전혀 다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려면, 법과 제도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소수에게 권력이 쏠리게끔 돼 있는 자본주의 원리가 민주주의의 기초까지 흔드는 일을 막으려면 적절한 규제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 비리에 대한 정부와 법원의 태도를 보면, 자본주의와 공존하는 민주주의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와 법원이 자본주의 원리에라도 충실한가. 역시 아니다. '1주 1표' 원리대로라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 그룹을 지금처럼 지배할 수 없다. 가진 지분이 워낙 적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모호한 상황은 삼성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학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엿보인다. 똑같이 삼성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서 있는 이념적 기반은 다르다는 이야기다. 어떤 경우는 자본주의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에서 삼성을 비판한다. 다른 어떤 경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충실하다보니 삼성에 비판적인 입장이 됐다. 삼성 불매운동을 주장하는 김 교수가 서 있는 입장이 궁금하다.

김상봉 : 내가 삼성 불매운동을 제안한 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맞닿아 있다. 기업의 작동원리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통했던 해법은, 국가가 기업을 소유하거나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해법은 이제 효용을 잃어가고 있다. 기업은 국가 속에서 잉태되었지만, 지금은 국가를 넘어선 존재가 됐다. '세계화' 때문이다. 기업은 인건비와 세금이 싼 나라로 공장을 옮겨 다니며 몸집을 키운다. 국가는 오히려 기업의 눈치를 본다.

결국 해법은 기업 자체를 민주화하는 것이다. 현대의 기업은, 개인에게 있어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와 다름없다. 사회적 삶이 일어나는 지평이 기업이다. 따라서 기업을 민주화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기업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소유권의 개념을 제대로 설정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경영권과 소유권을 분리하는 게 핵심이다. 주식을 가진 사람이 왜 노동자를 지배할 권리까지 가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출발점이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오듯, 기업의 경영권은 노동자에게서 나오는 게 맞다. 그렇다면 누가 주식에 투자하느냐고? 그래도 투자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배당금을 받을 수 있지 않는가. 기업이 낸 이익 가운데서 어느 정도를 주주에게 배당할 것인지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하면 된다. 배당을 너무 적게 하면, 자본 투자가 줄어들 테고 너무 많이 하면 기업에 재투자할 몫이 줄어든다. 기업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으면 된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면, 이건희 회장이 1퍼센트 수준의 지분만 갖고 삼성 그룹 안에서 황제처럼 지배하는 일은 생길 수 없다. 회사 돈을 비자금으로 빼돌리고,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손해를 회사에 뒤집어씌운 그에게 지분에 걸맞은 배당금을 주고 내쫓으면 그만이다.

"5·18 30주년, 이제 삼성독재와 싸울 때"

프레시안 : 기업 지배 구조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행정부, 사법부가 기업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바뀌려면 그것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운영방식을 닮는 게 선진화'라는 생각이 깊이 뿌리내렸다. 공무원들을 기업에서 연수받도록 한다거나, 정치인들이 'CEO'를 자처하는 것 등이 그 예다.

김상봉 :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뒤, 국가 위에 기업이 있는 구조가 짜여졌다. 옛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었는데, 그보다 더 답답한 구조다. 당은 그나마 통제 가능성이 있지만, 기업을 기업 바깥에서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기업 내부는 일종의 독재 체제로 운영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선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민주주의의 퇴행에 다름 아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한마디로 '기업 독재' 체제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공화국' 전통의 유무가 낳은 차이다. 이런 전통이 살아 있는 나라에서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공화국' 전통과 기업 독재 흐름이 서로 맞부딪히면서 균형을 이룬다. 반면 '공화국' 전통이 없는, 국가기구가 한 번도 온전히 공공적 기관이었던 적이 없으며, 국가기구가 소수의 권력집단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적으로 점유한 수탈과 억압의 도구로만 쓰였던 한국에서는 기업 독재 흐름을 견제할 힘이 없다.

프레시안 : 공화국 전통이 없다는 지적을 하는 지식인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절망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외부로부터 이식당한 한국 사회에서 강자의 탐욕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절망감이다.

김상봉 : 꼭 그렇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다른 전통이 있다. 저항 공동체의 전통이다. 30년 전,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모습이 좋은 예다. 지난 18일, 진보신당 광주시당은 '삼성독재 해체 투쟁'을 선언했다. 1980년 5월 신군부에 온몸으로 맞섰던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이런 선언은 의미가 깊다. 나는 지금 이 선언이 신자유주의 기업독재에 시달리는 세계인들에게 자유와 인권, 해방을 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도 전달할 것이다.

총탄이 쏟아지는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1987년 6월을 상상한 이가 있었겠는가. 아마 없었을 게다.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 광주에서 나온 선언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역사는 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왔다.

지난 30년은 '부정과 문학의 시대'…앞으로 30년은 '형성과 철학의 시대'

프레시안 : 기업 독재를 막자는 목소리는 진보 진영 안에서도 미미한 편이다. 삼성 불매운동에 몸을 던지는 진보 정치인, 활동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김상봉 : 나는 올해가 광주항쟁 30주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지난 30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출발점에 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난 30년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부정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는 '멀쩡해 보이는 현실 뒤에 있는 거짓'을 드러내는 게 중요했다.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을 학살했던 장본인들이 고개 들고 다니는 현실, 이런 거대한 아이러니를 폭로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30년은 '문학의 시대'였다고 본다. '부정의 정신',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그려내는 이미지와 환상이야말로 문학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백낙청, 김지하, 황석영 등이 지난 30년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기업독재의 시대는 새로운 정신을 요구한다. 바로 '형성의 정신'이다. 신자유주의 기업독재는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옥죈다. 그래서 여기에 맞서는 대안 역시 총체성에 바탕을 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개념이 필요하다. 나는 그 작업이 철학자의 몫이라고 본다. '형성의 시대'가 될 앞으로 30년은 '철학의 시대'가 되리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삼성 문제 외면하는 사회과학은 '불임의 학문'"

프레시안 : '철학자가 왜 삼성 문제에 나서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린다. 상당수 사회과학자들이 삼성 문제에 침묵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김상봉 : 단언하건데, 삼성 문제에 침묵하는 사회과학은 '불임의 학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어떤 이들은 용기가 없어서이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 침묵한다. 삼성 문제라는 구체적 현상을 총체성 속에서 보지 못하는 게다. 대신, 그들은 삼성이 저지른 일부 불법, 탈법 행위에만 주목한다. 교과서를 들이밀며, 거기서 벗어난 행위를 찾는데 그치는 게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그게 학문인가'라고?

모든 구체적 현상을 구체성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은 개념을 다루는 것인데, 진짜 개념은 총체성 속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짜 개념은 '형성'하는 것이다. 예컨대 집 짓는 설계도 역할을 못하는 것은 설계도가 아니듯, 현실을 형성하지 못하는 개념은 가짜 개념이다. 삼성 문제라는 구체적 현실에 관한 진짜 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과학을 '불임의 학문'이라고 규정한 이유다.

사회과학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나는 철학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철학이야말로 총체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철학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부정의 시대'가 저물어 갈 때, 철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때야말로, 이 땅의 구체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작업이 절실한 때였다. 그러나 그 귀한 시간을 철학자들은 총체성에 대한 냉소로 메워버렸다. 거듭 말하지만, 철학은 구체적 현실을 총체성 속에서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땅의 철학자들은 이런 작업을 포기하고, 대신 남의 개념을 수입해 폭력적으로 적용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그건 철학이 아니다.

삼성 문제에 철학자가 나선 것은 필연이라고 본다. 기업 독재의 구체적 발현태인 삼성과 싸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이 만들어질 게다.

"악과 싸우지 않는 진보, 결국 보수에 전용된다"

프레시안 : '총체성'을 강조하는 게 인상적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 많은 지식인들이 작고 구체적인 문제에 매달렸다. 그 사이 삼성을 포함한 재벌은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갖게 됐다.

김상봉 : 많은 이들이 '생활 진보'를 강조한다. 좋은 말이지만, 이런 주장이 '총체성을 포기한 구체성'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현실 속의 구체적인 악(惡)과 맞설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악은 구체적으로 발현되지만, 뿌리는 총체적이다. 따라서 총체성을 포기해서는 이런 악과 맞설 수 없다. 그리고 악과 싸우지 않는 진보는 결국 보수에게 전용되기 마련이다. 물론, 총체성에 대한 집착이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는 핑계가 돼서도 곤란하다.

이런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이곳에서, 삼성과 싸우지 않는 생활 진보는 가짜다."

ps : 한때 나도 삼성제품을 단 한개도 사지 않았다. 결혼 혼수 준비를 할때도 삼성 제품은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그러다, 작년 처음으로 삼성 핸드폰을 구입했다. 물론 어쩔수 없다는 핑계가 있지만... 난 개인적으로 김상봉 교수가 참 좋다. 대학에서 교수의 강의를 듣고 지도를 받고 싶을 정도로...예전에 몇번의 강좌에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참 인상도 좋고 말씀도 잘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 분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몇권의 책은 교수님의 사인을 받기도 했다.ㅋㅋ) 그래서 그 이후로 김상봉 교수의 책은 거의 빼먹지 않고 구입하고 읽고 있다.(물론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지만..)  

김상봉 교수의 책들을 한번 모아본다. '만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상봉 교수의 단독 저서이다.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내 서재에 아래 책이 모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중 읽은 책은 '도덕교육의 파시즘', '학벌사회' 뿐이다라는 사실도 알았다. ㅋㅋ 생각난 김에 우선 '자기의식과 존재사유'부터 읽어야 겠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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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 뒤에 제자들이 행여 오해할까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덧붙였다. 우주적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 평화를 짓밟는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어져 있는 것이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평화를 핑계로 어떤 불의와도 싸우지 않겠다는 사람은 틀림없이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이다. 도롱뇽 한 마리 때문에 자기의 온 육신을 걸고 세상과 싸웠던 지율 스님에서부터 최근 이 정부의 4대강 죽이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한국 가톨릭교회 주교단까지 이 땅의 깨어있는 종교인들은 싸워야 할 때 싸움으로써 그들이 진정한 평화의 수호자들임을 증명했다.

종교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정치는 어떻겠는가? 근본에서 보자면 정치야말로 싸우는 일이다. 모든 싸움은 상대가 있는 까닭에, 대개 정치집단의 정체성은 그들이 싸우는 상대가 누구냐를 통해 드러난다. 한나라당은 북한과 싸우고, 민주당은 독재와 싸우며, 민주노동당은 외세와 싸운다고 한다. 이처럼 기존 정당들은 싸움의 대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알리고 지지층을 결집해 나간다. 그래서 정당들이 설정하는 싸움의 전선에 따라 지지자들 역시 달라지는데, 6·25 세대가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을 더 지지하고 민주화운동 세대가 상대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것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평화와 칼은 동전의 앞뒷면

하지만 아무와도 싸우지 않는 정당이 있다면,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정당이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싸우거나, 겉으로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뒤로는 딴짓을 한다면, 이 역시 모였던 지지자들을 쫓는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정치인이 싸워야 할 이유가 있는 대상과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먼저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처음엔 구경꾼이 모여들고 마침내 그들이 같이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면 역사가 바뀌는 것이다. 다른 말 할 필요 없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성장했던 정치인들이 다 그랬다.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독재권력과 싸우면서 남들도 같이 싸우도록 만든 승부사들이었다. 수준 낮은 정치인들은 무대에서 사라지면 대중에게 잊혀지지 않을까 두려워해 어떻게 하면 선거에서 떨어지지 않고 제도권에 남아 있을까만 염려한다. 그러나 김대중이 박정희와 전두환에 의해 그렇게 오랫동안 정치권에서 추방되었다고 사람들이 그를 잊었으며, 노무현이 연거푸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그의 정치인생이 끝났던가? 도리어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들을 더욱 애틋하게 가슴에 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의 시대는 갔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싸움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므로 누구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온갖 사회적 질병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그것과의 싸움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새로운 진보의 과제인 것이다. 여당과 달리 야당이나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현실과 기득권 세력의 부당한 권력독점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만큼, 싸움은 그들의 운명이요, 존재이유일 수밖에 없다.

사회 질병과의 싸움 진보과제

하지만 지금 진보신당처럼 새로운 진보를 말하는 정당의 정치인들은 과연 어디서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한나라당이 북한과 싸우고 있고, 민주당이 이명박과 싸우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이 외세와 싸운다면서 싸움의 대상을 모두 선점해 버렸으니, 누구와 싸워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투쟁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제 싸움은 그만두고 참신한 정책만 개발하면 유권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건희씨가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한 것은 닥쳐올 새로운 싸움을 위해 전열을 정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적어도 이 싸움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 만큼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역사적 싸움터에서 그와 맞서 싸울 장수는 누구인가? 다시 역사가 용기있는 자를 부른다.

 
경향신문 20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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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김용철 전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과 관련된 김상봉 교수의 칼럼이 경향신문에서 거절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나라에서 '삼성'이라고 하는 기업(집단)의 영향력이 과히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뭐 사실 대단할 것도 놀랄 일도 아니지만, 칼럼을 거부한 신문이 '경향신문'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나라의 삼성을 비판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너'마저 라는 탄식아닌 탄식이 나온다. 

물론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경향신문'의 문제는 아니다. 왜 그럴수 밖에 없는지는 아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경향신문'을 지키지 못한 건 어쩜, 우리들인지 모른다. 대다수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경향 '너'마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인지도. 

 

이하는 <프레시안>에 다시 기고한 글을 퍼온 것입니다. (2010. 02. 17일자 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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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 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김상봉입니다.
저는 지난해 말부터 <경향신문>에 3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기명 칼럼을 써왔습니다.
오늘 제 글이 실릴 차례인데 불행하게도 글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에서는 제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소개하면서
삼성 및 이건희 전 회장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신문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저는 물론 거절했으나, 신문사는 끝내 저의 칼럼 지면을 다른 분의 글로 채웠습니다.

저는 이 일에 대해 <경향신문>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을 닫을 때 닫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언론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재 이 땅의 진보 언론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의 원인이
신문사 내부의 잘못이 아니라 언론 소비자들의 무지와 무관심에 기인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을 두고 <경향신문>을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진정한 독립 언론의 길을 걷도록 더 열심히 돕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번 사건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서
결코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는 독재 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해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시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한 주체는 국가 권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결실로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적 권리는 큰 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재 권력이 물러간 자리를 지금은 자본 권력이 대신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시민적 자유와 주체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일간지에 광고할 수 있는 지면을 얻지 못하고,
외부 칼럼으로 기고한 저의 원고가 신문사 자체 검열에서 끝내 게재를 거부당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삼성이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력이 되었다는 것을 웅변해줍니다.

1970년대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개정이나 폐지를 청원하는 것도,
더 나아가 그런 움직임을 보도하는 것조차 금지했던 긴급조치 9호 시절처럼,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비판하는 것은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 불리는 신문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본이라는 새로운 독재자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의 정의로운 기초를 뒤흔드는 시대에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애써 역사의 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종이 신문에서 실리지 못한 저의 글을 혹시 실어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쭈면서
이번 일이 이 땅에서 삼성의 독재를 끝내는 대장정의 첫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경향신문> 2월 17일 '김상봉 칼럼'에 실리지 못한 원고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새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나면
우리는 삼성이란 재벌이 어느덧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 암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는 삼성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코미디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들도 꽤 많다.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은 일단 회의가 시작되면 아무리 길어져도 화장실을 가는 법이 없다 한다.
놀랍다면 놀라운 일인데 끔찍한 일은 따로 있다.
주인이 화장실을 가지 않으니 회의에 참석한 머슴들도 화장실을 못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에 회의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물 비슷하게 생긴 것은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한다.

이 책에 엽기적인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건희는 유명 예술인들을 집에 불러 연주를 청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가 부르면 대중가수든 고전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달려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다.
그런데 유독 나훈아 씨만은 그렇게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대중가수이니 오직 대중들 앞에서만 노래한다는 것이 이 존경스런 가수의 신념이라 한다.

이 재미있는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에 비하면 대다수 언론의 침묵은 기이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출판사에서는 몇몇 신문에 광고를 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돈 주고 광고 내겠다는데도 선뜻 받아주는 신문사가 없어
지금까지 이 책은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금지도서 아닌 금지도서가 된 셈이다.

7~80년대에는 금지도서가 많았다.
체제에 비판적인 책들은 어지간하면 금서로 분류되어 책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렇게 밟고 눌러도
땅거죽을 뚫고 솟아오르는 겨울 보리싹처럼 많은 금서들이 수십만 권씩 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의 차이 또한 분명하다.
그 시절에는 국가가 비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금서 같은 것을 지정하는 억압의 주체였다면,
지금은 삼성이 우리의 입과 귀를 막는 그런 권력이 된 것이다.

그렇게 말과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말기적 징후이다.
삼성이 한국 최고의 경제 권력으로 군림하면서
뇌물로 국가기구를 매수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고 나면,
이제 그 절대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내부로는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을 막고
외부로는 삼성을 비판하는 개인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일만 남는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증언하듯이
삼성은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가 기구와 주요 언론을 장악하는 과제를 완료했다.
삼성의 남은 과제는 김용철 씨처럼 어디서 출현할지 알 수 없는 비판자들이 나타나지 않게 막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도 삼성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유신 독재 시절처럼 모든 개개인의 말과 생각을 전면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해야 한다.

마치 미국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것이 금기시되듯,
한국에서 삼성과 이건희를 비판하는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삼성이 이건희의 왕국에서 그 아들 이재용의 왕국으로 순조롭게 이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포석인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금서 아닌 금서가 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알고 보면 삼성그룹 전체에서 이건희가 소유한 지분은 0.57퍼센트에 불과하다는데,
그는 자기 머슴들의 배설을 억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 모두의 입과 귀를 가리려 한다.
그러면서 이 짝퉁 루이16세 폐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한다'는 교시까지 내리셨다 한다.

선거날이 가까워올수록 사람들은 이명박 심판에 열을 올리겠지만,
그 일은 박근혜 전 대표가 누구보다 차분히 잘 해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눈앞의 허상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자본에 매수되지 않는 진보정당을 키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삼성을 해체하고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한국식 자본주의를 타파할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삼성제품 불매는 당연한 일이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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