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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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며, 급속한 산업화, 빈부 격차의 심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언급된 현상들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변화가 미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느냐이다.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이다. 버틀러는 1872년에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소설 《에레혼》(김영사, 2018)을 발표했다. 에레혼(Erehwon)은 ‘No Where’(이 세상에 없는)를 거꾸로 쓴 제목이기도 하지만, ‘Now Here’, 즉 ‘지금 여기’라는 뜻도 된다. 즉 이상세계는 없을 수도 있지만 바로 내가 있는 이곳이기도 하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영국 식민지에 거주하는 양치기다. 그는 거대한 산맥 너머에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한다. 양치기는 ‘초복(Chowbok)’이라는 별명을 가진 늙은 원주민에게 접근하여 산맥 너머에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한다. 양치기는 초복을 여행 동반자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나 초복은 산맥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채 도망치고 만다. 혼자서 산맥을 넘은 양치기는 에레혼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에레혼은 모든 것이 영국과는 반대이다. 에레혼에서 질병은 죄악이다. 질병에 걸리면 구속되어 장기간 복역 생활을 해야 한다. 반면 강도, 사기 등을 저지르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병원에는 ‘교정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의사가 있는데, 교정관이 되려면 특정 기간에 온갖 나쁜 짓을 하면 된다. 에레혼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상당히 관대하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증상이 생기면 아픈 티를 내지 않게 철저히 숨긴다.

 

에레혼에서는 기계를 찾아볼 수 없다. 사용하지 않는 기계는 ‘오래된 기계’로 분류되어 박물관에 진열된다. 이곳에서 기계를 설치하거나 사용하면 중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를 싫어한다. 에레혼의 영주는 양치기가 가지고 있던 시계를 보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왜 에레혼 사람들은 기계를 싫어하는 것일까? 《에레혼》의 23~25장인 ‘기계의 책’은 에레혼 사람들의 반 기계주의를 보여주는 글이다. <기계의 책>은 에레혼의 반기계파가 쓴 논문이다. 5백 년 전에 기계파와 반기계파 간의 내전이 일어났고 반기계파가 승리한다. 양치기는 <기계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그 내용이 《에레혼》의 23~25장이다. 사실 23~25장은 버틀러의 에세이 <기계 사이의 다윈>을 보완한 글이다. 버틀러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에 큰 감명을 받아 ‘기계가 발전하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진화론을 대입했다. 그는 이 ‘기계의 책’이라는 글을 통해 기계 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기계와 인간은 서로에게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기계의 완전한 멸절을 제안하지 못하지만,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은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57쪽)

 

지금 이 시간에 기계에 종속되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내내 밤낮으로 기계만 돌보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계에 노예로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 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다는 것을 감안해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 (259쪽)

 

 

버틀러는 인간과 기계가 함께 진화하면서 발전하는 ‘공진화’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시대를 앞서간 예측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가 인간 진화의 경로를 바꿀 것이며 훗날 인간은 기계에 종속된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심취한 빅토리아 시대 지식인들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거로 기대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인류의 진보를 믿는 진화론자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 문명의 발전이 곧 이상향을 실현할 것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디스토피아를 제시했다. 동시대 진화론자들은 버틀러가 다윈의 진화론을 거부했다고 비판했지만, 《에레혼》을 읽다 보면 버틀러가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몸이 수백만 년에 걸친 우연과 변화의 결과로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265쪽)

 

 

버틀러는 ‘진화=진보’라는 단순한 낙관론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는 낙관론에 반기를 들고 진화의 우연성을 주장한다. 버틀러가 생각하는 진화는 ‘인류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인 진보’와 거리가 멀다. 우연성은 진화의 주된 동력이며,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인간은 우연성이 빚은 부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버틀러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보다 백 년 앞서서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에레혼》의 해제는 과학 칼럼니스트 이인식이 썼다. 이인식은 《에레혼》이 인공지능의 미래를 예측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에레혼》에서 드러난 버틀러의 ‘반기계주의’가 기계문명을 예측하는 미래학,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할 갈림길, 즉 기계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를 고민한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Now-Here(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에레혼》은 ‘시대를 앞서 간 미래소설’로 재평가를 받고 있지만, 풍자소설로서의 문학적 가치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래서 이 책의 구성 방식이 아쉽다. 빅토리아 시대는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에레혼》을 읽으면 버틀러의 풍자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역자는 《에레혼》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버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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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8-02-2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특이한 책이네요.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봐도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그렇고. 일단 보관함으로 보냈습니다.ㅎㅎ

cyrus 2018-02-27 12:1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분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옛날 소설이 다 그렇듯이 재미있는 이야기라 볼 수 없어요. 좀 지루한 내용도 있어요. ^^;;

2018-02-28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01 08:10   좋아요 0 | URL
그분이 쓴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칼럼 몇 편은 읽어봤어요. 그 분이 요즘 미래학에 꽂혔는데 우리 같은 일반 독자가 보기에 그 분의 글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
 

 

 

 

지난주 월요일(2월 19일)에 진행된 레드스타킹 《젠더 무법자》 두 번째 시간 공식 후기입니다. 작성자는 채령님입니다. 이 날, 저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출처는 레드스타킹 공식 트위터, 공식 인스타그램입니다.

 

* https://www.instagram.com/feminism_talk/

 

 

 

 

 

 

 

 

 

 

 

 

 

 

 

 

 

 

 

 

이번 모임에서는 <젠더 무법자> 4, 5, 6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자는 앞선 장들에서 남성-여성,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이 무수한 젠더와 정체성을 지우는 폭력적 체제를 지탱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는데요, 이번 장부터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가며(ex.컬트) 젠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려 한 것 같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제시하고 하나를 고르기를 강요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최선의 선택을 이끌어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체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법적 젠더 체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구부정한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이분법적 젠더 체제에서 가려지고 오도되고 지워진, 제대로 호명조차 할 수 없는 젠더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는 ‘시스젠더 헤테로 섹슈얼 여성’인 제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치열히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서 저는 퀴어-트랜스젠더들과 연대를 쌓고 함께 남근중심 가부장제를 타파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습니다만, 타자와 나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부재한 채 막연히 평화주의적 연대를 부르짖은 것 같아 대단히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더 많이 읽고, 만나고, 공부해야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임에 모인 토론자들은 모두 페미니스트이지만 그동안 비교적 LGBT이론(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한)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였고, 적지 않은 영역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마침 새로 모임에 참여하신 분께서 주변에서 보고 들은 퀴어-트랜스젠더 지인들의 사례를 들려주셔서 이해가 풍성해졌습니다.

 

트랜지션(transition, 성별을 바꾸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적 차별이 없다면 트랜지션을 하지 않게 될까?” 그리고 “의료지원이 충분히 된다면 트랜지션을 더 많이 하게 될까?”라는 질문들이 나왔는데, (새로 오신 분께서) 그건 지극히 개인의 감정과 판단에 따르는 문제이기에 굉장히 어렵다고 답해주셨습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신이 가진 남성의 신체적 특질(페니스)이나 여성의 특질(부드러운 유방)을 사랑하면서도 수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정체성에 방해가 되는 신체를 혐오하여 수술을 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으며, 패싱이 자연스러운 경우 굳이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구체적인 성소수자 지원 정책에 대한 논의도 있었고, 수술 이후에 과거의 자신을 지워내는 외로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을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과거를 잊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며 사회적 인식이 변화되어 이들이 과거의 자신을 언제까지라도 온전히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추었습니다. 또 하나 새로웠던 이야기는 퀴어-트렌스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도 종종 가시적이고 폭력적인 배제가 일어난다는 사실(ex.티부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사적인 견해입니다만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날의 젠더 해방 운동이 모든 집단을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아내거나 젠더 정체성 하나에 의지해 혐오에 대한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4장이 대한 토론이 마무리될 때 즈음 “여러분은 본인의 성별에 대해 의심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워낙 지배적인 남성-여성(혹은 양 극을 전제한 양성) 젠더 체제 속에 살아온 탓인지 의구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힘들기는 합니다만, 과거는 물로 현재도 여전히 본인의 성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시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 경우에는 몸이나 성적지향 보다는 ‘젠더 역할’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저는 어렸을 때부터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다”는 말, ‘남성을 위한 축복들’을 듣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옷이나 장난감을 구매할 때에도 제가 원하는 것을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자아이의 것으로 여겨지는 자동차와 로봇, 푸른색의 옷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며 가슴이 봉긋해지고 월경이 시작되고, 설거지통에 충분히 키가 닿는 나이가 되자 이전에 전유하던 것들을 더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의 무수한 가능성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것 같은 비참함을 느꼈지만 우습게도 교복‘스커트’를 입으면 되바라진/선머슴 같은 여자애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에, 스커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내 어린 시절의 (소위 말하는) ‘남성적인’ 가능성들을 기꺼이 쟁취하려는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얻는 것 같은 안도를 느꼈습니다.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퍼포먼스, 그것을 수행하는 역할을 설명할 언어가 남성적, 혹은 여성적이라는 두 가지 밖에 없다는 사실은 너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닐까요.

 

논의의 장이 바뀌어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기 시작했을 때 몹시 흥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S/M플레이에 대한 섹스판타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토론자분들이 S/M플레이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가난하고 어린 여성’의 지위에서 경험해온 평범한 이성애적 성관계 경험은 제게 굉장히 폭력적이고 통제불가능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명확한 합의가 전제된 ‘놀이’로서의 S/M플레이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께서 우려되는 지점을 설명해주셔서 금방 S/M플레이에 대한 조심스런 시각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남성중심 젠더위계가 이토록 절대적인 상황에서 남성이 S의 역할을 여성이 M의 역할을 할 때에 룰을 무시하고 자행되는 폭력-강간에 대한 에어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합의된’ 관계 내의 모든 폭력에 법적으로 관대한 국가에서라면 즐거워야 할 놀이는 너무 쉽게 공포의 장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SM은 플레이어들이 놀이를 ‘젠더 초월자’로서 향유하도록 하며, 규정된 젠더 역할과 정상적 섹슈얼리티를 비웃을 힘을 가집니다. ‘이분법적 젠더체제를 깨어 부술’ 강력한 샤먼(shaman: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역할을 맡은 자, 무당)는 인 것입니다.

 

두서도 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도 없이 길어지니 제가 너무 피곤해서 급하게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레드스타킹 책모임에서는 대단한 이야기/질문/반성들이 오고갔습니다. 창조적인 공간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몹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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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단 두 줄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파르르 떨게 했던 시가 또 있을까요? 정현종 시인의 시는 수수께끼입니다. 사람들 틈에 섞이고 싶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거든요. 우리는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 싶은 분명한 메시지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 시에는 정답이 없어요. 시의 의미는 시를 읽는 사람의 심리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격 분석에 사용되는 로르샤흐 검사처럼 똑같은 얼룩무늬를 보면서도 각자의 해석이 달라지듯이 같은 시를 읽어도 저마다의 해석은 다릅니다.

 

 

 

 

 

 

 

 

 

 

 

 

 

 

 

 

 

 

 

*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1997)

* 정현종 《나는 별 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95)

 

 

 

장 그르니에(Jean Grenier)의 산문집 《섬》(민음사, 1997)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섬’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르니에는 애초에 ‘섬’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르니에의 애제자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섬》의 서문에서 스승의 글이 읽는 사람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둔다고 썼습니다. 카뮈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서재를 탐하다’ 책방에서 우주지감 회원님들과 《섬》을 같이 읽고 대화를 나누어보니 혼자 책을 읽으면서 스쳐 지나간 문장들을 다시금 살펴보게 됩니다.

 

 

 

 

 

 

 

 

 

 

 

 

 

 

 

 

 

 

 

* [‘서재를 탐하다’ 책방지기님이 가져온 책] 장 그르니에, 알베르 카뮈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 (책세상, 2012)

* [‘우주지감’ 회원님이 가져온 책] 박웅현 《책은 도끼다》 (북하우스, 2011)

 

 

 

‘서재를 탐하다’ 책방지기님은 젊은 시절 카뮈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 구절 일부, 그리고 카뮈가《섬》을 읽고 난 뒤에 쓴 단상 속 구절을 인용, 낭독했습니다. 카뮈는 《섬》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써놓은 감상문에 실존에 관한 고민이 느껴졌습니다. 이○○님은 《책은 도끼다》(북하우스, 2011)에 인용된 김화영 교수의 문장을 읽어줬습니다. 《섬》을 번역한 분이 김화영 교수입니다. 이○○님은 그르니에가 지중해를 여행하면서 발견한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박○○님은 『고양이 물루』에서 물루가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보면서 슬펐다고 합니다. 불교, 힌두교에 관심이 많은 신○○님은 《섬》을 읽으면서 불교와 힌두교 사상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상상의 인도』를 읽고 나서 인도 철학서, 인도의 고대 경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님께 힌두교를 알기 위해 읽을 만한 책이 뭐가 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님은 아주 명쾌한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인도에 직접 가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인 걸까요?

 

천○○님은 《섬》 118쪽에 있는 평범한 문장을 보자마자 크게 공감했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얘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을 때면 누구나 그러듯이 우리는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부활의 섬』 중에서)

 

 

평소 사람을 만날 때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려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할 수 있는 적절한 소재가 바로 ‘날씨’입니다. 초면인 사람과 만날 때 대화에서 그날 날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마침 오늘 아침 대구에 눈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직장 동료를 만나자마자 날씨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어요. “오늘 아침에 내린 눈 봤어요?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 위에 눈이 조금 쌓여 있었다니까요”

 

 

 

 

 

우주지감의 선택

 

 

 

 

 

 

 

 

 

 

 

 

 

 

 

 

 

 

 

 

 

 

 

 

 

 

 

 

 

 

 

 

 

 

 

 

 

 

 

 

 

 

 

 

 

 

 

* [‘서재를 탐하다’ 책방지기님이 읽은 책]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 (워크룸프레스, 2016)

* [장OO님이 읽은 책]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 [이OO님이 읽은 책] 알랭 드 보통 《관계》 (와이즈베리, 2017)

* [신OO님이 읽은 책]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청어람미디어, 2013)

* [최OO님이 읽은 책]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2017),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문학사상사, 2015)

* [이OO님이 읽은 책] 홍명진 《쉬는 시간에 읽는 세계화》 (인물과사상사, 2010), 서영채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 2017), 최우성 《동화경제사》 (인물과사상사, 2018)

* [cyrus가 읽은 책] 쉴라 제프리스 《래디컬 페미니즘》(열다북스, 2018)

 

 

 

《섬》에 대한 대화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9시 30분경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각자 한 사람씩 요즘 읽고 있는 책(읽었던 책)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분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습니다.

 

이○○님(김화영 교수의 글을 들려준 분과 성만 같을 뿐, 이름이 다른 분입니다)은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시리즈’를 읽고 있습니다. ‘서재를 탐하다’ 책방지기님은 김한민 씨의 그림소설을 추천했습니다. 실은 《비수기의 전문가들》(워크룸프레스, 2016)은 올해 8월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선정도서입니다. 신○○님은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의 글을 읽으면 ‘삶’,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님은 작년에 나온 《노르웨이의 숲》(민음사, 2017) 리커버판 표지가 좋아서 구입했다고 합니다. 또 요즘 ‘소확행(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자신만의 소확행이 무엇인지 고민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님은 세 권의 책을 소개해주셨는데요, 특히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문학 비평서로 《죄의식과 부끄러움》(나무,나무, 2017) 을 추천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읽는 세계화》(인물과사상사, 2010)는 청소년 독자를 위한 책입니다. 비록 이 책에 실린 통계자료는 시의성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님은 이 책에서 세계화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바라보는 접근 방식을 살피는 데 유용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동화경제사》(인물과사상사, 2018)는 다소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지만, 저자의 직업이 기자라서 ‘기자식 글쓰기’의 지루함이 느껴졌다고 평가했습니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민음사, 2003)

 

 

새벽 12시에 책방이 문을 닫았습니다. 우주지감은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일상이 있는 ‘각자의 섬’으로 향했습니다. 다음 달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선정도서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언니의 《오만과 편견》(민음사, 200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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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이론 - 입문
애너매리 야고스 지음, 박이은실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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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Queer). 생소한 단어라서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퀴어 문화축제’, ‘퀴어 영화’는 들어봤어도 ‘퀴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퀴어는 ‘괴상한’을 뜻하는 영단어로, ‘동성애’를 뜻하는 속어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 사용되는 퀴어는 모든 성 소수자(LGBT: Lesbian 레즈비언, Gay 게이, Bisexual 양성애자, Transgender 트랜스젠더 혹은 Transsexual 트랜스섹슈얼)를 일컫는 용어로 쓰고 있다. 외국에 비해 한정된 성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선 성 소수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혐오하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퀴어 문화축제는 성 소수자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들에게 성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퀴어는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퀴어 이론(Queer theory)을 처음으로 제시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퀴어의 규범화는 결국 퀴어의 비극적 종말이 될 것이다[1]라고 우려했다. 퀴어는 시대 및 사회 상황에 따라 앞으로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 그리고 퀴어 이론은 젠더 이분법을 강요하는 이성애 중심주의(Heterosexism)에 의문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론이다. 이성애는 사회 존립 기반을 형성하는 안정적인 인간관계 모델이다. 이것에 의존하는 규범적인 젠더 이분법을 전복하는 것이 퀴어 이론의 목적이다. 그래도 퀴어와 퀴어 이론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호주에서 활동 중인 퀴어 학자 애너매리 야고스(Annamarie Jagose)의 설명을 참고하면 된다.

 

 

거칠게 말하면 퀴어란 염색체적 성(sex), 젠더(gender) 그리고 성적 욕망 사이의 소위 안정된 관계(이성애-cyrus 주)에 모순들이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태도 혹은 분석 모델을 가리킨다. ‘자연 그대로의’ 섹슈얼리티란 존재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퀴어는 ‘남자’ 혹은 ‘여자’라는 말과 같은 명백히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퀴어 이론 : 입문》 10쪽) 

 

 

따라서 퀴어와 퀴어 이론을 ‘규범적인 이론’으로 고정해서 말하는 것은 유동적인 퀴어 정체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퀴어 이론은 ‘가능성들의 구역(a zone of possibilities)’[2]이다. 퀴어 정체성은 누구와 싸우고 연대하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한다.

 

야고스가 쓴 《퀴어 이론 : 입문》(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퀴어 정체성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고, 차별과 혐오에 맞서 어떻게 투쟁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퀴어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가벼운 입문서’로 취급하는 건 오산이다. 앞서 말했듯이 퀴어 이론은 유동적이다. 퀴어를 이해하는 입장들이 제각각 다르고 모순되기 때문에 퀴어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야고스는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발전해 온 동성애 및 레즈비언 담론의 지형과 역사적 맥락을 들려주기만 한다. 일반[3]은 퀴어를 ‘성 소수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편협하고 피상적인 간단명료한 퀴어의 정의를 거부한다. 그래서 이성애자인 일반에 속한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책을 펼치는 내내 독자는 이제껏 살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젠더 개념과 가치들을 새로 생각해보게 된다. 당신은 이성애와 섹슈얼리티를 하나하나 따져 보는 퀴어 이론의 광범위한 시도에 놀라게 될 것이다.

 

야고스는 퀴어 이론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퀴어 이론을 비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까지 살핀다. 이 책에는 ‘게이 남성-레즈비언’, ‘MTF트랜스젠더-여성’의 연대를 반대하는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의 입장이 언급된다. 야고스는 게이 남성을 가부장적 가치를 고집하는 남성으로 분류하여 비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입장이 ‘동성애 혐오’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성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성 소수자가 살기에는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동성을 사랑하고 성을 바꾸려 하는 것이 중대한 범죄일까? 퀴어 이론을 공부하면서 성 소수자의 현실을 알아보자. 그리고 ‘다수’, ‘일반’에 속한 당신의 생각이 정말로 옳은지를 스스로 질문해보자. 그것이 《퀴어 이론 : 입문》을 읽기 위한 목적이다.

 

 

 

 

 

[1] 《퀴어 이론 : 입문》 8쪽

[2] 《퀴어 이론 : 입문》 8쪽

[3] 이성애자. ‘성 소수자(특히 동성애자)’를 뜻하는 이반(二般, 異般)과 대비되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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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8-02-25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수가 소수에게 무심코 행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름을 틀림이라 억지부리며. .

cyrus 2018-02-26 06:45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나와 ‘다른 대상‘이 낯설게 느껴지면 그것을 ‘틀린(비정상적인) 대상‘으로 간주하여 기피하고, 혐오합니다.
 

 

 

추위를 느끼면 피부가 닭살처럼 우툴두툴하게 변한다. 몸의 반응에 따른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이다. 추위에 느끼면 뇌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신체 각 기관에 명령을 내리고,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털을 세우는 피부의 입모근이 수축한다. 피부가 닭살 돋는 것처럼 변하는 이유다. 그런데 사시사철 닭살 피부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 닭살 피부가 심한 사람은 여름이 두렵다. 반소매 티셔츠, 반바지를 입지 못한다. 닭살 피부도 피부 질환이다. 정식 병명은 모공각화증이다. 피부 모공에 각질이 쌓여 발생하는 증상이다. 가려움증이 없기 때문에 외관상 문제 외에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도드라진 모공을 억지로 제거하면 피부가 벗겨져 상할 수 있다.

 

내 피부는 각질이 잘 생기는 건성 피부라서 모공각화증이 잘 생긴다. 잘 씻고 다니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항상 닭살 피부를 볼 때마다 신기하게 생각했다. 닭살 피부가 피부 질환인지 몰랐던 어머니는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는 본인의 음식 취향 때문에 닭살 피부가 생겼다고 믿었다. 어머니는 닭고기, 특히 퍽퍽한 가슴살을 좋아한다. 내가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도 어머니는 닭고기를 즐겨 드셨다. 순진무구했던 나는 어머니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닭살 피부가 생닭에서 볼 수 있는 우툴두툴한 돌기와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황당한 속설이다. 특정 음식 과다 섭취가 태아의 피부 발달에 영향을 준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임산부가 우유를 자주 마시면 태아의 피부는 백설 공주처럼 하얗게 될까? 그럴 일은 절대로 없다.

 

 

 

 

 

 

 

 

 

 

 

 

 

 

 

 

 

* [절판] 얀 본데손 《자연의 장난 원숭이 여인》 (일빛, 1999)

 

 

 

임산부의 모든 행동이 태아에게 영향을 준다는 속설은 어머니의 양육 태도, 즉 모성이 태아 또는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중요하게 여기는 육아 문화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활동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은 팔자가 세다고 좋지 않게 봤다. ‘드센 여성’으로 성장하는 아기를 원하지 않는 임산부들은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조신하게 행동했다. 지금으로선 황당한 일이지만, 옛날에는 태아를 위해서 임산부가 당연히 따라야 할 행동 요령이었다.

 

과거 서양에서는 모성 영향론(maternal impression)을 의학적 통설로 여겼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모성 영향론을 신봉한 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의 귀부인이 검은 피부의 아기를 낳았다. 귀부인과 그녀의 남편 모두 백인이었다. 남편은 부인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법정 증인을 나선 히포크라테스는 기이한 출산의 원인을 무어(Moors,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사람들)인이 그려진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부인의 방에 무어인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히포크라테스는 임신 중인 부인이 그 그림을 자주 보는 바람에 배 속에 있는 태아의 피부가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 플라톤, 천병희 역 《국가》 (도서출판 숲, 2013)

* 플라톤, 박종현 역 《국가 · 정체》 (서광사, 2005)

 

 

 

 

플라톤(Plato)은 자신의 책 《국가》에서 태아가 출생 이전부터 생명을 갖는다고 믿었지만, 사회와 가족의 복지가 태아의 생명권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기형아가 태어나면 곧바로 내다 버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기형아 출산을 막기 위해선 기형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의 외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성 영향론에 대한 믿음은 고대 로마,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하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모성 영향론을 믿었고, 모성 영향론을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성 영향론을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의 사소한 행동과 생각들이 태아의 발달과정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상상력이 지나친 사람들은 모성 영향론을 바탕으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환상적인 가공인물을 만들었다. 흉측한 모습의 물고기를 본 임산부가 ‘물고기 인간’을 낳았다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고양이를 쓰다듬어서 ‘고양이 인간’을 낳은 임산부 이야기도 등장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임산부들은 임신 기간 집에서 피아노를 열심히 쳤다. 그녀들은 피아노를 열심히 연주하면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속설은 아기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속설이 만들어진 목적은 임산부가 얌전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임산부가 바람을 피울까 봐 걱정하는 남편들은 아내가 딴생각을 하면 태어날 아기가 불행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편들은 임신한 아내의 바람기를 막기 위해 피아노를 장만했다.

 

 

 

 

 

 

 

 

 

 

 

 

 

 

 

 

 

 

* [절판] 돈 캠벨 《모차르트 이펙트》 (황금가지, 1999)

* [절판] 로버트 토드 캐롤 《회의주의자 사전》 (잎파랑이, 2007)

 

 

 

 

한때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용하면 태아 또는 아이의 잠재능력을 발달할 수 있다는 ‘모차르트 효과’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모차르트 효과를 이용한 음악 교육법을 만든 돈 캠벨(Don Campbell)은 태아부터 시작해서 연령별로 아동의 발달과 음악의 관계를 설명하고, 연령별로 들으면 좋은 모차르트의 곡을 소개했다. 사실 모차르트 효과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따로 있다. 그들은 모차르트 효과를 입증한 자신들의 작업이 허점이 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캠벨은 허점투성이인 모차르트 효과 연구 결과를 과장, 왜곡하여 그럴싸한 음악 교육법으로 포장했다. 부모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더 똑똑해질 수 있다는 낭만적 생각에 사로잡혔고, 캠벨은 자녀의 지능을 높이려는 부모의 욕망에 편승해 모차르트 효과를 ‘믿을 만한 과학 이론’인 것처럼 홍보했다. 모차르트든 베토벤이든 어느 클래식 음악가의 곡을 들으면 임산부나 태아, 육아의 정서 안정에 도움 된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머리가 단번에 좋아질 리가 없다. 모차르트 효과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그런데도 ‘클래식 음악 태교’는 머리 좋은 아이가 태어나길 원하는 임산부를 솔깃하게 한다.

 

 

 

 

 

 

 

 

 

 

 

 

 

 

 

 

 

*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 가설》 (이김, 2017)

* [절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만들어진 모성》 (동녘, 2009)

* 장 자크 루소《에밀》 (한길사, 2003)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실은 모성은 여성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자연적인 본능이 아니라 ‘여성의 종속을 정당하게 하는 남성의 발명품’이다.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에밀》에서 여성의 모성애를 강조했고,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를 환자로 취급했다. 5명의 자녀를 보육원에 보낸 루소의 ‘흑역사’를 생각하면 모성애를 강조한 루소의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프로이트(Freud)는 엄마가 아기와 어떻게 애착 관계를 맺고 어떤 정서적 교감을 나누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정신 건강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을 반박한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는 수많은 여성이 여성의 본능과 모성애를 동일하게 보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강요당했다고 말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들만 못하다고 느끼면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그 탓에 출산과 양육의 짐은 ‘본성’을 핑계로 여성이 짊어졌고 남성들은 양육을 ‘여성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인식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는 양육을 지지하는 프로이트 심리학에 반기를 든다. 그녀는 부모의 양육이 자녀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는 ‘양육 이론’을 ‘가설’이라고 주장한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만들어진 모성’은 여성에게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가 모성을 신성하게 여기다 보니, 스스로에게 또는 타인에게 모성을 강요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기혼 여성은 ‘나는 왜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지 못할까’, ‘나는 왜 모성이 없는 것일까’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맹목적인 모성애는 기혼 여성의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심할 경우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모성은 여성을 병들게 한다. 그래서 급진적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에서 여성에게만 출산과 모성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문화를 향해 꽤 묵직한 돌직구를 날렸다. “임신은 야만적이다.” 여성의 자유를 막기 위해 남성들이 만든 모성도 야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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