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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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컴퓨터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상대편이 컴퓨터인지 진짜 인간인지 대화 당사자인 사람이 구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알려진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통해 진짜 인간의 반응과 컴퓨터의 반응을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존 설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을 제시하여 튜링 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한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다. 방 안에는 중국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중국어로 적힌 질문을 받으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답변을 보낸다. 질문자는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그가 중국어에 능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존 설은 ‘중국어 방’의 역설을 들면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물며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을 100% 이해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스스로가 어떻게 자의식과 마음을 갖게 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컴퓨터의 기능이 인간과 유사하다면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총체적 지적능력을 초월한 초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두 권의 책이 있다(한 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쓴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집이다).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지루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과연 철학은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해줄 수 있을까? 철학이 편안함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차(茶)가 될 수 있을까? 위안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맴도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철학만 한 게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김재인이 서울대에서 강의한 ‘컴퓨터와 마음’이라는 제목의 철학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에 들뢰즈에 대한 언급(133, 174쪽)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저자의 논변을 ‘거들고 있는’ 엑스트라다. 사실 이 책에서 주연급으로 나오는 철학자는 플라톤데카르트다.

 

저자는 튜링의 오래된 질문, 즉 “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몸과 마음, 생각, 시간 등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사고 실험’을 시도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해하는 것(과학적 접근법)과 철학적 성찰(인문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이 아니라 하나의 창구로 통하는 겹창이다. ‘마음’과 ‘의식’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요, 탐구대상이다.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아직 마음과 의식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성과 깊이에 대해 밝혀낸 것은 없다. 따라서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마음과 의식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 그 ‘내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 ‘내공’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즉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 등의 창조적인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른다. 인공지능이 시행착오, 즉 ‘버그(Bug)’를 만나면 작동이 멈춘다. 창조적인 일은 인공지능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성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할 능력이다.

 

저자는 초인공지능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일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그는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분위기가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튜링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이렇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는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의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한 호흡에 끝까지 내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라는 부제를 감안하면 과학보다는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느껴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다루다 보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보인다. 170~175쪽에 저자가 새뮤얼 버틀러《에레혼》(김영사, 2018)의 ‘기계들의 책’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버틀러는 기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기계도 인간처럼 진화하여 ‘재생산(생식)’ 체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버틀러의 생각을 ‘기계(기술)의 진화’를 예언하는 입장인 것처럼 설명했는데, 실은 버틀러는 ‘기계의 진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계의 진화’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미래를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에레혼》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에레혼》의 ‘기계들의 책’은 기계의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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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6 11:40   좋아요 0 | URL
인공지능의 시대가 와도 불평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돈, 정보, 그리고 기술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이익을 가질 것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부가 편중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본 글은 작품에 대한 줄거리, 결말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토 준지 컬렉션 9화 첫 번째 에피소드

화가

 

 

 

 

 

모리 미츠오는 인기와 실력 모두 겸비한 화가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전이 열린 전시장에서 신비한 매력을 가진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토미에. 화가는 토미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그림에 대한 감상평을 알려달라면서 접근한다. 토미에는 그림 속 여자 모델이 멍청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델이 된다면 아주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다고 추파를 던진다.

 

 

 

 

 

 

토미에는 이 세상에 자신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진 여자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한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화가는 토미에의 초상화를 완성했지만, 토미에는 그 그림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면서 조소한다. 그녀는 화가의 자존심을 꺾어놓고 유유히 떠난다. 체면을 구긴 화가는 전시회 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완벽한 토미에’를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화가는 토미에가 만족할만한 그림을 그려내지 못해 슬럼프에 빠진다.

 

 

 

 

 

화가는 친구로부터 조각가 이와타 타미오의 근황을 알게 된다. 조각가는 새로운 모델을 만난 이후로 연작 조각상을 발표하여 큰 주목을 받는다. 그 연작 조각상의 제목은 ‘토미에’다. 화가는 조각상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조각가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조각가는 ‘토미에는 나만의 것’이라면서 공개를 거부한다. 토미에의 미모에 완전히 홀린 화가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 조각가를 죽인다. 화가는 조각가의 작업실에 들어갔으나 그곳에는 산산조각이 나서 널브러진 토미에 조각상들과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서 있는 토미에가 있었다. 토미에는 조각가가 조각상 전부 부숴버렸다고 울면서 하소연한다. 토미에의 가짜 눈물에 홀린 화가는 ‘완벽한 토미에’를 그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화가는 토미에의 매력에 완전히 지배당한 채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토미에는 화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나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모두 나를 죽이려고 해요.”

 

 

화가는 토미에에게 완성된 그림을 보여준다. 토미에는 그림 속 여성은 자신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를 가리켜 ‘최악의 화가’라고 말하면서 멸시한다. 화가는 자신을 비웃는 토미에의 모습에 분노를 폭발하고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인다. 미쳐버린 화가는 토미에의 시체를 토막 낸다. 그러나 토미에는 죽지 않는다. 잘린 토미에의 신체 부위는 세포처럼 재생하여 ‘새로운 토미에’가 되어 자란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1 : 토미에 Ⅰ》(시공사, 2008)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2 : 토미에 Ⅱ》(시공사, 2008)

 

 

 

 

『화가』《이토 준지 공포박물관 1 : 토미에 Ⅰ》에 수록된 이야기다. 토미에는 이토 준지 작품 속 등장인물 중에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토미에는 유혹으로 남자를 낚아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이다. 토미에의 외모에 홀린 남자들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있으나 그것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녀의 매력에 헤어 나오지 못한 남자들은 살인 욕구를 느껴 그녀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러나 토미에는 불사(不死)의 존재이다. 토막 난 신체 부위는 ‘새로운 토미에’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부활한 토미에‘들’은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며 남자들에게 접근한다.

 

 

 

 

 

 

 

 

 

 

 

 

 

 

 

 

 

 

*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아트북스, 2018)

 

 

 

 

 

 

 

 

 

 

 

 

 

 

 

 

*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창비, 2017)

*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지만지, 2011)

* E. T. A. 호프만 《모래 사나이》(문학과지성사, 2001)

 

 

 

 

토미에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화가의 모습은 ‘강박적 아름다움(convulsive beauty)’을 재현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미술사가 핼 포스터는 초현실주의 미술을 재정립하기 위해 ‘강박적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을 제시한다. ‘강박적 아름다움’은 ‘익숙한 낯섦(uncanny, 언캐니)’이 주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언캐니의 정의를 이해하려면 프로이트의 저서를 참고해야 하지만, 이 언캐니를 문학적 효과로 적절히 활용한 E. T. A. 호프만의 소설 《모래 사나이》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수월하다(프로이트가 호프만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언캐니’ 개념을 도출했다고 알려졌는데, ‘언캐니’를 제일 처음 쓴 사람은 독일의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취다). 《모래 사나이》에 언캐니가 산출하는 감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드러난다. 소설의 주인공 나타니엘은 자신이 사랑하는 올림피아와 입을 맞추는 순간, 섬뜩함을 느낀다. 나중에 나타니엘은 그녀의 정체가 사람이 아니라 ‘자동인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미쳐버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관점으로 언캐니를 설명하자면, 언캐니는 ‘억압된 것이 어떤 다른 경험 때문에 다시 나타나는 상황’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에로스(eros)를 삶의 욕망, 즉 ‘삶 욕동’으로 이해하여 찬양했다. 즉 삶과 아름다움을 향한 상승 욕구를 샘솟게 하는 것이 에로스이다. 그러나 핼 포스터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원하는 삶 욕동 속에 ‘죽음 욕동’이 내포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삶 욕동’과 ‘죽음 욕동’을 서로 대비되는 개념이 아닌 ‘결합 상태’의 개념으로 보았다.

 

 

 내가 보기에 초현실주의는 에로스의 사랑을 내세우면서도, 그와는 반대로 죽음 욕동의 언캐니함이 가리키는 쪽을 향했다.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 9쪽)

 

 

초현실주의자들은 죽음 욕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여성’을 지목한다. 초현실주의자들도 세기말적 공포의 기운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은 쾌락과 고통, 사랑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여 여성에게 요부, 즉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양산한 팜므 파탈은 ‘성적인 것(삶 욕동)’과 ‘파괴적인 것(죽음 욕동)’이 결합한 상징이다. 팜므 파탈에는 가부장적 사회에 반기를 들고, 남성을 위협하는 여성에 대한 공포가 반영되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팜므 파탈의 유혹이 주는 ‘쾌락’을 선호하면서도 파멸의 길로 몰고 가는 ‘파괴적인 힘’을 낯설어했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은 언캐니로부터 아름다움을 해방하기 위해 여성을 ‘처벌’하는 사디즘(sadism)을 지향했다. ‘그녀(팜므 파탈)를 좋아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다시 이토 준지의 『화가』로 돌아가자. 화가는 토미에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비정상적으로 창작 욕구를 드러낸다. 그가 토미에를 만나지 않았으면 ‘완벽한 토미에’를 그리는 데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화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실패했고, 토미에는 화가의 자존심을 긁는다. 화가는 사랑스러운 토미에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했을 때 자존심에 상처를 준 불편한 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토미에를 죽이고 만다. 화가가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가학적인 처벌’이자 그녀를 파괴하면서 느끼는 일종의 ‘성적인 쾌락’이다. 『화가』는 ‘열린 결말’이다. 이토 준지는 토미에가 부활한 이후 화가의 삶을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있다. 아마도 토미에 여려 명 부활하면 화가는 영원히 토미에의 ‘강박적 아름다움’에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강박적 아름다움’은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다. 시시포스는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놓는 형벌을 받는다. 바위를 굴려 산 위로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올라가는 방향의 고통과 내려가는 방향의 절망을 무한 반복하는 잔인한 형벌이다. ‘강박적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의 발견을 목표로 하는 예술가들이 감내해야 하는 형벌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을 ‘팜므 파탈’로 설정하여 가학적으로 대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반응과 토미에를 잔혹하게 죽이는 『화가』의 결말은 ‘여성혐오(misogyny)’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이토 준지의 ‘토미에 시리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불안과 공포뿐만 아니라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여성 혐오의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남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여성(모델)을 착취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성적 욕망을 조합한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페미니스트 미술 연구가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여성의 이미지를 비판의 도마에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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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2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 준지에게 토미에라는 캐릭터는 단연 에이스급이라 생각됩니다^^:)

cyrus 2018-04-25 20:31   좋아요 1 | URL
<소용돌이> 다음으로 유명한 이토 준지의 작품이 <토미에> 시리즈죠. 애니 2기가 제작된다면 토미에 에피소드가 반드시 나올 거예요. ^^

2018-04-25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5 20:34   좋아요 0 | URL
미술을 공부하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 섹슈얼리티를 ‘예술‘로 인정받으려면 어느 정도 선에서 표현을 허용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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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정말 심각해”라는 생각으로 대충 반응하고 넘겨버리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 너무나도 쉽게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문제 중 하나가 ‘성폭력’이다. 우리는 이 ‘성폭력’이 끔찍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 각 영역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쉽지만은 않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문제, 피해자와 지원자들만이 가해자를 상대로 싸우는 문제, 즉 일반 시민에게는 상관없는 문제로 설정되자마자 개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 두지 않을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무관심은 타인을 배제하는 행위가 된다.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무관심하고 침묵하면서 그 문제에서 멀어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또 하나의 권력이다. 이런 상태에 오랜 시간 지속한다면 개인의 분별력과 사유능력이 상실돼 부조리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말했다.

 

불특정 여성을 공격하거나 강간한 범죄를 ‘그들(피해 당사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나는 너다’,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등의 문장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였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우리(여성)’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 문제라고 인식했을 때 피해자의 ‘정체성’을 우리와 동일시하게 됐지만 피해 자체는 여전히 타자화하는 우를 범했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약칭 ‘피가페’)은 성폭력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미투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책이다. 성 문화 연구 모임 ‘도란스’가 세 번째로 기획한 책이다(첫 번째 책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두 번째 책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그 출발로 권김현영‘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라는 용어의 한계들을 살핀다. 그녀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 편을 들고, 피해자를 위해 폭로하는 것으로 왜곡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페미니즘으로는 성폭력 문제를 ‘권력과 폭력’의 문제로 볼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윤리-정치적 결단은 공동체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폭력을 관리하고 해결하려는 절차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로서의 역할만을 요구받는다.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닌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라는 역할’ 속에서 피해자는 오직 피해자의 권리만을 특별하고 이질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처럼 비치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생각한다. (권김현영, 63쪽)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성폭력 근절을 위해 ‘분노하고 폭로하는 정치’를 반복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는 목록을 늘리면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했다. 하지만 점점 피해자의 폭로가 공론화가 되면서 피해자는 ‘싸우는 사람’이기보다 ‘보호받을수록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전락했다. 페미니즘은 피해자를 편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사건 해결에 목소리를 내면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피해자에 연대하는 사상이다. ‘강간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가 더 고통받는가’ 식으로 경쟁하는 길로 빠진다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를 더 어렵게 만든다.

 

‘2차 가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2차 피해’라는 용어를 살펴봐야 한다. 2차 피해는 피해자가 1차 피해(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부당한 상황을 뜻한다. 대표적인 ‘2차 피해’ 사례가 피해자의 증언을 불신하고, 소극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태도이다. 그런데 2차 피해는 성폭력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부추겼다. 가해자로부터 법적으로 공격받는(무고죄, 명예훼손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2차 피해’ 대신 ‘2차 가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김현영은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무분별하게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2차 가해’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그렇게 되면 공론장에서 주목해야 할 1차 피해, 즉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만다. 따라서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는 피해자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반 성폭력 운동 전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정희진도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비판한다. 그녀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피억압자 또는 피해자로 규정하는 반응이 여성 자체를 ‘남성 권력의 피해자’로 한정된다고 지적한다.

 

 

피억압자 스스로 피해자화는 경우, ‘피해자화’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남성 권력의 피해자라고 보고 여성에게 그에 맞는 이미지와 역할을 요구한다. 또한 ‘피해받은 불쌍한 여성’은 여성의 존재성을 남성과의 관계로만 한정하는 방식이다. 남성 권력은 여성이 피해 상태에 머물기를 원한다. 피해 여성만이 남성을 권력의 주체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희진, 223쪽)

 

 

오용된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권김현영과 정희진의 입장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의 피해 경험을 ‘폭로’하고 ‘발견’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페미니즘의 진짜 역할이고, 미투 운동 이후 우리 사회가 실천해야 할 자세이다.

 

이 책의 2장은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기록하고, 관련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해온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의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3장(한채윤)4장(루인)퀴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성소수자 관련 쟁점들을 다룬다. 앞서 《피가페》가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페미니즘과 퀴어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1] 그리고 성 소수자도 같은 성 소수자 또는 비(非) 성 소수자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며 죽음을 부르는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성폭행을 경험한 레즈비언, 트랜스 여성도 미투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혹자는 페미니즘 책에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룬 글이 두 편씩이나 있다는 점에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특히 성 소수자를 배격하고 오로지 ‘여성’을 위한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 진영에 속한 독자라면 3, 4장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란스’는 성 문화 연구 모임이다. ‘페미니즘 문화 연구 모임’이 아니다. ‘성(性)’에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건 아니다.

 

여성이 성적 피해를 보는 이유는 ‘복장’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성이 갖는 권력과 폭력성 때문이다. 그리고 방관자가 그런 폭력성에 대해 침묵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만들었다. 이런 위계적 관계와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계획적 함정에 고스란히 빠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런 모순된 구조를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정희진은 성 소수자를 차별하고, ‘여성 순혈주의’만 고집하는 TERF를 에둘러 비판한다. 그러면서 ‘퀴어’가 빠진 페미니즘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페미니즘도 퀴어 이론도 결국 차별 받지 않고, ‘인간’으로 존중받는 삶을 위한 사상이다.

 

성적소수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태도가 가부장제의 원리이다. 그래서 퀴어 정치는 페미니즘의 성립 조건이다. 이는 마치 계급이 젠더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퀴어는 인간의 성별을 양성으로 고정시키려는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젠더들이다. 젠더 환원주의나 ‘여성 순혈주의’는 옳고 그름을 떠나, 가능하지 않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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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과 다른 지역의 미투(#MeToo) 운동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미투 운동 열기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곳인 대구는 이제야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 JTBC를 포함한 대다수 언론이 ‘경북대 미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뉴스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경북대는 법과 학칙에 따라 엄정히 조사하겠다고 공식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경북대가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본격적으로 진상조사가 이뤄진 것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권김현영 님이 또 한 번 대구에 오셨어요. 월요일에 있었던 ‘레드스타킹 꽃페미 강연’에 이어서 두 번째인데요,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대구여성주의그룹 ‘나쁜 페미니스트’가 공동 주최한 강연에 나섰습니다. 강연 제목은 「미투 이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강연 장소는 ‘꽃페미 강연’이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안 갈 수가 없죠. 한 주에 유명 인사를 두 번 보게 될 줄이야. 금요일 강연에 저를 포함한 레드스타킹 멤버 세 명이 참석했습니다.

 

 

 

 

 

원래 이날 강연 후기를 쓸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거로 판단했고, 결국 후기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 금요일 강연 내용을 정리한 '공식 후기'가 있습니다. 링크 가져왔으니 참고하세요.

 

https://www.instagram.com/p/Bhy8uZ6HYht/?taken-by=feminism_talk

 

 

 

 

저는 주말에 집 아니면 헌책방,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요.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저만의 놀이 상대는 따로 있어요. 그 놀이 상대는 누구인지 말 안 해도 뭔지 알겠죠?

 

 

 

 

 

 

 

 

어제 대구 동성로에 있는 중앙파출소 앞 광장에 미투 집회가 열렸습니다. 미투 집회가 시작하기 전에 저는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일찍 만났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대구 청년 커뮤니티 활성화 프로젝트 ‘다모디라’ 지원서를 작성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 건 딱히 없어요. 행사 관련 아이디어를 내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처음부터 이 일을 준비한 분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오후 2시부터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6시에 지원서 작성을 완료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에 미투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이날 집회에 특별한 분을 만났어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을 번역한 여성주의 상담가 김민예숙 님을 만났습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은 김민예숙 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요. 사진은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볼 수 있어요.

 

집회가 끝나고 카페에서 밤 11시가 될 때까지 멤버들과 대화를 나눴어요.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책에 없는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제가 몰랐던 것들이 아주 많았어요. 젠더 감수성(gender sensibility)이 떨어지는 운동권 남성들의 실체도 알았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알라디너 중에 진보주의자가 많을 거예요. 지금은 등을 돌렸겠지만, ‘나꼼수’를 지지했던 분들이 많은 거로 압니다. 모든 남성 진보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성을 차별하고,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남성 진보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을 ‘진보적인 사상’으로 보기 어려워요. 페미니즘에도 ‘보수’가 있고요, 성 소수자 운동에 뛰어드는 진보주의자라고 해서 페미니스트인 건 아니에요. 페미니즘은 단수의 형태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상의 폭이 엄청 넓고 복잡해요. 그리고 페미니즘은 책에 있는 내용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에요. 저는 요즘 ‘책 밖의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페미니즘을 알고 싶어요. 눈과 머리가 아닌 피부로 페미니즘을 느끼고 싶어요. 레드스타킹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책 속의 세상’만 바라보면서 페미니즘을 혼자서 공부하고 있었을 거예요. 미투 집회가 있는 주말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을 저의 모습을 상상하면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부끄러워요. 이제는 말과 말이 서로 부딪히는 현장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혹시 제 글을 보고, “멋있다!”, “훌륭하다” 식의 칭찬하는 어조의 말씀을 댓글로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칭찬받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고요, 제가 경험하면서 느낀 것들을 그대로 썼을 뿐입니다. 기록 안 하면 잊어버려요. ‘칭찬받는(칭찬 받기를 원하는) 남자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그냥 ‘남자’입니다.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남자 페미니스트의 역할’에 대한 글을 발견했어요.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역할 :

여자들한테 와서 박수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남성연대 안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라!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주체로 하고 여성을 타자로 위치 짓는 사회구조와 특정 인물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여성 차별 및 혐오를 조장하고, 주입하는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남자들은 여성(페미니스트가 아닌데도)이 남성을 비판하면 ‘남성 혐오’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남성 연대를 비판하는 ‘내부 고발’은 ‘남성 혐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습을 만드는 성차별적 권력 구조의 병폐와 심각성을 남성들에게 알리는 것이 '내부 고발'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도 저는 외출을 합니다. 카페 스몰토크에서 《과학혁명의 구조》(까치, 2013) 독서 모임이 있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오랜만에 ‘진짜 재미없는 책’을 읽었어요. 이번 기회에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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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4-2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하고 싶은데 칭찬하지 말라니 무섭다.....
그냥 칭찬하면 안 되나요.....
사이러스님만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니면 되는 거 아닌가요.....
칭찬을 봉인당했엌ㅋㅋㅋㅋㅋㅋㅋㅋ

cyrus 2018-04-23 17:15   좋아요 0 | URL
생각해 보니 나 혼자서 ‘남자 페미니스트’는 이래야 한다, 저래선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니까 감별사 같군요.. ^^;;

그렇지만 저는 남자 페미니스트의 한계를 지적한 권김현영 님의 말씀에 공감해요. 권김현영 님의 말씀에 따르면 남자 페미니스트는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늘어놓는다고 해요.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얘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미니즘 책 리뷰나 페미니즘 독서모임 후기를 작성할 때면 내가 맨스플레인을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검열해요. 독서모임에 참석할 때도 그래요.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저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남자라면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안의 남성성, 그리고 맨스플레인을 쉽게 털어내는 게 쉽지 않아요.

sprenown 2018-04-2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현장경험이 없어 잘 모르지만 타도시에 비해 대구는 미투운동과 페미니즘운동이 상당히 활성화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네요... 남성페미니스트로서 잘 해나가시리라 믿습니다.

cyrus 2018-04-23 17:18   좋아요 0 | URL
저도 현장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요. 트위터, 인스타그램에는 페미니즘 관련 행사들을 공유하는 게시물이 많습니다. 저는 둘 다 계정이 없어요. 그래서 페미니즘 행사가 뭐 있는지 잘 몰라요. 인스타그램 계정 하나 만들까 고민 중입니다. 페미니즘 독서모임 멤버들 앞에서 ‘나는 남자 페미니스트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없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려고 해요. 페미니즘 독서모임 활동을 하기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저는 ‘남자’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위치입니다. 제가 ‘남자 페미니스트’가 되기에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배울 게 많습니다.
 

 

 

어제 뉴스를 접한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경북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성추행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 [“경북대 성추행 사실 알리자 ‘자율징계’, 2차 가해 저질러”]

오마이뉴스, 2018년 4월 19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186483

 

 

* [경북대서 ‘미투’...“K교수 10년 전 제자 성추행, 재조사 · 징계”]

평화뉴스, 2018년 4월 19일

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6196

 

 

 

※ 이 두 개의 기사는 어제 경북대 기자회견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찾은 건 아니고요,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알려줬습니다.

 

 

 

이 사건은 10년 전에 발생했고, 피해 대학원생은 ‘미투 운동(#Me_Too)’에 힘입어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놀랍게도 성추행 가해자 교수는 성폭력상담소 소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은 가해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를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어제 경북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학교 측에 가해자 징계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에 레드스타킹 멤버들도 동참했습니다.

 

‘경북대 미투’ 관련 기사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학교 내 성추행 사건을 미온적으로 대처한 경북대 측의 태도는 잘못됐습니다. 학교는 어떻게든 성추행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으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했습니다. 어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과 면담을 한 교학부총장은 사건의 심각성을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본 남녀 간 문제로 무조건 매도해선 안 된다.”

(경북대 교학부총장의 발언)

 

 

경북대 성추행 사건은 ‘권력형 성폭력’입니다. 권력형 성폭력은 힘 혹은 지위를 악용하여 약자에 가하는 학대 행위이며 엄연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건을 ‘남녀 간 애정 문제’로 볼 수 있을까요?

 

 

 

 

 

 

 

 

 

 

 

 

 

 

 

* 수잔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 (글항아리, 2016)

 

 

 

교학부총장의 발언은 성범죄 가해자가 자신이 불리할 때 쓰는 화법과 비슷합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성폭행 의혹에 휩싸였을 때 “남녀 간의 애정 행위였다”고 말 같지 않은 해명을 했습니다. 강간과 협박에 가까운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화법은 공정하게 수사해야 할 경찰마저도 믿게 만듭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레드스타킹 멤버들의 말에 따르면 가해자 교수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에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고 합니다.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 측을 명예훼손 혐의로 ‘역고소’하는 일은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 측의 사건 공론화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수법입니다. 가해자 교수는 자신을 ‘성범죄 가해자’가 아닌 ‘명예훼손의 피해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당방위’가 아니라 ‘적반하장’입니다. 가해자는 역고소하면 피해자가 움츠러들 줄 아나 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가해자를 비난하는 여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북대 미투’를 계기로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교에도 ‘미투 운동’이 확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글 일부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경북대는 용기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위드유’로 응답하라!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거나 곧 끝날 거라는 기대는 버려라!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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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1 10:44   좋아요 0 | URL
성범죄가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일으키는 범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러한 착각이 성범죄의 심각성을 둔감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고 지지하는 연예인, 정치인, 전문가 등이 성범죄를 저지르면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기는커녕 연민과 동정을 느껴요.

페크pek0501 2018-04-22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1인입니다. 그들이 어렵게 낸 용기에 대해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후속 처치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8-04-22 11:40   좋아요 0 | URL
미투 운동 이후 조치를 다룬 기사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미투 운동을 보도하는 일부 언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기자들이 선호하는 기사거리는 대중의 반응이 높은 특정 현상이에요. 미투 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니까 기자들이 ‘미투 운동’을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미투 운동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기자들은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다른 관심사에 눈을 돌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