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쓰는 법 - 내가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낀 것의 가치를 전하는 비평의 기본기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박숙경 옮김 / 유유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때부터 의미를 캐내고 전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독서는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리뷰 쓰기는 독자의 독서 체험을 공유하게 해주고 다양한 관점에서 책을 읽게 해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아름다운 말로 상찬하는 리뷰도 좋지만, 가차 없이 비판하는 리뷰를 읽는 재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주로 전업 작가, 기자, 도서평론가들이 쓴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른다. 리뷰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오랫동안 언론매체나 학술지에 실린 리뷰를 ‘서평’이라 부르고, 서평을 쓰려면 전문 작가나 사회적 명사여야 한다는 ‘장벽’이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 독자는 서평을 쓸 수 없는 걸까? 독자 리뷰를 서평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리뷰를 즐겨 쓰는 독자들은 자신이 쓴 글에 큰 의미(리뷰도 ‘서평’이다)를 부여하지 않는다. 책을 소신껏 소개한 리뷰를 썼는데도 독자라는 위치 때문에 ‘내 리뷰도 서평이다’라고 말을 꺼내지 못한다.

 

리뷰는 무엇보다 독자를 위해서 쓴 글이다. 그런데 그 독자는 누구인가? 리뷰에 소개되는 책의 성격에 따라서 글쓴이가 상정한 독자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독자를 위한 리뷰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써진 리뷰의 효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 리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리뷰와 서평의 공통점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독자도 ‘서평’이라 불릴만한 리뷰를 쓸 수 있다. 《리뷰 쓰는 법》리뷰와 서평을 가르는 장벽을 허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가와사키 쇼헤이가 추구하는 리뷰의 목표는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책의 등장에 압도당하기 쉬운 지금이야말로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가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이야말로 리뷰가 온전하게 힘을 발휘하여 ‘좋은 책’을 돋보이게 한다.

 

리뷰를 쓸 때 ‘재미있다’, ‘재미없다’, 또는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책을 평가한다면 책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리뷰는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가치를 전달하는 리뷰’를 쓰려면 객관적으로 책의 내용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책 어디가 재미있는지를 알려주고, 왜 재미없는지를 따져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글쓴이는 리뷰를 쓰면서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를 위해 ‘지침’을 제공한다. 리뷰는 읽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는 책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알린다. 쇼헤이는 ‘비평으로서의 리뷰’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비평’이라는 단어도 많이 보인다. 그렇다면 리뷰도 비평인 셈이다. 저자가 비평 쓰기를 알려준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생각하는 리뷰 쓰기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리뷰와 서평은 다르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의 가치를 발굴하여 그것을 언어로 재구성하는 글쓰기 과정은 비평 쓰기의 원점이다. 따라서 리뷰가 비평과 같은 글이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책을 명확히 관찰하면서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 · 문화적 가치를 전달한다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도 ‘서평’이라 부를 수 있다.

 

책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시대인데도 자연스럽게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온 · 오프라인 공간은 여전하다. 그러나 리뷰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쯤으로 취급당한다. 독자들은 굳이 일반 독자가 쓴 리뷰를 찾아 읽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 독자 리뷰는 넘치지만,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여전히 리뷰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뷰 쓰는 법》은 리뷰의 역할과 가치, 그리고 누구나 리뷰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리뷰 쓰는 법》을 읽으면 리뷰와 서평의 의미를 더욱 잘 알게 된다. 《리뷰 쓰는 법》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과 상호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진다. 리뷰는 누구나 책을 읽고 자유롭게 논하는 독서 문화를 고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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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7 16:21   좋아요 0 | URL
아마추어도 전문가 뺨치는 독후감을 쓸 수 있어요. ‘리뷰, 서평은 전문가가 쓰는 것’, ‘독후감은 일반 독자, 아마추어가 쓰는 것’이라는 단순 이분법적 생각에 반대합니다.

stella.K 2018-07-16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같은 리뷰 쓰기의 대가가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게 넌센스야.
근데 난 좀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긴 해.
점점 리뷰 쓰는 게 자신없어지고 있어.
리뷰에는 채찍을 필요없고 당근이 필요한데 당근을 주는 곳이 없구나.ㅠㅋ

cyrus 2018-07-17 16:22   좋아요 0 | URL
리뷰를 매일 쓰다보면 ‘어떻게하면 더 잘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써보려고 해요. ^^

레삭매냐 2018-07-16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 서평 - 독후감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 진다고나 할까요.

자기 만족적인 글쓰기 만으로도 독후감
쓰기의 매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리뷰는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부담 없이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cyrus 2018-07-17 16:2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독후감에도 책을 평하는 글쓴이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독후감을 쓸 때 느낀 점을 쓰라고 가르치지, 책을 비판하는 입장을 쓰지 못하게 해요. 책을 비판하는 생각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잖아요. 비판적 감상문도 ‘나만의 방식’으로 책의 가치를 전달하는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18-07-1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저자만의 리뷰론으로도 볼 수 있겠네요^^

cyrus 2018-07-17 16:30   좋아요 0 | URL
네, 사람들마다 리뷰의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이가 생각한 리뷰의 정의에 공감하면 거기에 맞춰서 리뷰를 쓰면 됩니다. ^^

sprenown 2018-07-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쓰기도 결국은 글쓰기의 욕망,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책읽고 나서 느낀점과 생각을 남에게 보이면서 자기만족 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가끔씩 슬럼프가 오더라도 꾸준히 써야겠다는 마음이지만,현실적으로 먹고사는 일에 치이게 되면
이젠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가 강요하는게 아닌데...애정결핍인가? 이것도 중독성이 있더군요^^.

cyrus 2018-07-17 16:35   좋아요 1 | URL
저는 글쓰기가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인정 욕구’ 그리고 ‘자아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족 또는 인정 욕구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점을 글의 주제로 삼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어요. 이러한 글쓰기 또한 ‘인정 욕구’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제 ‘서재를 탐하다’ 책방에서 <로쟈와 함께 읽는 가즈오 이시구로> 강연이 있었습니다. 7개월 만에 로쟈 님이 책방을 방문하셨습니다. 강연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일주일 전부터 이시구로가 쓴 두 편의 장편소설 《남아있는 나날》《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요. 톨스토이《전쟁과 평화》를 지겹도록 수십 번 훑어봤고,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위한 책도 읽었습니다. 페미니즘 독서모임 책과 관련해서 수박 겉핥듯이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했습니다. 아무튼 여러 책을 꾸역꾸역 읽느라 이시구로의 작품을 다 못 읽을 뻔했어요. 다행히 《남아있는 나날》은 다 읽었어요.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민음사, 2010)

* 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2012)

 

 

 

로쟈 님은 이시구로를 ‘빈틈없는 작가’라고 평가했습니다. 지금까지 작가가 남긴 전 작품 모두 뛰어나다고 극찬했습니다. 의외의 평가였습니다. 저는 이시구로의 첫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었을 때 이야기 전개의 미숙함(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해석을 요구하는 듯한 모호한 묘사들)이 보여서 썩 훌륭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남아있는 나날》은 로쟈 님의 표현대로 ‘빈틈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기억’입니다. 로쟈 님은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있는 나날》을 ‘기억 3부작’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억 3부작’은 이시구로의 초기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기억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칩니다. 작가는 이 과정을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이시구로는 기존에 기억을 다룬 작가들(예를 들면, 프루스트)과 달리 ‘기억의 부정성’을 극대화합니다. ‘기억의 부정성’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왜곡된 기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최선을 다해 주인을 섬기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 정도로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집사입니다. 그와 같이 일한 총무 켄턴은 스티븐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지만, 스티븐스는 집사 일에만 몰두합니다.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는 충성과 헌신으로 주인 달링턴 경을 섬겼습니다. 소설은 20년이 지난 뒤 스티븐스가 켄턴의 편지를 받고 그녀를 찾아 길을 나서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최선을 다했던 지난 시절을 회상합니다. 만약 프루스트가 《남아있는 나날》을 썼더라면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과거를 회상하는 프루스트의 인물은 집요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진실을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구로의 인물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지만, 끝내 진실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독자는 알고 있습니다. 스티븐스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달링턴 경은 독일 나치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들의 생각(반유대주의)에 동조합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주인의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실,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직분에 충실했으나 인생을 잘못 살아왔습니다. 그는 주인의 결점을 지켜보기만 했으며 끝까지 이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켄턴과의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면서 스티븐스가 알아차리지 못한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살면서 놓친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여행하는 내내 ‘위대한 집사’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살아온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스티븐스는 여행하면서 과거를 회상하지만, 본인이 만든 ‘왜곡된 기억’ 속에 머무르기만 합니다. 이시구로는 스티븐스의 회상을 통해 기억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부각합니다로쟈 님은 《남아있는 나날》의 결말을 보면서 한 편의 ‘섬뜩한 공포소설’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 《나를 보내지 마》, 《파묻힌 거인》에 대한 로쟈 님의 깊이 있는 설명이 있었지만, 제가 이 두 작품을 읽지 않은 관계로 강연 내용은 요약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강연에 맞춰 준비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절반에 못 미치는 강연 내용을 전달하고 말았네요. 《남아있는 나날》마저 못 읽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마도 강연 후기를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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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7-15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기억이 많이 왜곡될 수 있음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제 경험으로도 알게 됐어요.
예전에 쓴 일기장을 보니 제 기억이 틀렸더라고요. 그리고 더 브레인, 이라는 책을 보면
실험을 통해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증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기억만 엉터리가 아니고 심지어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실험도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한다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남아 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 마>는 팟캐스트로 들어서 내용을 대충 압니다.
읽어 봐야겠단 생각을 했었죠. ㅋ

cyrus 2018-07-16 11:53   좋아요 0 | URL
예전에 쓴 리뷰를 다시 보면 책을 잘못 소개한 내용이 보여요. 기억에 의존하면서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 엉터리 내용이 나올 수 있어요. ^^;;

레삭매냐 2018-07-1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시구로 작가의 책, 거진 다 읽었는데
두 권 짜리 하나 못 읽었나 싶네요.

말씀 해주신 대로 책 읽고 나서 바로 기록
한 내용을 보면서 리뷰를 쓰지 않으면 불
상사가 벌어지는 것 같더라구요.

우리는 귀차니즘과 싸우게 되는 것 같네요.
 

 

 

현재 시중에 나온 톨스토이(Tolstoy)《전쟁과 평화》 번역본은 1869년에 완성한 최종 판본을 원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톨스토이는 1860년부터 《전쟁과 평화》를 쓰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부터 생각한 《전쟁과 평화》는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데카브리스트(Dekabrist: 1825년에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들을 가리키는 명칭)가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잠시 집필을 중단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아이들에게 1812년 나폴레옹(Napoléon)의 러시아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이유로 톨스토이는 이야기가 1805년부터 시작되는 《전쟁과 평화》를 쓰게 된다. 이에 따라 기존에 구상했던 주인공들에 대한 묘사가 달라진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문학동네, 2016~2017)

* [절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이룸, 2001)

 

 

 

 

 

 

 

 

 

 

 

 

 

 

 

 

 

 

 

 

 

 

 

 

 

 

 

* 미셸 오쿠튀리에 《톨스토이 : 러시아의 위대한 영혼》 (시공사, 2014)

* 빅토르 쉬클롭스키 《톨스토이》 (나남출판, 2009)

* [절판] 얀코 라브린 《톨스토이》 (한길사, 1997)

 

 

 

 

1865년부터 1866년까지 <러시아 통보>라는 잡지에 《전쟁과 평화》 제1권에 해당하는 《1805년 : L. N. 톨스토이 백작의 장편소설》이 연재된다. 이때 톨스토이는 거의 완성된 《전쟁과 평화》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다. 1866년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제목이 붙여진 초고본이 완성된다. 이 초고본과 현재 알려진 최종 판본 사이에 차이가 있다. 초고본에서 안드레이 공작페탸 로스토프(로스토프 백작의 차남)는 살아 남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전쟁과 평화》 초고본은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되지 못한다. 1868~1869년에 톨스토이는 다시 소설을 수정하는 작업에 돌입했고,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전쟁과 평화》는 오랜 증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최종 판본이다.

 

 

 

 

 

 

톨스토이 전기 작가인 빅토르 쉬클롭스키(Victor Shklovsky)는 톨스토이가 ‘잘못 치료된 팔을 다시 고치듯이 낡은 소설을 부수고 이런 저런 안으로 바꾸어 가며 새롭게 집필’[1]했다고 썼다. 쉬클롭스키는 최종 판본이 ‘결정적 텍스트’라고 판단한 편집자들의 결정을 비판한다. 쉬클롭스키의 지적에 따르면 편집자들은 《전쟁과 평화》 원고를 완벽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수정 작업을 하면서 따로 떼어낸 원고를 복원해야 전체적으로 완벽한 《전쟁과 평화》를 만날 수 있다. 쉬클롭스키의 톨스토이 전기가 나온 연도는 1963년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톨스토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전쟁과 평화》 초고본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톨스토이는 초고본 원고를 ‘잘못 치료된 팔을 다시 고치듯이’ 개작했는데, 이미 썼던 글을 지우거나 새로운 문장을 추가해 덧붙여 썼다. 하지만 톨스토이 연구가 에벨리나 자이덴슈르는 50년에 걸쳐 5000장에 달하는 최종 필사본을 검토하여 초고본을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 1983년에 유실된 내용을 복원한 초고본이 공개되었고, 2000년에 독자들이 무난히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어져 출간되었다. 이듬해 우리나라에 초고본을 완역한 《전쟁과 평화》 번역본이 세 권짜리로 나왔으나 절판되었다[2]. 초고본과 최종 판본을 놓고 어느 것이 진짜 완전한 《전쟁과 평화》 텍스트인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러시아 학계 일각에서는 초고본 복원 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실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초고본의 존재를 부정한다.

 

 

 

 

 

[1] 빅토르 쉬클롭스키, 《톨스토이 2》(나남출판, 2009), 41쪽.

[2] 류필하 옮김, 《전쟁과 평화》(이룸, 2001), 이룸출판사는 ‘자음과모음’ 출판사 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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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1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가슴에 불을 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활활 탈 지는 모르겠네요 ㅋ전쟁과 평화...아

cyrus 2018-07-13 14:45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 작품 배경, 등장인물 정보를 먼저 알고 난 뒤에 소설을 읽으면 완독할 수 있어요. 사실 소설에 불필요한 인물 대화나 장면이 많아요. 저는 이 부분은 속독했어요.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톨스토이의 논문은 반드시 정독해야 합니다. ^^

카알벨루치 2018-07-13 15:20   좋아요 0 | URL
소설읽기전에 먼저 사전예비지식을 갖고 들어가야한다는 말씀! 오케이!

수이 2018-07-1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전쟁 평화 읽기 시작했는데~~

cyrus 2018-07-14 07:10   좋아요 0 | URL
문동꺼 다 읽어가고 있을 때 민음사꺼 나왔더라고요. 민음사꺼는 내년에 읽어봐야겠어요.. ㅎㅎㅎ

oren 2018-08-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에 걸쳐 5000장에 달하는 최종 필사본을 검토하여 초고본을 복원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군요. 더군다나 그 초고본을 우리말로 완역해 놓은 절판본도 있다니, 정말 깜놀입니다.^^

cyrus 2018-08-14 10:34   좋아요 0 | URL
초판본을 번역한 책과 최종 판본을 번역한 책(문학동네 판)을 비교해서 읽어보니 내용이나 인물 묘사에 차이가 있었어요. ^^

막시무스 2020-12-2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를 읽어내기 위해 선행학습 차원에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실수 있을까요?

cyrus 2020-12-20 23:51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이라면 막시무스의 질문에 답변을 잘 해드릴 것 같은데요.. ㅎㅎㅎ
이때 당시 제가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에 선행 독서를 한 책은 빅토르 쉬클롭스키의 <톨스토이> 뿐이었어요. 2권에 <전쟁과 평화> 집필 배경에 대한 내용이 나와요. 저는 읽은 책만 언급하는 성격이라 한 번도 안 읽은 책에 대해서 얘기해줄 수 없어요. 죄송해요. ^^;;
 
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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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코미디(black comed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웃음을 통해 환멸과 냉소를 표현하는 드라마’[*]라고 설명되어 있다. 블랙 코미디에서 교훈을 찾기 어렵다. 모든 것을 조롱하는 블랙 코미디 앞에서는 교훈마저 조롱의 먹잇감이 된다. 이처럼 부조리한 상황에서 피어나오는 ‘검은 웃음’, 이것이 블랙 코미디가 자아내는 웃음이다. 불쾌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희화화한다는 점에서 블랙 코미디의 웃음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허문다. 이를 통해 블랙 코미디는 희극과 비극, 폭소와 절망 사이를 자유로이 오간다. 블랙 코미디로부터 교훈은커녕 의미조차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에서 느껴지는 허무함 속에는 진실이 주는 위력이 담겨 있다. 우리 삶 자체가 그처럼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블랙 코미디는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구병모의 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은 주택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네 쌍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보여주는 ‘현대인들을 위한 블랙 코미디’다. 블랙 코미디에 희비를 함께 가졌듯이 이 소설에는 정상과 비정상이 공존한다. 《네 이웃의 식탁》에선 삶의 부조리에 속절없이 말려든 인간들이 보인다. 작가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극을 통해 흔히 우리가 정이 가득 묻어나는 단어라고 느끼는, ‘가족’, ‘이웃’, ‘공동체’의 어두운 이면을 펼쳐 보인다.

 

아이 셋을 낳았거나 10년 이내에 아이 셋을 낳을 계획이 있는 부부는 공동주택에 입주할 수 있다. 이곳에 네 쌍 부부가 입주하여 서로를 가족처럼 대하면서 지낸다. 출근할 때 자동차를 함께 타고, 쓰레기 분리배출도 함께하는 등 공동체 생활을 이어나간다. 속사정이 제각각인 네 쌍 부부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를 시작한다. 공동육아는 기혼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가사부담 증가, 독박육아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동육아는 더욱 부부들의 삶을 꼬이게 한다. 소설 속에서 부부들은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내가 혼자 감당하는 육아의 무게는 변함이 없다. 소설은 공동주거생활과 공동육아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크고 작은 불편한 일상들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공동체 생활은 때로는 번거롭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 제한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지급해야 할 불가피한 대가로 작용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공동체 생활의 안전한 일상, 그 ‘친밀한 관계’ 아래 겨우 잠복해 있던 개인의 불만들이 하나씩 터져 나온다. 불편함을 참으면서 가족이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 그들과 관계 맺는 방식 등 공동주택 입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독자에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보인다. 공동체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는 인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주어진 삶에 툭툭 내던져지는 돌발 상황들을 견뎌낸다.

 

작가는 진심과 표현이 일치하지 못하는 데서 파생되는 불쾌하고 부조리한 현대적 공동체 풍경을 만들어 소설에 담아냈다. 그 풍경에 실질적인 의미를 더 부여하자면, 정부의 저출산 정책과 가족 중심 문화가 교묘하게 결합하여 빚어진 일련의 부조리이며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인간들의 쓰라린 몸부림이 반영되어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가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받는데, 누가 잘못했냐고 탓할 수 있단 말인가.

 

 

 

 

[*]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엮음, 《문학비평용어사전》(국학자료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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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2 18:22   좋아요 1 | URL
아이를 돌보는 부모들에게는 저마다 사정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정을 모르면서 부모의 육아 방식에 태클을 걸거나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육아에 지친 부모를 피곤하게 만들어요. 국가는 ‘평균’을 기준 삼아 정책을 내세워요. 이렇다 보니 누구는 정책의 혜택을 보지만, 나머지 ‘평균’에 벗어난 사람들은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어요. 이러한 상황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레삭매냐 2018-07-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에 등장하는 공동거주, 공동육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실험‘이었습니다.

오히려 잘 되는 게 이상한 거죠.

좀 빤한 이야기라 나중에 가서는 좀 그렇더라구요.

cyrus 2018-07-12 18:24   좋아요 1 | URL
소설에 나오는 공동주택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디스토피아 같았습니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희정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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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는 펜 하나로 세상을 움직인 인터뷰 전문 기자이다. 그녀는 세계적인 정치 거물들과 인터뷰를 도전적으로 진행하는 걸로 유명하다. 정치 거물들은 팔라치의 신랄한 질문 공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늘 팔라치의 승리로 인터뷰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는 그녀의 말과 글을 토대로 사후에 펴낸 자서전이다. 자서전 편집자는 팔라치가 자신에 대해 직접 밝힌 내용만 선별하여 자서전 형태로 엮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녀의 투쟁적인 삶과 뜨거웠던 열정을 회고하는 생생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팔라치는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권 아래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를 이끈 지도부였다. 팔라치는 파시스트와 나치에 맞서는 저항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찍부터 정치권력 남용 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자서전의 1부(「운명은 그렇게 준비되었다」)는 팔라치가 유년 시절에 겪은 일화와 ‘기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에 대한 기록이다. 삼촌의 권유로 팔라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베트남 종군기자로 활동한다.

 

팔라치는 종군기자로 베트남 전쟁에서 중동 전쟁, 헝가리 침공에서 남미 봉기,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팔라치는 기사를 쓰면서 자신을 ‘역사의 증언자’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역사 현장의 중심에 섰다. 2부(「돌아다녀! 세상을, 마음껏!」)에서는 기자의 사명, 글쓰기와 인터뷰에 대한 팔라치의 진솔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팔라치는 자신과 인터뷰한 유명 인사들을 가리켜 ‘불쾌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유명 인사, 특히 권력자와의 인터뷰는 걸림돌이 많다. 사전에 질문 원고를 받아 보고 거북한 내용은 빼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고, 미리 특정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인터뷰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현장의 위압감 때문에 준비한 내용을 제대로 질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련한 팔라치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한풀 옷을 벗기듯 놀라운 사실을 뽑아내고 권력자의 속내를 간파해 나갔다. 그러나 팔라치는 자신이 정치 인터뷰 기자로 알려진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팔라치의 활약상에 감탄한 대중은 그녀를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으로 칭송했지만, 그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수많은 인물을 인터뷰하고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던 팔라치는 그리스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Alexandros Panagoulis)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파나굴리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뒤 전설적인 영웅으로 다시 되살린 것이 <한 남자(Un Uomo)>라는 소설이다. 3부(「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쟁」)는 사랑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숙명적인 인연을 잊지 못하는 팔라치 자신의 독백이기도 하다.

 

팔라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인 삶을 살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뛰어들었고, 나치즘과 파시즘이 위세를 떨쳤을 때 이에 대한 저항의 글을 쓰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색적이었으며,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고독한 인간이었다. 혹자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오리아나 팔라치’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팔라치는 자신의 이름에 ‘영웅’, ‘성녀’, ‘전사’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을 거부했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서서히 만들어진 신화를 부정했다. 팔라치가 좋아할 만한 명예로운 별명이 뭐가 있을까. 하늘에 있는 깐깐한 팔라치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녀를 ‘자유인’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자유인’ 팔라치의 내면적 자화상이다. 그녀가 인터뷰한 팔라치는 ‘전설의 여기자’가 아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인간이다.

 

 

 

 

 

※ Trivia

 

63쪽에 팔라치가 이란의 소라야 왕비를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긴 일화가 나온다. 이 장에 소라야를 ‘소리야’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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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12 12:53   좋아요 0 | URL
역시 사진 보는 눈이 뛰어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