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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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싸늘한 반응에 굴복하여 할복을 결정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순수미학을 사랑했던 작가로서 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은 작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주인공 '나'는 성장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몇 가지 이미지를 접한다.

 

 

 

 

 

 

귀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1616년  / 세바스티아누스로 분한 유키오  

 

 

히르슈펠트가 성도착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회화 및 조각 1위로 ‘성 세바스티아누스 그림’을 꼽은 것은 나의 경우 흥미로운 우연이었다. 이것은 성도착자, 특히 선천적인 성도착자에게는 도착적 충동과 사디스틱한 충동이 구별하기 어렵게 착종되어 있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에 아주 적합한 예다. (49쪽)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그림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사정한다. 레니의 그림에서 묘사된 세바스티아누스는 주인공의 관능을 더욱 강조하는 이미지가 된다. 유키오에게 죽음이란 불완전한 삶의 보완양식으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자신이 뜻을 품고 있는 가치가 훼손되거나 그 길이 어긋나 버릴 것 같은 경우, 그는 장렬한 죽음을 통해 그 유한한 삶의 완전함을 이루고 또한 그것에 완벽한 방점을 찍으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만의 은밀한 미학과 완벽한 죽음에의 동경을 꿈꾸어 왔던 그에게 죽음이란 바로 일생의 유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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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1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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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멀티 아티스트' 호크니

 

 

 

 

 

 

데이비크 호크니 「무제, 2009년 7월 5일, No. 3 」 2009년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친구로 두었다면 매일 아이폰으로 그린 새벽 풍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호사를 누리게 될지 모른다. 그의 아이폰 그림은 붓으로 그려낸 듯한 섬세한 터치가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폰의 브러쉬 기능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뒤 갤러리에 판매하고 있다. 호크니의 드로잉에서 ‘보는 것’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을 둘러싼 세계 역시 달라질 것이다.

 

1960년대 영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 새로운 접근의 포토 콜라주를 시도한 사진가, 일러스트레이터, 판화가, 무대 미술가 그리고 최초의 스마트폰 화가. 영국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를 수식하는 단어는 매우 다양하다. 호크니에 대한 설명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마틴 게이퍼드는 이 ‘멀티 아티스트’와 나눈 10년간의 대화를 한 권으로 정리했다. 호크니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란 어떤 것인지에,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지 등 주제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호크니는 청년 같은 왕성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으로 다양한 매체와 예술 영역을 유랑했다. 그가 평생 몰두한 미술은 ‘사람과 그림’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림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아닌 3차원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 놓은 그림이 어떻게 무엇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일까.

 

호크니는 관찰하고 묘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렸다.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꽃병도, 방금 벗어놓은 모자나 슬리퍼도 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품고 있는 피사체였다. 길을 가다가 차를 세우고 스케치북을 열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풀들을 스케치하곤 했다. 호크니는 그 풀을 사진으로만 찍었다면 드로잉을 할 때만큼 유심히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피사체의 고유한 특징과 매력은 열심히 관찰한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열심히 바라보는 것’은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였고,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 매력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린 호크니에게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그래서 보면 볼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그런 주제였다. 호크니는 렘브란트, 반 고흐, 모네의 그림이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화가가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Scene #2  눈을 커지게 만드는 그림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 2007년  

 

 

호크니의 미술에 관한 열정과 통찰력은 진정 감동적이었다. 책 초반부에 월드게이트 숲을 그린 장부터 이미 인상적인 풍경화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특히 5장 ‘점점 더 커지는 그림’을 읽다가(66~67쪽) 입이 딱 벌어졌다. 거기에는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가 담겨 있다. 게이퍼드는 아마도 미술 역사상 가장 큰 풍경화라고 소개한다. 적어도 전적으로 야외에서 그린 가장 큰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며, 이 작품은 소설과도 같은 시각 경험을 제공해 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책의 도판을 보면서, 그저 그림의 떡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걸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지금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서 올해 2월말까지 호크니의 큰 나무들이 그 무성함을 직접 뽐낸다. 이 그림은 높이 4.5m, 폭 12m에 이른다. 총 50개의 캔버스를 이어 하나의 대형 풍경을 펼쳐낸 대작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한다. 해가 환하게 미소 짓다가도 금방 심술궂은 먹구름이 온 세상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때때로 굵은 빗줄기를 대지에 쏟아 붓는다. 나무와 들풀도 바람에 몸을 파르르 떨며 잠시도 똑같은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양화가들은 하나하나의 정지된 순간을 고정된 시점으로 포착할 뿐이다.

 

호크니는 이런 게 불만스러웠다. 그는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려면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은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 중 하나다. 50개의 캔버스는 하나의 풍경을 포착했지만 각각의 캔버스는 서로 다른 순간을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표현되었다. 관객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수십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풍경을 감상하게 되는 셈이다.

 

 

 

 Scene #3   결국, 그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 「개로비 언덕」 1998년

 

 

현대인의 눈은 스스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보다 카메라 앵글로 조작된 세상(사진, 영화, 광고 등)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재료의 거친 날것이 주는 신선함보다는 조리된 인스턴트 음식의 편안함에 손이 가듯이 말이다. 최근 미술에서의 ‘사실화 경향’ 중 하나도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기록된 것이거나, 카메라의 기록과 컴퓨터의 조작, 손을 통해 재생산된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호크니의 미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그림은 화가의 내부세계와 그림의 소재가 된 외부의 세계가 발가벗고 만나는 과정, 생생한 라이브 쇼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각의 주체로서의 시각 인식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작품 소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작가 자신의 생활 태도와 경험에 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면에 담는 대상을 정확히 관찰하고 소화하고 이해해서 ‘나의 것, 나의 이야기, 나의 이미지’로 전환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작업의 시작이다. 반복되는 스케치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동시에 이런 요소들을 큰 화면으로 구성하는 작업인 것이다.

 

호크니는 인간의 눈, 더 이상 과거 이성을 대변하는 눈이 아닌 여타의 감각을 담아내는 눈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크니는 카메라의 눈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변화와 생생함을 회화, 즉 그림만이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를 자신의 눈으로 실천했다. 실제로 밖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최대한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고자 관객을 둘러쌀 정도의 거대한 멀티캔버스 회화를 펼쳐 보이고 있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스쳐지나갈 수도 있을 법한, 어쩌면 큰 특징이 없기까지 한 자연 풍경은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눈에 포착되어 우리 앞에 자리한다. 아니 우리가 그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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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2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다녀오셨군요! 저도 꼭 보고 싶은 그림인데.. 이번 주말이 마지막 기회네요. 음...

cyrus 2014-02-20 22:27   좋아요 0 | URL
서울에 들릴 때 정말 큰 맘 먹고 과천까지 이동해서 그림을 봤어요. 서울에 한 번 전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폰에 있는 기능을 듣긴 했는데 저처럼 그림그릴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그림의 떡인데... 요즘은 드로잉이라도 연습해야하나.. 그러고 있어요. 하다보면 어떻게 안될까.. 잘그려서 화가 될것도 아닌데...

저 논밭 그림 예뻐요!

cyrus 2014-03-04 23:58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시죠? 요즘 스마트폰으로 손수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알려주는 어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보기가 힘들죠.. ^^;;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길」 1689년

 

 

 

길을 그리기 위해 나무를 그린 것인지

나무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또는 길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그리기 위해

길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에 던져진 초록 그림자,

길은 잎사귀처럼 촘촘한 무늬를 갖게 되고

나무는 제 짐을 내려놓은 듯 무심하게 서 있네

 

그 평화를 누가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의 도끼는

때로 나무를 길 위에 쓰러뜨리나니

파르르 떨리던 잎사귀와 그림자의 비명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겠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

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

굽이치며 사라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

 

- 나희덕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

 

 

 

서로 마주 보고 나란히 선 가로수가 만든 선을 연장하면 한 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점이 소실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차 레일을 멀리서 보면 평행선이 만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생은 길과 같다. 길이 마치 소실점 같은 끝이 있어서 어느 지점에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길을 떠나는 누구나가 길 끝에서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인생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소실점에 급히 도달하고 싶은 열망이 아니다. 길은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다.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자신을 찾아 걷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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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시 삼백수 : 7언절구 편 우리 한시 삼백수
정민 엮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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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시비성(是非聲)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북 「계류도(溪流圖)」 연대 미상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최북은 이 시의 후반부를 첫 글자 ‘상(常)’만 ‘각(却)’으로 바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그린 「계류도(溪流圖)」의 화제(畵題)로 삼았다.

 

 

미친 물결 쌓인 돌 묏부리를 울리니

지척서도 사람 말 분간하기 어렵구나.

올타글타 하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 부러 시켜 산을 온통 감싼게지.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 題伽倻山讀書堂 / 가야산의 독서당에 쓰다, 14쪽)

 

 

최치원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재능이 좋았고, 그의 고독이 좋았고, 그의 시가 좋았다. 망해가는 신라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그의 삶이 좋았다. 시비(是非)하는 소리가 싫어 바위 사이를 울리며 흐르는 물로 차단해버리고 그 고독 속에 파묻힌 그의 결정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 다닌다. 내가 내뱉은 언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주울 수 있는 언어, 내가 버린 언어. 세상은 바야흐로 언어의 천국이다. 내가 내뱉은 언어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가 듣는 언어로 인해 내가 아프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하면 모든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 언어가 시(是)하는 것이든, 비(非)하는 것이든 그 모두를 내 속에 받아들인다. 지난 시간과는 달리 내 속에 들어온 시비성(是非聲,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투는 소리)은 아주 자유롭게 내 속을 흘러 다닌다. 흐르는 물소리로 시비성을 막아버린다고 시비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是)’가 반드시 ‘시(是)’인 것도 아니고, ‘비(非)’가 반드시 ‘비(非)’인 것도 아니다. ‘시(是)’가 ‘비(非)’로 변하기도 하고, ‘비(非)’가 ‘시(是)’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시비’ 모두가 상대적이라고 결정해버린다면 삶은 미궁으로 빠진다. 삶은 끊임없는 ‘시비’의 판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치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시비’를 결정할 수 있을까? 상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판단이다. 개인을 넘어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 거기에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생긴다.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도덕이고 법일 것이다. 우리가 도덕이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비성’이 들린다고 흐르는 물소리로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소리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Scene #2  아름다워 슬픈 여강,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그림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거늘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려 하나.

여강 한 굽이 산은 마치 그림 같아

반쯤은 그림인 듯 반쯤인 시인 듯.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廬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이색, 麗江迷懷 여강에 마음이 심란하여, 108쪽)

 

 

 

여강(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여주 땅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나타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여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여주에서 그림 같고 시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강의 풍경이다.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는 남한강이 여주를 감고 돌면서 비로소 여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청, 강원은 물론 영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강줄기를 여주 사람들은 ‘여강 백리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언제나 사람과 풍성한 물자로 흥청거렸던 이곳도 철도와 고속도로의 등장에 잊힌 강이 되어버렸다.

 

4년 전에 여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핵심 구간이 되면서 찬반 세력이 첨예하게 맞선 곳이었다. 강 생태계 파괴로 환경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며 환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공사로 파괴되는 현장을 직접 보려는 시민순례단의 답사 발길이 이어졌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공사는 진행되었다. 지금쯤이면 여강의 그림은 반쯤은 콘크리트이고, 반쯤은 식당일 것이다.

 

여강길은 철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물수제비를 뜰 수 있고 동물발자국과 희귀식물도 찾을 수 있으며 강을 울리는 메아리도 들어볼 수 있다. 자갈길과 모랫길, 억새길, 늪지길이 번갈아 나오는 그 길을 걸으면 이야기가 있고 유적도 있다. 그리고 눈물도 난다.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심란하다.

 

 

 

 Scene #3  연밥 던지고 임도 보고

 

 

 

문혜정 「연곷 이야기 1」 2008년

 

 

가을날 맑은 호수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두고.

임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행여 남이 봤을까 봐 한참 부끄러웠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 採蓮曲 / 연밥 따는 노래, 324쪽)

 

 

 

가장 더운 여름날 새벽에 피어나서 밤이면 꽃잎이 닫히기를 3~4 일간 계속 되는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가장 깨끗하게 피어난다. 흔히 연꽃을 한 꽃 받침에서 두 송이가 핀다 해서 부부간의 금슬을, 연밥에는 씨가 많아 다산을, 연밥의 씨는 수백 년 동안 생명을 유지해서 장수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군자를 의미하고 절개를 뜻하는 연꽃도 한편으로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꽃이 심어져 있어 연밥을 따는 연못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 사랑이 무르익는 장소였으며 ‘연밥도 따고 임도 본다’는 대표적인 꽃이다. 연밥(蓮子)을 던져주는 것은 사랑 고백을 의미한다. 정민 교수의 해석대로 ‘연자’(蓮子)의 동음이의어 ‘憐子’로 읽으면 ‘그대를 사랑해요!’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부끄럽지만 임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구절이 뛰어나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을 사랑으로 갈망하고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연인을 가져보지 못했고, 지아비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난설헌의 문학적인 성취의 뒤편에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자리 잡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다, 기생집을 전전하던 남편, 그리고 재주를 질시하던 시어머니와의 끝없는 불화, 그리고 두 자녀의 죽음. 그녀의 삶은 질곡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한(恨)을 난설헌은 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연꽃잎은 기억할까, 여인의 눈물을. 진흙 속에 활짝 피는 연꽃잎을 만나면 시대와 불화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과 못다 핀 사랑을 기억해야겠다.

 

 

 

 Scene #4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리는 독립의 의지

 

 

사방 산 감옥 에워 눈은 바다 같은데

찬 이불 쇠와 같고 꿈길은 재와 같네.

철창조차 가두지 못하는 것 있나니

밤중의 종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鐘聲何處來

 

(한용운, 雪夜 / 종소리, 612쪽)

 

 

 

김광균의 ‘설야’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귀를 열게 하지만, 한용운의 설야는 몇 겹으로 갇힌 감옥 속에서 듣는 종소리로 귀를 당긴다. 안 그래도 감옥인데, 사방에 눈이 하염없이 쌓여, 갇힌 마음을 다시 섬으로 가뒀다. 외롭고 슬픈 마음에 이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싸늘하고 꿈마저 으스스하다. 그런 가운데 문득, 가둔 울타리 모두 풀고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있다. 저 종소리의 놀라움. 철창도 가두지 못하는 게 있다. 종소리를 가두지 못한다면, 마음인들 어찌 가둘 수 있으랴.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만해 한용운 선생은 변호사를 대지 말고,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주변에 당부했다고 한다. 그가 수감 중 지은 시 '설야(雪夜)'는 꿈마저 재가 될 정도로 혹독한 감옥에서 한 밤 종소리를 들으며 느낀 비감한 심사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자유와 독립의 의지를 가두지는 못한다는 그 기개가 미명의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려온다.

 

돌아온 봄에 꽃은 피고, 회복한 땅엔 새살이 돋았다. 아픔은 사라졌고, 흉터는 남았다. 남은 역사의 흉터가 부끄럽다고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더욱 혹독한 아픔을 다시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옥중에서 뽑아 올린 이 시가 아무리 드높은 예술로 승화된 절창(絶唱)이라 할지라도, 이런 절창은 결코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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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피카소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누리면서도 장수까지 한 그였지만 그 역시 무명화가로서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를 ‘청색 시대’(1901~1904)라고 부른다.

 

1901년 당시 20세의 피카소는 가난했다. 돈을 벌지 못해 차가운 빵으로 연명했고 얼음장 같은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다. 가까운 친구 카사헤마스가 죽자 피카소는 자신도 제대로 먹지 못해 눈이 멀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파블로 피카소 「인생」 1903년

 

 

‘청색 시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생」은 젊은 예술가의 차갑고도 깊은 절망감이 느껴진다. 벽에 그린, 마치 웅크리고 앉은 인물은 고독과 절망,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는 탄생과 모성, 연인(남자의 얼굴은 죽은 친구 카사헤마스)은 육체적 사랑을 상징한다. 사랑, 결혼 그리고 생명의 탄생. 인생의 황금 같은 순간들이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색 시대로 세상을 보면 인생은 하나도 아름다울 것이 없고 절망과 불행의 연속으로만 느껴지게 돼 있다. 청춘의 고통과 우울함, 복병처럼 찾아든 가난과 향수병, 미래의 불안으로 영혼과 캔버스를 온통 어두운 청색으로만 염색했다. 그야말로 무기력했던 청춘의 ‘청색 시대’였다.

 

그러나 인생에서 그 궁극적 과제가 생존이고 생존은 고통과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은 어쩌면 우울한 시대에 자라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피카소도 그랬다. 1905년에 자신의 그림이 인정을 받고,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피카소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그의 그림에선 푸른색이 사라지고 화려한 붉은색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라고 부른다.

 

 

 

 

 

 

 

 

 

 

 

 

 

 

 

인생의 무게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이들의 어깨를 공평하게 짓누른다. 하지만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젊은 날이 삶 가운데 특별히 빛나는 시간이라는 미신도 설득력을 얻는다.

 

 

 

 

라이언 맥긴리 「Somewhere Place」 2011년

 

 

누가 청춘을 반짝 빛나는 순간이라고 했던가. 맥긴리의 「Somewhere Place」에서 청춘은 영원하다. 피카소의 「인생」의 연인은 공허한 초점으로 예정된 인생의 고통을 기다린다면, 맥긴리의 연인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딘가에 있을 인생의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내일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사진 속 비춰 내려오는 따사로운 장밋빛이 있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아마 우리가 나아가는 길도 그렇지 않을까. 인생을 살다 보면 청색 시대를 겪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절망하지 않고 노력하며 내일은 더 나은 날이 온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만이 장밋빛 시대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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