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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민수 《프로레슬링 : 흥행과 명승부의 역사》 (살림, 2005년)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문예출판사, 2002년)

 

 

프로레슬링을 좋아한 지 십여 년이나 지났다. 중학생 때 친구의 권유로 케이블 채널에 중계한 WWE 경기를 보면서 레슬링에 ‘입덕’하기 시작했다. WWE 관련 소식을 전하는 국내 프로레슬링 전문 매체가 여러 개 있는데, 하루를 거르지 않고 꼭 챙겨본다. 관심 있는 레슬링 선수들이 무슨 경기를 했는지 확인하고, 경기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시청한다.

 

각설하고, 지난주 네이버 메인에 잠시나마 오른 레슬링 관련 뉴스 하나를 소개해본다. 뉴스의 주인공은 멕시코에서 레슬러로 활동 중인 미국 출신의 샘 폴린스키(Sam Polinsky)다. 나는 인디 단체 레슬링도 좋아하는 레슬링 덕후 수준이 아니라서 처음에 이 선수가 누군지 몰랐다. 샘 폴린스키는 본명이고, 링네임(ring name)은 샘 아도니스(Sam Adonis)다.

 

 

 

 

 

이 선수가 화제가 된 이유는 링에 입장하면서 상당히 ‘위험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샘은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있는 성조기를 들고 오면서 관중이 보는 앞에서 ‘트럼프 지지자’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샘은 미국인이고, 멕시코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과 트럼프의 국경장벽 공약 때문에 멕시코와 미국 간의 사이가 비틀어지는 중이다. 샘이 트럼프를 찬양할 때 멕시코 관중들은 온갖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다. 이곳에서 샘은 멕시코 관중들이 싫어하는 ‘악당’ 같은 존재다. 그를 혼내주기 위해 멕시코 레슬러가 등장하고, 관중들의 열화 같은 응원에 힘입은 멕시코 레슬러는 미국인 악당을 무찌른다.

 

 

레슬링 경기를 안 보는 사람들도 다 안다는 명언이 있다. ‘레슬링은 쇼(show)다!’ 이 말 한마디로 WWE를 포함한 모든 전 세계 프로레슬링은 순수 스포츠 종목이 아닌 ‘가짜’라고 믿는 사람이 생겼다. 레슬링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느 선수가 이기는지 다 정해져 있으며 심지어 선수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정교하게 짜인 각본의 일부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링 위에 구르고, 뛰고, 땀 흘리는 과정들은 ‘100% 가짜’가 아니다. 선수들이 링 위에 움직이는 모든 동작은 피나는 훈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 경기 다 뛰고 나온 선수들은 온몸에 몰려오는 통증에 시달린다.

 

레슬링 선수들이 관중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면 ‘기믹(gimmick)’을 갖춰야 한다. 기믹이란 선수가 연기하는 캐릭터이다. 쉽게 말해서 드라마의 배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기믹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관중들에게 환호받는 선역 기믹, 반대로 반칙을 일삼으며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악역 기믹이다. 샘 폴린스키는 악역 기믹 선수이다. 그가 트럼프를 찬양하고, 미국을 싫어하는 멕시코 관중들을 비난하는 행동은 실제 본 모습이 아니다. 그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악역을 맡은 선수들은 심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듣지만, 관중들의 관심을 얻은 것에 만족한다. 악역인데도 관중들의 반응이 썰렁하거나 반대로 환호를 보내면 그 선수의 기믹은 실패한 것이다.

 

여전히 ‘레슬링은 쇼’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레슬링을 무슨 재미로 보냐고 핀잔준다. 당연히 그들이 기믹에 맞게 연기하고, 링 위에 뛰는 모습 하나하나가 재미있어서 보는 거다. 레슬링 경기를 시청하는 것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닮았다. 드라마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악인이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면 분노를 드러내고, 반대로 악인이 궁지에 몰리는 ‘사이다 전개’를 보면서 통쾌감을 느낀다. 드라마 줄거리 전개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시청자의 감정 상태를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낀다고 말한다. 카타르시스, 즉 배설은 쾌락을 가져다주며 눈물도 그중 하나라고 정의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시학》에서 비극은 관객들로 하여금 숭고한 인물이 불행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눈물이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서의 순화작용을 일으키게 한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억눌려 있지만, 인간의 감정을 비극의 힘을 빌려 자연스레 분출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인 윤리를 유지해 나가는 하나의 방편으로 비극을 생각했다. 오늘날의 영화나 드라마는 비극의 역할을 대신 해주고 있다. 드라마에 볼 법한 요소가 들어간 프로레슬링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대 레슬링 단체인 WWE의 약자가 ‘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이다. WWE는 프로레슬링에 ‘오락’을 부여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독특한 개성의 선수들이 링 위에 등장했다. 레슬링 관중들은 그 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야유를 보내면서 가슴 속에 쌓인 응어리를 한 번에 푼다.

 

 

 

 

WWE에서 악당으로 인정받는 선수들 대부분은 관중이 싫어할 만한 언행을 하며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다. 예를 들면 ‘밀리언 달러맨(The Million Dollar Man)’으로 잘 알려진 테드 디바이시(Ted DiBiase)는 ‘재수 없는 갑부’ 기믹으로 80년대 최고의 악역 선수로 자리 잡았다.

 

 

 

 

 

WWE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애국심’도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한다. 걸프 전쟁이 한창이던 90년대 초에 서전 슬로터(Sgt. Slaughter)는 미국을 배신하고 이라크 편에 선 반미주의자로 등장하여 ‘무적 선역’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헐크 호건(Hulk Hogan)과 메인이벤트 경기를 가졌다. 두 선수들은 8, 90년대에 활동한 최고의 악역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선역 선수를 만날 때면 무기력하게 패배당했다. 이 장면에서 관중들에게 주는 카타르시스는 배가 된다. 특정 선수 간의 대립을 통해 최후의 승자가 가려지는 이야기 전개는 매번 똑같아 보이지만, 결국 그런 과정이 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WWE 프로레슬링이 인기를 얻는다.

 

카타르시스가 느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카타르시스를 억지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 몰입을 방해하는 독이 된다. 갈수록 답답한 전개로 이어지는 ‘고구마 드라마’처럼 요즘 WWE를 보면 관중들이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수 간의 대립이 ‘고구마’ 전개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실 ‘선역’과 ‘악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양 선수가 갈등을 빚는 설정은 식상하다. 오죽하면 관중들은 선역 선수에게도 심한 야유를 보낸다. 월드 챔피언을 지낸 존 시나(John Cena)와 로만 레인즈(Roman Reigns)는 WWE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인데도 관중들의 야유와 욕설이 많이 나온다. 이 상황은 마치 답답한 행보를 펼치는 드라마 속 선역 주인공을 싫어하는 시청자들의 반응(MBC 주말 드라마 ‘내 딸, 금사월’)과 동일한 맥락이다. 분노를 표출하여 정서를 순화시키는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모든 사람에게 전부 적용되는 건 아니다. 카타르시스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려면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덧붙인 이야기를 만들지 말고, 그 이야기를 보게 될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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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3 17:29   좋아요 1 | URL
김일, 당연히 알죠. 역도산, 안토니오 이노키도 알아요. ‘프로레슬링은 쇼다’ 발언 이후로 국내 레슬링 산업이 한순간에 폭망한 건 아니었지만, 프로레슬링을 진짜 스포츠 종목으로 여겼던 팬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죠. 프로레슬링을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발언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겨울호랑이 2017-02-22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헐크호건과 워리어, 마초맨이 있었던 90년대 WWF때가 기억이 나네요 ㅋㅋ 교실에서 책상 밀고 친구들과 로얄럼블 재연했던 리즈시절이 그리워집니다. ㅋㅋ

cyrus 2017-02-23 17:3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학창 시절에도 교실에서 레슬링하는 친구들이 있었군요. 저도 중딩 때 애들이랑 레슬러 흉내 내면서 놀았어요. 그땐 더 락과 스티븐 오스틴, 트리플 H를 선호하고, 따라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

transient-guest 2017-02-23 0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레슬링은 80-90년대 말,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가 좋았죠. 그래도 91년 레슬메니아 기믹은 욕 많이 먹었습니다, 전쟁을 이용한 돈벌이라고; 사람들의 정신이 좀더 살아있던 시절이죠.. 2000년대 중반 이후로 WWE가 단체를 통합한 다음에는 완전이 entertainment노선으로 가면서 재미가 떨어졌어요. 같은 ‘쇼‘라도 연기하는 사람까지 이를 ‘쇼‘로 취급한다는 느낌이 나면서 combat개념이 너무 떨엉지더라구요. 요즘은 미국레슬링은 거의 안 보고, 가끔 유투브으로 예전 전일본이나 신일본 걸 봅니다. 좀 살벌하게 치고받는, 종합격투기 이전 사실상 종합격투기를 표방하던 시절이 그립네요.ㅎㅎ 미국의 MMA는 BJJ와 tough guy 대회 같은데서 발전했다면 일본의 MMA는 사실 프로레슬링과 레슬러들이 원조니까요.ㅎㅎ 간만에 추억이 쏠쏠 돋네요.

cyrus 2017-02-23 17:44   좋아요 0 | URL
t-guest님이 저보다 ‘레잘알’이시군요. 전일본, 신일본 경기를 보는 분을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ㅎㅎㅎ

서전 슬로터가 반미주의자 기믹으로 활동했을 때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미주의자 기믹을 포기했고, WWF에서의 선수 경력이 많지 않아요.

지금도 WWE가 선수들과 관련된 굿즈 상품과 페이퍼 뷰로 수익을 얻고 있다지만, 8, 90년대 WWE를 보는 관중과 지금의 관중의 시선을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 관중들은 이제 여전히 오락 위주의 WWE를 지루하게 느끼고, 존 시나나 로만 레인즈 같은 선역 선수들을 싫어하게 됩니다. WWE는 경기력 있는 선수보다는 상품성 있는 선수들을 밀어주죠.

캐모마일 2017-02-23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재밌게 읽고 갑니다. 예전에 세상의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아주머니 한 분이 주인공으로 나오셨는데, 우연히 본 레슬링에 심취하신 경우였어요. 제작진이 왜 레슬링이 그렇게 재밌으시냐 여쭤보니까, 거기에도 선역과 악역이 있고 드라마가 있다시면서 선수 이름과 줄거리를 막힘 없이 이야기 하셔서 말 그대로 세상의 이런 일이구나 ㅎㅎㅎㅎ 하고 놀랬습니다. 기믹과 카타르시스로 설명해 주시니 이해가 갑니다. 주인공 아주머니는 평소 식당일 열심히 하셨지만 마음 한켠에 무료함과 공허함이 있던 와중에, 레슬링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셨네요.

캐모마일 2017-02-23 07:39   좋아요 0 | URL
오래 전 본 영화라 가물가물하지만 김지운 감독 연출 송강호 씨 주연의 영화 반칙왕이 떠오르네요. 극중에서 주인공 임대호가 상사과 실적이 치이는 소심한 샐러리맨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상사가 심심하면 헤드락을 거는 통에, 무언가 탈출구와 도전이 필요했던 임대호가 레슬링을 혹독하게 배워서 복면을 쓰고 레슬링 무대에 섰었나 했어요...종반부에 악역 기믹을 맡은 임대호가 주인공 기믹에게 지는 설정이었는데, 샐러리맨의 비애와 분노가 순간 밀려오면서 각본 없는 레슬링이 펼쳐지는 줄거리였습니다. 어렸을 적엔 웃음과 재미, 감동으로 봤지만 지금 보면 애환과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거 같아요. 고 장진영 씨도 그립네요.

cyrus 2017-02-23 17:5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에서도 WWE 중계를 보는 할머니가 고민거리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분도 레슬링을 보면서 공허한 마음을 풀 수 있어서 좋다고 말씀하셨어요. 프로레슬링을 자주 보면 사람 성격이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하던데, 그런 경우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저는 비폭력주의자입니다. ㅎㅎㅎ

<반칙왕>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제가 초딩이었는데, 그땐 제가 레슬링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이제는 오래된 영화라 케이블 채널에서도 보기 힘들어졌어요. ^^;;

2017-02-23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23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밤의 화학식 문예중앙시선 45
성윤석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성서》 창세기 3장 19절)

 

 

 

어떤 것은 빨리 썩고 어떤 것은 느리게 분해된다. 물렁물렁한 것은 빨리 찢기고, 딱딱한 것은 천천히 마모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썩어야 생기는 원소를 먹고 산다. 분자로 이루어진 먼지가 더욱 나누어져야 그곳에서 생명의 필수영양원소가 나온다. 썩는 것을 학술적인 용어로 분해라 한다. 형체가 있는 것에서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아주 작은 존재로 부서지는 과정이다. 생물체의 모든 성분은 빠짐없이 흙 속에 들어 있는 성분과 같다. 모든 생물체는 화학적으로 성분을 분석하면 흙이다. 따라서 생명을 잃은 존재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성윤석 시인의 시집 《밤의 화학식》의 ‘화학식’은 우리가 학창시절 과학 수업 시간에 배웠을 그 ‘화학식’이 아니다. 시인은 화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는 원소에 의해 생명이 생성되어 소멸하는 자연의 순리를 화학적 원리로 접근하여 시적 언어로 표현했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원소를 경험적 현실로 인식하고, 나름의 상상력으로 구성된 ‘자연의 순리’를 독자들에게 펼쳐 보여 주고 있다.

 

 

 

 

한 호흡

 

이즈음의, 이즈음의 한 호흡

 

사는 것은 죽어가는 것

 

길고 긴 목포행 완행열차처럼 생의 과정들을 죽 늘어놓고

 

빛나는 것은 소멸한 것, 소멸해가는 것

 

 

(『산소 O』 중에서, 34~35쪽)

 

 

 

 

산소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원소다. 호흡을 통해 몸 안에 유입된 산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 때 사용된다. 하지만 산소가 항상 우리 몸에 이로운 것은 아니다. 산소도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다. 신체의 대사과정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변한 ‘활성산소’는 인체에 해를 끼친다. 우리 세포막과 세포 속 유전자를 공격해 몸을 늙고 병들게 한다. 활성산소는 대사과정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 다행히 우리 몸은 스스로 활성산소의 양을 조절할 능력이 있다. 그렇지만,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자연을 유기체로 보는 동양 전통의 자연관에 따르면 본래 자연의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간다. 즉 인간은 산소를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배설물을 쏟아내며, 죽어서 육신을 땅에 되돌려줌으로써 식물의 번성에도 기여한다. 우리가 죽어서 마지막으로 뱉어낸 ‘한 호흡’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생의 과정’ 일부가 된다,

 

 

얘야, 실제로 무서운 건 우리가 낱낱의 알갱이로 떨어져

서로의 입자들을 다 잃고 난 뒤겠지.

그리고 추운 세상이 올 거야. 넌 혼자가 될 거야.

네가 아닌 사물들이 널 들여다보겠지.

사물들의 뒤편엔 이웃들의 사유들이 먼지처럼 쌓일 거야.

 

(『먼지의 화학식 2』 중에서, 66~67쪽)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들은 감정도 없고, 자기표현 방법도 없으니 무생물이다. 그러나 생각을 뒤집어서 사물들에게 감정을 부여한다면,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시도이다. 시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인 주석을 하나의 실체로 인식한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질문’은 진지하다. 시인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주석의 실체를 탐구하며 생존 욕구를 가지고 환경에 반응하며 변화해 가는 과정 전체를 관찰한다.

 

 원자번호 50번. 이 지방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극한의 추위란, 여기에 없을 테니까. 주석이 극한으로 내려가는 기온 속에서 회색 가루로 변할 동안 사람들도 얼어 부서져버릴 테니까. 스스로 가루가 되어버렸던 사람들을 본다. 눈에 뭔가 자꾸 보였던 것. 눈에 뭔가가 자꾸 보일 때, 시간은 스스로를 묶고 사람이 어디로든 되돌아올 때를 기다린다. 주석 같은 사람들을 안다. 빛나는 술을 담아낼 줄 알지만, 때가 오면, 희미한 가루로 남던 사람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있는가? 당신을 묻는 내가, 너무 진지한가. 아니면 우스꽝스러운가. 세계가 침묵하는 동안 나는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다.

 

(『주석 Sn』 39쪽)

 

 

사람은 죽어서 먼지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은 우주공간에 흩어진 원소들로부터 유래되었고, 생명체가 죽으면 그 구성 물질은 분해되어 먼지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뇌세포에 의식이 있어서 당연한 운명을 두려워한다. 아무리 많은 연구가 있어도 인간 스스로 소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해 아무런 이의제기를 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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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2 14:22   좋아요 1 | URL
원효 대사가 해골 물을 마셨던 상황과 비슷하군요. ㅎㅎㅎ
이번 주 금요일에 일찍 퇴근할 수 있습니다. 그 날 일찍 가겠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7-02-22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물의 근원은 원자라고 말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도 연관이 있겠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2-22 17:40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시집의 100자평으로 잘 어울리는 명언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7-02-22 15: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의 백 뮤직은 이윤수의 ‘먼지가 되어‘로 하겠습니다.
김광석도 있고 로이킴도 있는데, 이윤수를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이 마음이라니...ㅋ~.
연식이 들통나 버릴텐데도 완전 우쭐합니다.
님께도 강.권.합니다~ㅅ!

cyrus 2017-02-22 17:41   좋아요 0 | URL
저는 김광석 버전을 좋아합니다. 이윤수 버전을 안 들어봤어요. 유튜브 영상 올리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안 했어요.. ^^;;

캐모마일 2017-02-23 07:45   좋아요 0 | URL
이윤수는 처음 들어본 가수인데, 한번 그 분 버전의 먼지가 되어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캐모마일 2017-02-23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독특한 시집이네요. ㅎㅎㅎㅎ 마치 화학시간에 인문학과 감성이 풍부한 문과 학생이 하나하나 원소와 개념을 배우면서 시로 승화시킨 거 같아요. 말씀처럼 상상과 받아들임이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되는 사색의 여정이요. 이런 말씀 드리면 시인에게 누가 될런지요.

cyrus 2017-02-23 18:21   좋아요 1 | URL
화학에 대한 지식 없이도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몇 편의 시들은 난해했어요. 저는 제가 이해하기 쉽고, 좋은 시가 많다고 느껴지면, 그 시집의 평점을 높게 줍니다. ^^
 
그림에 나를 담다 - 한국의 자화상 읽기
이광표 지음 / 현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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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은 회화적 기량과 깊은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 장르다. 자화상이라는 주제는 다른 장르와 달리 자의식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화가에게 추가로 요구한다. 얼굴엔 일생동안 찍어낸 한 사람의 발자국, 욕망과 좌절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얼굴을 표현한 자화상엔 화가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게 자화상의 매력이다.

 

   

                        

 

그러나 한국 미술에 있어서 자화상이라는 주제는 회화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결코 많은 화가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았다. 18~19세기에 제작된 일부 화가들의 자화상이 남아있지만, 서양화의 전통이 투영된 자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1910년대다. 고희동(1886~1965)이 동경미술학교에 건너가 서양미술을 공부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미술은 막을 올린다. 서양화를 배운 동경 유학생들의 졸업 작품에 자화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이종우(1899~1981), 나혜석(1896~1948) 등이 구미 각국에서 미술수업을 하고 돌아오면서 자화상 제작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림에 나를 담다의 부제는 한국의 자화상 읽기. 이 책의 저자는 조선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자화상 작품을 한데 모아 분석했다. 시대와 양식, 기법을 넘어서서 자화상이라는 독특한 주제에 대한 화가들의 다양한 이해와 접근방식을 살펴볼 수 있고 나아가 비교까지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그려진 강세황(1713~1791),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역대 조선 회화사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저자는 이 두 사람의 자화상이 자의식을 강렬히 드러낸 이례적인 작품으로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인물화는 별다른 배경을 두지 않았고, 실제 인물 이상의 회화적 효과나 과장을 추구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활동한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고, 과장된 모습으로 표현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적 흐름을 벗어난 윤두서의 자화상이 파격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이 압권인 이 자화상은 목과 상체는 물론 귀도 없이 머리만 그려져 있다. 윤두서의 자화상에 원래 상체가 그려졌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사실이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의 저자인 오주석 씨가 상체 윤곽이 보이는 윤두서의 자화상 도판을 발굴해 원래 자화상에 있던 윤두서의 상체 그림이 실수로 사라져버렸다는 견해를 밝혔다. 여기에 미술사학자 이태호 씨가 오주석 씨의 견해에 반박했다. 두 주장 가운데 한쪽에 당장 손을 들어주기 어려울 정도로 자화상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저자는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관점을 빌려 자화상의 의미를 재고한다. 앞서 말했듯이 자화상은 화가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그림이라고 했다. 관람객과 미술사학자들은 자화상을 바라볼 때 캔버스 속 화가의 얼굴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리쾨르는 자화상을 그린 사람(화가)’자화상에 그려진 사람(화가의 모습)’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냐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 리쾨르의 질문은 일반적인 자화상 감상법을 거부한다. 과연 그 얼굴이 정말 화가의 진짜 얼굴일까, 또 그 속에 화가의 삶이 묻어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이 그림에 나를 담다의 핵심 주제이다.

 

 

            

 

저자는 자화상에 그려진 배경과 소품을 주목했다. 자화상의 진짜 의미는 붓으로 재현한 화가의 얼굴뿐만 아니라 화가를 둘러싼 배경과 소품에도 숨어 있다. 그것은 화가만의 자의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상징물(attribute)이다. 1910~1920년대 자화상이 인물 표현 위주로 그려졌다면, 1930년대 이후부터 배경과 소품이 등장하는 자화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배경과 소품을 적절히 배치해 개인적 서사(화가의 자의식)뿐만 아니라 시대적 서사(조선의 근대화, 일제 강점기, 분단 상황)까지 담아냈다. 동경 유학생 출신 화가들은 조선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는가 하면, 이쾌대(1913~1965)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을 통해 전통과 근대에 혼재된 해방 이후 격변기의 상황과 그 속에 살아가면서 느꼈던 개인적 고뇌까지 표출했다.

 

인간의 의식은 자기의 발견에서부터 출발하면서 자아가 확립되고, 더 나아가 자기로부터의 세상으로 의식이 확대되어 간다. 이 과정을 모두 거친 화가의 자화상과 피상적인 이해만으로 자의식을 인식한 화가의 자화상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화가는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배웠고, 세상을 통해 자화상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붓 한 자루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살아가는 일은 어렵고도 굉장한 일이다. 훌륭한 자화상은 화가의 내면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아니다. 그 자화상에는 ‘세상을 이해한 화가의 눈이 살아있다. 관람객은 자화상에 화가의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 눈 속에 화가가 담으려는 시대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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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02-21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끊임없는 독서와 글쓰기,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
글 넘 좋습니다.

cyrus 2017-02-22 08:30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온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보면서 정말 부지런히 책 읽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제 글을 보는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쓸 겁니다.

캐모마일 2017-02-22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출판사인 현암사에서 또 귀중한 책이 나왔네요. 윤두서 자화상은 워낙 유명해서 낯익습니다. 눈이 부리부리한데다 상체가 없어서 마치 삼국지 관운장의 수급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좀 오싹했는데 상체와 관련된 논쟁이 있었군요.

훌륭한 자화상은 ‘화가의 내면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아니다. 그 자화상에는 ‘세상을 이해한 화가의 눈빛’이 살아있다. 관람객은 자화상에 화가의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 눈 속에 화가가 담으려는 시대상이 보인다.

자화상 속에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어요...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cyrus 2017-02-22 08:32   좋아요 1 | URL
책의 주제가 좋은데도 독자서평 한 편 없어서 의외였습니다. 아쉽게 묻혀버린 책입니다.

yureka01 2017-02-22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사이러스님의 독서넓이는 전방위적이라능..ㅎㅎㅎ

cyrus 2017-02-22 09:04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의 말씀을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면, 깊이가 없습니다. ㅎㅎㅎ

관심가는대로 책을 마구 읽게 되니까 정작 읽어야 할 책들은 못 읽습니다. ^^;;

목나무 2017-02-2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쾌대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는데요 저 자화상을 보니 예전에 갔던 이쾌대 전이 생각나네요.
그때 팜플렛에 사용한 그림이 바로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이었거든요.
덕분에 이 책에 관심이 듬뿍 갑니다. ^^

cyrus 2017-02-22 12:58   좋아요 0 | URL
이쾌대를 좋아하는 분을 만나기 어려워요. 그가 대구 출신의 화가인데도 그를 모르는 대구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
 

 

 

 

 

 

 

 

 

 

 

 

 

 

 

 

 

 

 

 

*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랭크 맥린 (다른세상, 2011년)

* 《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2003년)

 

 

과거 동 · 서양의 왕가들은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다. 《명상록》의 저자 로마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사촌지간인 파우스티나(Faustina)와 결혼했다. 마르쿠스의 일대기와 《명상록》을 같이 읽어보게 되면 황제의 결혼 생활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이 주제에 상당히 흥미로워했다. 프랭크 맥린(F. McLynn)과 (역사가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Shiono Nanami)는 고대 문헌들을 토대로 황제의 결혼 생활을 주목 · 분석했다.

 

정설에 따르면 마르쿠스의 아내 파우스티나는 ‘정숙하지 못한 아내’로 알려졌다. 그런데 마르쿠스는 《명상록》에 아내에 향한 헌사를 남겼다.

 

 

“너무도 순종적이고, 너무도 사랑스러우며, 너무도 소탈한, 너무도 좋은 여인.”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56쪽)

 

 

“더없이 다소곳하고 더없이 다정하고 무엇보다도 전혀 꾸밈이 없는 여자” (《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158쪽)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가 부부로서 함께 지낸 생활은 30년. 그 짧지 않은 세월 속에 파우스티나는 14명 혹은 15명의 자식을 낳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파우스티나가 다산한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성생활이 활발했으며 결혼 생활이 행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서술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가끔 그녀는 역사를 서술할 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물론, 성생활이 부부의 행복에 무척 중요하다. 그렇지만 성관계를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성관계의 빈도보다는 부부 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만족감을 느끼는 성관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1]

 

 

 

 

 

 

 

 

 

 

 

 

 

 

 

 

*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알베르토 안젤라 (까치, 2014년)

 

 

로마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랑’해서 결혼하고, 섹스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결혼을 가문과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사회적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마르쿠스 시대의 역사가들은 파우스티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를 근거로 현대의 역사가들과 《명상록》의 번역가들은 파우스티나가 결점이 많은 아내로 소개했다. 프랭크 맥린은 파우스티나의 부정적인 측면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 근거,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했던 것. 두 번째 근거는 고집 세고 잔소리가 심한 황후의 성격이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Xanthippe)와 닮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황후가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는 완전 정반대의 성격이다. 마르쿠스는 늘 차분한 성격에, 어떤 일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성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파우스티나 입장에서는 굼뜨고, 무미건조한 남편이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동시대의 황제에 대판 평을 다분히 주관적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가 어떠한 사료를 참고했는가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그 사료를 참고한 학자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편집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르쿠스 시대의 역사가들의 증언을 참고할 뿐 비중 있게 보지 않는다. 그녀는 고대의 사료를 무시하고, 파우스티나가 ‘현모는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양처였을 것’이라고 썼다. 그 근거로 《명상록》에 있는 아내를 위한 헌사인데, 솔직히 이것만 가지고 파우스티나를 ‘양처’라고 추측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파우스티나가 전장으로 향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홀로 기다렸으며 병사들의 기지에 방문할 정도로 남편 못지않게 존경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파우스티나를 ‘악처’로 보는 프랭크 맥린의 주장과 충돌한다.

 

파우스티나를 크산티페와 동일한 인물로 보는 맥린의 관점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가정을 소홀히 한 남편이다. 남들과 달리 평범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크산티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우스티나는 악처도 양처도 아니다. 그저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편을 만나 고생하면서 살다간 여인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합의 이혼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로마의 여성은 남편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정숙’하도록 살아야 했다. 본능을 숨기면서까지 품위를 유지하면서 지내는 일이 답답했을 터. 로마 남성들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성적 쾌락을 누릴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평생 남편의 울타리에 갇혀 지냈다. 그녀들이 조금이라도 바람을 피우면 가문과 남편을 욕보이는 부도덕한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람을 피운 파우스티나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그렇게 살아야 했던 원인을 단순히 그녀 개인의 결점으로만 보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많은 사료가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음침한 마음! 여자 같으며 완고한 마음, 사납고 어린애 같으며 짐승 같고 어리석으며 교활하고 상스러우며 부정적이고 폭군적인 마음. (《명상록》 제4장, 황문수 역)

 

 

정말 마르쿠스는 파우스티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는지 아니면 ‘황제’의 명예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지 않기 위해 부부가 30년 동안 끝까지 참고 지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만약 마르쿠스가 아내를 싫어했다면, 《명상록》 제4장에 나오는 저 문장이 아내를 향한 마르쿠스의 진심일 수도 있다. 파우스티나의 진짜 품성과 기질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늘 논란거리가 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2]

 

 

 

[1] 『1주일에 한 번 성관계 맺는 부부가 가장 행복』 뉴시스, 2015년 11월 19일

[2]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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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13:47   좋아요 1 | URL
결혼과 섹스가 인생의 의무가 되는 바람에 이 둘 다 못 하면 ‘등신‘ 취급 받습니다. 둘 다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사회의 편견이 가혹합니다.

2017-02-2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17:20   좋아요 1 | URL
속 시원하게 해주는 사이다 말씀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7-02-2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십자군이야기를 읽으니 보는 관점에 따라 상당부분 취사선택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싸이러스님의 비판적 읽기에 또 배우고 갑니다.^^;

cyrus 2017-02-21 17:25   좋아요 1 | URL
제가 어렸을 때 시오노 나나미를 역사가로 믿었고 <로마인 이야기>를 직접 사서 읽었습니다. 고딩 때 공부하느라 7권까지 사다 말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시오노 나나미를 비판하는 입장을 본 이후부터 저 역시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무조건 믿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비판적으로 보는 능력은 많이 부족하지만,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살펴볼려고 합니다. 머리가 아프지만, 이렇게라도 여러 번 시도를 해볼려고요. 귀찮다고 안 하면, 역사를 자신이 믿고 싶은 한 가지 관점만 보게 됩니다. 박사모처럼 말이죠. ^^;;
 

 

 

 

 

 

 

 

 

 

 

 

 

 

 

 

 

 

 

 

 

 

* 책표지 사진이 없는 책 : 《명상록 · 행복론》 아우렐리우스 · 세네카 (범우사, 1994년)

* 《명상록》아우렐리우스 (도서출판 숲, 2005년)

 

 

 

2013년 올재 클래식스 6번째 시리즈로 발간된 《명상록》은 황문수 씨가 번역했다. 이 번역자의 약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서점의 ‘작가 소개’에 따르면 황문수 씨는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70~80년대에 나온 철학 서적들, 특히 버트런드 러셀, 플라톤, 칼 야스퍼스, 윌 듀란트 등의 저서를 번역했다. 《명상록》도 마찬가지다. 사실 황문수 씨 번역의 《명상록》은 1974년 범우사에서 펴낸 책이다. 이때 나온 책의 부제는 ‘자성록(自省錄)’이다. 1987년에 세네카의 글과 함께 수록한 번역본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제목이 《명상록 · 행복론》이다. 《행복론》의 번역은 최현 씨가 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범우사판 《명상록》은 최현 씨가 번역한 것이다. 거의 절판된 거나 다름없는 황 씨 번역의 《명상록》을 사단법인 올재가 재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서양 고전 번역본들은 거의 일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황 씨 번역의 《명상록》도 일역본을 중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황 씨의 문장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은 편이다. 한자에 생소한 젊은 독자들은 《명상록》의 진미를 느끼는 데 어려울 수 있다. 천병희 교수의 《명상록》은 그리스어 원전을 옮긴 번역본인데, 여기도 문장 속에 생소한 한자어가 몇 개 있다. 그래도 번역자 입장에서는 우리말로 풀이하기 어려운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 최대한 원문과 비슷한 의미의 한자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프랭크 맥린 (다른세상, 2011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전성기에 등장한 5현제 중의 한 사람이다. 마르쿠스가 통치한 시기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지만, 역시 나라의 정세가 흔들리는 크고 작은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홍수와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해서 인명피해가 생겼고,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퍼지기도 했다. 외세의 침략에도 시달렸다. 중동에 위치한 파르티아 제국과 훈 족의 위협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 족의 위협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학구적인 성격이었다. 마르쿠스 통치 시절의 역사학자는 내성적인 황제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고 기록했다. 19년 동안의 통치 기간은 황제 입장에서는 힘겨운 시기였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고, 전쟁을 진두지휘해 모범을 보였다. 외세로부터 로마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그는 고전 문헌들로 가득한 서재가 아닌 전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의 양자로 들어왔다. 어린 마르쿠스를 유난히 아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에게 ‘진실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마르쿠스는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착했으면 로마 전역에 아내의 추문이 알려졌는데도 결코 아내를 꾸짖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 아내를 좋게 표현했다.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천병희 역, 《명상록》 제1장 30쪽)

 

마르쿠스는 상대방의 결점을 비판하는 성격의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아우렐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들어왔고, 같은 해에 공동 황제로 임명된 루키우스 베우스(Lucius Verus)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반성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대했다고 한다. 루키우스 베우스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르쿠스는 죽을 때까지 단독 황제의 자리를 유지했다.

 

 

 

 

 

 

 

 

 

 

 

 

 

 

 

 

 

*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미셸 푸코 (동녘, 2016년)

 

 

 

 

《명상록》을 보면 마르쿠스가 로마의 황제라는 의식과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찰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삶에 가장 해로운 것들, 즉 권위에 대한 탐욕, 집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에 ‘통치받지 않으려고’ 했다.[1] ‘황제’, ‘대통령’ 등 권위와 관련된 이름을 누구나 가지는 순간, 그 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 이럴 때 국민의 권리는 유린당하고, 국민과 유리된 권위가 통치하는 국가는 파멸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마르쿠스의 비판적 글쓰기는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2]이다.

 

마르쿠스는 젊었을 때에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로 ‘대화편’을 써야 한다고 했다. (《명상록》 제1장) 이 ‘대화’는 나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묻고 답하는 행동이다. 그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일이다.

 

지금 나 자신의 영혼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 경우에나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며, 지배적 원리라고 불리는 나의 이 부분을 나는 지금 어떤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를 음미해야 한다. 지금 나의 영혼은 어떤 영혼인가? (황문수 역, 《명상록》 제5장 71쪽)

 

자기 수양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성을 통해 자신의 감정 및 행동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된다. 푸코는 비판의 기능이 있는 자기 수양을 ‘배운 것을 버리는 것(de-disccere)’이라고 했다. 자기 수양은 상대방의 타당한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몸에 배야 할 기본 덕목이다.

 

내가 올바르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올바르게 행동하지도 못한다고 나에게 설득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즐거이 나의 태도를 바꾸겠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진리로 말미암아 해를 입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류와 무지에 안주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 (황문수 역, 《명상록》 제6장 85쪽)

 

배운 것을 버리는 것. 내가 스스로 발견한 결점이든 상대방이 알려준 내 결점이든 이를 과감히 떼어내는 삶의 태도는 한 인간이 평생 살면서 치러야 할 투쟁이다. 혼자 투쟁하려면 이를 실천하려는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마르쿠스와 푸코는 자기 수양을 위한 훈련법으로 ‘글쓰기’를 강조한다. 이들의 제안은 비판적 목소리를 ‘비난’으로 매도하고, 잘못에 대한 반성을 선행하지 않는 세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비판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결점을 들춰낼 줄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박 씨, 최 씨,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보호하려고 매 주말마다 영혼 없이 태극기를 휙휙 휘날리는 사람들. 이들은 사회에서 배운 낡고 편협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못 버릴 듯하다. 과거의 쓰레기들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무덤에 갈 때 남김없이 들고 가길 바란다. 이건 그들에 향한 악의에 찬 저주가 아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곡히 부탁하는 말이다.

 

 

 

 

[1]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 46쪽

[2]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불복종의 기술일 것입니다.” (같은 책,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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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08:0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납니다. 필사하기 참 좋은 책입니다. ^^

우마우마 2017-02-21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요. 고등학교 때 왠지 멋있어 보여서 명상록을 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뭘 알고 읽었나 싶어요. ㅎㅎ 남기신 댓글처럼 필사를 해볼까 싶어집니다.

cyrus 2017-02-21 12:35   좋아요 0 | URL
<명상록>이 처음 읽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곱씹을만한 글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가 노인이 돼서 <명상록>을 다시 읽으면 책을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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