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2일 《소설 마태우스》 구입

2016년 5월 초순 《닳지 않는 칫솔》 구입

 2017년 3월 1일 《대통령과 기생충》 구입

 

 

 

 

*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저주의 소설] (2016년 1월 14일 작성)

 

* [서민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2016년 1월 15일 작성, 《소설 마태우스》 리뷰)

 

* [닳지 않는 서민] (2016년 5월 12일 작성, 《닳지 않는 칫솔》 리뷰)

 

 

 

 

 

《대통령과 기생충》 리뷰는 오늘 오후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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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7-03-11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갑자기 왜이러십니까ㅠㅠ 제가 잘 하겠습니다 ㅠㅠ 부디 선처를...

cyrus 2017-03-11 14:55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의 소설은 다시 나올 수 없는 겁니까? 《대통령과 기생충》은 좋았습니다. 이 재미있는 책이 절판돼서 아쉽습니다..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창비시선 385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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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다. 문인수의 『중력』은 우리 삶의 안정감을 유지해주는 특별한 중력이다. 그 힘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세월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월은 살아있는 존재 위에 올라타게 되는데, 삶을 내리누를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기 귀찮아지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만성적인 게으름은 몸과 생각을 점점 처지게 한다.

 

 

  내리누르는 힘은 바쁘다. 내리누르는 힘, 식성은 연속,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든 이름 위에 있다. 말 탄 세월은 그러나, 그러니까 사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저 모든 이름을 내리누르는 중이다. 중력, 그것은 그 무엇보다 무거워 무게가 없는 것. 그래, 당신의 눈시울이며 볼이며 목덜미며 뱃가죽이, 말투며 기억력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더 처지는 것이다. 지금은 비애가, 그 쭈글쭈글한 성욕이 너풀거린 활엽의 황홀을 뒤덮고 있다. 먹어라, 저 세월. 어떤 나무를 시퍼렇게 뒤덮은 칡넝쿨 속으로, 그걸 또 붉게 뒤덮는 저녁노을 속으로 누가 또 한바탕 새떼를 쏟아붓는다. 그럴 때, 제때 어둠이 오고, 그 어둠 위에 별들의 뾰족뾰족한 부리가 또 총총총총 올라타는 것이다. 오, 여명이 녹여 먹는, 여위는 별들…‥

 

(『중력』 중에서, 18~19쪽)

 

 

삶의 중력을 거스르는 유일한 사람이 나그네이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여행자이다. 그들이 집을 떠나 맞닥뜨리는 놀라운 세계에 매혹되곤 하지만, 그들처럼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까 봐 내심 두려워한다. 낯선 곳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나’를 대면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데 대해 근원적 공포를 느낀 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가끔은 한 사람의 나그네처럼, 그런 외로운 여행을 즐겨도 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은 불안해 보이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을 준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는 일상에 탈출하는 존재의 여정을 노래한 시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도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훨씬 못미처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으로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72~73쪽)

 

 

시인은 홀로 떠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처음 떠나는 곳은 언제나 낯선 곳이고, 여행은 늘 혼자이며 고독한 것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기꺼이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여행이다. 시인은 조금씩 더 먼 곳으로 떠났으며, 더 외롭고 낯선 곳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아무 데나 가본 행선지가 설령 잘못 들어섰다 해도 나와 무관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시인의 인생과 여행, 그리고 시는 뒤엉킨 한 몸이고 한 뿌리다. 시인의 여행이란 그저 길에게 나를 맡기고, 바람과 구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 숲에서, 바다에서, 낯선 도시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거기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것들은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와 있다. 굳이 수첩에 적지 않아도 마음이 모든 것을 받아 적는다. 마음이 받아 적은 것들은 언젠가 시가 되고, 행복한 기억이 된다. 설령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여행은 여행만으로 충분하다. 오랜 옛날부터 김삿갓 같은 시인들이 방랑에 탐닉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숨겨진 모험심과 새롭게 은유하고 싶은 감정을 자극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여행’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감식안’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일상’이 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거나 조금 더 불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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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3-10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시집에까지 마수를 뻗치시는 독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cyrus 2017-03-11 09:39   좋아요 0 | URL
이 시집, 2015년에 읽은 건데 리뷰를 쓰지 못했습니다. 2년 전에 시집을 필사한 기록을 발견해서 머리를 쥐어짜면서 리뷰를 썼어요. 역시 시집 리뷰 쓰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

yureka01 2017-03-10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며칠전에 시낭송회때 문인수 선생님도 오셨는데..소개를 못시켰네요. 아마 이동네 원로시인이시거든요..저도 몇번 인사 드린적 있었습니다.언제 기회되면 꼭 한번 뵐 기회 생기실 겁니다^^..낭만이 참 풍부하신 .ㅎㅎㅎㅎ노래 몇 번 들었거든요~~~

cyrus 2017-03-11 09:41   좋아요 1 | URL
문인수 선생님 얼굴을 봤습니다. 그 분을 실물로 직접 본 게 그 날이 처음이었어요. 만나게 될 날을 기약하면서 문 선생님 시집이 나오면 사야겠어요. ^^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대재앙을 일으킬 가능성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천문학자들의 대답은 지금까지는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상과학영화 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
* 칼 세이건 《혜성》 (사이언스북스, 2016)
* 다치바나 다카시 《21세기 지의 도전》 (청어람미디어, 2003)
* 게릿 L. 슈버 《대충돌》 (영림카디널, 2004)
* 콜린 윌슨 《세계의 불가사의 1》 (간디서원, 2004)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Tunguska) 지역의 원시림 위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정체불명의 폭발로 인해 약 2,000㎢의 숲이 완전히 타버렸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1,000개가 폭발하는 것과 맞먹는 충격이었다. 미제로 남은 ‘퉁구스카 폭발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소행성과 혜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관심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임에도 우리나라에 퉁구스카 사건의 경위를 소개한 책이 많지 않다. 내가 알아본 바로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의 4장, 다치바나 다카시(たちばなたかし)의 《21세기 지의 도전》, 게릿 L. 슈버의 《대충돌》 그리고 콜린 윌슨(Colin Wilson)의 《세계의 불가사의 1》이 전부다. 《혜성》에는 퉁구스카 사건을 조금만 언급했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는 퉁구스카 사건의 원인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검증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퉁구스카 대폭발의 이유를 ‘운석 충돌’이라 설명했다. 즉, 수십 미터 크기의 운석이 지구로 떨어지면서 일으킨 폭풍 때문에 그 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폭발 지점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기지 않았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석이 땅에 떨어졌다면, 미국의 애리조나 운석구덩이(Meteor Crater)와 같은 거대한 접시 모양의 흔적이 남아야 했다.

 

칼 세이건은 ‘혜성의 조각’이 지구와 충돌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퉁구스카의 대폭발은 정확히 1908년 6월 30일에 일어났다. 매년 이 날을 기점으로 유성우가 떨어진다. 이때 지구는 앵케 혜성(Encke’s Comet)의 궤도에 지나게 된다. 혜성과 유성우가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간 혜성의 조각이 퉁구스카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행성은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 · 통과하면 속도가 감속되고, 대기권의 공기층에 의한 마찰열로 인해 분해된다. 불에 타오르면서 지구에 떨어지는 자잘한 부스러기가 운석이다. 그러나 대기권을 통과하는 혜성의 조각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땅에 충돌할 때 지진과 유사한 엄청난 충격이 일어나고, 삼림을 한 번에 다 태워버린다. 혜성의 조각은 얼음 덩어리로 이루어졌다.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하는 과정에서 얼음 덩어리가 녹아버렸기 때문에 엄청난 충돌에도 땅에 구덩이가 생기지 않는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퉁구스카 폭발 현장을 조사하면서 미세한 다이아몬드 알갱이를 발견했다고 한. 이 다이아몬드 알갱이는 혜성과 운석 물질을 이루는 구성 성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가설은 ‘UFO 충돌설’이다.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운석 및 혜성의 조각 충돌설’에 완전히 밀린 가설이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도 코웃음 치는 가설이다. 상상력에만 너무 의존하는 사람들이 ‘UFO 충돌설’을 선호한다. 우리보다 월등히 수준 높은 외계 지적 생명체가 탑승한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를 지나갔다. 그런데 우주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퉁구스카에 추락했다. 과학소설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다. 일단 우주선의 일부로 보이는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콜린 윌슨은 ‘혜성의 조각 충돌설’에 동의하면서도 공중에 폭발한 물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별에 날아온 우주선일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역시 오컬트에 심취한 작가다운 주장이다.

 

 

 

 

 

며칠 전에 퉁구스카 사건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중에 흥미로운 보도 기사 한 건을 발견했다. 그 보도 기사에는 러시아 과학자들이 퉁구스카 폭발 현장에서 UFO 잔해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게 정말 사실이면 가장 신빙성이 높은 ‘운석 및 혜성의 조각 충돌설’은 폐기된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발견한 잔해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란다. UFO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만 듣고도 흥분하겠지만, 회의주의자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외계 우주선 잔해 말고도 ‘50kg에 달하는 암석’을 발견했다고 하던데, 아마도 국내 기자가 ‘운석’을 ‘암석’으로 잘못 적은 것 같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기자가 ‘운석’을 몰라서 ‘암석’으로 고쳐 썼을 수도 있다. 아무튼 ‘50kg의 돌덩어리’라면 그리 적지 않은 무게이다. 이 정도 무게이면 맨눈으로 확인 가능한 크기이다. 그런데 1926년부터 총 여섯 차례에 걸쳐 현지 조사를 진행했던 레오니드 쿨리크(Leonid Kulik)는 폭발 현장에 운석 부스러기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1958년 이후에 재개된 현지 조사에서도 운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주선의 잔해와 ‘50kg에 달하는 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2004년 이 보도 이후로 우주선의 잔해와 ‘50kg에 달하는 암석’의 실체를 규명한 새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오보’일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과학자들의 발견을 처음 보도한 언론이 인테르팍스 통신(Interfax, Интерфакс)이다. 이 언론사는 러시아 최대의 민영통신사인데, 오보율이 높다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혜성의 조각 충돌설’을 반박한다. 얼음 덩어리로 된 혜성 조각이 폭발 지점으로 추정되는 상공의 7,000Km 지점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녹아 분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듣고 보니, 그럴싸한데? 녹아버려 거의 분해되기 일보 직전인 혜성 조각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될 수 없게 되고, 충격의 힘도 약해진다.

 

칼 세이건은 구소련 시절에 활동한 러시아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외국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퉁구스카에 거주하는 몽골계 소수 민족 에벤키족(Evenki, 과거에는 ‘퉁구스족’이라고 불렀다)의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 폭발 사건 당시의 증언까지도 채록했다. 발품 들여 조사해서 검증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분석에 당연히 신뢰할 수밖에 없다.

 

1908년 퉁구스카에 살았던 에벤키족이 대폭발을 가까이에서 본 목격자이다. 그리고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으나 대폭발의 충격으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에벤키족은 폭발이 일어난 퉁구스카 현장을 자신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여긴다. 그래서 러시아 당국은 현지 조사 진행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그들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로 퉁구스카 폭발로 사망한 에벤키족의 희생자 수를 집계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외국에서는 퉁구스카 사건이 지구 멸망을 초래할 뻔했지만, 희생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역사상 최악의 행운’(《대충돌》 174쪽)으로 소개한다.

 

 

 

 

 

칼 세이건은 에벤키족을 ‘미개한 퉁구스족’(《코스모스》 165쪽)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로 그 자리에 사망한 에벤키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미개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그의 표현에 어폐가 있다. 에벤키족은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지도를 나뭇잎으로 직접 만들 정도로 뛰어난 지리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지성(知性)들이 왜 백 년이나 지난 폭발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생뚱맞은 주제를 들고 나와 뭐 이리 길게 쓰고 있을까. 당연히 알아두면 좋은 내용이라서 썼다.

 

《21세기 지의 도전》의 독자 서평 중에는 이 책에 퉁구스카 폭발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독자는 퉁구스카 사건을 한낱 사라져버리는 ‘나무 한 그루’ 정도로 봤다. 그렇지만 남들과 다른 안목을 지닌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사건을 지구 생존 여부에 직결된 ‘나무 전체’ 수준으로 봤다. 퉁구스카 사건은 과학 교과서에 실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이다. 학생들은 이 사건을 접하면서 혜성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과정과 이유를 알게 되면, 말도 안 되는 ‘종말론’에 빠질 우려가 없다. 퉁구스카 사건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검증, 또 검증하는’ 회의주의 방법론을 체득하게 된다.

 

칼 세이건의 4장 끝부분에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라고 썼다. 다치바나 다카시도 퉁구스카에 다녀온 이후로 ‘푸른 별이 처해 있는 환경적 위험성’을 걱정했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하고, 여기에 투자 가능한 돈만 들인다면 거대한 혜성의 지구충돌도 예방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과학 산업이 튼튼한 강대국들이 그렇게 나서서 해주면 고마울 텐데, 정작 그들은 국가 예산을 엉뚱한 데 쓰고 있다. 힘 있는 국가들이 군사 강국이 되기 위해 지금도 생명 살상 무기와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핵무기가 터질 확률이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확률보다 높아 보인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 절반이 정신 차려서 ‘반핵 운동가’로 변신하면 좋겠는데, 이 확률도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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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09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당장이라도 딮 임펙트 같은 현실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없죠...우주에 수많은 별과 행성들의 명멸은 흔한 일상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7-03-10 10:49   좋아요 0 | URL
네, 지금도 저 먼 우주에 소행성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을 겁니다. 지구 밖의 세계에 시야를 넓힌다면, 별의 일생이 우리 일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별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반짝거리지 않습니다.

레삭매냐 2017-03-1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일전에 저희 회사 이사님하고 테슬라와 관련되어
이야기했던 에피소드네요...

음모론에 심취하신 저희 이사님은 테슬라의 비밀시험
이었다는 주장을 하시더라구요 ㅋㅋ

cyrus 2017-03-11 09:45   좋아요 0 | URL
폭발 사건에 대한 원인 가설이 수백 개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 중에 대다수는 안 봐도 되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회사 이사님이 믿고 있던 테슬러의 비밀시험 설도 그 중 하나겠어요. ^^;;
 
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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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여기서는 좋은 ‘리뷰(혹은 서평, 독후감)’로 표현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리뷰란 일상 경험을 책 속 이야기와 버무려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리뷰는 책을 좀 더 쉽고 편안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글에서 살며시 배어 나오는 진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다. 글을 자주 써본 사람이라면 이런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한다. 그런데 막상 써보면 어렵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글쓰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글쓰기 교육은 논술이 중심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은 폭넓은 배경지식, 논리적 구성력 등을 습득한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강조한 대로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의 지적 재료들을 가지고 좋은 글로 아웃풋(Out put, 출력)을 내면 모를까 우리나라 논술문 쓰기는 지식 입력과 출력 과정 양쪽이 완만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구조이다. 학생들은 단기간 내에 전혀 모르는 분야의 지식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논술 고사 당일 날에 머릿속에 담은 재료들을 하얀 시험지 위에 일목요연하게 쏟아낸다. 결국, 그 날 하루를 위해 학생들은 제대로 뜻도 모르는 현학적 용어를 써가며 자신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 가르쳐준 내용을 형식적 논리만을 시험지 위에 옮겨 적는다. 글 쓰는 일 자체가 ‘시험문제’로 직결되는 교육 환경은 자칫 글쓰기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고, 막연한 두려움만을 안겨준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사소한 경험에서부터 자기만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 표현해보는 ‘생활 속 글쓰기’에 적응되면, 자연스럽게 논리적 글쓰기로 이어진다. 필자는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신문 칼럼을 많이 봤고, 사람들과 어울려 부대끼며 지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생활 속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몇 차례 시도를 해봤으나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미미했고, 억지로 과거 경험을 떠올려 조금 과장해서 쓴다는 게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필자의 리뷰가 재미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탓이다. 필자는 이 상황을 팔자라고 생각하면서 알라딘이 망할 때까지 꾸준히 리뷰를 쓸 생각이다.

 

 

 

생활 속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며 자기 자신을 ‘글의 중심’에 세워보는 경험, 즉 ‘독서를 통한 앎과 삶이 조화를 이룬 글쓰기’를 실천한 사람이 박균호이다. (물론, 아주 능숙하게 ‘생활 속 글쓰기’를 실천하는 작가와 독자 들이 많다. 가장 유명한 작가가 ‘마태우스’ 서민이다) 최근에 그가 새로 선보인 《독서만담》의 부제를 한 번 보시라.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다. 그의 글은 리뷰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건 나쁜 의미의 말이 아니다. 저자만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 글에서만 갖춰진 특색이다. 리뷰와 에세이라고 하면 책 또는 삶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교훈을 담아 쓰는 글이라는 공통된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리뷰와 에세이에 거창한 담론을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독서만담》에 가득 담은 글을 읽어보면 리뷰와 에세이의 고정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책의 1장은 애서가들이 무릎을 탁 칠만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글 제목은 ‘절판본과 탐욕의 끝’, 두 번째 글 제목은 ‘책 수집의 괴로움’이다. 애서가들은 이 글 제목들을 보자마자 벌써 어떤 내용이 나올지 짐작하리라. 1장 제목이 ‘하나도 쓸모없는 책 이야기’이지만, 이는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반어법이다. 애서가들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가 지금까지 어떤 희귀한 절판본을 구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된다. 헌책과 절판본을 소유하게 된 작가의 무용담을 듣노라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즐겁다. 그리고 귀한 책을 쉽게 양도하지 않으려는 주인들의 태도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책에 미친 이 남자도 계속 사도 끝없는 책 욕심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 알고 있다. 저자는 새 책을 사기보다는 오래된 친구와 같은 헌책을 재회하기로 결심한다.

 

2, 3장은 《독서만담》의 부제에 딱 어울리는 글들이 포진되어 있다. 솔직히 필자는 미혼이라서 부부나 가족 이야기에 관심 없다. 여전히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혼자 지낸 일상에 익숙한 탓이다. 그래도 SNS에 길들어져 버리는 바람에 남의 사소한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이 못된 심리가 남아 있어서 계속 끝까지 보게 된다. 다행히 이 책을 끝까지 보길 잘했다. 역시 작가의 글은 경험담으로 시작해서, 책 소개로 자연스럽게 마무리 짓는다. 야구를 좋아하는 독자가 ‘야구를 아무리 싫어해도’라는 글을 읽으면 ‘맞다, 맞아!’라고 연신 속으로 외치게 될 것이다. 이 글에 나오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와 딸이 ‘리모컨 컨트롤을 손에 꽉 쥔 주인’이 되어 거실 한가운데서 버틴다. 이 두 사람의 힘에 밀려 야구 TV 중계를 시청하지 못해 인터넷 중계로 시청하는 저자의 상황이 딱해 보인다. 필자는 서른이나 먹고 다 컸음에도 ‘거실의 여왕’으로서 오랜 세월 군림하는 어머니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다. 고집은 자신의 입지를 더욱 위축하게 하는 필패의 지름길이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한발 물러나서 양보하는 것이 좋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으로 야구를 볼 수 있는 세상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저자는 아내와 딸처럼 야구를 잘 모르는 여성들을 야구 팬으로 만들 수 있는 책 세 권을 선보인다.

 

 

 

 

잠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작가는 아내와 딸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서 ‘야구는 남자들의 운동, 여자들의 것이 아니다(107쪽)’라고 썼다. 개인의 경험을 근거로 야구는 ‘남자들의 운동’으로 규정하는 말은 요즘 야구에 향한 여성들의 관심 수준을 생각하면 ‘일반화의 오류’에 가깝다. 작년 잠실야구장에 울려 퍼지는 여성 관중의 함성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그만큼 야구를 직관(직접 경기장에 가서 관람)하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야구장에 분 ‘여풍(女風)’이 없었으면 작년 ‘한 시즌 관중 800만’이라는 기록이 오지 않았다. 지금의 야구는 남자, 여자 모두의 것이다. ‘야구는 남자들의 운동, 여자들의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필자의 눈에 걸린다.

 

아, 리뷰를 쓰다 보니 오늘도 재미없는 내용이 되어버렸군. 내 리뷰야말로 ‘하나도 쓸모없는 책 이야기’이다. 그래서 읽어보면 무겁고 딱딱하지 않는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능력이 부럽다. 생활 속에서 길어낸 작고 소소한 작가의 책 이야기는 솔직담백해서 좋다. 글쓰기 공포증이 있거나 편안하게 자기만의 글을 써보고 싶은 분에게 박균호의 《독서만담》으로 시작해보길 권한다.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가벼운 동기 부여는 글쓰기의 열쇠가 된다. 그리고 작가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글감으로 어떻게 만드는지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사실 《독서만담》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1권 3득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두 개의 이득은 앞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개의 이득은? 그것 또한 글 초반부에 이미 언급했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모르면 어쩔 수 없다. 독자들이 내 글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탓이다. 아무튼 《독서만담》이 내 리뷰보다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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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7-03-08 2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잡문이 이토록 긴 논의을 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글을 쓸 때 교훈이나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을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 제 글의 단점이기도 하고 ‘일부 독자‘에게는 장점이 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야구를 극협하는 두 여자와 살다보니 요즘 야구장의 여성팬들을 등한시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나 봅니다. 뼈와 살이 되는 좋은 리뷰 정말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요.

cyrus 2017-03-09 08:25   좋아요 1 | URL
책 잘 읽었습니다. 글에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논의할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을 겁니다. 박균호님의 글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

yureka01 2017-03-08 2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웃분에게 책 선물 받았습니다..이책이었어요.저도 다 읽으면 리뷰 올려볼께용~~~ㅋ

박균호 2017-03-09 00:22   좋아요 0 | URL
앗...그 고마운 분은 누구신지...ㅎㅎ 소중한 리뷰 미리 고맙다는 말씀 드려요.

cyrus 2017-03-09 08:25   좋아요 1 | URL
‘이웃분‘이 누군지 압니다. 유레카님도 자식을 둔 아버지라서 박균호님의 글에 많이 공감하실 겁니다. ^^

곰토낑 2017-03-09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가 재미 없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굉장히 논리정연해서 정독하고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봐야할 책이네요. 야구가 남자의 것이라는 저 문장이 나오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요.

cyrus 2017-03-09 08:29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제 글이 너무 딱딱해보여서 나름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평소대로 글 쓰는 게 편했어요. 저보다 글 잘 쓰는 분들 따라하니까 힘들었어요.

제 글을 잘 읽어보면 허점이 보입니다. 저보다 똑똑한 분을 만나면 털립니다.. ㅎㅎㅎ

제 글도 비판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판을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

stella.K 2017-03-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 망하면 그동안 좋은 인맥을 쌓아왔던 우리 알라디너들은
흩어져야 하잖아.
글 못 써도 좋으니까 당췌 그런 생각일랑 말고 열심히 쓰기나 하셔.ㅋㅋ

이 책 리뷰에 좋아요가 유독 많더라구. 그러니까 난 같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은 쓰기가 부담되더라. 그래도 올리긴 올려야겠지?ㅠ

cyrus 2017-03-09 15:33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사라져서 흩어져도 다른 인터넷 서점에서 만나겠죠. ^^

‘좋아요‘ 수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거 생각하면 글 못 써요.. ㅎㅎㅎ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 같은 그림을 보면 경건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밀레는 밭에서 하루 일을 끝낸 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멀리 보이는 교회에서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실제의 종소리야 바로 그쳤겠지만 ‘그림’에 담은 종소리는 1세기가 넘도록 울려 퍼지고 있다.

 

 

 

 

 

 

 

 

 

 

 

 

 

 

 

* 드림프로젝트 《세계 명화의 수수께끼》 (비채, 2006)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형언할 수 없는(Unnamable)’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만종』이 노동의 경건함과 일상의 평화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간직한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밀레는 『만종』을 부부가 아사한 어린 자식을 땅에 묻는 장면을 그리려고 했다. 달리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되면 기도하는 부부는 실은 죽은 아기의 명복을 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밀레는 이 장면이 너무 암울하다고 판단하여 죽은 아기가 있는 관을 감자 바구니로 덧칠하여 그렸다.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달리는 『만종』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그림들을 제작했다.

 

 

 

 

 

『만종』을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은 달리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외선 투시 작업을 진행했다. 감자 바구니가 있는 자리에 조그만 나무상자가 그려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이 전 세계로 전해지자 사람들은 달리의 투시력(?)을 재평가했다. 달리의 해석을 신뢰한 사람들은 『만종』이 원래 죽은 아기를 위해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믿게 됐고, 『만종』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필수적인 정설이 되었다.

 

여전히 논란이 있는 달리의 『만종』 해석이 예술 상식으로 소개되는 상황이 난감하다. 예술에 생소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흥미로워 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예술 이야기를 접하면 어렵다고 생각한 예술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밀레의 그림을 연구한 학자들은 달리의 해석이 억측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사실 의문의 나무상자가 달리의 말대로 관인지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만종』의 관 이야기는 그림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던 달리의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심리’는 가짜 지식을 유통하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준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때문에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만종』에 진짜로 죽은 아기의 관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다.

 

 

 

 

 

 

 

 

 

 

 

 

 

 

 

* 살바도르 달리 《달리, 나는 천재다!》 (다빈치, 2004)

*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이마고, 2002)

* 살바도르 달리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이마고, 2012)

 

 

달리는 일생에 걸쳐 확증편향에 가까운 기행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과시욕을 보여줬다. 그는 마치 돈키호테(Don Quixote)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둘러싼 세상과 주변 사람들까지 변형해서 봤다. 그런 자신의 시선을 반영한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생뚱맞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달리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달리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달리가 직접 쓴 글은 달리의 과대망상 세계관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헌이다. 《달리, 나는 천재다!》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일기 형식에 가깝다. 달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천재가 쓴 유일한 일기’라고 밝혔다.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는 달리가 37살에 집필한 자서전이다. 달리는 스스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오만방자한 발언들을 했다. 괴팍한 성격답게 달리의 문장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 어떤 내용은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연상되며 이게 과연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게다가 앞에 언급했던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위배하기까지 한다.

 

 

일곱 살부터 여덟 살까지 나는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 나중에 가서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의 기억은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서, 너무나 부조리한 몇몇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한 다음에라야만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의 어떤 추억거리가 러시아에서 벌어졌다고 할 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추억을 가짜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번도 그 나라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달리의 머릿속 또는 환각과 몽상으로 이루어진 달리의 그림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기본 열쇠이다. 달리의 그림은 상상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얼핏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달리는 자신의 그림들이 '객관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제작한 것처럼 설명했다.

 

 

 

 

 

 

 

 

 

 

 

 

 

 

 

 

 

 

 

 

 

 

 

 

 

 

 

 

* 로버트 래드퍼드 《달리》 (한길아트, 2001)

* 자비에르 질 네레 《살바도르 달리》 (마로니에북스, 2005)

* 장 루이 가유맹 《달리 :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시공사, 2006)

* 돈 애즈 《살바도르 달리》 (시공아트, 2014)

* 캐서린 잉그램, 앤드류 레이 《This is Dali》 (어젠다, 2014)

 

 

달리는 자신이 지향하는 초현실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편집증적 비평 방법은 현실 세계의 대상(사람, 사물)을 환각 또는 상상력을 동원해 또 다른 대상으로 변형하여 해석한다.

 

 

 

 

 

 

 

 

 

달리는 ‘편집증적 비평 방법’으로 『만종』을 새롭게 봤고, 재해석했다. 그는 그 그림 속에 무의식적 욕망이 반영된 서사가 있길 원했고, 그가 확인한 것이 바로 ‘죽은 아기의 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는 농부를 어머니에게 정욕을 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지배한 아들로, 농부의 모자를 발기의 상징으로 봤다. 건초 마차는 성관계를 암시하는 대상으로 해석했다. 어린 시절 달리는 죽은 형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못마땅했고, 그런 어머니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무의식 속에 품은 공포와 절망감을 『만종』에 투영해서 바라본 것이다. 그가 천재 특유의 투시력이 있어서 그림에 가려진 나무상자를 알아챈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실 ‘편집증적 비평 방법’은 달리가 아포페니아(Apophenia)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거창하게 보여주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현상들에서 연관성을 찾는 착시의 심리 상태이다. 이 두 가지 착시에 빠지면, 보름달을 보다가 떡방아 찧는 토끼 한 쌍을 발견하기도 하고, 화성 표면을 찍은 사진에서 외계 생명체로 추정하는 얼굴 형태를 찾는다. 『만종』의 감자 바구니를 죽은 아기의 관으로 본 달리의 시선 역시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 현상과 관련 있다. 회의주의자 입장에서는 객관성과 거리가 먼 달리의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달리의 예술을 옹호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질서, 특히 사람 얼굴과 닮은 형상을 보려고 한다. 달리를 포함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런 인식의 한계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이용했다. 며칠 전에 쓴 글에서도 밝혔다. 인간은 상상할 자유가 있다.

 

 

 

 

[추신] 글의 제목은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에 착안해 정해졌다.

 

[1] 살바도르 달리 《달리, 나는 천재다!》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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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0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착각이 심하면 두가지 경향의 극단으로 치닫죠.
미쳤거나, 천재거나..^^..
다행히 예술로 미친거라서 작품의 망상적 해석이
예술로 발현된듯 하네요..

cyrus 2017-03-08 18:50   좋아요 0 | URL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수준 미달 정도가 아니면 예술에서 망상 허용은 인정합니다. ^^

갱지 2017-03-08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죠. 소통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이와 단절시키고 스스로만 공고해져가는 이가 있을 뿐. 달리는 후자의 끝 쪽이었던 듯해요, 재밌는 글 잘 읽고갑니다-.

cyrus 2017-03-08 18: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달리의 삶을 살펴보면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하고, 고집스럽고, 자신의 아내에만 의지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가 아내를 만나지 못하면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