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아이들은 지금까지 토토로는 알고 있어도 우토로는 몰랐을 거다. 얼마 전에 방영한 방송 프로그램 <무한도전> 덕분에 우토로가 다시 한 번 알려지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우토로를 치면 관련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1998년에 우토로 사람들(이사히신문사)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토로 마을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이 저자로 참여한 우토로(민중의소리), 2010년에 어린이 독자를 위한 우토로의 희망 노래(푸른책들)까지도 나왔다. 이미 공중파 방송의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적도 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학교에서 우토로 마을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낯설다. 우토로 마을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의 반응이. ‘무한도전우토로 편은 아주 오랫동안 꺼져 있었던 관심의 불씨를 다시 살렸지만, 과연 이 불씨가 얼마나 오래갈지 걱정이 든다.

 

오랫동안 한반도의 불행을 고스란히 고여 있는 채 흘려야 했던 재일조선인의 눈물을 생각한다면 우토로 마을 이야기에 반성의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선 안 된다. 일제 지배, 미 군정, 전쟁과 분단, 남북대치, 그 역사의 가파른 기복은 재일조선인들에게 고통이요, 질곡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팔려가고 끌려간 세대들이 해방의 기쁨도 잠시,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일제가 징병으로 강제로 끌고 간 사람들까지 법적 지위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귀향하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의 부초 같은 삶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세금은 일본인과 똑같이 내면서 외국인으로 취급되며 취직 진학 영업 대출 등에서 시린 차별대우를 견뎌야 했다. 거기에 또 조국의 분단과 대치가 그들의 국적을 갈라놓고 동포사회를 양분했다. 냉전이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는 민단(재일한국거류민단)과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대립이 분단 조국에서보다 더 첨예하게 맞섰다.

 

한일 과거사를 논할 때 재일조선인 문제를 제외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식민지배의 유산만이 아니라 그 유산을 지속해왔던 한국 사회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재일동포의 삶에 무관심하다. 재일동포대신에 지금 쓰고 있는 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 생소하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요즘에는 조선한국’, ‘대한민국보다 열등하게 보는 의미로 사용된다. 과거 일제 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인 것도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선진국과 거리가 먼 사회구조로 변하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열등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서경식 선생은 글이나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재일동포대신에 재일조선인이라고 사용한다. 그 이유가 선생은 조선이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호칭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에 의해 난민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식민지 나라였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됐다는 이유로, 그리고 조국이 분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은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때로는 일본인처럼 때로는 한국인처럼 분장해야 숨을 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에게 국가가 난민으로 만든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무한도전> 우토로 편이 방영되자, 일본 우익들은 막말을 퍼부었다. 오히려 우토로 마을 사람들을 불법체류자라고 말하면서 조롱을 퍼부었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우토로 마을 사람들은 반난민이다. 서경식 선생은 자신의 책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반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간 난민들처럼 먹을 것이 없고 살 곳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추방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모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의 비극은 국가라는 방호막이 없고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는 나라와 모국, 양쪽으로부터 다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다.

 

우토로 마을이 2017년에 재개발돼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재일조선인의 역사마저 사라지고 만다. 이럴 때 우토로 마을의 비극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진다. 일본이 잘못된 식민지 지배를 했고 잘못된 침략전쟁을 했다는 역사를 인정했다면, 재일조선인이 차별받고 정체성 때문에 아픔 겪고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20세기가 남겨놓은 식민지 시대와 세계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려면 조선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무한도전>이 준 감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은 재일조선인의 울음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익 시위대의 폭력 속에서도 민족 차별의 고통에 울부짖는 존재의 슬픔을. 그러니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점점 더 잊히고 있는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삶과 그걸 그저 눈물만 훔치며 브라운관을 보고만 있는 우리의 태도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행복하자 2015-09-1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했어요. 이렇게 입에 회자되게 해 주는것은 좋은데 본질을 외면한채 감동과 죄책감으로만 끝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예능에서 시작했더라도 진지한 논의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텐데요~ 이런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버린 일들이 너무 많아요.

cyrus 2015-09-11 18:32   좋아요 0 | URL
다음 주 하시마 섬 편은 어떻게 방영될지 기다려집니다만, 역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데만 그칠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5-09-1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픔을 예능으로 꺼집어 내었다는 의미는 크지만,
이걸 자칫 결론없이 단순 감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들었어요..

cyrus 2015-09-11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실 이런 감동도 예전처럼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역사를 제대로 못 배웠다거나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상처에 눈물 흘리는 방송인의 모습을 ‘방송용’이라고 무시할 정도니까요.

해피북 2015-09-1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무도`보면서 마음 아프기만 했지 이렇게 깊이 생각해보지 못해 부끄럽네요. 특히 `반성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역사의 흔적도 희미해진다`는 말이 정말 크게 다가왔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 잊지 말아야겠어요^^ 정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

cyrus 2015-09-12 22:03   좋아요 0 | URL
재일조선인 문제를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차원으로 접근하면 좋은데, 결국 시청자들만 과거 역사에 슬프고 분노하는 데만 그치는 게 너무 아쉽기만 합니다. 해피북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yamoo 2015-09-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방송을 꼭 봐야 겠슴다! 좋은 글 감솨함돠!^^

cyrus 2015-09-12 22:05   좋아요 0 | URL
본방을 놓치면 토요일 정오 12시에 하는 재방송을 보면 됩니다. ^^
 
몸 숭배와 광기 - 개정판
발트라우트 포슈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신디 셔먼 『Unitled Film Stills #39』 (1979년)

 

 

 

신디 셔먼은 속옷만 입은 채 욕실에 서 있다. 그녀가 서 있는 사진을 1분 동안 가만히 주시하면 프레임을 가득 채운 그녀의 불안감이 당신에게도 전이된다. 잘 들어보면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내뱉는 그녀의 속삭임도 들린다. “난 정말 예쁘지가 않아. 그 사람이 내 몸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성들은 거울을 자주 본다. 외모가 뛰어나고 안 뛰어나고를 떠나서 여성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10차례 이상은 거울을 들여다볼 것이다. 자신에게 변화를 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거울을 보며 못마땅한 부위를 살피고 이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하거나 최후의 방법으로는 성형수술을 선택하기도 한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자신감의 표현이며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외모 가꾸기’는 몸과 마음을 파괴할 정도로 병적이다.

 

외모지상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다. 작은 치수의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정상 체중인데도 몸무게를 줄이려다 부작용을 겪는다. 이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운동이나 가벼운 다이어트 요법 등을 통해 몸매를 가꾸다가, 점점 막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성형수술을 하고, 결국은 다이어트 강박증 및 성형 중독 현상에 이른다. 뛰어난 외모는 한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되고 그 누구도 현대사회에서 미용과 패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남성까지 외모 가꾸기에 한창이다. 이제 예뻐지려는 욕구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떤 아름다움이 가치를 갖는지 혼란스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외모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뻔하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것.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행동과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겸비하고 마음을 닦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이런 충고는 외모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의 짜증을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거울 속에 사는 악마가 아름답게 살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악마는 우리에게 저주를 내린다. 악마의 장난 때문에 우리는 외모 자체의 이상이나 장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왜곡된 신체상을 추구한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타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연민과 자기애 때문에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지 못하므로 우리는 거울 앞에서 외모에만 치중하라고 자기를 설득하는 중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의 지배에 구속당한 사람들.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는 비단 거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미디어(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 속에서도 ‘아름다움’으로 둔갑한 악마가 득실거리며 산다. 미디어의 악마는 우리의 생각을 획일화한다. 미디어는 외모에 대해서 적지 않은 정형화된 이미지(Stereotype)을 갖게 한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대부분 예쁘고 날씬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나온다. 반대로 뚱뚱한 사람은 미련하다거나 이성 친구가 없다거나 하는 등 미디어의 일반적인 묘사를 통해 우리는 외모에 대해서 크나큰 편견을 갖게 된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모방심리가 강해서 멋있게 나오는 연예인을 보고 동일시하려는 특성도 강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고 외모가 잘생긴 사람을 무조건 우상화한다든지,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하는 선입견이 형성된다.

 

여성들은 나이, 계급과 상관없이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몸을 계발할 것을 주문받는다. 지위와 부는 여전히 사람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지만 ‘아름다움’ 또한 지위나 부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독립적인 특성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호감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혹독한 단련 행위를 거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 결국, 여성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회 속에는 ‘자신을 위한 만족’보다는 ‘남성의 취향’을 먼저 생각하는 의식구조가 숨어 있다. 여기에 맞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못생겨도 당당해지자!’고 외쳤다. 외모를 꾸미지 않음으로써 외모를 평가하는 세상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아름다운 여성’과 ‘지적인 여성’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면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여성들도 거울 앞에 서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고민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美)’에 미쳐버린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몸 숭배와 광기》가 1999년에 출간된 이후로 ‘외모지상주의’ 광풍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미디어와 미용 산업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의 신화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미달한 사람들을 탈락시킨다. 아름다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망상은 개인을, 나아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 《몸 숭배와 광기》의 저자 발트라우트 포슈는 우리가 자신을 외부로부터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내부로부터 느끼는 방법을 터득할 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이 원론적인 해법만이 외모 강박증을 부추기는 우리 주변의 악마를 무찌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거울 속 못난 얼굴을 보니 문득 故 이주일 선생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여기 페미니즘 - 함께 공부하는 여성권 강의 사회운동 작은책 2
이유미 지음 / 사회운동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페미니즘은 억압과 불평등의 구조적 모순을 해체하는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왜곡된 가치 질서를 붕괴시키고 평등한 세상으로 바꾸려는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이로 인해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TV나 영화 등 미디어가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해 왔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묘사되는 페미니스트들은 주로 못생기고, 과격하고, 남성을 혐오하는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팝 칼럼니스트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보다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칼럼을 기고하여 페미니즘을 ‘무뇌아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웠다. 그는 칼럼 논란 사건을 통해 스스로 페미니즘에 대해 얼마나 비뚤어진 시각을 가졌는지를 보여줬다. 여권이 많이 신장한 요즘 남자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고깝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일부 편향된 페미니즘이 여성에게 우월적 지위를 주거나 최소한 남성에게 상대적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남성혐오’와 동등한 단어로 오해받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확대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 역시 뿌리 깊게 남아 있기도 하다. 법적으로 명문화된 공식문서들은 성별에 의한 차별 없이 그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교육이 공식적, 명시적 차원에서 남녀에게 동일한 교육목적과 가치를 고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고착된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이라는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영역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이며, 소비의 주체이고, 가사노동 전담자라면, 남성은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는 공인으로서 다양한 경제활동영역에 참여하는 생산자로 등장한다. 여성 또는 남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여전히 사리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 페미니즘》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진 않다. 어디선가 한번 들었음 직한 그런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도 식상하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살면서 페미니즘의 렌즈로 남녀 문제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의 렌즈를 착용하는 것이 낯선 이유가 바로 단순히 ‘페미니즘의 과잉’ 탓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과소’가 원인이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하였다고는 하나,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은 그동안 남성혐오의 그늘에 가려져 ‘여성의 시각’의 필요함을 역설하지 못했다. 왜 여성은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일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는지, 왜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취업, 승진 순위에서 늘 밀려나는지, 왜 여성은 강간을 당하고도 그 불합리함을 소리 내어 말 못하는지, 이런 문제 제기의 목소리를 잊혔다.

 

《지금 여기 페미니즘》을 읽는 동안 이론서 속의 여신이었던 페미니즘이 그 높은 데에서 걸어 들어와 내 머릿속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머리는 페미니스트이되 생활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성차별주의자로 살아가는 나를 위하여 이 책은 그렇게 다가왔다. 여성 노동운동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유미는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과 소원한 남녀 독자들에게 페미니즘의 핵심을 설명한다. 저자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여성권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한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인식의 틀을 갖고 살듯, 그보다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은 그려지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차이와 다양성은 곧 더욱 복잡한 사회 구조와 더 많은 분리를 낳게 된다. 결국, 우리가 차이를 차별로 귀결시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선 우리의 사고를 결정짓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권이 보장받기 위한 운동은 편한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을 머리 맞대고 의논하는 힘든 삶이다. 차별과 편견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고민하는 삶이다. 새롭고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아는 어려운 삶이다. 머릿속의 운동이 너무 편한 것만 쫓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5-09-05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책 읽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누구든 휴머니스트라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둘을 동의어로 이해합니다.

cyrus 2015-09-06 20:11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제가 쓴 글을 단 한 줄로 정리하셨군요. 남성과 여성은 같은 인간이기에 절대로 한 쪽만 차별해서도, 혐오감을 가져선 안 됩니다.

단발머리 2015-09-07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의 렌즈를 착용하는 것이 낯선 이유가 바로 단순히 ‘페미니즘의 과잉’ 탓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과소’가 원인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남자들`을... 저는 기다립니다.
정희진씨 말처럼,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된다면 어느 여성이든 여성학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자로서는 입장이 다를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남성 혐오라고 이해하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으니까요.
항상 그렇지만,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9-08 18:0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페미니즘의 과소’을 심각하게 여기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지 않아요.
 
인간과 동물, 유대와 배신의 탄생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2
웨인 파셀 지음, 전진경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얘들아, 저기 봐!”

 

갑자기 한 친구가 창문 밖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이들이 우르르 창문 쪽으로 모인다. 창문 밖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 자란 흰색 진돗개의 목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할아버지는 우악스럽게 막대기로 진돗개의 몸통을 때리고 있었다. 진돗개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크게 몸부림치다가 몇 분 후에 땅바닥에 축 늘어진 채 가만히 있었다. 기어이 할아버지는 개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명백한 동물 학대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장면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슬펐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렸으나 우리나라에 동물과 관련된 법이 제대로 없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잠깐이라도 받았을 이 진돗개는 무관심한 ‘인간들의 도시’ 뒷골목에서 먹을거리를 찾아 배회하다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동물’을 만난다. 식사 때마다 장조림, 스테이크, 치킨 등 여러 가지 음식의 형태로 만난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기르는 개 또는 고양이와 장난하거나, 반려동물이 나오는 각종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나처럼 인간의 손에 잔혹하게 죽어가는 동물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는 이들은 개별적으로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루에 1만 마리 이상의 동물이 우리나라 실험실에서 죽어가고 있다. 대학과 연구소, 병원과 제약업체에서 생활용품 안전검사, 약품과 화장품 개발, 유해물질 독성 검사 등을 위해 희생되고 있다. 어린이들이 붐비는 동물원. 아이들이 동물원에서 실제로 동물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동물의 ‘진짜 모습’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는 전혀 없다. 인간에게는 순간의 ‘관람’이지만, 동물에게는 평생의 ‘감금’이다. 동물원은 아이들에게 ‘동물은 인간을 위해 얼마든지 갇혀도 되는 존재’라는 첫 인식을 만드는 공간이 된다.

 

동물의 삶이 이토록 극과 극인 이유는 무엇일까. 대다수 사람은 동물이 사람보다 열등하며 사람처럼 감정을 느낄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에서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인식을 끌어내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 학대 문제라면 또 모른다. 늘 식탁에 오르는 식용 가축이 어떻게 키워지는지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관심 밖인 게 사실이다. 없어서 못 먹지 사육 환경이 무슨 문제냐, 또는 어차피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동물을 놓고 권리 운운한다는 건 ‘악어의 눈물’ 아니냐고 반발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전보다 훨씬 더 동물 학대가 행해지고 있다.

 

미국 휴메인 소사이어티의 대표인 에인 파셀은 오늘날까지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야의 동물 학대를 동물을 상품으로 취급한 인식에서 비롯된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 휴메인 소사이어티는 미국 내 1,000만 명의 회원을 둔 최대 동물보호단체다. 1954년 설립돼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이 동물은 물론 인간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인간과 동물 유대와 배신의 탄생》은 우리가 즐겨 먹는 고기 등 먹을거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인간 식생활의 소름 끼치는 이면을 파헤치고 있다. 권총 모양의 볼트건의 나사는 소의 뇌를 관통하여 소를 기절하게 한다. 움직이기조차 힘든 소는 그 자리에 죽는다. ‘공장식 농업’의 문제점들이 적나라하게 예시된다. 인간의 식탁에 오르는 먹이들의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축산업을 위해서는 고기가 접시에 오르기 전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소비자들이 모를수록 좋다. 따라서 가축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처리되는지 제대로 모른다.

 

동물들을 공장의 빵처럼 여기는 인간들과 그런 인간들의 학대를 받다가 죽어가는 동물들. 그 사이의 불화가 우리 관심에서 멀어질수록 재앙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축을 생명이 아니라 공장의 제품으로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업은 환경파괴와 자원 소비를 가속하며,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저자는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도축의 현장, 그를 둘러싼 권력의 행태는 현대가 얼마나 그 속으로는 야만의 힘에 의지하고 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도 인간과 동물 간의 불화는 깊어만 가고 있다. 이런 충격적인 실태의 고발은 결국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우리는 때로 동물들의 처참한 상황에 안타까워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축산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며, 인간이 고기를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비인도적 도살을 규제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학대받은 동물은 학대받은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아이는 학대를 당하더라도 방어하거나 표현할 능력이 없다. 말 못하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특별히 더 존중을 받을 이유는 없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의 유대 관계를 받아들이면, 그들을 존엄성과 권리가 있는 생명체로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건물을 짓고 상품을 만들어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은 가치 없는 것으로,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인간의 동물 학대는 심각한 환경파괴와 맞물려 있으므로 동물의 권리문제를 ‘생명의 권리’로 확장하여 인식해야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5-09-0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건 주로 영상물로 많이 접하곤 하는 것 같아.
그런 점에서 S본부의 <동물농장>이 한몫을 하고 있긴하지.
그래도 동물학대는 여전하고...
책으로는 얼마나 읽을런지 모르겠다.
우리집도 애완견을 키우고 있는데 도대체 학대할 데가 어딨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TV 같은데서 고기 먹는 장면도 좀 줄여야 할 텐데
여전히 먹어라 먹어라 하니 동물이 얼마나 권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끼를 잡아 먹는 인간을 보면 인간이 참 죄가 많다 싶어.

그런데 책표지가 참 어린이스럽다. 모르고 보면 무슨 동화책인 줄 알겠어.ㅋ

cyrus 2015-09-03 22:05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이 정말 로그인 접속하기 싫은 또 하나의 이유가 동물을 잔인하게 괴롭히는 동영상이나 상처 입은 동물의 사진 때문이에요. 페친이 그 사진에 ‘좋아요’ 하나 누르면 저도 그 사진을 보게 되요. 동물 권리를 주제로 한 책 중에서 표지가 좋아요. ^^

페크pek0501 2015-09-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잔인한 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이 없는 걸까요? 아예 동물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동물들도 똑깥이 고통을 느낄 줄 알 텐데 말이죠. 인간에게 고통을 준 것은 `악`이지만 동물에게 고통을 준 것은 `악`이 아니라고 보는 걸까요?

cyrus 2015-09-04 20:11   좋아요 0 | URL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사람을 괴롭히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엄연히 이런 비도덕적 행동도 범죄인데 우리나라는 형량이 너무 가벼워요.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 서울의 삶을 만들어낸 권력, 자본, 제도, 그리고 욕망들
임동근.김종배 지음 / 반비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별의 도시다. 한강의 기적과 그것이 빚어낸 명암, 꿈을 갈망하고 욕망을 소비하는 메트로폴리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광적으로 서울에 몰렸다. 개발 연대기 서울 행정은 인구 분산과 교통난 해소, 택지개발, 아파트 건설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는 욕망의 응집체다. 이 욕망은 재개발과 투기라는 이름으로 무한증식하며 허물고 새로 짓기를 반복한다. 한국인의 ‘내 집 갖기’ 욕망은 세계 최고 수준인 교육열 못지않다. 집의 소유 여부, 크기, 위치가 ‘계층’ 판단의 기준이 되다시피 해 도시서민 제1의 목표 역시 ‘내 집 마련’에 맞춰지곤 한다. 엄청난 마력을 발휘하는 아파트는 모든 이의 꿈을 획일화하며, 거주자들은 자기만의 성을 쌓아간다. 하지만 꿈은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하다. 수십 차례에 걸쳐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나왔지만, 아파트 가격의 폭등을 멈추지 못했다. 이로 인해 빈부 격차는 더 벌어졌다.

 

사회를 조정·통제하는 정치적·사회적 요인과 제도는 그 도시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도시개념에 무지한 사람들은 이 거대한 도시를 마치 경제성장, 주거환경의 혁신적 결과로 착각한다. 사실은 서울은 그때그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허물어지고 구축됐다. 그 안에 사는 인간은 이같이 파괴적인 순환에 저절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반비, 2015)은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서울의 변천 과정에 숨어있는 공공적 욕망에 주목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토대 위에 존립한다. 이 욕망의 시발점을 보려면 행정구역이 새롭게 개편되면서 점점 도시의 모습으로 갖추기 시작하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서울시는 1960년대 초반부터 시민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시가 아파트의 골조만 짓고, 입주자가 내부공사 일체를 맡는 방식이었다. 실적 위주로 밀어붙인 아파트 짓기는 1970년에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는 대형사고를 낳았다. 70년대에는 유신정권이 민간부문에 의한 주택건설을 확대하기 위해 세금 면제, 재정 지원 등 다양한 유인책을 내놨다. 압구정동, 여의도, 잠실 등지의 아파트는 대부분 이때 지어졌다. 각종 개발사업이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이 아파트 개발 사업에 참여한 대형 건설업체들을 끌어모아 힘을 얹어주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고 건설업체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80년대 말부터 주택난이 발생했지만, 정권수립에 도덕성이 없는 전두환 정권은 국민 불만을 물가안정으로 잠재우려고 했다. 멈출 줄 모르는 집값 폭등이 민심이반 현상으로 크게 번지게 되자 노태우 정권은 승부수를 걸었다. 수도권 주변의 5개 신도시 개발이 한꺼번에 진행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우리는 ‘아파트’라는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투자를 넘어서 투기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이런 투기 광풍 속에 건설업체는 입맛대로 분양가를 책정하여 고수익을 챙겼다. 정권과 대형 건설업체는 서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연대를 구축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독자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을 통해서 개발사업의 성공신화에 가려진 불편한 이해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권력과 자본, 욕망이 무수히 교차하는 도시 ‘서울’은 일종의 무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정부의 조종에 따라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이다. 정부의 정책 블루스로부터 시작된 도시의 춤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지금 어디선가 커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욕망은 수십 년 후의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모두 궁금해하지만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주식 투기에 뛰어들었다가 잠시 지옥에 경험했다는 과학자 아이작 뉴턴도 모를 것이다. 뉴턴은 주식시장 전망을 묻는 한 투기꾼에게 “나는 천체의 무게를 측정할 수는 있어도 미친 사람들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뉴턴 같은 천재에게도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욕망의 힘은 알쏭달쏭한 불가해의 영역이다. 하지만 확실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고전경제학이 말했던, 그 꼭대기 위에 앉아 욕망을 제어한다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대해진 도시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셈법이 있을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르미원주 2015-08-3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 권력은 한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이기심을 끌고 가는 세력이라고 생각해요. 거대도시 서울의 흥망성쇠에 대한 담론을 대담 형식으로 잘 담아놓은 책이라서 저도 읽어보려해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8-31 16:46   좋아요 1 | URL
지리학에 낯설어서 어려울 줄 알았는데 대담 형식으로 풀어서 그런지 책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