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시는 분, 저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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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5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7-25 18: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조카들이랑 라이온킹 볼겁니다. 히히히

2019-07-2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7-2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안주셔도 됩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감정을 갖게될지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소문난 고전이라고 해서 그 책을 읽고 감동받으리란 법도 없고, 뻔한 구절이 가득한 책이라 해서 당연히 실망하리라는 법도 없다.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라고 쓰려다가 또 쓸데없이 길어질까 이쯤하고.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는대신 단발머리 님 방식대로, 원하는 사람들을 먼저 골라 읽기 시작했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읽었고, 오늘 아침엔 베티 프리단을 시작했다.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2006)은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 1934~)과 더불어 1960년대 이후 미국 여성운동을 이끈 가장 유명한 지도자로 손꼽힌다. 프리단이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은 1963년에 출간된 『여성성 신화』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성공과 반향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쏟아진 엄청난 관심과 열광적 평가는 짧은 지면에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다. 앨빈 토플러는 이 책을 일컬어 역사의 방아쇠를 당긴 책이라 격찬했는데, 역사의 방아쇠까지는 아닌지 몰라도 여성운동에서 한 새로운 단게의 출발을 알린 책인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미국 근대 여성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화점이 되어주었다고 평가되기도 하고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서구 여성주의 운동 (이른바 여성주의 제2의 물결)을 이끌어낸 기폭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프리단이 2006년 2월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지의 부고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여성주의의 십자군 용사이자 1963년 현대 여성운동을 작열시킨 뜨거운 첫 저서 『여성성 신화』의 저자이며, 그 결과 미국과 세계 각국의 사회구조를 영구히 변화시킨 인물인 베티 프리단이 사망했다." (p.315)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도 죽었다. 파이어스톤도 죽었다. 보부아르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살아있지 않은 저자들을 만나왔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 아침에는, '베티 프리단이 사망했다'는 구절에서 왈칵- 치밀어 올랐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심지어 나는 베티 프리단의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왜 그녀가 사망했다는 구절에서 왈칵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가만, 처음으로 돌아가 그녀의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을 다시 보았다. 얼만큼을 살다간 것인가.





많은 여성들에게 읽히고 자극을 준 책, 여성주의의 기폭제가 된 책을 쓰기 위해서 베티 프리단은 의문을 가졌고, 설문조사를 했고, 집필을 했다. 그렇게 열정적 삶을 살아서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결국은 죽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이 결국 닿게 되는 종착지일텐데, 문득 '인생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거다. 우리는 결국 죽을텐데, 왜이렇게 살고 있을까. 세상이 뒤죽박죽이고, 어어 이 세상 이상해, 그렇다면 이상한 이유가 뭘까?, 내 생각엔 이래서 이런것 같아, 라는 치열한 사고를 거쳐 세상에 알렸건만, 죽었다.


좋은 작품을 쓰고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더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변방에서 책을 읽으며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나라고 해서 일찍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누가됐든 사람은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죽게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데, 새삼, 어떤 삶을 살든 죽어야 한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픈 거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우리는 왜 죽어야할까.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살아가고, 그리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한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거라면, 그 과정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자기의 몫일 것이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내가 죽더라도 내 뒤에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삶의 절대가치 혹은 상대적 가치를 평가하는 건 누구의 몫일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하나의 위대한 저작을 냈다고 해서 평생을 위대한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백래시』에서도 베티 프리단이 오히려 페미니즘에 역행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게다가 동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질투했다는 얘기도. 인간은 태어난 이상 죽어야하고, 그 개인으로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복잡한 감정들에 휩싸여있다. 어마어마한 저작을 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어깨힘 뽝주고 살아가도 됐을텐데, 아마도 더한 것, 더 높은 것을 바랐던 것일까. 책을 쓰기 전에는 그 책이 이렇게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을 것이고, 그 어마어마한 책을 써낸 뒤에는 더 높은 곳에 닿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지도 몰랐겠지. 인생은 아주 많이, '이럴 줄은 몰랐어' 를 내뱉으며 살게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어제 엄마랑 노화에 대해 얘기를 나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둘이 시장에 가면서 엄마의 팔에 핀 검버섯을 보았다. 검버섯은 손에도 있었다.



엄마, 나도 곧 그 검버섯이 내 몸에 깔리겠지.

응.

나 벌써 시작된 것 같아.

누구나 그래. 신경쓰지마. 늙으면 검버섯 생기는 건 당연한거야.



나는 늙어가고 죽음에 이르겠지. 나도 그냥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 다른 사람과 똑같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베티 프리단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는 책을 쓰지는 못할거다.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리고 내 온전한 행복을 위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바라는대로 살 수 있을까?



죽기 전에 『여성성 신화』는 읽어야겠다. 검색해보니 2018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남편인 칼은 부인의 활동을 격려하고 적지 않게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지적이고 독립적인 부인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고, 의견 마찰이 있을 때는 부인을 구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결혼관계는 결국 1969년 이혼으로 끝났다. 칼은 얼마 후 가정적인 여성과 재혼해서 아주 만족스러워했으며, 베티와 같이 지적인 여성은 존중하기는 해야 할 테지만 그러한 여성과 결혼할 것은 아니라고 극구 주장하기도 했다. (p.320)



맙소사.. 베티 프리단의 남편도 아내를 때렸다니. 세상에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자가 있기는 한건가요? 그리고 왜, 남자들은 지적인 여자를 싫어하는가.. 왜 지적인 여자랑 결혼하기 싫어하는가. 나는 이거 너무 이상하다. 사람들이 대부분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나? 토요일에 남동생 부부랑 저녁 식사 하면서 '애인에게 용납 안되는 한가지' 화제가 나왔는데, 나는 '멍청한 남자는 질색팔색' 이라고 했단 말이야? 누구나 다 멍청한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거 아닌가? 왜 남자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여자를 기를 쓰고 싫어하지? 그런데 대부분 다 자기보다 똑똑할 수밖에 없는데.. 아아, 모를 일이다.




남동생 부부와 바깥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는 남동생 부부의 집으로 갔다. 텔레비젼을 틀어서 보며 술을 마시다가, 채널을 돌리고 잠깐 무슨 밥상 차리는 프로를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데, 여자가 지역 특산물로 밥을 차려내고 있었다. 닭장 육수로 떡국을 끓이고, 보쌈을 준비하고, 토하(새우)젓을 준비해 상을 차려냈다. 차려진 상에 밥을 먹기 위해 남자 셋이 몰려들었다. 한 명은 남편인것 같고 다른 두 명은 모르겠는데, 일단 준비과정부터 여자 혼자 하는 걸 봤던 터라 몹시 기괴한 장면. 나는 한마디 하려다가, 아아 지금 분위기 좋은데 걍 입닫고 있자, 괜히 남동생 부부 앞에서 욕하지 말자, 하고 있었단 말야? 그런데 남자가 '토하에서는 특유의 향이 난다' 고 하는 거다. 여자는 '그게 싫지 않지?' 하는데 남자가 대답을 안해..아아,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



"차려주는대로 쳐먹기나 하지, 가만히 앉아서 밥상 받는 주제에 말이 많어 개새끼가."



남동생은 "누나가 뭐라고 할 줄 알았다" 면서, "저거 여자가 혼자 차렸고 치우는 것도 여자 혼자 치울 거 아냐"며 거들었다. 으으...



자, 다시 베티 프리단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이런 생활을 하던 여성들이 표현할 수 없는 심적 고통과 고뇌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잔디밭 깔린 좋은 집과 가구, 온갖 가전제품, 착한 아이들이 있고 사이좋은 이웃들과 환한 얼굴로 담소하며 유행따라 멋진 옷을 갖춰 입고 취미생활까지 하며 사는 여자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감적이 격해져 울거나 집을 뛰쳐나가 거리를 헤매거나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신체적으로도 징후가 나타나 손과 팔에 큰 물집이 생겨 터져 피가 흐르기도 했다(세척제 문제가 아님). 이런 문제를 안은 여성들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들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적 요구를 하고 이를 통해 "살이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인들은 성적 동물이 되어갔고 남편들은 부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여자들이 어머니로서의 존재 확인을 위해 끊임없이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이 현상의 특징이었다. (p.337-338)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정확히 이 부분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오는 소설, 『마담 보바리』 생각이 났다. 보바리 부인도 자기 안에 그 감정 때문에 교회를 찾아가지만, 너에게 부족한 건 없고 그런건 다른 가난한 여자들이나 갖는 감정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지.




「사실」 하고 그는 엠마 곁으로 되돌아와서는 커다란 사라사 손수건을 이빨로 물어 펴면서 말했다. 「농민들은 정말 불쌍해요」

「그들 말고도 또 있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서 도시의 노동자들이 그렇죠」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실례지만 말입니다, 내가 아는 불쌍한 가정의 어머니들은, 정숙한 여성들은, 정말이지 거의 성녀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인데 빵 한 조각 없이 헐벗고……」

「하지만 저어……」 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 양쪽 끝이 일그러졌다). 「신부님, 빵은 있어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여자들이……」

「겨울에 불이 없는 여자들」하고 신부가 말했다.

「아니!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때요?」

「뭐라고요! 아무려면 어떠냐고요? 내가 보기엔 사람이란 몸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만 하면……왜냐하면……결국……」

「아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p.167)




인생 뭘까.

인생 왜 사는 걸까.

난 모르겠다..




현대의 생물학자, 사회과학자, 심리분석학자들은 인간적 성장의 요구(need)나 충동(impulse)이 섹스 못지않게 원초적인 인간적 요구이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1940년대 메국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여성의 비정상성, 열등성, 인간적 결함을 설명하는 근거 역할을 했다. 여성은 자신이 남근을 가지지 못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남근을 부러워하고 남성성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여성에 대해 적용한 기본 관념이었다. 게다가 여성은 본래적 결핍인 남근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남근 선망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자아를 발전시키기 어렵고 본능을 승화시키는 능력도 더 약하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는 여성은 남성 성기에 대한 갈망을 자녀에 대한 갈망으로 대체하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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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7-2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웠던 보관함에...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를 넣습니다... 곧 구매 예정.

다락방 2019-07-22 11:38   좋아요 0 | URL
술술 빨리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비연님. 저 이번달 안에 이 책 끝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하하하하

비연 2019-07-22 11:41   좋아요 0 | URL
흠.. 그렇다면 전, 완전 굳게 맘먹고 시작해야겠네요 -.-;;;

공쟝쟝 2019-08-03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티프리단 남편 진짜 극혐 ㅋㅋㅋㅋ 그런 여상과 결혼 하지 말라닠ㅋㅋㅋㅋ
넷플릭스에서 지금은 내려갔지만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 She’s Beautiful When She’s Angry 라는 다큐가 있는 데 거기 베티프리단이 나와요~ 우리가 읽었던 수잔브라운 밀러도 나온다지요. 저자들이 나와서 자신의 페미니즘 운동 증언 하는데 너무 반가웠어요. 책에서 now나 witch의 활동 나올때 그 다큐에서 본 기억이 나서 생생했어요. 언제 기회되면 한번 보세요 🔥🔥
 
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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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잘난척 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데 잘난척하지 않는다. 이미 이름난 독서가이고 책을 냈던 사람이니 독서란 이름 붙여 책을 쓸 거라면 온갖 유명한 철학자나 인문학자 끌고 와서 내가 이런 책들을 읽었소~ 할 수 있을텐데, 문유석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순정만화부터 김연수까지, 그저 정말 자신이 재미있게 읽었던 작가들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았고, 인상적인 건 하루키의 유머 감각을 언급한다는 점. 하루키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역시 하루키의 유머감각은 재미있어~ 하는데, 그게 참 좋았다. 하루키에 대해 최근에 좀 아아, 가슴 집착남... 같은 거 생겨서 실망했지만, 하루키 유머감각은 나도 항상 깔깔대며 웃었던 바, 이 책에서 문유석이 언급한 하루키 유머 부분은, 까페에서 읽다가 빵터져버렸다.



내가 아는 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에 일본어로(그것도 간사이 사투리로) 가사를 붙인 인간은 기타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목욕할 때면 곧잘 큰 소리로 그 노래를 불렀다.


어제는/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p.141-142)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에 나온 부분이라는데, 나도 그거 읽었는데 왜 기억 1도 안나지? ㅋㅋㅋ 아무턴 어제 까페에서 이 책 읽으면서 어제는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여기 읽다가 혼자 소리내서 웃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오래전에 썼던 단편소설도 생각났다.  하루키답게 썼었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뭔가 리뷰가 또 산으로 가는데, 아무튼 잘난 사람은 굳이 잘난척하지 않아도 잘난 게 다 드러난다...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아아, 뭔가 초딩 감상문이다 ㅋㅋㅋㅋㅋ)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정독도서관의 독소교실에 다니게 되었다.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고, 인근 학교들에 몇 명씩 인원이 배정되어 강제 차출된 것이었다. 책이야 각자 알아서 읽으면 되는 거지 독서교실은 무슨 놈의 독서교실이람. 툴툴거렸지만 어차피 나는 불의를 질끈 잘 참는 아이였다. - P39

흥미로운 것은 당연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얘기를 할 때도 굳이 ‘개인적으로‘를 덧붙이는 강박증도 자주 관찰된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크림 파스타를 좋아해." 이런 얘기를 길게 듣다보면 나는 개인적으로 하품이 나고 개인적으로 소변이 마려워진다. - P77

생각해보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선조 남성들은 이천년 동안 끝도 없이 ‘남자가 온 세상을 떠돌며 방탕하게 놀고 다니는 동안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는 고향에서 지고지순하게 그를 기다리다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타락한 남자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유의 철면피스러운 이야기들을 재생산해온 것 아닐까.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페르귄트와 솔베이지, 오해로 돔아간 신랑을 평생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입고 앉아 기다리다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는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 새색시까지. - P105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는 타인의 존재를 편하게 받아들일 만큼 수양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꼭 누구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부를 만끽하는 모습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정당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성취를 누리는 당연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의도적인 과시로 비쳐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연결되어 있다. 나 홀로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관계의 촘촘한 거미줄 속에서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으며, 또는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 P127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 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식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체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많은 바 행정절차인 뿐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을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 P192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감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ㄴ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94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가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응ㄴ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 P194

비행기를 예약해두지 않았어도 마음속으로 나는 언제나 이전 여행과 다음 여행 사이에서 스톱오버중이었다. 다음 여행을 꿈꾸고 있으면 지금 일상에서 부딪히는 일들에 좀더 관대해진다. 여행자가 굳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으니까. 여행자답게 가능하면 좀더 친절한 사람이 되려 애쓸 뿐이다. 어쩌면 이번 삶 전체가 다 스톱오버일지도 모르겠다. 그전, 그후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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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9-07-2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정곡입니다!ㅎㅎ

다락방 2019-07-21 12:49   좋아요 1 | URL
굳이 잘난척 하지 않는데 참 잘나셨더라고요. 하하하하하.

hnine 2019-07-2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올리신 마지막 페이지는 시간절약을 위해서? ^^
인도에 다녀온 유일한 저희 집 식구인 제 아들 말에 의하면, 웬만한 환경에서 군소리하는 편이 아닌 녀석임에도, 인도는 정말 가보라고 권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하더군요. 단순히 청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면서요.
아직 문유석 판사님의 책을 못읽어본 저로서, 다락방님의 이 리뷰가 굉장히 읽어보고 싶게 만드네요. 그렇죠. 무슨 척 한다는 것, 어떻게 보이고 싶어하는 티가 난다는 것은 일단 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이지요. 뭐, 못봐줄 일도 아니지만요.

다락방 2019-07-22 07:44   좋아요 1 | URL
저 마지막 하나의 인용문을 두고 타자 치기가 너무 귀찮아지더라고요. 아아 더이상 치기 싫다..이래서 사진 찍어 올렸는데, 사진 찍어 올리는 것도 만만찮게 귀찮았어요. ㅎㅎ

인도가 추천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실망이었다, 라는 구절 때문에 찍은 건 아니고요, 그렇게 기대를 품고 갔는데 아니었다면서 ˝류시화씨, 싸울래요?˝ 한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 구절 때문에 인용했는데, 저 구절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앞 구절들이 필요해서.. ㅎㅎ


살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이웃으로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게 되고요. 그럴 때 ‘나는 ~ 하는 사람이다‘ 라고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 이라기 보다는 ‘남들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의로운 사람, 용감한 사람, 잘난 사람은 딱히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드러내지 않아도 그 행동으로 알게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재미있었어요, 나인님.

clavis 2019-07-2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같지 않아요.아아,그렇구나 했는걸요.락방님 저는 왜인지 이 글을 보다가 울고 말았어요. 언어의 한계때문에 저능아처럼 그냥 밥만 먹고 연습만 하는 것 같아요. 밤에도 우리말 유투브든,라디오를 켜놓고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이렇게 사람다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우리말이 참 그립고 좋습니다. 좋은 책,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늘 고마워요 락방님♡

다락방 2019-07-22 08:02   좋아요 1 | URL
으아아 멀리서 외롭지요, 클래비스님? 오랜 연습과 우리말을 듣기 위한 유튜브라니..
클래비스님, 말하고 쓰기도 중요한 것 같아요. 말할 수 없다면 쓰는 거라도 부지런히 해요. 매일매일 짧은 일기라도요. 여기에 못쓴다면 작은 노트에 써도 되고요. 제 경우에는 쓰기가 저를 참 많이 지탱하게 해주거든요.

지치지마요!

clavis 2019-07-2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길가에 거지들이 누워있는데, 오르간은 큰소리가 나는 악기니까, 선생님께 배운 대로 소리를 만들고 치면서도 나에겐 고국과 가족을 맞바꾼 이 피같은 시간들이 한량 놀음 같이 보여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겠지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락방님의 글에서 저자의 글을 접하고, 어제 내가 얼마나 고민하면서 소리를 줄였는지,또 소리를 키워야했는지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서 참 고마웠습니다. 늘 연습을 안하고 있을 때는 백퍼 아, 연습해야 하는데..로 마음 불편하게 사는 이 길로 접어들면서 오늘은 마음 편히 쉬려고 락방님네 놀러왔어요. 내일은 또 초긴장 속에 연습과 연주 준비를 해야하기에 늘 제 기분을 잘 맞춰줘야 해요. ㅠㅠ락방님 글 덕에 많이 울고 많이 웃을 수 있어서 늘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7-22 08:0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누군가로부터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제 글을 보면서 혹은 제 삶을 보면서 괜히 열등감 생기기도 할 거라는 생각도 해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니, 누군가의 존재 만으로도 안정감을 얻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또 우리가 생각하고 가야하는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해야할 일을 해야 하고요.

벌써 날이 바뀌었네요. 연습과 연주 준비 잘 하고, 기분도 잘 맞춰요, 클래비스님!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니 기분이 괜찮아요. 사무실 책상 위에 간식이 많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인가봐요. 클래비스님도 간식 먹으면서 해요!

비연 2019-07-2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정말 겸손한 말들이 즐비했으나 이 분은 잘난 분이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다락방 2019-07-22 11:18   좋아요 1 | URL
잘난 사람들은 티가 나는것 같아요, 비연님.... 아무리 따라하려고 해도 따라할 수 없는 본연의 잘남.....

비연 2019-07-22 11:21   좋아요 0 | URL
쩝 ㅠㅠㅜ

얼음장수 2019-07-2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저 대목이 기억나요. ‘예스터데이 간사이 사투리‘는 킥킥거리면서 봤거든요. 잘난척하지 않는 자의 미덕을 논하는 글에, 잘난착을 해버렸네요 ㅋㅋ

다락방 2019-07-22 14:15   좋아요 0 | URL
이런 잘난척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얼음장수님!
더운데 잘 지내고 계십니까?

유부만두 2019-07-22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문유석 판사의 예전 독서책을 읽었는데
심하게 자기자랑을 해서 밉상이었습니다.
ㅎㅎㅎ

같은 작가 다른 인상

다락방 2019-07-23 07:48   좋아요 0 | URL
독서책이 다른 게 또 있군요? 저는 이거 하나 뿐인줄 알았어요.
저는 최근에 제가 생각한 열등감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오늘 전자책 다섯권 질렀는데, 나의 장바구니에 함께 담긴 이 전혀 다른 책들이여...

이게 한 사람의 장바구니란 말인가...


크리스티나 로런 님, 제목좀 어떻게 좀..... ㅠㅠ

아니, 번역 제목이 이상한 거네요... 단단한 남자가 뭐야, 단단한 남자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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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7-19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쿠폰 사용하신 거겠죠, 다락방님?^^

다락방 2019-07-19 11:53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그래서 기다렸다 오늘 한거에요. 매일 적립금 100원 오늘 하루 더 받아서 결제하려고 ㅋㅋ 그래봤자 얼마 못모았지만 ㅠㅠ

단발머리 2019-07-19 12:08   좋아요 0 | URL
잘하셨습니다. 저도 이달에는 성실하지 못 해 많이 못 모았어요.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 심정이 필요할 때로 보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7-19 12:38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도 오늘 한 번 지르시나요? 쿠폰 사용해서? 저는 7월에 책 안사겠다는 결심을 도대체 왜 했는지 모르겠어요. 종이책 박스 오고 이렇게 전자책도 한 꾸러미... 인생....

블랙겟타 2019-07-1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중에 밤에 지를려구요.
이날을 위해서. 월 초에 전자책상품권(적립금 두배주니깐요^^;;)으로 채워놓구요..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뺐다가를 반복하며 추려서 쿠폰과 매일 100원 살뜰히 모아 오늘 터뜨(?)릴려구요 하하..(◜▿‾ )ノ

다락방 2019-07-19 12: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알뜰살뜰 매일 적립금 모으셨군요! 저는 그게 안되더라고요. 아이참.. ㅋㅋ 게을러서 원 ㅋㅋㅋㅋㅋ
월초에 전자책상품권 적립금 두배...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아아, 알뜰살뜰의 경지는 제가 가기엔 너무 멀군요!

이따 밤에 지르시면 뭐 질렀는제 공유해주세요. 남들 뭐 샀는지 궁금한 1인입니다 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7-19 13:45   좋아요 0 | URL
이런거에만 살뜰할까요? ㅎㅎㅎ

매월 1~3일마다 전자책 캐시를 구매하면 기존에 사면 주는 적립금보다 두배로 주거든요. 거기에 혹(ㅠㅠ)해서 3만원짜리로 사사거든여.(`ω´;)

네네! 사고나서 알려드릴께요 ㅋㅋㅋ
앗!☂ 여긴 비가 오네요
다락방님 점심 맛있게 드세요 ^^

2019-07-20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1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사 학위를 받은 뒤 교직을 얻기 위해 철학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던 1929년 6월, 3살 연상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80)를 만났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그해 교수자격시험에 1,2등으로 나란히 합격했으며, 당대의 스캔들이었던 2년간의 계약결혼에 들어갔다.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나 일, 앞으로의 계획, 지난 경험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고 전적으로 상대방과 공유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 이들의 관계는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결혼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각자 애인을 사귀면서 죽을 때까지 계약결혼을 유지하였고, 지적 동반자로서 서로를 인정하였다. 보부아르는 마르세유, 루앙, 파리의 고등학교에서 12년간 철학 강의를 하였으며,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같은 해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Les temps modernes)지를 창간했다. (p.278)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이의 계약결혼이야 워낙 유명한 사건이지만, 위의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보부아르는 대체 왜 사르트르와 굳이 계약결혼을 한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영혼의 정절' 과 '관계의 투명성'은 다 뭐람?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 계약내용인데, 서로 완벽하게 자유로울 거면 굳이 결혼으로 묶이지 않아도 되지 않나.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만족시키는 가장 큰 중점을 지성에 둔 것 같다. 그들의 계약결혼,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해야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서 '보부아르 결혼' 을 넣고 알라딘에 검색했더니, 이런 책이 나온다.




















교수자격시험에서 1,2위 할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이니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일테고, 굳이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고 계약결혼을 택한 점, 그리고 서로의 자유로운 생활을 완벽히 인정했다는 점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결혼'을 보이려고 했던 게 가장 큰 것일테다. 그러나 '결혼이 꼭 여러분이 아는 결혼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라는 걸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굳이 결혼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 가져다둘 필요가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저 살림지식총서 한 번 읽어봐야지.



얼마전에 본 영화 《토이스토리4》에서 '보핍'은 한명의 주인에게 지정되어 사랑받는 장난감이 아닌, 철저하게 자유로운 장난감이다. 장난감이라고 말하려니 어딘가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러나 보핍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고, '언젠가는 내게도 주인이 나타날거야' 라는 같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나중에 누군가 자신을 옆에 데리고 다녀줄 어린 주인이 나타날 수도 있고 안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거랑은 전혀 별개로 보핍은 자신의 자유를 누리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 보핍의 태도는 사랑과는 전혀 별개로 '나는 나!' 로 유지되는데, 그러면서 건강한 삶을 사는 게 너무 좋은 거다.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야만 그 인생이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캐릭터랄까.


'카붐' 캐릭터도 마찬가지. '우디' 가 자기를 소유한 아이를 위해 자기 한 몸 바쳐 충성하고 희생하고자 하고, '개비개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고쳐서라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자 애쓰는 캐릭터라면, 카붐도 역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자기 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하고 친구를 도우려 하고.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삶만이 가치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재미있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도 아니며 유일한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항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삶도 당연히,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높은 지성은 어쩌면 그 지성에 맞는 짝으로는 서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왜 굳이 '계약결혼'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 존재하게 한걸까? 그렇게 해야했던 그들의 동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돌아온 나의 파트너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점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는데, 내 경우에 계약결혼한 상대와 지적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고 서로의 다른 연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나의 계약결혼 상대를 졸라 사랑하지 않을 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내 경우엔 결혼을 생각했을 때, 미안한 말이지만, 결혼을 하고자 한 상대를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었다. 사실 사랑 자체와도 좀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상대와 결혼을 하면 어떨까, 라고 혼자 생각해보았던 것.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신경쓰이지 않는 누군가를 둔 채로, 나가서는 언제든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했던 거다. 지금이나 그 때나 '가장 좋은 사람과는 연애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마 이런 사고가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도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며 지성을 존중하는 게 가능했지만, 사실, 사랑..은 딱히 크게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람이 사는 모습도 다르고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행하는 자세도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 만약 졸라 사랑하는 사람하고 계약결혼을 했다면, 서로의 자유로운 연애를 인정하는 걸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럴거면 뭐하러 나랑 해? 걍 다른 사람이랑 해.


이건 자유연애 상대가 되어도 마찬가지. 내 상대가 '나는 지적 동반자인 사람과 계약결혼해 살고 있어, 나의 연애는 자유로워' 라고 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연애상대가 되고 싶지 않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어떤 생각을 하고 그 결혼에 임한건지 너무 궁금하다. 이렇게 궁금한 건 값싼 호기심일까?



어제는 누군가의 결혼이 궁금하다는 것이 값싼 호기심은 아닐까, 자꾸 생각해보게 됐다. 호기심과 관심은 어디에서 갈리는걸까. 나는 애정어린 상대에게 관심이 많고, 많은 것들이 궁금해져서 묻고 싶다. 퇴근 후에는 무얼 하며 지내는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무엇인지, 책의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는지, 어떨 때 행복함을 느끼는지, 전완근은 있는지.. (응?) 그런 것들이 궁금해 조잘조잘 묻고 싶은데, 만약 내가 관심있는 상대가 계약결혼을 했다면, 그걸 왜 했는지 묻는 건 실례일까 아닐까. 이것은 호기심인가 애정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갈리는가.




상반기 결산 같은 건 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 만약 올 한 해를 정리하게 된다면, 가장 인상깊었던 비문학 도서로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모임에서 진행했던 《여자는 인질이다》가 될것이다. 그 책에서도 언급됐고,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에서도 언급됐던 것처럼, 여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여성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연애와 결혼이 결국 억압적인 것이라는 것에 닿게 되는 것 같다. 강제된 연애, 결혼의 압박. 《제2의 성》을 1권 밖에 못읽었지만, 다 읽게 되면 역시 보부아르도 그런 결론에 대해 말하는가 보다.




3부 「정당화」에서 보부아르는 이러한 억압적 상황에 대한 여성들 스스로의 자기 정당화 방식들을 다룬다. 그동안 여성의 본질적 태도인 것처럼 간주되어왔던 나르시시즘, 연애와 사랑으로의 도피 그리고 신비주의가 기실은 기존의 남성적 질서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반(反)세계'를 형성할 자신이 없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에 공모하여 삶을 이어가기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라는 내용은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p.288)




보부아르는 자신이 도피성 결혼을 한 게 아니라는 걸 드러내고 싶었던걸까? 그래서 굳이 '계약' '결혼'을 택했던걸까? 계약결혼과 지적동반자, 그리고 자유로운 연애라니. 얼핏 보면 가장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마음적으로는 아주 복잡한 것들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 같지 않은가.


어째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어야할 것들이, 알아야 할것들이, 알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머리가 터질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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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7-1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기하기 어려운 특정 부위가 전완근이었군요! (응?) ㅋㅋㅋㅋ

살림에서 나온 저 작은 책은 사르트르-보부아르의 관계를 나름 잘 정리한 책 같았어요.
근데 저 책만 읽어봐도 아시겠지만 사르트르-보부아르는 계약결혼 뒤에도 내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대체 이 인간들은 왜 이런 짓을 한 것인가..... 그저 한낱 소시민인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더라고요.
심지어 보부아르는 나중에 사르트르가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사랑한 것에 고통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고, 게다가 그는 섹스도 형편없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죠.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런 결혼을.........;;

둘 다 지적으로는 매우 잘 통하니까 그 방면으로는 내내 교감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결혼(서로를 옭아매는)은 반대하고 싶었기에 ‘계약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글쎄요.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너무 간과한 것 같아요. 지적동반자로서만이 아니라 육체, 정서적으로 교감이 다 잘 되는 상대여야 이상적인 파트너가 아닐까 싶은데.... 서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 그들의 결혼도 기존의 결혼만큼이나 참 공허해 보입니다.

다락방 2019-07-19 09:47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생각한 게 바로 그거였어요, 잠자냥 님. 어느 하나만으로 결정되면 안될 것 같은데 지적동반자..라는 것이 계약결혼을 유지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함께 가져가기에 다 괜찮은가.. 가 안될것 같거든요.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대해 반대하기 때문에 계약결혼을 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한데, 내 파트너는 지적 동반자 그리고 자유로운 연애..라고 하면 ‘왜 굳이??‘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죠.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지성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걸 잘 맞는 파트너를 찾게 되겠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그걸로만 만족하게 두지는 않으니까요.

저도 잠자냥 님처럼, 육체, 정서적 교감이 다 잘되어야 이상적인 파트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파트너라면 굳이 ‘계약‘ 결혼을 했을 것 같진 않고요. 그래서 되게 복잡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계속 ‘굳이 왜?‘ 라고 묻게 되더라고요, 보부아르에게.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히 혁명적이었을 것 같고요.

오늘은 안그래도 전자책 맘껏 지르는 날이라고 제가 혼자 정했으니, 마침 저 살림지식총서도 이북으로 있겠다, 질러버리겠어요. 꺅 >.<

단발머리 2019-07-19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수자격시험 원래 1등은 보부아르이나 보부아르에게 1등을 줄 수 없었던 심사위원들이 오랜기간 공부했고 여러번 떨어졌던 샤르트르에게 1등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샤르트르는 천재죠. 그런 사람을 천재라 하지만 보부아르가 그에 못지 않았음에도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계약 결혼으로 인해 더 큰 자유를 누렸던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전, 아직 잘 모르겠더라구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거다,라는 로맨스 소설 법칙 같은게 이런 천재들의 사랑에도 해당되는지도 모르겠구요.

다락방 2019-07-19 11:36   좋아요 1 | URL
아니, 1등이 보부아르인데... 아또 그럴법도 하네요. 그 때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아요.

저는 제2의 성도 읽으면서 ‘보부아르 천재인가, 아는게 어쩜 이렇게 많지!‘ 했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되게 자극이 되고 좋아요. 파이퍼스톤도 그렇고 실비아 페데리치도 그렇고 엄청 똑똑하잖아요. 마리 루티, 레베카 솔닛 모두 다요! 너무 좋아요!


계약 결혼으로 인해 자유를 누가 더 누렸다, 라는 건 사실 제 관심 밖이고요, 저는 그저 애정이란 걸 놓고 봤을 때, 두 명 혹은 여러명과의 관계를 가져가고 있는 거라면, 그 중 어느 하나도 완전히 충족된 건 없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적동반자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자유연애를 했다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는 좀 빈 구석, 공허함을 느꼇던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저 관계를 유지했어도 그것은 얼마만큼의 만족을 가져왔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물론, 한 명으로부터 육체적 정서적 교감을 모두 이루었다 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공허함은 있겠지만요.


저 계약결혼이라는 시도는 당시에 굉장히 대단했을 것 같아요. 음 그치만 분명히 마음 찢어지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고요. 저 살림총서 계약결혼 샀으니까 읽어보겠습니다!!

요즘 너무 이것저것 읽어보려고 시도하고 완독을 못하네요 ㅠㅠ

공쟝쟝 2019-07-2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앙 꽤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자유주의 패미니즘까지 읽다 말았는데 ㅠㅠ 비록 주말에도 할일이 많지만 반나절은 비워봐야겄어요~ 오랜만에 페이퍼 써야지 ㅋㅋㅋ!

다락방 2019-07-20 07:26   좋아요 0 | URL
아 저 순서대로 읽는 게 아니어서 저도 조금 읽었어요. 보부아르가 세 꼭지째입니다. 으하하하. 저 많이 남았어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