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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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잘난척 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데 잘난척하지 않는다. 이미 이름난 독서가이고 책을 냈던 사람이니 독서란 이름 붙여 책을 쓸 거라면 온갖 유명한 철학자나 인문학자 끌고 와서 내가 이런 책들을 읽었소~ 할 수 있을텐데, 문유석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순정만화부터 김연수까지, 그저 정말 자신이 재미있게 읽었던 작가들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좋았고, 인상적인 건 하루키의 유머 감각을 언급한다는 점. 하루키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역시 하루키의 유머감각은 재미있어~ 하는데, 그게 참 좋았다. 하루키에 대해 최근에 좀 아아, 가슴 집착남... 같은 거 생겨서 실망했지만, 하루키 유머감각은 나도 항상 깔깔대며 웃었던 바, 이 책에서 문유석이 언급한 하루키 유머 부분은, 까페에서 읽다가 빵터져버렸다.



내가 아는 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에 일본어로(그것도 간사이 사투리로) 가사를 붙인 인간은 기타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목욕할 때면 곧잘 큰 소리로 그 노래를 불렀다.


어제는/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p.141-142)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에 나온 부분이라는데, 나도 그거 읽었는데 왜 기억 1도 안나지? ㅋㅋㅋ 아무턴 어제 까페에서 이 책 읽으면서 어제는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여기 읽다가 혼자 소리내서 웃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오래전에 썼던 단편소설도 생각났다.  하루키답게 썼었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뭔가 리뷰가 또 산으로 가는데, 아무튼 잘난 사람은 굳이 잘난척하지 않아도 잘난 게 다 드러난다...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아아, 뭔가 초딩 감상문이다 ㅋㅋㅋㅋㅋ)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정독도서관의 독소교실에 다니게 되었다.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고, 인근 학교들에 몇 명씩 인원이 배정되어 강제 차출된 것이었다. 책이야 각자 알아서 읽으면 되는 거지 독서교실은 무슨 놈의 독서교실이람. 툴툴거렸지만 어차피 나는 불의를 질끈 잘 참는 아이였다. - P39

흥미로운 것은 당연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얘기를 할 때도 굳이 ‘개인적으로‘를 덧붙이는 강박증도 자주 관찰된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크림 파스타를 좋아해." 이런 얘기를 길게 듣다보면 나는 개인적으로 하품이 나고 개인적으로 소변이 마려워진다. - P77

생각해보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선조 남성들은 이천년 동안 끝도 없이 ‘남자가 온 세상을 떠돌며 방탕하게 놀고 다니는 동안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는 고향에서 지고지순하게 그를 기다리다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타락한 남자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유의 철면피스러운 이야기들을 재생산해온 것 아닐까.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페르귄트와 솔베이지, 오해로 돔아간 신랑을 평생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입고 앉아 기다리다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는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 새색시까지. - P105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는 타인의 존재를 편하게 받아들일 만큼 수양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꼭 누구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부를 만끽하는 모습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정당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성취를 누리는 당연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의도적인 과시로 비쳐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연결되어 있다. 나 홀로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관계의 촘촘한 거미줄 속에서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으며, 또는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 P127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 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식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체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많은 바 행정절차인 뿐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을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 P192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감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ㄴ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94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가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응ㄴ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 P194

비행기를 예약해두지 않았어도 마음속으로 나는 언제나 이전 여행과 다음 여행 사이에서 스톱오버중이었다. 다음 여행을 꿈꾸고 있으면 지금 일상에서 부딪히는 일들에 좀더 관대해진다. 여행자가 굳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으니까. 여행자답게 가능하면 좀더 친절한 사람이 되려 애쓸 뿐이다. 어쩌면 이번 삶 전체가 다 스톱오버일지도 모르겠다. 그전, 그후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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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9-07-2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정곡입니다!ㅎㅎ

다락방 2019-07-21 12:49   좋아요 1 | URL
굳이 잘난척 하지 않는데 참 잘나셨더라고요. 하하하하하.

hnine 2019-07-2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으로 올리신 마지막 페이지는 시간절약을 위해서? ^^
인도에 다녀온 유일한 저희 집 식구인 제 아들 말에 의하면, 웬만한 환경에서 군소리하는 편이 아닌 녀석임에도, 인도는 정말 가보라고 권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하더군요. 단순히 청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면서요.
아직 문유석 판사님의 책을 못읽어본 저로서, 다락방님의 이 리뷰가 굉장히 읽어보고 싶게 만드네요. 그렇죠. 무슨 척 한다는 것, 어떻게 보이고 싶어하는 티가 난다는 것은 일단 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이지요. 뭐, 못봐줄 일도 아니지만요.

다락방 2019-07-22 07:44   좋아요 1 | URL
저 마지막 하나의 인용문을 두고 타자 치기가 너무 귀찮아지더라고요. 아아 더이상 치기 싫다..이래서 사진 찍어 올렸는데, 사진 찍어 올리는 것도 만만찮게 귀찮았어요. ㅎㅎ

인도가 추천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실망이었다, 라는 구절 때문에 찍은 건 아니고요, 그렇게 기대를 품고 갔는데 아니었다면서 ˝류시화씨, 싸울래요?˝ 한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 구절 때문에 인용했는데, 저 구절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앞 구절들이 필요해서.. ㅎㅎ


살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이웃으로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게 되고요. 그럴 때 ‘나는 ~ 하는 사람이다‘ 라고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 이라기 보다는 ‘남들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의로운 사람, 용감한 사람, 잘난 사람은 딱히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드러내지 않아도 그 행동으로 알게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재미있었어요, 나인님.

clavis 2019-07-2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같지 않아요.아아,그렇구나 했는걸요.락방님 저는 왜인지 이 글을 보다가 울고 말았어요. 언어의 한계때문에 저능아처럼 그냥 밥만 먹고 연습만 하는 것 같아요. 밤에도 우리말 유투브든,라디오를 켜놓고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이렇게 사람다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우리말이 참 그립고 좋습니다. 좋은 책,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늘 고마워요 락방님♡

다락방 2019-07-22 08:02   좋아요 1 | URL
으아아 멀리서 외롭지요, 클래비스님? 오랜 연습과 우리말을 듣기 위한 유튜브라니..
클래비스님, 말하고 쓰기도 중요한 것 같아요. 말할 수 없다면 쓰는 거라도 부지런히 해요. 매일매일 짧은 일기라도요. 여기에 못쓴다면 작은 노트에 써도 되고요. 제 경우에는 쓰기가 저를 참 많이 지탱하게 해주거든요.

지치지마요!

clavis 2019-07-2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길가에 거지들이 누워있는데, 오르간은 큰소리가 나는 악기니까, 선생님께 배운 대로 소리를 만들고 치면서도 나에겐 고국과 가족을 맞바꾼 이 피같은 시간들이 한량 놀음 같이 보여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겠지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락방님의 글에서 저자의 글을 접하고, 어제 내가 얼마나 고민하면서 소리를 줄였는지,또 소리를 키워야했는지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서 참 고마웠습니다. 늘 연습을 안하고 있을 때는 백퍼 아, 연습해야 하는데..로 마음 불편하게 사는 이 길로 접어들면서 오늘은 마음 편히 쉬려고 락방님네 놀러왔어요. 내일은 또 초긴장 속에 연습과 연주 준비를 해야하기에 늘 제 기분을 잘 맞춰줘야 해요. ㅠㅠ락방님 글 덕에 많이 울고 많이 웃을 수 있어서 늘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7-22 08:0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누군가로부터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제 글을 보면서 혹은 제 삶을 보면서 괜히 열등감 생기기도 할 거라는 생각도 해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니, 누군가의 존재 만으로도 안정감을 얻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또 우리가 생각하고 가야하는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해야할 일을 해야 하고요.

벌써 날이 바뀌었네요. 연습과 연주 준비 잘 하고, 기분도 잘 맞춰요, 클래비스님!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니 기분이 괜찮아요. 사무실 책상 위에 간식이 많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인가봐요. 클래비스님도 간식 먹으면서 해요!

비연 2019-07-2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정말 겸손한 말들이 즐비했으나 이 분은 잘난 분이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다락방 2019-07-22 11:18   좋아요 1 | URL
잘난 사람들은 티가 나는것 같아요, 비연님.... 아무리 따라하려고 해도 따라할 수 없는 본연의 잘남.....

비연 2019-07-22 11:21   좋아요 0 | URL
쩝 ㅠㅠㅜ

얼음장수 2019-07-2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저 대목이 기억나요. ‘예스터데이 간사이 사투리‘는 킥킥거리면서 봤거든요. 잘난척하지 않는 자의 미덕을 논하는 글에, 잘난착을 해버렸네요 ㅋㅋ

다락방 2019-07-22 14:15   좋아요 0 | URL
이런 잘난척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얼음장수님!
더운데 잘 지내고 계십니까?

유부만두 2019-07-22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문유석 판사의 예전 독서책을 읽었는데
심하게 자기자랑을 해서 밉상이었습니다.
ㅎㅎㅎ

같은 작가 다른 인상

다락방 2019-07-23 07:48   좋아요 0 | URL
독서책이 다른 게 또 있군요? 저는 이거 하나 뿐인줄 알았어요.
저는 최근에 제가 생각한 열등감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