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서해클래식 4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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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전의 힘은 현재적 유용성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며 통시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1516년에 출간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봉건 영주 시대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예고했다. 왕에게 복무하기 이전에 한 종교인이었던 모어는 인간의 불평등 문제와 사회 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전쟁과 살육, 가난과 기아, 범죄와 형벌에 대한 민중들의 모습은 비참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문제점에 대한 명쾌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 <유토피아>다.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누구나 꿈꾸는 나라……

  형벌의 목적은 악을 없애고 사람을 구제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범죄자들이 착하게 될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해악을 남은 생애 동안에 보상하도록,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 본문 39페이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범죄자들의 사형 제도에 대한 견해로 모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형벌의 목적은 보복이 아닐 것이다. 봉건적 형벌제도에 대한 모어의 생각은 이렇게 확제시된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으로 범죄와 형벌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유토피아’를 시작한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훈풍이 불고, 종교의 절대권위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항해술의 발달로 바다건너 미지의 세계로 그 영역을 확대 시키던 시대적 배경으로 ‘유토피아’는 탄생된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그가 경험했던 ‘가장 좋은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존이었던 모어의 친구 피터 힐러스가 등장하여 라파엘의 이야기를 같이 듣는다. 이것은 허구적인 내용이지만 소설로 보긴 어렵고 장르나 형식을 구분하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라파엘이 들려주는 그 나라는 시대를 넘어선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 국가에 가장 근접해있다고 해서 16세기 초에 그려진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의 한 형태에 대해 많은 논란을 가져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학적 관점이나 많은 학문적 이론을 적용해서 그 타당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모어의 의도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폐가 없으며,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동 생산을 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되며, 모든 사람이 노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 유토피아. 빈둥거리는 귀족과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여생을 보내는 하인이 없기 때문에 가난과 범죄가 없는 사회 유토피아.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의 노동으로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휴식과 수면, 강의를 통해 지적 쾌락을 추구하며 덕을 지켜나가는 나라 유토피아.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모순된 나라이면서 침략 전쟁을 부인하지만 용병을 이용하여 전쟁에 승리하는 등 갖가지 전쟁 전략을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유토피아. 전세계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국민들만을 위한 유토피아.

  플라톤의 <국가>의 영향을 받아 철인 통치를 지지한다. 현명한 사람을 뽑기 위한 비밀 투표 등 가장 이상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통치 제도이지만 공동 식사등 수도원에서나 볼 수 있는 전체주의적 발상도 곳곳에 드러난다. 이 책은 이렇게 완벽하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현대인들에게 제시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어가 추구했던 이상적 세계의 근본에는 모든 인간에 대한 평등과 참된 진리에 대한 사랑이 배어 있다. 유토피아인들은 “덕을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고 정의”하여 스토아학파의 견해와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쾌락을 최고 선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가깝다. 또한 “누구도 자신의 종교 때문에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오래된 규정” 중의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당대의 철학과 시대 가치를 반영하면서도 현재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모어는 그들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을 제시한다.

  우리 삶의 참다운 행복인 쾌락에 대해 정신적, 육체적 쾌락으로 나누고 육체적 쾌락은 다시 감각적 쾌락과 건강으로 분류한다. 유토피아의 진정한 가치도 쾌락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고통 받지 않는 육체, 즉 건강 자체를 대단히 커다란 쾌락으로 말하는 것이 새롭다.

  오늘날 번영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명히 말하건대, 나라(공공의 복지)라는 이름 아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의 음모 이외의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들은 부정한 수법으로 긁어모은 것들을 잃어버릴 염려 없이 간직할 모든 수단방법을 고안해내고, 그러고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여 가능한 한 싼값으로 그들의 수고와 노동을 사들일궁리를 합니다. 부자들이 나라(공공복지)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 그 나라 안에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 이런 수단방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면, 곧바로 그것들은 법이 됩니다. - 본문 176페이지

  사회와 역사는 진보를 거듭했으며 발전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이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16세기에 모어가 했던 이 말이 현재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경제 제도나 사회 체제의 변화와 발전이 모든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구가와 국민의 관계와 개인의 행복은 어떤 형태로 규정할 수 있을까?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인간 사회의 필연일지라도, 가난과 기아, 범죄와 형벌이 없고 전쟁 대신 평화만이 가득한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불가능할지도 꿈을 꿀 수는 있지 않을까?


200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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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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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맨 왼쪽 위부터 항상 ‘문지시인선’을 꽂아 놓는 버릇이 있다. 이사할 때마다 시집들의 위치는 변함없이 가장 윗자리를 내주는 셈이다. 1권 황동규의 <나는 바뀌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며칠 전에 도착한 301권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까지 시집들을 훑어보며 시간의 무게와 변화를 가늠해 본다. 얼마쯤 될까 세어보니 111권이 꽂혀 있으니 세권 중 한권은 사서 읽은 셈이다. 그 뒤에 기대 서있는 창비와 민음사, 세계사의 시집들이 내 청춘의 많은 부분들을 채우고 있다. 내 영혼의 팔할은 시집이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녀와 첫 데이트 약속 장소는 교보문고 시집 코너였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86권)” 그렇게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던 90년에 100권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가 출간되었다.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102권)>을 그녀에게 선물했고, 몇 년후 그녀는 내게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119권)>을 선물했다. 그리고 97년 봄, 책장에는 여러권의 같은 시집들이 나란히 꽂히는 것과 동시에 기념이라도 하듯 200권 <詩야 너 아니냐>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여 300권 <쨍한 사랑 노래>가 나왔다.

  “모든 사건은 밤에, 안개의 살갗처럼 움직인다. 너는 나의 미로다. …… 지금에 와서, 나는 너를 희망이었다고 되새긴다. (첫밤, 채호기, 밤의 공중전화(201) 중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시리즈 300권을 기념하여 출간된 <쨍한 사랑 노래>는 황동규의 시를 표제로 해서 201권 채호기의 시집부터 299권 이성미의 시집까지 한 편씩을 고른 선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100권, 200권 기념도 마찬 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깊다. 순수 참여 논쟁의 복판에서도 묵묵히 우리 현대시의 무게 중심을 흩뜨리지 않으며 시의 본령을 지켜온 것이 ‘문지 시인선’이다. 황동규, 오규원, 정현종, 황지우, 김광규, 기형도, 최승자, 김혜순, 장석남, 황인숙, 김준태, 김영태, 이성복, 나희덕,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인들을 만났고 그 시인들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삽십대 중반이 되었다.

  문학에 처음 눈뜨고 정호승, 이승훈, 김지하, 박노해, 정희성, 김용택, 신경림, 곽재구, 조태일, 양성우, 하종오, 임영조, 김남주, 함민복, 최승호, 김정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내 안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던 시절이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삶의 진정성에 대한 숱한 불면의 밤들을 함께 한 시인들이었다. 문지와 창비는 그렇게 정신의 두 다리처럼 한발 한발 나와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는 동지와 같다. 그렇게 나를 키운 시와 시인들은 ‘사랑’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둘은 모두 학생들에게 그 때 읽었던 시와 시인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집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 손때 묻은 책들이 아이들을 키울 것이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갈 듯 싶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 (뼈아픈 후회,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220) 중에서”가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청춘(224) 중에서)”에 낙서하는 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은 상상력의 종말을 뜻했다 (청춘, 박용하, 영혼의 북쪽(236) 중에서)”고 선언한 시인의 말이 부정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닻을 내린 정신, 그것은 한국이란 말처럼 욕되었다”는 지나칠 수 없는 현실들에 딴지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를 알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이 말에 소금인형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그녀에게서 몸을 빼다 (김윤배, 부론에서 길을 잃다(258)

  군더더기 없이 사랑에 대한 담백한 선언들과 감성의 떨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영원히 지속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열정이 시와 문학의 힘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275) 중에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도록 훈훈함이 세상에 가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로 삶이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시의 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무인도, 박주택, 카프가와 만나는 잠의 노래(287) 중에서”는 말을 깊이 새겨 둔다.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당도해 있다. 짧은 생에 대한 소망과 통찰은 모두 다른 형태로 실제 생활에 투영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환희와 고통, 행복과 절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 켜켜이 먼지 앉은 옛날 시집을 펼쳐보는 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다.


200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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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2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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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책에 관한 소설을 기대한다면 이 소설은 한 발 비껴 서있다. 책이 주는 의미와 역할들, 상상속의 공간에서 고스란히 작가의 숨결과 육성을 느끼고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측면에서 책들이 꿈꾸는 도시를 상상했다면 실망하게 된다. 다만 상상속의 동물과 부흐하임의 지하묘지 부흐링에서 펼쳐지는 환상과 모험의 어드벤처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상상력의 힘과 살아 숨쉬는 책들이 주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가족 동굴에 들어간 주인공 미텐메츠는 ‘오름’에 취하게 되고 부흐링 족에게 인정 받는다. 부흐링족은 한마디로 인생 자체가 책이다. 책을 읽으면 배가 불러지는 이 종족은 누가 뭐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듯싶다. 결국 책 사냥꾼들과 롱콩코마의 침략으로 미텐메츠는 우여곡절 끝에 그림자의 성에 들어가 그림자 제왕인 ‘호문콜로스’를 만나게 된다. 예정된 만남으로 그림자 제왕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미텐메츠가 모험을 시작하게 된 원고의 작가가 바로 그림자 제왕임을 알게 된다. 미텐메츠는 스마이크의 계략에 하르펜슈톡가 협조했고 부흐하임 전체가 스마이크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사정을 듣게 된다.

  지하묘지에서 스마이크 삼촌의 유언장을 발견하고 모든 진실을 파악하게 된 그림자 제왕과 미텐메츠는 키비처와 슈렉스의 도움으로 미로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고 묘지의 모든 책 사냥꾼들과 대결하게 된 순간 부흐링족의 도움으로 롱콩코마까지 죽이고 드디어 스마이크의 고서점까지 올라와 하르펜슈톡과 스마이크에게 복수한다. 주인공 공룡 디노사우루스는 부흐하임에서 오름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겪은 모험을 책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꿈꾸는 책들의 도시>이다.

  책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책처럼 책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살아 숨쉬는 책들이 등장하는 책은 없었다. 책에 눈이 달려 독자를 쳐다보고 여섯 개의 다리가 달려 있어 움직이기도 하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모든 상상이 실현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숨쉬는 현실의 벗어날 수 있는 상상의 빈 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 상상의 공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책에 대한 환상을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유아기 물활론(物活論)적 사고 방식은 우리에게 신선함과 순수한 동심을 전해준다. 처마 끝에서 땅바닥에 일렬로 불규칙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빗방울이 뛰어간다”고 외치는 꼬마들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파악하는 것은 상상력의 출발이 된다. 방안 가득 책꽂이의 책들이 나를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상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을까 싶다. 그 생각은 작가를 움직였고 소설이 되었다. ‘발터 뫼르스가 독자에게 붙이는 말’은 사족으로 느껴져 아쉽다. 다음 소설에 대한 독자의 견해를 묻는 내용과 이메일 주소가 책장을 덮기 직전, 모든 것이 현실속의 상상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림자 제왕과 공룡의 모험담으로 그치지 않고 책들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사건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한 편의 재밌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잠시 동안의 휴식과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배낭 속에 꽂혀 가기에 적당한 책이다. 별이 쏟아지는 밤 책장을 넘기다 잠들고 싶다면, 잠시 현실을 잊고 싶다면 <꿈꾸는 책들의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200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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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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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이 문장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며 암호를 풀기위한 키워드로 사용된다. 독특한 형식과 맛깔스런 내용의 소설 한편이 내게 왔다. 독일 작가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2>는 추리 소설이자 환타지 소설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삶에 대한 통찰이나 미처 돌아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재미가 ‘상상력’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과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럽다.

  우선 이 책은 주인공인 공룡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모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대부시인인 단첼로트로부터 상속받은 책속에 끼워진 열장의 원고를 읽으면서 그의 모험은 시작된다. 린트부름을 떠나 차모니아 서부 둘스가르트에서 동쪽에 위치한 부흐하임에 도착한 주인공은 그 원고의 작가를 찾아나섰다가 고서점가의 검은 실력자 스마이크의 덫에 걸려 지하묘지에 버려진다. 외눈박이 책벌레들인 부흐링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주인공이 가죽동굴에서 ‘오름’을 하기 직전까지의 내용이 1권의 내용이다.

  바야흐로 우주 여행을 시대를 맞이해서 인류는 이제 공간에 대한 상상력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하늘과 바다속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차츰 미지와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19세기에 쥘베른의 <지구속 여행>이 발표된 후 21세기가 되었지만 땅 속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여전히 상상력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부흐하임의 지하묘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물들과 끝없이 펼쳐진 서가들 그리고 그 서가에 꽂혀 살아숨쉬며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공룡 미텐메츠가 아니라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가공의 작가와 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부흐링족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책에 대한 애정은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희귀하고 소중한 책들을 얻기 위해 지하묘지에서 암투를 벌이는 전설적인 책 사냥꾼 레겐샤인과 악의 축(?) 롱콩코마의 역할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조연의 역할을 한다. 선과 악의 축으로 인물 유형이 나뉘는 한계는 모험 소설의 기본 유형으로 단순함의 재미가 시작된다. 어설픈 교훈과 현실과의 연계성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모험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이미 오래된 책들 속에 쓰여 있습니다.”

  무심히 내뱉는 작가의 이 말 한디가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또다른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우리는 거의 무한대로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도서관과 대형 서점에서 책에 대한 중압감에 기가 질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의 총아로 볼 수 있는 책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1차원적인 재미과 흥분, 지적 호기심과 깨달음도 물론 책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일까?

  여로형 구조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흥분과 기대, 알수 없는 원고 한편의 의미와 그 작가를 찾아 내는 과정속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상상속의 존재들과 공간들이 서사구조의 축이다. 주인공과 조력자, 악의 무리들과 해결과제가 뚜렷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쉽게 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끝을 보아야 손을 놓게 되는 부류의 책인 것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분량 때문인지 몰라도 2권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과 하드카바가 주는 부담감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풍스런 느낌과 켜켜이 먼지 앉은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책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와 표지는 일체감을 떨어뜨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2권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부흐링들의 ‘오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고 열장짜리 원고의 주인공과 의미를 밝혀내야하며 행방이 묘연한 레겐샤인과 그림자 제왕도 만나야한다. 그리고 지하묘지에서 부흐하임의 지상이나 린트부름으로 주인공이 살아돌아 올 수 있을지는 뻔하면서도 궁금하다. 기대감을 저버릴 수 없고 방법을 알기 위해 2권을 Т?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 찬바람이 불 때까지 현실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지? 본격적으로 소설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20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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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299
이성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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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부리를 톡톡 차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답
  자꾸 묻는다 - <전문>

 이성미의 시들은 절제와 이미지의 변형에 대한 탐구로 요약할 수 있다.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정제된 언어와 변형된 이미지들이 조화를 이룬다. 표제 시인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는 한 때 유행하던 잠언식 아포리즘이 아니다. 일본의 하이쿠는 형식이 내용을 제약한다. 소네트나 시조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정형성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 한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름의 미학을 가진다. 그것들은 일종의 기성품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변형의 미학이 없기 때문이다. ‘발부리로 톡톡 차’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길지 않은 진술 속에 담아 낸 시인의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하다.

  시에 대한 논란과 애증은 독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고 오래된 문제다. 즉물적인 태도로 시를 대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시가 싫다. 불편하고 어색하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것이다. 무언가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특히 이성미의 시처럼 하나의 대상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을 비틀고 변형시킨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표면적인 언술만으로 시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쉽지만 어렵다. 그렇다고 유행가 가사의 행 배열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바리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나야 할 그는 오지 않았다
  타르 같은 애정을 내게 주던
  여자는 지칠 줄을 몰랐다.

  식물보다 식물을 닮은 단어를 사랑했고
  요리법과 안전 지침은
  아무리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 ‘청춘’중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사소함으로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고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시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그것은 시의 본령이 아름다움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만나 변증법적 결합을 이루듯 사물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안에서 재가공 되어 하나의 주관적 객체로 남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시인이 말하는 사물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끼리끼리 부대낄 때 즐겁다.

  다만 주관에 매몰되어 언어 유희로 끝나버리는 겨우를 많이 본다. 그것에 대한 기준과 판단, 수용과 배제는 물론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객관적 이미지의 주관적 변용을 본다. 그녀의 첫시집을 주목한다.

  벽과 못

  녹슬고 굽어 바닥에 뒹굴기 전까지

  그림 하나 걸릴 수 있도록
  벽에 꼭 박혀 있어야겠다 - <전문>



200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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