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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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인간에 탐구와 진지한 관심이 문학의 출발이다. 그 개인이 사회와 인류로 확장된다. 문학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놓여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유독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 우리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다양한 이유들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와 상황, 작가의 특별한 죽음, 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등등.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11월 25일, <천인오쇠>의 마지막 원고를 신조사에 넘겨 준 후, ‘다테노카이’ 대원들과 육상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난입,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고는, 동부 방면 총감실에서 할복자살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심각해지는 상황이 지금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길고 긴 세월속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일본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넘어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의 죽음이 주는 의미와 일본 문학에 끼친 영향들에 대해 다른 책을 통해 읽다가 문득 그의 <금각사>를 읽었다. 1956년에 완성된 일본 소설을 평가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없다. 소설의 완성도에 대한 의견이나 우리 문학과의 비교도 의미 있겠지만 호기심은 이 소설을 쓴 작가에 집중되어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와 그의 친구 가시와기는 작가에게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분신처럼 보인다. 미시마 유키오의 성장배경과 성격이 반영되어 나타난 부분이 많다. 우리 소설에서 김동인 보여주였던 유미주의 계열의 소설로 볼 수 있는 이 소설의 미의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평론가들에게 변주되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인식가’인 가시와기와 ‘행동가’인 미조구치 사이의 관계다. 애증 관계에 있는 두 주인공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로 갖지 못한 부분에 대한 열등감은 정신병적 이상 증상으로 나타나 결국 ‘금각사’를 불태우는 극단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사건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둔감한 사람들은 피가 흐르지 않으면 허둥대지 않는다. 하지만, 피가 흘렀을 때에는 비극은 끝나 버린 다음인 것이다. - P. 22

잊혀진 ‘기억’은 일종의 역설이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먼 옛날의 사건들이 존재한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고 삶을 결정하며 현실을 조종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있어 우이코의 죽음은 그의 생애 전반을 지배한다. 소설 초반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버린 우이코는 ‘금각’에 투영되어 환영처럼 나타난다. 주인공에게 있어 우이코가 금각이고 금각이 곧 우이코가 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적인 모습들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에 반응하는 방식들에 대해 되볼아보게 하기도 한다. 엉뚱한 방식의 소설읽기는 자유롭게 상상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 P. 210

희망을 추악하다고 말하는 미시마 유키오는 한 인간에게 있어 부질없는 희망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이 작가의식이든 주인공의 성격에 대한 반영이든 나는 이 소설에서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풀처럼 끈끈한 희망의 지겨움을 읽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의미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얼마나 큰 욕망 속에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현실이 서글프다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더욱 명료해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희망이 용도 폐기되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게 무의미한 단어를 이 소설에서는 애써 외면한다.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나머지는 광기나 죽음이지.”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절대로 인식이 아니야.”라고 얼떨결에 나는, 고백에 가까운 위험을 무릅쓰고 반박하였다.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행위야. 그것밖에 없어.” - P. 226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행위’라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행위 이전에 용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을 통해 용기가 생기가 그것은 현실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 실천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미조구치는 금각사에 대한 ‘방화’를 행동으로 옮겼다. 어떤 행동이든 그것은 우리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없다. 다만 현실을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니면 영원히 현실에서 격리된다. 전후 일본 소설의 정점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재미없는 소설이지만 의미있다.


06112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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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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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친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진은영,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중에서 -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그래서 적어도 도달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혹은 누군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 이루어지길……사람들은 왜 내겐 들을 수 있는 귀만을 허락했냐고 신에게 한바탕 퍼붓는 살리에르의 한탄과 비애를 전하지만, 사실 얼마나 배부른 소린가? 모차르트와 동시대인이라는 거, 그거 축복 아닐까?” 하고 시비거는 시인의 후기를 읽으며 별 것도 아닌 것들에 감사하고 객관적 시각에선 하찮은 일들에 목숨거는 우리들, 아니 나의 모습에 또한번 고개를 튼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힘이 남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비가 내”릴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 살지 않을 주소 불명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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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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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존재하는 형식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은 삶,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동시에, 문학은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는 시간의 신기루 위에서 홀로 나부끼는 깃발이다.”

작가의 말에서 방현석은 자신의 문학관을 간략하게 피력하고 있다. 40대 중반의 작가가 등단한지 15년이 지나 우리들의 존재형식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는 조심성을 내비치는 것은 지나친 겸손이라는 생각과 함께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도 든다.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네 편의 중단편을 묶어놓았다. <존재의 형식>, <랍스터를 먹는 시간>, <겨우살이>, <겨울미포만>이 그것이다. 존재의 형식과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겨우살이는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주인공의 시선을 빌었고 겨울미포만은 노동운동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미국의 부시정권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에 바쁘지만 국제사회의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라는 느낌이다.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뒤를 캐고 다닐만큼 미국은 모든 반대세력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현재 이라크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군인들은 이라크 재건과 평화유지를 위해 파병되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겨우 베트남 종전 30년이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금붕어 수준일 뿐이다. 지나간 과거와 역사에서 교훈과 반성을 얻지 못하는 미국의 더러운 야망을 손가락질 할 뿐. 미국의 부름을 받고 대한민국 군인은 이라크 침략 전쟁에 동참하게 된 현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네 편의 소설 모두 후일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존재의 형식>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서 활약했던 영화감독의 이야기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전력을 지닌 주인공의 이야기가 병치되어 있다. 어느 시대를 이야기할 때 그것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소설 속에서 그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서로가 가진 상처의 깊이와 아픔이 주는 현재적 의미를 되돌아 볼 뿐이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그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따이한(한국군)의 만행 때문에 몰살당한 한 마을을 찾아가는 주인공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영웅적 전사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 마을의 또다른 생존자 노인을 통해 아무 상관없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쥐여준 총을 잡고 싸우다 죽어간 따이한이 더 불쌍하다는 회상을 들려준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베트남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략전쟁은 미래의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고통받는 이라크 국민들의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겨우살이>는 전교조 해직 교사였던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 사회를 본다. 학교의 규정 때문에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한 가장 반장스러운 반장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인공의 둘째누나는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으마 가해자는 4만원짜리 교통범칙금 딱지 한 장을 떼고 돌아가 찾아오지 않는다. <겨울 미포만>은 8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의 현장 변화와 조직원들의 이반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포조선소 사건이후 와해되는 노동 운동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노동귀족’이라는 이름의 고임금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속물적 자본주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의 구석구석 어디 아프지 않은 곳이 있으랴. 문학의 본질과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보다도 오히려 이런 한권 한권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그 해답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방현석씨의 다음 소설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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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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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66년생이니까 올해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94년 가을이었다. 둥글고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채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산속에서)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따뜻하고 순수하며 생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었다. 젊고 생동감 넘치는 20대였기 때문일까? 진명여고 국어교사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두번째로 만난것은 2001년 봄이었다.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도 그녀처럼 국어교사 되어 있었다. 네번째 시집으로 만난 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었다. 시가 탄력을 잃었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에 깊이가 더해졌다. 물론 시대도 변했다.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유성호는 '내가 아는 희덕은 그만큼 감성적일 때보다는 논리적일 때, 그리고 자기 표현적일 때보다는 자기 반성적일 때 더 투명하고 깊은 사람이다'라고 서평에 적고 있다. 논리적이고 반성적인 감각이 그녀의 진정한 미덕일까?

그리고 그녀의 다섯번째 시집으로 그녀를 세번째 만나다. '나희덕 시 세계의 진정한 장점은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의 현실성에 기초한 간명하고도 절제된 언어적 형식에 있는 듯 싶다'(김진수)라고 시집 서평에 적고 있다. 그리고 창비에서 문지로 출판사가 바뀌었고 약력에 보니 조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의 외형적 조건들이 인식의 틀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조건들, 예컨데 시인의 나이와 직장, 가정 생활의 변화 등이 시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소설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화된 인식과 논리적 힘이 결여된 시를 읽을 사람도 없겠지만 관념 속에 허우적대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이성의 영역으로 함몰될 위험을 배제할 수도 없다. 순수시의 죽음을 선포할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오랫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을 나는 씁쓸하게 바라본다.

시의 역할과 소명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감각적일 지는 모르나 현실성에 기초했다고 보기엔 그 의미와 영역이 너무나 협소하다. 어쩌면 사적 경험의 객관화가 시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논리의 모순보다도 더 위험한 감동의 위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를 보며 그래도 그녀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사라진 손바닥'이 '꽃조차 숨은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며, 땅 속에 숨은 꽃조차 꽃은 아름답다는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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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좋은일이 나에게도 좋은일입니다 -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밝혀주는 15가지 이야기
안철수, 최재천, 이윤기, 강만길 외 12인 지음 / 고즈윈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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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共生, symbiosis]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서로 다른 두 생물이 특별한 해(害)를 주고받지 않는 상태에서 접촉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생활 양식."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상리 공생과 편리 공생으로 나눌 수 있다. 개미와 진딧물, 악어와 악어새, 한줄말미잘과 얼룩흰동가리, 바다거북과 따개비 등이 이러한 공생 관계에 있다. 서로 이익을 주고 받는 상리 공생이든 한쪽에게만 이익이 있는 편리 공생이든 이들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공생이라는 개념조차 모르고 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이러한 공생 관계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들은 서로 최소한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들 관계의 전제가 된다. 이 관계가 깨지면 상대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생존의 몸부림인 '기생'관계가 되는 것이다.
 
  왜 인간은 공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유행어처럼 신년벽두에 정치인들이 던지는 '상생(相生)'은 공생의 다른 이름이다. 매일 점보기 한대 탑승 인원인 500여명이 이 지구상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 어린이와 여성등 노약자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부시는 여전히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깡패가 되어 재선에 성공했다. 취임식 축하연 비용으로 지진해일 복구 비용으로 기부하기로 한 돈보다 많이 썼다. 신산스런 근대사를 겪으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지금도 이라크 파병에 대통령까지 나서고 있다. 지구상의 이 무수한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해답이 있을까?
 
  물론 혹자는 종교에서 구원과 안식을 얻기도 하고 혹자는 실천과 행동으로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지구인,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의식과 생활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나도 그렇다. 다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생'에 대한 의미와 숨가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을 돌이켜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헐떡이며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흰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이마의 땀을 닦고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와 우리 그리고 모두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되돌이켜 본다.
 
  벤처 CEO 안철수, 소설가 이윤기, 환경운동가 최열, 생태학자 최재천, 진보주의 지성 홍세화, 역사학자 강만길등 15명의 전문가가 상생과 공존의 지혜를 '공생'이라는 화두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제목과 책의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 본문에 지나치게 많은 사진과 설명도 거슬리고 특히 비싼(?) 종이는 심하게 짜증난다. 소박하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책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으나 책값 상승요인을 제작비에서 찾으려는 느낌이다. 물질로서의 책이 주는 느낌과 감동도 내겐 중요하기 때문에 내용이 주는 감동을 다소 반감 시켰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뷔페와 같은 풍성함으로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현실속의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가며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소중한 책이다.

   인간의 마음처럼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도 흔치 않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이것이 '방심(放心)'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를 맹자는 '놓친 마음을 되찾는 것(求放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마음이다.마음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마음을 먹든, 무슨 생각을 하든 손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이처럼 방일하게 되면 언젠가는 행동으로 나오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사회의 조화 역시 어긋나게 된다. - 본문중에서

 

 200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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