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여기 머문다 -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전경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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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수상하는 문학상은 단 한 명에게 수상을 안겨주어야 한다. 당연한 규칙이지만 많은 것을 함의한다. 당해연도에 발표된 소설들의 편차와 무관하게 습관적으로 누구에겐가는 상을 안겨야 한다. 이것이 문학상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매년 수상하는 작품들이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매력적이고 뛰어난 작품이 나온 해도 있고, 기대 이하의 작품이 수상하기도 한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은 없습니다’라고 발표할 만한 용기(?)는 없을까? 문학상의 권위를 떠나 수상작이 출판사에 안겨줄 경제적 이익과 수상자가 안게 될 명예를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른 한 번째 이상 문학상,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가 나왔다. 책꽂이 한 켠에 스물 한 권째가 꽂혔다. 이상 문학상과 함께 세월이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은 문학상에 권위를 부여하고 특별한 의미를 갖게한다. 하지만 매년 작품집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감동과 감회는 부침이 심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별 감동도 큰 울림도 없었다.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상처는 일상적이다. 매일 벌어지는 일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일이다. 비극적인 상황 인식이지만 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변이될 뿐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감정의 결들은 미세한 떨림과 섬세한 울림으로 표현된다. 섹스에 탐닉하고 상대를 속박하는 결혼관계가 결국 파경을 몰고 오고 머나먼 이국에서 섹스없는 백색결혼을 고민하던 주인공에게 빛의 환영이 보인다. 그녀에게 사랑과 결혼은 무엇인가를 점검해야한다. 아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인해 보아야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지닌 내용을 너머선 문학적 성과에 있다. 수상 선정 이유에서 여러 명의 심사위원들이 밝히고 있지만, 그것이 이해되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과 이해는 거리가 멀다. 엘리트 소설과 대중 소설의 벽을 허물었다는 이태동의 평가보다는 허무과 열기를 내뿜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온당하다. 보는 시각에 따라 혹은 태도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만장일치로 한 작품을 선정하면 핵복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독자의 평가도 달라진다. 어쨌든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 미흡하는 쪽에 과감하게 한 표 던진다.

 내용과 관계없지만 우수상 수상작의 순서를 등단순서로 한 것은 엽기다. 이전처럼 가나다순이 합리적이다. 군대도 아니고 문단 짬밥 순으로 우수상 수상작 순서를 정하다니 어이가 없다. 문단 권력은 이렇게 작은 곳에서 싹이 트고 내면화된다. 그들만의 서열과 위계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이 이렇게 스치듯 비춰진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

 한창훈의 ‘아버지와 아들’이 내뿜는 사투리의 힘. 입말이 보여주는 구수함과 부자 간의 대화가 생활의 일부로 녹아들어 감칠맛이 난다. 김연수의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발상이 기발하며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소도시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주인공을 오히려 에피소드 형식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적절한 배치가 흥미롭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젊은 작가의 발랄함이 그대로 묻어나면서도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백이 날카롭고 진지하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했다는 권여선의 ‘약콩이 끓는 동안’이나 편혜영의 ‘첫번째 기념일’은 밋밋하게 다가왔고, 천운영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감각에 의존하고 있어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유일하게 매년 구입하는 책에 대한 느낌도 생각도 매년 달라진다.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소설과 문학상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작가의 문학적 성과와 미래에 대한 격려가 내포된 것이 문학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쏟아지는, 혹은 명멸하는 숱한 단편들 중에서 매년 옥석을 가리는 작업의 힘겨움과 독자들과의 약속 사이에서 분명한 자세를 보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지난 해의 문학적 성과를 기억하는 책으로서 의미를 가진 책이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엔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그냥 읽고 쓴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입맛과 손맛이 씁쓸한 것은 나 혼자 느끼는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070209-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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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2-09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년째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계시군요. 저도 78년 것을 산 적이 있는데(물론 제가 그때 산 건 아니고 고등학교 때 예전 것을 산 것 같습니다. 저도 한 때 1년에 한권이라도 소설을 읽자는 생각에서 매년 살 생각을 했었는데...작년 것 한번 훑어보고 사볼 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

sceptic 2007-02-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9년부터 매년 구입했고 그 이전 것이 몇 권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번호가 빠지는 게 싫어서 그냥 사게 되네요...ㅋ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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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평생을 같은 일에 몰두해도 행복한 일이 있다면 좋겠다. 한 번도 고개 돌리지 않고 푹 파묻혀 뒤돌아보지 않고 한 우물만 파보아도 좋겠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두 갈래 길에서 항상 선택의 고민과 갈등에 망설이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19년 만에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시의 길을 걸으며 내쳐 달려오지 않았어도, 먼 길을 돌아 왔어도 시집 한 권 펴내는 일이 어려울 수 있지만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 외적인 이야기가 호기심보다 시에 담긴 마음들이 눅눅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비맞지 않고도 장마철에 습기를 머금은 장판처럼 쭈글쭈글한 마음의 켜들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시간은 흘러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바라볼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바람처럼 흘러가는 마음 한 구석 어디로 보낼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리로 흘러가는지 굳이 묻지 않고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은 아닐는지.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시들은 아름답게 독자의 마음을 적신다. 슬픔과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의 본령에 충실하다. 빠른 것 보다 느린 것에, 큰 것 보다 작은 것에 마음이 쓰이는 김사인의 시들은 읽는 동안 현실 속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죽음과 사랑, 일상과 기억으로 점철된 시의 편린들은 독자를 우울하게 한다. 이수익의 ‘우울한 샹송’과는 또 다른 의미의 애잔함이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 속에 숨 쉬고 있는 텅 빈 바다 하나씩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정현종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시집의 대표작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만히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 표현들이 잔잔하게 끓어오른다. 애매하고 공허한 구절들보다 스치고 지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반 박자 느린 템포. 이 시집은 그렇게 사람들을 가만히 있게 만든다. 가만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게 한다.


07020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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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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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은어처럼 윤대녕의 소설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새롭다. 최근작 <제비를 기르다>에 이어 초기 작품집 <은어낚시통신>을 읽는 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보았다. 물론 소설가에게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서 그 흐름에 맞춰 소설이 국수 가락처럼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온 강물처럼 한 작가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윤대녕의 ‘은어’을 읽다가 ‘음력 삼월 삼일에 강남에서 왔다가 구월 구일에 돌아간다죠?’라는 구절을 보고 ‘제비를 기르다’를 떠올렸다. 윤대녕의 작품 세계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돌고 돌아 찾아온 곳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생의 비밀들을 찾아내지 않을까 싶다.

 은어와 제비는 돌아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의 초기작들은 ‘은어낚시통신’에서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존재의 시원’을 찾아 떠나는 머나먼 여정으로 보인다. 이후 펼쳐지는 다양한 시도들과 소설들이 보여주었던 작업들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거나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말해질 수 없는 순간, 혹은 찰나의 감정들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 순간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말해질 수 없는 부분들을 부단히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이후 사회적 관점이나 자본에 대한 치밀한 세부에 접근하기 힘겨웠던 90년대의 소설은 사소설에 가까운 흐름들을 보여왔다.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윤대녕의 소설은 사회적인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자칫 감정의 과잉 토로나 시대의 유행에 민감했던 소재들의 끼워넣기가 부작용으로 드러날 수 있으나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흐름은 무난하게 비껴가고 있다.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린다. 점치는 여자의 이력과 점집을 찾아가는 세 명의 젊은이(?)들의 모습이 90년대 초반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서 사회로의 확장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모든 균형감각과 폭넓은 주제와 시야를 한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특징없는 백화점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윤대녕은 이제 반환점을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은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문체와 행간에 숨어있는 모호한 환상들은 작가 특유의 개성이 된다. 윤대녕스러운 이야기 전개와 어법들이 주는 매력은 언제나 은근하다. 뜨겁게 달아오르거나 열광할 수 없는 목소리지만 쉽게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은어낚시통신,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카메라 옵스큐라’ 등에서 보여주는 현실과 환각 사이의 거리감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은어, 국화옆에서’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를 보여준다. 엉뚱하게도 철저하게 자본의 힘과 논리 현실 사이의 감시망이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을 나는 인상깊게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그의 소설들을 현실과의 거리감이라고 보는 것은 망원경으로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보여지는 현실과 인물의 내면 풍경은 생활과 거리가 멀다.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광고 카피처럼 그의 소설에서 나는 생활의 냄새를 맡기 어렵다. 아쉬움으로 보아야 하나 작가의 특징이자 매력 혹은 장점으로 보아야 하나?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다.

 처음과 현재를 확인하고 거는 기대는 더욱 크다. 내가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에 대해 개인적으로 갖는 관심은 물론 ‘제비’에서 비롯됐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미래는 진행될 것이고 윤대녕의 작품들은 더욱 흥미롭게 전개될 것이라 믿는다. 맥없이 주저앉아 그대로 쭉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어떤 ‘느낌’ 때문이다.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지만, 벌써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버일 수 있겠지만 어쩐지 다음이 더 기대된다.


0702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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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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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20년만에 사랑니를 또 하나 뺐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였으니 그 고통과 통증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또 뽑을 용기를 냈다. 인간의 기억은 그만큼 간사하다. 지나간 시간들을 지워버리는 화학물질을 분비하지 못하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은 현재이다가 과거였다가 미래일 것이다. 그 오래된 미래 속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비루한 삶이다. 날카롭게 자른 생의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어쩌자는 것일까? 소설은 보여주기만 할 뿐 답은 없다. 미처 바라보지 못한 부분들과 구석구석을 헤집어 보여주는 소설은 흥미롭다. 늘 바라보는 대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혹은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새롭다. 그렇다면 윤대녕의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물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다. 보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져지지 않으니 느낄 수 없고 보이지 않으니 인식될 수도 없다. 그런데 뭔가 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내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이다. 정지화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질 때 생기는 파문.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긴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켜온 그의 무늬와 빛깔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새로움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 소설집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길어올린다. 소설이 되지 않을 것들을 소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편 ‘못구멍’은 서사 구조가 뻔하다.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적어 놓은 몇 줄의 글귀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랑의 의미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반전의 효과는 미미하다. 이런 구절들을 살펴보자.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P. 227 ‘못구멍’중에서 

남녀가 웬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관계에 속도가 생기게 마련이다. 사소한 절차는 서로 비껴가는 일종의 지혜를 터득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좀 더 담백해진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 P. 237 ‘못구멍’중에서

 설혹 사과를 하더라도 두고두고 잊어버려지지 않는 일이라는 게 있다. - P. 246 ‘못구멍’중에서

  책,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주관을 개입시킨다. 내가 살아온 경험과 내 정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본다. 아직도 소설에 줄을 그어가며 읽느냐고? 그래, 그렇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렇게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전달하는 방식의 새로움이든 문체의 특징이든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큰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결국 소설은 인생에 대해 그저 한 번쯤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아직도 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너무 진부해서 다루기 곤란할 것 같지만 이 문제를 빼고 나면 문학은 개점 휴업 선언을 해야한다. ‘연’과 ‘못구멍’, ‘마루 밑 이야기’는 사랑에, ‘낙타주머니’와 ‘편백나무숲 쪽으로’, ‘고래등’은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비를 기르다’와 ‘탱자’는 두 가지가 섞여있다. 거칠게 나누었지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내용이 아니라 소리와 빛깔에 주목해야하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행간에 숨은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무슨 수학책이나 이론서적도 아닌데 숨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는 없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안 느끼면 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작년 봄 강화도에 갔을 때 가능포들에 몰려와 있던 제비떼를 본 순간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문희는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날부터 하늘에서 길을 잃은 철새처럼 방황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 P. 70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따지고 보면 사랑한다는 말처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말도 없잖아요. 그 말은 상대의 모든 걸 원한다는 뜻이니까요. 사실 모든 건 안되죠. - P.81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문희에게 다가왔던 생의 한 순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설명하는 작가의 목소리와 문희가 직접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숱한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돌아보는 인생은 어떨까? 작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갖는 기대와 희망의 대부분은 알고 보면 타인에게 애써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를 객관적인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 186 ‘고래등’중에서

 삶은 뜻하지 않은 각도로 사람을 바꿔놓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계기로 작용해 생의 전모를 바꿔놓는 수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이자 저마다 이면에 감춰진 속박이자 굴레이기도 하다. - P. 187 ‘고래등’중에서

  결국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돈에 목숨 걸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단순하게 인생을 정리하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삶에는 여자의 내부처럼 함부로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열어보게 돼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데 열지 말 것을 열게 되면 대개 뜻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다. - P. 212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이 곧 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몸과 마음은 자웅동체로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 P. 216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이 가난했으므로 피워야만 했다. - P. 217 ‘낙타 주머니’중에서

 열어보지 말아햐 할 판도라의 상자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공감한다. 작가는 ‘낙타주머니’를 통해 생의 비애 혹은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들 생의 굴레일 뿐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생의 다양한 부분들을 헤집고 들여다 보고 때로는 우울과 희망을 버무려 놓아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생이라면.

 뚜렷한 기억 속에 정확한 연도와 날짜와 시간을 적는 방법은 독자들에게 과거를 확인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생을 증거하는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는 이야기 방식과 캐릭터와 맞지 않는 대화들은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 상황에 맞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뱉어내는 앵무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허공에 발딛고 서 있는 듯한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특별한 직업과 생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작가의 많은 소설 속에서 보여 주었듯이 불친절하게 던져주는 희망과 삶에 대한 인식은 찰나적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사회적인 관심이나 거시적인 담론들을 다루고 싶지 않을 리 없겠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주제로 내세워 작가의 대표작이나 특별한 작업에 매달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써야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작가의 미래를 짐작하기 보다는 기다리며 즐기는 것이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070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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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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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에 출판되는 책들 중에 옥석을 가려내는 일은 정말 힘들다.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만 누구에겐가 책을 추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불특정 다수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좋은 책들을 여기저기서 추천한다.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일이지만 잘 선별해서 나중에 후회할만한 책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선택한 책 중의 하나가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이다.

김용석이나 김용규나 대중에게 익숙한 철학자들의 책은 쉽고 편안하다. 어렵게 접근하지 않고 그야말로 가벼운 읽을거리 이상의 의미를 던져준다. 다만 이렇게 누워서 떡을 먹다보면 체하기 쉽다는 반성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13편의 고전 문학을 거론한다. 파우스트, 데미안, 어린왕자, 오셀로, 변신, 구토, 고도를 기다리며, 페스트, 유토피아, 당신들의 천국, 멋진 신세계, 1984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것이다.

특별한 기준도 이유도 없다. 저자가 읽어온 문학 작품에 대한 나름의 견해와 분석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들의 색깔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로 독자를 주눅들게 아니다. 영화나 음악 이야기가 튀어나오기도 하도 주관적인 감상으로 흐르기도 하며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잡탕찌게처럼 끓고 있지만 맛은 특별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막힌 해설과 맛깔스런 양념이 더해져도 그 작품을 읽는것만 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은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음미하고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 다른 사람의 책읽기를 들여다 보는 일도 즐거울 수 있고 때때로 그 과정과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도 즐거운 일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책들을 통해 읽지 않은 고전을 이해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책들이 겪는 본의 아닌 부작용이다. 재미와 상관없이 교양과 다른 목적으로 읽어내기에도 충분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이유가 다양한 만큼 읽는 목적에 따라 같은 책이 달리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지만.

안 그래도 바쁜 철학이 카페에서 문학을 이야기할 때 귀 기울여 들을만한 사람이 있을까? 아니 어쩌면 철학은 한가하다. 카페에서 문학 얘기나하고 예술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것이 철학 본연의 임무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을 지혜를 전해주고 새롭게 생각하게 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철학은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이론과 개념 속에서 헤매는 철학을 가깝게 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서는 직접적인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든 말이다. 철학의 목적과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의 문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토막난 단상처럼 보이지만 깊이와 통찰력을 두루 갖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문학도 예술도 철학도 한 동네 사람처럼 정겨워 보인다. 결국 이들의 공통점은 당연하게도 인간과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둥이만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이나 목적도 생각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이나 삶이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한가하게 카페에 앉아 철학이나 문학을 논할 시간이 없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우울한 메시지가 아니길 바란다.

이 책은 유한 계층의 담소용으로 이해되기보다 색다른 방식으로 문학 읽기가 타당하다. 문학은 사람이 중심이 된다. 삶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당연하다. 둘이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든 잘 들어보면 들을만한 이야기가 나올법하다. 다만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과 방법은 저자의 몫이고 독자들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판단한다.

추천하긴 어렵지만 정확하게 중간등급으로 어정쩡한 자세로 한번쯤 읽어보세요라고 권할만한 커피 한 잔 같은 책이다. 커피는 취향에 따라 다르게 마시면 그 뿐이다. 커피 마시면서 특별이 할 일이 없는 분들게 추천한다.


07011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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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지기 2007-01-3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한 번쯤 읽어보려고 했던 책이에요^^ 솔직한 리뷰 덕분에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당~ㅎㅎ

sceptic 2007-01-3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