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299
이성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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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부리를 톡톡 차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답
  자꾸 묻는다 - <전문>

 이성미의 시들은 절제와 이미지의 변형에 대한 탐구로 요약할 수 있다.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정제된 언어와 변형된 이미지들이 조화를 이룬다. 표제 시인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는 한 때 유행하던 잠언식 아포리즘이 아니다. 일본의 하이쿠는 형식이 내용을 제약한다. 소네트나 시조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정형성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 한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름의 미학을 가진다. 그것들은 일종의 기성품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변형의 미학이 없기 때문이다. ‘발부리로 톡톡 차’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길지 않은 진술 속에 담아 낸 시인의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하다.

  시에 대한 논란과 애증은 독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고 오래된 문제다. 즉물적인 태도로 시를 대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시가 싫다. 불편하고 어색하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것이다. 무언가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특히 이성미의 시처럼 하나의 대상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을 비틀고 변형시킨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표면적인 언술만으로 시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쉽지만 어렵다. 그렇다고 유행가 가사의 행 배열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바리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나야 할 그는 오지 않았다
  타르 같은 애정을 내게 주던
  여자는 지칠 줄을 몰랐다.

  식물보다 식물을 닮은 단어를 사랑했고
  요리법과 안전 지침은
  아무리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 ‘청춘’중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사소함으로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고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시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그것은 시의 본령이 아름다움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만나 변증법적 결합을 이루듯 사물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안에서 재가공 되어 하나의 주관적 객체로 남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시인이 말하는 사물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끼리끼리 부대낄 때 즐겁다.

  다만 주관에 매몰되어 언어 유희로 끝나버리는 겨우를 많이 본다. 그것에 대한 기준과 판단, 수용과 배제는 물론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객관적 이미지의 주관적 변용을 본다. 그녀의 첫시집을 주목한다.

  벽과 못

  녹슬고 굽어 바닥에 뒹굴기 전까지

  그림 하나 걸릴 수 있도록
  벽에 꼭 박혀 있어야겠다 - <전문>



200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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