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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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릴케 <두이노의 비가>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는 글에서 제목을 빌려왔다는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그의 소설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의 아름다움과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미적 쾌감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고 통칭되는 것들에 내재한 감각적 흥분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본능에 가까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인생에 적용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늘 안타깝게 수런거린다. 창밖의 빗소리처럼 들릴듯 말듯 속삭이는 생의 이면들에 대해 하늘의 별처럼 명료한 목표와 동경이 없어도 우리는 걷는다. 그 비루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시간의 누적으로 쌓여온 단편들을 묶어내는 일이 소설가에게 쉼표와 같다면 독자들에게는 시대와 세월의 나이테를 들여다 보는 일과 같다. 은희경의 소설은 아름다움으로 빛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낯설고 허무한 생의 간극들을 확대경처럼 보여줄 뿐이다.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지 않으면서 긍정과 희망의 웃음을 함부로 흘리지도 않는다.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한 권의 소설집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볼 수는 없다. 시처럼 소설도 결국 독자들마다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고 마음의 결마다 묻어나는 향기가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단편 ‘고독의 발견’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익숙한 목소리를 낸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곁에서 나만 모르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나는 언제부터 이들 사이에서 제외되어 있었을까. -  P. 63

  누구나 하고 싶은 말들을 작가가 대신 토해낼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울컥했던 마음들이 정화되거나 확인되지 않았던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은희경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의 빈 곳을 보여준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목소리는 높지 않으나 강건하다. 의심을 찬양하거나 고독을 발견하는 일은 일상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 ‘의심’과 ‘고독’을 즐길 만큼 미학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 생활인과 소설가는 그만큼의 간격을 벌리고 서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몸이 계급인 현대 사회에서 다이어트와 기아飢餓는 공존한다. 지구 한 구석에서는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한 명씩 굶주려 죽어가지만 또 다른 현생 인류는 몸에서 살을 제거하기 위해 가히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단지 아름다움을 위해 목숨 걸고 살을 빼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주인공의 행위도 결국에는 현대인의 모호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결국 나를 멸시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멸시할 수는 없으므로.

  날씨와 생활은 은희경의 소설과 함께 도착한 오디오북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이다. B라는 소녀의 엉뚱한 상상을 시작으로 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우리들 삶이 보여주는 부조리에 관한 보고서이다. 차안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은희경의 소설은 라디오의 단막극처럼 건조하게 들렸다. 처음 접해보는 오디오북이 내게는 모래바람처럼 귀가에 맴돌았고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만 울리다 돌아 나가버렸다. 나는 듣는 체질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활자 중독증 환자다.

  활자에 중독되었든 지도에 중독되었든 현실을 견디는 비법을 누구나 한가지 쯤 지니고 있다. 현실 밖에서 곰을 만나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할 확률만큼이나 낮다. 그 확률에 기대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상황의 우연성이 상징하는 현실의 우발성은 아닐까. 반복적이고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밖의 것들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만큼 잡히지 않는 투명한 막들에 둘러쌓인 상상계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랬을 것이다.
 
  현실계를 벗어나 상상 속의 먼 우주를 유영하는 유리 가가린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우주 밖에 떠도는 우리들의 꿈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현실 속의 암흑을 떠도는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나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삶은 그런 식으로 비루하게 이어지는 거고, 우리는 아버지들의 위선 속에 세상을 배우는 거잖아.(108페이지)’라고 툭 던지는 한 마디 속에 유리 가가린의 꿈은 좌절하고 만다. 그 두려움과 상상할 수 없는 영원 속으로 떠나고 싶게 하는 것은 신형철의 해설처럼 은희경의 소설이 아름답고, 낯설고, 허망하기 때문이다.


070415-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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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김원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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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노피온 왕이 오리온을 장님으로 만들자, 복수하러 나선 오리온 같네.” 안나가 커피를 홀짝거렸다.
  “장님이 된 처지에 왕을 복수한다고? 내가 그렇게 보여?”
  “전갈자리 신화예요. 신탁을 받은 오리온이 시력을 회복해선 복수하러 나섰다가 여신 아르테미스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죠. 아르테미스의 오빠가 아폴론인데, 누이가 미남 오리온을 사랑하게 될까바 전갈을 보내 누이를 지키게 했는데, 오리온이 전갈 독침에 죽었죠.”

  김원일의 장편소설 <전갈>의 제목과 관련된 신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강재필와 안나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깊다. 한 인간의 숙명은 어쩌면 신화의 시대부터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디선가 느꼈거나 보았던 익숙한 기시감은 운명처럼 발목을 감싸고 목을 조여오기도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그닥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떤 운명을 타고 태어나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은 삶에 대한 각기 다른 방식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보통 인생을 ‘만남’이라는 주제로 읽어내면 그렇다는 얘기다.

  한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복권 추첨과 같다. 1차적으로 인종과 국가,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현실적인 인간이 과거 속의 인간을 대신 살아내는 과정은 설명하기 힘들다. 조부와 부모의 삶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속에 분명하게 살아 숨쉰다.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이어지는 진행형의 과거이다. 나는 부모의 미래형이며, 부모는 나의 과거형이다.

  밀양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가 만주 731부대 위병초소 근무를 했던 조부와 도시 빈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부친의 삶은 주인공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 주인공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조부의 행적을 쫓는 일은 다분이 작위적이다. 감옥에서 독학으로 대입 검정 고시를 마쳤다고 하지만 출소해서 조부의 행적을 쫓는다는 설정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담담하게 쫓아가면서 이 땅에 태어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격앙된 목소리도 아니고 냉소적인 비판도 아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조금씩 현재와 과거를 이어나가는 목소리가 진지하고 차분하게 들린다.

  김원일의 관심과 소설적 이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편소설 <전갈>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독의 근원을 묻고 있는 작품이다. 어떻게 만들어진, 누구를 향한 독인가에 대해 묻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역사와 사회를 조망하고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하는 소설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스토리가 주는 흥미와 사건 전개의 재미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삶의 뿌리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결코 가볍거나 만만치 않은 주제를 3대의 삶을 교차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과 함께 대가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의 소설이 보여주는 경쾌함과 발랄함 속에서 김원일류의 소설들이 지니는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묵직하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나 느끼는 긴 여운은 또 다른 재미를 확인하게 된다. 소설은 결국 우리들 삶의 모습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외면하고 고개 돌려도 우리들의 모습의 과거이며 현재이며 미래이다. 그런 면에서 <전갈>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끝나지 않은 역사의 단면이다.

  항상 밝고 행복한 일로 가득한 인생이 없겠지만 철저하게 망가지고 비참한 인생도 찾기 힘들다. 소설은 보통 후자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낸다. 주류와 보통 사람들 너머에 있는 사람들, 정상분포곡선의 좌우측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대 정신은 당대의 관심과 문화, 철학적인 배경이나 가치관을 반영하지만 소설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구석구석을 뒤집고 다니며 먼지를 털고 젖은 이불을 널어 말리듯 모두에게 햇빛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독자가 소설에서 건져 올려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장편이었다.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한 소설가들의 다양한 소설들은 타인의 삶에 대한 애정과 통찰을 키워준다. 어디 내 인생만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나의 고통만을 이야기할 수 있으랴.


07041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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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시선 273
최종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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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따먹고 나면 비로소 너는
의미를 떠나 상징을 벗어버리고
하나의 실재가 된다,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가 된다.                                                         - ‘따먹다’중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포장하고 꾸며대지만 최종천 시인은 직설적이고 대담하게 언급한다. 도대체 되먹지 않은 사랑 타령은 그만두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따먹고 나야 상징을 벗고 ‘실재’가 된다는 논리는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선하게 만들어 준다. 비실재와 실재는 관념론과 유물론만큼의 간극을 보인다. 특히 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빚어내는 언어의 힘에 기대다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손에 잡히는 대상에 대한 직설법에 인색해지게 마련이다.

  시간의 개념을 무화시키는 어느 봄날의 오후 소나기와 먹구름은 순차적인 선적 순환구조를 무너뜨린다. 공간에 대한 지각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시가 자리잡고 있다는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다. 대낮에 알몸을 드러내듯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언어들의 충돌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가 보여주는 진정성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형성되는 지점에 있다. 언어가 보여주는 투명함과 낯선 이미지의 현란함이 또 다른 시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최종천은 오랜만에 ‘몸’의 시를 읽어준다.

  몸을 통해 노동을 이해하고 삶을 깨닫는 생활은 실재적이다. 여기에 다른 무엇이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다. 그 과정을 인식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나를 확인하는 작업은 고통스럽기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해보인다. 내 손의 주인은 나다. 가엾은 자신의 손만 들여다보아도 자아를 찾게 된다.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 ‘가엾은 내 손’중에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 조작에 전념하고 있다’는 말에 등골이 오싹하다. 평생 실재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은 내 손을 들여다 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게으름과 먹물의 상징이다. 노동의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른다. 가슴보다 머리로 부대끼며 살아온 것은 아닌 지……

상징은 배고프다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한권의 시집이 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징은 늘 배가 고픈가보다. 생존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상징일까? 살기 위해 시집이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순간의 아득함을 상상해 본다. 극단적인 비유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희망을 꺼놓자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무작정 희망을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실.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는 지구에 사는 일은 힘겹다. 희망을 반사해서 빛을 발하는 절망을 없애기 위해 희망을 꺼두자는 빈약한 논리에도 공감할 수 없다. 희망도 절망도 동의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가려움.

희망을 꺼놓자

인간이 희망을 켜놓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므로
희망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은 인간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으로는
식물을 재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꺼버리면 어떨까요?
절망은 희망의 위성 같은 것으로서
희망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기에
희망을 꺼두면 절망도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가 사막화하고 있는 것은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기 때문입니다


070328-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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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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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하고 나른한 일상이 끝없이 펼쳐질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평화로운 수면 아래 오리의 발짓만큼 숨가쁘고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정확하게 그만큼 일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움직이며 마치 수면위에 그림처럼 떠다니는 청둥오리의 우아함은 부럽지 않다. 처량하고 슬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나도 너도 다들 그렇게 그만큼씩만 바쁘게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바닥에 땀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권여선의 새로운 소설집 <분홍리본의 시절>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켜켜이 쌓여온 먼지들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다. 일상의 균열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면서 느꼈던 위기의 순간들은 사실 나의 위기일 뿐이었다.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나에게 비롯되었다는 낭패감.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내면은 불투명하고 쇳소리가 난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주인공들이 모두 삐걱이는 일상과의 불화를 나타낸다.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의 삶이 특별히 불행하거나 환경이 특수하다고 볼 수 없다. 넓은 의미에서 평범한 불행과 일상들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주인공이 화를 낼까? 아프다고 지르는 비명 소리를 외면하는 것도 나쁜 독자의 요건이라면 나는 나쁜 독자다.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 애정을 보이지 못하고 측은지심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 무언가 문제가 있는 내면의 풍경이다. 그것이 나의 내면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노력한다고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소리내지 않고 슬쩍슬쩍 엿볼 수 있도록 곁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타인의 불행과 슬픔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전달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보여지는 고통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표적으로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과 ‘약콩이 끓는 시절’의 여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못한다.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결정적 단서도 없고, 그것을 무시한 채 소설 속에 침잠시킬만한 문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내면이 삭막해지면 소설이 읽혀지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는 것인지, 소설이 독자를 끌어안는 방법이 달라져 가는지 모르겠다.

 ‘분홍 시절의 리본’은 윤대녕의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이 연상되어 소설읽기에 방해가 되었다. 윤대녕의 단편 ‘못구멍’에서 보았던 ‘구멍’들의 반대편에서 그 구멍들을 들여다보는 것같은 착각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분홍 리본의 추억은 아스라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단 하나의 이미지나 기억만으로도 타인을 규정해버리는 버릇을 고치는 못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분홍 리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현실 속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환상 혹은 나비.

 나머지 단편들,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에서도 작가는 일관되게 일상과 불협화음을 보이는 주인공들의 내면 풍경을 묘사한다. 그들이 겪는 심각한 현실과의 부조화는 겉으로 보기에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갈등과 고통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 틈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사람들과 생활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지 궁금하다.

 단 한 순간의 실수와 헛발질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다만 허공에 붕 떴다가 착지하는 순간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와 너, 여기와 저기 모두가 무화된다. 소설에서, 혹은 현실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찾으려는 그 무엇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곳에나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양다리를 걸쳐 보아도, 그 경계를 넘어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07031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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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잘쓰시네요...리뷰 잘봤습니다.

sceptic 2007-03-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잖아요...과찬이신거...^^...드팀전님의 리뷰는 예술이죠...전 그렇게 정성들여 꼼꼼히 쓸 수 없어요...^^

프레이야 2007-03-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균열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인상적인 글귀입니다.
책표지 또한 멋지네요^^

sceptic 2007-03-1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내문제고 나부터 시작해서 실마리가 보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얼음장수 2007-03-2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러봅니다.
저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약콩이 끓는 동안'을 읽고 꽤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 작품집 끌리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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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강물처럼 흘러왔다’는 작가의 말이 잔잔한 물결에 작은 파문처럼 일렁인다. 김영현의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아니 어떤 소설이 동물에 대한 탐구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면 할말이 없지만 이 책은 김영현이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비의감을 드러낸다. 종교와 결부되어 왜 태어났니를 물어보면 참 난감하다. 인간의 탄생에는 선택이 없다.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죽음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에 해답을 달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그 대상이 신이어도 아니어도 좋겠지만 문제는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는 데 있다. 신산스런 삶에 때때로 환한 빛이 비춰지거나 제 길을 찾은 듯해도 길은 이내 끊겨버리고 벼랑이 기다리고 있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이후 처음인가 싶어 책날개를 살펴보지만 그간 김영현의 책을 읽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소설은 참으로 낯설고 생경하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해 분류할 수 없다. 다만 특별한 경우와 예외적인 상황들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런 것들이 소설 속에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 현실감을 상실하거나 비현실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식상하고 지루한 일상의 재현에 불과하다. 물론 표현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 방식에 따라 일상에 탄력이 붙고 재미와 웃음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스토리 자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무딘 감각들을 일깨우며 발뒤꿈치를 간지럽게 한다.

 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나. 그런 것들이 소설이 될 수 있나. 더구나 김영현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추리 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나 은유는 죽어 있고 익숙하고 짐작할 만한 표현들은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 문장에 탄력이 떨어져 스토리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정상에 올라 소리 한 번 지를 목적으로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겸허를 배우지 못하는 등산이 즐거울 리 없다. 독자는 소리를 지르기 위해 산 정상에 서지 않는다.

 인간 구원의 문제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고전에서나 사용했던 방법이다. 방법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 독자 개인의 성향이겠으나 즐겁지 않은 책읽기에 누가 나서겠는가? 낯선 사람들은 정말 낯선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구속되는 동연과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있는 동생 성연을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한 소읍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그 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죄의 기준이 있든지 간에. 하지만 이처럼 파렴치한 인간을 정점으로 그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는 방식은 지루하고 감동이 없다.

 탐욕과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분명하며 인간의 삶은 과연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은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종교적 관점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를 소설로 부딪히게 될 때 사람들은 당혹스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박자 늦게, 혹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 문제와 만나게 되길 바란다. 나의 바람일지 모르나 추리 소설 형식으로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무거운 주제에 비해 분량이 부족하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끈끈하지 못해 보인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가 있고, 시대와 상관없이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후자를 다루고 있는 <낯선 사람들>은 읽을만 하지만 권할만하지 못하다. 이상하게 식상한 표현들과 죽어버린 은유가 눈에 거슬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의 내용과 형식 어느 쪽도 소홀이 할 수 없고 분리 될 수 없지만 어딘가에서 어긋나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 조금 넘게 부족한 소설을 만난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더욱 어렵다.


070309-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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