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책장 맨 왼쪽 위부터 항상 ‘문지시인선’을 꽂아 놓는 버릇이 있다. 이사할 때마다 시집들의 위치는 변함없이 가장 윗자리를 내주는 셈이다. 1권 황동규의 <나는 바뀌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며칠 전에 도착한 301권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까지 시집들을 훑어보며 시간의 무게와 변화를 가늠해 본다. 얼마쯤 될까 세어보니 111권이 꽂혀 있으니 세권 중 한권은 사서 읽은 셈이다. 그 뒤에 기대 서있는 창비와 민음사, 세계사의 시집들이 내 청춘의 많은 부분들을 채우고 있다. 내 영혼의 팔할은 시집이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녀와 첫 데이트 약속 장소는 교보문고 시집 코너였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86권)” 그렇게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던 90년에 100권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가 출간되었다.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102권)>을 그녀에게 선물했고, 몇 년후 그녀는 내게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119권)>을 선물했다. 그리고 97년 봄, 책장에는 여러권의 같은 시집들이 나란히 꽂히는 것과 동시에 기념이라도 하듯 200권 <詩야 너 아니냐>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여 300권 <쨍한 사랑 노래>가 나왔다.

  “모든 사건은 밤에, 안개의 살갗처럼 움직인다. 너는 나의 미로다. …… 지금에 와서, 나는 너를 희망이었다고 되새긴다. (첫밤, 채호기, 밤의 공중전화(201) 중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시리즈 300권을 기념하여 출간된 <쨍한 사랑 노래>는 황동규의 시를 표제로 해서 201권 채호기의 시집부터 299권 이성미의 시집까지 한 편씩을 고른 선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100권, 200권 기념도 마찬 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깊다. 순수 참여 논쟁의 복판에서도 묵묵히 우리 현대시의 무게 중심을 흩뜨리지 않으며 시의 본령을 지켜온 것이 ‘문지 시인선’이다. 황동규, 오규원, 정현종, 황지우, 김광규, 기형도, 최승자, 김혜순, 장석남, 황인숙, 김준태, 김영태, 이성복, 나희덕,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인들을 만났고 그 시인들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삽십대 중반이 되었다.

  문학에 처음 눈뜨고 정호승, 이승훈, 김지하, 박노해, 정희성, 김용택, 신경림, 곽재구, 조태일, 양성우, 하종오, 임영조, 김남주, 함민복, 최승호, 김정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내 안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던 시절이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삶의 진정성에 대한 숱한 불면의 밤들을 함께 한 시인들이었다. 문지와 창비는 그렇게 정신의 두 다리처럼 한발 한발 나와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는 동지와 같다. 그렇게 나를 키운 시와 시인들은 ‘사랑’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둘은 모두 학생들에게 그 때 읽었던 시와 시인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집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 손때 묻은 책들이 아이들을 키울 것이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갈 듯 싶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 (뼈아픈 후회,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220) 중에서”가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청춘(224) 중에서)”에 낙서하는 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은 상상력의 종말을 뜻했다 (청춘, 박용하, 영혼의 북쪽(236) 중에서)”고 선언한 시인의 말이 부정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닻을 내린 정신, 그것은 한국이란 말처럼 욕되었다”는 지나칠 수 없는 현실들에 딴지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를 알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이 말에 소금인형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그녀에게서 몸을 빼다 (김윤배, 부론에서 길을 잃다(258)

  군더더기 없이 사랑에 대한 담백한 선언들과 감성의 떨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영원히 지속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열정이 시와 문학의 힘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275) 중에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도록 훈훈함이 세상에 가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로 삶이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시의 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무인도, 박주택, 카프가와 만나는 잠의 노래(287) 중에서”는 말을 깊이 새겨 둔다.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당도해 있다. 짧은 생에 대한 소망과 통찰은 모두 다른 형태로 실제 생활에 투영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환희와 고통, 행복과 절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 켜켜이 먼지 앉은 옛날 시집을 펼쳐보는 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다.


200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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